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틀:대한민국의 국보 1~30호, version=27, uuid=b16ef97f-b363-494a-ab2a-e95ccd5f503f,
title2=틀:대한민국의 국보 31~60호, version2=23, uuid2=979147df-3a26-481f-b049-2bed6c206bdc,
title3=틀:대한민국의 국보 61~90호, version3=18, uuid3=a651288c-6ac5-4be6-aabd-d4ff8ce28b2d,
title4=틀:대한민국의 국보 91~120호, version4=16, uuid4=47b78863-c197-4fb3-8fa6-911be58d2f63,
title5=틀:대한민국의 국보 121~150호, version5=18, uuid5=38233d15-3cf9-4c93-833c-94c06a6fbf8b,
title6=틀:대한민국의 국보 151~180호, version6=15, uuid6=edf3cf60-9adb-4a8f-8ee0-0b7fbc07c52f,
title7=틀:대한민국의 국보 181~210호, version7=13, uuid7=dc5f6abf-c5c1-4679-b79e-a752e027eb8b,
title8=틀:대한민국의 국보 211~240호, version8=15, uuid8=0da4ae8e-4b56-4578-9135-01ed7dddf02a,
title9=틀:대한민국의 국보 241~270호, version9=13, uuid9=98999a90-809a-452b-9fd0-6721c558ff35,
title10=틀:대한민국의 국보 271~300호, version10=12, uuid10=d3cf8eb4-7dea-45c4-8db8-f764102672c0,
title11=틀:대한민국의 국보 301~330호, version11=21, uuid11=654db38a-ea8b-426b-a33e-245918ddd995,
title12=틀:대한민국의 국보 331~360호, version12=14, uuid12=6bc2ec27-8f76-40cf-9ef0-c2d80032b65e)]
대한민국 국보 제175호 | |
<colbgcolor=#315288> 백자 상감연화당초문 대접 白磁 象嵌蓮花唐草文 大楪 |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용산구 서빙고로 137 (용산동6가, 국립중앙박물관) |
분류 | 유물 / 생활공예 / 토도자공예 / 백자 |
수량/면적 | 1개 |
지정연도 | 1974년 7월 9일 |
제작시기 | 조선 시대(15세기) |
1. 개요
白磁象嵌蓮花唐草文大楪. 조선 세조 12년인 1466년 또는 성종 초에 왕의 명으로 우산리 2호 가마에서 만들어진 조선백자.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대한민국 국보 제175호이다.2. 내용
높이 7.6㎝, 입지름 17.5㎝, 밑지름 6.2㎝.고려백자의 전통 양식을 이어 만들어진 조선백자로, 경기도 광주의 우산리 2호 가마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우산리 2호 가마는 분원 관요가 설치되기 이전에 운영되었기 때문에, 분원이 운영되기 전에도 정교한 갑번 백자와 경질 상감 백자가 제작되었음을 밝혀주는 중요한 유물이다.
호암미술관 소장 '성화 병술'(1466)이 새겨진 상감 백자 지석과 양식과 재질이 완전히 동일한 연질백자로, 같은 1466년(세조 12)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 중이다. 또는 연대를 좀 더 늦게 잡아 성종 초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는 추측도 존재한다.
우리나라에서 15세기 중반경에 만들어진 상감 백자 대접류를 대표하는 유물이다.
3. 외부 링크
4. 국보 제175호
고려 백자의 전통을 이은 조선 전기의 백자로, 높이 7.6㎝, 입지름 17.5㎝, 밑지름 6.2㎝인 대접이다. 바탕흙은 석고와 같은 질감으로, 벽이 얇은 그릇이다. 아가리 부분이 밖으로 살짝 벌어지고 안쪽 윗부분에는 단순화된 덩굴무늬가 둘러져 있다. 바깥면에는 그릇의 위와 아랫부분에 두 줄의 띠를 두르고, 그 안에 연꽃 덩굴 무늬를 상감기법으로 표현하였다.
이러한 백자상감류는 조선시대 15세기 중반경에 주로 만들어진 것으로 대체로 경상도와 일부 지방가마에서 고려의 수법을 계승하였다.
이러한 백자상감류는 조선시대 15세기 중반경에 주로 만들어진 것으로 대체로 경상도와 일부 지방가마에서 고려의 수법을 계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