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특별자치도 완주군에 있는 동명의 절에 대한 내용은 송광사(완주) 문서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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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불교조계종 제21교구 본사 | |
승보종찰 조계총림 송광사 松廣寺 | Songgwangsa | |
<colbgcolor=#B9A26A><colcolor=#fff> 위치 | 전라남도 순천시 송광면 송광사안길 100[1] |
주지 | 무자 |
방장 | |
등급 | 제21교구 본사 |
링크 | | |
송광사의 본찰로 들어가는 입구인 삼청교와 우화각. 송광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꼽힌다. |
[clearfix]
1. 개요
2001년 BTN에서 제작을 한 송광사 저녁 예불. |
2017년 BTN에서 제작을 한 송광사 저녁 예불. 불교판 오케스트라. 넋을 잃는 외국인들도 많다. |
한자 : 松廣寺 / 로마자 : Songgwangsa
전라남도 순천시 조계산 기슭에 위치한 사찰이며, 대한불교 조계종 제21교구 본사이다. 사적 제506호.
법보사찰 합천 해인사, 불보사찰 양산 통도사와 더불어 한국 불교의 '삼보사찰' 중 하나인 승보사찰의 순천 송광사로 손꼽힐 정도로 크고 유명한 절이다.
2. 연혁
남북국시대 신라말의 승려인 혜린선사(慧璘仙師)가 송광산에 길상사라는 명칭으로 창건한 것이 시초이다.[2] 그 뒤 후삼국시대의 혼란기에 폐사가 되었는지 고려 인종 대의 승려 석조대사(釋照大師)가 중창하려는 뜻을 품고 자재와 인력을 모아 공사를 진행했으나 완공을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그를 이을 사람이 없었는지 당분간 길상사는 거의 폐사화되었다가 50여 년 뒤인 고려 신종대에 조계종의 창시자인 보조국사 지눌이 정혜결사(定慧結社)를 이곳으로 옮겨와, 수선사(修禪社)로 이름으로 고치고 중창하여 가르침을 베풀기 시작하면서 발전하였다. 덤으로 이때 송광산은 조계산(曹溪山)으로 개칭되었다 한다.이후 보조국사 지눌의 제자이자 조계종의 제2조(第二祖) 진각국사(眞覺國師) 혜심이 중창한 뒤부터 조선 초기까지 많은 국사를 배출하였는데 이 절에서 배출한 국사는 지눌을 비롯해 16명이나 되며[3] 한국 불교의 전통을 이은 중요한 승보종찰이 되었다. 하지만 해방 이후 성철 스님 등이 있었던 해인사 위주로 중심이 이동하면서 약간 밀리게 되었다.
송광사라는 이름으로 언제부터 불리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보조국사 지눌이 모후산에서 나무로 깎은 솔개를 산에 날렸고 지금의 국사전 뒷등에 떨어지자 그 뒷등을 솔개가 내려앉은 곳이라 하여 치락대라 불리게 되었다고 전해지는데, 근대의 문학가 최남선은 이 전설에 따라 송광을 솔개의 사투리인 '솔갱이'라 하여 송광사는 '솔갱이절'을 한자화한 것이라고 풀이했다. 다른 유래로는 예로부터 조계산에 소나무가 가득했기 때문에 이곳 사람들이 이 산을 솔메라고 부른 것에서 '송광산'이라는 이름이 유래하였으며, 산 이름을 따서 사찰 이름도 송광사라 불렀다는 설이 있다. 또한 송광사 북쪽에는 광원암(廣遠庵)이라는 암자가 있는데[4] 진각국사 혜심이 창건했다고 알려져 있었으나 삼국시대인 516년(백제 무령왕 14년) 6월 승려 가규(可規)가 창건했다는 내용의 상량기(上樑記)가 발견되었다. 그렇다면 암자를 절의 기원으로 볼 시에는 연대가 삼국시대까지 올라가게 된다.[5]
일제강점기 송광사 전경 |
이후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치르면서 폐사에 이르렀으나 승려 응선과 부휴가 천자암, 보조암, 임경당을 차례로 중건하고 동행랑, 천왕문 등을 세웠었다. 1842년에는 큰 화재가 일어나 거의 모든 건물이 불타 없어져 또 다시 세웠다. 일제강점기 직전에는 항일 의병을 돕는 근거지 역할을 했던 사찰이었는데, 이후 일제는 사찰 건물을 파괴하는등 만행을 저질렀다. 그러나 1922년부터 1928년까지 승려 설월과 율암이 용화당, 명성각 등을 보수하고 장원문, 사감고를 새로 지었다. 이후 현대에 들어 여수·순천 10.19 사건과 6.25 전쟁으로 사찰의 중심 전각들이 불탔는데, 그 뒤 승려 취봉과 금당이 건물들을 복구하였다. 대웅보전은 1988년에 재건된 것이라고 한다.
2017년에 일본으로 밀반출되었던 18세기 조선시대의 고승 묵암당 최눌(1717∼1790)의 것으로 추정되는 진영이 송광사로 반환되었다. #
3. 가람 및 중요 문화재
'YTN 사이언스'에서 방송한 송광사 |
절의 전체 면적, 전각의 수가 전국에서 손 꼽힐 정도로 크다. 다만 큰 절임에도 불구하고 탑이 없다는 점이 특이하다. 풍경[6][7] 과 석탑[8], 석등이 없기 때문에 송광사에는 3가지가 없다는 말로 불리기도 한다. 풍경이 없는 이유는 바람에 흔들리는 풍경 소리가 스님들의 공부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며, 석탑과 석등이 없는 이유는 송광사 터가 연화부수[9]형으로 무거운 석탑을 세우면 가라 앉는다는 의미 때문이다. 3가지 명물도 있는데, '비사리구시'라고 불리는 커다란 나무 밥통[10], '능견난사' 라고 하는 음식을 담는 그릇들[11], '쌍향수' 라는 향나무[12]. 이 3가지다.
한국의 3보[13] 사찰로도 꼽히는데, 해인사는 법보(팔만대장경), 송광사는 승보(수계사찰), 통도사는 불보(진신사리) 사찰이기 때문이다. 부산의 범어사, 구례의 화엄사 등과 함께 5대 사찰로 꼽히기도 한다. 뛰어난 승려를 많이 배출한 곳[14]답게 여러 고승들이 나왔다. 송광사의 송광(松廣)이란 이름에서 松(소나무 송)자를 파자하여 十八公으로 풀이, 고승 18명이 나오게 될 절이라는 이야기도 전한다.
국사전, 약사전, 영산전을 비롯해 목조삼존불감[15], 고려고종제서[16], 대반열반경소, 수선사형지기, 금동요령, 대승아비달마잡집론소, 묘법연화경찬술, 금강반야경소개현초 등 전국 사찰 가운데 가장 많은 문화재가 있는 절로도 유명하다.
송광사 지장전(地藏殿) 내부 오른편에는 금호아시아나그룹 박인천(1901-1984) 초대 회장과 아내 이순정(1910-2010) 여사의 위패가 큼지막하게 있다. 송광사에서 1985년에 명부전(冥府殿)을 허물고 그 자리에 지장전을 세웠는데, 여기에 필요한 금액을 박인천이 미리 시주했다고 한다. 그래서 지장전 오른쪽 벽을 회장 부부의 위패가 넓게 차지하였다. 한자로 청입법왕궁(請入法王宮) 안심좌도량(安心坐道場)이라는 글귀도 위패 옆 벽에 쓰여 있는데, 이는 관음시식 중에 하는 봉안게(奉安偈)라는 기도문의 한 구절로 '법왕(부처)의 궁전에 초대하여 맞아들였으니 편안한 마음으로 도량에 앉으소서.'라는 뜻이다.
3.1. 순천 송광사 목조삼존불감
자세한 내용은 순천 송광사 목조삼존불감 문서 참고하십시오. 송광사 보조국사 지눌의 소장품 도난당하다(영상)3.2. 혜심고신제서
자세한 내용은 혜심고신제서 문서 참고하십시오.3.3. 순천 송광사 국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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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국보 제56호 | |
순천 송광사 국사전 順天 松廣寺 國師殿 | |
소재지 | 전라남도 순천시 송광면 송광사안길 100, 송광사 (신평리) / (지번)전라남도 순천시 송광면 신평리 12 송광사 |
분류 |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 불교 / 불전 |
수량/면적 | 1동 |
지정연도 | 1962년 12월 20일 |
제작시기 | 조선 시대 초기 |
<colbgcolor=#315288> 순천 송광사 국사전 |
1369년 고려시대에 지어진 건물로 16분의 스님 영정이 모셔져 있다. 해당 영정들은 1990년 보물 제1043호로 '순천 송광사 십육조사진영(順天 松廣寺 十六祖師眞影)'으로 지정되었는데, 1995년에 국사전에 도둑이 들어 전체 16점 중 1세(世) 보조국사 지눌, 2세 진각국사 혜심, 14세 정혜국사의 영정을 제외한 나머지 영정들이 도난을 당했다.
3.3.1. 외부 링크
3.3.2. 국보 제56호
조계산에 있는 송광사는 우리나라 3대 사찰 중 하나로 매우 유서 깊은 절이다. ‘송광’이라는 절 이름은 조계산의 옛 이름인 송광산에서 따 왔다고 하는데, 절을 언제 세웠는지 정확한 자료는 없고 신라 말기에 체징이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
송광사 국사전은 나라를 빛낸 큰 스님 16분의 영정을 모시고 그 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건물로, 옛날에는 참선을 하던 곳이었다. 고려 공민왕 18년(1369)에 처음 지었고, 그 뒤 2차례에 걸쳐 보수하였다.
앞면 4칸·옆면 3칸 크기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으로,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이다. 건물 안의 천장은 우물 정(井)자 모양의 천장으로 꾸미고 연꽃무늬로 장식하였는데, 천장의 연꽃무늬와 대들보의 용무늬는 건물을 지을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건축 구조상 조선 초기 양식을 지니고 있는 이 건물은 순천 송광사 하사당(보물 제263호)과 같은 시대에 지은 것으로 짐작되며, 소박하고 아담한 형태와 그 기법에서도 주심포 중기 형식의 표준이라고 할 만한 중요한 건축물이다.
송광사 국사전은 나라를 빛낸 큰 스님 16분의 영정을 모시고 그 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건물로, 옛날에는 참선을 하던 곳이었다. 고려 공민왕 18년(1369)에 처음 지었고, 그 뒤 2차례에 걸쳐 보수하였다.
앞면 4칸·옆면 3칸 크기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으로,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이다. 건물 안의 천장은 우물 정(井)자 모양의 천장으로 꾸미고 연꽃무늬로 장식하였는데, 천장의 연꽃무늬와 대들보의 용무늬는 건물을 지을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건축 구조상 조선 초기 양식을 지니고 있는 이 건물은 순천 송광사 하사당(보물 제263호)과 같은 시대에 지은 것으로 짐작되며, 소박하고 아담한 형태와 그 기법에서도 주심포 중기 형식의 표준이라고 할 만한 중요한 건축물이다.
3.4. 순천 송광사 화엄경변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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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국보 제314호 | |
순천 송광사 화엄경변상도 順天 松廣寺 華嚴經變相圖 | |
소재지 | 전라남도 순천시 |
분류 | 유물 / 불교회화 / 탱화 / 불도 |
수량/면적 | 1폭 |
지정연도 | 2009년 9월 2일 |
제작시기 | 조선 영조 46년(1770) |
<colbgcolor=#315288> 순천 송광사 화엄경변상도 |
화엄경변상도는 가로 270㎝, 세로 294.5㎝의 거대한 탱화(幀畵)로 비단에 그려졌다. 변상도란 불경 또는 불교의 설화를 알기 쉽게 조형화하여 그린 그림인데, 화엄경변상도의 경우 화엄경의 내용을 표현한 그림이다. 1770년에 제작 되었는데, 현존하는 조선시대 화엄경변상도 가운데서 가장 이른 시기에 제작된 것이다.
화엄경의 방대한 내용을 한 폭에 압축하여 표현하고 있는데, 거대한 사이즈에 걸맞게 대단히 복잡한 구도를 가지고 있으며 수많은 등장인물들이 묘사되어 있다. 이 변상도는 7군데의 장소에서 행한 9번의 설법에 대해 다루고 있다.
2003년 2월 3일 보물 제1366호로 지정되었다가 그 가치를 인정 받아 2009년 9월 2일 국보 제314호로 승격지정 되었다.
3.4.1. 외부 링크
3.4.2. 국보 제314호
『화엄경』의 7처9회(七處九會)의 설법내용을 그린 변상도로, 비단 바탕에 채색하여 그린 그림이다.
이 화엄탱은 기본구성을 잘 보여주는 작품으로 구도상 상·하단 모두 법회장면이 거의 대칭을 이루며 펼쳐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랫부분에는 제1회 ‘보리도량회’를 중심으로 왼쪽에는 보광명전에서 열린 제7회·제2회·제8회가 자리하였으며, 오른쪽에는 제9회 ‘서다림회’가 위치해 있다. 그리고 윗부분에는 아래로부터 위로 진행되면서 오른쪽에 제3회 ‘도리천궁회’와 제4회 ‘야마천궁회’를, 왼쪽에 제5회 ‘도솔천궁회’와 제6회 ‘타화자재천궁회’를 배치시켜 대칭구조를 이루고 있다.
계획적이고 짜임새있는 구도와 더불어 황토색 바탕에 홍색과 녹색 및 금색을 사용하고, 각 회주인 보살형 노사나불의 영락에 고분법을 활용하여 장식함으로써 화면이 밝고 화려해지는 18세기 불화의 경향을 살필 수 있다.
한편 그림 아랫부분에는 보현보살이 대중들에게 비로자나불의 정토인 연화장세계의 모습을 설명하고 있는 『화엄경』39품 중의「화장세계품」내용을 도해한 ‘연화장세계도’가 그려져 있어 주목된다.
그림에 대한 내력을 적어 놓은 기록에 의하면, 조선 영조 46년(1770)에 화련을 비롯한 12명의 승려화가들이 무등산 안심사에서 조성하여 송광사로 옮겨졌음을 알 수 있다.
이 불화는 현존하는 조선시대 화엄경변상도 중 조성시기가 가장 빠름은 물론, 『화엄경』의 7처9회 설법내용을 매우 충실하게 효과적으로 그려내고 있는 기준작이라는데 사료적 가치가 있다.
이 화엄탱은 기본구성을 잘 보여주는 작품으로 구도상 상·하단 모두 법회장면이 거의 대칭을 이루며 펼쳐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랫부분에는 제1회 ‘보리도량회’를 중심으로 왼쪽에는 보광명전에서 열린 제7회·제2회·제8회가 자리하였으며, 오른쪽에는 제9회 ‘서다림회’가 위치해 있다. 그리고 윗부분에는 아래로부터 위로 진행되면서 오른쪽에 제3회 ‘도리천궁회’와 제4회 ‘야마천궁회’를, 왼쪽에 제5회 ‘도솔천궁회’와 제6회 ‘타화자재천궁회’를 배치시켜 대칭구조를 이루고 있다.
계획적이고 짜임새있는 구도와 더불어 황토색 바탕에 홍색과 녹색 및 금색을 사용하고, 각 회주인 보살형 노사나불의 영락에 고분법을 활용하여 장식함으로써 화면이 밝고 화려해지는 18세기 불화의 경향을 살필 수 있다.
한편 그림 아랫부분에는 보현보살이 대중들에게 비로자나불의 정토인 연화장세계의 모습을 설명하고 있는 『화엄경』39품 중의「화장세계품」내용을 도해한 ‘연화장세계도’가 그려져 있어 주목된다.
그림에 대한 내력을 적어 놓은 기록에 의하면, 조선 영조 46년(1770)에 화련을 비롯한 12명의 승려화가들이 무등산 안심사에서 조성하여 송광사로 옮겨졌음을 알 수 있다.
이 불화는 현존하는 조선시대 화엄경변상도 중 조성시기가 가장 빠름은 물론, 『화엄경』의 7처9회 설법내용을 매우 충실하게 효과적으로 그려내고 있는 기준작이라는데 사료적 가치가 있다.
3.5. 원숭이상
일주문 계단 소맷돌에는 원숭이상이 있다. 상원사가 고양이상으로 뜨는 것에 비하면 별 존재감이 없다.3.6. 약사전
<colbgcolor=#315288> 송광사 약사전 내부 |
보물 302호. 대웅전 앞 뜰의 남쪽에 있다. 앞면 1칸, 옆면 1칸으로 현존하는 불교 건물 중 가장 작은 규모이며, 약사여래를 봉안하고 있다.
3.7. 순천 송광사 목조관음보살좌상 복장전적
자세한 내용은 순천 송광사 목조관음보살좌상 복장전적 문서 참고하십시오.3.8. 순천 송광사 소조 사천왕상 복장유물
자세한 내용은 순천 송광사 소조 사천왕상 복장유물 문서 참고하십시오.3.9. 진영(초상화) 목록
송광사에는 수십 점의 진영이 있다. 그 중 국사전에 있었던 16점의 진영 중 13점을 도난맞기도 하였다. 현재까지 찾지 못한 상황이다.- 청량국사 징관(淸凉國師 澄觀, 738 - 839)
- 보조국사 지눌(普照國師 知訥, 1158 - 1210)
- 진각국사 혜심(眞覺國師 慧諶, 1178 - 1234)
- 정혜국사
- 풍암당 세찰(楓巖堂 世察, 1688 - 1767)
- 중봉당 우징(中峰堂 宇澄)
- 두월당 우홍(斗月堂 禹洪, 1744 - 1816)
- 기봉당 장오(奇峰堂 藏旿, 1776 - 1853)
- 묵암당 최눌(默庵堂 最訥, 1717 - 1790) - 풍암 세찰의 제자이다.
- 응암당 낭윤(應庵堂 朗允, 1718 - 1794) - 풍암 세찰의 제자이다.
- 제운당 해징(齊雲堂 海澄, 1719 - 1804) - 풍암 세찰의 제자이다.
- 벽담당 행인(碧潭堂 幸仁, 1721 - 1798) - 풍암 세찰의 제자이다.
- 환해당 법린(幻海堂 法璘, 1749 - 1820) - 묵암 최눌의 제자이다.
- 화악당 평삼(華岳堂 評三) - 응암 낭윤의 제자이다.
- 보광당 정선(葆光堂 晶宣) - 제운 해징의 제자이다.
- 화운당 정순(華雲堂 定淳) - 제운 해징의 제자이다.
- 경월당 성훈(鏡月堂 性薰) - 몽암 기영의 제자이다.
- 회계당 휘종(會溪堂 輝宗, 1759 - 1835) - 벽담 행인의 제자이다.
- 응봉당 정특(應峰堂 正特) - 월성 성감의 제자이다.
- 설봉당 법일(雪峰堂 法日) - 경월 성훈의 제자이다.
- 완월당 축행(翫月堂 竺行) - 봉암 낙현의 제자이다.
- 해련당 보심(海蓮堂 甫心) - 환해 법린의 제자이다.
- 은허당 계훈(隱虛堂 戒薰) - 보광 정선의 제자이다.
- 원응당 계홍(圓應堂 戒洪) - 보광 정선의 제자이다.
- 동호당 성민(東湖堂 性敏) - 화운 정순의 제자이다.
- 용운당 처익(龍雲堂 處益, 1813 - 1888) - 보봉 맹척의 제자이다.
- 응봉당 함잠(應峰堂 銜岑) - 설봉 법일의 제자이다.
- 구련당 법선(九蓮堂 法宣, 1844 - 1897) - 용운 처익의 제자이다.
- 함월당 맹홍(咸月堂 孟洪) - 구봉 천유의 제자이다.
- 수산당 원만(守山堂 圓滿) - 계봉 기준의 제자이다.
- 성암당 정은(惺庵堂 正垠) - 봉월 광찬의 제자이다.
- 침명당 한성(枕溟堂 罕醒) - 영봉 표정의 제자이다.
- 운계당 성환(雲桂堂 聖幻) - 원응 계홍의 제자이다.
- 동허당 치성(洞虛堂 致性, 1844 - 1901) - 벽하 구붕의 제자이다.
- 이봉당 낙현(离峰堂 樂玹, 1814 - 1890) - 설하 정훈의 제자이다.
- 원해당 문주(圓海堂 文周, 1850 - 1888) - 수산 원만의 제자이다.
- 제월당 신종(齊月堂 信宗) - 해룡 덕선의 제자이다.
- 인봉당 창율(印峰堂 昌律, 1859 - 1942) - 추파 찬선의 제자이다.
- 함호당 완규(函湖堂 玩圭, 1853 - 1928) - 휴암 긍언의 제자이다.
- 우담당 홍기(優曇堂 洪基, 1822 - 1881) - 연월 이준의 제자이다.
- 율암당 찬의(栗庵堂 贊儀, 1867 - 1929) - 원해 문주의 제자이다.
- 침룡당 취진(枕龍堂 取珍) - 추담 서관의 제자이다.
- 낙암당(樂庵堂)
3.10. 비석 목록
- 송광사보조국사비
- 송광사사적비
- 송광사원감국사비
- 송광사백암당대선사비
- 송광사부도전묵암대선사비
4. 산내 암자
- 감로암
- 광원암
- 부도암
- 불일암
- 오도암
- 인월암
- 천자암
5. 송광사를 거쳐간 스님
송광사와 인연이 있는 스님을 다루는 장이다.- 송광사 16국사
- 1세 보조국사 지눌(普照國師 知訥, 1158 - 1210)
- 2세 진각국사 혜심(眞覺國師 慧諶, 1178 - 1234)
- 3세 청진국사 몽여(淸眞國師 夢如, ? - 1252)
- 4세 진명국사 혼원(眞明國師 混元, 1191 - 1271)
- 5세 원오국사 천영(圓悟國師 天英, 1215 - 1286)
- 6세 원감국사 충지(圓鑑國師 沖止, 1226 - 1293)
- 7세 자정국사 일인(慈靜國師 一印)
- 8세 자각국사 도영(慈覺國師 道英)
- 9세 담당국사(湛堂國師)
- 10세 혜감국사 만항(慧鑑國師 萬恒, 1249 - 1319)
- 11세 자원국사(慈圓國師)
- 12세 혜각국사 묘구(慧覺國師 妙軀)
- 13세 각진국사 복구(覺眞國師 復丘, 1270 - 1355)
- 14세 정혜국사 복암(淨慧國師 復庵)
- 15세 홍진국사(弘眞國師)
- 16세 고봉국사 법장(高峰國師 法藏, 1350 - 1428)
- 탁연(卓然) - 고려 후기 스님으로 송광사에서 출가하였다. 원오국사 천영이 도반(친구)이다.
- 기봉 장오(奇峰 藏旿, 1776 - 1853) - 1842년 송광사에서 대화재가 났다. 기봉은 제자인 용운과 함께 서울로 올라가 관리들에게 송광사를 다시 세우는 것을 도와달라고 하였다. 이러한 노력으로 송광사를 다시 세울 수 있었다.
- 용운 처익(龍雲 處益, 1813 - 1888) - 통도사와 송광사를 오갔던 스님으로 기봉 장오와 함께 송광사를 다시 세우는 데 참여하였다.
- 우담 홍기(優曇 洪基, 1822 - 1880) - 조선후기 송광사의 학승으로 삼종선 논쟁에 참여하였다.
- 금명 보정(錦溟 寶鼎, 1861 - 1930) - 인조 때 일어난 이괄의 난을 평정하는 데 참여한 학성군 김완의 후손으로 송광사에서 출가하였다. 송광사 도총섭[17]을 맡았다. 1919년 고종이 죽자 백일재가 열렸는데 이때 보정이 천도문을 지었다. 또한 불교사 관련 책을 많이 썼다.
- 범일 보성 대종사
- 편양 현묵 대종사
- 벽산 원각 대종사
- 남은당 현봉 대종사 (1949 ~ 2024) 송광사의 7대 방장. 구산 수련 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셨다. 방장을 역임하면서 행자스님들을 대상으로 자경문, 수심결 등의 다수의 유튜브 강의를 남겼다. 생전에 송광사 산내 암자인 광원암에 주석하였으며 방장으로 추대 후 삼일암에 주석하셨다. 송광사의 가풍이라고 할 수 있는 보조국사 지눌스님의 목우가풍 등에 대해서 널리 알리는 노력을 하였다. 저서로는 선으로 본 반야심경 등이 있으며, 2024. 5. 1. 입적하셨다.
- 법정 스님 (1932 ~ 2010) 수필집 무소유로 알려진 길상사의 회주스님, 효봉스님을 은사로 출가를 하셨으며, 무소유, 산에는 꽃이 피네 등 다수의 수필집을 내셨다. 송광사 수련원장을역임하였고, 수필로도 유명하신 스님이지만 유튜브를 검색해보면 성철스님과의 답변도 꽤 유명하며, 스님은 길상사의 회주를 하시면서 종교간의 화합도 중요하게 여겨 생전 김수환 추기경 및 이해인 수녀와도 교분이 있었다. 생전에 송광사 암자인 불일암에 주석하셨다.
- 자공 스님
6. 선암사
조계산의 산등성이 너머에는 또다른 고찰인 선암사가 있다. 등산로로 이어져 있기 때문에 자차가 아닌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좀 걸어도 상관없는 사람이라면 송광사로 가서 선암사로 나오거나 그 반대로 하는 일정을 짜는 것도 괜찮다. 등산로라 해도 산꼭대기까지 올라가는 건 아니고 산중턱을 둘러 가는 길이라 걷기길치고 약간 가파른 정도다.7. 해우소 관련
현재 해우소의 모습 |
1993년에 오래된 해우소(화장실) 건물을 부수고 다시 지으면서 옛 건물과는 판이하게 다른 새 건물을 새웠다. 옛 건물은 더럽게 보일 지라도 오래된 나무 목재들과 연못, 아름다운 팔작지붕이 어울어진 꽤 멋진 건물이었다. 그러나 전의 건물은 허물고 비율과 구성 등 여러 심미적인 요소는 무시한 채 팔작지붕을 맞배지붕으로 바꾸는 등 조잡하게 꾸민 새 건물을 세웠다.
인근에 자리한 선암사가 해우소를 수리할 때 외형을 크게 바꾸지 않고 옛 모습을 지켰기 때문에 더욱 비교된다.
8. 교통
8.1. 자가용
호남고속도로 주암 나들목으로 나와서 18번 국도를 따라 오면 송광사 아래에 도착한다. 주암 나들목에서 송광사까지는 약 15분 정도가 걸린다. 전라남도 서남부권에서 송광사에 오려면 남해고속도로 벌교 나들목으로 나와서 15번 국도(조계산로)를 타고 오면 된다.8.2. 대중교통
순천시 시내버스 111번, 63번과 벌교에서 출발하는 보성교통의 곡천10번 계열이 운행한다. 순천 버스와 벌교 버스 모두 각각 순천역과 순천종합버스터미널, 벌교버스공용터미널 인근 정류장에서 정차한다. 벌교역에서 벌교 버스를 타야 할 경우 벌교세무서 앞 정류장으로 가야 해서 조금 걸어야 한다.버스를 이용할 경우 순천시내 기준 대략 60여분 정도 소요된다. 순천시내까지 저정도 걸리는 것이라 만약 순천만쪽으로 일정을 잡았다면 2시간 이상 걸릴 각오를 해야한다. 게다가 송광사에서 순천시내 구간에는 관광지라고 할게 딱히 없기 때문에 사실상 들어왔던길 그대로 다시 돌아나와야 해 동선상으로도 손해가 크다. 따라서 송광사를 일정에 넣었다면 아침일찍 일정을 시작해야한다.
9. 여담
- 박찬욱 감독의 영화 헤어질 결심의 촬영지다.
- TV 문학관 등신불(1981년 작)에서 이 장소가 등장하기도 했다.
- "길상사"로 창건된 송광사는 같은 이름을 가진 서울 길상사와 창원 길상사를 말사로 두고 있다.
- 송광사는 한국 3대 사찰인 동시에 총림 규모의 사찰이라 그런지 여타 사찰보다 크다. 그래서 그런지 절 입구에서 송광사 경내까지 거리가 좀 되는 편이다. 송광사 경내 입구 쪽 가까이에 법정스님이 주석하셨던 불일암도 있으니, 시간되면 천천히 둘러보자.
- 2023년 전국연합학력평가 3학년 10월 모의고사 한국사 영역 9번 문제에서 송광사가 나왔다.
(가)이/가 결사 운동을 시작한 거조사에 이어 알아볼 곳은 송광사입니다. 이곳은 그가 수선사 결사를 이끌며 입적할 때까지 활동한 사찰입니다.
(가)의 행적을 찾아서: 전남 순천시 송광사, 경북 영천시 거조사 사진
① 삼국사기를 편찬하였다.
② 서경 천도를 건의하였다.
③ 청 문물 수용을 주장하였다.
④ 왕오천축국전을 저술하였다.
⑤ 선종과 교종의 조화를 추구하였다. ||
10. 외부 링크
[1] 신평리 12[2] 해당 항목을 타고 들어가면 다른 절이 나오듯이 동명의 길상사가 있기 때문인지 송광사의 전신인 길상사는 대길상사(大吉祥寺)라고도 불리는 듯하다.[3] 송광사에는 이들 16명의 국사의 초상화가 봉안되어 있었지만 1995년에 보존상태가 좋지 않았던 3점을 제외하고 모조리 도난당했고, 안타깝게도 2018년 현재까지 행방이 묘연하다. # 그나마 컬러사진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토대로 다시 복원할 수는 있었다는 것이 불행 중 다행이랄까. # 여담으로 9세 담당국사는 금나라 장종의 황자였다는 설이 있다.[4] 위치는 절의 북쪽이지만 보조국사 지눌이 창건한 보조암(普照庵)을 기준으로 방위를 정했기 때문에 광원암은 일명 서암(西庵)이라고도 불린다.[5] 광원암이라는 이름 자체는 진각국사 혜심이 이곳에서 주석하면서 한국 선불교의 가장 중요한 문헌이 된 선문염송(禪門拈頌) 30권을 편찬하고 이를 널리 유포하였다고(廣遠流布, 광원유포) 하여 그런 이름이 붙게 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삼국시대의 최초 창건 당시에 붙었던 원래 이름은 알 수 없다.[6] 처마 끝에 달리는 작은 종[7] 정확히 말하자면 아예 없는 것은 아니고 스님들의 수행지역과 비교적 멀리 떨어진 곳에 달려 있다. 일주문을 지나 대웅전으로 통하는 교량인 우화루 아래에 달려 있다. 송광사와 비슷한 예로 부안군 내소사의 지장암이 있는데, 이곳에도 처마에 풍경이 달려있지 않고 그 대신 입구 나무에 서양식 윈드차임이 달려 있다.[8] 아예 없는 것은 아니고 대웅전의 불상을 받치는 형태의 석탑이 단 하나 있다.[9] 물 위에 연꽃이 뜬 듯한 모습.[10] 쌀 7가마분, 약 4천명분의 밥을 한꺼번에 담을 수 있다고 한다.[11] 지눌이 원나라에서 가져온 그릇 세트. 수공예품인데도 세트인 29개의 그릇이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원래는 500개였다는데, 아무튼 이 그릇들을 포개어 놔도 딱 맞을 정도로 그 정교함이 대단하다고. 훗날 조선 숙종이 똑같은 그릇을 만들려고 하였으나 실패하고는 "능히 볼 수는 있어도 이치를 알기 어렵다"(보기에는 쉬워보이는데 만들기는 어려운)고 해서 능견난사라고 하였다. 1972년 1월 29일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9호로 지정되었다.[12] 똑같은 모양의 향나무 2그루가 엿가락처럼 꼬여 가지가 모두 땅을 향하고 있다. 800년 전에 보조국사 지눌이 꽂은 지팡이로부터 자랐다고 전한다. 일종의 고승-절-지팡이 클리셰긴 하지만. 쌍향수는 천연기념물 제88호로 지정되어 있다. 부석사에도 비슷한 나무가 존재한다.[13] 삼보(三寶)란 불교에서 불(佛), 법(法), 승(僧)을 뜻하는 것[14] 법정 스님도 이곳에서 기거하셨고 때문에 다비식도 이곳에서 거행했다.[15] 송광사의 중창조(重創祖)인 보조국사 지눌 본인의 소장품이다.[16] 고려 고종이 1216년 지눌의 뒤를 이어 조계종 제2조가 된 혜심에게 대선사(大禪師)의 칭호를 내린다는 내용의 임명장. 혜심고신제서라고도 불리며 대한민국 국보 제43호.[17] 도총섭이란 현재의 주지를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