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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315288> 경주 석굴암 석굴 慶州 石窟庵 石窟 Seokguram Grotto\, Gyeongju | ||
소재지 | <colbgcolor=#fff,#1f2023> 경북 경주시 불국로 873-243, 석굴암 (진현동) | |
분류 |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 불교 / 불전 | |
수량/면적 | 1기 | |
지정일 | 1962년 12월 20일 | |
시대 | 통일신라시대 | |
소유단체 | 석굴암 | |
관리단체 | 불국사 | |
링크 | 공식 홈페이지 |
유네스코 세계유산 | ||
<colbgcolor=#000> 석굴암과 불국사 Seokguram Grotto and Bulguksa Temple Grotte de Seokguram et temple Bulguksa | ||
<colcolor=#fff> 국가·위치 | <colbgcolor=#fff,#1f2023>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경상북도 경주시 | |
등재유형 | 문화유산 | |
지정번호 | 736 | |
등재연도 | 1995년 | |
등재기준 | (ⅰ)[1], (ⅳ)[2]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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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석굴암은 경상북도 경주시 진현동 토함산 중턱에 위치한 암자로, 호국불교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통일신라의 건축물이다. 대한민국의 국보이자[3], 한국을 대표하는 석굴사원으로 그 예술성과 가치를 인정받아 불국사와 함께 1995년 12월 6일 독일 베를린에서 개최된 제19차 세계유산위원회(World Heritage Committee)에서 '석굴암과 불국사'라는 명칭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4]입장료는 2023년 5월 4일부터 무료이며, 관람 시에는 실제 석굴 안으로는 들어갈 수 없으며 유리 차단막이 설치된 통로 밖에서 지나가며 관람하는 것만 가능하다. 예외적으로 부처님오신날에는 차단막 안으로 들어가 옛 신라인들이 했던 것처럼 본존불 주변을 한 바퀴 돌아볼 수 있다.[5] 단 내부에서 사진 촬영은 금지된다.
2. 역사
2.1. 신라 시대
신라 불교 예술의 전성기를 이룬 경덕왕 시기, 시중이던 김대성과 이성룡이 창건해서 774년에 완성하였다고 한다. 당시에는 석불사로 불렸으며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도 석불사로 언급된다.석굴암은 한국 불교의 전래 경로였던 인도[6]와 중국[7] 등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한반도는 한국지리를 공부해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조각 난이도가 높은 돌인 화강암과 청석류가 많고 기후도 달라 저들 나라만큼 석굴사원이 많이, 크게 지어지지는 않지만 이 시기 신라에서는 석굴암, 군위 아미타여래삼존 석굴, 경주 골굴암 마애여래좌상, 양산 미타암 석조아미타여래입상, 경주 남산 칠불암 마애불상군 등 한국사에서 손꼽히게 석굴사원이 많이 지어졌다. 그 중에서도 석굴암은 가장 정교하게 제작된 곳이다.
2.2. 신라 멸망 이후
고려 건국 이후 중심지에서 멀어진 석굴암은 그 존재감이 약해져 일부 기행문에서만 간간히 언급된다. 다만 17세기~18세기 정시한의 산중일기, 정선의 교남명승첩 등의 기록에 따르면 이 때까지는 어느 정도 석굴암이 관리되었고 특히 산중일기에는 전주에서 불국사와 석굴암을 보러 오는 사람이 언급되므로 전국적으로 알려졌고 참배객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시대 숙종 29년(1703), 영조 34년(1758)에 보수했다는 기록이 있고 조선 말기 울산병사 조예상(趙禮相)이 크게 중수했다고 한다.조선시대를 거치며 경주도 평범한 지방도시로 위상이 떨어지고[8] 불교도 숭유억불 정책으로 차츰 세가 줄어드는 와중에 불국사 마저 폐사되자 석굴암도 해발고도 565미터 산중턱에 있다는 점까지 겹쳐 차츰 잊혀지고 방치되었다. 특히 조선 말기에는 전국적으로 의병 활동이 활발해 깊은 산 속의 치안이 불안해져 스님들이 산 아래로 내려가 비어 있는 절이 많았다고 한다. 1902년 8월 세키노 타다시, 1906년 이마니시 류 등 당대의 일제 유수의 사학자들이 불국사를 보러 와서 사진도 찍고 조사했지만 석굴암은 방문하지 않았다. 그들이 이 뒤로 얼마나 한국 유적지 이곳저곳을 활발하게 조사했는지를 생각해 볼 때 불국사를 가놓고도 석굴암에는 방문하지 않은 것은 그 존재를 몰랐다는 증거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2.3. 일제강점기
조선 후기 문인들의 기록들이 석굴암에 대해 언급하고 있고, 1891년 풍양 조씨 가문에 의해서 석굴암이 중수되었다는 '토함산 석굴중수 상동문' 등, 석굴암이 완전히 잊힌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1891년의 기록을 마지막으로 방치되었고, 토함산의 동산령을 넘어 동해안 지대로 배달을 가던 우체부가 범곡 근처에서 능 같은 것을 발견해 보고하면서 1907년 재발견되었다. 당시 초기 조사에서 석굴 내부는 이미 "본존불의 코가 깨졌고 연화대 또한 심하게 갈라져 파손되었으며, 천장의 3분의 1이 이미 추락하여 구멍이 생겨 그 구멍에서 흙이 들어오고 있어 그대로 방치할 경우 모든 불상이 파손될 위험이 있다."고 기록되었을 정도로 보존 상태가 극히 불량 하였다.그래서 1910년 조선통감부는 처음엔 산간 벽지에 있는 석굴암을 해체한 뒤 경성부로 옮길 계획을 세웠지만 막상 해체를 시작해보니 돌들의 무게가 워낙 무거워서 이전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해서 이전을 포기하고, 1913~1915년, 1917년, 1920년~1923년까지 세 차례에 걸쳐서 전면적으로 수리를 했다. 100여년 전 흑백사진에 담긴 《석굴암》 모습
복원 직전인 1912년 답사에서 촬영된 석굴암의 사진. 근대에 석굴암이 촬영된 첫 사진들이다. |
당시 조선 총독이었던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이곳을 시찰한 뒤 석굴암을 보수하기로 결정하면서 대규모 유적 복원 사업이 시작되었다.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에서는 다른 지역의 역사적인 유적을 발굴하고 이를 복원하는 것이 국가 위신을 홍보하는 사업으로 크게 유행했으며, 이러한 시류를 따라 일본 역시 자국의 식민지로 새로이 편입한 한반도의 여러가지 문화재를 지정하고 조사하였다. 이 당시 조선총독부가 해마다 발간한 문화재 관련 보고서와 연차 사업으로 간행된 조선고적도보에서도 병합한 뒤 곧바로 대대적으로 문화재를 조사했던 정황이 드러난다.[9]
복원을 위해 해체된 석굴암의 모습. | 복원된 1920년대의 석굴암. |
1913년 10월부터 감개돌을 고정하기 위한 공사를 시작으로 석굴 천장 부분에 목제 가구(假構)를 설치하였고, 1914년 8월 말 돔형 지붕을 분리하여 완전 해체한 뒤, 1915년 5월 석굴을 재조립하는 등 1915년 9월까지 석굴을 완전히 해체하고 복원하였다.
그러나 거액을 들여 준비한 복원 사업은 예상외로 잘 풀리지 않았다. 수리 과정에서 불상을 습기로부터 보호하고 석병을 보강하기 위해 콘크리트를 타설했는데 이는 나름 당대 최신 건축재료인 콘크리트를 사용해[10] 최신 건축 기법을 활용한 첨단 수리 방법이었다. 문제는 콘크리트가 방수에는 탁월해도 방습에는 취약하다는 것이었는데, 당대에는 콘크리트의 물성에 대해 지금처럼 정밀하게 파악되지 않았기 때문에 간과되었다.
시멘트에서 나오는 탄산가스(CO2)와 칼슘(Ca)이 화강암 벽을 손상시킴을 몰랐던 것도 문제였다. 21세기에는 시멘트의 단점을 잘 알기 때문에 시멘트로 미술관이나 박물관을 건설한다면 적어도 건물이 준공된 뒤 2, 3년 동안은 내부에 작품을 전시하지 않는다. # 하지만 당대에는 대부분은 이걸 몰랐다. 또한 공사를 주도한 것이 석공 전문가가 아니라 철도를 놓던 터널 공사 전문가였던 것도 문제였다. 당연히 석굴암에 의도된 설계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고, 이들이 방습을 위해 도입한 조치가 오히려 더 많은 문제를 일으켰다.
또 석굴암은 지하수 샘물이 솟아나는 암반 위에 있는데, 이것은 석굴 내부의 냉각 기능을 하는 아주 중요한 지형이었다. 수분은 0.1도 차이만 있어도 차가운 쪽에서 물 분자 이동이 저하되어 결로 현상이 일어나므로, 샘물로 석굴암 바닥을 냉각해 일부러 바닥에 결로를 일으켜 습기를 배출하게 한 것이다. 일제의 건축공들은 이 샘물을 습기의 원인으로 오인해서 아연관을 설치해 배수 해버렸다. 그러자 바닥의 온도가 높아져 정교한 조각이 있는 석굴 벽면 표면에 결로가 생기기 시작했다. 덕분에 공사가 끝나자마자 엄청난 결로와 이끼가 출몰했다. 습기에 노출된 시멘트 콘크리트에서 탄산염과 칼슘염이 누출되어 화강암을 부식시키기 시작한것은 덤이다.
1917년 누수 현상과 습기 등으로 바닥과 천장 위로 물이 스며드는 문제가 나타나자 1920년부터 1923년까지 천장의 방수를 위해 아스팔트를 바르고 석실 지하 아연 배수로의 방향을 바꾸는 보수 공사를 실시했으나,[11] 그럼에도 불구하고 습기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1927년에는 푸른 이끼를 없애기 위해 증기 세척을 했다. 당시 보수 공사 비용은 당시 돈으로 2만 2726원. 지금 가치로 대략 38억 원 정도 된다. 이끼가 또 생겨 1934년에도 증기 세척을 했는데 문제는 이 과정에서 거친 처리로 본존불을 비롯한 조각들이 많이 마모됐다.
무엇보다 당시 일본 실무진들은 대형 고대 석조 문화재 지식이 거의 전무했다. 특히 이들은 당시 현지의 석공 장인들에게 조언[12]을 구하거나 이들을 공사에 참여시키지도 않았다. 게다가 현장의 조선인은 잡역 인부를 빼고는 모두 일본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또한 조선에서도 방치된 석굴암의 '제대로 된 사진'이나 '기록'은 당연히 없었다. 복원 이전에 남긴 사진이나 자료들은 대체로 일본인이 남긴 것인데, 복원공사를 하며 어떻게 해체했는지 기록하지 않았기에 사진조차도 제대로 남은 게 없다.
복원 공사를 한 뒤로도 다 조립하지 못하고 방치된 석굴암 석재들.[13] |
만약 해체 보수를 매뉴얼대로 제대로 했다면 이 석재들은 다시 제대로 조립되었든지, 아니면 적어도 어느 지점에 있던 몇 번 석재 같은 메모라도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일제는 그런 조치를 취하지 않은 채 제대로 조사기록을 남기지도 않고 주먹구구로 해체공사를 추진했다.
결국 일제의 야심찬 복원 계획은 거액만 쓰고 망했다고 한다.
강희정 서강대 교수는 이 복원이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비판하고 있으며, 이전에는 없었던 것인 양 발견됐다고 선전한 점, 과거 유물에 대해 찬탄하면서도 조선의 현실이 '쇠락한 문명'이라 강조되었던 점 등을 들어 석굴암이 일제에 의해 변모된 조선 근대의 표상, 제국주의의 성공적 지배의 상징으로 전락했다고 주장했다.#
2.4. 해방 이후
이 두 구조를 놓고 역사학계에선 갑론을박이 심하다.[14][15]
그 뒤에 장면 내각과 박정희 정부 때 재보수를 하여 그 위에 돔형으로 콘크리트를 다시(!) 타설 했다. 당시 유네스코에서 온 석조문화재 전문가까지 초빙해서 추진한 공사였으나 그 문화재 전문가는 결정이 난 뒤에야 국내 전문가의 의견을 듣고 뒤늦게 "이건 안되겠다. 하면 안 된다."며 박정희 대통령에게 복구공사 전면 취소 및 재설계로 입장을 바꿨다. 하지만 박정희 대통령은 그 조언을 무시하고 공사를 강행[16], 그 결과는 더 미칠듯한 내부 습기로 금세 나타났다. 이중 콘크리트 돔 사이에 들어있는 더운 공기가 쉽게 빠져나가지 못해서 여름이 되면 굴 내부의 상대온도와 상대습도가 급격히 낮아져 석굴 벽면에서 물이 흘러넘치는 수준이 되었다. 게다가 이 습기로 인해 내부에 이끼가 더 끼자 이를 제거한답시고 고압 증기를 이용한 세척 작업을 했다. 그 과정에서 훼손이 더 생긴 것은 당연한 일.
결국 서울대 기계공학과 김효경 교수가 투입되어 석굴암 내부를 완전히 밀폐하고 그 안에 에어컨을 계속 가동함으로써 습기를 제거하는 방법을 썼다.[17] 이로서 일단 에어컨이 돌아가는 동안은 문제없는 상태가 되었고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물론 에어컨의 미세한 소음과 진동이 수십, 수백년 계속되면 미세하게 훼손이 된다는 우려는 계속되고 있다.
그리고 이 밀폐와 에어컨 처리로 인해 석굴암은 본래 의미를 완전히 잃어버린 완전통제구역이 되어버렸다. 본래 설계도만 봐도 참배객이 직접 석굴 안으로 들어와서 석굴암 본존불 주위의 10대 제자상과 11면 관음상으로 둘러진 방을 한 바퀴 돌면서 참배하는 구조임을 생각해 본다면 이렇게 입구를 틀어막아버리고 밀폐하는 건 원래 의미를 거의 잃어버리는 뼈 아픈 결정. 게다가 24시간 365일 내내 돌아가는 에어컨 작동이 잠깐이라도 중지된다면 지금도 바로 다시 습기 문제가 발생할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식 미봉책이었다. 하지만 일단 당장 생기는 습기는 제거해야 했기에 김효경 교수 팀은 완전 통제 및 에어컨 설치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부처님 오신 날 하루 만큼은 신자들을 위해 원래 용도대로 본존불 주변을 한 바퀴 도는 방식의 참배가 허용되는데, 이것도 문 열어놓고 에어컨 트는 격이라 자주 그러기는 어렵다.
3. 습기 문제에 대한 견해
-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 의하면 이런 결로 현상을 해결해 주었던 것은 석굴암 밑을 흐르는 냇물이었다고 한다. 때문에 석굴암의 상황을 해결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콘크리트를 완전히 없애고 냇물이 흐르던 처음 그대로 놔두는 것이라고 한다.
- 좀 더 자세히 설명한 프랑스 뻬르삐냥 과학국가박사 이종호의 글에 따르면, 서울대학교 명예교수인 이태녕 박사는 석굴암은 본래 지하에서 용출되는 물이 굴의 바닥에 있는 암석 기초층을 관통하여 흐르도록 만들어져 있었는데, 일제강점기의 보수 공사 때 이 지하수를 다른 곳으로 방출되도록 구조를 변경한 것도 석굴암 훼손에 한몫 했다고 지적했다. 이 교수의 주장에 따르면 원래 석굴암은 샘물이 용출하며 굴 안의 온도를 조절해서 벽면에 결로 현상이 생김을 막았는데, 근현대에 구조를 바꾸었기 때문에 습기 문제가 생겼다. 일제가 1910년대 처음으로 석굴을 보수하기 이전에 했던 기초조사의 평면도를 보면, 원형 주실의 뒤쪽과 2시 방향의 바로 옆면에 샘이 있었다. 이 샘은 10초에 1리터 정도 물이 솟아나와 일년 내내 쏟아져 나왔다. 결로 현상이 집중적으로 일어나는 여름, 차가운 샘물이 석굴 밑의 석재 아래로 흐르면 '바닥면의 온도가 낮아진다. 벽면이나 석불의 외면에 비해 바닥 면의 온도가 낮으면 이슬은 바닥 면에서만 생긴다. 이러한 원리를 석굴암을 만든 신라의 석공들이 터득했기 때문에 일년 내내 샘물이 콸콸 쏟아지는 샘물 바로 옆에 석굴을 짓고 그 밑바닥으로 샘물을 흘러보냈던 것이다. 이 교수에 따르면 석굴암에서 습기가 생기는 가장 근본적인 요인은 일제가 석굴암을 석굴 내부가 숨을 쉬지 못하는 밀폐 구조로 복원한 뒤 박정희 시기에 재복원했을 때도 이 문제를 확실하게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원형대로라면 완전히 개방된 구조이기 때문에 대기의 온도가 상승하면 바깥의 공기가 들어오면서 내부의 표면온도도 함께 높아지므로 결로가 생기지 않는데, 광창과 창구를 모두 막고 전면을 목조 암자로 만들었기 때문에 상황을 악화시켰다.
- 물이 흐르는 습한 땅 위에 시설물을 세운 사례로 원성왕릉도 있으며, 여기서도 바닥의 습기에서 관을 보호하기 위해 관을 거는 장치를 만들거나 물을 흘려보내는 인공수로 장치를 만들어놨다. 그뿐 아니라 감은사는 아예 법당 밑에 바닷물이 드나들도록 지었다. 이런 사례들을 보면 신라인들은 습한 땅에 뭔가를 만들 때는 어떤 조치를 해야 하는지 잘 알았던 듯하다.
4. 예술적 측면
석굴암의 배치는 법화경의 첫머리에 나오는, 석가모니가 가장 많이 설법한 인도 영취산의 풍경을 재현한 것이다. 석가모니 본존불이 가운데 있고 주변을 십대제자와 과거불들, 팔부신중 등이 둘러싸고 있다.석굴암의 가운데에 앉아 있는 본존불은 한국 불교미술사의 석불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이때를 기점으로 이후의 석불들은 조형적인 완성도에서 오히려 점차 쇠퇴한다고 평가받는다.[18]
통일신라는 성덕왕 때부터 전제왕권이 수립되고 효성왕~경덕왕 초기에 이르는 시기까지 신라의 전제 왕권이 극성기를 맞던 때였으며 화엄종과 같은 종파 불교가 전제왕권의 이념적 기반이 되어주었다. 그리고 이때의 경주는 국제도시로 변모하고 당, 서역, 발해, 일본, 인도, 페르시아 문화가 직접적으로 수입될 수 있었다. 이 시기의 예술적 특징은 당나라 성당(盛唐) 시대의 사실주의 양식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사실주의를 토대로 신라화된 모습을 보여줘서 '이상적 사실주의'에 기반한 예술품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즉, 사실적으로 묘사하되 조형적으로 완벽한 불상을 만들었다. 중국에 영향을 주었던 인도 간다라 미술의 영향도 고려된다.
석굴암 본존불은 이상적 사실주의에 바탕한 육감적인 관능성을 보여준다. 쇄골 표현이나 허리와 엉덩이는 완전히 일직선이라거나. 불상의 표정은 자비롭다기보다는 팔공산에 있는 갓바위처럼 왕을 연상케 하듯 무뚝뚝하고 근엄할 뿐만 아니라 덩치가 크고 남성적인 느낌이 철철 흐른다. 그 이유는 위에 서술한 전제 왕권 강화와 맥락을 같이 한다. 왕즉불 사상에 의거해서 실제 경덕왕의 얼굴이 본존불의 모델이라는 설도 있다.[19]
또한 실제 비율보다는 관람자의 시선을 감안해 원근법을 활용했다. 본존불은 실제 인간의 신체 비례와 달리 몸에 비해 얼굴이 큰 편이고, 뒤쪽 지붕에 조각된 광배(후광)도 실제로는 약간 타원형이다. 영남대 김익수 교수는 석굴암을 건설한 김대성의 키가 170 cm일 것이라고 추정했는데, 3m 45cm 규모의 본존불 앞에 서서 올려다볼 때 이 타원형 광배가 원근법상 가장 똑바른 원으로 보이는 지점이 172 cm인 사람의 눈높이인 160 cm라는 것이다. 172에서 신발의 높이 2 cm를 빼서
조각의 기술적인 측면에서도 그 솜씨가 매우 뛰어나다. 보통 석조 조각은 비교적 무른 대리석(모스경도 2~3)을 이용하지만, 석굴암은 암석 중에서 특히 단단한 화강암(모스 경도 6~7정도)을 깎아 만들었으므로, 조각 난이도로서는 단언 최상위라 할 수 있다. 간다라 불상이나 당시 그리스 석상에 비해 투박하지만 조각 난이도가 매우 힘든 화강암을 이 정도로 조각한 게 용하다.
본존불 앞 석실 통로에 새겨진 11면 관음은 중국 보경사 11면 관음과 상당히 유사하다.
석굴암의 주인공은 본존불이라 본존불에만 집중하기 쉽지만 본존불을 둘러싸고 있는 십대제자를 비롯한 여러 부조도 완성도가 높다고 평가받는다. 십대제자는 본존불 옆과 뒤에 있는데 출가한 순서대로, 본존불 오른쪽에 앞부터 1~5대 제자가 서고 왼쪽 앞부터 6~10대 제자가 배치돼 있다. 각자의 특성이 반영돼 있는데, 1대 제자 지혜제일 사리불은 석가모니보다 나이가 많았던만큼 어깨가 굽고 야윈 모습으로 묘사되었고, 9대 제자 라훌라는 석가모니의 친아들인만큼 나머지 9명 제자들의 부조는 전부 본존불을 바로 쳐다보지 않고 고개를 옆으로 돌린 모습인데 라훌라만 아버지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구도로 조각했다고 한다.
그리고 석굴암 안에 들어가지 않으면 밖에서는 보이지 않는, 본존불 맞은편 좌우에는 보현보살, 제석천, 문수보살, 범천이 부조로 조각되어 있다. 석굴암의 범천, 제석천 부조는 한국 불교미술사에서 가장 빠른 시대로 의미가 크다. 그리고 석굴이 가장 좁아지는 통로에는 갑옷을 입은 사천왕이 있고, 관람자가 본존불과 함께 정면으로 마주보는 벽면에는 부처님 법을 지키는 2구의 상의탈의한 근육질의 금강역사가 있다. 둘 중 한 쪽은 입을 '아' 하듯이 벌리고 다른 한쪽은 '훔' 하듯이 입을 다무는데, 벌린 쪽을 '아(哦) 금강역사' 다문 쪽을 '훔(吽) 금강역사'라고 부른다. 하필 '아/훔'이란 소리로 구분하는 것은 아(哦)와 훔(吽)이 산스크리트어에서 첫 번째 소리, 마지막 소리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관람자와 가장 가까운 부분인 전실에는 불교의 호법신 팔부신중이 부조로 조각되어 있다. 다만 왼쪽 맨 앞의 아수라, 왼쪽 3번째 건달바 등 일부 외에는 누가 어떤 팔부신중인지 비정이 정확하진 않은 상태다. 이 팔부신중은 뒤에 서 있는 다른 석굴암 조각보다 솜씨가 조금 떨어지기 때문에 경덕왕 시대에 김대성이 만든 게 아니라 후대에 추가로 조각해 넣은 것이 아닌가 추정하는 학자도 있다.
위에서 언급했던 석불사 밑의 샘물도 주목할 만 한데, 물이 건물의 하단부를 통해 밖으로 빠져나오면서 물보라를 일으켜 석불사가 마치 구름 위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고 한다. 더욱이 햇빛이 비치는 날에는 물보라에 빛이 산란되어 무지개까지 만들어져 더욱 신비로웠다고.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사진으로 감상할 수 있다. (nrich.go.kr, 자료마당-기증자료)
5. 불상 논쟁
석굴암 불상과 관련된 학술적 논쟁이 있다. 첫 번째는 조성연대 문제다. 삼국유사에는 불국사가 751년에 중건되어 774년에 완공되었다고 한다. 시기 문제가 중요한 이유는 신라 불교미술은 중대와 하대의 양식이 서로 차원이 다르기 때문이다. 삼국유사는 불국사의 창건 연대를 기록했을 뿐 석굴암을 언제 만들었는지는 적지 않았다. 심지어 불국사도 751년에 창건을 시작하여 김대성이 774년에 사망하고 나라에서 이어 완공하였다고 서술되어 있다. 이는 774년 이후 완공을 의미하지 774년에 완공이 되었다고 단정지을 수 없다. 거기에 불국사석탑에서 발견된 석탑중수기 일명 묵서지편이 판독되었는데 여기에는 불국사의 창건 시작 연대를 742년으로 기록했다. 삼국유사와는 9년이 차이난다.석굴암을 오랜 시간에 걸쳐 만드느라 내부 조각상들의 양식이 서로 달라졌다. 이 것이 두 번째 문제이다. 본존불을 1양식, 그 주변을 둘러싼 10대제자상을 2양식, 사천왕이나 인왕상, 팔부중상을 3양식으로 명명해보자. 1양식과 3양식의 조형적 미감은 확연하게 차이가 난다. 본존불이 최정점이라면 팔부중은 그에 비해서 세밀함이 덜하고 양감이 부족하다.
세 번째 문제는 본존불의 명호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명호 문제가 중요한 것은 이 불상의 명호에 따라 주변에 배치된 조각상들의 명호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본존불이 오른손은 땅을 가리키고 왼손은 무릎 위에 올려 바닥을 보이게 하는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취했는데, 항마촉지인은 본래 석가불만 취하는 수인(手印)이다. 그래서 일본인 학자들은 오랫동안 석굴암 본존불상을 석가여래라고 판단했지만, 석가불이 아니라 아미타불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왜냐하면 신라 불상은 항마촉지인을 했는데도 아미타불인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의 본존불 역시 항마촉지인을 했는데도 석가불이 아닌 아미타불이다. 또한 창건자 김대성 관련 설화 또한 아미타불일 가능성에 힘을 실어준다. 김대성 설화에선 김대성이 전생의 부모를 위해 석굴암을 지었다고 하는데, 전생의 부모가 극락왕생하길 바랐다면 아미타불을 조성함이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신라에서 항마촉지인을 한 아미타불이 나온 이유는 당시 신라의 특수한 상황 때문이었다. 삼국시대에는 미륵이 어느 나라에 강림하느냐에 관심을 쏟느라 미륵 신앙이 유행했다. 통일신라 때는 전쟁 때 희생된 전몰자들의 명복을 비는 차원에서 정토 사상에 기반한 아미타 신앙이 유행했다. 당시 제작된 불상은 우견편단(右肩偏袒)[21]에 항마촉지인을 하였다.
하지만 학계에서 석가여래라고 주장함은 본존불 주변에 있는 10대제자상 때문이다. 10대제자는 석가모니의 제자이므로 석가불상에만 함께 배치한다. 석가모니의 제자들을 아미타불상 주변에 배치한다면 굉장히 이상하다. 또한 본존불 앞 석실 통로에는 십일면관음의 부조가 있는데, 관세음보살은 석가불을 호위하는 보살이다.[22] 어쨌든 이런 이유로 학계에서 석가여래를 주장하는 사람은 9, 아미타불을 주장하는 사람은 1 정도로 석가여래라는 것이 중론이다.
6. 국보 제24호
석굴암은 신라 경덕왕 10년(751)에 당시 대상이었던 김대성이 창건을 시작하여 혜공왕 10년(774)에 완성하였으며, 건립 당시에는 석불사라고 불렀다. 경덕왕은 신라 중기의 임금으로 그의 재위기간(742∼765) 동안 신라의 불교예술이 전성기를 이루게 되는데, 석굴암 외에도 불국사, 다보탑, 삼층석탑, 황룡사종 등 많은 문화재들이 이때 만들어졌다.
토함산 중턱에 백색의 화강암을 이용하여 인위적으로 석굴을 만들고, 내부공간에 본존불인 석가여래불상을 중심으로 그 주위 벽면에 보살상 및 제자상과 역사상, 천왕상 등 총 40구의 불상을 조각했으나 지금은 38구만이 남아있다.
석굴암 석굴의 구조는 입구인 직사각형의 전실(前室)과 원형의 주실(主室)이 복도 역할을 하는 통로로 연결되어 있으며, 360여 개의 넓적한 돌로 원형 주실의 천장을 교묘하게 구축한 건축 기법은 세계에 유례가 없는 뛰어난 기술이다.
석굴암 석굴의 입구에 해당하는 전실에는 좌우로 4구(軀)씩 팔부신장상을 두고 있고, 통로 좌우 입구에는 금강역사상을 조각하였으며, 좁은 통로에는 좌우로 2구씩 동서남북 사방을 수호하는 사천왕상을 조각하였다. 원형의 주실 입구에는 좌우로 8각의 돌기둥을 세우고, 주실 안에는 본존불이 중심에서 약간 뒤쪽에 안치되어 있다. 주실의 벽면에는 입구에서부터 천부상 2구, 보살상 2구, 나한상 10구가 채워지고, 본존불 뒷면 둥근 벽에는 석굴 안에서 가장 정교하게 조각된 십일면관음보살상이 서 있다.
원숙한 조각 기법과 사실적인 표현으로 완벽하게 형상화된 본존불, 얼굴과 온몸이 화려하게 조각된 십일면관음보살상, 용맹스런 인왕상, 위엄있는 모습의 사천왕상, 유연하고 우아한 모습의 각종 보살상, 저마다 개성있는 표현을 하고 있는 나한상 등 이곳에 만들어진 모든 조각품들은 동아시아 불교조각에서 최고의 걸작품으로 손색이 없다. 특히 주실 안에 모시고 있는 본존불의 고요한 모습은 석굴 전체에서 풍기는 은밀한 분위기 속에서 신비로움의 깊이를 더해주고 있다. 지극히 자연스러운 모습의 본존불은 내면에 깊고 숭고한 마음을 간직한 가장 이상적인 모습으로 모든 중생들에게 자비로움이 저절로 전해질 듯 하다.
석굴암 석굴은 신라 불교예술의 전성기에 이룩된 최고 걸작으로 건축, 수리, 기하학, 종교, 예술 등이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어 더욱 돋보인다. 석굴암 석굴은 국보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으며, 석굴암은 1995년 12월 불국사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공동 등재되었다.
한편, 현재 석굴암은 내부 전면 공개 관람 시 항온항습 등의 문제가 우려되어 1976년부터 유리벽을 통한 외부관람을 실시하고 있다.
토함산 중턱에 백색의 화강암을 이용하여 인위적으로 석굴을 만들고, 내부공간에 본존불인 석가여래불상을 중심으로 그 주위 벽면에 보살상 및 제자상과 역사상, 천왕상 등 총 40구의 불상을 조각했으나 지금은 38구만이 남아있다.
석굴암 석굴의 구조는 입구인 직사각형의 전실(前室)과 원형의 주실(主室)이 복도 역할을 하는 통로로 연결되어 있으며, 360여 개의 넓적한 돌로 원형 주실의 천장을 교묘하게 구축한 건축 기법은 세계에 유례가 없는 뛰어난 기술이다.
석굴암 석굴의 입구에 해당하는 전실에는 좌우로 4구(軀)씩 팔부신장상을 두고 있고, 통로 좌우 입구에는 금강역사상을 조각하였으며, 좁은 통로에는 좌우로 2구씩 동서남북 사방을 수호하는 사천왕상을 조각하였다. 원형의 주실 입구에는 좌우로 8각의 돌기둥을 세우고, 주실 안에는 본존불이 중심에서 약간 뒤쪽에 안치되어 있다. 주실의 벽면에는 입구에서부터 천부상 2구, 보살상 2구, 나한상 10구가 채워지고, 본존불 뒷면 둥근 벽에는 석굴 안에서 가장 정교하게 조각된 십일면관음보살상이 서 있다.
원숙한 조각 기법과 사실적인 표현으로 완벽하게 형상화된 본존불, 얼굴과 온몸이 화려하게 조각된 십일면관음보살상, 용맹스런 인왕상, 위엄있는 모습의 사천왕상, 유연하고 우아한 모습의 각종 보살상, 저마다 개성있는 표현을 하고 있는 나한상 등 이곳에 만들어진 모든 조각품들은 동아시아 불교조각에서 최고의 걸작품으로 손색이 없다. 특히 주실 안에 모시고 있는 본존불의 고요한 모습은 석굴 전체에서 풍기는 은밀한 분위기 속에서 신비로움의 깊이를 더해주고 있다. 지극히 자연스러운 모습의 본존불은 내면에 깊고 숭고한 마음을 간직한 가장 이상적인 모습으로 모든 중생들에게 자비로움이 저절로 전해질 듯 하다.
석굴암 석굴은 신라 불교예술의 전성기에 이룩된 최고 걸작으로 건축, 수리, 기하학, 종교, 예술 등이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어 더욱 돋보인다. 석굴암 석굴은 국보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으며, 석굴암은 1995년 12월 불국사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공동 등재되었다.
한편, 현재 석굴암은 내부 전면 공개 관람 시 항온항습 등의 문제가 우려되어 1976년부터 유리벽을 통한 외부관람을 실시하고 있다.
7. 관광
7.1. 교통
대중교통으로 찾아가려면 터미널이나 경주 시내에서 바로 갈 수 있는 방법은 없고 불국사까지 와서 환승해야 한다. 어차피 경주 와서 석굴암만 달랑 보고 경주를 떠나는 경우는 거의 없고 대부분 불국사를 보는 김에 석굴암도 같이 보게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큰 불편은 없을 것이다. 불국사까지는 터미널이나 경주역, 시내에서 10번, 11번, 700번, 711번을 타면 된다. 경주역에서는 35분 간격으로 운행하는 700번이나 1일 10회 운행하는 711번을 이용하면 된다. 10번과 11번은 같은 노선으로 순환 방향만 다를 뿐이다.불국사에서 석굴암으로 가는 버스는 12번인데 불국사와 석굴암만 왔다갔다하는 석굴암 셔틀버스나 다름없다. 불국사 주차장 맞은편(10, 11번 시내버스 정류장 맞은편)에서 탈 수 있다. (단, 불국사를 관람한 뒤 바로 석굴암으로 가려고 한다면 아래쪽 주차장까지 내려올 필요 없이 매표소 광장 앞길을 건너가면 동리 목월 문학관 넘어가는 바로 앞에도 정류장이 있다.) 불국사에서 매시 40분 출발이다. 석굴암에서 불국사로 돌아오는 버스는 매시 정각 출발. 석굴암 매표소에서 석굴암까지도 제법 걸어 들어가야 된다.
혹은 불국사 부근에 있는 토함산 정상으로 가는 산길을 이용해서 40분 정도 걸어서 올라가는 길이 있다. 남산처럼 올라가는 길에도 문화재가 많거나 하진 않고 평범한 등산로다. 12번 버스를 타고 석굴암을 먼저 본 뒤 불국사를 볼 계획이라면, 이 산길을 통해 내려오는 방법도 있다. 석굴암 매표소 바로 뒤쪽으로 불국사로 내려가는 길이 시작된다. 내려올 때는 당연히 40분보다는 덜 걸린다.
직접 차를 운전해서 온다면 운전을 조심하자. 불국사와 석굴암을 연결하는 불국로와 석굴로가 상당히 구불구불하고 험하다. 그나마 감포 방면은 헤어핀 1번만 조심하면 갈 수 있지만 불국사와 경주 방면은 헤어핀 및 급커브가 굉장히 많다.
7.2. 입장
통로에 '경내 설명 금지'라는 경고문이 붙어있는데, 좁은 석굴 안에 사람 몇명만 말을 하기 시작해도 소리가 울리며 매우 시끄러워지기 때문. 그냥 서서 오래 구경하는 건 제한이 없다.- 관람 시간
평일 오전 9시 ~ 오후 6시 주말 및 공휴일 오전 8시 ~ 오후 6시
- 주차 요금 (후불)
대형차 4,000원 중형차 (1,000cc 이상) 2,000원 소형차 (1,000cc 미만) 1,000원
8. 기타
- 불국사의 배치를 기하학으로 해석했던 요네다 미요지의 석굴암 분석이다. 옹호론도 많지만 서양과 달리 동양에서 기하학을 이용하여 건축물을 배치하였다는 뚜렷한 근거는 없으며, 지나친 서구중심적인 해석이고 실측이 좀 달라서 비판이 많이 있다.
- 서울특별시 성북구 보문동에 위치한 보문사에도 경주 석굴암을 본떠서 만든 석굴암이 있다. 1972년 보문종을 창종하면서 그해 6월에 석굴암을 완공하였다. 보문사 뒷산이 돌산이라는 지형적 특성을 살려 조성하였는데 경주 석굴암을 그대로 본떠서 제작한 것으로 보문사 대중이 이루어낸 대표적인 불사로 평가받고 있다. 1970년 8월에 시작하여 23개월 동안 진행된 이 불사에 연 4만 5천여 명에 이르는 조각가와 석공이 동원되었고, 전라지방의 황등석과 경기석 등 화강석 총 2400톤을 사용하였다. 주불은 원석 15톤으로 제작되었으며, 높이는 3.38 m이다. 전체적인 것은 경주 석굴암을 따랐으나 경주 석굴암은 문이 1개인데 서울 석굴암은 문이 3개이고, 공간상 문제로 팔부신중(八部神衆)은 생략되었다. 창건될 당시에는 현관에 지붕은 덮되 출입구 문짝 없이 열어두었으나 날아드는 새의 오물과 깃털 등이 불상을 오염시키자 결국 입구에 문을 달고 철조망을 설치했다. 종영된 KBS2 프로그램 스펀지에도 나온 바가 있다.#
- 석굴암 주차장에 있는 토함산 망원경 전망대에서는 동해가 보인다. 500원이지만, 5개 중 3개는 고장나서 그냥 돈을 먹는다. 어차피 육안으로도 떠다니는 배까지 충분히 보인다.
- 1년에 딱 한 번, 부처님오신날에는 석굴 내부를 개방한다.
- 김성모 화백의 학습만화 마계대전 문화재의 비밀에서 배경으로 등장한다. 석굴암의 수호신으로 오페라가 등장한다.
- 만 원권 지폐가 처음 나올 당시에는 지금의 세종대왕이 아닌 석굴암 본존불상이 불국사와 함께 인쇄되어 나올 예정이었고, 사진 속의 시제품에 박정희 대통령의 재가를 뜻하는 사인까지 적혀졌다. 하지만 기독교계는 특정 종교에 편향적이라고 반대했고, 불교계도 세속의 상징인 돈에 부처님을 새기면 안된다고 반발했다. 결국 세종대왕 도안으로 변경되어 현재까지 이어진다.
- 머털도사 -백팔요괴편-에 석굴암이 등장한다. 도깨비묘지로도 불린다.
- 석굴암 매표소 옆에서 시작하는 등산로는 석굴암 주차장 자체가 이미 고도가 상당히 높기 때문에 20분 정도만 걸어 올라가면 745 m 토함산 정상에 오를 수 있다. 이 구간은 경사도 완만하고 남산(경주) 같은 돌산도 아닌 걷기 쉬운 흙길이라서 등산이라기보단 좀 걷는다는 느낌으로 오를 수 있고 정상에서 동해 바다를 내려다볼 수 있다.
- 대중들에게 대단히 인지도가 높은 문화재이다 보니 각종 루머가 많다.
- 본존 이마에 박힌 보석(백호)을 일본인들이 빼돌렸다거나 그 보석에 햇빛이 닿으면 반사돼서 일본까지 간다는 뭔가 초현실적인 것이 많다. 영화 원스 어폰 어 타임이 이런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사실 마의태자가 2명이고 1명은 금강산에 나머지 1명은 양평 용문사에 들어가 죽었다. 그것에 그의 시신과 함께 보석이 숨겨져 있다는 것이며, 일본군이 전쟁 말 일본 본토로 가져가려 한다는 이야기가 주 내용이다.
- 돔형 지붕의 뚜껑 돌이 파손되었지만, 일제가 훼손한 것이 아니라 신라시대에 건설하는 과정에서 부서진 것이다. 삼국유사에도 전설에 가깝긴 하지만 기록이 있다. '석불을 조각하고자 하여 큰 돌 하나를 다듬어 감개를 만들다가 돌이 갑자기 세 조각으로 쪼개졌다. 대성이 속이 상해 있다가 깜빡 졸았는데 밤중에 천신이 내려와 다시 만들어 놓고 돌아갔다.'는 내용이다.[23] 실제 일화일 가능성은 매우 낮은데, 오늘날에도 건축가가 건축주 몰래 마음대로 하자보수를 하면 소송이 걸릴 일이다. 당시 김대성의 권력이 상당했음을 생각해보면 석공들은 목숨을 잃었을지도 모른다.
- 다른 속설로 본존불이 바라보는 방향이 문무대왕릉으로 알려진 대왕암 방향이며, 이는 신라의 호국불교 사상을 뜻한다는 주장이 있다. 방향이 얼추 비슷하지만, 정확히 구분하면 동지 때 해가 뜨는 방향에 더 가깝다. 반면 '석굴의 방향이 동짓날 일출 지점'이고 '동해의 아침 햇살을 본존불 백호에 맞추려는 의도로 석굴이 지어졌다.'는 주장은 그 논지가 일본 아마테라스 같은 태양 숭배에 가깝다는 비판도 있다.
- 원래 불상에 채색이 되어있었다는 설이 있으며, 이는 역사스페셜에서도 다룬 적이 있다.
- 2024년 7월 중순 토함산 일대에 2022년 태풍 힌남노 당시 생긴 것으로 추정되는 산사태 피해 현장이 73곳에서 확인됐다. 또한 3군데에 산사태의 일종인 '땅밀림' 현상이 발견됐는데 확인된 진행 면적만 1만 2천㎡에 달한다. 한 번 무너지면 그 위력이 일반 산사태의 100배 수준에 달할 수 있으며 집중호우가 쏟아질 경우 산 전체는 물론 국보 석굴암까지 위험하다. 이미 산사태가 석굴암 근처까지 진행된 상황이며 땅밀림까지 나타나면서 토함산 전체가 위험 구역으로 변했다. 땅밀림 현상까지는 아니더라도 산사태 우려가 높은 40여 곳도 추가 확인됐다. 이런 현상이 나타난 건 토함산 함월산 일대가 땅밀림에 취약한 지질적 구조·여건을 가지고 있는 곳이기 때문이라고. 경주시는 산림청 등 관계 기관과 합동 대책을 마련하기로 하고, 우천 시 도로 폐쇄와 사방댐 추가 설치 등의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고 밝혔다. #1 #2 #3
- 습기와 바람에 따른 문화재 훼손을 막기 위해 내부에는 공기 조화 장치가 상시로 돌아가고 있다.
9. 관련 문서
10. 외부 링크
- 한국어 위키백과: 석굴암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경주 석굴암 석굴
- 한국고중세사사전: 석굴암
- 한국 미의 재발견 - 불교건축: 경주 석굴암
- 한국 미의 재발견 - 불교 조각: 석굴암
- 답사여행의 길잡이 2 - 경주: 석굴암
-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국내 여행 1001: 석굴암
- 대한민국 구석구석: 경주 석굴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 두산백과: 경주 석굴암 석굴
11.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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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간의 창의성으로 빚어진 걸작을 대표할 것[2] 인류 역사에 있어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 사례일 것[3] 처음 지정될 당시 국보 제24호로 지정되었다. 현재는 문화유산에 번호를 매기는 것이 유산의 중요도로 오인될 수 있음을 고려해 따로 번호를 매기지 않고 있다.[4] 당시에 함께 등재된 문화유산으로는 불국사, 합천 해인사 장경판전, 종묘가 있다.[5] 부처님오신날만 되면 석굴암을 구경하기 위해 진입도로부터 줄을 서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6] 인도의 대표적인 석굴사원으로는 아잔타 석굴과 엘로타 석굴 등이 있다. 또한 현재는 탈레반에 의해 파괴된 아프가니스탄의 바미안 석불 역시 인도의 영향으로 축조된 것이다.[7] 중국의 대표적인 석굴사원으로는 위진남북조 때 만들어진 막고굴, 윈강석굴, 룽먼 석굴 등이 있다.[8] 신라시대 수도 →고려시대 3경 중 동경 → 조선시대에는 경상도 지방에서 좀 큰 도시 정도.[9] 상술했듯 석굴암 이전이 불가능했던 것은 물론 # 이미 조선이 일본의 일부가 됐으므로 어디 있든 일본 정부의 재산이니 반출할 필요가 없었다.[10] 당시 일본은 (자신들이 성군으로 치켜세우는) 메이지 덴노의 왕릉인 후시미모모야마능의 봉분을 콘크리트로 만들 정도로, 콘크리트라는 소재를 문명시대의 상징적인 만능소재라고 한없이 좋게 보고 있었다.[11] 이 보수 공사에 든 돈이 1차 공사의 70%가 넘는 1만 6980원이었다고 한다.[12] 당시 현지 석공들이 일본에서 온 기술자들에 비해 뭘 알겠냐는 생각을 하겠지만 첨언하자면 이들은 그곳에 온 기술자들보다 더 오랫동안 돌을 만지며 살아온 숙련된 전문가들이다. 현재의 문화재 관리에도 관련 학자들 사이에 목공, 석공 등 관련 장인들이 끼인 데에는 다 까닭이 있다.[13] 다만 전부 그런 것은 아니고, 신라시대 때 보수공사를 하면서 빼낸 부재도 혼재하고 있다.[14] #[15] https://youtu.be/3U3zYS9FuGI[16] 박정희는 당시 경주를 문화 관광도시로 개발하면서 경주에 있는 수많은 유적들을 속전속결로 발굴하고 개발했는데 석굴암의 경우도 여기에 편승하여 빠르게 복구 공사를 진행하고 있었다.[17] 이 일화가 유명하여 석굴암에 설치된 에어컨이 한국 최초의 에어컨 설비라는 낭설이 있으나, 사실이 아니다. 에어컨 문서 참조.[18] 통일신라 하대와 고려, 조선까지 통틀어. 신라 하대에는 혼란한 정국 탓에 불교 예술이 중흥할 여력이 없었고 고려 때 그나마 불교를 국교로 지정하면서 불교 예술이 조금 부활하였다. 그러나 고려를 무너뜨리고 개창한 조선은 숭유억불을 국시로 삼아 불교를 억압해서 불교가 진흥하지 못했다.[19] 남산 감실부처가 선덕여왕의 실제 얼굴을 모델로 했다거나, 중국 북위 시절에 만든 윈강석굴, 룽먼석굴의 대불은 측천무후의 얼굴이라거나 등등 불상을 조성하던 당시 군주 얼굴을 모델로 했다는 설은 원래 흔하다.[20] 보통 절을 드릴 때는 신발을 벗고 하니까.[21] 불교 승려들이 가사를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어 입는 방식. 가사로 양쪽 어깨를 모두 가리어 입는 것은 통견(通肩)이라 부른다. 지금도 남방불교에서는 승려들이 가사를 상황에 따라 우견편단/통견으로 입는다.[22] 관세음보살 항목을 보면 아미타불의 협시보살이고 11개 얼굴 중 하나는 아미타불이다. 불교미술 연구자인 문명대 동국대 교수는 관세음보살이 석가여래와 아미타여래 둘 다의 협시보살이었지만, 통일신라 시대에는 아미타불의 협시보살이 원칙으로 관례화되었다고 설명했다. # 따라서 11면 관음상이 석가여래를 증거한다는 것은 다른 방식의 설명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23] 유홍준 교수는 자신의 저서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장기간 공사에 지친 석공들이 김대성이 잠든 틈을 타 뚜껑을 끼우고 완공한 것으로 해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