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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5 08:17:02

유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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劉載奇[1]
로 등재되어 있다.]
창씨명 아마기 쿄신
天城虛心
자 / 호 운종(雲從) / 허심(虛心)
출생 1905년 6월 19일
경상북도 영천군 어화면 상소동
(現 경상북도 영주시 이산면 용상리)[2]
사망 1949년 7월 14일 (향년 44세)
서울특별시
본관 강릉 유씨[3]
가족 아버지 유추열, 어머니 손기운
학력 영주공립보통학교 (졸업)
대구사립교남학교 (중퇴)
니혼대학 전문부 (사회과 / 중퇴)
종교 개신교 (장로회)
비고 친일인명사전 등재
서훈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4]

1. 개요2. 생애
2.1. 초기와 독립운동2.2. 친일 행적2.3. 해방 이후
3. 사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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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제강점기장로회 목사. 한 때는 독립운동가였으나 1940년대에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전락했다.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으나 2010년 서훈 취소되었다.

2. 생애

2.1. 초기와 독립운동

1905년 6월 19일 경상북도 영천군 어화면 상소동(現 경상북도 영주시 이산면 용상리)에서 시골 유생이던 아버지 유추열(劉鄒烈, 1885. 1. 16 ~ ?)과 어머니 손기운(孫基雲) 사이의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1916년 4월 영주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해 1920년 졸업했고, 1922년 4월 대구사립교남학교 고등과에 입학하여 고학하다가 1923년 2월 1학년을 중퇴했다.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닛신고등학교에서 유학하다가 1924년 4월 니혼대학 전문부 사회과에 입학했으나 1925년 6월 중퇴하고 그 해 말에 귀국했다.

이후 1926년 4월부터 1927년 4월까지 평양 숭실전문학교에서 청강생으로 수학했으며, 1927년 1월부터 이듬해 11월까지 강서군 요촌교회 전도인으로 활동했고, 1928년 11월부터 경상북도 하양교회 조기철 목사의 조수를 지냈다. 1929년 4우러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여 1934년 3월 졸업했으며, 경북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1934년 4월부터 칠곡교회를 담임했다.

1935년 1월부터 의성교회를 담임한 그는 일찍부터 꿈꿨던 '예수촌 운동'을 전개했다. 농촌소년지도론과 협동조합론이라는 책자를 저술했으며, 가난한 농민들과 빈민들이 있는 곳에서 함께 먹고 자고 생활했다. 사람들은 그런 그를 가리켜 '누더기'라고 불렀다.

1937년 1월부터 대구 침산교회를 담임하면서 경북노회 종교교육부 총무를 겸임하면서 농촌연구회를 확장시키려 했으나, 일제는 농촌연구회를 비밀결사로 간주하고 1938년 7월 그를 구속시켰다. 이후 1939년 5월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2.2. 친일 행적

출옥 후 대구제일교회를 맡은 그는 1941년 7월 국민총력조선예수교장로회 경북노회 연맹 이사장으로서 연맹 산하 각 지 교회에 다음과 같은 공문을 보냈다.
매월 초 1일에 신사참배할 것, 매월 첫 주일은 애국 예배로 드릴 것, 매일 가정에서 궁성요배를 할 것, '황도실천', '전도보국'이라는 표어를 예배당 정면에 붙일 것.

또한 1941년 11월에는 경북노회 상무위원장으로서 노회 산하 각 교회에 '장로교회 애국기 헌납기금 조달에 관한 건'이라는 제목의 공문을 보냈다. 그리고 1942년 1월 <장로회보>에 '시난(時難) 극복의 신앙력'이라는 제목의 설교문을 실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만년대계의 동아평화를 수립하야 팔굉일우의 대이상을 실현하려는 여기에 대고가 없이 어찌 이루어지며 대난이 없이 어찌 실현될 것인가요. 그러므로 구무신의 배급이 없이 소족(맨발)으로 걸을 때도 있고, 보리밥 한 홉의 배급도 어려워서 배고픔을 당할 때가 있으리라고 각오치 아니하고 어찌 이 큰 일에 당한 신민의 각오라 하오리까!

1945년 2월 경상북도 도청 회의실에서 조직된 조선전시종교보국회 경상북도지부의 이사를 맡았다.

2.3. 해방 이후

8.15 광복 후 서울로 상경하여 일본인이 경영하던 극장과 여관 등을 인수하여 흥국호텔을 운영했으며, 1945년 12월 기독신민회 발기인으로 참여해 조직국장을 맡았고, 기독신민회 협동조합 실행위원에 선임되었다. 1946년 2월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산업부장을 맡았고, 그해 6월 중앙상무집행위원으로 참여해 산업부쟁으로 재임되었다. 1946년 10월 흥국형제단을 조직하고 기관지 <흥국시보>를 창간하는 등 정치 활동에 힘을 쏟다 1949년 7월 14일 서울에서 사망했다.

3. 사후

대한민국 정부는 농촌의 발전을 위해 농촌연구회에서 활동하다 옥고를 치른 점을 고려하여 1995년 유재기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러나 그의 친일 행적이 드러나면서 2010년 서훈 취소되었다. 또한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던 그의 유해는 다른 곳으로 이장되었다.


[1] 강릉유씨병사공파보 4권 442쪽에는 劉[2] 강릉 유씨 집성촌이다. 유수호 전 국회의원도 이 마을 출신이다.[3] 30세 재(載) 시(時) 항렬.[4] 친일 행적으로 인해 2010년 서훈 취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