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민족문제연구소라는 시민단체에서 발간한 대한민국의 일제강점기 당시 친일반민족행위자들에 관한 인명사전. 2009년 11월 8일 공개되었으며, 총 3권으로 이루어져있다. 민문연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에서 선정한 구한말 이래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친일 인물들의 구체적인 반민족행위와 해방 이후 주요행적 등이 기록되었다. 총 4,776여 명이 수록되었다.민간 단체에서 발간한 사전이므로 국가 기관인 대한민국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서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이나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보고서」와는 다르므로 유의하여야 한다.[1]
2. 편찬 과정
친일인명사전의 편찬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2001년부터였다. 친일문제 연구에 평생을 바친 재야사학자 임종국의 뜻을 이어 1991년에 설립된 민족문제연구소는 이후 10년간 사전 발간을 위한 사전 준비 작업을 해왔고, 마침내 2001년 120여 명의 학자들로 구성된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를 발족하면서 본격적인 사전 제작에 착수했다.8년에 걸친 제작기간 동안 친일인명사전은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는데, 2004년에는 여야의 정치 투쟁 도구로 이용되는 바람에 대한민국 국회에서 민족문제연구소의 예산을 전액 삭감한 적도 있었다. 이를 알고 분노한 네티즌들이 국회 예산보다 더 많은 성금을 모아 전달하기도 했다.
2008년 4월 29일에는 발간에 앞서 친일인명사전의 수록대상자 명단을 발표하고 기자회견을 가졌다. 발표된 명단은 큰 논란을 야기했고, 편찬위원회는 5월부터 7월까지 2달간 이의신청을 접수하고, 이후 지속적인 논의 끝에 최종명단을 확정하고, 2009년 11월 8일에 완성된 사전을 공개했다. 숙대에서 발간 국민보고대회가 개최될 예정이었으나 대관이 취소되어 대신 서울특별시 용산구 효창동 백범김구기념관에서 개최되었다.
3.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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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논란
친일인명사전은 제작 전부터 많은 논란을 불러왔다. 제작 이후에도 인명에 대한 형평성이나 당시 사정을 감안하지 않았다는 비판이 있었다.4.1. 인물 선정에 관한 논쟁
친일파인지 아닌지에 대한 판단은 정치적인 문제인 관계로 친일인명사전의 인물 선정에 대해 많은 논란이 있었다. 특히 친일 경력이 불확실하거나[2] 독립유공자로 지정된 인물의 수록 여부를 두고 말이 많았는데, 특히 문제로 희비가 엇갈린 인물이 대한민국 국무총리를 지냈던 신현확, 대한민국 정치인 최근우와 언론인 장지연, 김성수 등이었다.열린우리당 의장을 맡았던 신기남 의원의 아버지 신상묵의 경우 명확한 친일 행적이 확인됨에도 실리지 않아 논란이 되었다. 결국 지속적인 요구에 2009년 11월 늦게 등재되었다.
신현확 전 국무총리[3]의 경우, 일제강점기 말기에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하여 고등관으로 근무하면서 전시 군수물자를 관리했다는 자료를 근거로 원래 명단에 포함됐으나 유족 측은 "신 전 총리가 일제의 근무명령에 따르지 않고 근무지를 이탈해 수배를 받았다"며 이의를 제기, 연구소 측이 이를 받아들였다. 연구소 관계자는 "조사 결과 일본 국립공문서관에서 `1945년 7월 (신 전 총리에게) 고등관 승서(陞敍)와 동시에 일본 동북지방 군수감리국 파견을 명하였는데 직후 무단결근했으며 조선으로 돌아간 것으로 추정된다'는 요지의 1946년 9월5일자 내각 기록을 찾아냈다"고 전했다.출처
정치인 최근우[4]의 경우 일제강점기 말기 중국 펑톈(奉天)성 안둥(安東)현 민정청 사무관과 관변 단체인 오족협화회의 안둥현 사무총장을 지낸 전력으로 처음에 명단에 수록되었으나, 실제로는 여운형과 조동호의 주도하에 결성된 건국동맹에 참여하는 등 비밀리에 독립운동을 벌여 온 것으로 확인되어 제외되었다. # 여기에 더하여, 민족문제연구소가 유지를 이은 임종국을 비롯한 여러 독립운동가들이 친일의혹을 제기한 이갑성도 최종적으로 반박되어 빠졌다.[5]
언론인으로 동아일보 사장이었던 김성수 역시 논란이 많았다. 논란이 되는 부분이 있긴 있지만, 그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독립운동 지원과 건국을 위해 많은 일을 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김대중 전 대통령은 생전에 김성수는 친일파가 아니라고 이야기했으며, 강원용 목사도 김성수를 친일파로 규정하면 일제강점기 당시 살던 지식인은 전부 친일파가 된다고 비난했다. 김수환 추기경 또한 같은 입장을 표명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변호에도 불구 김성수는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발간한 친일인명사전 뿐만 아닌 국가기관 친일진상규명위와 재판부에서도 '사실에 부합하는게 많다.'면서 김성수의 몇몇 행보를 친일 행적으로 인정하였다.[6][7]
2010년 12월 10일, 국가보훈처에서 친일 경력이 있는 건국훈장 추서자 19명을 서훈 취소 결정을 내렸다. #[8] 김성수 경우는 당시 인촌기념사업회에서 법정 소송을 냈다.[9] 김성수 관련건은 향후 판정이 나는데로 결정날 듯싶다. 일단 2011년 1심 지방법원과 2016년 고등법원은 김성수가 친일이 맞다고 판결을 내렸다.고등법원 판결 기사 이후 2017년 대법원에서 김성수는 친일이 맞다는 판결이 확정되었다. # 이에 따라 2018년 국무회의를 거쳐 김성수의 수훈이 취소되었다.
인물 선정 기준에 대해서도 말이 많았는데, 편찬위원회가 예술가들과 종교 인사들의 자발적 친일과 강압에 의한 친일을 나누는 것이 작위적이고 모호하다는 주장이 많았다. 왜냐하면 중일전쟁 발발 이후 터진 수양동우회 사건과 흥업구락부 사건 때문이다. 당시 감옥에 갇혔던 정치범(독립운동가)이 석방되기 위해선 총독부 당국에서 일괄적으로 요구하는 '전향서'를 꼭 써야 출옥할 수 있었다. '전향서'를 안 쓰면 절대 내보내주지 않았다. 때문에 일제강점기 말기에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잡힌 많은 예술가들이 출옥하기 위해 전향서를 써야 했으며, 감옥에서 출옥해도 무슨 시국강연이나 어용단체에 들지 않으면 취직할 곳도, 글을 발표할 곳도 없어 극심한 생활고에 빠져야만 했다. 이광수나 주요한 같은 자발적인 변절자도 많았지만,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전향서를 쓰는 이가 급격히 늘어났던 시기였다. 때문에 이 두 사건이 한국독립운동사에 있어서 최악의 흑역사라 불리는 건 그만한 이유가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전향 과정에 대한 논란이 많은 홍난파와 노기남 대주교, 장면 총리[10]. 노기남 대주교와 장면 총리의 경우는 김수환 추기경이 직접 나서서 "그분들은 한국 천주교회를 어떻게든 지키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한 측면이 많기 때문에 이분들을 친일로 규정하기에는 문제가 많다."라고 언급한 바 있으며,[11]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부인인 이희호 여사의 경우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기준이 다소 모호하다는 점을 들어 판단하기가 어려움을 내비치기도 했다.[12]
유명 작곡가 홍난파의 경우는 공개적으로 전향서를 썼다는점 등이 큰 논란이었는데, 실제로 그는 당시 병세가 매우 악화되어 있던 시기인 데다 과거 일본기관에 고문을 당한적도 있고, 딸의 증언에서도 나오듯이 생존에 직결된 문제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의견이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일인명사전에서는 그대로 실렸지만, 국가기관인 친일진상규명위에서는 홍난파가 '자발적 전향자인지 여부는 좀 더 확인해야한다'고 일단 보류하고 명단에서 제외되었으나, 2010년 11월 초, 홍난파 후손들이 돌연 행정소송 전격 취소를 해버려서 다시 등재되었다. # 그 밖에 예술가들과 종교 인사들 가운데 논란이 많고, 여러 면에서 봤을 때 이 문제는 앞으로도 논의해야 할 게 많다.
열린우리당 의장이었던 신기남의 경우, 아버지가 일본 제국 육군 헌병 오장 출신이라는 게 밝혀져서 선친이 고문한 독립유공자에게 사죄를 하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 신기남 부친은 현재 친일인명사전 명단과 대통령직속 친일진상규명위 조사보고서에 각각 수록되어있다.
형평성과 관련해서 조선 왕족들이 포함되지 않았다는 지적도 있다. 대표적으로 일본군에서 육군 중장까지 지낸 영친왕과 이우 같은 사례도 있다. 이에 대해 민족문제연구소 측의 입장은 '왕실, 공족 등에 대해서 수록해야 하느냐는 문제에 대해 많이 고심했었다고 한다. 고심한 끝에 '왕실, 공족 등 역시 결코 책임으로 부터 가벼울 수 없지만, 친일적 문제보다는 망국에 대한 정치적, 도의적 책임을 묻는 것이 나을 것이라고 판단했다.'고 한다. 실제로 영친왕이 중장까지 지낸 것도 정치적인 의도 등이 있기도 했고.
다만, 고종의 형 이재면이나 흥선대원군의 손자 이준용, 이재극 등 기준에 부합하는 적극적이고 구체적인 친일행위가 있는 자들은 수록 대상자로 선정했다. 왕, 공족은 대한제국 황실을 예우하기 위해 일제가 고안한 일본 황족과 일본화족, 조선귀족 사이의 특수한 지위로 협력에 대한 대가였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기 때문이다. 공족 중 이재면과 이준용, 이지용 등은 아예 나라 자체를 팔아먹은 매국노이자 구체적인 친일행적자이기 때문에 사전에 수록되었으나, 영친왕과 이우는 사실상 볼모였음을 감안하여 제외되었다.
또한 일부 악질 친일파들이 빠졌다는 지적도 있는데, 대표적으로 만주에서 일제 관동군 밀정으로 활동해서 독립운동가 250명을 때려잡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반민특위를 '망민법'이라고 비난했던 이종형, 암태도 소작쟁의 당시 악덕 지주인 문재철 같은 사람이 대표적이다. 연구소 측에 의하면 '이종형 등 일부 악질 친일파들이 빠진 이유는 출신이 명확하지 않아 현재 보류 명단에 있다.'고 밝혔다. 이는 후속 연구에서 보완해야 할 것이다.[13]
그 외에 한때 친일 활동을 하다가 그만두거나 반일로 전향한 사람도 등재되지 않은 경우가 있다. 자작 작위를 받아 조선귀족이 되었으나 포기하고 일가족이 망명해 독립운동을 한 김가진이나, 마찬가지로 소극적 친일을 하며 자작을 받았다가 3.1 운동에 충격을 받고 전향한 김윤식, 일본인의 정체성으로 살고자 어느 일본인에 입적했지만 한글 편지 사건이 일어나 한인애국단의 일원으로 의거를 일으킨 이봉창 등이 대표적인 경우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김가진의 경우는 친일 행적이 작위 받았다는 것 외에는 없고 그나마도 금세 탈주해서 친일이라고 하기도 어렵거니와, 무엇보다 선친일 후항일은 친일로 인정하지 않고, 선항일 후친일은 친일로 인정하는 것이 친일파를 가르는 가장 명백한 논리이다. 김가진 같은 사례는 등재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등재되면 안 된다. 애당초 메이저급 독립운동가로만 알려져 있어서 그 전의 친일적 행동을 했던 것으로 드러난 이봉창도 마찬가지다. 친일 활동을 하다가 아무런 활동도 하지 않고 은거한 사례라면 차라리 애매하겠지만.[14]
4.2. 편찬 주체와 방향에 대한 논쟁
4.2.1. 편찬위원회에 대한 긍정론
비판측은 민족문제연구 소장인 임준열(임헌영)의 과거 행적을 빌미로 '편찬위원회의 학문적 중립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임준열(임헌영)은 제4공화국 유신 정권 말기에 남조선민족해방전선(약칭 남민전)이라는 지하 반체제 조직에서 활동했던 인물로, 극우 쪽에서는 '이런 사람이 소장으로 있는 단체에서 공정성을 가지고 집필하기에는 상당한 문제가 있다.'고 제기한다. 그러나 남민전은 참여정부 시절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진상규명을 통해서 민주화운동 단체로 인정되었으며, 임헌영을 포함한 남민전 사건 관련자 29명은 참여정부 시절 민주화운동보상심의회에서 민주화운동자로 인정받았다. 일반적으로 학계와 언론에서도 남민전을 구 혁신계의 반독재민주화 투쟁의 일환으로 평가하고 있다.[15] 참고로 당시 남민전 조직원에는 이재오 한나라당 전 국회의원, 김남주 시인, 홍세화 저술가 등이 있었다.[16]거기에 실제 사전에는 임준열의 대학시절 '정신적으로 크게 영향끼친' 교수였던 백철을 과감히 수록한 것을 보면 학문적 중립성을 문제 삼는 시각은 설득력이 낮다. 여기에 친일인명사전 편찬의 선구자였던 임종국의 부친 역시 과감히 수록한 것을 보면, 일부 극우세력들의 주장은 정말 설득력이 없다.
또한, 편찬위원회의 구성원들은 대부분 역사학계에서 활동하는 학계 사람들이나 국정교과서 집필진, 국사편찬위원회, 역사문제연구소 등 각 분야에서 인정받는 사람들이기에, 학문적 전문성은 높은 편이다. 심지어는 오영섭 교수와 이명화 독립기념관 연구원처럼 보수로 분류되는 학자들도 사전편찬에 참여했었다. 여기에 한국교육과정평가원 국사, 근현대사 부분에서 출제위원으로 활동하거나 깊게 관여된 학자도 포함되어 있다.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장은 윤경로인데, 윤경로는 한성대학교 총장을 지내고 있으며, 경실련 중앙위원회 의장을 지낸 인사다. 그리고, 친일인명사전 편찬 발간에 가장 힘쓴 사람은 임준열(임헌영)소장이 아닌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을 맡았던 부민관 의거 주역이자 독립운동가 조문기가 포함되어 있었다. #[17]
4.2.2. 편찬위원회에 대한 부정론
하지만 남조선 민족해방전선이 반체제 혐의를 벗엇다고 해서 그것이 "극좌"가 아니라고 할수는 없기 때문에 편찬위의 학문적 중립성에 대한 의문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민주화단체로 인정받았다고 해도 "민주화 단체"의 사상적 스펙트럼은 천차만별일 수밖에 없고 민주화단체로 인정받았다고 남민전이 중립, 온건파가 되는 것은 아니다. 위 글의 논지는 민주화단체로 인정받았으니 학문적 중립성을 가지고 있다는 논지인데 그 단체가 민주화단체로 인정받았다는 사실 자체는 학문적 중립성과 별 연관관계가 없다. 민주화 인정 자체가 심하게 북한과 연계되지 않은 이상은 설사 북한에 대해 찬동적인 모습을 보였다 해도 당시 전두환 정부로 인해 북한을 이상화하는 기류 자체는 어쩔수 없는 측면도 있다고 보기 때문에 심각한 반체제행위가 아닌 이상은 명예를 복권해주는 것이고 이렇게 "반체제"의혹을 벗는 것은 사상적으로 중립인지 아닌지는 판단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단순히 민주화 보상심의에서 민주화 인정을 받았다고 남민전 자체가 학문적으로 편향되지 않았다고 볼 수는 없다.백철 교수에 관한 부분 역시 자신의 정신적 스승마저 친일파로 올렸다고 하면 심사위원들이 엄격한 잣대로 판단을 했다는 근거는 될 수 있겠지만, 그 "잣대"가 옳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학문적 중립성과는 상관없다. 실제로 역사에서도 보면 일관되지 않은 잣대로 심사하는 건 더 말할 것도 없이 문제지만 엄격한 잣대로 심사를 해도 답이 없는 경우도 많다. 올리버 크롬웰이나 루터 같은 경우는 오히려 잣대 자체가 틀려먹었는데 그걸 엄격하게 적용해서 망한 케이스다. 오히려 판단을 하는 "잣대" 자체가 문제일 경우는 잣대를 지키는 데 엄격한 것이 오히려 더 부정적인 효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따라서 남민전(민문연)이 역사를 보는 사관 자체가 어떤지 그리고 임헌영 소장이 지금도 그런 관점을 유지하고 있는지에 대한 고려도 함께 해야 한다.
따라서 이 두 반박을 요약하면 위글에서 제시한 두 글 모두 다 학문적 중립성에 대해 제대로 이해를 못 하고 잘못된 근거를 제시하고 있으며 민문연이 학문적으로 중립이다라는 근거로는 부적절하다.
또한 민족문제연구소 자체의 문제가 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연구소라는 간판을 달고 있지만, 실제 학계에서 인정받는 연구실적은 거의 없다. 오히려 몇몇 자료과 출처가 의심스러운 증언 몇가지로 특정 인물이나 단체를 친일파로 단정짓다가, 역풍을 맞은 사례들이 여럿 존재한다. 학술연구는 모두 교차검증을 통과해야 하며, 모두가 민감하게 여기는 친일파 연구라면 그 과정을 더더욱 엄격하게 해야 하는데 민족문제연구소는 부실한 검증으로 여러차례 문제를 일으킨 적이 있다.
오히려 학문적인 연구보다는 대외적인 프로파간다에 집중하는 듯한 행태를 자주 보여왔기 때문에, 이들이 일정한 정치적인 목적을 가지고 활동하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을 많이 불러 일으킨다. 일관된 반일 행적을 보여준 이승만을 골수 친일파로 묘사한 '역사다큐 백년전쟁' 같은 영상을 만들어 방영한 적도 있다. 이 때문에 소위 진보/개혁 진영에서도 민족문제연구소는 사실상 정치운동단체라고 보는 사람들이 많다. 상기한 부실한 검증도 이런 프로파간다의 일환으로 일단 터트리고 보자는 식 아니냐는 비판이다. 이 때문에 친일인명사전 편찬에 외부의 전문연구자들이 참여했다고 해도, 여러 가지 의심을 받는 것이다.
4.2.3. '정부 수립 인사들 및 대한민국 정통성 폄훼' 논란
일부에서는 친일인명사전이 '대한민국 건국세력을 폄하했다'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 대한민국 초대 내각 구성원들의 면면을 보면 오히려 독립운동가들이 주축이 되어 건설된 정부임을 알 수 있다. 초대 내각 구성원 명단은 다음과 같다.- 대통령 - 이승만 - 독립운동가[18]
- 부통령 - 이시영 - 독립운동가 (임시정부 재무총장)
- 국무총리 - 이범석 - 독립운동가 (광복군 참모장)
- 내무부 장관 - 윤치영 - 친일반민족행위자[19]
- 외무부 장관 - 장택상 - 독립운동가[20]
- 국방부 장관 - 신성모, 이범석, 손원일 - 독립운동가
- 재무부 장관 - 김도연 - 독립운동가
- 상공부 장관 - 임영신 - 독립운동가, 중앙대학교 창립자,
친일반민족행위자[21] - 문교부 장관 - 안호상 - 독립운동가, 철학 박사
- 법무부 장관 - 이인 - 독립운동가, 법조인
- 사회부 장관 - 전진한 - 독립운동가, 노동운동가
- 농림부 장관 - 조봉암 - 독립운동가
- 교통부 장관 - 민희식 - 교통전문가
- 체신부 장관 - 윤석구 - 한의사, 예수교 장로
- 무임소 장관 - 지청천 - 독립운동가 (광복군 사령관)
- 초대 헌병 사령관, 초대 병무국장 - 장흥(인명) - 광복군
이상 초대 내각 명단을 보면 친일파 전력이 있는자들이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만든 주인공이 결코 아님을 알 수 있다.
4.3. 일부 미등재된 인물에 대한 반박
- 일부 세력에서는 '좌익계열 친일파는 빠졌다!'라면서 형평성,공정성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데, 이들은 여운형, 허헌, 안재홍, 김약수, 홍명희, 한용운 등을 제기하고 있는데, 이들 중 안재홍은 '순정우파'라 자부하면서 다녔던 진퉁 보수 우파이다.[22]
- 여운형의 경우 일제 말기 총독부 어용기관지 경성일보에 학병을 권유하는 기고문이 3일 연달아서 장문의 기사로 그의 명의로 연재되었다는것이 의혹이 제기되어 일부에게 의혹을 샀으나, 편찬위원회는 '1942년~1945년 동안 일제 패망을 대비하고 건국동맹이라는 독립운동 단체를 결성해 주도해나아갔으며, 상황 앞뒤 판단으로 미루어 볼 때 그 증거가 부족하고 자료의 신뢰성이 부족하다.'고 반박하여 기각했다. 여운형의 친일 논란과 관련된 자세한 내용은 참고. 한가지 덧붙여 해방정국 시기, 경성일보 기자 출신인 사람이 자신의 출신지인 부산 지역신문 일간지에다가 여운형과 일본인 기자가 만나는 자리에 자신도 있었고, 여운형의 학도병 권유 기고문이 어떻게 조작되었는지 과정 등 직접 증언한 신문기사가 있다. # 그리고 여운형은 조동호와 함께 일제말기 유일한 독립운동 단체인 조선건국동맹을 결성하고 일제패망에 대비했다는 점 등이 있기 때문에 친일논란은 크게 입씨름하지 않아도 쉽게 결론지을 수 있다.
- 허헌은 일제강점기에 김병로, 이인과 함께 독립운동가들을 변호하는 3대 인권변호사로 유명했는데, 1940년대초 일제 어용단체에 그의 명의가 있다는것을 근거로 들고 있다. 그러나 허헌은 1943년 단파방송 밀청사건에 연루되어 일제에 체포되어 가혹한 고문 후에 2년 동안 감옥에 수감돼 있다가 극도로 건강이 악화돼서 1945년 4월 병보석으로 출감했다.[23] 이런 점을 미루어 볼 때 그가 전향해서 총독부에 협력했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다.
- 이극로에 대해 친일의혹 제기하는 것은 허헌과 마찬가지로 어용단체에 그의 명의가 있다는 것#인데, 이극로는 한글학자로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에 연루되어[24] 해방을 맞을 때까지 감옥에서 고문당하면서 지냈었다. 이극로는 조선어학회사건에 연루된 인물들 가운데 최현배와 더불어 가장 높은 형량을 받았다.[25] 수감 도중에 8.15 광복을 맞아 최현배와 함께 석방된 이런 인물이 '친일파'라는것은 앞뒤 자체가 맞지 않다. 더구나 이극로는 1945년 8월 17일이 돼서야 출소했다. 당시 이극로의 출옥 광경을 직접 목격한 사람도 있다. 상당히 처참한 모습으로 출옥했다고 한다.
- 안재홍[26], 홍명희, 한용운, 김약수 등 이런 자들 역시 마찬가지로 무슨 어용신문(경성일보나 매일신보)지에 내선일체 찬양기사 명의로 기고되거나 어용단체에 명의가 있다는 것을 근거로 제기하고 있는데, 이들은 일제로부터 어떠한 협력한 대가나 작위를 받지도 않았을 뿐더러 일제말기 국내에서 유일하게 변절하지 않고 끝까지 자신들의 지조를 지킨 자들이었다. 국내에 민족주의 우파가 있느냐라는 말에 몇 안 되게 언급되는 인물들이 바로 여기서 언급되는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을 변절은 차처하고 좌익이라고 주장하면 국내에 있던 우파 민족주의자가 남아나질 않는다.
- 실제로 친일인명사전 내용을 면밀히 보면 1920~30년대 사회주의/좌익계열에서 활동하다가 친일파로 변절한 인물들도 다수 포함돼있다. 김한경, 안준, 강영석[27], 주련, 인정식[28], 차재정, 박영희[29], 김기진, 백철, 신태악[30], 홍양명[31] 등이 대표적이다.
- 해방 이후 북한에서 애국열사릉에 묻힐 정도의 예우를 받은 고위급 인물들도 여럿 수록되어 있는데 대표적으로 김정제, 이종만, 이찬 등이 있다. 특히 이종만은 북한에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직을 지냈고, 애국열사릉에 묻혔던 거물급 인사였다.
- 친북계열 연극 배우인 심영, 문예봉, 황철 등 북한에서 유명한 공훈배우들 가운데 친일협력 경력이 있는 자들은 등재되어 있다. 특히 황철의 경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과 교육문화성 부상을 지내고 공훈 인민배우 칭호를 받은등 북한에서 김일성으로부터 많은 신임을 받았던 인물이었다. 즉, 수록자들 명단을 자세히 보면 친북인사들도 다수 수록되어 있다.[32] 즉 친일인명사전이 일부의 주장처럼 민족주의/우익 계열 출신 친일파들만 수록하고 사회주의/좌익 경력자들은 고의적으로 빼버린 이념적 편향성을 보이고 있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 다만 친일대첩 이후 밝혀진 열린우리당 의원들 부친들의 친일 의혹에 소극적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이미경, 신기남, 김희선 의원의 부친들이 대표적이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자료부족을 이유로 심사 중이라 해명했고 3년 후인 2008년에 신기남 부친인 신상묵을 등록했다.
4.4. 악용 의혹에 대한 논쟁
친일인명사전의 제작은 한국 근현대사의 쟁점과 과제를 연구하고 해명하기 위한 학문적 연구 의도에서 출발한 것이다. 그러나 제작과정에서 친일인명사전의 내용이 정치공방의 핵심으로 떠오르면서, 그 순수성이 심각하게 훼손되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친일인명사전 제작과정을 보면 일제강점기 공문서, 신문, 잡지 등 3천여 종의 문헌자료를 수집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250만 건의 인물정보를 데이터베이스로 구축부터 시작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2만 5,000건의 친일혐의자 모집단을 추출하고, 20여 분야의 전문분과회의와 상임위원회 심의를 거친 결과 4,430명을 선정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선정된 인물들은 각 분야별 학계에서 권위높은 전문가들하고 상의하고 재차 검토 및 자문을 거쳐 전체회의에서 확정되는 것이다.
실제로 이 과정에서 민족문제연구소장 임헌영의 스승격이 되는 백철[33], 친일파 연구 권위자인 임종국의 부친 임문호 등이 수록되어있다. 임문호는 아들인 임종국이 친일연구서인 <친일문학론>을 집필할 때 '(그 책에) 내 이름도 넣어라. 그 책에서 내 이름 빠지면 그 책은 죽은 책이다'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그밖에도 반독재민주화운동 진영의 이론가였던 평론가 백낙청의 부친 백붕제도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어있다. 이런 사례는 이 외에도 상당히 많다. 대표적으로 장준하와 같이 잡지 사상계를 발행하고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던 부완혁[34]이라든가 1970년대 후반까지 진보운동, 야당 정치가로 활동했던 윤길중 등이 수록되어있다.
5. 여론
2009년에 실시한 여론 조사에서는 찬성 58%와 반대 32%의 결과가 나왔다. 2009년 11월 발간당시 여론조사 사실 친일파 척결, 개혁과 같은 구호를 걸고 실시한 여론조사치곤 반대가 매우 높다는 의견이 있다.연구소 측에 의하면, 향후 역사관 설립 등 사업을 확장할 계획이라고 한다. #
현재 일제강점기 '민중생활역사관' 건립계획안을 발표했다.
6. 기타
재미있는 사실이라면,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사람들 내용을 보면 '간도특설대 상병'이 눈에 띄게 흔히 보인다. 심지어 부사관인 오장이나 군조도 여럿있다. 간도특설대는 자원으로만 충당되었고 존재의의부터가 독립군 토벌이라 사병이나 장교 가릴거 없이 그 자체에 소속된 자체를 '반민족행위'로 보기 때문이다. 이들의 악행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매우 끔찍한 것도 한 몫한다. # 다만 특설대원 3기 인원들은 지원이 아닌 '발령' 형식으로 차출되어 온 경우가 있어 논란이 있기는 하다. 일단 장교들은 애초 일본군, 만주군에 제 발로 지원하여 군에 입대한 것이기에 발령으로 차출되어 왔어도 친일인명사전 등록을 피할 길이 없다.하지만 3기부터 신병은 징집으로 무작위 배치되어 온 경우가 대다수였다. 게다가 일본군은 하사관과 병졸의 진급이 오로지 부대 내 근무평가와 업무숙달 시험성적에 따라 정해졌는데, 그냥 이 악물고 버티던 징집병이 어쩌다보니 하사관까지 진급을 하거나 진급과 동시에 새로이 특설대로 발령 나는 케이스도 없지 않아서 이들에 대한 평가에 대해 논란이 되기도 한 것이다.
그 밖에 일본군위안소 운영자도 수록명단에 있다.
서울시교육청은 서울내 중고등학교에 친일인명사전을 배포하는 사업을 시작한다고 한다. 관련 예산 자체는 지난해인 2014년에 통과 되었으나 반대 여론 등으로 사업 시작이 되지 않고 있다가 이번에 집행한다고 한다. 친일인명사전이 비치되지 않은 학교들이 대상이 된다고 한다. #, # 다만 해당 학교들과 새누리당에서 반대하고 있어 어떻게 될지는 지켜봐야 할 듯.
한편, 해당 출판물 구입을 거부하는 사립학교들은 민족문제연구소가 편찬한 친일인명사전이 정치적 편향성을 담은 저작물인지에 대한 판단은 유보하겠다면서도 "이제라도 교육청이 학교 재량에 맡겨 교장이 구성원의 의견을 수렴해 (구입 여부를) 정하도록 하는 게 해법"이라고 밝힌 바 있다. 관련기사
서울에 이어 경기도의 중, 고등학교 에서도 친일인명사전이 보급될 것으로 보인다. 보급을 위해 편성된 예산이 도의회에 제출되었으며 예산이 통과될 경우 내년부터 보급될 것으로 보여진다. #
7. iOS/안드로이드 플랫폼으로 출시
안드로이드 버전으로도 출시되었다. 가격은 한화로 10,000원이고 미화로는 8.99달러.안드로이드 버전으로는 경술국치 102주년인 2012년 8월 29일 날 출시되었다.
iOS 버전으로는 9월 말 출시예정이라고 밝혔고, 이 쪽도 판매가 시작되었다.
iOS 앱의 경우에는 문제가 많다. 출시 이후 앱의 유지를 위한 업데이트가 사실상 중단되어 있는 상태일 뿐만 아니라, 3년이 넘게 지난 2015년 10월까지도 아이패드 및 아이폰 6 이후의 아이폰의 해상도를 지원하지 않는 등 전혀 유지보수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고, 또한 발간 이후로도 역사학계의 친일파 연구는 계속되고 있지만, 최신 연구 결과를 반영하는 내부 데이터의 개정 또한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즉, 내외부적으로 모든 지원이 중단되어 있다.
2017년 8월 14일에 iOS 10을 지원하는 신규버전을 출시했다. 이것이 마지막으로, 2020년 9월에 iOS 14가 배포 후 일부 아이폰에서는 앱이 실행되지 않는 문제가 발생하고 있지만 해를 넘겨 2021년 3월인 현재에 이르러서도 더 이상의 업데이트는 없다.
유지보수가 중단된 앱의 경우, 사실상 구매자가 피해를 볼 수 있는 부분이라 신중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이런 부분은 숨긴 채 애국심 마케팅과 친일파 마케팅을 통해 과도하게 홍보하는 경우가 많다. 아예 일부 사람들의 경우 이 앱은 구매보다 후원으로 생각하면 되니 앱이 유지보수가 안 되는 것은 문제가 없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앱의 경우 지속적인 유지보수는 사용을 위한 중요한 문제이며, 후원의 경우로 구매하는 경우라면 굳이 쓰지 않는 앱을 살 필요가 없이, 공식 후원을 통해 직접 후원하는 방법이 있기 때문에 앱의 구매에는 신중을 기하는 것이 좋다.
8. 관련 문서
9. 외부 링크
[1] 그러나 양쪽의 집필자가 꽤 겹치는 편이다. 아무래도 한국근대사 관련 권위자가 주로 집필을 맡아 그런 것으로 추정.[2] 주로 단순히 일본군으로 복무했지만 반민족행위에 가담하지 않은 사람들이 해당된다.[3] 보건사회부 장관을 거쳐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으로 재임 중 10.26 사건를 맞이하였다. 최규하 국무총리가 대통령 권한대행을 거쳐 대통령이 되자 국무총리에 취임하였으며 이후 5.17 내란이후 무력감을 느껴 내각 총사퇴하였다.[4] 이쪽은 2.8 독립 선언때 활약했던 유학생이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하기도 했었다.[5] 다만 이갑성에 대해서 서훈 취소를 강력하게 주장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공식적인 입장 표명 없이 인명사전에서 빼기만 한 것은 비판받을 여지가 있다. 자세한 건 문서 참고.[6] 반면 이 또한 논란이 있다고 보는 사람이 생각보다 적진 않다. 왜냐하면 같은 시대를 살았던 김대중 대통령, 강원용 목사와 김수환 추기경은 초당파적으로 그를 변호할 정도였는데, 그 시기를 살아보지도 않은 재판관들이 내린 결정이기 때문이기도 하다.[7] 한겨레도 이를 거들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한겨레가 동아일보 해직 기자들이 창간한 신문이기 때문이다.[8] 강영석, 김우현, 김홍량, 남천우, 박성행, 박영희, 유재기, 윤익선, 이동락, 이종욱, 이항발, 임용길, 차상명, 최준모, 최지화, 허영호.[9] 2009년 11월 대통령직속기관 친일진상규명위에서 김성수와 방응모를 수록하자, '인촌기념사업회' 측에서 강하게 반발해 소송을 걸었다.[10] 장면은 김승학의 친일파 살생부에 올랐다.[11] 이 발언 때문에 형평성 문제가 생겼다며 일부 계층에서 김 추기경을 비판하기도 했다.[12] 참고로 김대중은 바로 장면의 추천으로 민주당(1955년)에 입당해서 정치를 시작했다. 당시 장면이 이끌던 민주당 신파 계열에는 천주교 신자들이 많았는데 장면, 김대중 모두 독실한 천주교 신자들이다.[13] 다만 문재철 같은 경우 지주였으나 친일파였는지는 명확치 않다. 문재철은 상해임시정부에 자금을 지원하기도 했기 때문이다.[14] 이 비슷한 사례는 항일쪽에도 있다. 항일운동을 하다가 명백한 친일로 넘어가지 않고 대외 활동 자체를 안하고 은거해버리는 경우인데, 이 경우에도 전형 혹은 변절이라고까지는 하지 않는다. 기록들이나 후대의 평가도 해당인물에게 긍정적으로 언급하려는 시도가 많기도 하고. 예를 들어 조봉암의 경우 사회주의계 독립운동가였지만, 일제강점기 말기가 되면 좌익 활동과 독립운동 양자 모두가 시들해진다. 이 때문에 기존 동지들에게는 변절한 것 아니냐는 의심을, 일제로부터는 아직 독립운동 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의심을 사면서 광복을 맞이하게 되는데, 조봉암을 친일파까지 보는 사례는 기본적으로 없다.[15] 다만 남조선이란 조직 명칭에서도 드러나듯이 이들이 남한을 미제에 점령당한 식민지로 북한은 민족자주를 견지하는 해방된 정권으로 보는 관점을 가졌던 것은 명백한 사실이며 이런 측면에서 북한과 연계를 시도했던 것도 사실이다. 다만 뭔가 아마추어틱했을 뿐...[16] 김남주 시인은 남민전 사건 이후에도 "남조선은 미제의 식민지"라는 관점에서 계속 활동하면서 80~90년대 NL주사파들이 열광하는 존재가 되었고, 이재오는 민중당(1990년)까지는 친NL 성향의 통일운동을 하다가 보수우익으로 전향했으며, 프랑스로 망명한 홍세화는 반북성향의 사회주의자가 되었다.[17] 조문기에 대해 궁금한 사람은 여기 참조바람.[18] 한때 임시정부 주요 인사들과 독립운동 방법론에서 일부 충돌을 빚기도 했지만 명백한 독립운동가이고, 제헌국회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초대 대통령에 당선된 것 또한 분명하며, 평생토록 매우 강경한 항일노선을 견지했다.[19] 1940년대에 친일 활동을 한 것 때문에 2010년에 독립유공자 서훈까지 취소되었다.[20] 장택상 본인에 한정. 다만, 집안이 좀 복잡하다. 항목 참조.[21] 일제강점기 말기 '임전보국단' 같은 친일어용단체에 임영신의 이름이 올라가있다. 다만 이름만 걸어두는 수준으로 실제 활동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적극적인 친일파로 보기 힘들다는 의견이 강하며, 오히려 지하 독립운동 활동을 위한 위장 전술로 보는 시선이 커졌다. 민족문제연구소 또한 2009년 입장을 바꾸어 친일인명사전에서 제외하였다.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조.[22] 과거 친일파 세력들과 한민당 세력들은 반민특위 결성 당시, 반민특위 부위원장 김상돈이 '일제시대 동네 이장 자리 맡았다.'고 트집잡아 김상돈 부위원장을 친일파라고 몰아가기도 했다.[23] 그 뒤 허헌은 재취 아내의 처가가 있는 황해도 신천군의 달천온천에서 휴양을 하면서 해방을 맞이했다.[24] 그것도 그냥 연루된 정도가 아니다. 이극로는 최현배, 이윤재와 더불어 조선어학회 사건에서 가장 핵심적인 인사로 지목되어 구속된거다![25] 징역 6년형 선고. 최현배는 징역 4년형 선고, 같은 핵심인사인 이윤재는 고문에 못이겨 옥사했다.[26] 일제말기 안재홍은 칩거생활을 지내면서 역사서를 편찬, '신민족주의'사관을 내세워 식민사학에 반박하는등 '비타협적'인 행보를 보였다.[27] 이쪽은 공산주의계열 독립운동 활동 공로로 독립유공자로 인정되어 무려 '건국훈장'까지 받은 사람이었다. 다행히 2010년 12월에 서훈취소 결정되었다.[28] 인정식 경우는 마르크스주의 유물론 사관에 입각한 경제학자, 이론가로 공산주의운동가 가운데 최고참격이다. 마르크스 경제학자 백남운과 동급의 위치에 있던 인물이었으며 나중에 1938년에 전향하고 본격적으로 친일파로 변절해 '대표적인 좌익계열 친일파'로 손꼽힌다.[29] 계급투쟁과 프롤레탈리아문학을 내걸었던 카프의 대표인물이다. 1938년 전후로 변절했다.[30] 1920년대 대표적인 공산주의 활동가였다. 30년대 법조인으로 활동하다가 일제 말 친일파로 변절했다. 광복 이후에는 우익으로 변신해서 대한민국 자유당에서 활동했다.[31] 조선일보 기자 출신으로 2~30년대 조선공산당을 비롯해서 사회주의 계열에서 활동했다. 중일전쟁 시기 전후로 변절해서 친일파가 되었다.[32] 북한은 친일파를 완전히 청산했다는 일부의 주장에 대해서 보수우파 계열에서 반박하면서 가장 대표적으로 제시하는 게 바로 황철과 문예봉, 심영이다. 특히 북한 제2의 국가인 김일성장군의 노래의 작사자 리찬 역시 친일인명사전 등재자이다.[33] 참고로, 민문연 소장 임헌영의 대학시절 정신적으로 가장 영향을 준 사람이 자신의 학교 교수인 백철이었다고 한다.[34] 부완혁의 사위가 1970년대 중후반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율산그룹의 신선호 회장이다. 신선호가 모종의 이유로 회장직을 사퇴한 이후에 한때 부완혁이 회장을 맡기도 했다. 신선호는 율산그룹 해체 이후 야인으로 지내다가 21세기 들어서 센트럴시티 회장으로 화려하게 복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