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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기 | 2004년 MMIV 二千四年 | 二〇〇四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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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세 | 갑신년 甲申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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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기 | 4337년 | |||
| 불기 | 2548년 | |||
| 주체 | 93년 | |||
| 대만 | 민국 93년 | |||
| 일본 | 헤이세이 16년 | |||
| 황기 2664년 | ||||
| 이슬람력 | 1424년 ~ 1425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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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류세력 | 12004년 | }}}}}}}}} | ||
| <colbgcolor=#0b6db7><colcolor=#fff> 밀레니엄 | 제3천년기 | |||
| 세기 | 21세기 | |||
| 연대 | 2000년대 | |||
| 양력 2004년 | 음력 2003년 12월 10일 ~ 2004년 11월 20일 | |||
| 음력 2004년 | 양력 2004년 1월 22일 ~ 2005년 2월 8일 | |||
| 일수 | 366일(윤년) | |||
1. 개요2. 설명3. 정치
3.1. 세계 선거 일정3.2. 대한민국
4. 경제3.2.1. 참여정부 vs 검찰 vs 재벌3.2.2. 헌정 사상 최초의 대통령 탄핵3.2.3. 제17대 국회의원 선거3.2.4. 김선일 피랍 사건3.2.5. 노무현 정부의 행정수도 이전 논란
3.3. 해외4.1. 한칠레 FTA 발효4.2. 2004년 만두 파동
5. 기후6. 자연재해7. 국제행사7.1. 2004 아테네 올림픽7.2. 기타
8. 문화9. 사회9.1. 대한민국
10. 지리/교통11. 사건12. 탄생9.1.1. 갑신왜란9.1.2. 이승연 위안부 누드 사건9.1.3. 강도얼짱9.1.4. 유영철 연쇄살인 사건9.1.5. 2004년 프로야구 병역비리 사건9.1.6. 수능 대규모 부정행위 사건9.1.7. 밀양 여중생 집단 성폭행 사건
9.2. 해외12.1. 아이돌 비주얼: 04라인
13. 사망14. 데뷔15. 은퇴/해체16. 히트작17. 유행어18. 최초19. 최종20. 출시 상품21. 단종 상품22. 관련 문헌23. 달력23.1. 공휴일/연휴
24. 음력 날짜1. 개요
| 당동벌이(黨同伐異) 뜻이 같은 자는 무리를 삼고 다른 자는 공격한다. |
| ▲ 2004년 올해의 사자성어 |
2. 설명
| 2004년 서울특별시 한겨레 결산기사 | 동아일보 결산기사 | 연합뉴스 결산기사 |
2004년의 시작부터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가 기습적으로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면서 한국과 중국의 반발을 불러왔다. 그로 인해 대한민국 우정사업본부가 독도 우표 발행을 단행하자 일본인들이 이를 비난하였고, 이내 한국 네티즌과 일본 네티즌 사이에 사이버 갑신왜란까지 벌어지면서 국내에서는 반일 정서가 더욱 심화되었다. # 이어서 민경찬 게이트[1]와 김영삼 前 대통령이 연루된 안풍사건 그리고 제16대 대통령 선거 당시 대통령 후보들과 기업 사이의 유착 관계가 수면 위로 드러나면서 정국이 어수선하였다. 한편, 지난해 12월에 개봉한 영화 실미도가 신드롬을 불러 일으키면서 최초로 천만 관객을 달성하는 데 성공하였다.
2월에는 배우 이승연이 위안부 누드 영상으로 큰 논란을 일으켰다. # 또, 노무현 대통령이 취임 이후 1년 만에 대한민국의 행정수도 이전을 사실상 공식화하여 여야가 육탄전을 벌이면서까지 대치하는 진풍경이 벌어졌고, 1년 전부터 논의 중인 이라크 추가 파병 문제를 두고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이 찬성하기로 당론을 모으면서 국회에서 추가파병안이 가결돼 찬반 논란이 불거졌다. 한편, 2월부터 6월까지 안상영 부산시장, 남상국 대우건설 사장, 김인곤 전 국회의원, 박태영 전남지사, 이준원 파주시장 등 고위인사들의 잇따른 자살로 정치판이 시끄러웠다.[2]
3월에는 헌정 사상 최초로 대통령에 대한 탄핵 소추안이 가결되어 대통령이 직무 정지 상태가 된 바 있었다. 이 때문에 고건 총리의 대통령 권한대행 체제가 이루어졌으며, 노무현 대통령의 참여정부는 탄핵에 발이 묶이게 되었다. 게다가 3월 4~5일에는 한반도에 엄청난 폭설이 내려 전국에 대설주의보가 발효되었으며, 이 폭설로 인해 수많은 농가와 도시민들이 큰 피해를 당했다. 또, 검찰이 2년 전 제16대 대통령 선거 당시 발생한 불법 대선자금을 대대적으로 수사하기 위해 1월 출범시킨 김진흥 특검이 3월 31일을 마지막으로 안풍사건과 민경찬 게이트 등의 걸쭉한 사건의 수사를 마무리 지으면서 정치권의 파란도 막을 내렸다. 검찰이 발표한 바로는 당시 여당이었던 새천년민주당은 114억 원, 야당이었던 한나라당은 823억 원을 수수했다.
4월에는 칠레와의 자유무역협정 발효로 사회에 큰 파장이 일었다. 한칠레 FTA 타결로 묻히긴 했지만, WTO 국가별 중요 농산물 개방 협상 또한 이해 4월에 있었다. 결국 대한민국 정부는 WTO와의 협상에서 쌀 시장 개방을 10년 연기해 다가오는 2014년에 재합의하기로 결론지었다. 이로 인해 농업계에서는 한칠레 FTA와 WTO 쌀 시장 개방 등 농업정책에 대해 항의시위가 유난히 많았던 시기이기도 하다. 한편, 북한 평안북도에 소재하는 룡천역에서 열차가 폭발해 100여 명이 사망하는 대형 참사가 발생했다. 이 때문에 전국 각지에서 북한 룡천 주민들을 돕기 위해 정치인을 포함해 많은 시민들이 성금을 보냈고, 정부도 북한에 의약품과 쌀을 담은 구호물자를 보냈다. #
5월에는 지난 3월에 국회에서 가결된 대통령 탄핵안으로 직무가 정지된 노무현 대통령이 헌번재판소의 기각 판결에 의해 상실된 대통령의 기능을 회복하였다. 노무현 대통령은 자리에 복귀하자마자 고건 국무총리를 비롯한 주요 인사들의 개각을 단행하였고, 미국의 주한미군 차출 방안에 대응하기 위해 협력적 자주국방 제도를 임기 말까지 도입하라고 강조하였다. 또, 종교를 이유로 하는 양심적 병역거부가 법원에서 무죄가 선고되면서 사회적 이슈로 급부상하였다. #
6월에는 작년에 미국과의 전쟁으로 초토화된 이라크에서 유일신과 성전이라는 무장단체가[3] 미군 군납업체인 가나무역에서 통역원으로 지낸 김선일을 피살하여 고국으로 시신이 운구되었다. 이 때문에 한국 일각에서 6월 하순부터 7월 상순 사이에 반(反)아랍 및 이슬람 정서가 확산되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노무현 대통령의 이라크 파병 정책에 대한 반대 시위와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에 대한 비판도 거세졌다.[4] 이로 인해 재작년에 효순이 미선이 사건 때문에 반미 시위에 참여한 O2(산소)학번과 이라크 전쟁을 규탄하기 위해 반미에 나선 O3(오존)학번 그리고 공포(04)학번[5]은 이 사건으로 반미 감정이 최고조에 달했다.
7월에는 열린우리당이 제17대 국회 개원에 맞추어 국가보안법 개정/폐지, 사립학교 개혁, 언론개혁, 과거사 청산을 담은 '4대 개혁 입법'을 발의해 여-야 간에 파장이 일었다. 노무현 대통령이 "독재시대의 유물인 국보법은 칼집에 넣어 박물관에 보존해야 한다."고 국보법을 철폐하겠다는 의사를 밝히면서 보수-진보 양측이 연말까지 치열하게 격돌하기도 했다. 이외에도 군인공제회에서 비리를 저지른 것과 관련해 검찰의 수사가 본격화되면서 사회 분위기가 전반적으로 무거워진 감이 있었다. 출국금지는 물론이고, 압수수색까지 실시하며, 검찰 수사가 철저하게 이루어졌다. #
10월에는 2002년부터 큰 논란거리가 된 수도 이전 문제가 도마 위에 오르면서 수도권과 충청권 지역 간 갈등과 대립이 심했다. 서울/경기도는 수도이전 반대, 대전/충청권은 수도이전 찬성으로 갈라섰으며, 결국 이 문제는 헌법재판소로 넘어가게 되어서 수도이전은 위헌이라는 최종판결이 내려졌고 관습헌법이라는 용어가 이때부터 생기게 되었다. 이로 인해 충청권은 당황해 하는 모습이 역력했고, 수도권은 크게 기뻐하는 상반된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이듬해에 헌법재판소에서 수도 이전을 합헌으로 판결하였고, 8년 후에는 행정중심복합단지인 세종특별자치시가 들어서게 되었다.
11월에는 7차 교육과정[6]과 문이과 통합이 처음 적용된 2005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시행되었고, 이때 대규모 부정행위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에는 총 300여 명 이상의 가담자가 연루되었고, 그 중에는 수험생의 선배/후배, 학부모, 학원 교사가 동조한 사실도 드러나 전국적으로 큰 파문이 일었다. 이 사건은 당시 수능 응시자들이 수능 감독 시스템의 허점을 노려 진행되었는데 당시 부정행위를 저지른 응시자들은 시험 도중 자신의 휴대폰을 통해 자신이 매수한 사람과 문자를 주고 받아 답안을 전송 받으며 시험지에 그대로 답을 마킹하였다. 결국 이 사건으로 인해 이듬해에 실시된 모의고사와 대학수학능력시험부터는 수능 응시 전에 필적 확인란에 문구를 기입해야 하는 과정이 생겨났고 수능샤프도 생겨났다. 이 당시의 고3인 1986년생은 과도기인 셈이다.
12월에는 성탄절에 동남아 지역에서 2004년 남아시아 대지진으로 인한 쓰나미가 덮쳐서 세계구급 재앙이 벌어졌다. 이 참사로 총 40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고 부모를 잃은 고아들은 150만 명에 육박했다. 심지어 몇몇 고아들 중에서는 싼 값에 팔려 인신매매를 당하기도 하여 이 소식을 접한 네티즌들은 분노해 했으며, 한편으론 안타까워하며 그들을 간접적으로 위로하기도 하였다. 당시 대지진 피해 국가들은 다른 국가 또는 국제 기구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워낙 연말인지라 구호 물품이 사고 지역에 빨리 보내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결국, 대지진으로 인해 2005년 새해는 전세계적으로 조용하고 엄숙한 분위기로 1월 1일을 맞이하였다.
한국에서는 시위가 유독 많이 일어났던 해로 기억된다. 대통령 탄핵에 반대하는 20만 명의 시민들이 결집해 광화문과 서울특별시청 주변을 가득 메웠고, 김선일 피랍 사건 및 이라크 파병 반대 시위 당시에는 5~6000여 명의 시민들이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였다. 그러나 과거와 달리 시위 에티켓과 매너를 지키며 평화적인 방법으로 문제 해결을 고수하려는 시민들이 늘어 정계와 언론이 예상했던 유혈사태는 다행히 발생하지 않았다. 그 결과 이해를 기점으로 촛불집회 문화가 확산돼 현재에 이르고 있다.[7] 추가로 주 5일 근무 제도가 7월부터 단계적으로 시행돼 토요일에도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는 직장인들이 늘었다.[8]
한국 경제는 2002년부터 사회적 문제가 되었던 카드 대란이 이해에도 지속되면서 시민들의 소비 심리가 크게 위축되어 국가 경제가 한때 위태로웠던 적이 있었다.[9] 그 외에도 이해 5월 10일에는 미국의 조기금리 인상과 중동 지역의 국제유가 급등, 중국의 긴축정책, 대한민국의 대통령 탄핵으로 인한 외국인들의 순매도 등 별의 별 악재가 겹쳐 블랙 먼데이로 한 주일을 시작했다. # 게다가 종합토지세와 대중교통 비용을 인상하겠다는 정부의 방침이 발표되면서 서민들의 시름이 더해져 한탄하는 목소리가 더욱 거세졌다. 다음 날인 5월 11일에는 다행히 종합주가지수가 반등세를 보였지만 그마저도 약진이었으며, 원-달러 환율은 전 날보다 더 올라 긴장감이 감돌았다. 이후 8월 중순에 정부가 새로운 방향의 경제 정책과 카드 대란 피해자들을 빚으로부터 구제 할 방법을 발표하면서 급한 불은 꺼졌으나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경제적으로 힘들다고 호소해 의미있는 대응인가에 대한 논란이 일었다.
살인 사건으로는 1989년~1990년과 비슷한 양상을 띠고 있는데, 2003년 9월부터 이해 7월까지 서울 각지에서 주로 부유층 노인 또는 출장마사지사 여성 등 총 20명을 살해한 유영철, 이해 1월부터 2006년 4월까지 서울 서남부 지역과 경기 지역에서 총 13명을 살해하고 19명에게 중상을 입힌 정남규가 있었다. 한편 8월에는 서울특별시 은평구 응암동에서 자신의 애인과 경찰관 2명을 흉기로 살해한 이학만, 9월에는 대구광역시 중구에서 불특정 다수를 노린 독극물 요구르트 사건[10], 12월에는 서울특별시 송파구 석촌동에서 남성 2명이 모 전당포의 주인을 범행 대상으로 삼아 무자비하게 칼로 찌른 뒤 돈을 챙기고 달아난 2인조 연쇄살인 사건 등이 발생했다.[11] 이외에도 살인사건은 아니지만 2003년 1월부터 경상도와 강원도 지역에서 강도 짓을 벌여오던 이미혜를 경찰이 특수강도 혐의로 공개수배하였으나 수배 전단지에 올라온 피의자 이미혜의 뛰어난 미모에 얼짱 신드롬을 불러일으킨 강도얼짱 사건이 있었다.[12][13][14]
미국에서는 연중에 이라크전 명분 논란과 아부 그라이브 포로 학대사건 등에 대한 논란이 연쇄적으로 벌어지자 조지 부시 대통령은 여론으로부터 비난을 받아 위기를 겪었다. 특히, 이해 6월에 개봉한 화씨 911은 부시 대통령 일가에 대해 밝혀지지 않은 사실들이 상당수 포함돼 있었기에 정치평론가들마저 2004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정권 교체가 이루어질 것으로 예측하였다. 이에 힘입어 당시 민주당 소속의 존 케리 후보는 '경제 후퇴'와 '이라크 전쟁 정책'을 비판하며, 국민들의 지지를 받아 부시를 이길 것처럼 보였으나, 테러 위협의 공포로부터 해방되길 바랐던 국민들은 부시를 더 크게 밀어주며 부시 대통령은 아슬아슬하게 연임에 성공했다. 한편, 마이클 잭슨의 여동생인 자넷 잭슨이 슈퍼볼 XXXVIII 하프타임 쇼에서 가슴이 노출되는 니플 게이트가 발생해 전 세계에 어마어마한 파문을 일으켰다.[15] 이후 5월에는 미 전역에 큰 인기를 끌었던 시트콤 프렌즈가 방영 10년 만에 종영을 맞이하였고, 6월에는 자신의 개조된 불도저를 몰고 원한 있는 사람들의 건물들을 부순 킬도저 사건이 발생해 아쉬움과 분노가 교차하였다. 또, 이해 12월에는 미국의 대표적인 메인 뉴스 NBC Nightly News의 앵커 톰 브로코를 시작으로 1980년대 초반부터 진행을 맡아 온 CBS 이브닝 뉴스의 댄 래더와 ABC 월드 뉴스 투나잇의 피터 제닝스가 2005년 3~4월에 연이어 은퇴하면서 2004년은 메인 뉴스 앵커 빅3시대의 마지막이 되었다.[16]
중국에서는 2월과 6월에 6자회담[17]이 개최되었다. 2월 회담에서는 한반도의 비핵화를 이루기 위해 6개국의 다자간 합의가 성사되었으며, 2008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 때 남한과 북한이 단일팀을 구성해 공동입장하는 것으로 가닥을 잡았다. 이후 4개월 만에 개최된 6월 회담에서도 같은 기조로 유지될 것으로 예측했으나 북한이 미국과의 접촉에서 자신들은 핵 개발 계획을 보유하고 있다고 돌연 시사하면서 큰 파장이 일었다. 이후 이해 9월에는 2003년 3월까지 재임한 장쩌민 전 국가주석이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자리마저 사임하면서 후진타오 시대의 개막을 본격화하였다. 한편 중국에서 시작된 사스[18]와 중국 정부의 도가 지나친 고구려 역사 왜곡으로 한중관계는 냉랭해졌으며, 한국 정부도 이를 인지하여 고구려 역사 바로하기와 고구려연구재단을 설립함으로써 공고히 대응해 나갔다.
일본에서는 독도, 납북 일본인 문제 그리고 이라크 파병 문제가 2004년의 주요화제였다. 5월 4일부터 사흘에 걸쳐 일본의 극우단체 소속 회원들이 독도 부근에서 해상시위를 한 뒤 불법으로 독도 상륙을 하려고 시도하자 한국의 독도경비대와 일본의 해상보안청이 저지하여 가까스로 유혈사태를 면하였다. 5월 22일에는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가 납북 일본인에 대해 북한과 논의하기 위해 1년 8개월 만에 김정일 위원장과 평양에서 정상회담을 가졌고, 북한이 적극적인 태도로 조사에 임하면서 의미있는 회담으로 평가되었다. 10월에는 이라크에서 피살된 코다 쇼세이를 두고 일본 정부가 이라크 파병을 고민하였으나 끝내 파병하지 않기로 결정하면서 연말까지 갑론을박이 이어졌다. 이외에도 사세보 소학교 동급생 살인사건과 Bakky 사건 등의 엽기적인 사건들이 발생해 일본 사회를 경악케 한 바 있다.
이외에도 일본에서는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의 개혁 의지에 따라 전년도에 이어 이해에도 주목할 만한 변화가 있었다. 우선 이해 12월 17일, ‘헤이세이 16년(2004년) 법률 제110호’로 불리는 경관법이 국토교통성[19]의 주도로 일부 시행되면서 길거리와 도시 경관에 국가가 직접 개입하기 시작했다.[20][21] 또, 기존의 사법시험 체제를 폐지하고 아시아에서는 첫 번째로 로스쿨을 도입하였으며, 이와 함께 예산의 경직성과 인사의 한계를 타파하기 위해 일본의 국립대학을 전부 법인화 해서 경영하도록 결정했다. 마지막으로, 제도고속도교통영단이 도쿄메트로로 4월에 민영화되고, 헤이세이 신권이라고 불리는 새 일본 지폐가 11월에 교체되었다.[22]
러시아에서는 2000년 5월 7일에 임기를 시작한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러시아의 경제회복과 안정이라는 목표를 공약으로 내걸어 71%의 지지를 얻으면서 재선에 성공하였다. 그러나 2기 정부가 시작되자마자 러시아령 체첸 공화국의 수도 그로즈니에서 카디로프 대통령을 겨냥한 폭탄 테러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는 반러 성향인 반군 세력이 러시아로부터의 분리 독립을 요구하기 위해 행한 것으로 카디로프 체첸 공화국 대통령과 바르노프 러시아 공군 사령관을 비롯하여 20여 명이 사망하고, 50명 정도가 부상당했다. 또, 이해 9월에는 러시아령 북오세티야 공화국에 소재하는 베슬란 공립학교에서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에 의한 대규모 인질사건이 발생해 364명이 사망하고 753명이 부상을 입기도 하였다. # 이외에도 러시아 여객기 연쇄 테러 사건과 오렌지 혁명[23] 등으로 러시아 국민들에게는 악몽 같은 한 해였다.
일본한자능력검정협회가 선정한 2004년 올해의 한자는 '災(재앙 재)'였다. UN은 2004년을 '노예제 반대투쟁 및 폐지의 해'와 '세계 쌀의 해'로 지정했고, 서울신문은 대한매일신보 창간을 기준으로 '창간 100년'을, 기상청은 1904년 측후소 설치를 기준으로 '근대기상 100년'을 각각 맞이했다. FIFA도 'FIFA 100' 행사와 기념우표를 발행하여 설립 후 100돌을 성대히 맞이하였다. 한편 철도청[24]은 출범 40주년 및 KTX 개통의 원년으로, 서울특별시지하철공사[25]는 서울지하철 개통 30주년을 기념하였다.
3. 정치
3.1. 세계 선거 일정
- 3월 14일: 러시아 - 2004년 러시아 대통령 선거
- 3월 20일: 대만 - 제11대 대만 정부총통 선거
- 4월 15일: 대한민국 -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 7월 11일: 일본 - 제20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
- 11월 2일: 미국 - 2004년 미국 대통령 선거 + 2004년 미국 양원·주지사 선거
- 11월 11일: 대만 - 제6대 대만 입법위원 선거
- 11월 21일: 우크라이나 - 2004년 우크라이나 대통령 선거
- 12월 7일: 가나 - 2004년 가나 대통령 선거
3.2. 대한민국
3.2.1. 참여정부 vs 검찰 vs 재벌
| 2월 19일 SBS 8 뉴스[26] |
1월 1일이 되자마자 송광수 검찰총장은 "청와대의 반발에도 개의치 않고 수사하겠다"는 입장을 밝히며 정치권에 파란을 예고했다. 나흘 후 검찰은 첫 번째 타켓으로 한나라당의 김영일 의원을 소환해 삼성 등 대기업들로부터 불법자금을 추가로 모금하도록 지시했는지 조사했으며, 다음 타겟으로 태광실업의 박연차 회장이 소환돼 한나라당에는 10억 원, 새천년민주당에는 7억 원 정도를 제공한 정황이 확인되었다. # 1월 6일에는 한화 김승연 회장이 소환 하루 전에 돌연 미국으로 출국하면서 한화를 대상으로 압수수색을 벌였으나 수사에 헛점이 드러나면서 별다른 정보는 얻지 못했다. 1월 7일에는 금호아시아나[27]가 새천년민주당과 한나라당에 각각 10억 원씩 제공한 것이 검찰 조사 결과 드러났고, 1월 8일에는 썬앤문 그룹의 문병욱 회장이 노무현 후보에게 5천만 원을 제공한 사실이 드러났다. # 이어서 1월 9일에는 대우건설이 한나라당에 10억 원, 새천년민주당에 8억 원을 전달했다고 검찰이 발표했으며, 1월 10일에는 검찰이 한나라당 의원 4명과 새천년민주당 의원 2명을 구속키로 결정하면서 국회의원이 무려 6명이나 구속·수감되는 사상 초유의 일이 발생했다. 이후 1월 11일부터 1월 14일까지는 김영삼 전 대통령의 안풍사건으로 수면 위로 오르면서 불법 대선자금 수사가 잠시 주춤해졌으나 1월 15일에 열린우리당의 이재정 의원이 검찰에 한화로부터 10억 원을 수수했다고 실토하면서 그 동안 의구심만 들게했던 한화의 대선 관여가 확실해지면서 수사가 다시 탄력을 받기 시작했다. #
1월 20일에는 롯데그룹이 한나라당 신경식 의원에게 10억 원을 받은 것이 확인됐다고 검찰이 발표했다. # 이어서 1월 26일에는 한나라당 서청원 의원이 한화로부터 10억 원을 받은 것이 밝혀져 이틀 후인 1월 28일 서청원 의원은 구속·수감되었다. 같은 날, 청와대는 윤태영 대변인을 통해 '노 캠프 75억 수수'라는 내용이 담겨진 뉴스를 허위사실이라고 말하며 강력한 법적 대응방침을 예고했다. 그러나 보란 듯이 바로 1월 29일, 새천년민주당의 김경재 의원이 노무현 캠프가 104억 원을 수수했을 가능성을 제기하며 큰 파장이 일었다. 결국 새천년민주당과 청와대는 정면 충돌해 서로 맞고발을 하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 이후 1월 31일에는 한화갑 새천년민주당 의원의 구속, 안영근[28] 열린우리당 의원의 실토로 1월이 막을 내렸다.
2월 2일, 검찰의 첫 행보는 노무현 대통령과 정동영 열린우리당 의장의 경선자금 수사였다. 또, 노무현 대통령의 사돈 민경찬이 650억 원의 수수한 점을 확인하고, 내사에 착수했다. # 2월 5일에는 노무현 대통령이 결국 자신의 사돈이 관련된 불미스러운 일에 대해 국민에게 사과했으며, 검찰에게는 원칙적으로 처벌하라고 주문했다. 2월 9일에는 1월 28일 구속·수감된 한나라당 서청원 의원이 석방되었으며, 김진흥 특검이 청와대 계좌를 압수수색하는 등 강도 높은 수사에 착수했다. # 다음날, 국회는 야당 주도로 대선자금 청문회를 추진하였으나 첫날부터 싸움이 벌어지면서 또다시 파행으로 이어졌다. 또, 특검이 노무현 대통령과 썬앤문 그룹의 유착관계에 대해 사실무근이라고 결론 내렸다. 2월 12일에는 삼성그룹이 한나라당에 170억 원을 준 것과 대부업체 굿머니가 신계륜 열린우리당 의원에게 30억 원을 로비한 것이 알려져 파문이 일었다. # 2월 14일, 대검찰청 중앙수사부가 삼성그룹, LG, SK, 현대자동차, 롯데그룹 등 5대 그룹의 총수를 선별적으로 소환해 처벌할 방침이라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2월 16일, 대통령 측근비리를 수사 중이던 특검보가 돌연 사퇴를 표명하여 논란이 일었다. 또, 검찰은 기업인들에 대해 선처를 바란다는 노무현 대통령의 발언을 무시하고 기존 입장을 고수하겠다며 수사 의지를 확고히 하였다. # 다음날, 최병렬 한나라당 대표는 대규모 불법 대선자금 수수사건은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의 잘못으로 촉발된 것이라며 선을 그었고, 검찰은 4~5명의 정치인을 추가 소환할 것이라고 밝혔다. 2월 18일에는 2002년 대선 직전에 한나라당으로 당적을 옮긴 새천년민주당과 자유민주연합 출신 의원 11명이 이적 대가로 2억 원씩 수수한 정황을 잡았으며, 대통령의 최측근인 안희정이 10억 원을 추가로 수수한 사실이 검찰에 포착됐다. 2월 20일에는 자유민주연합의 이인제 의원이 한나라당으로부터 5억 원을 받은 것이 드러나 큰 파문이 일었고, 결국 2월 21일 이인제 의원을 소환해 조사키로 결정하였다. 2월 22일에는 그동안 대부업체 굿머니와의 관계를 부정했던 열린우리당 신계륜 의원이 그 회사로부터 3억 원을 받은 것이 확인돼 검찰이 소환조사하였다. 이후 2월 24일에 열린우리당 정대철 의원이 대한항공으로부터 6억 원, 2월 25일에는 김원기 열린우리당 고문과 박근혜 한나라당 의원이 대의자금 명목으로 1~2억 원 상당의 금품을 수수한 것이 파악됐다. 2월 27일에는 제16대 대통령 선거에 관여한 삼성전자의 주주총회가 개최됐는데, 이때 주주들과 시민단체들의 성토로 진행에 차질을 빚었다. # 이를 의식해서인지 검찰은 5대 그룹[29]의 총수들을 불구속 기소하기로 방침을 세우면서 수사는 막바지에 다다랐음을 시사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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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월 13일 조선일보 | 5월 15일 동아일보 |
제가 유감스러운 것은, 한 번도 한나라당이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인정한 적이 없습니다. 처음으로 탄핵 얘기가 나온 게 언제인지 아십니까? 작년 3월 10일, 취임 14일 후입니다. 그리고 지난 1년 동안 언론에 보도된 탄핵 관련 발언만 한나라당 민주당 합쳐서 무려 114건입니다.
열린우리당 유시민 의원의 100분 토론 발언 #[30]
열린우리당 유시민 의원의 100분 토론 발언 #[30]
사람은 아이를 낳을 때 진통을 겪더군요. 또 곤충은 허물을 벗을 때 엄청난 고통을 겪습니다. 사회는 개혁이 될 때 변화가 생길 때 진통을 겪습니다. 저는 이번 탄핵을 그 진통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저 괴롭기만 하고 그저 소모적이기만한 진통은 아닐 것이다, 반드시 새로운 발전과 도약을 위한 진통일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현대로템[31]을 방문 중이던 노무현 대통령 #
현대로템[31]을 방문 중이던 노무현 대통령 #
여러분, 얼마나 놀라셨습니까? 설마 그러랴 했습니다마는 노무현 대통령 탄핵안이 가결됐습니다. 헌법기관인 국회의원의 개별적인 판단이라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193명의 찬성으로, 비리로 점철된 16대 국회는 이제 대통령의 권한을 정지시킨 것입니다. 탄핵 가결, 그 최대 피해자는 물론 우리 국민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엄기영 앵커의 MBC 뉴스데스크 오프닝 #
엄기영 앵커의 MBC 뉴스데스크 오프닝 #
| 노무현 대통령 직무정지 기간 / 고건 총리 권한대행 체제 기간 |
| 2004년 3월 12일 17시 15분 ~ 2004년 5월 14일 10시 28분 |
2003년 9월, 2000년 1월 창당 이후 쭉 여당이었던 새천년민주당이 당 내 노선갈등으로 계파 간 싸움이 잦아지면서 분당 위기를 겪었다. 결국, 우려한 대로 새천년민주당은 친노계(탈당파)와 동교동계(온건파)로 나뉘어 노무현 대통령의 지지 세력인 친노계는 신규 정당인 열린우리당으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지지 세력인 동교동계는 기존 정당인 새천년민주당에 계속 남아있었다.[32] 그 결과 분당 과정을 겪은 새천년민주당은 풍비박산 난 당의 모습에 노무현 대통령을 지속적으로 공격하는 행보를 보였으며,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직전에는 새천년민주당의 당원 중 한 명이 당원들이 열심히 고생해서 대통령 자리에 앉혀놨더니 당을 버리고 떠났다는 듯한 뉘앙스로 노무현 대통령을 직접적으로 비난하기도 하였다. 이는 새천년민주당이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을 실행키로 결정한 대표적인 원인 중 하나이다.
2004년 2월, 이번에는 노무현 대통령의 발언이 큰 논란이 되었다. 첫 번째는 2월 18일에 치러진 합동 기자회견에서 개헌저지선까지 무너지면 그 뒤에 어떤 일이 생길지는 나도 정말 말씀드릴 수가 없다라는 발언을 해서 개헌저지선 논란을 일으켰으며 #, 두 번째는 2월 24일에 치러진 대통령 기자회견에서 국민들이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을 압도적으로 지지해 줄 것을 기대한다. 대통령이 뭘 잘해서 열린우리당이 표를 얻을 수만 있다면 합법적인 모든 것을 다하고 싶다라는 발언을 해서 열린우리당 공개 지지 발언 논란을 일으켰다. #
이에 새천년민주당 조순형 대표는 벼르고 벼르다 2월 25일[33], 최병렬 한나라당 대표 그리고 김종필 자유민주연합 총재와 함께 긴급 회동을 가졌고, 그 결과 '대통령 탄핵'을 고려해야 한다는 입장을 내비쳤다. # 그러다 3월 2일과 3월 3일에 여택수 청와대 행정관과 안희정 전 노무현 후보 캠프 정무팀장이 제16대 대통령 선거가 치러진 2002년에 롯데그룹으로부터 각각 5억 원 정도의 정치 자금을 받은 사실이 차례대로 언론에서 보도되었고, 야권 3당은 대통령을 탄핵하는 쪽으로 마음을 굳혔다.[34]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난 3월 9일, 야당은 대통령 측근 비리 / 도덕적인 정당성의 상실 / 국정파탄과 무능이란 세 가지 사유로 대통령 탄핵안을 국회에서 발의했으며, 이는 56년 헌정 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
운명의 날을 하루 앞둔 3월 11일, 노무현 대통령이 청와대로 기자들을 초청해 특별기자회견을 열었는데, 여기서 노무현 대통령은 대선자금과 측근 비리에 대해서는 거듭 사과했으나, 탄핵을 모면하기 위해 야당에게 사과할 생각은 전혀 없다고 밝혔다. #[35] 또, 노무현 대통령은 그 자리에서 대통령의 친형인 노건평에게 돈을 주고 연임을 청탁한 것으로 알려진 남상국 전 대우건설 사장을 직접적으로 거론하였고, 남상국 전 사장은 그 기자회견을 보고 끝내 한강에 투신하였다. #[36] 이에 여당과 야당은 서로 남상국 전 대우건설 사장의 투신 원인을 놓고 책임론을 제기하면서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을 자아냈다.
같은 날(3월 11일), 국회에서는 열린우리당 의원들이 국회의사당을 사수한다며 의원 일부가 본회의장에서 잠을 청하거나 보초를 서는 등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탄핵을 저지하기 위해 준비하였다. 이에 맞서 야당은 박관용 국회의장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국회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는 등 대여 공격에 대비하고 있었다. 마침내 운명의 날이 밝아오면서 여야 의원들간의 난투극이 벌어지고 국회가 소란에 빠진 가운데 박관용 국회의장은 야당의 호위를 받으며, 본회의장에 입장하였다. 이후 박관용 국회의장은 의장석에 도달하자마자 질서유지권을 발동하였으며, 대통령 탄핵 소추안의 안건 소개나 찬반 토론도 생략한 채 곧바로 투표를 진행했다. 이때 열린우리당은 대거 불참을 선언했지만 탄핵안 투표는 힘 있는 야당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마침내 가결 193표 부결 2표라는 결과가 나오게 되면서 박관용 의장은 대통령 탄핵소추안 가결을 선포하였다. 결국 노무현 대통령은 오후 5시 15분을 시작으로 대통령 권한이 정지되어 고건 총리의 권한대행 체제로 전환되었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고건 전 대통령 권한대행은 전국의 모든 군부대와 경찰에 비상 근무와 경계 강화를 지시했다. # # 같은 시각, 노무현 대통령은 현대로템을 방문해 시설을 둘러보다가 자신의 탄핵 소식을 전해 듣고, 그 자리에서 헌법재판소는 법적으로 판단하니까 정치적으로 판단하는 것과는 결론이 다를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또, 영부인 권양숙 여사는 경남여성대표 오찬 간담회에 참석해 세련된 정치를 보여주지 못한 것에 대해 송구스러움과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한편 이 모습을 지켜 본 시민들은 '탄핵안 가결'이라는 결과가 나온 것에 대해 경악을 금치 못했다. 시민들은 국회의 판단을 개탄스럽게 여기며 3월부터 5월까지 광화문광장과 서울시청 앞 분수대[37]에서 대규모 촛불집회를 열었는데 이때 탄핵 반대에 대한 시민들의 외침과 열기는 대단했다. 그 이유는 탄핵안 가결 당일(3월 12일)부터 탄핵안 기각 결정이 내려질 때(5월 15일)까지 많은 사람들이 참여했기 때문이다. 촛불집회 첫 날에는 1만 2000여 명 이상이 모였으며 #, 촛불집회 사흘 째에도 수만 명이 거리로 나와 평화적으로 탄핵 반대를 외쳤다. # 이후 촛불집회 여드레 만에 촛불집회 참가자가 사상 최대치(13만 명)를 기록하면서 대한민국 뿐 아니라 외신들도 놀라게 했다. 특히, 이해에 열린 촛불집회는 진보-보수 지지자[38] 그리고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두들 평화롭고 질서 있게 집회에 임했다는 점에서 우리나라 국민들의 시민의식이 또 한 차례 성장했다는 것을 입증하기도 한다.
탄핵안 가결에 대한 전직 대통령들의 반응 또한 국론 분열의 현장이었던 여의도만큼 반응이 저마다 각각 달랐다. 먼저, 노태우 전 대통령은 탄핵안 가결은 나라에 불행한 일이라며 빠른 정상화를 위해 국민 모두의 단결을 강조했으며, 김대중 전 대통령은 탄핵사태는 매우 심각한 상황이라며 여야 정치인들은 책임감을 갖고 사태를 수습하라고 촉구했다. 반면, 김영삼 전 대통령은 앞서 말한 두 전직 대통령들과는 달리 이번 탄핵은 자신(김영삼)의 충고를 소홀히 여긴 노무현 대통령에게 엄연히 큰 책임이 있는 것이라며 그를 강하게 문책했다. 나머지 최규하 전 대통령과 전두환 전 대통령은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안 가결 소식에 대해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았다.
이 모습을 본 세계 주요 국가의 수장들도 우리나라의 탄핵안 가결 소식을 두고 여러 반응을 보였다.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백악관 기자회견을 통해 대한민국은 역동적인 민주주의 국가라며 하루 빨리 불안정한 국면에서 벗어나기를 바란다는 입장을 드러냈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도 관저에서 한일관계의 영향과 다가올 6자회담에 악영향이 있을까 주시하고 있으며, 순조로운 국정 운영을 위해 노무현 대통령의 직무 복귀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과 장쩌민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은 당 회의를 거친 뒤 대한민국의 내정에서 비롯된 만큼 대한민국의 정국이 하루 빨리 냉정을 되찾기를 바란다고 전했다.[39]
대통령 탄핵안이 국회에서 가결된 지 2달이 지난 5월 14일, 헌법재판소는 기나 긴 심판 끝에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을 끝내 기각으로 결정 내리면서 노무현 대통령은 업무에 복귀했고, 정국의 주도권은 다시 여권으로 돌아갔다. 이때 열린우리당은 탄핵기각 결정이 사필귀정이라며 야당의 사과와 반성을 촉구했고, 한나라당은 헌재의 결정을 겸허히 수용한다며 국민에게 심려를 끼쳐 죄송하다는 입장을 보였다. 나머지 세 정당(민주노동당, 새천년민주당, 자유민주연합)은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존중한다며 이제부터는 상생의 정치를 펼쳐 보자는 다짐을 하였다.
그러나 12년 후인 2016년, 또 다시 대통령 탄핵 소추안이 국회에서 가결되는 일이 벌어졌다. 놀라운 점은 2004년 대통령 탄핵 사태와 2016년 대통령 탄핵 사태를 비교했을 때 탄핵 추진을 주도하던 측과 반대하던 측의 위치가 소수를 제외하고 모두 뒤바뀌었다. 대표적으로 노무현 대통령을 변호하던 문재인 피청구인 대리인단 간사, 정세균 열린우리당 의원은 각각 대통령과 총리에 취임한 반면,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을 이끌던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와 김기춘 국회 법제사법위원장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피의자 신분으로 대통령직이 파면되었고, 이내 구속되었다. 다시 말해 당시의 주역들은 12년 만에 역할이 바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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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 및 심판#|]] 부분을}}} 참고하십시오.3.2.3.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 KBS 뉴스의 보도물 모음집[40] |
제17대 총선을 치르기 전 KBS 뉴스 보도국에서 집중적으로 여론조사를 실시해 시민들의 의사 결정을 예측했다. 먼저, KBS가 서울 강북지역 20개 선거구를 조사한 결과 모두 열린우리당이 강세를 보였다. 이어서 서울 강남지역 21개 선거구를 조사한 결과 강북보다는 덜했지만 이 지역 또한 열린우리당이 한나라당보다 조금 더 우세했다. 경기 남부지역 26개 선거구에서는 열린우리당이 크게 앞서는 상황이 나타났으며, 경기 북부지역 23개 선거구에서는 열린우리당이 초강세를 보였다. 인천지역 12개 선거구에서는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이 혼전 양상을 보이며 치열한 격전지임을 드러냈다.[42]
다음은 대전, 충남지역 15개 선거구인데 이 중 열린우리당은 14곳에서 1위를 하여 강세를 유지했다. 충북, 강원지역 15개 선거구 중에서 열린우리당이 11곳에서 우세를 보여 탄핵 역풍을 실감케 했다. 진보 정당의 지지 기반이 탄탄한 광주, 전남지역 20개 선거구 중 경합 지역 3곳을 제외하고는 열린우리당이 크게 앞질렀다. 이외에도 전북, 제주지역 13개 선거구에서는 열린우리당이 모든 곳에서 1위를 차지하며 독식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반면, 보수 정당의 탄탄한 결집력을 자랑하는 경남, 울산지역 23개 선거구에서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이 초접전 양상을 보였다. 또, 부산지역 18개 선거구에서는 한나라당이 열린우리당을 앞서기도 하였다. 한편 대구지역 12개 선거구와 경북지역 15개 선거구에서는 접전 양상을 보였으나 한나라당이 열린우리당보다 더 우세했다.[43]
이후 4월 15일에 치른 제17대 총선 투표 결과, 당시 열린우리당[44]에 많은 동정표가 쏟아지면서 과반 이상의 의석수를 확보하게 되어 16대 국회와는 달리 반전을 이루어냈다. 제 1야당인 한나라당은 열린우리당에 패했으면서도 개헌저지선을 확보하게 되었다. 민주노동당도 약진을 이루어냈으며, 2000년 창당 이후 처음으로 제3당으로 원내진출이라는 대성과를 이루었다. 반면, 노무현 대통령 탄핵안 발의를 주도한 새천년민주당은 추락했고, 그와 손 잡은 자유민주연합은 명맥만 유지했다.[45]
이때 각 정당의 분위기를 살펴보면 먼저, 열린우리당은 개표 방송을 지켜보는 내내 기쁨을 감추지 못해 환호성과 박수가 끊이지 않는 등 축제 분위기가 이어졌다. # 특히, 열린우리당 시점에서 바라본 제17대 총선은 대통령의 탄핵을 막을 수 있는 마지막 수단이라고 판단하였기에 마지막까지 환호성과 박수가 끊이지 않을 만도 하다. 당시 노인비하 논란으로 선대위원장에서 사퇴하고 평당원 신분으로 선거운동을 지휘하던 정동영 의원은 열린우리당이 압승한다는 뉴스보도를 보고 눈물을 흘리기도 했는데, 그 장면이 항상 노무현 전 대통령을 다룬 뉴스에서 자료화면으로 사용될 만큼 유명하다.
한나라당은 열린우리당에 패했으면서도 예측의석 수를 넘겨 다행이라는 평이 많았으며, 동시에 개헌저지선을 확보해 1당 독재는 막았다는 의미있는 결과를 얻으면서 당 지도부 내에서도 나쁘지만은 않은 결과라고 판단하였다. # 때문에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대표가 영웅 취급을 받기도 했다.[46] 그 결과 당시 총선을 계기로 박근혜 대표의 영향력이 높아지면서 박근혜 대표를 중심으로 한 계파인 친박이 급속도로 성장하기 시작해 기존의 이회창/최병렬 계파를 따돌리고 한나라당의 주도권을 완전히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이때 박근혜 대표의 총선 승리와 활약이 훗날 그녀의 대통령 당선에 기여한 가장 큰 정치적 성과가 되었다.
민주노동당은 여러 지역에서 선택을 받아 새천년민주당과 자유민주연합을 이기고 당당히 제3당 원내진출을 하게 되면서 열린우리당과 비슷하게 축제 분위기가 이어졌다. # 또, "살림살이 좀 나아지셨습니까?"라는 유행어를 남긴 민주노동당 권영길 대표는 제15대 대통령 선거와 제16대 총선 그리고 제16대 대통령 선거 패배 이후 처음으로 얻은 승리라고 말하며, 이에 감격해했다. 허나 권영길 당시 민주노동당 대표는 ‘극좌’라는 정치 성향을 띠고 있었던지라 한나라당을 비하하는 듯한 인터뷰를 해 논란이 되기도 했다.
새천년민주당은 개표 방송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몇몇 의원들 외에는 모두 당 사무실을 빠져 나가면서 당 소속 의원들과 당원들이 크나 큰 허탈감에 빠진 모습이 역력했다. # 왜냐하면 새천년민주당은 당시 노무현 대통령 탄핵에 찬성했다는 이유로 지지율은 좀 떨어졌어도 이전에 여당이었던 적도 있고, 전라도 지역에서는 비교적 표심을 사로잡았기 때문에 어느 정도 패할 것은 예상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기 때문. 자유민주연합 또한 새천년민주당과 크게 다를 바 없이 허탈한 모습을 보였다. # 이유는 자유민주연합 소속 국회의원들은 물론이고, 삼김시대를 이끌었던 한 사람이자 10선에 도전하는 김종필 당시 자유민주연합 총재마저 낙선했기 때문이다.[47]
청와대는 개표방송 초반까지는 별다른 감정 없이 담담하게 지켜보고 있다고 밝혔으나 개표 후반부에 들어서자 열린우리당의 제1당이 확실시되면서 안도하고 있다는 입장을 보였다. # 또, 청와대는 제17대 총선을 기점으로 노무현 대통령의 진정한 임기가 시작될 것이라면서 국정수행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보이기도 했다. 다만, 설령 열린우리당이 승리했더라도 당시는 대통령 권한정지라는 비정상적인 상황이었기 때문에 노무현 대통령은 고건 권한대행이 경제와 민생 등 국정 현안을 잘 챙기도록 적극 지원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하여 이후에는 말을 아꼈다.
여담으로 당시 진행된 제17대 총선은 사실상 마지막으로 진행된 대규모 낙선 운동 선거였던지라 선거 운동의 열기가 뜨거웠다. 특히 대규모 낙선 운동을 주도하기 위해 이해 2월에 발족된 “2004 총선시민연대”는 선거 운동이 시작되기 전인 2월~3월에 이미 낙천, 낙선 대상자를 발표하였다. 그들이 1차로 발표한 낙선 대상자는 총 66명이었으며, 이들 중 32명은 한나라당, 19명은 새천년민주당, 7명은 열린우리당, 3명은 자민련, 1명은 국민통합21, 또 다른 1명은 하나로국민연합 소속이었다. #
이후 제17대 총선 당선자들은 2004년 5월 30일부터 2008년 5월 29일까지 국회의원직을 수행하였다. 결과적으로 제17대 총선은 최초로 탄핵 시기에 진행되었고, 중진 의원들의 대규모 낙선과 초선의 활약 그리고 제6공화국 내에서 첫 여대야소를 이루었다는 점에서 20년 넘게 지난 현재까지도 꽤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회자되는 국회의원 선거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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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부분을}}} 참고하십시오.3.2.3.1. 정동영 노인 비하 발언 논란
2004년 3월 26일, 국민일보 소속 대학생 기자들과 한 인터뷰에서 정동영 열린우리당 의장이 "미래는 2~30대의 무대니까 6~70대는 투표를 하지 않아도 괜찮다"라는 발언을 해 노인 폄하 발언 파문이 일었다. 당시는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안이 국회에서 막 가결돼 헌법재판소의 판결을 기다리고 있던 시점으로, 대통령 탄핵을 강하게 추진한 야당들의 지지율 하락세와 여당인 열린우리당의 상승세가 대두되었던 때였다.[48] 파문이 확산되자 정동영 의장은 의장직 사퇴와 경로당에 방문해 연신 사과하는 등[49] 반성 행보를 이어갔지만, 노인 비하 발언을 계기로 고령 유권자들의 표심 이탈 현상은 이미 걷잡을 수 없을 정도가 되어 당초 언론들이 예상했던 200석 선점은커녕 150석을 간신히 넘기게 되었다.이후 2018년 정태옥의 이부망천 발언과 2020년 차명진 세월호 유가족 망언 파동 등 여러 정치인들의 망언이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터져나왔지만, 정동영의 해당 발언 이상으로 사회적 파장이 크고 후폭풍이 장기간 이어진 발언은 20[age(2000-01-01)]년 현재까지 나오지 않고 있다. 그 결과 한국의 정당들은 진보/보수를 막론하고 노년층 유권자들에게 극도로 신경쓰게 되었고, 2020년대 들어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고령 운전 문제를 그 어떤 정치인도 공론화하지 않는 등 젊은 세대보다 노년층에게 우호적인 스탠스를 취하게 되었다.[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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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정동영 노인 비하 발언 논란#|]] 부분을}}} 참고하십시오.3.2.4. 김선일 피랍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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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월 22일 중앙일보 | 6월 23일 조선일보 |
먼저, 김선일이 이라크에서 피랍된 사건을 설명하려면 김선일이 이라크에 입국한 2003년 6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2003년 당시 이라크는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의 이라크 침공으로 인해 그야말로 아비규환의 현장이었다. 게다가 미국의 침공으로 이라크 대통령궁이 무너지고, 수도 바그다드까지 장악되었으며, 반란군과 무장세력의 무자비한 공격으로 질서와 규율은 파괴된 지 오래였다. 그런데 당시 한국외국어대학교에 재학 중이던 김선일은 대학원 학비를 벌겠다며 살인이 일상처럼 벌어지는 이라크에 입국했다. 그렇게 그는 전쟁의 아픔이 채 가시지도 않은 이라크에 입국한 후 만 11개월 동안 미군의 군납업체인 가나무역에서 통역원으로 근무했다. 또, 그와 동시에 이라크 입국의 또 다른 목적이었던 선교 활동까지 펼치게 된다.
이라크에 입국한 지 11개월이 지난 2004년 5월 31일, 김선일은 바그다드의 한 고속도로를 주행하던 중 이라크의 무장세력 가운데 하나인 알 자르카위에게 납치되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한국에서는 김선일의 피랍 소식을 전혀 모른 상태였다. 피랍된 지 3주가 지난 6월 21일, 김선일이 이라크 무장세력에게 피랍된 내용이 담긴 비디오테이프가 알자지라 위성 방송을 통해 전해지면서 대한민국 외교부가 이를 확인하고, 국내 모든 방송사에서 일제히 그 소식을 뉴스 특보로 내보냈으며, 신문 기사 1면에 그 내용을 실었다. # 알자지라 위성 방송을 통해 알려진 그 테이프에는 초췌한 몰골로 무릎을 꿇은 채 흐느끼고 있는 김선일과 그의 뒷쪽에 서 있는 이라크 무장세력이 대한민국 정부에게 이라크 파병을 24시간 내에 철회하라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신속히 국가안전보장회의 상임위원회를 열고, 김선일 구출 작전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는 끝내 김선일의 구출 작전에 힘쓰겠다면서도 이라크 파병을 철회하지는 않을 것이라 시사하면서 무장세력의 요구를 끝내 듣지 않았다. 대신 어디까지나 이라크의 재건을 위한 것이라는 점을 적극적으로 알리기로 했으며, 이라크의 주변국과 모든 재외국민을 대상으로 대테러 예방 활동을 벌이기로 결정하였다고 전했다. # 이러한 사실이 방송을 통해 시민들한테 전해지자 김선일의 피랍 사실이 알려진 6월 21일부터 6월 25일까지 나흘 동안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지휘하는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과 이라크 파병을 끝내 추진하려는 노무현 대통령을 규탄하는 시위가 전국 각 지역에서 벌어졌다. #
2004년 6월 23일, 생존해 있을 것으로 추정된 김선일은 이라크 팔루자 지역으로부터 8Km 떨어진 곳에서 몸에 폭탄이 둘러싸인 채로 발견되었다. 사흘 후인 6월 26일, 김선일의 유해는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한국으로 송환되었으며, 장례식을 치른 뒤 안장되었다. #
시민들은 김선일의 피살 소식을 전해 들은 뒤 큰 충격에 빠진 모습이 역력했다. 대부분의 시민들은 피랍 후 인질을 석방해 줄 것으로 기대했지만, 끝내 무참히 살해한 것에 대해 분노하고 분개해 했으며, 일부는 슬픔을 잠겨 통곡해 하거나 오열해 하기도 하였다. # 특히, 광화문 거리에서는 시민들이 총 3,000여 명이 모여 집회를 열었을 정도로 이라크 무장세력의 무모한 테러행위를 강경하게 규탄하는 모습을 보였다. 한편 김선일의 피살 소식을 들은 가족들은 온통 통곡에 휩싸였다. 지난 6월 22일까지만 해도 김선일이 살아 있을 것이라는 실낱 같은 희망에 뜬눈으로 밤을 지샜지만 뉴스 속보를 통해 아들의 피살 소식이 전해지자 망연자실해 했다. 이후 김선일의 부모님은 오랫동안 통곡을 하다가 끝내 실신해 주위를 안타깝게 하였다. #
정치권에서도 김선일 피살 소식에 여야 할 것 없이 한 목소리를 냈다. 국회에서는 시급히 긴급대책회의를 열고, 반인륜적 테러행위를 규탄한다는 입장을 발표하였다. 특히, 신기남 열린우리당 의장은 자기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테러를 수단으로 하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결코 용납할 수 없다고 밝혔으며,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는 반인륜적인 행위는 정말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다만, 이라크 파병 찬반에 대해서는 이견이 어느 정도 존재했다. 열린우리당 의원 27명을 포함한 50명의 국회의원들이 파병 중단 결의안을 국회에 제출하여 당. 정 간에 마찰이 생겼다. 정당별로 파악할 경우 대체적으로 한나라당 의원들은 노무현 정부의 이라크 파병에 찬성하는 분위기였으나 열린우리당과 민주노동당은 청와대의 정책에 반대하는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다른 국가의 수장들도 이 사건을 보고 김선일을 애도하고, 김선일을 살해한 무장단체를 강하게 비판했다.[52] 특히, 미국의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김선일을 무참히 살해한 것은 야만적인 범죄라며 맹비난했다. 또, 부시 대통령은 한국 정부가 지난 며칠간 테러에 대해 보여준 확고부동한 태도에 감명 받았다는 말을 전하며 이라크 파병을 계속 진행해 줄 것을 당부했다. 일본의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는 김선일 피살에 대해 애도를 표하고, 무고한 민간인을 희생시킨 이라크 무장단체의 비열한 행위는 결코 용납할 수 없다고 말했다. 중국의 후진타오 국가주석도 김선일과 그의 가족에게 애도를 표하고, 이라크의 무자비한 살해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강한 어조로 입장을 발표하였다. 추가로 코피아난 UN 사무총장 또한 이례적으로 반응을 내놓았는데, 그는 UN 회원국이 단합하여 테러범에 대항해야 한다며 강력히 규탄했다.
이후 2007년, 김선일의 부모는 대한민국 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했으나 재판부에서는 김선일 피살 사건에 대해 국가가 배상을 질 만한 책임은 없다고 판결하였다. 우연히도 김선일의 부모가 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청구한 2007년에는 김선일 피살 사건과 비슷한 샘물교회 선교단 아프가니스탄 피랍 사건이 발생해 또다시 충격을 안겨주었다.[53] 또, 이미 위에서도 언급하였듯이 김선일은 별 다른 목적이 아니라 선교를 하기 위해 이라크에 입국한 것이 이후에 밝혀졌기 때문에 김선일에 대해 옹호 여론보다는 비판 여론이 더 거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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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김선일 피랍 사건#|]] 부분을}}} 참고하십시오.3.2.5. 노무현 정부의 행정수도 이전 논란
| 10월 21일 MBC 뉴스데스크 |
먼저, 신행정수도 이전 논란이 일어난 배경으로는 김대중 정부 때인 2002년 9월, 노무현 당시 새천년민주당 대통령 후보가 "한계에 부딪힌 수도권 집중 억제와 낙후된 지역경제 문제의 근본적 해결을 위해 충청권에 행정수도를 건설, 청와대와 중앙부처부터 옮겨가겠다"라고 입장을 밝히면서 행정수도 이전을 공식적으로 자신의 대선 공약의 포함시킨 때부터였다. 이후 3개월이 지난 2002년 12월에는 노무현 대통령 후보 당선자가 '신행정수도의건설을위한특별조치법'을 발의하였고, 취임 직후인 2003년 4월에는 노무현 대통령이 대통령 산하의 신행정수도건설추진기획단을 발족시켰다.
해가 지나 2004년 1월에 드디어 노무현 정부가 본격적으로 행정수도 이전을 실행하기로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이와 관련해 정부는 신행정수도 예정지의 땅투기를 막기 위해서 규제의 그물막을 이중으로 대폭 강화하기로 결정했다. # 반면, 정부의 행정수도 이전 계획을 두고 심기가 불편했던 이명박 당시 서울특별시장은 정부의 수도 이전 정책에 반대하기 위해 반대운동에 돌입할 방침이라고 발표하면서 노무현 정부에게 패배하지 않을 것이라는 강한 의지를 보였다. 하지만 노무현 정부가 신행정수도 이전 정책을 굽히지 않는 태도로 받아들이자 서울특별시청 관계자와 교수 등 전문가 100여 명으로 구성된 수도이전 반대 국민포럼은 행정수도 이전의 근거법률인 신행정수도 건설특별법에 위헌소지가 있다며 헌법소원을 내기로 결정했다. #
이를 의식했는지 노무현 대통령은 도리어 행정수도 이전은 자신의 진퇴를 걸고 성사 시키겠다며 자신감 있는 모습을 보였다. 또, 정부는 같은 날 신행정수도로 선정한 4곳을 발표했는데 선정된 곳은 충청북도 음성·진천과 충청남도 천안· 연기 그리고 충청남도 공주·논산 등이었다. 때문에 후보지로 선정된 지역의 주민들은 대체적으로 환영하는 분위기를 보이면서도 한편으로는 부동산 투기가 증가할까 걱정하는 분위기도 보였다. # 이후 80명의 평가위원들이 일주일 동안 후보지 4곳에 대한 점수를 매긴 결과 그 동안 최종 입지로 유력시되어 온 충남의 연기·공주 지역이 가장 높은 점수를 받아 최종적으로 신행정수도 지역으로 선정되었다. 정부의 선정 지역 발표가 있은 후 얼마 가지 않아 투기꾼들이 입주권을 노리고 빈집까지 싹쓸이하는 사태가 벌어져 선정 지역 주민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기도 했다.
아무튼 이렇게 순탄하게 진행될 줄만 알았던 노무현 정부의 신행정수도 이전 계획에 반발한 한나라당은 노무현 대통령의 대선 공약 중 하나였던 국민투표로 신행정수도 이전을 결정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이해찬 당시 국무총리는 국민 투표 주장에 반대하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이와 같은 총리의 태도에 서울시청과 한나라당은 총리 사퇴론을 거듭 주장하며, 행정수도 이전이 합헌인지 위헌인지 가리기 위해 헌법재판소에 헌법 소원을 제기했다. # 또, 한나라당은 헌법재판소의 위헌 판정을 유도하기 위해 여러 전문가들을 초빙해 자문을 구하는 등 지속적으로 신행정수도 이전 논란을 가라 앉힐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였다.
이와 더불어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를 비롯한 보수 성향의 언론사들이 참여정부의 행정수도 이전을 연일 비판하고 나서자 노무현 대통령은 저주의 굿판을 걷어치우라고 언급하며 맹비난하였다. 또, 1977년에 박정희 정부가 행정수도 이전을 정책으로 내세웠을 당시에는 오히려 동조하는 분위기였지만, 왜 자신이 추진할 때는 그렇게까지 반발하는지 의문이라고 말하며 특정 언론사에 전면 대응에 돌입하면서 행정수도 이전 의지를 천명하였다. 즉, 행정수도 이전 문제에 있어서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다는 것을 간접적으로나마 피력한 것이다. #
수도이전을 확정하고 이전 절차를 정하는 법률은 ‘우리 수도가 서울’이라는 불문의 관습헌법 사항을 헌법개정 절차를 이행하지 않은 채 법률의 방식으로 변경한 것 (중략) 국민의 헌법개정 국민투표권을 침해했으므로 헌법에 위반된다.
윤영철 헌법재판소장의 결정문
그렇게 헌법 소원이 제기된 지 3개월 후인 2004년 10월 21일, 헌법재판소 전원재판부는 최상철 외 221인(대리인: 이석연 등)이 청구한 신행정수도특별법에 대한 헌법소원 사건에 대해 위헌 판정을 내렸고, 주문 과정에서 서울은 관습헌법적으로 명백한 대한민국 수도라는 결정문을 낭독하면서 국민들의 시선을 잡아내었다. # 이때 관습헌법이라는 생소한 단어는 정치권에 큰 파란을 불러일으켰으며, 한동안 TV 토론 프로그램에서도 관습헌법을 집중적으로 다루며 판결문에 관습헌법이 나온 사례나 관습헌법의 뜻을 분석하기도 하였다.윤영철 헌법재판소장의 결정문
이 재판에서 서울특별시는 승리자로서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인정한다는 의사를 밝혔으나 행정수도 이전을 지지했던 충청남도, 충청북도 그리고 대전광역시는 충격에 빠졌다. 이명박 당시 서울시장은 "서울이 대한민국의 수도인 것은 당연하다, 수도이전을 빌미로 국민들과 서울시민들을 당혹하게 만든 노무현 정권이야말로 진심으로 사죄해야 할 것"이라고 입장을 밝혔다. 이때 손학규 당시 경기도지사도 이명박 서울시장의 입장을 거듭 지지하며 경기도도 행정수도 이전을 반대한다고 밝혔다.[55] 반면, 심대평 당시 충남도지사는 관습헌법이라는 것이 있는 줄도 몰랐지만 충남도민들의 염원이 한순간에 무산된 것 같아 도지사로서 도민들 앞에 사죄를 하고 싶은 심정이라고 밝혔다. 노무현 대통령 역시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받아들이겠다면서도 행정수도 이전이 무산된 것은 아쉽다고 밝혔다.
시민들도 헌법재판소의 위헌 결정에 대해 대체적으로 환영하는 분위기였다. MBC와 한국갤럽리서치가 전국에 있는 성인 남녀 916명을 상대로 조사를 진행했는데, 먼저, ‘헌법재판소의 위헌 결정은 잘한 것인가’라는 질문에 62.8%가 그렇다고 답했으며, 27.8% 정도만 헌법재판소의 결정은 이해하기 어렵다고 답했다. 또, ‘수도 이전을 위해서 헌법을 개정해야 할까’라는 질문에는 57.9%가 필요없다고 답했으며, 34.4%의 사람들만 개정해야 한다고 답하였다. ‘행정수도 이전을 국민투표로 결정해야 하나’라는 질문에는 63.9%의 사람들이 필요하다고 답했으며, 33%는 굳이 필요하겠냐고 답하였다. 추가로 ‘노무현 대통령의 국정운영은 어떤가’라는 질문에는 잘못하고 있다고 응답한 사람이 59.3%로 압도적이었고, 잘하고 있다고 평가한 사람들은 31.9%에 불과했다. #
한편, 헌법재판소의 위헌 결정이 내려진 지 3주가 지난 11월 12일, 열린우리당의 이목희 의원이 국회 대정부 질문에서 “헌재의 결정은 사법적 쿠데타”라며 헌법재판소를 맹비난해 논란을 일으켰다. # 또, 이목희 의원은 그 자리에서 7명의 헌법재판관들을 국민과 국회의 자유와 인권을 유린한 법복 입은 정치인으로 규정해 이 또한 논란거리가 되었다. 이에 한나라당은 헌정질서를 부인하는 발언이라며 격렬하게 반발했고, 이 상황을 지켜보던 자유민주연합 의원들과 민주노동당 의원들은 국회가 오랜 파행을 끝내고 다시 정상화가 된 만큼 이제는 그만 대립해야 한다고 의견을 같이했다.
이후 정부는 이해 12월에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반영하고 국가균형발전을 이루는 등의 5대 원칙에 따라 행정수도 후속대안을 선정했다고 발표했으며, 2005년 6월에 또다시 신행정수도와 관련해 헌법재판소에 헌법 소원을 제기했는데, 그 결과 합헌으로 결정되어 2005년 11월에 첫 삽을 파게 되었다. 그렇게 시행착오와 논란이 많았던 신행정수도는 8년 후 한국의 행정복합도시인 세종특별자치시로 새롭게 출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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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f 문서명 = 문서명 != null ? 문서명 : calleeTitle
의 [[대한민국의 행정수도 이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3.3. 해외
3.3.1. 미국의 이라크 침공
3.3.1.1. 아슈라 학살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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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2004년 아슈라 학살 사건#s-|]]번 문단을#!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if 문서명 = 문서명 != null ? 문서명 : calleeTitle
의 [[2004년 아슈라 학살 사건#|]] 부분을}}} 참고하십시오.3.3.1.2. 제1차 팔루자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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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f 문서명 = 문서명 != null ? 문서명 : calleeTitle
의 [[제1차 팔루자 전투#|]] 부분을}}} 참고하십시오.3.3.1.3. 제2차 팔루자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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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제2차 팔루자 전투#s-|]]번 문단을#!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if 문서명 = 문서명 != null ? 문서명 : calleeTitle
의 [[제2차 팔루자 전투#|]] 부분을}}} 참고하십시오.3.3.1.4. 이라크 무장세력의 연쇄 납치
- 파브리치오 콰트로치
- 닉 버그
- 로버트 제이콥
- 폴 존슨
- 김선일
- 게오르기 라조프 피살 사건
- 무라트 유스
- 네팔인 12명 피랍사건
- 엔조 발도니 피살 사건
- 케네스 비글리 피살 사건
- 코다 쇼세이 이라크 피살 사건
3.3.2. 체첸의 대러시아 테러
3.3.2.1. 러시아 여객기 연쇄 테러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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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2004년 러시아 여객기 연쇄 테러 사건#s-|]]번 문단을#!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if 문서명 = 문서명 != null ? 문서명 : calleeTitle
의 [[2004년 러시아 여객기 연쇄 테러 사건#|]] 부분을}}} 참고하십시오.3.3.2.2. 베슬란 학교 인질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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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f 문서명 = 문서명 != null ? 문서명 : calleeTitle
의 [[베슬란 학교 인질사건#|]] 부분을}}} 참고하십시오.3.3.3. 슈퍼페리 14호 테러
| 2월 27일 SBS 8 뉴스 |
구조 장비와 안내가 충분하지 않은 상태에서 많은 사람들이 바다로 뛰어들었고, 일부는 연기에 질식하거나 화재에 휩싸여 탈출하지 못했다. 그 결과 공식적으로 최소 116명이 사망, 수십 명이 실종되었으며, 이는 필리핀 역사상 가장 치명적인 테러 사건으로 평가된다.
초기에는 단순 사고나 가스 폭발 가능성도 제기되었으나, 필리핀 정부와 수사당국의 장기 조사 끝에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단체 ‘아부 사야프’의 테러 행위로 결론이 내려졌다. 이들은 선박에 TV 세트로 위장한 폭탄을 반입해 설치한 것으로 밝혀졌으며, 조직의 간부가 직접 실행에 관여했다고 자백했다.
아부 사야프는 이 사건을 통해 자신들의 존재를 과시하고, 필리핀 정부와 미국에 대한 보복 및 이슬람 극단주의 이념을 선전하려는 목적을 가졌던 것으로 분석된다. 이 사건 이후 필리핀은 항만 보안과 여객선 검색 절차를 대폭 강화했고, 해상 테러에 대한 국제적 경각심도 크게 높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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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슈퍼페리 14호 테러#|]] 부분을}}} 참고하십시오.3.3.4. 마드리드 열차 테러
| 3월 11일 KBS 뉴스 9 |
이 연쇄 폭발로 191명이 사망하고 약 2,000명 이상이 부상했으며, 희생자 중에는 스페인인뿐 아니라 남아메리카·북아프리카·동유럽 출신 이민자들도 다수 포함되어 사회 전반에 큰 충격을 주었다. 폭발 직후 열차 내부는 심하게 파손되었고, 객차가 찢어지듯 무너지며 현장은 즉각적인 대형 참사 현장이 되었다.
초기 수사 단계에서 스페인 정부는 바스크 분리주의 무장단체 ETA의 소행일 가능성을 강조했으나, 곧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 조직 알카에다와 연계된 세력이 배후라는 증거가 속속 드러났다. 폭탄은 휴대 전화 타이머로 작동하는 배낭 폭탄이었고, 폭약은 광산용 폭약이 사용된 것으로 밝혀졌다.
사건 발생 사흘 뒤인 3월 14일, 스페인 총선이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테러는 엄청난 정치적 파장을 불러왔다. 정부의 초기 발표가 사실과 다르다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여론이 급격히 악화되었고, 결국 선거에서 정권이 교체되었다. 새 정부는 곧바로 이라크 파병 철수를 결정해 국제 사회의 주목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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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f 문서명 = 문서명 != null ? 문서명 : calleeTitle
의 [[마드리드 열차 테러#|]] 부분을}}} 참고하십시오.3.3.5. 천수이볜 대만 총통 암살 미수 사건
| 3월 19일 MBC 뉴스데스크 |
3월 19일, 당시 대만 총통이자 재선에 도전 중이던 천수이볜은 부총통 후보 뤼슈롄과 함께 타이난시에서 유세 차량을 타고 거리 유세를 진행하고 있었는데, 군중 속 어딘가에서 총성이 한 발 울렸다. 총알은 천수이볜의 복부 오른쪽을 스치듯 관통해 상처를 남겼으며, 뤼슈롄 역시 파편 또는 도탄으로 추정되는 물체에 맞아 무릎 부근에 경상을 입었다.
두 사람은 즉시 병원으로 이송되었고, 다행히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는 진단을 받았다.[56] 총알은 치명적인 장기를 직접 타격하지는 않았지만, 사건 발생 시점이 총통 선거를 불과 하루 앞둔 시점이었기 때문에 대만 사회 전체는 극도의 긴장 상태에 빠졌다.
사건 직후 대만 전역에서는 계엄령에 준하는 비상 경계 태세가 선포되었고, 경찰과 군이 주요 시설과 투표소 경비를 대폭 강화했다. 선거는 예정대로 다음 날인 3월 20일 치러졌으며, 천수이볜은 불과 약 0.22%포인트라는 극히 근소한 차이로 재선에 성공했다.
그러나 이 암살 미수 사건은 곧바로 거대한 정치적 논란으로 번졌다. 야당인 중국국민당과 친중 성향 진영은 사건의 진위 여부와 배후에 강한 의문을 제기하며, “선거에 영향을 주기 위한 자작극일 가능성”을 공개적으로 주장했다. 반면 여당과 지지자들은 이를 민주주의에 대한 명백한 테러 행위로 규정하며 강하게 반발했다.
대만 당국의 수사 결과, 총격은 정치적 조직 테러가 아닌 단독 범행으로 결론 났다. 범인은 천이슝이라는 인물로 지목되었는데, 그는 사건 발생 열흘 뒤 타이난 인근에서 바다에 투신해 사망한 채 발견되었다. 수사 당국은 그가 개인적 불만과 정신적 문제를 안고 범행을 저질렀다고 발표했지만, 범인이 사망하면서 직접적인 동기와 배후에 대한 의혹은 완전히 해소되지 못했다.
이 사건은 이후에도 오랫동안 대만 사회를 분열시켰다. 선거 결과의 정당성, 수사의 공정성, 언론 보도의 책임성 등을 둘러싼 논쟁이 수년간 이어졌고, 대만 정치에서 ‘3·19 총격 사건은 지금까지도 음모론과 의혹이 끊이지 않는 상징적 사건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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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f 문서명 = 문서명 != null ? 문서명 : calleeTitle
의 [[천수이볜 암살 미수 사건#|]] 부분을}}} 참고하십시오.3.3.6. 제2차 북일정상회담
| 5월 22일 YTN 뉴스의 현장 |
이 회담은 2002년 9월 17일 제1차 북일정상회담 이후의 합의를 이행하고 남은 쟁점을 정리하기 위해 열렸다. 2002년 회담에서 김정일은 일본인 납치 사실을 처음으로 인정하고 사과했으며, 이로 인해 납치 피해자 5명이 일본으로 귀국했지만, 북한이 “이미 사망했다”고 주장한 다른 납치 피해자들의 진상을 둘러싸고 일본 내 여론은 강하게 악화된 상태였다.
이런 상황 속에서 이해 5월 22일, 고이즈미는 일본 총리로서는 이례적으로 다시 단독으로 평양을 방문해 김정일과 회담을 가졌다. 회담의 핵심 의제는 납치 피해자 문제 / 북일 관계 정상화 가능성 / 안보 현안과 신뢰 구축이었다. 회담에서 김정일은 일본이 가장 중시하던 납치 문제와 관련해 추가 조치를 약속했다. 그 결과, 2002년에 일본으로 돌아온 납치 피해자 5명의 북한에 남아 있던 자녀 8명이 일본으로 이동하는 데 합의했고, 실제로 이들은 같은 해 일본으로 입국해 가족과 재회했다. 이는 일본 사회에서 “인도적 성과”로 크게 평가되었다.
반면, 일본 정부가 요구했던 사망 판정을 받은 납치 피해자들의 생존 가능성 재조사에 대해서는 북한이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고, 일본이 제기한 DNA 감정 결과 조작 의혹에 대해서도 충분한 설명을 내놓지 않아 근본적인 불신은 해소되지 않았다. 경제 협력과 국교 정상화 문제에서도 실질적인 진전은 제한적이었다. 일본은 국교 정상화의 전제로 납치 문제의 완전한 해결과 핵·미사일 문제 진전을 요구했고, 북한은 식량 지원과 경제 제재 완화를 기대했지만, 상호 입장 차이가 커 포괄적 합의에는 이르지 못했다.
결국 2004년 북일정상회담은 인도적 사안에서는 부분적 진전을 이뤘지만, 납치 문제의 완전한 해결과 국교 정상화라는 근본 목표에는 도달하지 못한 채, 이후 북일관계가 다시 장기간 교착 상태로 빠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 회담은 오늘날까지도 북일 간 신뢰 부족과 납치 문제가 외교의 최대 장애물로 남아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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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북일정상회담#|]] 부분을}}} 참고하십시오.3.3.7. 자카르타 호주 대사관 폭탄 테러
자카르타 호주 대사관 폭탄 테러는 2004년 인도네시아 수도 자카르타에서 발생한 대형 자살폭탄 테러로, 동남아시아에서 국제 테러 조직의 위협이 여전히 심각하다는 점을 전 세계에 각인시킨 사건이다.사건은 9월 9일 오전, 자카르타 중심부 쿠닝안 지역에 위치한 호주 대사관 앞에서 발생했다. 출근 시간대에 맞춰 폭약을 실은 차량이 대사관 정문 인근으로 접근한 뒤 자폭했고, 강력한 폭발로 대사관 외벽과 인근 건물들이 크게 파손되었다. 폭발 충격은 수백 미터 떨어진 곳까지 전달되어 유리창이 산산이 깨지고 거리에는 잔해가 흩어졌다.
이 테러로 인도네시아인 9명이 사망하고, 대사관 직원과 행인, 인근 사무실 근무자 등 150명 이상이 부상했다. 다행히 폭발 지점이 대사관 경계선 바깥이어서 호주 외교관 중 사망자는 발생하지 않았지만, 민간인 피해가 컸다는 점에서 큰 충격을 주었다. 현장은 즉시 통제되었고, 자카르타 전역에 비상 경계 태세가 내려졌다.
인도네시아 당국의 수사 결과, 이 사건은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 조직 ‘제마 이슬라미야의 소행으로 밝혀졌다. 이 조직은 2002년 발리 폭탄 테러를 일으킨 세력과 같은 계열로, 호주가 미국의 대테러 정책과 이라크 전쟁을 지지한 데 대한 보복을 테러 동기로 삼았다고 발표했다. 실제로 테러 직후 공개된 성명에서도 호주와 서방 국가들을 직접적인 공격 대상으로 지목했다.
폭탄은 대량의 폭약을 사용한 차량 자살폭탄이었으며, 공격 방식과 준비 과정에서 제마 이슬라미야 특유의 조직적·계획적 테러 양상이 확인되었다. 이후 수사 과정에서 조직의 핵심 인물들이 체포되거나 사살되었고, 이 사건을 계기로 인도네시아 정부는 대테러 전담 부서 강화, 외교 공관 주변 경비 확대, 국제 공조 수사를 대폭 강화했다.
호주 정부 역시 자국민 보호를 위해 인도네시아 내 여행 경보를 상향하고, 동남아 지역 전반에서 외교 시설과 공공장소 보안 수준을 높이는 조치를 취했다. 이 테러는 발리 테러 이후에도 인도네시아가 국제 테러의 주요 표적 중 하나로 남아 있음을 보여주며, 외교 공관을 겨냥한 상징적 공격이라는 점에서 국제 사회에 큰 경각심을 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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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자카르타 호주 대사관 폭탄 테러#|]] 부분을}}} 참고하십시오.3.3.8. 이집트 시나이 반도 연쇄 테러
이 연쇄 테러의 시작은 이해 10월 7일, 이집트 시나이반도 남부의 대표적 관광지인 타바와 인근 누웨이바라는 지역에서 발생한 폭탄 테러였다. 타바의 힐튼 호텔과 해안 인근 캠프장 등에서 차량 폭탄과 대형 폭발이 거의 동시에 일어나면서 최소 34명이 사망하고 100명 이상이 부상했다. 희생자 중에는 이집트인뿐 아니라 이스라엘 관광객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으며, 이는 사건 직후 국제적 파장을 키웠다.이집트 정부의 수사 결과, 이 연쇄 테러는 알카에다 중앙 조직의 직접 지휘라기보다는, 시나이 지역 베두인 청년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현지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 네트워크의 소행으로 결론지어졌다. 이들은 정부의 차별적 개발 정책, 실업, 경찰의 강경 진압과 체포 그리고 이스라엘·서방과의 관계에 대한 반감을 결합해 급진화된 것으로 분석되었다. 일부 단체는 알카에다의 이념에 공감하며 그 명칭을 차용했지만, 조직 구조는 비교적 느슨한 지역 기반 세포 조직에 가까웠다.
이 시나이 연쇄 테러는 단기간에 종식되었지만, 시나이 반도의 구조적 불안정과 급진화 문제를 국제 사회에 각인시켰다. 이후 2010년대 들어 이 지역에서는 IS계열 무장세력의 활동이 다시 확산되며 또 다른 형태의 폭력이 이어졌고, 2004~2006년까지 3년 동안 테러가 계속되면서 그러한 불안정의 전조이자 출발점으로 자주 언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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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2004년 시나이 연쇄 폭탄 테러#|]] 부분을}}} 참고하십시오.3.3.9. 우크라이나 오렌지 혁명
오렌지 혁명은 2004년 11~12월, 우크라이나에서 대통령 선거 부정에 항의해 벌어진 대규모 평화 시위로, 구소련권에서 민주주의 요구가 폭발적으로 표출된 대표적 시민 혁명이다.사건의 직접적 계기는 이해 11월 우크라이나 대통령 선거였다. 당시 선거는 친서방 성향의 야권 후보 빅토르 유셴코와 친러 성향의 집권 세력 후보 빅토르 야누코비치의 대결 구도로 치러졌다. 1차 투표에서는 과반 득표자가 나오지 않았고, 11월 21일 실시된 결선 투표에서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야누코비치의 승리를 발표했다. 그러나 투표 과정 전반에서 조직적 부정, 개표 조작, 유권자 협박, 언론 통제 등의 의혹이 광범위하게 제기되었다.
특히 출구조사에서는 유셴코의 승리가 일관되게 나타났고, 일부 지역에서는 투표율이 100%에 육박하거나 사망자가 투표한 기록까지 확인되면서 결과에 대한 신뢰는 급격히 무너졌다. 이에 유셴코 진영과 시민단체들은 선거 결과를 인정할 수 없다며 즉각 항의에 나섰다.
곧이어 수도 키예프의 독립광장을 중심으로 수십만 명이 모이는 대규모 시위가 시작되었고, 이는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시위대는 유셴코 캠프의 상징색이었던 주황색을 리본, 깃발, 옷 등으로 착용하며 결속을 과시했고, 이로 인해 이 운동은 “오렌지 혁명”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오렌지 혁명의 가장 큰 특징은 폭력 없는 시민 저항이었다. 혹한 속에서도 시민들은 수주 동안 광장을 점거하며 노래와 연설, 연좌 시위로 항의했고, 군과 경찰 역시 대규모 무력 진압을 거부하면서 사태가 유혈 충돌로 번지는 것을 막았다. 국제 사회, 특히 EU와 미국은 선거 부정 의혹에 우려를 표하며 재검표와 법적 해결을 촉구했고, 반면 러시아는 야누코비치 지지를 공개적으로 표명하며 긴장 관계가 형성되었다.
결국 우크라이나 대법원은 결선 투표 결과가 부정으로 오염되었다고 판결하고, 2004년 12월 결선 투표의 재실시를 명령했다. 재선거는 국제 감시단의 엄격한 감독 아래 치러졌고, 그 결과 유셴코가 승리해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이는 시민 저항이 선거 결과를 법적으로 뒤집은 역사적 사례로 평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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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오렌지 혁명#|]] 부분을}}} 참고하십시오.3.3.10. 2004년 미국 대통령 선거
| 재선에 성공한 조지 W. 부시(왼쪽)와 딕 체니(오른쪽) |
선거는 2004년 11월 2일에 실시되었으며, 공화당 후보이자 현직 대통령인 조지 W. 부시와 민주당 후보이자 매사추세츠 상원의원인 존 케리의 양자 대결 구도로 진행되었다. 부시는 2001년 9·11 테러 이후 강경한 대테러 정책과 아프가니스탄·이라크 전쟁을 주도한 인물로, “전시 대통령”으로서의 지도력을 강조했다.
반면 케리는 부시 행정부의 이라크 전쟁 명분 부족과 전후 혼란, 동맹 외교의 약화, 경제 불평등 심화를 강하게 비판하며 외교적 다자주의와 국내 중산층 보호를 주요 공약으로 내세웠다. 그러나 케리는 이라크 전쟁 초기 승인 표결에 찬성했던 이력이 있어, 입장이 일관되지 않다는 공격을 받기도 했다.
선거전의 핵심 쟁점은 이라크 전쟁이었다. 부시는 사담 후세인의 제거와 대량살상무기 위협을 강조하며 전쟁의 정당성을 주장했고, 케리는 정보 실패와 전쟁 관리 능력의 부재를 문제 삼았다. 여기에 테러 대응, 국가 안보, 동성결혼·낙태 등 사회적 가치 이슈, 감세 정책과 재정 적자, 의료보험과 일자리 문제가 주요 쟁점으로 부각되었다.
투표 결과는 전국적으로 매우 접전이었다. 최종적으로 조지 W. 부시는 50.7%의 득표율로 약 6,200만 표, 존 케리는 48.3%로 약 5,900만 표를 얻었다. 선거인단에서는 부시가 286명, 케리가 251명을 확보해 부시가 재선에 성공했다. 특히 승부를 가른 곳은 오하이오주로, 부시는 이 주에서 근소한 차이로 승리하며 전체 선거인단 과반을 확보했다.
이번 선거는 투표율이 약 60%로 1968년 대선 이후 가장 높은 수준을 기록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컸다. 이는 9·11 이후 안보 불안과 정치적 양극화가 유권자들의 참여를 크게 끌어올렸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동시에 전자투표기 신뢰성, 개표 과정의 투명성을 둘러싼 논란도 제기되어, 2000년 대선에 이어 미국 선거 제도에 대한 비판이 계속되었다.
재선에 성공한 부시는 이를 이라크 전쟁과 대테러 정책에 대한 국민적 신임으로 해석하며 2005년 1월 20일, 2기 행정부를 출범시켰다. 그러나 이후 이라크 내 치안 악화와 전쟁 장기화로 인해 점점 목적성에 의문이 제기되더니 2005년 허리케인 카트리나 당시 부적절한 대응으로 인한 자질 문제 그리고 임기 마지막 해인 2008년에는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미국 경제가 휘청이면서 팍스 아메리카나 시대의 폐막과 신냉전을 도래하게 한 장본인으로 평가되면서 임기 후반기(2005.01~2009.01)는 임기 전반기(2001.01~2005.01)에 비해 상당히 암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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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f 문서명 = 문서명 != null ? 문서명 : calleeTitle
의 [[2004년 미국 대통령 선거#|]] 부분을}}} 참고하십시오.4. 경제
4.1. 한칠레 FTA 발효
| 2월 16일 KBS 뉴스 9 |
협정의 핵심 내용은 상품 교역에서의 관세 철폐이다. 양국은 대부분의 공산품과 상당수 농산물에 대해 관세를 즉시 또는 단계적으로 철폐하기로 합의하였다. 이에 따라 한국은 자동차, 기계, 철강 등 제조업 품목을 칠레 시장에 낮은 관세 또는 무관세로 수출할 수 있게 되었고, 칠레는 와인, 포도, 키위, 돼지고기, 연어 등 농수산물과 구리 등 광물자원을 한국 시장에 보다 경쟁력 있는 가격으로 공급할 수 있게 되었다. 다만 농업 부문에서의 민감성을 고려해 일부 품목은 장기 철폐나 예외 품목으로 설정되었다.
한칠레 FTA는 단순한 관세 인하에 그치지 않고, 서비스 무역과 투자, 지식재산권, 정부조달, 기술장벽(TBT), 위생 및 검역(SPS), 분쟁해결 절차 등 포괄적인 통상 규범을 포함하고 있다. 이를 통해 양국 기업은 보다 안정적이고 예측 가능한 제도 환경 속에서 교역과 투자를 확대할 수 있게 되었으며, 이는 이후 한국이 체결한 다른 FTA들의 기본 모델로 활용되었다는 점에서도 의의가 크다. 특히 원산지 규정과 분쟁해결 제도는 이후 한미자유무역협정, 한EU FTA 등 대형 FTA 협상의 기초 경험을 제공하였다.
종합하면, 한-칠레 FTA는 한국 통상 정책의 출발점이자 실험장이었으며, 자유 무역 확대를 통해 수출 시장을 다변화하고 자원 확보와 경제 협력을 강화한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 협정은 이후 한국이 전 세계 주요 경제권과 연쇄적으로 FTA를 체결하는 기반을 마련했으며, 오늘날 한국이 글로벌 FTA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데 있어 역사적·전략적 의미를 지니는 협정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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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f 문서명 = 문서명 != null ? 문서명 : calleeTitle
의 [[한칠레 FTA#|]] 부분을}}} 참고하십시오.4.2. 2004년 만두 파동
| 6월 7일 MBC 뉴스데스크 |
당시 한국에는 값싼 중국산 냉동 만두가 대량으로 수입·유통되고 있었고, 학교 급식과 군 급식, 소규모 음식점 등에서도 널리 사용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쓰레기로 만든 만두”라는 자극적인 표현이 확산되면서 소비자들의 불안은 급속히 커졌고, 중국산 만두뿐 아니라 만두라는 식품 전체에 대한 불신으로까지 번졌다. 그 결과 할인점과 음식점에서 만두 판매가 급감했고, 일부 업체는 영업 중단이나 폐업 위기에 몰리기도 했다.
정부는 사태가 확산되자 긴급 대응에 나섰다. 식품의약품안전청는 문제로 지적된 중국산 만두의 수입을 중단하고, 관련 업체에 대한 조사와 검사를 실시했다. 조사 결과, 일부 제품에서 위생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원료가 사용된 사실이 확인되었으며, 이에 따라 해당 제품은 전량 회수·폐기 조치되었다. 동시에 정부는 중국 당국과 협의해 수입 식품에 대한 위생 관리와 검역 기준을 강화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만두 파동은 단순한 수입 식품 문제를 넘어, 언론 보도의 과장성과 정보 전달 방식에 대한 논란도 함께 불러일으켰다. 모든 중국산 만두가 동일하게 문제가 있는 것처럼 인식되면서, 실제로는 기준을 충족한 제품과 국내 생산 만두까지도 소비자들로부터 외면받는 부작용이 발생했다. 이로 인해 일부에서는 “공포 마케팅” 혹은 “과도한 일반화”라는 비판도 제기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4년 만두 파동은 한국 사회에 중요한 교훈을 남겼다. 이 사건을 계기로 수입 식품의 원산지 표시 제도와 위생 검사 절차가 강화되었고, 식품 제조 과정의 투명성과 이력 관리의 중요성이 크게 부각되었다. 또한 소비자들 역시 가격만이 아니라 안전성과 품질을 중시하는 소비 태도를 갖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는 이후 광우병 논란, 가습기 살균제 사망사건 등과 함께 한국 사회에서 “먹거리 안전”이 중요한 공공 의제로 자리 잡는 데 영향을 준 대표적인 사건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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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f 문서명 = 문서명 != null ? 문서명 : calleeTitle
의 [[2004년 만두 파동#|]] 부분을}}} 참고하십시오.5. 기후
대체로 포근한 해여서 연평균기온이 꽤 높았으며 특히 초겨울(11~12월 중순)의 고온이 기록적으로 강했다.[57] 다만 초이상 고온 현상도 2월, 12월을 제외하면 딱히 일어나지 않았다.[58] 일별로 따지면 기온이 최고기온 극값을 기록하거나 반대로 한파와 폭설이 오는 날도 있었다. 월별로 보면 1~4월에는 대체로 온화했지만 가끔씩 한파, 폭설, 꽃샘추위가 왔다. 특히 3월 4일~3월 7일은 봄답지 않게 한시적으로 전국에 100년 만의 강력한 폭설이 내리기도 했다. # 5월의 경우 기온은 평범했으나 비 오는 날이 대체적으로 많았고, 6월에는 평년보다 기온이 다소 높았다. 7~8월에는 2015년처럼 짧지만 강력한 폭염이 며칠 있었으며, 7월 23일과 8월 10일에는 단 하루 동안 모든 지역이 37도를 넘기기도 했다. 또, 7월에 한시적으로 엄청난 양의 폭우로 전국에서 침수사고가 발생한 바 있는데, 7월 2일~7월 4일에는 전국적으로 250mm의 비가 내려 호우경보가 내려졌고, 7월 11일~7월 17일에는 6일 연속으로 비가 쏟아져 전라북도와 경상북도는 물바다가 되어 혼선이 빚어졌다. # 9~10월은 평년보다 조금 높았을 뿐 별 이상 없이 지나갔지만[59] 11~12월에 기온이 꺾이지 않고 계속 가을 날씨를 유지하여 초이상 고온 현상이 나타났다. 때문에 이해 11월은 기상 관측 사상 최초로 서울 최저 기온이 영하인 날이 없었으며,[60] 12월에는 눈이 쌓이지도 않았음은 물론이고 기온도 15~16도까지 올라갔다. 결국 기상학적 겨울은 12월 하순이나 되어서야 시작되었다.[61]2002~2003년에 찾아온 엄청난 태풍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은 한반도가 이해에는 위력이 약한 태풍들만 상륙하면서 약간의 숨 고르기가 이루어졌다. 2004년 한반도에 상륙한 태풍 중 피해 규모가 컸던 것은 6월 20일에 북상해 6명의 희생자를 낸 뎬무[62]와 8월 18일에 북상한 태풍 메기이다. 특히, 당초 태풍 메기는 중소형 크기에 속도도 크게 빠르지 않은 수준이었지만 우리나라 쪽으로 북상하면서 갑자기 크기를 키우고 바람의 속도가 빨라졌다. 또, 메기는 우리나라 쪽으로 북상한 뒤 남부 지방 등을 강타해서 엄청난 피해를 안겼는데 이때 전남 지역은 농작물 흉작까지 겹치면서 농산물의 가격이 크게 뛰어올랐고, 5명이 사망·실종되었다. 뎬무 메기 또한 민들레도 영향을 줬다.
서울과 전국의 월별 평균기온은 다음과 같다.
| 1월 | 2월 | 3월 | 4월 | 5월 | 6월 | 7월 | 8월 | 9월 | 10월 | 11월 | 12월 | 년 | |
| 서울 월평균기온(°C) | -1.6 | 2.3 | 6.3 | 13.1 | 17.6 | 23.2 | 24.8 | 26.1 | 21.7 | 15.2 | 9.1 | 1.9 | 13.3 |
| 평년대비 편차(°C) | 0.9 | 2.6 | 1.1 | 1.0 | 0.2 | 1.3 | -0.1 | 0.7 | 0.9 | 0.8 | 2.2 | 1.7 | 1.1 |
| 1월 | 2월 | 3월 | 4월 | 5월 | 6월 | 7월 | 8월 | 9월 | 10월 | 11월 | 12월 | 년 | |
| 전국 월평균기온(°C) | -1.2 | 2.7 | 6.2 | 12.7 | 17.2 | 21.6 | 25.0 | 24.8 | 20.6 | 14.0 | 8.7 | 2.8 | 13.0 |
| 강수량 | 1월 | 2월 | 3월 | 4월 | 5월 | 6월 | 7월 | 8월 | 9월 | 10월 | 11월 | 12월 | 년 |
| 서울 월평균강수량(mm) | 19.8 | 54.6 | 27.6 | 74.1 | 168.5 | 138.1 | 510.7 | 193.3 | 198.7 | 6.5 | 80.0 | 27.2 | 1499.1 |
| 평년대비 편차(%) | 91.7 | 231.4 | 60.3 | 96.2 | 164.9 | 103.6 | 155.7 | 55.5 | 144.4 | 13.2 | 150.9 | 109.2 | 111.5 |
| 강수량 | 1월 | 2월 | 3월 | 4월 | 5월 | 6월 | 7월 | 8월 | 9월 | 10월 | 11월 | 12월 | 년 |
| 전국 월평균강수량(mm) | 13.8 | 41.3 | 32.0 | 90.6 | 117.2 | 235.0 | 307.4 | 327.2 | 203.4 | 5.9 | 54.6 | 27.9 | 1456.3 |
| 평년대비 편차(%) | 52.7 | 115.7 | 56.6 | 101.0 | 114.8 | 158.6 | 103.7 | 115.8 | 131.1 | 9.4 | 113.8 | 99.6 | 109.4 |
| 연 최저기온 | 연 최고기온 | 연교차 | 서울 일강수량 극값 |
| -16.7 °C (0122)[63] | 36.2 °C (0810)[64] | 52.9 °C | 108.5mm(0716) |
- [순별 기온/펼치기·접기]
- 단위: (°C)
평년대비 편차는 순별 평년으로 비교함- 1분기
1월 상순 1월 중순 1월 하순 2월 상순 2월 중순 2월 하순 3월 상순 3월 중순 3월 하순 서울 순평균기온 2.3 -1.7 -5.0 -1.9 4.9 4.2 1.3 6.9 10.2 평년대비 편차 4.1 1.1 -2.0 0.2 4.6 3.2 -1.8 1.7 3.0 - 2분기
4월 상순 4월 중순 4월 하순 5월 상순 5월 중순 5월 하순 6월 상순 6월 중순 6월 하순 서울 순평균기온 9.5 16.5 13.5 16.4 16.9 19.4 23.1 23.1 23.4 평년대비 편차 -0.4 4.4 -0.8 0.6 -0.2 0.3 2.6 0.9 0.4 - 3분기
7월 상순 7월 중순 7월 하순 8월 상순 8월 중순 8월 하순 9월 상순 9월 중순 9월 하순 서울 순평균기온 22.8 23.6 27.8 28.6 25.8 24.1 23.4 21.2 20.5 평년대비 편차 -1.0 -1.0 1.6 2.5 -0.1 -0.1 0.5 0.5 1.6 - 4분기
10월 상순 10월 중순 10월 하순 11월 상순 11월 중순 11월 하순 12월 상순 12월 중순 12월 하순 서울 순평균기온 17.1 15.4 13.5 12.1 8.0 7.2 6.4 3.5 -3.6 평년대비 편차 0.2 0.7 1.7 2.0 1.1 3.5 4.5 3.4 -2.4
6. 자연재해
6.1. 지진
6.2. 태풍
6.3. 폭설
| MBC 뉴스의 보도물 모음집 |
하늘길과 바닷길 또한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늘길의 경우 제주국제공항, 김포국제공항과 같은 거점공항은 3월 5일 오전부터 이틀 동안 비행기가 운행하지 않는 결항 사태가 빚어졌으며, 청주와 여수, 원주 등 지방 공항 또한 주변에 강풍이 불거나 짙은 구름이 끼면서 모두 20편 가량의 항공편이 결항되었다. 게다가 동북아시아의 허브 공항이자 우리나라 최대 공항인 인천국제공항 또한 개항 3년 만에 처음으로 모든 항공편이 지연되거나 결항되었다.[65] 바닷길의 경우 전라남도 목포에서 근처 섬들로 가려는 여객선 운항이 전면 중단돼 대부분의 섬지역은 통행이 끊긴 고립상태에 빠졌었다.
100년 만에 왔다는 이 기록적인 폭설은 대전광역시와 경상북도 지역에 50cm 정도가 쏟아졌으며, 충청북도 지역에서도 35cm 이상이 쏟아졌다. 그나마 상황이 나았던 강원도 지역도 20cm는 기록하여 1904년 기상관측 이래 3월 하루 적설량으로는 최대치를 기록한 셈이다. 하필 이러한 대폭설은 농경지가 많은 지방에 많이 내려 농가의 피해가 상당했다. 비닐하우스에서 재배되는 오이와 상추는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얼어서 시들해졌으며, 그마저도 창고에 보관 중이었던 무와 배추도 상대적으로 피해가 덜했을 뿐 실질적으로는 피해 규모가 상당했다. 이와 더불어 고속도로까지 차단된 터라 농산물 수급불안은 더욱 심화되었다.
한편 폭설과 관련해 정부의 부실한 대응이 지적되기도 하였다. 먼저, 폭설이 내리면 건설교통부 또는 도로교통공단[66]이 즉시 고속도로의 진입을 차단하는 것이 옳은 방안이지만 끝내 진입로를 차단하지 않고 오히려 고속도로에 들여보내는 바람에 교통정체를 더욱 심화시켰다는 불만이 터져 나왔다. 게다가 통행료까지 꼬박꼬박 받았다는 점에서 비판이 쇄도했다.[67] 두 번째는 기상청이 이러한 대형 폭설을 왜 예측하지 못했냐는 것이다. 세 번째는 정부의 부실한 대응이 아쉬웠다는 지적이 많았는데, 그 중 대표적으로 특별재해지역 선포를 두고 당국이 늦장 대처를 했다는 것이다. 이후 노무현 대통령은 국무회의에서 허성관 행정자치부 장관에게 폭설로 인한 피해상황을 보고받고 피해 최소화와 복구에 만전을 기하라고 지시했다.
폭설 5일 후인 3월 10일, 고속도로에 있던 모든 눈을 치우고, 방치된 차량들을 모두 견인하면서 마비되었던 도시기능이 다시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또, 이틀 후(3월 12일)에는 행정자치부가 폭설 피해 상황을 발표했는데,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이해 3월에 발생한 폭설로 인한 전체 피해액은 6,734억 원에 달한다고 밝혔다. 게다가 전국에서 주택 94동과 학교시설 79동, 축사 8,990동, 비닐하우스 2,221㏊가 붕괴해 전체 피해액은 지속적으로 늘어날 수 있음을 시사했다.
그리고 이해로부터 10년 후인 2014년에는 또다시 동해안 폭설 사태가 발생해 일부 시민들이 큰 불편을 겪는 일이 벌어졌다. 2025년 3월 4일에는 2004년 폭설과 매우 유사하게 서울을 비롯한 중부지방은 물론이고, 충청도와 경상도에도 폭설이 내려 사실상 전국적으로 대설주의보가 발효되었으며, 적설량이 가장 많았던 강원도는 지역에 따라 대개 18~27cm의 눈이 내렸다. 이 폭설로 비닐하우스가 무게에 못 이겨 내려앉는 사고가 일어났으며, 하필 폭설이 내린 당일은 학생들이 개학, 개강하는 날이었던지라 학사일정에 차질을 빚었다. 다만, 2025년 폭설의 경우 재난안전관리본부의 예상과는 달리 교통혼잡은 의외로 심각하지 않아서 2004년과는 달리 뜬눈으로 고속도로에서 밤을 지새우거나 다중 추돌 사고는 벌어지지 않았다는 차이점이 있다.
6.4. 폭염
기상 관측 사상 엄청난 더위를 기록한 1994년 7월 이후 10년 만에 또다시 강한 폭염이 찾아왔다. 3~4월까지만 해도 예년보다 살짝 높을 것이라는 예상에 그쳤으나 5월 상순에 이미 전국적으로 30도 안팎을 기록하였고, 결국 6월 1일에는 오존주의보까지 발령되었다.# 그래도 2분기까지는 다른 해와 크게 다를 바가 없었지만 7월 19일 포항과 밀양 등 남부 지방이 34도를 기록하였고, 7월 23일에는 서울특별시를 제외하고 전국 대부분의 지역이 36~38도를 웃돌아 열사병으로 숨지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차량이 고장나 도로가 정체되는 등 많은 불편이 발생하였다.# 이후 불볕더위는 8월 초까지 전국 기준 31~33도 정도를 유지하다가 8월 10일 전국 단위로 36도, 체감온도는 40도까지 올라간 뒤 비의 영향으로 서서히 주춤해져 21일 만에 기세가 누그러졌다. 그 결과, 이해 폭염은 1995년부터 2011년까지의 통계에 최고 기온으로 자리매김하였다.[68]7. 국제행사
7.1. 2004 아테네 올림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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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 아테네 올림픽 심볼 |
| 2004 아테네 올림픽 개막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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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2004 아테네 올림픽#s-|]]번 문단을#!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if 문서명 = 문서명 != null ? 문서명 : calleeTitle
의 [[2004 아테네 올림픽#|]] 부분을}}} 참고하십시오.7.2. 기타
8. 문화
8.1. 가요
| 2004 연말 가요제 | |||
| 방송사 | 프로그램명 | 대상 | |
| [[KBS 2TV| KBS 2TV | KBS 가요대상 | 비 《It's Raining》 | |
| [[MBC TV| MBC | MBC 10대 가수 가요제 | 이수영 《휠릴리》 | |
| [[SBS TV| SBS | SBS 가요대전 | 신화 《Brand New》 | |
| [[엠넷| 엠넷 | Mnet KM MusicVideo Festival | 비 《It's Raining》 보아 《My Name》 | |
한편, 신인 보이그룹의 열기도 대단했는데, 2003년 말에 데뷔한 동방신기와 버즈가 그 사례이다. 2003년 12월 26일 SBS '보아&브리트니 스페셜'을 통해 방송 데뷔를 먼저 한 동방신기는 이해 1월 14일 싱글 1집 <Hug>를 발매하고 정식으로 데뷔했다. 해당 앨범이 발매되자마자 MBC 생방송 음악캠프와 SBS 인기가요에서 각각 3번씩 1위를 달성하면서 입지를 굳혀나갔으며, 타이틀곡 Hug에 이어 후속곡 My little princess도 상당한 반향을 불러일으키면서 세대교체가 임박했음을 알렸다. 버즈는 1집 앨범 <Morning of Buzz>의 타이틀곡 어쩌면...으로 지난해 10월부터 이해 3월까지 무대에 섰으며, 4월부터 6월까지는 후속곡 Monologue를 노래해 밴드계에 새로운 붐을 몰고 왔다.
보이그룹은 성황을 이룬 반면 걸그룹은 완전히 사장돼 TV에서 걸그룹 보는 것이 하늘의 별따기일 정도로 희귀해졌다. 이미 2003년부터 노래 분위기가 섹시한 컨셉으로 바뀌었고, 걸그룹 출신 가수들이 솔로로 대활약한 것이 대두되었기 때문이다.[69] 이해에 컴백한 걸그룹 중 인지도 있는 가수는 디바, 베이비복스, 슈가 단 세 팀뿐이다. 디바는 7집 《Hey Boy》를 발매해 10~20위권에 진입하면서 전성기에는 한참 못 미치지만 중박 이상의 결과를 보여주었다. 베이비복스는 힙합 컨셉의 7집 <Ride West>를 발표해 SBS 인기가요에서 Take 7에 들었으며, 활발한 예능 활동으로 그룹 활동의 마지막을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끝으로 슈가는 이해 10월 2.5집 <Secret>으로 컴백했지만 전에 비해 크게 떨어지는 성적을 기록하였다. 이후 핑클, 샤크라, 베이비복스, 슈가가 2006년에 공식적으로 해체 수순을 밟으면서 2005년을 끝으로 1세대 걸그룹 활동은 막을 내렸다.
2004년 남녀혼성은 코요태와 거북이의 투톱체제였다. 먼저, 코요태는 3월에 정규 6집 앨범 <Koyote 6>을 발표했다. 앨범 타이틀곡 디스코왕은 물론이고, 후속곡인 불꽃과 Together가 모두 1위에 성공하면서 총 19관왕을 기록하였다. 이 앨범으로 코요태는 최전성기이자 동시에 마지막 전성기를 보낼 수 있었다. 2002년에 데뷔한 거북이는 지난해 말에 발매한 정규 2집 <Turtles 2>의 후속곡 왜이래로 인기를 얻었고, 연말에는 3집 <Turtles 3>에 수록된 빙고로 인지도를 넓혔다. 이외에도 <Instant Pig>로 데뷔한 클래지콰이와 정규 7집 <애정>으로 2년 만에 컴백한 영턱스클럽(당시 YTC) 그리고 SM엔터테인먼트가 8번째 앨범 <2004 Summer Vacation in SMTOWN.com>을 발매해 타이틀곡 여름편지로 활동기를 가졌다.
전 소속사의 방해로 인해 1집 앨범이 무너지고 위기상황에 빠졌던 김종국이 이해에 솔로 2집 앨범 <Evolution>을 초히트시킴과 동시에 인기 예능 프로그램에서도 종횡무진 활약하면서 본격적으로 솔로 가수로서 홀로서기에 성공하여 전성기를 이어갔다. 장나라도 연초에 3집 <장나라 세번째 이야기>로 활동했고, 연말에는 4집 앨범 <나의 이야기>를 발매해서 가요계 활동을 지속하였다. 한편, 이 당시 솔로의 대세는 '문화대통령' 서태지, 이수영, 비였다. 서태지는 7집 <7th Issue>를 통해 멜로디코어와 이모코어, 하드코어를 골고루 결합한 신종 장르 '감성코어'를 내세운 곡 Live Wire와 로보트를 각각 히트시켜 한 해 최다 판매량인 48만 2,066장을 기록했고, 이수영은 리메이크 앨범 <Classic>과 정규 6집 <The Colors of My Life>를 발매해 서태지의 바로 뒤를 이은 음반판매량 2~3위를 차지하는 쾌거를 달성하였고, 골든디스크 본상도 수상하였다. 비는 자신이 출연한 드라마 풀하우스가 한국뿐만 아니라 전 아시아 지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끄는 것과 동시에 정규 3집 <It's Raining> 활동을 통해 멀티 엔터테이너로서의 활약을 예고했다.
그동안 사회비판적 랩을 주로 하던 조PD는 5집 앨범 <Great Expectation 조PD>로 컴백해 인순이의 피쳐링을 받은 타이틀곡 친구여가 모든 세대로부터 공감 받는 가사와 좋은 사운드로 멜론 연간차트 1위, 한국대중음악상 올해의 노래상, 엠넷 KM 뮤직비디오 페스티벌 베스트 랩 퍼포먼스, 서울가요대상 본상, SBS 가요대전 힙합 부문 수상 등 많은 인기를 얻고 일약 국민래퍼로 떠오르게 되었다. SM 소속 보아는 4집 <My Name BoA>를 발표해 타이틀곡 My Name과 후속곡 Spark로 기존의 귀여운 컨셉에서 섹시한 컨셉으로 이미지를 바꾸는데 대성공하였다. YG 소속 SE7EN은 2집 <Must Listen>을 통해 골든디스크어워즈에서 본상을 수상하였고, 같은 회사 소속 렉시는 지난해 말에 앨범 <Lexury>로 데뷔해 1~2월에는 후속곡 Let me dance와 3~4월에는 삼속곡 Girls로 활동하면서 실력파 래퍼로 거듭났다.
또, 1집 앨범 <The First Journey>의 타이틀곡 사랑은…향기를 남기고로 데뷔하자마자 1위를 수상한 발라드 가수 테이, 1집 <나방의 꿈>을 발매해 국민남동생에 등극한 멀티 엔터테이너 이승기, 논스톱4에 출연해 주가를 올리고 있다가 힙합 앨범 <180 Degree>를 내자마자 1위 후보에 오른 MC몽이 있다. 이외에도 트로트 가수로서는 드물게 젊은 층과 기성세대 양쪽에서 모두 지지를 받고 있는 장윤정도 <어머나!>로 이해에 데뷔했다.
드라마가 활기를 띠었던 해답게 인지도 있는 OST곡도 다수 탄생하였다. SBS 드라마 스페셜 천국의 계단은 김범수의 <보고싶다>와 레베카 루커의 <아베 마리아>를 히트시켰으며, SBS 주말 특별기획 발리에서 생긴 일은 조은의 <안되겠니>로 조인성의 전화씬을 밈으로 승화시킨 바 있다. 방영 마지막 날에 시청률 50%를 넘긴 SBS 주말 특별기획 파리의 연인도 조성모의 <너의 곁으로>라는 곡을 엔딩 타이틀로 사용하면서 히트하였다.
MBC 대하 드라마 대장금에서는 김슬기와 김지현이 부른 <오나라>가 단연 으뜸이었고, 대장금이 방영된 2003~2004년 당시 MBC 예능에서 꼭 나오는 BGM 중 하나였다. KBS 수목 미니 드라마 풀하우스는 Why의 <운명>으로 분위기에 맞는 곡을 뽑았고, KBS 월화 드라마 미안하다, 사랑한다는 일본 가수 나카시마 미카의 雪の華를 한국어로 번안한 박효신의 <눈의 꽃>을 타이틀곡으로 사용해 드라마와 함께 국민적 사랑을 받았다.
| MBC 울산 서머 페스티벌 - YOUNG 콘서트 |
세계적으로 브리트니 스피어스와 어셔가 양대산맥을 이룬 해였다. 먼저, 브리트니 스피어스는 이해 1월에 유년기~청소년기를 함께 보내온 제이슨 알렉산더와의 결혼 실패[71]와 동년 10월에 케빈 페더라인과의 재혼으로 사적 문제를 빚었음에도 불구하고 <Toxic>과 <Do Somethin'>을 발표해 미국 내에서만 각각 500,000장 이상의 앨범 판매량과 6,000,000장 이상의 디지털 음반 판매량을 기록하였다. 또, 영국과 호주 등 여러 국가에서도 1위를 기록하면서 세계적으로 히트하였음을 증명하였다. 이후 브리트니 스피어스는 2005년 9월과 2006년 9월에 남편 케빈 페더라인 슬하의 자녀를 출산하고, 출산 이후 한 달 만에 또다시 이혼하면서 2004년이 그녀의 마지막 전성기가 되었다.
어셔는 3월에 4집 앨범 <Confessions>를 선보였는데, 공개되자마자 타이틀곡 Yeah!와 후속곡 Burn이 히트곡 반열에 오르는데 대성공하였다. 얼마나 인기 있었는지 Yeah!의 경우 12주 연속으로 1위를 달성했으며, Burn은 8주 연속으로 1위를 달성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게다가 2004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를 보면 어셔의 두 곡이 전부 1~2위에 오르면서 1964년 비틀즈 이후 정확히 40년 만에 연말 차트 상위권을 모두 석권한 아티스트에 이름을 올렸다. 이외에도 BET가 선정한 2000년대 10대 명반 1위, 빌보드 선정 2000년대 200대 명반 2위, alot이 선정한 21대 21세기 명반 그리고 죽기 전에 꼭 들어야 할 레코딩 1000에 들면서 2004년을 '어셔의 해'로 만드는 데 기여하였다. 여담으로 이해 4월에는 한국에 방문해 MBC 수요예술무대와 SBS 인기가요에 출연하면서 한국 팬들을 열광시킨 바 있다.[72]
일본에서는 '국민밴드' Mr.Children이 26집 싱글 <Sign>을 발매해 1996년 이후 8년 만에 오리콘 차트 상위권에 오르며 전성기 시절에 버금가는 인기를 얻었고, 1990년대 최정상 자리에 올랐던 아무로 나미에는 27집 싱글 <ALL FOR YOU>를 공개해 오랜만에 100,000장 이상의 앨범이 판매되면서 3년 만에 재기에 성공하였다.[73] 아무로 나미에의 공백기/침체기 동안 여성 솔로 가수의 빈자리를 채워 온 우타다 히카루는 이해 3월에 첫 번째 베스트 앨범 <Utada Hikaru SINGLE COLLECTION VOL.1>을 발표해 2004년 오리콘 연간 앨범차트 1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한편, 지난해 가을에 데뷔해 인지도를 쌓고 있던 오오츠카 아이는 2003년 12월 <사쿠란보>로 컴백해서 2004년 오리콘 12위에 오르는 등 신인으로서는 상당히 높은 성적을 받게 되었다. 2005년 AKB48 데뷔 이전까지 여자 아이돌 그룹의 대표격인 모닝구 무스메는 연초에 <愛あらば IT'S ALL RIGHT>와 연중에 <女子かしまし物語>를 통해 최전성기 시절(99~01)보다는 성적이 저조했지만 앨범 판매량도 100,000장 이상을 유지하였고, 이해까지는 인기 멤버 및 1기 원년 멤버가 탈퇴하기 전이라서 명맥만은 유지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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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f 문서명 = 문서명 != null ? 문서명 : calleeTitle
의 [[2004년 가요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8.1.1. 음반판매량 TOP 10
| <rowcolor=#ffffff> 순위 | 앨범 | 발매 일자 | 판매량 |
| 1위 | 서태지 정규 7집 7th Issue | 2004.01.27 | 482,066장 |
| 2위 | 이수영 정규 5.5집 Classic | 2004.01.12 | 380,868장 |
| 3위 | 이승철 정규 7집 The Livelong Day | 2004.07.03 | 352,323장 |
| 4위 | 이수영 정규 6집 The Colors of My Life | 2004.09.10 | 343,724장 |
| 5위 | 신화 정규 7집 Brand New | 2004.08.27 | 324,772장 |
| 6위 | 신승훈 정규 9집 Ninth Reply | 2004.02.02 | 243,600장 |
| 7위 | 동방신기 정규 1집 TRI-ANGLE | 2004.10.13 | 242,580장 |
| 8위 | 동방신기 싱글 2집 The Way U Are | 2004.06.23 | 214,069장 |
| 9위 | 코요태 정규 6집 Koyote 6 | 2004.03.26 | 198,114장 |
| 10위 | 휘성 정규 3집 For The Moment | 2004.10.16 | 195,546장 |
이렇듯 50만 장을 넘기는 가수조차 못 나올 정도로 음반시장의 침체가 가속화되자, 한국연예제작자협회와 음원업체들은 협상을 통해 음원시장을 합법화하기에 이른다. 이듬 해인 2005년부터 소리바다를 필두로 불법 음원사이트들의 합법화와 함께 유료화로 전환시키고, 통신사를 통해 멜론(SKT), 뮤직온(LGT), 도시락(KT) 등을 출범하면서 본격적인 온라인 음원시장 시대가 열리게 된다.
8.2. 방송
| 2004 연말 시상식 | |||
| 방송사 | 프로그램명 | 대상 | 작품 |
| [[KBS 2TV| KBS 2TV | KBS 연기대상 | 고두심 | 꽃보다 아름다워 그대는 별 |
| [[MBC TV| MBC | MBC 연기대상 | 한강수타령 | |
| [[SBS TV| SBS | SBS 연기대상 | 박신양 김정은 | 파리의 연인 |
한편, KBS와 SBS가 2002년 11월부터 드라마에서의 흡연 장면 삭제 조치를 시작한 데 반해 MBC는 이해 9월부터 해당 조치를 시행하기로 결정하면서 흡연 장면이 그대로 방영된 마지막 해였다.[76] 또, 2002년 10월에 대망(SBS), 2003년 7월에 다모(MBC), 2004년 11월에 해신(KBS)이 시범으로 HD로 제작·방영된 것이 전부였지만 2005년 2분기를 시작으로 지상파 3사가 순차적으로 HD로 전환해 4:3 SD 화질의 드라마가 주류였던 마지막 시기였다.[77][78]
| 2004 연말 시상식 | |||
| 방송사 | 프로그램명 | 대상 | 작품 |
| [[KBS 2TV| KBS 2TV | KBS 연예대상 | 이혁재 | 스펀지 |
| [[MBC TV| MBC | MBC 방송연예대상 | 이경규 | 대단한 도전 전파견문록 |
종영된 프로그램으로는 1984년 10월 31일부터 이해 10월 30일까지 정확히 20년 동안 방영된 퀴즈탐험 신비의 세계와 주택복권 추첨과 함께 정통 코미디극을 볼 수 있어 시청률이 꽤 높았던 쇼 행운열차 그리고 퀴즈 열풍을 몰고 온 퀴즈가 좋다 등이 있다. 반면 신규 프로그램의 영향력도 대단했는데, 2002년 대개편 이후 마땅한 예능 프로그램이 없던 SBS가 X맨/웃음을 찾는 사람들/야심만만 만명에게 물었습니다를, KBS가 스펀지를 2003년에 방영시켜 이해부터 점차 인기를 모으면서 항상 똑같은 소재를 울궈먹던 예능계에 이변을 몰고 왔다. 또, SBS는 2001년 이후 3년 만에 일요일이 좋다를, KBS는 이해 11월에 상상플러스와 해피선데이를 개시하면서 장수 프로그램이 시작되었다.
TV/라디오 광고에서도 유행은 거듭되었다. 가수 김C가 출연한 델몬트 광고에서 구아바 구아바~ 망고를 유혹하네~는 엄청난 인기를 끈 바 있으며, 음치로 유명한 배우 서민정이 빙그레의 생귤탱귤 광고에 출연했는데 음이 틀린 건 물론이거니와 박자까지 맞지 않아 개그맨들이 이를 희화하면서 유명해졌다. 펩시와 마운틴 듀도 과거 십자군 전쟁 시기를 배경으로 한 광고를 방영하여 펩시맨을 제작한 1996년 이후 8년 만에 좋은 반응을 얻었다. 한국야쿠르트의 왕뚜껑이 지난해에 방송된 SKY 휴대폰의 광고를 패러디해 나름 신선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80] #[81]
한편 정보통신과 관련된 광고에서는 당시 코미디하우스에서 바보 역할을 맡던 개그맨 정준하의 KTF 1541콜렉트콜이 유행했다.[82] # 또, It's Different 브랜드를 도입한 SK텔레텍의 SKY가 이해에도 어김없이 재밌는 소재의 광고를 제작해 IM-7200과 IM-7400의 광고를 보는 이로 하여금 웃게 하였다. IM-7200 IM-7400 이외에도 삼성전자 애니콜이 2003년부터 가수 이효리를 모델로 한데 이어 이해에는 배우 권상우가 이효리폰과 권상우폰 광고에 출연해서 특유의 이상한 춤으로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이효리폰 권상우폰
8.2.1. 한류 열풍의 원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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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년 한류 관련 뉴스 |
지도부의 허락 없이 마음대로 한국과 외국의 매체를 시청 및 열람할 수 없는 북한에서도 한국 드라마가 유행했는데, 당시 인기 있던 드라마는 송승헌, 송혜교 주연의 가을동화와 장동건, 김소연 주연의 이브의 모든 것 그리고 한류 열풍을 불러일으킨 주역 대장금이었다. 특히 가을동화와 이브의 모든 것 둘 다 2000년에 방영된 드라마로 이해에 유행하기에는 조금 늦은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그 전까지는 남북교류가 드문드문 이어졌기 때문에 드라마의 방영시기와 유행시기의 간격이 컸다. 또, 북한 주민들이 한국산 제품들을 구매할 때 애용하는 곳인 장마당마저 2002년 7월에 경제관리개선조치와 2003년 3월에 시장 상설화 내용의 내각조치 24호가 공포되면서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결국, 이해를 기점으로 한국 드라마가 담긴 비디오테이프와 CD가 북한에서도 암암리에 유통되면서 북한은 외부와의 접촉을 막는다는 이유로 영상물 검열 조직인 '109 연합지휘부'를 출범시켜 현재에 이르고 있다.
"'겨울연가'의 인기가 어느 정도인지 알고 싶으신 분들은 본 작품에 나오는 인물배역을 맡은 배용준을 보고 '저런 기생오라비같이 생긴 녀석이 뭐가 좋다고' 라고 한 마디만 해보시라. 아마 부인께서는 화가 나서 며칠 동안 귀하의 아침밥을 차려주지 않으실 것이다."
아사히 신문
일본에서는 2002년에 방영된 KBS 드라마 겨울연가가 2003~2004년 사이에 굉장한 히트를 쳤다. 2003년 4월, 일본의 한 케이블 방송에서 겨울연가를 방영했는데, 초기에는 시청률이 저조하다가 회를 거듭할수록 재미있다는 입소문을 타면서 시청률이 폭증하게 된다. 이후 2003년 9월에 겨울연가가 케이블 방송에서 종영된 후 30~50대 여성들 사이에서 미칠 듯한 인기를 끌게 되었고, 거의 하나의 사회현상에 비견될 만한 거대한 열풍을 불러일으켰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일본의 공영방송 NHK가 고민 끝에 이해 4월에 겨울연가를 재방영했다. 당시 겨울연가의 방영 시간은 매주 토요일 오후 11시 10분이었데도 불구하고 NHK의 간판 드라마인 대하드라마 신센구미!를 능가하는 시청률을 기록하기도 한다.[84]아사히 신문
심지어 이해 5월 22일,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의 북한 방문 일정 때문에 드라마 방영이 1주일 연기되자 "왜 겨울연가를 방영하지 않느냐"는 문의가 3,000건이나 들어왔으며, 2004 아테네 올림픽 기간에는 중계 방송 때문에 19회의 시간대를 늦춰서 방영하자 문의가 쇄도했다.[85] 또, 이해 7월 23일에는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가 노무현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마친 직후 바로 겨울연가에 출연했던 배우 최지우를 내각총리대신 관저에 특별초청 했다. 당시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는 최지우를 보자마자 "아, 후유노 소나타!"라고 외쳤으며, 배용준이 일본에서 '욘사마'로 불리며 엄청난 인기를 얻는 것에 자극을 받았는지 한 모임에서 "앞으로 '준사마'로 불리도록 노력하겠다.'라며 우스갯소리를 하기도 했다. #
한편, 이 드라마로 인해 강원도 춘천시에 위치한 남이섬과 경상남도 거제시에 위치한 거제도는 일본에서 성지순례를 온 팬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또한 탤런트 배용준과 최지우가 일본에 갔을 때 4,500여 명 정도의 인파가 도쿄 하네다 국제공항에 몰렸으며, 이 중 대다수는 30대~60대였다. 더욱 놀라운 점은 배용준과 최지우를 보러 온 사람이 대부분 중년 여성인 것도 모자라 몇몇은 눈물까지 흘리며 그들을 맞이한 것이었다. 추가로, 배용준 팬들은 배용준을 ‘욘사마’(용준 님), 최지우 팬들은 최지우를 ‘지우 히메’(지우 공주)로 부르며 팬덤을 다졌다.
이에 대해, 일본 미디어 전문가들은 유례없는 한국 드라마의 대성공을 분석했다. 그 결과, 가부장적 성격이 강한 일본 가정 내의 권위주의·남존여비에 지친 주부들에게 드라마 가을 연가는 대리만족을 주었기 때문에 이렇게 대박을 칠 수 있었다는 분석이 강하다. 또, 당시 일본 드라마는 도시적인 분위기가 주류였던지라 중년 여성들이 볼 만한 콘텐츠는 거의 없었으며, 겨울연가가 일본에서 히트를 치기 전까지 일본의 주요 시청자는 대부분 젊은 세대와 남성들이었다. 그러다보니 일본 방송사들은 중년 여성들의 관심을 끌어 올리기 위해 힘을 주어 편성하게 된 것이다.
이외에도 일본에서 한류 열풍을 불러일으킨 주역으로는 인기가수 보아, 신화, 쥬얼리가 있으며, 탤런트 중에서는 이병헌, 장동건, 원빈이 있다. 특히, 가수 보아의 경우 이해 연말에 발표한 메리크리가 일본에서 굉장한 인기를 끌었고, 일본의 민영방송 후지 테레비가 서울 동대문을 실시간으로 연결해 보아의 가요 무대를 생중계할 정도였다. #
중국에서도 북한과 마찬가지로 2003~2004년에 방영된 MBC 드라마 대장금이 굉장한 인기를 끌었다. 이해 10월, 중국의 한 케이블 방송을 통해 대장금이 중국 전역에 방영되었는데 시청률이 3.2%였다. 시청률만 보면 터무니 없는 수치인 것 같지만, 중국의 평균 시청률 수치를 따졌을 때 3.2%는 제법 잘 나온 시청률로, 공식 시청자수는 약 1억 6천만 명으로 추산되었다. 특히, 드라마 대장금은 중국에서 밤 10시에 방영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대도시 지역에서 시청 점유율 10%대를 기록했다.
이렇게 대장금이 중국에서 방영되면서 굉장한 인기를 얻자, 대장금의 주제곡 또한 중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다. 심지어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은 한국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대장금'을 매우 좋아하지만 공무로 바빠 전부 보지는 못했다"라고 할 정도로 드라마 대장금의 열렬한 팬임을 드러냈다. 말고도 이해 5월에는 중국 선양시에 코리아타운이라는 곳이 새롭게 생기기도 하였다. # 또, 중국에서 유행한 한류의 특징이 있다면 일본과는 달리 젊은 세대에서 더 인기가 많았다는 점이다. 실제 당시 중국의 젊은 세대[86]에게는 중국 문화에 비해 한국 문화가 화려함과 동시에 너무 일탈적이지도 않은 적당한 성격을 띠고 있었기 때문에 선택되었다는 견해도 존재한다.
이와 관련해 중국 미디어 전문가들은 중국에서 한류가 유행하게 된 배경을 탐구했다. 당시 중국의 전문가들은 중국인들은 서구지향적 문화 소비 추세가 상승 중이었는데, 미국 문화로 대표되는 서구 문화는 미국과 대립 관계를 갖은 중국 입장에서는 거부감을 주었고, 일본과는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와 같은 정치적인 갈등으로 반일 감정이 컸다. 또, 홍콩의 문화는 이미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서서히 저물어가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렇다보니 한국 문화가 적합하다고 생각되어 유행하게 되었다는 의견이 압도적이었다. 또, 미국이나 일본 문화에 비해 한국 문화는 소비 비용이 상당히 저렴한 것도 한몫했다.
이외에도 중국과 홍콩에서 한류 열풍을 불러일으킨 주역으로는 인기가수 NRG, 베이비복스, 코요태가 있으며, 탤런트 중에서는 장나라, 이정현, 김희선이 있다. 이 중 걸그룹 베이비복스의 경우 이해 11월, 중국에서 제1회 동맹 박람회 폐막식 공연에 한국 대표로 출전하기도 했으며, 베이징올림픽체육관에서 콘서트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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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f 문서명 = 문서명 != null ? 문서명 : calleeTitle
의 [[동아시아의 한류#|]] 부분을}}} 참고하십시오.8.3. 게임
이해 11월까지는 6세대 거치형 게임기와 휴대용 게임기의 시대였으나 11월 21일[87]에 닌텐도가 닌텐도 DS[88]를, 12월 12일[89]에 소니가 PSP를 출시하면서 휴대용 게임기에 한해서 7세대의 태동기를 거쳤고, 이듬해 여름과 가을에 걸쳐 새 기기에 대응하는 소프트웨어를 대거 출시하면서 2005년 연말에는 500만대 판매에 성공하는 등 세대 교체를 가속화시켰다.[90] 반면, 이해에 새로 출시한 6세대 게임기는 미취학 아동을 타겟으로 한 게임기 브이텍의 V.Smile, 노키아의 N-Gage QD와 조디악 2이다.[91]먼저, 마리오 시리즈로는 2000년 이후 4년 만에 출시된 페이퍼 마리오 시리즈의 두 번째 게임인 페이퍼 마리오 1000년의 문이 출시되면서 많은 이들의 기대를 모았으며, 지난해에 발표된 마리오 파티 5의 미니 게임들을 재정비한 후 이해 11월에 출시한 마리오 파티 6가 있다. 또, 요시를 주인공으로 한 요시의 만유인력의 귀여운 색채와 그림으로 어린이들 사이에서 각광 받은 바 있다. 한편, 별의 커비 시리즈의 원작자 사쿠라이 마사히로가 마지막으로 제작에 참여한 별의 커비 거울의 대미궁이 이해에 출시되었고, 소닉 메인 시리즈 중 하나인 소닉 어드밴스 3은 6월에 출시돼 북미에서 엄청난 판매고를 올렸다. 곤충에게 영감을 얻어 개발된 피크민 시리즈의 피크민 2도 4월에 출시돼 단종 당시 전세계 판매량 112만 장을 기록하였다.
출시 4년을 맞는 PlayStation 2가 680억 달러 규모의 수익을 기록한 해였고, 한국에서는 이해 10월 29일에 100만대 출하를 달성하면서 플레이스테이션 대중화를 공식화한 시기였다. 2004년을 대표한 플레이스테이션 소프트웨어로는 그란 투리스모 시리즈의 전성기를 상징하는 작품으로도 통용되는 그란 투리스모 4, 니드 포 스피드 시리즈 1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개발된 니드 포 스피드: 언더그라운드 2, 2004 올해의 게임상 수상작이자 PlayStation 2 발매 이후 가장 많이 팔린 Grand Theft Auto: San Andreas[92]가 있다. 또, 액션, 콘텐츠, 레벨을 적당히 조절해 게이머들과 평론가들에게 호평을 받은 메탈기어 솔리드 3가 이해 11월에 출시되었다. 한편, 하드웨어 부분에서는 PlayStation 2의 슬림형 모델인 70000번대가 이해 11월에 첫 출시되었다.[93]
Xbox 1세대는 2001년 출시 이후 3년 만에 드디어 빛을 보게 되었다. 이해에 출시한 둠 3, 하프라이프 2 그리고 헤일로 2가 3연속으로 큰 인기를 모으면서 2003년까지 3년 연속으로 10억 달러 이상의 적자를 기록한 Xbox가 유일하게 2004년에만 5억 달러 미만의 적자를 내면서 나름대로 성적이 양호했다는 증거를 보여주었다. 특히, 헤일로 2는 Xbox 1세대의 런칭작인 헤일로: 전쟁의 서막의 차기작으로서 출시 전부터 게이머들에게 큰 기대를 얻었는데, 출시 후에도 난이도 문제를 제외하고는 뛰어난 그래픽과 센스 있는 선곡이라고 평가 받으면서 Xbox 1세대의 최다 판매 소프트웨어에 당당히 자리하였다. 이후 2005년 11월 22일에 Xbox 360이 출시돼 2006년 2분기에 이미 500만~550만대 판매를 달성하면서 2006~2008년에 최전성기를 맞았고, Xbox 1세대와 그에 대응하는 소프트웨어는 결국 자취를 감췄다.
8.4. 스포츠
국내 축구계에서는 2004년 아시안컵 8강이라는 좋지 않은 성적과 2006 독일 월드컵 2차 지역예선에서 불안한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어떻게 해서든 최종예선에는 진출하였고, 연말에는 지금도 회자되는 사건이 일어난다. 그것은 바로 조 본프레레 감독이 이끈 2군과 유망주로 라인업이 구성되었던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이 최정예 1군 멤버들로 구성된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을 평가전에서 3:1로 격파하는 이변을 보여준 사건이다. 특히 이 경기를 통해 독일 축구 대표팀 역사상 최초로 아시아 팀에 패배한 기록과 대한민국 축구 대표팀 역사상 최초의 독일전 승리 기록을 달성하였다. 특히 이 경기의 하이라이트 장면은 본인의 인생골이라 불리는 이동국의 터닝 발리슛을 통한 멋진 골장면과, 이운재의 미하엘 발락의 페널티킥을 선방해내는 장면이다. A매치에서 독일을 제압한 한국 축구의 이 역사적인 순간은, 14년이 지난 후 2018년 월드컵에서도 재현되었다.[94] 한편 K리그에선 안양 LG 치타스가 서울특별시로 복귀(재이전)해 FC 서울로 팀명이 바뀌었고, 안양 시민들은 FC 안양이 창단되기까지 9년을 기다려야 했다.해외 축구계에서는 굉장히 충격적인 이변들과 엄청난 기록들이 연속으로 있었던 해로 기억된다. 먼저 2003-04 UEFA 챔피언스 리그에서는 그 누구도 결승전에 진출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언더독으로 평가받은 두 팀인 FC 포르투와 AS 모나코가 서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레알 마드리드와 같은 빅리그의 빅클럽들을 격파하고 결승전까지 진출해 많은 팬들에게 충격을 안겨주었고, 결승전에서는 FC 포르투가 AS 모나코를 상대로 3:0으로 승리하면서 포르투는 17년 만에 빅 이어를 들어올렸다.[95]
얼마 뒤 개최된 유로 2004에서도 유럽의 약체 그리스 축구 국가대표팀이 개막전에서부터 개최국이자 포르투의 챔스 우승 주역들이 주전이었던 우승후보 포르투갈 축구 국가대표팀에게서 승리를 차지하고 이후 조별리그에서도 좋은 모습을 보이면서 또 다른 우승후보 스페인 축구 국가대표팀과 동유럽의 강호 러시아 축구 국가대표팀을 제치고 8강 토너먼트에 진출하고, 이후 8강에서도 디펜딩 챔피언인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과 4강에서 파벨 네드베드를 위시한 황금 세대들이 포진했던 동유럽의 강호 체코 축구 국가대표팀, 그리고 결승전에서 다시 만난 개최국이자 개막전 상대였던 포르투갈 축구 국가대표팀을 차례대로 승리하면서 전세계에 충격을 안겨주었고 그리스는 사상 처음으로 메이저 국가대항전 트로피를 들어올린다.[96]
그리고 이뿐만 아니라 2003-04 시즌에는 앙리, 비에이라, 융베리 등을 위시한 아스날 FC가 프리미어 리그 개편 이후 사상 최초로 리그 무패 우승을 달성했고, 스페인 라리가팀 데포르티보 라 코루냐가 UEFA 챔피언스 리그 8강에서 AC 밀란을 상대로 한 리아소르의 기적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 외에도 분데스리가에서는 SV 베르더 브레멘이 리그와 포칼컵을 동시에 우승하면서 더블을 달성하고, 라리가에서도 발렌시아 CF가 리그와 UEFA 컵을 동시에 우승하는 더블을 달성한다.[97] 세리에 A는 AC 밀란이 5시즌만에 스쿠데토를 따냈다.
리즈 유나이티드 FC는 재정난으로 인한 전력 약화를 극복하지 못하고 끝내 프리미어리그 19위로 강등되어 2020년까지 16년 동안 기나긴 하부리그 생활을 시작한 해이다.
F1에서는 미하엘 슈마허가 드라이버 챔피언을 차지하며 역대 최초로 개인 통산 7회 챔피언과 5회 연속 챔피언을 달성했다.
국내 야구계에서는 이해에 최악의 시기를 보내게 된다. 프로야구 역사상 최소 평균관중을 기록했고 이해에 프로야구 병역비리 사건이 터진다. 관중은 평균 4,383명이 왔고 총 2,331,978명이 입장했다. 이해를 비롯한 2000년대 전반기는 야구의 인기가 매우 없던 시절이다. 스타리그로 대표되는 e스포츠가 매우 흥행한 것도 있고, 이 시기는 대만에게 올림픽 예선에서 지면서 못 나갈 정도로 국제대회 성적도 좋지 않았다. 인기팀으로 분류되는 삼성 라이온즈와 KIA 타이거즈는 평균 관중수가 2000명대였고, 한화 이글스는 비인기팀인 현대 유니콘스보다도 관중이 적었다. 한화가 평균 1,916명이고 현대는 1,955명이었다.
해외 야구계에서도 엄청난 화제거리가 있었다. 2004년 월드 시리즈는 보스턴 레드삭스가 86년의 밤비노의 저주를 깨고 우승했고[98] 2004년 한국시리즈는 무려 9차전까지 가는 우중 대혈투 끝에 현대 유니콘스가 삼성을 꺾고 마지막 왕조의 불씨를 살렸다. 2004년은 각 리그의 최종우승자 결정시리즈가 가장 화끈했던 해로 기억에 남을 것이다. 그 외 국내 야구계 동향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은 이해 봉황대기부터 기존의 알루미늄 배트 대신 나무 배트를 도입한 점이다.
국내 농구계에선 연세대 선수 하승진이 한국인으로서 최초로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에 입단하여 NBA 무대를 밟았다.
해외 농구계에선 NBA 팀 디트로이트 피스톤즈가 14년 만에 파이널에서 이겨 래리 오브라이언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그리고 2004 아테네 올림픽에서는 아르헨티나 농구 국가대표팀이 4강에서 미국 농구 국가대표팀을 꺾고 결승에 진출하는 이변을 선보이고, 이후 결승전에서도 이탈리아 농구 국가대표팀을 상대로 승리를 차지하면서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드림팀 결성 이후 최초로 미국 외의 국가가 올림픽 농구 금메달을 차지하게 되었다.
8.5. e스포츠
e스포츠에서는 2001년, 2007년과 함께 가장 화젯거리가 많았던 해로 평가받은 해이다. 먼저 박성준이 8월 초에 있었던 Gillette 스타리그 2004 결승전에서 박정석을 꺾고 저그의 첫 온게임넷 스타리그 및 양대리그 우승을 일구어낸다.[99][100] 그리고 이 전에 있었던 4강에서는 당시 수많은 저그들의 악몽과도 같았던 최연성을 상대로 그 유명한 5:0 관광을 선보이면서 3.3 혁명 이전까지 스타판 최고의 충격적인 이변을 안겨준다. 그는 이러한 여세를 몰아 7차 iTV 랭킹전 결승전에서도 다시 한 번 더 최연성을 꺾고 우승을 차지하고, 연말에는 제2회 KT-KTF 프리미어 리그에서 KTF 리그 우승 및 통합 챔피언전 진출에 성공한다. 그리고 EVER 스타리그 2004에서는 그 유명한 삼연벙, 감동의 골마 사건이 일어나게 되었다. 특히 11월에 있었던 삼연벙은 3.3 혁명 이전까지 가장 충격적인 5전제로 꼽힐 정도였다.최연성 역시 지난해 11월 TG삼보 MSL 우승에 이어 이해에도 4월에는 하나포스 센게임 MSL과 8월에 Spris MSL을 차례대로 MSL을 3연속으로 우승을 차지하면서 본격적으로 최강자의 자리에 오르게 되고, 이후 11월 가을에 펼쳐진 EVER 스타리그 2004 결승전에서도 스승 임요환을 꺾으면서 2004년을 자신의 해로 만들었다. 한편 7월에는 부산 광안리해수욕장에서 열린 SK텔레콤 T1과 한빛 스타즈 이 두 팀이 펼친 SKY 프로리그 2004 1Round 결승전에서는 10만 관중이 왔다는 설이 퍼졌을 정도로 정말 많은 관중들이 운집하면서 이때를 기점으로 광안리는 한동안 e스포츠의 성지로 떠오르게 된다.[101] 그리고 한빛 스타즈가 당시 스타군단이었던 SK텔레콤 T1을 상대로 치열한 접전 끝에 4:3의 세트스코어로 우승을 차지하며 팀 사상 최초로 프로리그 및 팀단위대회 우승을 차지한다. 또한 강민도 3월에 NHN 한게임배 온게임넷 스타리그 03~04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프로토스로서는 최초이자 유일하게 양대 리그 우승을 기록한다. 그외에도 Spris MSL에서 그 유명한 이병민을 상대로 할루시네이션 리콜을 시전한 역대급 입스타를 시전한 것도 이 시절.[102] 그 외에 SK텔레콤 T1은 팀리그 2연패를 기록하였고, 슈마 GO도 neowiz Pmang Cup 온게임넷 프로리그 우승과 Tucson MBC GAME 팀리그 준우승을 기록하고, 팬택앤큐리텔 큐리어스도 10월 말에 끝난 SKY 프로리그 2004 2Round에서 우승을 차지하면서 팀 최초이자 유일의 팀단위대회 우승 트로피를 획득하였다. 또한 KTF 매직엔스는 2월에 끝난 LG IBM MBC GAME 팀리그에서 준우승을 차지하면서 구단 사상 최초로 팀리그 및 팀단위대회 결승진출과 준우승 기록을 남기고, SouL도 SKY 프로리그 2004 2Round에서 준우승을 차지하면서 구단 사상 최초로 프로리그 결승 진출 및 준우승 기록을 남긴다.
대회 내적으로 보면 먼저 기존의 온게임넷 스타리그는 Gillette 스타리그 2004부터 대회 명칭에서 '온게임넷'을 빼고 그냥 스타리그라는 명칭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였고, MSL은 하나포스 센게임 MSL을 통해 본격적으로 권위와 위상이 강화되면서 양대 리그로서의 면모를 갖춰나가기 시작한다. 온게임넷의 프로리그는 SKY 프로리그 2004 1Round부터 당시 11개팀 모두가 참가하면서 당대 최대 규모의 팀 단위 대회로 나아가기 시작하였고, MBC게임의 팀리그도 하반기에 개최한 MBC 무비스 MBC GAME 팀리그에서는 기존의 7전 4선승제 팀배틀 더블 엘리미네이션 방식에서 좀 더 대중적인 5전 3선승제 팀배틀 풀리그 방식을 채택하였다. 지난해부터 치러진 당대 최대 규모의 이벤트 대회였던 KT-KTF 프리미어 리그도 다시 한 번 더 개최되면서 많은 화제를 불러일으키게 된다. 반면에 iTV 랭킹전은 이해 여름에 열린 7차 iTV 랭킹전을 마지막으로 iTV가 송출이 중단되어버리면서 자연스럽게 폐지가 되고 만다.
8.6. 교육
8.7. 인터넷
- 메타 플랫폼즈의 대표 마크 저커버그가 이해 2월 4일 페이스북[103]을 런칭하였다.[104]
- 구글의 이메일 서비스인 Gmail이 이해 4월 1일 출시되었다.
- 세계적인 웹 브라우저 Firefox가 이해 11월 9일 출시되었다.
- Windows NT 4.0이 이해 12월 31일을 기해 단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