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fff> 금호아시아나 초대 회장 박인천 朴仁天|Park In-chon | |
<colbgcolor=#454a51> 출생 | 1901년 8월 18일[1] |
전라남도 나주군 죽포면 동산부락 신기마을 (現 전라남도 나주시 다시면 신석리) | |
사망 | 1984년 6월 16일 (향년 82세) |
서울특별시 용산구 동빙고동 | |
국적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
본관 | 밀양 박씨 |
호 | 금호(錦湖) |
직업 | 기업인 |
학력 | 나주공립보통학교[2] (졸업) |
부모 | 아버지 박옥용 어머니 김현금 |
형제자매 | 형 박성천, 박일천 남동생 박동복 |
배우자 | 이순정 |
자녀 | 장남 박성용 장녀 박경애 차남 박정구 차녀 박강자 삼남 박삼구 사남 박찬구 삼녀 박현주 오남 박종구 |
종교 | 불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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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기업인. 금호아시아나 초대 회장. 호는 금호(錦湖). 그룹의 명칭은 바로 그의 아호에서 유래한 것이다.친일인명사전에는 수록되지 않았지만, 택시 회사를 설립하기 전 경찰 간부(경부)였기 때문에 친일반민족행위자 논란에서 자유롭지는 않다.
2. 생애
1901년 8월 18일 전라남도 나주군 죽포면 동산부락 신기마을(현 전라남도 나주시 다시면 신석리)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의 이름은 박재곤 (朴在坤) 이었다.# 서당을 다니다가 늦은 나이에 나주공립보통학교에 들어가 졸업했다. 보통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광주에 나와 목화 장사를 시작했으나 실패하였고 이어 잡화상을 시작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 뒤 목포와 광주 송정리에서 미곡상, 가마니 장사, 무명 장사를 차례로 했으나 모두 실패하였다.1922년 경성에서 장사를 했고, 오성강습소에서 5개월, 중동학교에서 3개월을 수학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후 장사를 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으나 별성과없이 이듬해 돌아왔다.
이후 장사를 접고 순사 시험 준비를 시작하여 1924년 순사 시험에 응시해 합격하였다. 일반 순사에 만족하지 못하고 보통문관시험에 도전해 5년 만인 1929년 합격했다. 합격 후 이순정과 결혼했고, 보통문관시험 합격으로 1930년 경찰 간부로 승진했다. 이후 승진을 거듭하여 순사부장을 거쳐 경부까지 진급했다.
하지만 8.15 광복 두달 전인 1945년 6월 우연한 일로 경찰에서 파면되고 말았다. 태평양 전쟁에서 연패하고 있는 일본군 기사를 읽다가 "이러다가 일본이 정말 패망하는거 아니야?"라고 혼잣말로 중얼거린 것을 일본인 형사가 우연히 듣고 상부에 보고하는 바람에 파면되고 만 것. 하지만 이렇게 파면된 덕분에 광복 후에 반민특위 처벌 대상에서 제외되는 행운을 얻었다. 일제강점기에 경찰직을 역임한 사람은 반민 특위에서 최우선 처벌 대상이었고, 줄줄이 재판을 받고 교도소로 갔었다. 특히 박인천은 일반 순사도 아니고 간부였기 때문에 파면되지 않았다면 중형을 선고받았을 운명이었다. 훗날 박인천은 "일정 시절에 경찰에서 파면된 덕분에 광주고속을 시작할 수 있었다"고 회고한 바 있다. 반민 특위에 잡혀들어갔었더라면 평생 광주고속을 시작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광복 후 박인천은 전라남도 강진 유지였던 유재의 선생과 순사 시절 친분을 쌓아둔 지주들에게[3] 돈을 빌려 1946년 4월 1935년식 포드 디럭스 세단과 1933년식 내쉬를 구입하여 택시 사업을 시작했다. 광주택시 개업 시점 부터 수요가 밀려들기 시작해 당시 광주 부유층 사이에서 혼인날에 신랑, 신부들이 광주 시내를 일주하는게 풍속도가 되었다. 1948년 11에는 2개 노선(광주시-장성군[4], 광주시-담양군)[5]의 면허를 얻어 시외버스 운수업을 시작하였다. 하지만 6.25 전쟁이 발발하자 당시 운용하던 버스들이 군에 징발되거나 인민군의 폭격에 의해 파괴되었고, 박인천 회장 또한 인민군들로부터 사로잡혀 총살형을 선고받는 등 본인으로서나 회사로서나 큰 위기를 맞이하였다. 가까스로 감옥에서 탈옥한 박인천 회장은 그 해 10월 광주가 수복되자 전쟁통에서 생존하여 복직한 직원들과 힘을 합쳐 버스 잔해를 주워 모아 버스 2대를 재조립하여 장성-담양 간 노선을 재개했다. 이후 목탄차를 휘발유차로 바꾸고, 고유가 행진에 대비하여 다시 일본산 디젤엔진을 수입 장착해 사업은 급성장했다. 1970년 경부고속도로와 호남고속도로가 건설되자 장거리 고속버스 사업에 뛰어들어 '광주고속(現. 금호고속)'으로 규모를 확장시켰다.
호남고속도로가 개통된 1971년 당시 처음에는 대한민국재향군인회 및 군 간부 출신 인사들을 앞세워 설립된 중앙고속이 처음에 서울 및 호남 노선에서 강세를 보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광주고속이 호남-서울 노선의 1인자로 부상하면서 전체 고속버스 시장을 금호고속(당시엔 광주고속)과 중앙고속이 양분하게 되었다.
당시 중앙고속이 운용하던 버스들은 미국 대륙을 횡단하던 그레이하운드사의 버스들이라 좌석이 더 넓었으며[6], 비록 중고였을지언정 매우 튼튼했다고 한다. 광주고속은 버스 성능면에서는 열세였기 때문에, 속도를 강조하는 대신 고객의 안전을 위해 서행한다는 문구를 내세웠다. 그 대신 거친 도로를[7] 달린 자사 버스들을 "어떻게 해서든 그 다음날 아침 전까지 정비를 완료"해서 다음날 투입하는 방식으로 버스 운영 회전률을 최대한 유지하거나 늘려나가며, 시장을 잠식해 나간다.[8] 그래서인지 광주고속의 로고도 성실함과 안전을 강조하는 거북이었다. 다른 버스 회사들이 번개, 유니콘, 독수리, 사자, 표범 등 속도를 강조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게다가 '광주고속'이라는 상호 덕분에 호남 사람들의 지지와 성원을 받으며 지역에서 경쟁우위를 보인데다, 당시 서울로 상경한 호남 주민들을 단골 고객으로 끌어들인 호재에 힘입어, 광주고속은 대기업으로 성장하는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9] 당시 광주 시민들은 다른 회사 고속버스를 곧바로 타고 갈 수도 있었지만 굳이 30~40분씩 기다려 가면서 광주고속을 이용하는 등 믿기 어려울 정도의 엄청난 충성도를 보여주며 향토 기업을 응원했다.
한편 박인천은 운송업에 이어 1950년대 생사(生絲)업 (전남도시제사), 1960년대 타이어 제조업(금호타이어)과 건설업(금호건설), 1970년대 석유화학(금호석유화학), 가전(금호전자), 조명 (금호전기), 무역(금호실업), 윤활유 (모빌코리아윤활유) 등으로 사업분야를 다각화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금호건설은 60~70년대 내내 자리 잡지 못하며 오랜 적자로 그룹 전체에 부담을 주다가 장남 박성용 대에 비로소 자리를 잡게 되었고 가전 부문은 크게 재미를 보지 못하여 손을 뗐으며, 모빌코리아윤활유와 금호전기는 1984년 박동복 부회장이 경영권을 가져가 따로 독립하였다. 삼양타이어(現 금호타이어)는 장조카 박상구[10]의 수완에 힘입어 당대에 시장의 강자 지위를 획득할 수 있었다고 한다.
1984년 6월 16일 숙환으로 사망했다. 사망 후 장남 박성용이 그룹 회장직을 이어받았다. 박성용은 회장직을 맡자마자 부실했던 금호건설을 당시 잘나가던 광주고속과 합병하는 특단의 조치를 취해 건설업 적자를 만회했으며[11], 금호타이어와 금호석유화학을 각각 세계 10위권 내의 메이저 회사로 성장시켰고, 올림픽 개최를 앞두고 제2민항사로 선정된 아시아나항공을 취항하는 대형 호재를 맞이하는데 성공, 항공업에 이어 레저 사업에도 진출하는 등 회사가 제2의 도약을 이루게 되었다.[12]
이후 1996년 차남 박정구가 그룹 회장직을 이어 받아 금호고속, 금호타이어, 아시아나항공을 국내 업체 최초로 중국 시장에 진출, 금호렌터카를 국내 최대의 렌터카 업체로 성장 시키는 등 '비전 경영'을 내세우며 기존 사업을 통폐합하는 등 내실을 다져 금호그룹이 재계 순위 10위권에 진입하는 결실을 맺었다. 2002년 박정구 회장의 사망 후
3. 여담
- 박인천 회장은 1952년 10월 광주상공회의소 회장으로 피선된 후 1976년까지 회장직을 맡았으며, 지금과 달리 상당히 낙후되었던 광주와 전남을 위한 지역 발전을 위해 전라남도 물산공진회, 전남 특산품 선전직매회, 전라남도 산업전람회 등을 개최한 바 있으며, 호남선 급행열차 운행과 객차 증설, 화물열차 신설, 철도 복선화 등 호남지역 사람들의 오랜 숙원을 이루어 내는데 상당한 노력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1969년 호남고속도로 건설 과정에서 광주 구간을 포함시키도록 정부에 요청, 호남비료공장 (현 LG화학 나주공장) 건설을 추진하고, 아시아자동차 (현 기아 AutoLand 광주) 공장과 첨단지구 건설 등을 주도하는 지역경제 발전에 상당한 힘을 써왔다. 택시영업으로 시작해서 재계순위까지 오른 그의 업적을 기려 훗날 광주광역시 서구 농성동에 위치한 광주상공회의소의 1층 로비에 그의 흉상이 세워졌다.
- 이어 박인천 회장은 광주/전남 지역경제 발전을 위해 꼭 설립하려 한 것이 은행이었으며 결국 1968년 11월 한국 지방 은행으로서는 네 번째로 광주은행을 설립하는 성과를 이루었다.
- 박인천 회장의 지역 사랑은 기업 활동에서도 드러나는데, 광주고속은 1970년대부터 전국을 누비는 운송사가 되었지만, 사명에 '광주'가 들어간 이유로 오늘날에 비해 지역감정이 극심하던 당시에 광주/전남/전북 이외의 지역에서는 광주고속을 꺼리는 경향이 심했다. 때문에 상호를 바꾸어 전국적인 업체로 이미지를 바꾸자는 임직원들의 제안에도 불구하고 그는 회사의 뿌리가 광주라며 사명교체에 반대해왔다. 그러면서 승객 수요가 많은 경부선 보다 호남선에 우선적으로 상태가 좋은 버스를 우선 투입하였고, 서울-광주 간의 호남선을 증차시키기 위해 서울-포항을 잇는 황금노선을 한진고속에 넘기기도 했다. 회사의 이익보다는 고향 사람들의 편의가 우선이라는 것이었다. 또한 1959년 무등산 개발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무등산을 관광지로 지정받도록 했고, 사재를 출연해 광주국악원 재건에 나서 1974년 광주시립국악원을 출범시켰다. 1978년에는 전남 승주군 (현 순천시 승주읍)에 의료법인 송광의원[14]을 설립하여 농어촌 주민들에게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였다.
- 금호타이어와 금호석유화학 등의 설립 일화가 매우 재미있는데, 박인천 회장이 타이어 사업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바로 장거리 노선을 운행하는 버스에는 타이어가 상당히 중요한 부품이기도 하고 당시 국내 타이어 제조사는 한국, 흥아, 동신이 양분하고 있었는데, 생산량이 수요의 30%에도 미치지 못할 정도로 타이어 수급이 매우 딸린 환경이었으며, 외산 타이어 구입을 상당한 비용 때문에 꿈도 못꿀 상황이었다. 때문에 웬만한 고속버스 운송업체들은 불법으로 유통되는 군용 타이어에 의존하기도 했었다. 당시 100대 이상의 버스를 운용하던 광주고속의 운행에 있어 양질의 타이어 확보에 어려움을 겪자 박인천 회장은 "이참에 제대로 된 타이어를 만들어보자"며 승용차 타이어 및 광주고속에 쓰일 타이어 수요를 염두에 두어 당시 사명인 삼양타이어가 설립되었다.[15] 그러나 초기 타이어 제조 기술과 노하우 모든 면에서 부족한 상황에서 생산한 타이어의 품질은 '호박 타이어'라는 오명을 얻을 정도로 조악했었고 10여년 간 적자가 누적되자 임원들이 폐업 또는 매각을 권했으나 박인천은 미국의 유니로얄, 모호크 등의 선진 기술을 도입하여 오히려 타이어 사업을 키워나갔다. 타이어의 주원료인 천연고무와 합성고무는 국내의 열악한 사정상 해외에서 전량 수입하여 충당할 수밖에 없었는데, 박인천 회장이 3남 박삼구의 건의를 받아들여 1970년 금호석유화학의 전신인 '한국합성고무 주식회사'를 일본 JSR과 지분 50대 50의 합작 설립하여 합성고무 제조사업 참여를 결심하고, 1967년 7월 15일 합성고무공장 건설과 운영을 위한 우선 사업자로 계열사였던 삼양타이어가 선정되어, 한국합성고무의 설립에 이른 것이다.
- 광주광역시 금남로에 자택이 남아 있다.[16] 넓은 마당과 본채, 사랑채 등 박인천 회장이 생전 거주했던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데 높은빌딩이 가득한 도심 한가운데에 단독주택으로 쓰기엔 어마어마한 크기의 땅[17]이라 수십년째 광주 개별주택가격 1위에 오르던 곳이다. 박인천 회장 사후에도 아내인 이순정 [18]이 계속 생활하다가 2010년 사망한 뒤엔 금호문화재단에서 관리하고 있다. 그러다 2018년 10월 이 곳을 '금호시민문화관'으로 명명하고 공원 겸 갤러리 형태로 자택을 시민들에게 개방하고 있다. 이중에 1958년에 양옥형태로 건축된 사랑채의 경우 근대건축물로서 인정받아 문화재 등록이 되었다고 한다.
- 1977년 재단법인 금호문화재단을 설립하고 초대 이사장에 취임하였다. 재단 설립 초기시절엔 장학사업부터 광주·전남의 향토 문화예술을 지원하는 것으로 시작하였다. 의재 허백련, 소전 손재형, 국창 임방울과 같은 인물들을 지원을 많이 해준 것으로 알려졌다.
- 금호고속의 허브인 광주 유스퀘어 1층 로비에는 박인천 회장이 처음 택시 사업을 할 때 사용한 차량 모델인 포드 디럭스 세단(1935년형)이 전시되어 있다.
4. 어록
신의, 성실, 근면
금호 박인천의 생애 좌우명
금호 박인천의 생애 좌우명
가장 확실한 밑천은 집념의 정신이다.
정직, 근면, 성실만이 살 길이다. 기업을 맡은 사람은 직장에 대해 근면하고 성실하며, 절대 거짓말을 해서는 안된다.
나는 내 재산이 얼마나 되는지 한번도 관심을 가진 적이 없다. 필요없는 땅 한조각 갖지 않았다. 그저 기업을 일으키고 키워나가는 재미로 살았다.
손님이 막차를 놓치거나 정기시간을 놓쳐 당황할 때 차가 여유가 있으면 임시차라도 내서 그 손님의 불편을 빨리 도와드려라.
그때가 1946년 입니다. 그 당시의 교통이 아주 불편해 도대체 택시라는 것이 광주에 한 대가 없었어요. 그래서 시작한 것이 교통사업의 투신 동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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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상훈
- 제10회 수출의 날 석탑산업훈장 (1973)
- 제11회 수출의 날 철탑산업훈장 (1974)
- 제12회 수출의 날 석탑산업훈장 (1975)
- 금탑산업훈장 (1976)
6. 가족 관계
자세한 내용은 범금호가 문서 참고하십시오.7. 관련 문헌
- 택시 두 대에서 아시아나항공까지 박인천. 현대출판사. 2015.
- 이창동 장편소설 - 금호아시아나 창업주 박인천 일대기. 책만드는집. 2008.
- 아직 우리 곁에 남아 계십니다: 금호선생 탄신 100주년 추모문집 - 금호박인천선생기념사업회 편. 다지리. 2001.
[1] 링크[2] 現 나주초등학교[3] 특히 노름을 좋아했던 지주 김 씨와 젊은 시절부터 친분이 돈독했다고 한다.[4] 후에 광신고속 분사[5] 후에 동광고속 분사[6] 한국인보다 큰 미국인 체형에 맞는 좌석이었다.[7] 1990년대 들어 고속도로 구간 확장 후 1시간 생활권이 된 광주-광양 구간이 당시는 4시간 걸렸다.[8] 이와 같은 경향은 아시아나항공에서도 이어지는데 아시아나는 대형 항공사임에도 불구하고 저가항공처럼 항공편수 대비 적은 수의 항공기를 쉬지 않고 굴리며 수익을 짜내는 것으로 유명했다. 항공갤에서는 아시아나항공의 이런 운용을 마법 같다고 우회적으로 비판하면서 IATA 코드인 OZ와 엮어서 마법사라는 별명이 붙게 되었다.비행기는 지상에 세워두면 손해다.[9] 금호고속 외에 당시 강원, 경기 지역 노선에서 우위를 보인 동부고속도 고속버스 사업을 바탕으로 대기업으로 성장한 대표적인 사례다.[10] 부산저축은행 창업주. 성미가 급한 박인천 창업주를 보좌해, 구체적인 안을 만들고 성사시켰으며, 특히 삼양타이어를 성장시킨 1등공신이었다고 한다. 박인천 사후 금호타이어의 경영권을 상속받을 것으로 기대했지만, 박성용, 박정구 등의 반대에 부딪혀 뜻을 이루지 못하고, 금호그룹 계열사 지분을 매각해 그라인더 회사를 운영하다 부산-경남 지역에서 금융업을 하였다. 2019년 4월, 97세를 일기로 사망.[11] 이후로도 꽤 오랫동안 각각 금호산업 '건설사업부', '고속사업부'라는 이름으로 운영되었다가 2000년대 중반 분리되었다.[12] 때마침 건설 경기도 호황을 맞으면서 금호건설도 흑자로 돌아서게 되었다.[13] 본래 HDC 현대산업개발이 새 주인이 될 예정이었으나 이듬해에 터진 코로나19로 인해 아시아나항공의 부채가 천문학적으로 불어남과 더불어 전세계 항공산업의 붕괴로 인한 우려로 인수를 포기했으며, KDB산업은행의 주도하에 대한항공에 흡수합병 하는 걸로 상황이 급변했다.[14] 1988년 청산[15] '삼 三'은 박인천과 사업을 키운 동생 박동복, 조카 박상구의 세 사람을 뜻하는 것이고, '양 洋'은 오대양 육대주로 번창해 가자는 뜻을 담았다.[16] 나주에 있던 생가는 6.25 전쟁때 파괴되었다.[17] 대략 1,700평 정도된다.[18] 1910년생으로 2010년 5월 12일 향년 101세로 사망하였다. 생전에 큰아들과 둘째아들이 자신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는 비극을 겪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