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colcolor=#fff> 이동락 李東洛 | |
출생 | 1890년 10월 21일 |
황해도 금천군 | |
사망 | 1969년 3월 28일 (향년 78세) |
서울특별시 | |
종교 | 천도교 |
비고 | 친일인명사전 등재 |
서훈 | 건국포장 추서 |
[clearfix]
1. 개요
일제강점기의 종교인. 한 때는 독립운동가였으나 1930년대 후반 이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전락했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으나 2010년 서훈 취소되었다.2. 생애
2.1. 초기와 독립운동
1890년 10월 21일 황해도 금천군에서 태어났다. 그는 일찍이 천도교에 입교하여 황해도 일대에서 지방교구 조직과 모금 활동을 전개했다. 1919년 3월 7일 천도교 중앙총부와 연락을 취한 그는 3.1 운동을 자신이 거주하는 평산읍에도 벌이기로 결심하고 천도교인들을 중심으로 만세시위를 전개했다.1922년 7월 천도교를 중심으로 조직된 고려혁명위원회에 참여하여 해외조직부장으로 활동했고, 1923년 6월 조선민립대학기성회 황해도 평산지방부 집행위원 겸 감사위원을 지내다 1924년 12월 만주로 건너갔다. 1925년 4월 조선사회운동자동맹 발기준비위원회 위원으로 참여했으며, 1926년 3월 정의부가 주축이 되어 조직한 고려혁명당에 천도교 혁신파 대표로 참여하여 선전위원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하얼빈 등지에서 당원 모집 활동을 전개하던 중 일본 총영사관 소속 형사에게 장춘에서 체포되었고, 1927년 1월 국내로 이송되어 신의주경찰서에 수감된 뒤 취조를 받은 후 신의주지방법원 검사국에 송치되었다. 1928년 4월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열린 제1심에서 징역 6년이 언도되자 공소했다가 이내 취하하면서 옥고를 치렀다.
2.2. 친일 행적
출옥 후 1936년 7월 친일 단체인 대동민우회에 창립 발기인으로 참여하고 발기 취지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조선에서 공산주의 및 민족자결운동을 청산하고, 조선인에게 국민정신을 철저케 하여 국민적 지위의 향상 및 확보를 도모함으로써 근상일가(槿桑一家)의 이상을 실현하고 사상전향자의 보호사업, 심전개발사업 등을 실시한다.
같은 해 8월 2일 대동민우회 창립대회에서 신입회원 입회 문제 등으로 이각종파와 김경식파 간에 의견출동이 발생하여 이각종파가 퇴장하자, 그는 김경식파에 의해 민우회 이사에 선임되었다. 그러나 8월 29일 이각종파가 별도로 대동민우회 창립위원회를 개최하자 이에 참여했고, 9월 20일 대동민우회 창립총회에서 이사에 선임되었다. 그렇지만 이후에는 친일 활동을 별로 열성적으로 보이지 않았기에 일제의 주시를 받았고, 1945년 남천경찰서에 예비구금되었다가 8.15 광복으로 석방되었다.
2.3. 해방 이후
광복 후 서울의 성도초급중학교 교사를 지냈으며, 1948년 4월 천도교 총부 감사관장 겸 조사부장을, 1952년 4월 천도교 총부 현기실 상주선도사를 역임했다. 그리고 1953년 4월 천도교총부 교화원장을 맡았으며, 1954년 4월 재단법인 천도교 유지재단 이사를 지냈다. 또한 1963년 4월부터 1964년 12월까지 천도교 중앙총부 종무원장과 재단법인 천도교유지재단 이사장을 지냈다. 1969년 3월 28일 서울에서 사망했다.3. 사후
대한민국 정부는 평산읍에서 발발한 3.1 운동을 주도하고 만주에서 고려혁명위원회 선전위원으로 활동하는 등의 행적을 고려하여 1977년 이동락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그러나 후에 그의 친일 행적이 드러나면서 2010년 서훈 취소되었다. 그리고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던 그의 유해는 다른 곳으로 이장되었다.[1] 친일 행적으로 인해 2010년 서훈 취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