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육대학교 총장을 역임한 교수에 대한 내용은 김홍량(대학교수) 문서 참고하십시오.
<colbgcolor=#000><colcolor=#fff> 김홍량 金鴻亮 | |
호 | 포우(抱宇) |
출생 | 1885년 9월 20일 |
황해도 안악군 판교면 팔리 (現 황해남도 안악군 안악읍) | |
사망 | 1950년 7월 3일 |
서울특별시 | |
본관 | 김해 김씨 |
가족 | 조부 김효영 |
학력 | 메이지가쿠인대학 (졸업) |
비고 | 친일인명사전 등재 |
서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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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제강점기의 친일반민족행위자. 한 때는 독립운동가였으나 1930년대 후반 이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전락했다.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으나 2010년 서훈 취소되었다.2. 생애
2.1. 초년기
1885년 9월 20일 황해도 안악군 판교면 팔리(現 황해남도 안악군 안악읍)에서 태어났다. 그는 일찍이 부친을 여의고 조부 김효영(金孝英)의 슬하에서 자랐다. 김효영은 미천한 신분이었으나 포목상을 하여 재산을 모아 토지를 매입해 황해도에서 제일 가는 부자가 된 인물이었다. 그는 이러한 조부에게 든든한 지원을 받으며 서당에서 학업을 닦을 수 있었다. 당시 안악군에서 양산학교 교사를 지내던 김구는 백범일지에서 김효영이 "구식 인물이나 두뇌가 명석하여 시세의 관찰력이 당시의 신진청년으로도 더불어 의논할 만한 자격이 희소하더라"고 평가했다.1904년, 조부의 권유로 일본에 유학하여 메이지가쿠인에 입학했고, 메이지가쿠인을 졸업한 뒤 와세다대학 정치경제학부 예과에서 수학하며 최광옥, 홍명희, 최린, 조만식, 최남선, 오순형, 김낙영, 허헌, 장응진, 백남훈 등 유학생들과 교류했다. 그 중에서도 황해도 은율군 출신의 백남훈은 김홍량이 유학비용을 지원해준 덕분에 일본 유학을 할 수 있었다.
1905년 9월, 관서지방 출신 유학생들이 도쿄에서 조직한 태극학회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이후 회무 확장을 위해 매진하다가 최광옥에게 병환이 생기자 일시 귀국했고, 도쿄로 돌아온 뒤 태극학회의 재정을 지원하기 위해 2차례에 걸쳐 30원씩 의연금을 지불했다. 1906년 10월 18일 태극학회 회원 이상근이 도쿄 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게 되었으나, 병원비가 없어 어려움을 겪자 조부에게 부탁해 많은 돈을 받아낸 뒤 그것으로 병원비를 대신 지불해줬다.
1906년 7월, 그는 백남훈에게 "장차 노령 방면으로 가서 군관을 양성키 위해 귀국을 결심했다."고 밝히고 최광옥과 함께 귀국했다. 그는 고향인 안악에서 양산학교를 설립해 교육구국운동에 투신했다. 1906년 가을 최광옥의 병세가 심해지자 안악군 연등사에 거처를 마련하여 그가 요양할 수 있도록 주선했다. 이후 그는 안악의 여러 유지들과 두루 교류하면서 안악군에서 교육구국운동이 부흥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1907년 9월 도쿄로 돌아온 그는 9월 15일 태극학회 창립 제2회 기념식에 참석해 태극학회의 발전사와 내지동포의 유학생들을 고대한다는 등의 내용으로 연설해 박수 갈채를 받았다. 1908년 1월 12일 태극학회 총회에서 평의원으로 선출되었으며, 1월 30일 미국에서 활동하는 독립운동가 김성무, 이교담 환영회를 개최해 축사를 발표했다.
1908년 3월 1일 태극학회 임원 총선거에서 총무원 겸 편찬원으로 선정되었다. 3월 8일 통상총회에서 태극학보 확장을 발론하여 모두의 호응을 얻어냈고, 재정방침을 논의해 일반 회원들로부터 의연금을 지불받았다. 이때 그는 200원을 몸소 내놓았고, 이 자리에서 총 2,505원이 모금되었다.
1908년 5월, 태극학보 제20보에 <지성(至誠)의 력(力)>이라는 제목의 논설을 게재했다. 그는 이 글에서 '지성이면 감천'이니, 식민지 망국을 원망하지 말고 정성을 다하면 국권도 회복하여 자유와 행복이 무궁할 것이며, 교육, 정치, 군사, 실업 등 모든 분야에서 지성이 생명이며 구세주라고 강조했다.
1910년 1월 10일 대한학회, 태극학회, 공수학회, 연합회 등 여러 한인 유학생 단체들이 통합되어 대한흥학회가 발족되었다. 이때 그는 최창조와 함께 총무에 선임되었다. 각회의 청산보고는 대한흥학회 평의회에서 보고하도록 했고, 각회 청산위원으로 대한학회는 이풍재, 태극학회는 김홍량, 공수학회는 조용은, 연학회는 허헌으로 하여금 통지하여 보고하도록 했다.
1909년 봄 명치학원 중학부를 졸업한 후 귀국한 김홍령은 그해 6월 도쿄로 돌아갈 때 신학생 3명을 동반했다. 또한 대한흥학회 평의원, 출판부원으로 활동하다가 1909년 7월 13일 완전 귀국했다.
2.2. 교육계몽운동
일본 유학을 통해 얻은 학식과 인맥을 바탕으로 안악의 교육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그는 안악에 양산학교를 직접 설립했고, 일본 유학 당시 친분이 있던 최광옥, 장응진 등 여러 인사들을 안악으로 초빙해 안악 인사들과 일본 유학생 단체들이 교류하게 했다. 1908년 봄, 최광옥과 함께 안악면학회 제2회 연합운동회를 개최했으며, 같은 해 8월 13일 안악면학회 제2회 하기강습회 졸업식을 거행했다. 이어 8월 22일 양산학교 내에서 해서교육총회 설립을 논의했다.1908년 10월 4일, 양산소학교 자리에 양산중학교 설립을 합의한 그는 여러 인사들로부터 모금한 기금 3만원으로 양산중학교를 설립했다. 자신은 교장을 맡았고, 교사로는 한필호, 이상보, 이시복, 백신칠, 박도병 등이 맡았다. 개교 당시 학생은 15~6세의 소년 60여 명이었다. 또한 1908년 11월 해서교육총회를 조직해 황해도 도내 1면 1교 실현을 목표로 소학교 설립운동을 전개했다.
이 무렵 신민회가 조직되자, 그는 황해도 지회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양산중학교를 신민회와 연계시켰다. 신민회가 만주에 무관학교를 설립하고 독립군 기지 건설을 추진하자, 그는 자금 모금과 이주민 모집을 위해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안동현으로 이주해 농업과 무역회사를 경영하면서 국권 회복을 꾀했다. 그러나 1910년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었고, 양산학교는 폐교 조치되었다.
이후 김구 등과 함께 징역 15년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던 그는 1915년 10월 가석방으로 풀려났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와 모범 농촌 건설을 위해 노력했으며, 민족교육을 위한 지원을 지속하여 1923년 원효섭 등 14명의 안악 유지들과 함께 기부금을 모금하여 간도 동흥중학교를 지원하기도 했다.
1928년 11월, 그는 황해도 신천군 산천면 동산리 일대 아동들이 교육기관이 없어 교육을 받지 못한다는 소식을 접했다. 당시 그는 동산리 동산평에 농장을 소유하고 있었다. 아동들을 돕기로 결심한 그는 제종 김선량을 그곳으로 보내 동산평 기독교 교회당 내에 동산학원을 임시로 설립하게 했다. 학교 운영 경비는 김홍량 소유 농장에서 생산되는 조 30석을 매년 보조하기로 했으며, 집집마다 방문하여 남녀 아동 38명을 모집했다. 이후 11월 12일 동산학원을 개원해 아동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부여했다.
1925년부터 1931년까지 동아일보 안악지국장으로 활동했으며, 1936년 2월 안악고보 설립운동을 전개하여 60만원 기금을 목표로 재단법인 조직에 착수했다. 2월 7일 안신보통학교 강당에서 50여 명의 유지를 회합시켜 기성회를 조직하고 발기위원 10명을 선정했다. 그는 이 자리에서 10만원을 지불했다.
이어서 기부금이 각처에서 답지하였는데, 안악읍 판팔리에 사는 독지가 이제엽이 2천원을 희사했고, 2월 22일 안악군 은홍면 상홍리에 거주하는 전봉규가 안악고보기성회에 2백원을 희사했으며, 머슴 살이 하던 조만식이 2원을 기부해 주위 사람들을 감동하게 하기도 했다. 또한 전북 정읍에 주소를 두고 철도의무실 일야의원에서 근무하던 한명수가 100원, 웅진에 사는 윤도영, 안악읍에서 고두성, 국등순, 정응주가 50원을 희사했다. 그 중 국등순은 중국인으로 한국에 와서 장사를 하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기생 최긤홍, 장명주 2인이 각각 100원씩 기부했다.
이렇듯 각지에서 기부금이 모이면서 1936년 2월 25일 기부금 누계가 32만 5,514원에 이르렀다. 그리고 3월 19일에 55만원을 돌파하면서 목표로 정했던 60만원의 거액이 거진반 적립되었다. 이에 1936년 3월 21일 기성회장 이시복, 정남연과 함께 안악고보 설립을 위해 경성으로 향하여 여러 인사들의 협조를 부탁했으며, 농업전문가 양성도 별도로 진행하여 재령, 안악, 신천 3군의 중앙 지역에 농림대학 설립 계획을 추진했다. 그는 여기서 더 나아가 150만원의 기금으로 재단을 만들어서 60만원으로 남자고등보통학교 1개교, 40만원으로 여자고등보통학교 1개교, 40만원으로 빈궁한 일반인들을 위한 대중병원, 10만원으로 도서관을 설립해 문화 중심 도시를 건설하겠다는 원대한 계획까지 수립하기도 했다.
그러나 1937년 일제가 중일전쟁을 벌인 뒤 전시체제 강화를 위한 황민화교육을 실시하자, 안악고보 설립운동은 중대한 위기를 맞이했다. 조선총독부가 안악고보 설립을 허가하지 않은 것이다. 이에 김홍량은 방향을 전환하여 40만원 정도의 기성회 자금을 학무당국에 제공하고 당국과 협의해 안학중학교를 공립으로 설립하기로 합의했다. 1938년 3월 25일 공립으로 안악중학교 설립을 인가받았고, 학생을 모집해 1938년 4월 18일 안악읍 소천리에 있는 공회당을 임시교사로 하여 개교식을 개최했다.
학생 모집인원은 55명 1학급으로 양산소학교와 안신소학교 출신이 약 30여 명이었고, 군내 각 면에서 1~2명씩, 그리고 신천, 재령, 은율, 황주, 진남포 등 인근 징겨에서 4~5명이 입학했다. 안악중학교 초대교장에는 서울 제1고보 교무주임으로 있던 가쓰야가 부임했다. 이후 1940년 봄 모든 시설이 완비된 안악중학교는 2층 건물이었고, 18개의 방과 5개의 교실 외에 박물실, 화학실, 화학실험실, 물리실, 표본실, 도서실 등 당대 최고의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한편, 그는 1936년 여름 경신학교를 인수한 뒤 재단을 설립해 1945년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경신학교를 경영하기도 했다.
2.3. 모범농촌운동
그는 안악 일대의 교육 진흥운동을 주도하는 한편 1910년 이태건, 이승준, 정달하, 전봉훈 등과 함께 모범농촌운동을 전개했다. 그들은 각자가 소유하고 있는 토지를 재정적 기반으로 하여 황해도에서 가장 모범적인 중학교를 사리원에서 서쪽으로 10리 떨어진 누루치에 신설하고, 그 주위에 이상촌을 건설하기로 했다. 이 계획을 실천하기 위해 면학회 회원 장윤근을 의주로 파견해 건축용 자재를 구입해 오게 했고, 이태건이 소유한 토지에 공사를 착수하기로 했다. 이 공사의 건축 설계는 김필순이 맡기로 하고 김홍량과 함게 수차례에 걸쳐 현지를 답사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김홍량이 105인 사건으로 체포되면서 무위에 그쳤다.이후 김구를 동산평 농감으로 선임하고 그의 가족을 도와줬다. 또한 김구가 망명을 결심하자 여비를 지원해주기도 했다. 김구는 백범일지에서 이 일을 서술하면서 김홍량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밝혔다. 그 후 1926년 김농장 건설계획을 수립한 그는 안녕수리조합을 설립하고, 숙부인 김용정, 김용진과 함께 김씨 문중의 공동소유인 동산평농장을 담보로 식산은행에 대출을 신청한 뒤 조선총독부에 안녕수리조합 확장과 간석지 개간을 위한 지원을 요청했다.
기술진 확보와 건설업체 선정을 위해 일본에 다녀와서 일본인 전문가에게 시공을 맡겼다. 1927년 황해도 재령에 사무소를 둔 안녕수리조합에서 수로관 가설공사에 착수했다. 이 공사는 4~5년간 연기를 거듭했고, 30만원으로 책정된 공사비는 60만원이 추가되었다. 그렇게 좀처럼 난항을 겪던 공사는 1930년 5월 18일에 마침내 준공되어 개통식이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개통식에는 조선 총독이 참석했고, 그 이하 각 관청과 각 신문사 기자, 민간 유지들이 다수 초대되어 개통식에 참석한 뒤 성대한 축하연을 가졌다.
김농장은 크게 3대 권역으로 형성되었는데, 가장 넓은 대원면의 농지는 김홍량의 소유로, 문산면 일대는 김용진의 소유로, 안곡면 일대는 김용정의 소유로 하고 근대 기업 형식으로 경영했다. 또한 김농장 건설 당시 시공을 맡은 일본인 오오바야시조가 김농장 인접질역에 대림농장을 건설했으며, 안악의 3대 부호인 원씨 가문에서 '원농장', 최씨 가문에서도 '최농장'을 건설했다.
1934년 12월 2일 삼남 수재를 입은 경남 진해의 이재민 195명이 안악군 김농장으로 이주했다. 김농장에서는 매호당 56단보의 토지의 주택을 분배했다. 이들은 대원면에 19호, 문삼면에 10호, 안곡면에 10호씩 안주하여 김농장의 보호를 받았다. 이들은 2만여 원을 모아 안악고보 설립운동에 기부하기도 했다. 또한 경북 지역 이재민 49명 11가구가 안악의 대림농장에 이주하기도 했다.
김농장은 1927년부터 시작하여 1932년부터 수확을 거두었다. 그러나 1936년 2월 13일 김농장 정미소에 큰 화재가 일어났다. 당시 정미소에서는 기계 고장으로 건조기 연통에서부터 발화되어 삽시간에 정미소와 인접한 곡식 수천 석으로 번졌다. 이 급보를 접한 안악 소방조와 대원면 소방조, 재령군 서호면 소방조가 총출동하여 화재 진압에 진력했지만, 결국 곡식이 전소하고 말았다. 총 피해액은 약 6만여 원이었다. 이후 김홍량은 친지에게 농장장을 맡기고 자신은 교육 계몽운동에 매진했다.
2.4. 친일 행적
이렇듯 그는 안악군에서의 교육계몽운동을 진두지휘했고, 신민회에 가담해 국권 회복을 꾀하다 장기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으며, 김농장을 설립하여 지역 경제 발전을 도모하고 이재민들을 돕기도 했다. 또한 김구의 절친한 동지로서 그에게 갖가지 지원을 해주고 가족을 돌봐주기도 했다. 그러나 2000년대에 들어 민족문제연구소의 조사로 김홍량의 친일 행적이 밝혀졌다.1938년 8월 21일 일본군에서 소집, 개최한 19, 20사단 관하의 병사부장 관계관회의에 참석해 3일간 민간인 대표의 한 사람으로서 참여했다. 그리고 1939년 4월 일본적십자사 조선본부에 1,000원을 냈고, 89월에 계유구락부 총무를 맡았다. 그해 12월엔 일본 육군 지원병 훈련소에 환자 수송용 자동차 구입비 2,000원을 헌납했으며, 그 공으로 1940년 5월 상훈국으로부터 포장(褒狀)을 받았다. 또한 1940년 6월 황해도 신천경찰서 건축비 1,000원을 헌납하여 1941년 5월 상훈국으로부터 포장을 다시 수여받았다.
1940년 11월에 열린 '기원 2600년 축전 기념식전' 및 봉축회에 초대받아 기원 2600년 축전 기념장을 수여받았으며, 12월에는 황해수산주식회사 취체역을 맡았고, 1941년 6월 황해도 도회 부의장에 선출되었다. 이후 1941년 9월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으로 참여해 덴노에게 충성을 다짐하는 선언을 하였으며, 10월에 임전보국단 평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1월에는 황해도 지주보국회 회장으로서 30만원을 모금하여 일본 육해군에 지주호 2기를 헌납하기로 결정했다.
1942년 1월 황해도 양곡 배급 조합 대표로서 태평양전쟁 2주년을 기념하여 조선애국부에 전투기 헌납기금 10만원을 냈다. 같은 해 5월 황해도 양곡주식회사 검사역을 맡았으며, 1943년 3월 관립 해주사범학교 설립기성회 고문을 맡았다. 7월에 안악군 생활 필수품 소매상조합 감사에 선임되었고, 1944년 9월 국민동원총진회 이사에 임명되었다.
2.5. 해방 이후
8.15 광복 후, 그는 1945년 9월 고려청년당 추천고문에 추대되었고, 12월 보국기금실행위원회 위원장과 3.1동지회 영수를 맡았다. 이후 서울에서 여생을 보내다 1950년 7월 3일에 사망했다.3. 사후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김홍량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고 그의 유해를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그러나 2010년 국가보훈처는 김홍량에게 주어졌던 건국훈장 서훈을 취소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김홍량의 넷째 아들이자 노태우 정권 시절 건설부차관을 역임했던 김대영 씨가 국가보훈처를 상대로 소송을 걸었다.서울행정법원은 2012년 2월 16일 김대영 씨가 국가보훈처 등을 상대로 낸 서훈취소처분 취소 청구 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헌법과 법률에 따라 대통령의 서훈취소 권한이 행정안전부나 국가보훈처에 위임이나 이전됐다고 인정할만한 근거가 없다"며 "김홍량에 대한 독립유공자 취소는 권한이 없는 곳에서 결정한 것"이라고 판시했다. 또 "취소 처분이 유효하기 위해서는 대통령을 대리한 처분임을 알려야 하고 처분을 받는 상대방 역시 이를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며 "그러나 보훈처의 결정은 이러한 요건을 하나도 갖추지 못했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2015년 3월 30일, 서울고등법원은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비록 김 선생이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했다고 하더라도 친일인명사전에 적힌 행적이 객관적으로 확인된다"며 "이런 사실들은 서훈 공적과 양립하기 어려운 것이므로 서훈을 취소한 것은 적법하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또 "유족들은 이런 행위가 일제에 의해 이름이 도용되거나 강요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당시 내용이 신문에 객관적으로 보도된 사실 등을 고려할 때 이를 인정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이리하여 김홍량의 건국훈장 서훈은 취소되었고, 그의 유해는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이장되었다.
4. 대중매체에서
1995년 방영된 KBS1 대하드라마 《김구》에서는 탤런트 맹호림이 해당 인물을 연기했다.[1] 친일 행적으로 인해 2010년 서훈 취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