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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국보 제110호 | |
이제현 초상 李齊賢 肖像 |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용산구 서빙고로 137 (용산동 6가, 국립중앙박물관) |
분류 | 유물 / 일반회화 / 인물화 / 초상화 |
수량/면적 | 1폭 |
지정연도 | 1962년 12월 20일 |
제작시기 | 고려 충숙왕 6년 (1319년) |
<colbgcolor=#bf1400> 국보 제110호 이제현 초상[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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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려 후기 문신이자 학자인 익재 이제현(1287∼1367)의 초상화이다. 고려 시대에 그려진 초상화의 원본은 2점이 현재까지 내려오는데, 이제현의 초상화는 전신을 그린 것으로 보존상태 또한 매우 양호하다. 현재 동일한 양식의 이제현의 초상화 4점이 전해지는데, 그 중 가장 뛰어난 작품이기도 하다.이제현 초상은 1962년 국보 제110호로 지정됐고,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2. 상세
화폭 상단에 적힌 제문(題文)을 통하여 그 제작 시기 및 필자를 알 수 있다. 이에 의하면 이 초상화는 이제현이 33세 때인 1319년(충숙왕 6)에 충선왕을 시종하여 중국의 강호(江湖)를 유람한 일이 있었는데, 당시 충선왕은 당시 중국의 최고 화백인 진감여를 불러 이제현을 그리게 하였다고 한다.화폭 상단을 보면 당시의 원나라 석학인 탕병룡이 찬(贊)을 지었다는 것도 아울러 살필 수 있다. 그러나 이제현은 다시 고려로 돌아올 때에 이 영정을 가지고 오지 못하였다. 그로부터 33년 후 다시 원나라에 건너갔을 때 우연히 그 영정을 다시 보게 되었고, 그 감회를 40자의 시로 읊고 있다. 자찬시(自贊詩)는 『익재집』에도 수록되어 있다.
- 이제현이 남긴 제문
연우 기미, 내 나이 33살이 되던 때에 절강에 충선왕을 따라 갔다. 왕은 고항(古杭) 출신의 초상화 화가인 진감여(陳鑑如)를 불러 나의 얼굴을 그리게 하였으며, 그리고 문장가인 북촌(北村) 탕병룡(湯炳龍)에게는 찬문을 짓도록 하였다. 고국으로 돌아오자 남이 본다고 빌려가 소재지를 모르게 되었다. 21년 후에 나라의 국서를 받들어 원나라 수도 연경에 가게 되어 다시 초상화를 찾았다. 지금의 노년 모습과 초상화를 그릴 장년의 모습이 달랐음에 놀랐으며, 헤어짐과 만남에도 때가 있음을 느꼈다. 한□운(韓□雲)으로 하여금 붓을 잡게 하고, 나는 아래의 시를 지어 감회를 기록한다.
延祐己未, 余年三十三, 從於忠宣王. 降香江浙. 王召古杭陳鑑如, 寫陋容, 而湯北村爲之贊. 北歸爲人借觀, 因失所在. 後二十一年, 奉國表如京師, 復得之. 驚老壯之異貌, 感離合之有時. 使韓□雲把筆口, 題四十字爲識.
延祐己未, 余年三十三, 從於忠宣王. 降香江浙. 王召古杭陳鑑如, 寫陋容, 而湯北村爲之贊. 北歸爲人借觀, 因失所在. 後二十一年, 奉國表如京師, 復得之. 驚老壯之異貌, 感離合之有時. 使韓□雲把筆口, 題四十字爲識.
- 이제현이 남긴 자찬
내가 예전에 나의 모습을 남길 적에는 / 양쪽 귀밑머리는 파란 봄이었다 // 이 초상화가 많은 세월 동안 떠돌아 다니다가 / 우연히 다시 만나니 그림 속에 남은 정신은 여전하다 // 초상화 속의 인물은 다른 인물이 아니고 나이며 / 예전의 내 몸이 바로 후일의 내 몸이라네 // 손자들은 완전히 알아보지 못하고 / 초상화의 인물이 누구냐고 묻네 // 익재
我昔留形影 靑靑兩鬢春 流傳幾歲月 邂逅尙精神 此物非他物 前身定後身 兒孫渾不識 相問是何人 益齋
我昔留形影 靑靑兩鬢春 流傳幾歲月 邂逅尙精神 此物非他物 前身定後身 兒孫渾不識 相問是何人 益齋
- 탕병룡이 남긴 찬문
수레와 문자를 같이 사용하고 / 예악(禮樂)은 동쪽에서 왔다 // 산의 정기로 태어난 그대는 / 사람들의 으뜸이요 / 세상의 영웅이요 / 유학에 달통한 사람이다 // 기상은 공명정대하고 크며 / 모습은 의젓하고 공손하며 / 언사는 신중하고 조용하다 // 여유 있는 모습 / 따뜻하고 부드러운 성격에 / 굳센 마음을 가졌다 // 학문은 꽉 찼고 / 도덕심은 높고 / 문장은 풍부하다 // 마음가짐은 진실 되게 / 행정을 할 때는 공정하게 / 나라를 도와 공을 세웠다 // 명을 받아 나라에 등용 되었으며 / 모든 사람이 우러러 보며 그들의 마음을 화목하게 하나로 묶었으니 / 태평성대가 기다리네 // 연우(延祐) 기미(己未, 1319년) 9월 보름에 북촌노민(北村老) 탕병룡(湯炳龍)이 전당(錢塘)의 보화독역재(保和讀易齋)에서 쓰다. 이때 나이 79세이다.
車書其同 禮樂其同 光岳其鍾 爲人之宗 爲世之雄 爲儒之通 氣正而洪 貌儼而恭 言愼而從 恢恢乎容 溫溫乎融 挺鋌乎中 於學則充 於道則隆 於文則豐 存心而忠 臨政以公 輔國以功 命而登庸 瞻而和衷 徯而時雍 延祐己未鞠月望日, 北村老民湯炳龍, 書于錢塘保和讀易齋. 峕 年七十有九
車書其同 禮樂其同 光岳其鍾 爲人之宗 爲世之雄 爲儒之通 氣正而洪 貌儼而恭 言愼而從 恢恢乎容 溫溫乎融 挺鋌乎中 於學則充 於道則隆 於文則豐 存心而忠 臨政以公 輔國以功 命而登庸 瞻而和衷 徯而時雍 延祐己未鞠月望日, 北村老民湯炳龍, 書于錢塘保和讀易齋. 峕 年七十有九
대부분의 초상화가 오른쪽을 바라보는데 비해 왼쪽을 바라보고 있으며 비단 테를 두른 흰 베로 짠 옷을 걸치고 두 손은 소매 안으로 마주 잡고 있다. 선생의 왼편 뒤쪽에는 몇권의 책이 놓인 탁자가 있고, 오른편 앞쪽으로는 의자의 손잡이가 있어 앉은 모습이 안정되어 보이며, 화면구성도 짜임새 있다. 채색은 색을 칠한 다음 얼굴과 옷의 윤곽을 선으로 다시 그렸는데 부분적으로 표현을 달리 하여 날카롭지 않고 부드러워 보인다. 그림의 색감은 오랜 세월이 지나 변색된 듯하나 차분한 느낌을 준다.
얼굴과 의복을 선으로 표현한 것은 고려시대 다른 초상화들과 비슷하며, 조선시대 초상화가 인물이 오른쪽을 향하고 배경이 되는 바탕에 아무런 그림을 그려 넣지 않은 것에 비해 빈틈없는 구성과 왼쪽을 향하고 있는 모습에서 고려 초상화의 단면을 엿볼 수 있다. 비록 원나라 화가인 진감여가 그린 것이지만, 구도가 안정되고 인물 묘사가 뛰어난 우수한 작품으로 우리나라 미술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3. 외부 링크
4. 국보 제110호
고려 후기 문신이자 학자인 익재 이제현(1287∼1367)의 초상화이다. 이제현은 원나라의 만권당에서 조맹부 등과 교류하며 고려에 신학문과 사상을 소개하고, 성리학을 전파, 발전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호는 익재·역옹으로, 『국사』, 『역옹패설』 등을 남겼다.
가로 93㎝, 세로 177.3㎝로 의자에 앉은 모습을 비단에 채색하여 그렸다. 그림 위쪽에는 원나라 문장가인 탕병룡이 쓴 찬(贊)과 잃어버린 줄 알았던 이 그림을 33년 만에 다시 보고 감회를 적은 익재의 글이 있다. 대부분의 초상화가 오른쪽을 바라보는데 비해 왼쪽을 바라보고 있으며 비단 테를 두른 흰 베로 짠 옷을 걸치고 두 손은 소매 안으로 마주 잡고 있다. 선생의 왼편 뒤쪽에는 몇권의 책이 놓인 탁자가 있고, 오른편 앞쪽으로는 의자의 손잡이가 있어 앉은 모습이 안정되어 보이며, 화면구성도 짜임새 있다. 채색은 색을 칠한 다음 얼굴과 옷의 윤곽을 선으로 다시 그렸는데 부분적으로 표현을 달리 하여 날카롭지 않고 부드러워 보인다. 그림의 색감은 오랜 세월이 지나 변색된 듯하나 차분한 느낌을 준다.
이 그림은 충숙왕 6년(1319) 이제현이 왕과 함께 원나라에 갔을 때 당시 최고의 화가인 진감여가 그린 그림으로, 전해오는 고려시대 초상화가 대부분 다시 그려진 이모본인데 비해 직접 그린 원본으로, 안향의 반신상과 함께 현재 남아 있는 고려시대 초상화의 원본 2점 가운데 하나이다. 이 그림은 전신을 그린 것으로 보존상태가 양호하다. 얼굴과 의복을 선으로 표현한 것은 고려시대 다른 초상화들과 비슷하며, 조선시대 초상화가 인물이 오른쪽을 향하고 배경이 되는 바탕에 아무런 그림을 그려 넣지 않은 것에 비해 빈틈없는 구성과 왼쪽을 향하고 있는 모습에서 고려 초상화의 단면을 엿볼 수 있다. 비록 원나라 화가가 그린 것이지만 구도가 안정되고 인물 묘사가 뛰어난 우수한 작품으로 우리나라 미술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현재 동일한 양식의 익재 이제현의 초상화 4점이 전해지는데 그 중 가장 뛰어난 작품이다.
가로 93㎝, 세로 177.3㎝로 의자에 앉은 모습을 비단에 채색하여 그렸다. 그림 위쪽에는 원나라 문장가인 탕병룡이 쓴 찬(贊)과 잃어버린 줄 알았던 이 그림을 33년 만에 다시 보고 감회를 적은 익재의 글이 있다. 대부분의 초상화가 오른쪽을 바라보는데 비해 왼쪽을 바라보고 있으며 비단 테를 두른 흰 베로 짠 옷을 걸치고 두 손은 소매 안으로 마주 잡고 있다. 선생의 왼편 뒤쪽에는 몇권의 책이 놓인 탁자가 있고, 오른편 앞쪽으로는 의자의 손잡이가 있어 앉은 모습이 안정되어 보이며, 화면구성도 짜임새 있다. 채색은 색을 칠한 다음 얼굴과 옷의 윤곽을 선으로 다시 그렸는데 부분적으로 표현을 달리 하여 날카롭지 않고 부드러워 보인다. 그림의 색감은 오랜 세월이 지나 변색된 듯하나 차분한 느낌을 준다.
이 그림은 충숙왕 6년(1319) 이제현이 왕과 함께 원나라에 갔을 때 당시 최고의 화가인 진감여가 그린 그림으로, 전해오는 고려시대 초상화가 대부분 다시 그려진 이모본인데 비해 직접 그린 원본으로, 안향의 반신상과 함께 현재 남아 있는 고려시대 초상화의 원본 2점 가운데 하나이다. 이 그림은 전신을 그린 것으로 보존상태가 양호하다. 얼굴과 의복을 선으로 표현한 것은 고려시대 다른 초상화들과 비슷하며, 조선시대 초상화가 인물이 오른쪽을 향하고 배경이 되는 바탕에 아무런 그림을 그려 넣지 않은 것에 비해 빈틈없는 구성과 왼쪽을 향하고 있는 모습에서 고려 초상화의 단면을 엿볼 수 있다. 비록 원나라 화가가 그린 것이지만 구도가 안정되고 인물 묘사가 뛰어난 우수한 작품으로 우리나라 미술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현재 동일한 양식의 익재 이제현의 초상화 4점이 전해지는데 그 중 가장 뛰어난 작품이다.
5. 그외 이제현의 초상화들
- 전라남도 장성군 가산서원(佳山書院) 소장본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64호로 지정되어 있다. - 충청북도 청주시 수락영당(水洛影堂) 소장본(이제현 초상)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72호로 지정되어 있다. - 전라남도 강진군 구곡사(龜谷寺) 소장본(강진 구곡사 소장 익재 이제현상)[2]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89호로 지정되어 있다. - 경상북도 경주시 소재 익재영정[3]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90호로 지정되어 있다.
전술했듯, 국보로 지정되어 있으면서 가장 뛰어난 이제현의 초상화는 국립중앙박물관의 소장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