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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보림사 전경 |
현재 모습 |
1. 개요
한자 : 寶林寺 / 로마자 : Borimsa전라남도 장흥군 유치면에 위치한 사찰이며, 대한불교 조계종 제21교구 본사 송광사의 말사이다.
신라 말 유행한 선종 9산 중 가지산에 위치한 사찰이며, 860년 신라 헌안왕(憲安王)에게 권유를 받아 보조선사(普照禪師) 체징(體澄)이 창건하였다.
인도 가지산의 보림사, 중국 가지산의 보림사와 함께 삼(三)보림이라 불린다.
한국 전쟁 전까지만 해도 건물이 20여동이 있는 큰 절이었으나, 이 곳에서 공비들이 겨울을 났다는 이유로 이듬해 국군에 의해 모두 불태워졌다. # 당시 중위로 토벌대장이었던 전 전남도지사인 김종호씨가 사석에서 회고한 바에 따르면, 공비들이 보림사를 본거지로 이용하자 토벌대에서 방화를 하였고, 그에 대한 참회의 뜻으로 보림사 대웅전의 복원 불사를 후원하게 되었다고 한다. #
사찰을 창건한 보조선사의 생을 기록한 탑비가 현존한다.# 이는 신라 말 9세기 전남지방의 상황을 전하는 귀중한 당대 기록이다.
2. 문화재 목록
보유 문화재 수는 국보 2점, 보물 8점, 전라남도 지정 문화재 13점으로 천년 고찰답게 유물이 아주 많다.* 국가지정 문화재
01. 국보 제44 호 - 보림사 남,북 삼층석탑 및 석등
02. 국보 제117 호 - 보림사 철조 비로자나불 좌상
03. 보물 제155 호 - 보림사 동 승탑
04. 보물 제156 호 - 보림사 서 승탑 2기
05. 보물 제157 호 - 보림사 보조선사 탑
06. 보물 제158 호 - 보림사 보조선사 탑비
07. 보물 제745-9 호 - 보림사 사천왕상복장 월인석보 권제25
08. 보물 제772-3 호 - 보림사 사천왕상복장 금강경삼가해 권제1
09. 보물 제1252 호 - 보림사 사천왕상복장 상교정본자비도량참법 권제9,권제10
10. 보물 제1254 호 - 보림사 목조 사천왕상 4상
* 전라남도 지정 문화재
01. 유형 제191 호 - 장흥 전 의상암지 석불입상
02. 유형 제194 호 - 보림사 사천왕상복장 계초심학인문
03. 유형 제195 호 - 보림사 사천왕상복장 고봉화상 선요
04. 유형 제196 호 - 보림사 사천왕상복장 금강반야론
05. 유형 제197 호 - 보림사 사천왕상복장 대방광원각수다라요의경
06. 유형 제198 호 - 보림사 사천왕상복장 대전화상 주심경
07. 유형 제199 호 - 보림사 사천왕상복장 몽산화상 육도보설 2점
08. 유형 제200 호 - 보림사 사천왕상복장 불설 사십이장경
09. 유형 제201 호 - 보림사 사천왕상복장 육경합부 6점
10. 유형 제202 호 - 보림사 사천왕상복장 언해판화 관계불서 16점
11. 유형 제203 호 - 보림사 사천왕상복장 진언의식 관계불서 84점
12. 유형 제204 호 - 보림사 사천왕상복장 선종불서 47점
13. 유형 제205 호 - 보림사 사천왕상복장 경전불서 40점
3. 국보
3.1. 장흥 보림사 남 · 북 삼층석탑 및 석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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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 보림사 남ㆍ북 삼층석탑 및 석등 |
대한민국 국보 제44호 | |
장흥 보림사 남ㆍ북 삼층석탑 및 석등 長興 寶林寺 南ㆍ北 三層石塔 및 石燈 | |
<colcolor=#fff> 소재지 | <colbgcolor=#fff,#191919> 전라남도 장흥군 유치면 봉덕리 45번지 보림사 |
분류 |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 불교 / 탑 |
수량/면적 | 3기 |
지정연도 | 1962년 12월 20일 |
제작시기 | 통일신라 경문왕10년(871) |
석탑 2기와 그 사이에 있는 석등 한 기로 구성된다. 탑의 높이는 남탑이 5.4 m, 북탑이 5.9 m이고, 석등은 8각 형태이다. 전형적인 통일신라 시대 양식으로 탑의 상륜부까지 온전히 남아 가치가 높다. 1932년 도굴꾼이 사리장치를 훔치려 했으나 실패했다. 이때 쓰러진 탑신을 복구하던 중 탑신부 사리장치에서 사리와 함께 탑지를 발견했는데, 탑을 조성한 때가 신라 경문왕 10년(870)이란 내용이 있었다.
본래 석등은 부처의 진리를 상징하여 빛으로서 그 뜻을 나타내는 조형물이다. 화엄사, 부석사를 비롯한 고찰들은 석등 하나를 정전의 정면에 비치하여 부처의 진리를 상징하는 조형물의 기능을 하였다. 하지만 후대에는 의미가 퇴색되어 조명기구로 전락했기 때문에 정전에 모신 불상의 시선을 피하여 정전의 좌우에 하나씩 배치하는 경향이 있다.
통일신라 시대에 조성된 석등답게 본래 의미대로 석등 하나가 정전 중앙에 배치되었는데, 탑과 함께 온전한 세트로 보존되어 가치가 높다. 국보 제44호로 지정되었다.
3.1.1. 외부 링크
- 한국어 위키백과 : 장흥 보림사 남·북 삼층석탑 및 석등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장흥 보림사 남·북 삼층석탑 및 석등
- 답사여행의 길잡이 5 - 전남 : 보림사 삼층석탑 및 석등
- 한국사전연구사 한국불교미술대전 : 보림사삼층석탑및석등
- 두산백과 : 보림사 삼층석탑 및 석등
3.1.2. 국보 제44호
가지산 남쪽 기슭에 있는 보림사는 통일신라 헌안왕의 권유로 체징(體澄)이 터를 잡아 헌안왕 4년(860)에 창건하였다. 그 뒤 계속 번창하여 20여 동의 부속 건물을 갖추었으나, 한국전쟁 때 대부분이 불에 타 없어졌다. 절 앞뜰에는 2기의 석탑과 1기의 석등이 나란히 놓여 있다.
남북으로 세워진 두 탑은 구조와 크기가 같으며, 2단으로 쌓은 기단(基壇)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놓고 머리장식을 얹은 통일신라의 전형적인 석탑이다. 기단은 위층이 큰데 비해 아래층은 작으며, 위층 기단의 맨윗돌은 매우 얇다. 탑신부는 몸돌과 지붕돌을 각각 하나의 돌로 만들어 쌓았으며, 각 층 몸돌에 모서리기둥을 새겼는데, 2·3층은 희미하게 나타난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계단형으로 5단씩이고, 처마는 기단의 맨윗돌과 같이 얇고 평평하며, 네 귀퉁이는 심하게 들려있어 윗면의 경사가 급해 보인다. 탑의 꼭대기에는 여러 개의 머리장식들을 차례대로 가지런히 올려 놓았다.
석등 역시 신라의 전형적인 모습으로, 네모꼴의 바닥돌 위에 연꽃무늬를 새긴 8각의 아래받침돌을 얹고, 그 위에 가늘고 긴 기둥을 세운 후, 다시 윗받침돌을 얹어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火舍石)을 받쳐주도록 하였다. 화사석은 8각으로 4면에만 창을 뚫어 놓았고, 그 위로 넓은 지붕돌을 얹었는데 각 모서리 끝부분에 꽃장식을 하였다. 석등의 지붕 위에는 여러 장식들 놓여 있다.
이들 석탑과 석등은 모두 완전한 형태를 지니고 있으며, 특히 탑의 머리장식은 온전하게 남아 있는 예가 드물어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탑 속에서 발견된 기록에 의해 석탑은 통일신라 경문왕 10년(870) 즈음에 만들어진 것으로 밝혀졌고, 석탑과 더불어 석등도 같은 시기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보고 있다.
남북으로 세워진 두 탑은 구조와 크기가 같으며, 2단으로 쌓은 기단(基壇)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놓고 머리장식을 얹은 통일신라의 전형적인 석탑이다. 기단은 위층이 큰데 비해 아래층은 작으며, 위층 기단의 맨윗돌은 매우 얇다. 탑신부는 몸돌과 지붕돌을 각각 하나의 돌로 만들어 쌓았으며, 각 층 몸돌에 모서리기둥을 새겼는데, 2·3층은 희미하게 나타난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계단형으로 5단씩이고, 처마는 기단의 맨윗돌과 같이 얇고 평평하며, 네 귀퉁이는 심하게 들려있어 윗면의 경사가 급해 보인다. 탑의 꼭대기에는 여러 개의 머리장식들을 차례대로 가지런히 올려 놓았다.
석등 역시 신라의 전형적인 모습으로, 네모꼴의 바닥돌 위에 연꽃무늬를 새긴 8각의 아래받침돌을 얹고, 그 위에 가늘고 긴 기둥을 세운 후, 다시 윗받침돌을 얹어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火舍石)을 받쳐주도록 하였다. 화사석은 8각으로 4면에만 창을 뚫어 놓았고, 그 위로 넓은 지붕돌을 얹었는데 각 모서리 끝부분에 꽃장식을 하였다. 석등의 지붕 위에는 여러 장식들 놓여 있다.
이들 석탑과 석등은 모두 완전한 형태를 지니고 있으며, 특히 탑의 머리장식은 온전하게 남아 있는 예가 드물어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탑 속에서 발견된 기록에 의해 석탑은 통일신라 경문왕 10년(870) 즈음에 만들어진 것으로 밝혀졌고, 석탑과 더불어 석등도 같은 시기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