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모습 |
현재 모습 |
1. 개요
한자 : 雙峯寺 / 로마자 : Ssangbongsa
전라남도 화순군 이양면에 위치한 사찰이며, 대한불교 조계종 제21교구 본사 송광사의 말사이다.
신라 경문왕 때 철감선사(澈鑒禪師)가 산수의 수려함을 보고 창건하였다. 철감선사의 법력과 덕망이 널리 퍼지자 왕이 궁중으로 불러 스승으로 삼았다고 하며, 창건주 철감선사의 도호가 쌍봉이었으므로 사찰명을 쌍봉사라 하였다고 한다.
철감선사는 이 절에서 선문 9산의 하나인 사자산문(獅子山門)의 기초를 마련하였고, 이곳에서 그의 뒤를 이어받은 징효(澄曉)가 영월의 흥녕사(興寧寺)에서 사자산문을 개산하게 되었다.
창건 이후 퇴락한 절을 1081년(문종 35년)에 혜소국사(慧昭國師)가 창건 당시의 모습대로 중건하였고, 공민왕 때 전라도 관찰사 김방(金倣)의 시주로 중창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절의 땅을 면세해 주었으며,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뒤 1628년(인조 6년)에 중건하였고, 1667년(현종 8년)과 1724년(경종 4년)에 중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2014년에는 쌍봉사 일원이 전라남도 기념물 제247호로 지정되기도 했다.
특이점으로 고려 무신정권 시기에 최충헌(1149년~1219년)에서 시작된 최씨 정권의 제3대 집정자인 최항(?~1257년)이 젊은 시절 '만전(萬全)'이라는 이름으로 쌍봉사에서 주지를 지낸 적이 있었다. 고려사 열전에 전하는 바로는 무뢰배 승려들을 모아다가 문도로 삼고 오직 재물을 늘리는 것만 일삼으니, 금과 비단을 엄청나게 모았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만전은 환속 후에 이름을 최항으로 고치고 최씨 정권을 이어 받는다.
교통편으로는 화순교통 218-1번(덕흥동발 쌍봉사행)이 다니고 있으며, 하루 7번 왕복이다. 만약 쌍봉사에서 출발하는 막차를 놓쳐도 상심하지는 말자, 아직 증리발 덕흥동행 218-1번의 막차가 오후 7시20분(증리 기준)이기 때문에 7시20분 되기 전에 쌍봉사에서 출발하면 문제는 없다. 다만, 타는 정류장이 쌍봉사에서 거리가 꽤 되기 때문에 주의를 요한다. 이양면 옥리와 거리도 가깝고 바로 갈수 있는 길도 있긴 하나. 쌍봉사에서 옥리가는 버스편이 없어 버스타고 쌍봉사에서 옥리를 가려면 굳이 쌍봉사 종점, 혹은 쌍봉사 입구 정류장에서 이양행 버스를 타서 이양에서 내린 후 옥리행 차량으로 갈아타서 가야하는 방법이 있다.
쌍봉사입구 정류장의 위치, 쌍봉사에서 거리가 꽤 된다.
2. 대웅전
일제강점기 대웅전 |
1984년 소실 이전의 쌍봉사 3층목탑[1] |
소실 전 대웅전 내부 |
복원 이후의 모습 [2] |
단면도 |
총 높이 12m의 정방형 3층 건물인 이 대웅전은 상륜부[3]를 제외하고는 우리 나라에서 3층목탑의 모습을 전하고 있는 몇 안되는 목탑이었으나, 1984년 4월 3일 촛불로 인한 실화로 소진되었다. 다행히 이전에 남겨둔 단면도가 있었기에 무사히 복원을 했다. 다만, 문화재로서의 가치가 상실되었다고 판단되어 보물 지정이 해제되었다.
대웅전은 1962년 해체공사 때 3층 중도리에서 1690년(숙종 16)의 두번째 중건에 이어 1724년에 세번째 중건된 사실이 기록되어 있는 상량문이 나왔다. 그리고 최근까지 대웅전으로 사용되었던 3층각은 원래 대웅전 건물이 아닌 탑이었다고 전한다.
3. 화순 쌍봉사 철감선사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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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국보 제57호 | |
화순 쌍봉사 철감선사탑 和順 雙峯寺 澈鑒禪師塔 | |
소재지 | 전라남도 화순군 쌍산의로 459 (이양면, 쌍봉사) / (지번)전남 화순군 이양면 증리 195-1 쌍봉사 |
분류 |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 불교 / 탑 |
수량/면적 | 1기 |
지정연도 | 1962년 12월 20일 |
제작시기 | 통일신라 경문왕8년(869) |
<colbgcolor=#315288> 일제강점기 철감선사탑 |
현재의 모습 |
화순에 2개밖에 없는 국보 중의 하나로 국보 제57호.[5]
쌍봉사에 세워진 철감선사(澈鑒禪師)의 승탑으로 화강암 재질이다. 탑이 조성된 시기는 철감선사가 71세로 입적한 통일신라 경문왕 8년(868) 즈음이리라 추정한다. 본 승탑은 기단부터 지붕돌까지 전체가 8각형이다. 아쉽게도 지붕돌 위에 있었을 머리장식은 사라지고 없지만, 전체적으로는 원형이 상당히 잘 보존되었다.
본 승탑은 기단부부터 탑신, 지붕돌까지 하나하나 섬세하며 화려한 조각들을 부조로 새겼다. 팔각형 기단에는 사자 8마리와 구름, 연꽃, 불교에서 말하는 극락조인 가릉빈가를 묘사했다. 사리를 모신 탑신은 매 모서리마다 기둥을 새기고 기둥 사이의 각 면마다 문과 사천왕, 비천상 등을 조각했다. 역시 팔각으로 된 지붕돌도 섬세한하게 조각했다. 기와 사이의 기왓골도 하나하나 표현하고 기와의 끝에는 막새기와도 하나하나 만들어놨는데 심지어 막새기와의 문양까지도 모두 조각했다. 지붕의 기와 묘사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처마에는 서까래까지도 만들어놨다. 이렇게나 디테일들을 사실적으로 표현한 덕에 본 승탑은 신라시대 건축물의 지붕을 연구하는 데 있어서 큰 도움이 되는 자료이기도 하다.
화순 쌍봉사 철감선사탑은 신라 시대에 만들어진 승탑 가운데 원형을 잘 보존하였거니와 조형 수준이 대단히 뛰어나고 섬세하여 가치가 대단히 높다. 현전하는 모든 승탑 중에서도 아름답고 빼어난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3.1. 외부 링크
- 한국어 위키백과 : 화순 쌍봉사 철감선사탑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화순 쌍봉사 철감선사탑
- 향토문화전자대전 : 화순 쌍봉사 철감 선사 탑
- 미술백과 : 쌍봉사철감선사탑
- 답사여행의 길잡이 5 - 전남 : 쌍봉사 철감선사탑
- 두산백과 : 쌍봉사 철감선사탑
3.2. 국보 제57호
쌍봉사(雙峰寺)에 세워져 있는 철감선사의 탑이다. 철감선사는 통일신라시대의 승려로, 28세 때 중국 당나라로 들어가 불교를 공부하였다. 문성왕 9년(847) 범일국사(梵日國師)와 함께 돌아와 풍악산에 머무르면서 도를 닦았으며, 경문왕대에 이 곳 화순지역의 아름다운 산수에 이끌려 절을 짓게 되는데, ‘쌍봉’인 그의 호를 따서 ‘쌍봉사’라 이름하였다. 경문왕 8년(868) 71세로 이 절에서 입적하니, 왕은 ‘철감’이라는 시호를 내리어 탑과 비를 세우도록 하였다.
탑은 전체가 8각으로 이루어진 일반적인 모습이며, 대부분 잘 남아 있으나 아쉽게도 꼭대기의 머리장식은 없어진 상태이다. 탑의 무게를 지탱하고 있는 기단(基壇)은 밑돌·가운데돌·윗돌의 세 부분으로 갖추어져 있으며, 특히 밑돌과 윗돌의 장식이 눈에 띄게 화려하다. 2단으로 마련된 밑돌은 마치 여덟마리의 사자가 구름위에 앉아 있는 모습으로, 저마다 다른 자세를 취하고 있으면서도 시선은 앞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어 흥미롭다. 윗돌 역시 2단으로 두어 아래에는 연꽃무늬를 두르고, 윗단에는 불교의 낙원에 산다는 극락조인 가릉빈가(伽陵頻迦)가 악기를 타는 모습을 도드라지게 새겨두었다. 사리가 모셔진 탑신(塔身)은 몸돌의 여덟 모서리마다 둥근 기둥모양을 새기고, 각 면마다 문짝모양, 사천왕상(四天王像), 비천상(飛天像) 등을 아름답게 조각해 두었다. 지붕돌에는 특히 최고조에 달한 조각 솜씨가 유감없이 발휘되어 있어서, 낙수면에는 기왓골이 깊게 패여 있고, 각 기와의 끝에는 막새기와가 표현되어 있으며, 처마에는 서까래까지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탑을 만든 시기는 선사가 입적한 해인 통일신라 경문왕 8년(868) 즈음일 것으로 추정된다. 조각 하나하나를 조심스럽게 다듬은 석공의 정성이 고스란히 전해져 오는 작품으로, 당시에 만들어진 탑 가운데 최대의 걸작품이라 할 수 있다.
탑은 전체가 8각으로 이루어진 일반적인 모습이며, 대부분 잘 남아 있으나 아쉽게도 꼭대기의 머리장식은 없어진 상태이다. 탑의 무게를 지탱하고 있는 기단(基壇)은 밑돌·가운데돌·윗돌의 세 부분으로 갖추어져 있으며, 특히 밑돌과 윗돌의 장식이 눈에 띄게 화려하다. 2단으로 마련된 밑돌은 마치 여덟마리의 사자가 구름위에 앉아 있는 모습으로, 저마다 다른 자세를 취하고 있으면서도 시선은 앞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어 흥미롭다. 윗돌 역시 2단으로 두어 아래에는 연꽃무늬를 두르고, 윗단에는 불교의 낙원에 산다는 극락조인 가릉빈가(伽陵頻迦)가 악기를 타는 모습을 도드라지게 새겨두었다. 사리가 모셔진 탑신(塔身)은 몸돌의 여덟 모서리마다 둥근 기둥모양을 새기고, 각 면마다 문짝모양, 사천왕상(四天王像), 비천상(飛天像) 등을 아름답게 조각해 두었다. 지붕돌에는 특히 최고조에 달한 조각 솜씨가 유감없이 발휘되어 있어서, 낙수면에는 기왓골이 깊게 패여 있고, 각 기와의 끝에는 막새기와가 표현되어 있으며, 처마에는 서까래까지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탑을 만든 시기는 선사가 입적한 해인 통일신라 경문왕 8년(868) 즈음일 것으로 추정된다. 조각 하나하나를 조심스럽게 다듬은 석공의 정성이 고스란히 전해져 오는 작품으로, 당시에 만들어진 탑 가운데 최대의 걸작품이라 할 수 있다.
4. 연계 교통
[1] 당시 보물 제163호. 하지만 내부에 있던 금동불상은 원래 것 그대로다. 화재 당시 한 노인이 불난 것을 보고 재빨리 들쳐업고 나왔다고. 그런데 놀랍게도 사실 그 불상은 장정 여럿이 달려들어도 간신히 들 정도로 무겁다고 한다.[2] 상륜부가 사모지붕으로 바뀐 모습이다. 조선시대에 개조되기 이전 모습은 이 모습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3] 조선시대에 지붕이 사모지붕에서 팔작지붕으로 바뀌었다.[4] 위의 3층 목탑(대웅전)과 함께 실제로 수능 국사나 한국사능력검정시험 문화파트에서 종종 등장한다.[5] 나머지 하나는 국보 제143호 화순 대곡리 청동기 일괄이다. 다만 화순 땅에 있는 국보는 이게 유일. 대곡리 청동기 유물은 현재 국립광주박물관이 소장하였다.[6] 일 7회한천행 마냥 하품나는 배차간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