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8px; color: #C3C965"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메이지 시대| 메이지 시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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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중의원 (가나가와 11구) | ||||||||||||||||||||||||||||||||||||||||||||||||||||||||||||||||||||||||||||||||||||||||||||||||||||||||||||||||||||||||||||||||||||||||||||||||||||||||||||||||||||||||||||||||||||||||||||||||||||||||||||||||||||||||||||||||||||||||||||||||||||||||||||||||||||||||||||||||||||||||||||||||||||||||||||||||||||||||||||||||||||||||||||||||||||||||||||||||||||||||||||||||||||||||||||||||||||||||||||||||||||||||||||||||||||||||||||||||||||||||||||||||||||||||||||||||||||||||||||||||||||||||||||||||||||||||||||||||||||||||||||||||||||||||||||||||||||||||||||||||||||||||||||||||||||||||||||||||||||||||||||||||||||||||||||||||||||||||||||||||||||||||||||||||||||||||||||||||||||||||||||||||||||||||||||||||||||||||||||||||||||||||||||||||||||||||||||||||||||||||||||||||||||||||||||||||||||||||||||||||||||||||||||||||||||||||||||||||||||||||||||||||||||||||||||||||||||||||||||||||||||||||||||||||||||||||||||||||||||||||||||||||||||||||||||||||||||||||||||||||||||||||||||||||||||||||||||||||||||||
선거제도 개편 | → | 제41~44대 고이즈미 준이치로 | → | 제45~49대 고이즈미 신지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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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230AE><colcolor=#c3c965> 출생 | 1942년 1월 8일 ([age(1942-01-08)]세) | ||
가나가와현 요코스카시 | |||
재임기간 | 제87대 내각총리대신 | ||
2001년 4월 26일 ~ 2003년 11월 18일 | |||
제88대 내각총리대신 | |||
2003년 11월 19일 ~ 2005년 9월 20일 | |||
제89대 내각총리대신 | |||
2005년 9월 21일 ~ 2006년 9월 26일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0230AE><colcolor=#c3c965> 가족 | 외조부 고이즈미 마타지로[1] 부친 고이즈미 준야[2] 모친 고이즈미 요시에 전처 미야모토 가요코 (이혼) 장남 고이즈미 고타로 차남 고이즈미 신지로 며느리 타키가와 크리스텔 삼남 미야모토 요시나가 | |
학력 | 요코스카 시립 야마자키 초등학교 (졸업) 요코스카시 마보리 중학교 (졸업) 가나가와현 요코스카 고등학교 (졸업) 게이오기주쿠대학 경제학부 (경제학 / 학사) | ||
신체 | 169cm, A형 | ||
종교 | 신토 | ||
정당 | |||
지역구 | 가나가와 11구 | ||
의원 선수 | 12 (중) | ||
의원 대수 | 33, 34, 35, 36, 37, 38, 39, 40, 41, 42, 43, 44 | ||
약력 | 후쿠다 다케오 비서관 중의원 의원 대장정무차관[3] 제69-70·81대 후생대신 제55대 우정대신 제20대 자유민주당 총재 제87-89대 내각총리대신 제133대 외무대신[겸임] 제38대 농림수산대신[겸임] |
[clearfix]
1. 개요
일본의 정치인. 제87~89대 내각총리대신을 역임했다.내각총리대신치고는 상당히 긴 기간인 5년 5개월을 재임했으며, 그렇게 4년 11개월의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총리를 제치고 전후 최장기 재임 4위 기록을 세웠었다. 의원내각제인 일본 정계에서 연임을 포함해 총리 임기를 다 채우고 나가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당장 단임인 대한민국 대통령의 임기 5년보다 더 길게 재임하였고, 그 재임 기간 중 3년 8개월(2003년 ~ 2006년)이 노무현 전 대통령과 겹친다. 게다가 정치인 치고 개성 강한 헤어 스타일을[6] 유지해서 한국인에게 여러 의미로 기억되는 일본 총리가 되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오랜 재임기간 때문에 그에 비례해 악명을 널리 떨친 측면도 있다.[7]
한국에서 고이즈미의 이미지는 지속적인 야스쿠니 신사 참배나 역사 교과서 왜곡 문제, 독도 문제 등으로 인해 극우 이미지가 강하게 박히긴 했지만, 사실 후술되어있듯 고이즈미 담화를 발표하며 무라야마 담화의 계승 의지를 보여주기도 했고 서대문 형무소를 방문해 사죄의 목소리를 전하는 등 한국에 우호적인 모습 역시 제법 보였다.[8] #
어찌 됐든 이 사람만큼 한국인들에게 혐오를 받은 일본 총리는 당시 기준으로는 거의 없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한창 반일 감정이 고조되던 시기엔 '고이즈미 가지고 놀기' 등의 플래시 게임이 국내에서 유행하기도 했었으며, 같은 이유로 불멸의 이순신(게임)에서 적으로 나오거나, 스타크래프트의 유즈맵 '독도 지키기'에서 최종보스로 나오는 등 당시 기사, 고이즈미 가지고 놀기 게임 그런데 세월이 약인지 고이즈미의 악명도 퇴임 후 [age(2006-09-26)]년이 지난 지금은 많이 바랬으며, 퇴임 이후 그의 정치적 제자이기도 했던[9] 아베 신조가 2013년 재집권 시작부터 막 나갈 기질을 보이면서 고이즈미를 능가하기 시작했고, 이 때문에 아베 집권기 당시 일본이 한창 우경화되었을 때는 아예 "고이즈미 시절 일본이 그나마 나았다"고 하소연하는 목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고이즈미가 과거사 관련해서 구설수에 오른 적은 많았지만 현대사는 웬만하면 건드리지 않았는데, 아베 정권 들어선 현대사의 대명사인 한일월드컵 개최 사실을 삭제한 교과서를 검정 통과시키는 모습을 보이기까지 했으니. 또 2003년 유사법제 3법 통과 등 군사대국화 기도로 논란이 있었으나, 아베만큼은 아니었다.
이 외에도 정치인 이시하라 신타로, 아소 다로나 모미이 가츠토,[10] 햐쿠타 나오키, 그리고 다모가미 도시오 등 다수가 미친 존재감을 보이면서 한국에서 고이즈미의 존재감은 점점 묻히고 있다. 도리어 "이런 인간들을 거느리고도 결정적인 선을 넘지 않았던 고이즈미는 의외로 정상인이 아니었을까"라는 재평가마저 나오는 상황이다.
사실 곰곰히 생각해보면, 야스쿠니 신사 참배나 독도 문제를 제외하곤 상식 선에 들었던 인물이었다는 평도 있다. 실제로 무라야마 담화를 그대로 계승한 고이즈미 담화를 발표하고, 서대문 형무소에도 갔다오는 등 일본 제국의 만행에 대해서 어느정도 참회하는 모습도 보였다. 2004년에는 한국을 안보 우호국격인 백색 국가에 지정해 신뢰할 만한 나라라는 제스처를 보이기도 했다. 임기 초반엔 치도리가후치 전몰자 묘원을 국립 추도시설로 쓰는 방안을 검토하기도 했으나, 야스쿠니 신사의 상징성을 강조하는 일본 우익들의 성화 때문에 무위로 끝난 적도 있었다. 심지어 최초의 북일 정상회담도 이시기(2002, 2004)에 이뤄졌다. 이러한 재평가는 청출어람을 이룬 그의 후임자의 탓도 상당하다.
이런 이면엔 대외정책 문제는 미일동맹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함으로써 국내 문제에 집중하겠다는 의도 또한 작용했을 것이다. 고이즈미는 특별한 외교적 지향이나 대외정책에 대한 정견이 없었으며, 내정개혁이 임기 내내 추구한 단일 목표였다. 그 밖의 다른 분야 정책들은 그 달성을 위해 희생되어도 좋다는 것이 내각의 일관된 기조였다. 고이즈미가 보여온 이러한 혼란스러운 모습은 이에 기반한 것일지도 모른다.
2. 생애
2.1. 젊은 시절
어린 시절, 아버지 고이즈미 준야와 함께 |
1942년 1월 가나가와현 요코스카시에서 출생하였다. 일본 총리들이 흔히 그렇듯 선거구를 3대째 세습해 온 정치 명문가의 3세 국회의원이다. 외조부 고이즈미 마타지로(小泉又次郎)는 야쿠자 조직 고이즈미구미(小泉組)의 보스로 시작하여 일본 제국 중의원에서 12선 의원과 하마구치 내각 - 제2차 와카쓰키 내각에서 제33대 체신대신을 지냈다.[11] 부친 고이즈미 준야는 9선 중의원과 1960년대 방위청 장관을 지냈다.
준야의 성씨는 본래 '사메지마(鮫島)'였으나 마타지로의 외동딸인 고이즈미 요시에(小泉芳江)와 결혼[12], 아내의 성씨를 따라 '고이즈미'로 성씨를 바꾸고 고이즈미 가문의 데릴사위가 되었다. 준야와 요시에는 장녀 미치코(道子), 차녀 다카코(隆子), 3녀 노부코(信子), 장남 준이치로, 차남 마사야(政也)를 낳았는데 2남 3녀 모두 '고이즈미' 성씨를 따랐다.
고이즈미는 가나가와 현립 요코스카 고등학교[13]를 거쳐 3수로 명문 게이오기주쿠대학 경제학부에 입학했으며 대학 졸업 후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으로 유학을 갔다. 런던에서 공부하던 중 부친 준야가 급사하는 바람에 급히 귀국하여, 부친의 지역구를 물려받아(가나가와 2구) 총선에 출마하면서 27세의 나이로 정계에 입문했다.
1972년 중의원 총선거에서 첫 당선된 고이즈미 |
그러나 27세에 처음 출마한 선거인 1969년 중의원 선거에서 낙선했고[14], 훗날 일본 총리가 되는 자민당 우파의 거두 후쿠다 다케오 당시 중의원 의원의 비서관으로 들어가 정치를 배웠다. 2년 후인 29세에 중의원 초선에 당선되고 이후로 12선 중의원, 대장성 정무차관, 후생대신, 우정대신 등의 각료를 역임했다. 우정대신 때부터 민영화를 적극적으로 주장하기 시작해 결국 뜻을 이뤘다.
2.2. 총리가 되다
고이즈미는 1990년 가토 고이치, 야마사키 타쿠와 함께 YKK 연합을 결성하고부터 두각을 보이기 시작했다. YKK는 세사람의 영문이니셜로 이들은 다케시타파 지배에 반기를 들었다. YKK 연합은 고이즈미보다는 가토가 리더의 역할을 했기에, 사실상 이 연합의 막내격이었다.1995년 9월에는 우정 민영화를 내걸고 게이오기주쿠대학 선배 하시모토 류타로와 총재직을 놓고 싸웠으나 대패하고, 1998년에는 오부치 게이조와의 대결[15]에서도 패하였다. 그러나 2000년 말 '가토의 난'이 실패하면서 고이즈미가 YKK연합의 대표로 나섰으며, 모리 요시로가 지지율이 10% 아래로 추락하면서 참의원 선거에서 패배가 확실시되었던 상황이었고, 2001년 4월 24일, 자민당 총재경선에서 예상 밖의 당원 돌풍을 일으키면서 95년 패했던 자민당 최대 파벌 헤이세이 연구회의 하시모토 류타로 후보를 압도적인 표차이로 누르고 총재도전 3수 만에 정상에 올랐다. 이후 2003년에 후지이 다카오 후보를 누르고 총재 자리를 연임했다. 그리고 2001년 10월 16일 방한했다.
한국의 인터넷에선 원래 노나카 히로무가 총리로 유력했으나 부라쿠민이어서 고이즈미가 이겼다는 식의 얘기가 퍼지기도 했는데, 사실이 아니다. 애초에 노나카 히로무는 총재 선거에 출마한 적도 없고, 하시모토 류타로와 후지이 다카오를 후보로 밀었으나 두 후보 모두 개혁을 내세운 고이즈미에게 패배한다.
2.3. 총리 시절
총리로 재임할 당시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내각으로는 사토 에이사쿠와 요시다 시게루 다음으로 오래 집권(1,980일)했고, 나카소네 야스히로 이후로 오래간만에 사임하지 않고 임기를 끝까지 마친 자유민주당 총재가 되었다.총리가 된 후 잃어버린 10년을 극복하자며 성역없는 개혁이라는 슬로건하에 신자유주의적 개혁에 들어갔는데 공기업 민영화, 낙하산 철폐, 정경관 유착 해소, 조직 유연화 등이 대표적이다. 그 결과 당시 일본의 고질적인 문제점을 해소하는 데 상당히 기여했다는 평을 받기도 했지만, 반대로 복지 정책 축소와 이로 인한 양극화 심화 등 부작용에 따른 비판도 있었다.
국민의 정부 시절 방한하여 온전한 한일관계 유지에 노력하였으나, 참여정부 시절 야스쿠니 신사 참배와 함께 시마네현 의회가 다케시마의 날을 제정하면서 한국 네티즌들로부터 비난과 공격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다만 야스쿠니 신사 참배는 자기의 의지가 아닌 자민당내 우익들을 회유하기 위해 고이즈미가 쓴 수단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2000년 초반에 치도리가후치 전몰자 묘원을 국립묘지화하려는 움직임도 있었고, 그 외에 반원전 등을 주장하였으며, 2001년 10월 15일 일본 총리로선 최초로 서대문 형무소를 방문하여 참배하기도 했기 때문.# 물론 임기 내내 야스쿠니 신사 참배가 꾸준히 이어졌기 때문에 단순히 우익 회유 수단으로 참배를 했다고 보긴 좀 납득하기 어려운 점도 있다만. 아니면 회유를 넘어 친밀감을 심으려는 의도였을지도.
2001년 참의원 선거에서 9년 만에 자민당이 압승을 거둘때부터만 해도 탄탄대로를 걸을 거 같았지만, 2003년에 민주당이 자유당과의 합당을 통해 세력확장을 단행하면서 이를 저지하기 위해 온갖 어그로를 끌었지만 결국 자민당 의석이 줄어들어 단독과반 확보에 실패하고 오히려 민주당에게 비례대표 1당을 빼앗겼다. 그래도 연립여당인 공명당, 보수신당과 합해서 275석으로 절반을 넉넉하게 넘었기 때문에 정권을 안정적으로 연장할 수 있었지만 이듬해인 2004년 참의원 선거에선 민주당이 50석을 확보하며 1956년 참의원 선거에서의 기존 야당 최대였던 사회당 기록을 깨고, 자민당은 49석을 확보하는데 그치는 패배를 기록한다.
이렇게 두 차례 연속 선거에서 부진한 성적표를 보인 탓에 장기집권 여부는 불확실해졌고 당내에서도 점차 지지기반을 상실하고 있었으며 우정선거 직전에 치러진 2005년 도쿄도의회 선거에서도 자민당은 연립정당인 공명당과 합쳐서 과반을 획득했지만 어쨌든 의석수가 줄어드는 등 고이즈미 준이치로에게 썩 좋지 못한 상황은 계속되었다. 그러나 고이즈미는 이렇게 지지부진한 상황을 뒤엎기 위해 단박에 승부수를 던진다.
2005년 8월 8일 중의원에서 통과된 우정 민영화 관련 법안이 민주당이 다수당인 참의원 본회의에서 부결되자 참의원 부결 30분 만에 내각에서 중의원 해산을 결정하고, 중의원 해산 결의 서명을 거부한 시마무라 요시노부 농림수산대신을 파면[16]한 뒤 본인이 '내각총리대신 겸 농림수산대신'으로서 겸직한 채 가결시키는 패기를 보인다.[17] 이른바 우정 해산. 이 도박으로 그동안 지지부진하던 정국을 뒤엎고 지지율이 급상승, 9월 11일 제44회 총선거에서 자민당은 296석을 획득하게 되는데 이는 1986년 중의원 선거 이래로 최다 의석수를 확보한 것이었다.[18]
이후 자민당 총재의 임기가 만료됨에 따라 2006년 9월 20일 일본의 아베 신조 내각관방장관이 자민당 제21대 총재로 선출되면서 내각총사퇴 후 내각총리대신직에서 물러났다. 사임하지 않고 임기를 마친 몇 안 되는 총리였다. 이후에는 스가 요시히데가 총재 임기 만료 후 재선을 포기함에 따라 만기 퇴임했다.
정책적인 면에서는 지금도 제법 회자되는데, 일본 역사에서 손꼽히는 리버럴리스트였다는 평을 받기도 한다. 고이즈미의 기본 기조는 작은 정부였으며, 이는 일본의 전통적인 정치성향과 정면으로 대치되는 경우가 많았기에, 야당 뿐만 아니라 여당에서도 호의적이지 않은 시선이 많았다. 모리 요시로 총리가 대표적. 그러나 신자유주의 성향의 인사들과 친미 기조 아래 '북일 정상회담'[19] 등 외교정책에서의 지지층도 있었기에, 이들을 결집시켜서 우정 민영화나 여계 혈통 천황 인정 등 일본의 내부적인 개혁 안건을 추진하기도 했다. 일본 같은 폐쇄적인 나라에서 고이즈미 같은 (일본 기준) 개혁 소장파 성향 인물이 총리직을 오래 할 수 있었던 데에는 나름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의 결과, 복지 혜택이 축소되고 많은 분야에서 불평등성이 심화되었다는 평가 역시 나온다. 특히 고이즈미 임기 만료 후, 이러한 폐단이 보도되기 시작했고 이 때문에 고이즈미를 비판하는 목소리도 있다.
관광 부문으로 2003년 1월에 2010년까지 관광객 1,000만 유치라는 목표 아래 Visit Japan 슬로건을 내세웠다. 이는 제2차 아베 신조 내각에 실현되었으며, 일본이 관광대국으로 가는 원동력을 만들었다.
2.3.1. 두 차례의 북일정상회담
북핵문제로 인한 고립을 돌파하기 위해서 2000년대 이후 개혁개방적 면모를 한창 보이던 김정일은 2000년 6월, 한국의 김대중 대통령과 남북정상회담을 가졌다. 같은 해 9월에 미국의 올브라이트 국무장관과 10월에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과 각각 회담을 마쳤다. 하지만 조지 W. 부시가 예상을 깨고 앨 고어를 꺾고 당선 되면서 상황은 뒤집힌다.그러나 북한의 평화공세는 계속되었고, 결국 2002년 9월 전격적으로 평양을 방문한 고이즈미와 일북 수교를 위한 회담을 가졌다. 당시 김정일은 고이즈미에게 "남한에 8억 달러 줬으니 우리에게도 100억 달러는 줘야 한다"면서 속마음을 넌지시 드러내기도 했다. 당시 일본과의 실무협상을 맡은 사람은 'X'라 불린 정체불명의 인물이었는데 일본에서 그의 정체를 간파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지만 간단한 신상조차 캐낼 수 없었다. 다만 일본 측에서 성의를 보이려면 스파이 혐의 누명을 쓰고 체포된 일본 기자를 석방해달라고 요청하자 정말로 석방해주는 등 막강한 힘이 있던 인물임은 분명한데 이후 북한 인질외교의 대가였던 보위부 부부장 류경이라는 것으로 의견이 모아지지만 결정적 증거는 없다. 만약 류경이 맞다면 그는 2010년 이명박과의 남북정상회담 성사 실패 이후 처참한 죽임을 당했다.
그런데 북한의 납북 일본인 문제가 불거지면서 일본 사회의 반북 감정이 심화되기 시작한다.[20] 요코타 메구미의 부모를 비롯한 납북자의 가족들이 연일 시위하면서 납북 일본인 귀국을 촉구했고, 이에 고이즈미는 "납북 일본인의 존재를 밝히고 사죄하라"는 요구를 하기에 이른다. 이에 당혹한 김정일은 "오후에 대답하겠다"고 자리를 피한 다음, 결정을 내렸는지 그날 오후 일본인 납북 문제를 시인하고 사과한다. 경제적 지원이 절실했던 김정일이 한발 물러선 것이다. 납북자 중에서도 제일 유명한 요코타 메구미의 경우에는 죽었다고 둘러대면서 실체가 불분명한 유골만 돌려주었지만 말이다. 그래도 소가 히토미를 비롯해서 그때까지 살아있는 일본인들의 귀국을 성사시키는 등 업적은 분명히 있었으며, 납북자 가족들이 그의 귀국 때 항의시위를 하자 특유의 승부심을 발휘하여 자신에게 항의하는 유족회 사람들을 마주하여 한마디의 변명도 하지 않고 묵묵이 그들의 비난을 들었고, 이에 일본 민심이 유족회를 비난하고 고이즈미를 옹호하면서 지지율 급등의 호재로 작용하기도 하였다.
허나 북미 관계가 개선되지 못하는 상황에서 고이즈미 내각이 북한과 수교를 서둘러봤자 얻을 것보단 잃을 것이 더 많아보였고, 이런 모험을 할 수 없던 고이즈미에 의해 결국 북일수교는 무산되고 만다. 당연히 북한은 제2의 경술국치, 제2의 을사조약 운운하면서 길길이 날뛰게 된다. 이후 지금까지도 북한과 일본은 납북자 문제를 가지고 지리한 외교적 공방을 벌이면서 관계 개선은 올스톱된 상태이다. 한편, 고이즈미도 일본에선 납북자들을 데려오지 못했다고 비난에 시달려야 했다. 특히 북한 칠보산 송이를 받아온 일은 일본인들에게 조롱거리가 되기도 했다.
결국 북한과의 관계 개선 시도는 본전도 못 건졌고, 이 납치 문제는 현재까지도 북일관계의 가장 큰 걸림돌이 되고 있다.
2.3.2. 주변국들과의 마찰과 고이즈미 담화
치도리가후치 전몰자 묘원을 국립 추도시설로 쓰는 방안을 구상하기도 했던 고이즈미였지만 2001년부터 2006년까지 매년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였다. 이에 대해 고이즈미는 2001년 8월 13일 첫번째 참배 이후, "내가 신사에 구애를 받거나 집착하는 것은 아니며 단지 수상 고이즈미 준이치로라는 자가 온 정성을 다해 신사에 참배를 했을 뿐이다. 주변 나라들의 반발과 입장도 고려해서 부득이 오늘(2001년 8월 13일) 참배한 것이다."라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즉, 그래도 주변국 신경 써서 8월 15일에 안 했다는 소리. 중국은 여기에 대단히 화가 났는지 2차 참배 이후로 고이즈미의 방중을 거부하기도 했다.[21]
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 논란과 관련해서도 한국의 재수정 요구에 '일본 역사교과서는 별 문제가 없다'는 부정적 입장을 밝히는 한편, 자위대의 집단 자위권 용인 등 보수 우경화 정책을 시도하기도 했다. 덕분에 일본 우익층에선 호감을 샀지만, 반대로 일본내 양심 세력이나 주변국들에겐 제대로 어그로를 끌었다. 일본내에선 그래도 소장파 소리 듣던 고이즈미에 대한 환상이 깨지던 순간. 이에 대해 자민당 내부의 강경우익을 비롯한 고이즈미 반발 세력 약화와 선거에서의 보수층 결집을 위해 자신의 정치적 이념과는 약간 다른 방법을 택한 것에 가까웠던 것 아닐까 하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패전 60주년이었던 2005년 8월 15일, 고이즈미는 기존 무라야마 담화를 그대로 답습, 계승하는 고이즈미 담화를 발표했다.[22]
일본국은 일찍이 식민지 지배와 침략행위로 인해 많은 나라들, 특히 아시아 제국의 국민들에게 막대한 손해와 고통을 주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겸허하게 받아 들여 재차 통절한 반성과 진심으로 사죄의 뜻을 표명함과 동시에 지나간 전쟁으로 인한 내외의 모든 희생자에게 삼가 애도의 뜻을 표합니다.
담화 전문
담화 전문
그리고 앞선 그해 정월에도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미루는 등의 모습을 보였다. 이는 내각내 반대 탓도 있었고, 여론도 좋지 않았으며, 고노 요헤이 중의원 의장 등도 반대했기 때문. 그렇게 2005년엔 안가는가...했는데, 결국 2달 만인 10월 17일 개인 자격으로 신사참배를 강행하였다. 우정 해산 이후 승리에 따른 자신감으로 풀이되었다. 덕분에 같은 해 12월에는 국제무대에서 노무현 대통령과 야스쿠니 신사 참배 관련해 설전을 벌이기도 했다.#회담
"(제2차 세계 대전 패전국인 독일의 경우) 국가의 이름으로 전쟁에 나가 이웃에 고통을 준 사람들에 대해 일체의 추모시설을 만들지 않았다. 독일은 일부 영토까지 포기할 정도로 역사인식을 철저히 청산했다. (역대 공동체 발전은) 과거 질서에 대한 철저한 반성에 기초해야 한다."
"한 명의 국민, 총리로서 자국 시설에서 평화를 빌고 전몰자에게 애도의 뜻을 표하는 것을 비판하는 마음이 이해되지 않는다. 전쟁을 미화하거나 정당화할 생각은 전혀 없다."
2005년 12월 14일, 대통령 노무현 - 총리 고이즈미 설전 내용.
아예 임기 마지막 해인 2006년에는 쐐기를 박았다."한 명의 국민, 총리로서 자국 시설에서 평화를 빌고 전몰자에게 애도의 뜻을 표하는 것을 비판하는 마음이 이해되지 않는다. 전쟁을 미화하거나 정당화할 생각은 전혀 없다."
2005년 12월 14일, 대통령 노무현 - 총리 고이즈미 설전 내용.
일국의 수상이 내 나라에 있는 신성한 신사에서 수상 명의로 참배하는 것이 뭐가 그리 거슬리거나 잘못되었는지 나는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고로 반대 세력들이 제발 좀 내정간섭이나 신사참배 가지고 뭐라고 안 했으면 좋겠다.
- 2006년 8월 15일 야스쿠니 신사 공식 참배 이후
- 2006년 8월 15일 야스쿠니 신사 공식 참배 이후
2.3.3. 고이즈미 극장
고이즈미의 정치 방식은 일본의 일반적인 정치 방식과 궤를 달리한다. 자민당 일당우위제로 인해 일본 정치에선 파벌과 이익단체 등 배후의 움직임이 중요해졌다. 심지어 국민의 의견이나 정치계 표면의 움직임 보다도 중요한 경우도 곧잘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소위 '고이즈미 극장'이라는 방식을 쓰는 고이즈미는 일본 정치계에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고이즈미 극장은 국민들에게 하나의 극장과도 같은 극적인 현실을 보여주고 그 무대를 통해서 주도권을 확보하는게 특징이다. 상대가 대응한다고 해도 그가 아니라 국민을 설득함으로서 상대의 대응을 무효화하고, 국민의 지지를 등에 업고 목적을 달성한다.
우정민영화를 예로 들자. 우정국(한국의 우체국) 개혁은 우정국이란 이익집단과 일본 정치의 보수적 파벌 때문에 이루어지기 힘들다. 일반적인 정치 방식으로는 지지부진하게 정치 협상이 이어지다가 부결되는 것으로 끝이다. 지루하고 재미없지만 정치는 협치와 협상의 결과물이기에 어쩔 수 없다. 다른 의원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고이즈미는 협상과 정치력의 부족을 인정하는 대신, 고이즈미 극장을 개막한다. 즉각적으로 국회를 해산하고, 이에 반대하는 장관을 그 자리에서 파면시킨다. 국회 해산 이유를 우정민영화로 확고하게 선언함으로서 국민들에게 개혁을 각인시킨다. '4개 회사로 쪼개어 2017년까지 민영화합니다'라는 말 대신에 '민간에서도 할 수 있는 우정서비스를 굳이 공무원만 해야 하는가', '단시간 근무자를 포함해 38만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계속 국가공무원으로 유지해야 하는가' 등의 단순 명쾌하고 서민적인 언어로 계속 어필한다. 자민당이 내부분열해서 당에서 독립한 중진의원들이 고이즈미를 비난하고, 고이즈미는 그들을 '내각의 방침에 반대하는 세력은 모두 저항세력이다', '나의 신념이다. (내가) 죽어도 좋다'라는 강한 어조로 비판한다. 언론들은 파격적인 상황에 연달아 특종과 취재를 보도한다.
총리인 고이즈미가 이렇게 극적이고 재미난 무대를 깔았으니 국민은 팝콘먹으면서 구경할 수 밖에 없다. 공약과 개혁의 장단점이 뭔지, 고려할 점이 뭔지, 고이즈미와 그의 대적자의 머리 아프고 복잡한 주장들은 간과된다. 국민들 입장에선 명쾌하다. 고이즈미 극장의 '주인공인 고이즈미'와, '주인공의 대적자'들이 눈앞에 있다. 국민들은 고이즈미 극장에 집중하다가 주인공의 편을 들어주면 된다. 고이즈미 극장이 아니어도, 개혁을 부르짖다가 좌절하고 최후의 카드를 꺼낸 신예 정치인과 그걸 막는 구시대적이고 막강한 정치인들 중 누굴 국민이 더 선호할지는 명백하다. 이것 자체가 고이즈미 극장의 영향으로 도출된 생각에 불과하지만 말이다.
고이즈미 극장은 선과 악, 주인공과 주인공의 적, 개혁을 부르짖는 신예 정치인과 구시대의 망령, 국민의 지지를 받는 총리와 개혁의 발목을 잡는 자들로 고이즈미와 다른 이들을 나눈다. 고이즈미 극장을 통해서 국민의 지지를 얻은 고이즈미를 일본 정치 구조에서 이길 수 없었다. 국민만 보면 이긴다는 걸 알고 있던 고이즈미와, 국민이 아니라 파벌을 보던 일본 정치인들의 차이는 역력했다. 고이즈미는 반대파를 설득하는게 아니라 국민을 설득하면 되는 거였고, 고이즈미 수준으로 국민을 설득할 수 있는 정치인은 드물었다. 고이즈미 극장 안에서 이길 수 있는 정치인은 더 드물었다. 고이즈미 극장은 일본 정치인들에게 저항불가능한 재해에 가까울 정도로 충격과 패배를 안겨주었다. 자민당의 파벌들과 고참 정치인들도 우정민영화로 펼쳐진 고이즈미 극장으로 큰 타격과 붕괴에 이를 정도였다.
정치계에서의 화려한 성과와 별개로 문제들도 많다. 정치적 협상 대신 국민의 지지를 기반으로 했기에 정치적 대립은 심했고, 합리적인 반대 이유들까지 악역의 주장으로서 여론의 뭇매를 받았다. 반대측의 의견을 무시하는 강한 개혁 추구는 협의로 개선 가능했을 부작용을 남겼다. 개혁과 혁신을 부르짖음으로서 지지를 받았지만, 지지자들은 고이즈미가 뭔 개혁을 하는지도 제대로 몰랐다. 표퓰리즘 정치라는 비판도 강하다. 고이즈미라는 걸출한 정치인 외에 이런 방식을 따라하는 것은 힘들기에 이 방식을 이어간 일본 정치인은 없었고, 고이즈미가 사라지자 고이즈미 극장도 사라졌다.
장점도 단점도 있지만 고이즈미 시기는 일본 정치계에 큰 충격을 안겨주었고, 고이즈미 극장으로 대표되는 방식은 당대 일본 정치계를 상징하는 용어가 되었다.
2.4. 퇴임 후: 정치적 제자와의 충돌
5년 반을 집권한 자민당 총리인 그가 2010년대 들어선 원전 반대를 외치고 다녀서 아베 신조와 자민당 인사들을 당혹스럽게 만들고 있다. 일본의 시사 잡지 '프레지던트'의 창간 50주년 기념 행사에서 고이즈미는 "인간이 원자력을 제어할 수 있는지 의문을 가지고 있다. 정치권이 원전 제로를 결단해야 한다'"고 역설해 행사에 참석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사회민주당과의 좌담 강연회에서는 "(기술 문제와 관계 없이) 국민과 정권이 마음만 먹으면 원전 제로를 실현할 수 있다"고 말하며 원전에 대해서는 급진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사실 고이즈미는 총리 재직 시절만 해도 원전 찬성론자였는데, 2013년 8월 핀란드의 방사성 폐기물 최종 처분장을 방문한 뒤 지하수가 많고 지반이 불안한 일본에서 원전을 통제하는 것은 어렵다고 판단하여 탈원전으로 돌아선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11년 동일본 대지진과 직후 터진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도 큰 영향을 줬을듯.
그렇게 아베 내각과 각을 세우다 결국 2014년 1월 14일엔 탈원전을 기치로 하여, 2월 9일에 있을 도쿄도지사 선거에 나선 호소카와 모리히로 후보를 전격 지지 선언. 참고로 호소카와는 전 일본 총리로 비 자민당 출신 총리다. 이런 배경엔 정치적 스승인 자신의 탈원전 조언을 아베 신조가 무시한 채 중동 지방을 돌아다니며 원전 세일즈를 했던 것이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전직 스승 총리 vs. 현직 제자 총리[23] 구도가 되어 언론에서 주목을 받았고, 자민당은 고이즈미 전 총리의 차남인 고이즈미 신지로를 자민당 유세에 투입하여 부자대결 식으로 맞불을 놓는 방안을 검토하기도 했으나 신지로가 가능성을 일축하면서 고이즈미와 정면 대결하기보다는 원전 이슈를 희석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선거 결과 자민당 후보가 막강한 화력을 등에 업고 호소카와 후보를 더블 스코어 이상으로 앞서며 승리했다.
자민당의 관계자는 고이즈미가 아베를 흔들려고 이런다기보다는 자민당 내에 친원전 의원들이 아베에게 원전 재가동을 압박하는 것을 막기 위한 제스처로 본다고 지적했다. 어찌 되었든 당의 원전 재가동 정책과는 정반대의 행보라 "그냥 말을 말았으면" 하는 반응이 대다수. 그의 아들인 신지로를 비롯해서 유력 인사들은 고이즈미의 발언과 자민당 사이에 선긋기를 시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베와는 우정 민영화 철회 등으로 정책적 골이 상당한지라 고이즈미의 행보는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고 보는 경우가 많다.
동일본대지진 및 후쿠시마 원전사고 4주년인 2015년 4월 11일 후쿠시마현에서 행한 강연에서 “오염수는 통제되고 있다고 누군가가 말했지만 전혀 통제되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2016년 들어서도 탈원전 운동에 열심인 듯하다. 5월에는 미국 강연에서 "도호쿠 대지진 당시 구호작전에 나섰다가 피폭당한 미군을 도와야 한다"며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같은 때 방일한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은 아베 신조 총리와도 만났는데, 대화 주제 중 하나가 부시와 고이즈미와의 추억이었다고 한다. 아베가 고이즈미 정권 당시 관방장관 출신이라 그런 듯한데, 원전 문제로 둘 사이가 좋지 않은 것을 보면 미묘한 부분이 있다.
사실 고이즈미의 성향 자체가 완전히 통일된 게 아니라서 이런 일이 벌어진 건데, 정치/경제적으로는 좀 더 보수적인 성향이나 사회적인 문제에선 진보 성향을 보이기도 한다. 예를 들어 위에서 말한 우정 민영화야 개혁은 개혁이래도 경제적으로 봐서는 약간 보수적인 시각이겠으나, 천황의 여계 혈통을 인정하는 방안을 고려했던 사람도 고이즈미였다.[24] 더 정확히 말하자면 정치/경제적으로도 마냥 보수적 성향이라기보단, 정치/경제/사회 모든 분야에서 리버럴 성향이 드러난다고 일본내에서 평가받았던 게 고이즈미였다. 애초에 고이즈미는 작은 정부를 지향하는 신자유주의자이고, 사회 분야에서도 시민의 자유를 중시하는 자유주의적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정치적으로도 자민당 총재직 역임 당시, 파벌 정치에 반대하고 자민당을 뿌리부터 바꿔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25] 다만 착각하면 안되는 것이 일본에서도 이런 과거사 발언 자체를 비판하는 사람은 많다. 주로 자민당에 반대하는 세력이나 자민당내 비주류가 많아서 문제일 뿐. 물론 그 수가 적진 않다. 당장 2019년 참의원 선거만 봐도 정당 득표율만 보면 범야권이 4할에 가까운 득표를 했다. 게다가 범여권인 공명당도 과거사 문제에선 자민당 주류와 결이 다르다.
2018년에는 고이즈미가 아베 신조 총리의 내년 개헌 완료 및 2020년 새 헌법 시행 추진과 관련해 "해야 하는 일은 안 하고 할 수 없는 일만 하려고 한다"고 비판했다. 고이즈미 전 총리는 12일 아사히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개헌에) 야당은 찬성하지 않는다"며 아베 총리를 지적했다.
고이즈미는 니가타현에서 열린 반(反)원전 집회에 참석해 야권이 지지하는 니가타현지사 후보와 악수를 했고, 아베 정권에 반대하는 야권 자유당의 오자와 이치로(小澤一郞) 공동대표가 주최한 강연회에서 '원전 반대' 목소리를 높였다.
2018년 12월에는 아사히신문과 인터뷰에서 아베 총리의 개헌 드라이브에 대해 "판단력이 나쁘다"고 비판한 적도 있다.
15일 NHK에 따르면 고이즈미 전 총리는 이날 이바라키현 히타치시에서 열린 '원전 제로(0)' 집회에 강연자로 나서 아들 신지로가 환경대신으로 입각한 것과 관련해 "힘냈으면 좋겠다. 그(신지로)는 공부를 열심히 하는 스타일로 나보다 공부를 많이 하고 있다. 환경은 지금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자연환경을 중요하게 다뤄서 원전을 없앴으면 좋겠다"며 "(일본을) 자연 에너지로 발전 가능한 국가로 만들었으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고이즈미 전 총리는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반원전' 목소리를 내고 있다. 틈만 나면 반원전 주장을 공개적으로 펼쳐 원전 재가동 정책을 펴는 아베 총리를 곤란하게 만들고 있다.
모리토모 학교 비리 사건과 관련하여 2020년 3월 31일 발간된 주간지 '슈칸아사히'(週刊朝日)에 실린 인터뷰에서 아베 총리는 사학 비리에 대해 책임지고 총리직에서 물러나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아베 총리를 작심한듯 강하게 비판했다. 고이즈미 전 총리, "아베 거짓말 해...총리직 그만둬야" 비난 '정치적 스승' 고이즈미 "아베, 거짓말 해... 그만둬야" 맹비난 처음에 아베 총리는 이에 대해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대책에 전념하겠다면서 사퇴는 털끝만큼도 생각하지 않는다고 일축했다. # 그런데... 아베 총리는 결국 5개월 뒤 진짜로 사임하고 말았다. 물론 사학 비리는 입 안 대고 단순히 지병 때문이라는 이유만 붙이고 얼른 도망갔다. 그리고 후임에는 스가 요시히데가 선출되었다.
또, 2020년 11월 3일에는 홋카이도에 핵처리 폐기시설을 신설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 비슷한 시기 홋카이도에 있는 가타오카하루오촌장 선거에서 자민당의 지원을 받은 핵폐기물 처분장 유치파가 승리했기 때문. 물론 이때 이미 총리는 스가 요시히데로 바뀐 이후지만 아베가 막후에서 여전히 실세로 활동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렇게 이어져온 정치적 사제의 대립은 아베 신조가 2022년 7월 8일 선거 유세 도중 피살을 당하면서 어긋난 상태로 결말을 맺었다.
3. 성격
일명 '헨진(変人:괴짜)'[26], '일언거사(一言居士)'로 불리는 등 파격적이고 독설적인 언동으로도 유명하다. 그래서 한국 네티즌들로부터 비난과 공격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이 성격 문제 때문에, 그의 아내였던 미야모토 카요코는 결혼한 지 4년 만에 3남 요시나가(佳長)를 임신하고 있던 중에 이혼을 당했다. 고이즈미 집안에 문제가 있다는 설도 자자하다. 또한 카요코는 이혼당한 후, 두고 온 장남 고이즈미 고타로와 차남 고이즈미 신지로를 만나게 해 달라고 애원했지만 그때마다 고이즈미가 거절해서 멀쩡히 살아 있는 어머니와 아들들을 생이별하게 만들었다. 사실 여부는 알 수 없으나 일본인 사이에서는 널리 퍼져 있는 소문.[27]
소설가 이케미야 쇼이치로에게 "오다 노부나가와 닮은 꼴"이라는 평가를 받고 대단히 흡족해한 적이 있다고 한다. 실제로 오다 노부나가의 열렬한 팬이라고.[28]# 여담으로 이 소설가는 소설 <혼노지>의 작가로 이 사람의 소설 <혼노지>는 한국에 <난세의 파천황 오다 노부나가>라는 제목으로 정발된 바 있다.
4. 어록
출전은 일본어 위키인용집의 고이즈미 준이치로 문서. 그중에서도 대부분의 출처는 오가타 구니히코의 '괴짜 총리 고이즈미, 흔들리는 일본'이다.- 결국 외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유산 덕분이었습니다. 부모로부터의 후광을 곱빼기로 받아 당선되었습니다. - 1972년 12월, 중의원 당선 시신동아 2005.11.01 통권 554호 (238~253쪽)
- 복지를 담당하는 부서이니 노인에게도 이해가 되는 아름다운 일본어를 사용하도록 하시오. - 1989년 3월 후생성 예산설명 시
- 자민당이 증인심문을 거부한다 하더라도 스스로 국회에 나가겠다고 말하는 것이 정상적인 정치가라 생각한다. 나카소네는 좀 정신이 이상한 것 같다. - 1989년 4월 리크루트 사건 시
- 일본 경제의 발전은 민간이 노력해서 성장해 왔다. 우정의 일은 관업(官業)이 민업(民業)을 압박하고 있다. 마찰이 있는 부서지만 부서의 이익보다 국가의 이익이 우선이다.
- 1992년 12월 우정대신 취임 기자회견 시
- 알기 쉽게 말하자면 부하가 책임을 지고 할복하는 것과 같이 느껴졌다. 무거운 책임을 지는 것이 타당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 1996년 11월, 뇌물수수 의혹 후생사무차관 사직 승인 시
- 후보자는 유권자를 고르지 못한다. 헌금을 주는 사람이 나쁜 사람이라고 알아도 어떻게 할 수가 없다.
- 1996년 12월 후생성 소관 공익 법인 정치단체에게서 뇌물 수수시
- 행정개혁의 제일보는 정치가 자신이 기득권을 포기하는 것이다.
- 1997년 9월 중의원 연속 재직 25년 표창 거부 시
- 새로운 부서의 이름이 너무나 가볍다. 노동복지성이라면 각의에 서명하지 않겠다. 차라리 내 목을 자르라.
- 1998년 1월 재편예정 명칭 반대 시
- 보통 사람도 군인도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남은 것은 괴짜(変人)뿐이다. 나는 지극히 상식적인 발언을 하고 있는데 정계에서는 괴짜라고 평한다. 진짜 괴짜는 나가타초다.
- 2000년 7월 다나카 마키코의 보통 사람, 군인, 괴짜 발언 인용. 나가타초는 일본 국회의사당이 위치한 동의 이름으로 "일본 정치권"을 의미한다. 영국에서의 웨스트민스터, 한국 언론사가 사용하는 여의도 혹은 여의도정치와 비슷한 맥락이다.
- 나는 괴짜라고 불리지만, 괴짜라는 것은 변혁하는 사람에 대한 칭찬이다.
- 2001년 3월 파벌 소속 의원 모임에서
- 스파게티! 마카로니! 소피아 로렌!
- 미국 조지아주 시아일랜드에서 개최된 G8 회담에 참가하여, 2004년 6월 9일 기념 촬영을 했을 때,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당시 이탈리아 총리에게 말을 걸었을 때의 기행. 베를루스코니가 일반적인 정치인이었다면야 당연히 고이즈미의 괴짜 기질만 돋보였겠으나, 베를루스코니 또한 훗날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에게 썬탠을 잘했다고 말하는 등의 여러 망언으로 유명한 막장 정치인이다. 그런 베를루스코니조차 고이즈미의 어처구니없는 언행에 기막히다는 투의 반응을 보였고 주변의 외신 기자들 사이에서 고이즈미를 향해 "Shame on you!(부끄러운 줄 알아야지!')"라는 말까지 나왔는데, 고이즈미는 이에 대해 '땡큐!'라고 대답했다.(…)
- 상술한 이야기는 일본언론을 통해 한국에까지 널리 알려진 이야기이지만, 그 실체에 대해선 의심의 여지가 있다. TIME지를 비롯한 영미권 언론에 따르면, 고이즈미 총리는 "I love Italy! Berlusconi! Spaghetti!"(나는 이탈리아를 사랑해요! 베를루스코니! 스파게티!)라고 말했고, 외신 기자들의 반응에 대한 언급은 없다. 일본 내에서 실제와 다르게 과장된 이야기인 것으로 사료된다. #
- 그 때 갈릴레오는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말했다고 합니다.[30] 나는, 지금, 국회에서 우정국 민영화는 필요 없다고 하는 결과가 나왔습니다만, 다시 한번 국민에게 물어보고 싶습니다. 정말로 우정국의 일은 국가 공무원이 아니면 할 수 없는 것인지. 민간인으로는 안 되는 것인지? 이것이 불가능하다면 어떤 공무원 삭감이 가능할 수 있습니까? 어떤 행정 개혁이 가능하겠습니까?
- 우정 해산 때의 총리 기자회견. 고이즈미나 다른 우파 정치인들이 보기에, 우정성(郵政省)은 일본 국민들에게 철밥통 공무원의 상징 같은 존재였다. 옥상옥식의 비효율적인 조직을 끊임없이 확대하는 관료주의로 인해서 많은 정권들이 어떻게든 손을 보려고 했지만 로비에 밀려서 실패했다. 하지만 이런 관점 자체가 신자유주의적인 민영화의 관점에서 나왔다는 의견 역시 존재.
- 인생 가지가지, 회사도 가지가지, 사원도 가지가지 (人生いろいろ、会社もいろいろ、社員もいろいろ)
- 2004년 국민연금 미납 사실 때문에 곤혹을 치르던 와중에, 알고 보니 한 후원자의 회사에 적을 두고 거기서 직장인 신분으로 월급을 받고 연금보험료까지 내 주고 있었다는 사실이 들통나자 한 소리. 덤으로 저 소리를 하면서 "당시 사장은 '자네 일은 의원이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면서 "회사에 출근한 사실은 없지만 나중에 중의원이 됐으니 사장 말대로 일을 제대로 한 셈"이라는 개드립을 날려 자민당의 지지율은 급전직하, 참의원도 패배.[31] 결국 저 말은 2004년 최고의 유행어에 선정되는 영예를 얻게 된다.
원래 저 말은 시마쿠라 치요코(島倉千代子)의 노래인 "人生いろいろ"의 가사의 패러디이다. 원래 가사는 "인생 가지가지, 남자도 가지가지, 여자도 가지가지"(人生いろいろ、男もいろいろ、女だっていろいろ). 고이즈미의 이 발언 때문에 시마쿠라 치요코는 2004년 연말에는 8년 만에 NHK 홍백가합전까지 출장하게 됐다.
- 어디가 전투지역이고 어디가 비전투지역인지 나한테 물어본다고 알 리가 없다.(私に今、どこが戦闘地域でどこが非戦闘地域か聞かれても、分かるはずがない)
- 이라크 전쟁 자위대의 해외 파병과 관련하여 민주당 의원 간 나오토가 그 근거로 든 자위대가 활동가능하다고 하는 소위 '비전투 지역'이라는 지역이 지금 전쟁통인 이라크에 어디 있는지, 단 한 곳만이라도 집어달라며 질의하자 한 답변이다. 이 답변을 들은 간 나오토가 어이 없다는 말투로 "훌륭한 답변이네요"라고 받아치자 좌중이 웃음바다로 변한건 덤. 이후 민주당이 제출한 내각불신임결의안에 어이없는 답변이나 하고 앉아있다며 그 근거로 인용되기도 했다.
간과 고이즈미의 해당 설전은 일본 드라마 퍼스트 러브 하츠코이에도 나왔다.
5. 가족 관계
- 조부 사메지마 아키미사에몬(鮫島 彌三左衛門): 동네에서 어선을 관리하던 선주로, 준이치로의 아버지 준야가 11세 때 세상을 떠났다.
- 외조부 고이즈미 마타지로(小泉又次郞)
- 적외조모 아야베 나오(綾部ナオ): 게이샤 출신으로, 마타지로의 본처였지만 자녀를 낳지 못했다.
- 생외조모 이시카와 하츠(石川ハツ): 나오가 자녀를 낳지 못하자, 마타지로는 하츠와의 사이에서 요시에를 낳았다. 이후 하츠는 다른 남자와 결혼해 3남매를 낳았다고 한다.
- 아버지 사메지마 준야(鮫島純也): 준야는 형제자매가 8명 있는데 그 중 준야는 3남 6녀 중 차남이다. 결혼해서 고이즈미 마타지로의 데릴사위가 되면서 고이즈미로 성씨를 바꿨다.
- 어머니 고이즈미 요시에(小泉芳江)
- 첫째 누나 고이즈미 미치코(小泉道子): 결혼하여 딸 하나를 낳았지만, 이혼하고 딸과 함께 친정으로 돌아왔다. 딸도 외가를 따라 고이즈미로 성씨를 바꾸었다고 한다.
- 둘째 누나 고이즈미 다카코(小泉隆子)
- 셋째 누나 고이즈미 노부코(小泉信子): 젊어서부터 외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밑에서 정치를 배웠고, 쭉 독신으로 살며 남동생 준이치로의 정치활동을 도왔다(정책비서). 준이치로가 이혼한 후로는 일상생활 또한 챙겼다고.
- 남동생 고이즈미 마사야(小泉正也): 누나 노부코와 마찬가지로 형 준이치로의 정치활동을 도왔다(사설비서). 마사야의 아내는 이시하라 신타로의 아내인 노리코(典子)의 사촌 남동생의 딸이라고 한다.
- 전처 미야모토 카요코(宮本佳代子): 에스에스(エスエス) 제약회사의 창업주 타이도 쇼잔(泰道照山)의 외손녀. 대학교 4학년 때 맞선을 보고는 그날 프러포즈를 받아 결혼했다고 한다. 이혼 후에는 공인중개사로 일했다. #
- 장남 고이즈미 고타로(小泉孝太郞)
- 차남 고이즈미 신지로(小泉進次郞): 프랑스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인 프리랜서 아나운서 타키가와 크리스텔과 결혼, 아들 고이즈미 미치노스케(小泉道之助)를 낳았다.
- 3남 미야모토 요시나가(宮本佳長)
5.1. 가정사
1977년, 당시 35세의 고이즈미 준이치로는 21세의 미야모토 카요코와 맞선을 봤고, 당일 프로포즈를 해 다음해인 1978년 도쿄 프린스 호텔에서 성대한 결혼식을 하였다. 하지만 카요코에게 아버지와도 같았던 외할아버지 쇼잔은 이 결혼을 반대했다.[32] 고이즈미 일족은 제약회사 회장인 쇼잔으로부터 카요코가 물려받을 재산을 기대한 듯하지만, 반대하는 결혼을 감행한 카요코에게 쇼잔은 금전적 지원을 해주지 않았다.카요코는 금방 임신하여 두 아들을 낳았다. 그러나 그녀는 고이즈미 가문에서 여러 갈등을 겪었고, 결국 부부는 4년 후인 1982년에 이혼하였다. 당시 카요코는 셋째를 임신 중이었고, 첫째와 둘째는 고이즈미 일가에 두고 나와야 했다. 두 아이는 어린 나이에 어머니와 헤어져 고모들과 가정부들의 손에 자라며, 어머니를 만나지 못했다. 그리고 이때 준이치로도 맘고생이 심했는지 "이혼이 결혼보다 10배 많은 에너지가 소모되었다"라며, 그후로도 영영 재혼을 하지 않았다. 이건 카요코도 비슷했는지, 둘 다 이혼하고 [age(1982-01-01)]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쭉 독신으로 살고 있다.
장남인 고이즈미 고타로(小泉孝太郎, 1978년생, [age(1978-07-10)]세) #는 일본에서 드라마나 영화의 주조연급 배우로 활약 중이다. 대표작은 국내에서 인기리에 방영된 직장의 신의 원작인 파견의 품격(2007년작)인데, 파견사원을 물심양면 도와주는 사람 좋은 직장상사로 나온다. 재미있는 건 아버지 고이즈미 총리는 각종 노동법을 개악시킨 걸로 유명한데, 드라마 <파견의 품격>에서 고타로가 연기한 '사토나카 켄스케'는 노동법의 부조리에 괴로워 한다는 설정이었다는 점. 물론 선역뿐 아니라 악역으로써도 활약하고 있는데, 대표적인 게 <변두리 로켓 (下町ロケット)>에서 주인공의 회사와 경쟁하는 대기업의 NASA 엘리트 출신의 사장으로, 주인공과 주변 인물들을 압박하는 포스를 보여주기도 했다.
준이치로는 자식들이 정치에 입문하는 걸 반대했기에 자연스럽게 장남인 고타로는 다른 쪽 일을 알아보다 배우가 되었다고 한다. 아버지와 달리 표정이 호감상이어서 한국의 일본 드라마 팬들에게도 나름 인기를 끌었는데, 알고 보니 고이즈미 준이치로의 아들이라서 좌절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그래도 정치 활동과는 거리를 두고 연기 쪽에 몰두하는 행보를 보이는 터라 국내에서도 크게 논란거리가 되진 않는다. 2010년대 들어선 미국 디즈니사 + 마블 코믹스의 첫 합작품인 빅 히어로 6에서 테디 하마다의 성우로도 활약했다.[33]
드라마 외에도 활약 중인데, 고시엔 등의 여러 스포츠 대회의 메인 캐스터로 자주 나오고, 예능에서는 선배 배우인 사사노 타카시와 함께 블랙마요네즈와 베키가 진행하는 "인간 관찰 버라이어티 모니터링"에 레귤러 패널로, 그리고 매주 다른 연예인들과 하룻밤을 지내는 예능인 모노모노 후타리에서 바나나맨과 함께 진행을 맡기도 했다.
차남인 고이즈미 신지로(小泉進次郞, 1981년생, [age(1981-04-14)]세)는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정치계에 입문해서 활약중이다. 위에 언급된대로 아버지가 정치에 뜻을 두지 말라고 반대했지만 본인이 강하게 원하는터라 허락은 해줬는데, 그 대신 직접 뛰면서 배우라며 크게 도움을 주지는 않았다고 한다. 2006년 6월 아버지가 총리직을 내놓은 뒤로 정치의 중심에서 급속히 멀어지자 미국에서 정치학 공부 중이던 신지로가 급히 귀국해 아버지의 개인 비서 자격으로 정치 활동을 시작, 2008년 아버지의 공식 정계 은퇴 후 후계자가 됐다. 2009년 제4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나가 아버지의 지역구인 가나가와현 제11구에서 중의원에 당선됐고 이후에도 계속해서 재선에 성공해 현재 5선 의원이다. 2019년 중순엔 한국의 환경부장관에 해당하는 환경대신에 임명되어 활동하기도 했다. 2019년 8월 7일, 4살 연상의 전직 아나운서 겸 프리랜서 타키가와 크리스텔과의 결혼을 발표했다. 이때 이미 임신 중이었고, 2020년 1월 17일에 장남 고이즈미 미치노스케를 출산했다. 기타 고이즈미 신지로의 행보는 본인의 항목을 참조.
막내(3남)인 미야모토 요시나가는 부모의 이혼 후 출생하여 어머니 카요코의 곁에서 자랐으며, 아버지를 만난 적이 없다. 중학교까지는 일본에서 다닌 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고, 고등학교를 마친 후로는 교토외국어대학에 진학했다. 아버지를 만나려고도 했으나 거부당했고, 어머니 카요코와 함께 친할머니 요시에의 장례식에도 참석하려 했지만 제지당했다고 한다. 카요코와 요시나가는 간곡히 애원하여 간신히 분향만 할 수 있었고, 분향이 끝나자 곧바로 쫓겨났다고. 이때 준이치로, 고타로, 신지로는 카요코와 요시나가를 멀리서 바라만 보고 있었다고 한다.
다만, 2016년 카요코의 인터뷰에 따르면, 2008년 고이즈미가 정계 은퇴하면서 차남 신지로에게 “집안일은 모두 네게 맡긴다. 3형제끼리 친하게 지내라.”라고 했고, 이후 3형제가 만났다고. 그리고 2013년 말 요시나가의 결혼식 땐 다섯 식구(본인, 전 남편(준이치로), 아들 셋을 말하는 듯)가 30년 만에 처음으로 한 자리에 모였다고 한다.
그래도 아버지로서 아들 교육은 나쁘지 않게 했는지 2남 신지로가 타키가와 크리스텔과 결혼한다고 발표했을 때, "개인적으로 정치인으로서 아버지를 본받고 싶진 않지만, 적어도 아버지로서는 아버지를 본받고 싶다."리는 발언을 하기도 한 걸 보면, 정치인으로서 여러가지 바쁜 와중에도 자녀들에게는 나름대로 좋은 아버지 노릇을 한 듯하다.
6. 선거 이력
연도 | 선거 종류 | 지역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1969 | 제3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구)가나가와 2구[34] | | 103,381 (16.5%) | 낙선 (5위) | |
1972 | 제33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22,188 (16.8%) | 당선 (4위) | 초선 | ||
1976 | 제3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17,698 (14.5%) | 재선 | |||
1979 | 제3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05,125 (16.4%) | 당선 (3위) | 3선 | ||
1980 | 제3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46,681 (17.5%) | 당선 (2위) | 4선 | ||
1983 | 제37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15,274 (15.1%) | 당선 (3위) | 5선 | ||
1986 | 제3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67,838 (20.8%) | 당선 (1위) | 6선 | ||
1990 | 제3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68,997 (18.4%) | 7선 | |||
1993 | 제4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49,269 (16.5%) | 당선 (2위) | 8선[35] | ||
1996 | 제4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가나가와 11구[36] | 118,955 (58.2%) | 당선 (1위) | 9선 | |
2000 | 제4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57,335 (69.0%) | 10선 | |||
2003 | 제43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74,374 (74.4%) | 11선[37] | |||
2005 | 제4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97,037 (73.2%) | 12선[38] |
7. 여담
- 참여정부 시절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 야스쿠니 신사 참배, 역사 교과서 왜곡 등으로 한창 반일 감정이 심할 때, 노무현 대통령과의 정상회담 사진에서 배경으로 사용된 훈민정음 벽지에 '고이즈미 ㅆㅂㄹㅁ'라 합성한 짤[39]이 유행한 바 있다. 그의 제자가 고이즈미보다 더한 병크를 저지른 이후에는 고이즈미를 까는 여론은 많이 사라진 편이다.
- 의외로 외모에 대한 평가가 좋다. 실제로 젊은 시절 모습을 보면 제법 미남이기는 했다.# 사실 나이를 감안하면 총리 재임 시절에도 잘생긴 편이었다. 그리고 아버지의 유전자 덕분인지는 몰라도 슬하의 두 아들 역시 각각 배우, 미남 정치인으로 유명하다. 특히 차남 고이즈미 신지로는 이런 아버지의 후광을 제대로 받아 정치인으로선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벌써부터 차기 총리 후보로도 꼽힌 적이 있었다. 다만 지금은 나이가 들어 백발이 다 되었다.[40]
- 특이한 헤어 스타일과 기행들로 알려져 있어서인지 해외에서는 일본의 마스코트격 되는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특히 한국 내에서 나오는 CF들 중 일본인 캐릭터를 내세운 CF 중엔 고이즈미를 모델로 한 듯한 인물들이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 일본의 3대 폭력단 중 하나인 이나가와카이와 유착관계가 있다고 알려져 있다. 그의 10회나 연임한 선거대책본부장 타케우치 키요시가 이나가와카이 계열 요코스카카이의 조직원 출신이었고, 두목 이시이 타카마사와 매우 밀접한 관계였다고 한다. 이 때문에 고이즈미와 요미우리 신문과 대립이 시작되었고, 차남 또한 요미우리와 대립 중이다.
- 정치인 오자키 유키오를 존경해서 강연에서도 종종 그의 말을 인용한다고. 사실 외조부 고이즈마 마타지로가 입헌개진당에 참가, 유흥회 시절에 오자키 유키오와 행동을 함께 한 바 있었다고 한다.
- 엘비스 프레슬리의 광팬으로 알려져 있다. 조지 부시와 함께 미국 방문 당시 엘비스의 저택인 "그레이스랜드"가 있는 멤피스에도 방문했는데, 여기서 프리실라 프레슬리(부인)와 리사 마리 프레슬리(딸)도 만났다. 그리고 그레이스랜드에는 엘비스가 살아 생전 쓰고 다녔던, 엘비스의 트레이드 마크와 같은 선글라스가 유리관 속에 넣어져서 전시되어 있었는데, 고이즈미는 이것을 당당하게 꺼내서 쓰고 엘비스 춤을 흉내냈다. 엘비스 덕후들로서는 정치적 성향을 떠나서 "역시 총리쯤 되면 저 유일무이한 아이템도 써볼 수 있고 좋구나!"라는 조롱과 부러움이 섞인 탄식이 나오는 장면이었다고. 당시 영상.
- 일본의 록밴드 X JAPAN의 팬으로 유명하다. 고이즈미의 영향으로 X JAPAN의 노래 중에서 Forever Love가 자민당 CM 송으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그런데 고이즈미 내각에서 경제산업부대신을 지냈던 다카이치 사나에에 의하면, 고이즈미와 가라오케를 갔을때 Rusty Nail을 불렀는데 고이즈미가 모르는 노래였다고 한 것을 보면 발라드 곡만 좋아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 고이즈미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는 Tears라서 Tears를 CM 송으로 쓰려고 했는데 선거를 앞두고 눈물은 좋지 않다 생각했는지 결국 Forever Love로 교체되었다. 그리고 고이즈미는 X JAPAN의 멤버 hide와 같은 요코스카시 출신이다. hide 사후, 고이즈미는 자신의 지역구이기도 한 요코스카에 hide 기념관 설립에 협력하였다. 비교적 최근 2016년에 개봉된 다큐멘터리 영화 <We are X> 일본 로드쇼에도 참석하는 등 여전히 팬이다.
- 청년 시절에 한국 가수 계은숙의 열혈팬이라 팬클럽 회장을 맡았던 적도 있었다는 소문이 있으나, 팬 카페에 가입했다는 얘기가 와전된 것으로 추정된다. 2004년 계은숙의 팬임을 말하는 고이즈미 인터뷰 사실 고이즈미는 1942년생이고 계은숙은 1962년생이라, 계은숙이 데뷔했을 때 고이즈미는 이미 40대였다. 이후 일본에 겨울연가 붐이 일었을땐 여주인공이었던 최지우를 만나 자신도 겨울연가 잘 봤다며 촬영지 남이섬에 가고 싶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 은퇴한 뒤인 2009년 대괴수 배틀 울트라 은하전설 THE MOVIE에서 다름 아닌 울트라맨 킹의 성우를 맡아서 수많은 특덕후들을 충공깽에 빠뜨린 적이 있다. 그야말로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힘없는 발성과, 국어책 읽기로 더빙에 대한 평가는 좋지 않다.
- 경주마 하루 우라라의 팬으로 알려져있다. 공식 석상에서 "하루 우라라는 우리에게 지더라도 굴하지 말라는 희망을 준다." "하루 우라라, 한번쯤은 이겨 줬으면 좋겠는데..."라고 말한 적이 있으며, 교통사고 방지 부적으로 알려져있는 하루 우라라의 응원 마권도 가지고 있다고 한다.
- 2005년 한국 영화 청연이 친일 논란 등으로 흥행 실패를 하게 된 원흉이 준이치로의 외조부인 고이즈미 마타지로임이 밝혀져서 화제를 불러일으킨 바 있다. 주인공 박경원을 후원해주는 일본인의 모델이 다름아닌 고이즈미 마타지로였다는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 물론 청연이 망한 원인은 이것 뿐만 아니라 애초에 주인공 박경원이 친일 행적을 한 인물이였고, 그 외에도 박경원이 조선 최초의 여성 비행사였다는 제작사의 언플이 실패로 돌아가는 등 여러가지 요인이 있긴 했다.
- 아이돌 사변 애니메이션판 오리지널 캐릭터 중 메인 빌런으로 보이는 앵개당 당수 사쿠라바 소이치로 의원의 외모가 고이즈미 총리와 판박이다.
- 2023년 11월 일본의 한 민간 연구소에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 21세기에 취임한 전현직 일본 총리 9명 중 가장 호감도가 높은 것으로 조사되었다.# 전체 응답자의 호감도 평균 점수를 10점 만점 기준으로 정했을 때, 고이즈미는 6.6점의 점수를 얻어 1위를 기록했다. 참고로 현직 총리인 기시다 후미오는 9명 중 6위(4.2점)에 그쳤으며, 최하위는 하토야마 유키오(3.1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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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2선 중의원 의원, 중의원 부의장, 체신대신, 요코스카시장 역임.[2] 9선 중의원, 방위청장관 역임. 데릴사위로 본성은 사메지마(鮫島).[3] 現 재무대신 정무관[겸임] 내각총리대신과 겸임[겸임] 내각총리대신과 겸임[6] 젊은 시절 사진을 보면 오히려 평범했다.[7] 아베 신조가 한국인들에게 악명을 떨친 것 또한 오랜 재임기간 때문이기도 하다. 물론 망언의 수위나 극우적 색체부터가 고이즈미를 따위로 만들어 버릴 정도로 훨씬 강하기도 했지만.[8] 마찬가지로 한국에서 극우 이미지가 강하게 박힌 아베 신조 또한 "혐한시위 하는 애들은 같은 일본인으로서 부끄럽다"고 말하는 등 마냥 극우적인 모습만 보이지는 않았다.[9] 아베 신조는 총리로 처음 취임한 2006년 이전에, 직전 내각이었던 고이즈미 정권에서 관방장관을 지냈으며, 90대 내각총리대신 지명 역시 당시 현직이었던 고이즈미 준이치로의 전폭적인 지지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다만 2010년대 들어 원자력을 중요시하는 아베 신조와 탈원전을 주장하는 고이즈미 준이치로의 관계는 틀어져 현재는 서먹서먹한 관계가 되었다. 자세한 것은 후술한다.[10] NHK 제21대 회장이다. 아베 집권기 NHK를 우경화시킨 인물로 알려져 있다.[11] 온 몸에 문신이 있었기 때문에 별명이 이레즈미(문신) 대신이었다.[12] 당시 준야는 마타지로가 간사장을 맡고 있던 입헌민정당의 일개 사무 직원이었는데 마타지로가 자신의 딸과의 관계를 반대하자 요시에와 함께 사랑의 도피(…)를 해 도쿄에서 동거를 시작했다고 한다. 마타지로는 이에 자신의 딸에게 돌아오라고 신문에 광고를 싣기도 했다. 결국 준야가 데릴사위가 돼서 마타지로의 뒤를 잇는 조건으로 두 사람의 결혼을 허락한다. 참고로 준야는 3남 6녀중 차남이다.[13] 지역에선 명문고이며, 아들 신지로는 요코스카 고등학교 입시에 떨어졌다.[14] 소선거구제로 전환한 이후로 편하게 당선되는 입장이 되었지만 이때 가나가와 2구는 상대적으로 자민당 약세 권역이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다가와 세이이치가 자민당을 탈당하고 신자유클럽에 합류하면서 1990년 중의원 선거구를 제외하면 해당 선거구에서 당선자 5명 가운데 1명만 자민당인 대표적인 자민당 약세지역이 되었다.[15] 오부치는 고이즈미 모교의 영원한 숙적인 와세다대학 출신이다.[16] 그래도 총선 공천은 줬다.[17] 내각제 하 각료회의는 만장일치가 기본이다. 각의의 결정사항에 대해 총리를 비롯한 각료 전원이 연대책임을 지기 때문.[18] 연립여당 공명당의 31석까지 합하면 여권이 총 327석으로 중의원 의석의 2/3를 넘어섰다. 이렇게되면 참의원에서 부결된 법안을 중의원으로 다시 가져와 2/3 동의로 재의결시켜 법을 성립시킬 수 있다.[19] 2002년, 2004년 2차례 김정일과 정상회담을 가졌다. 이때 김정일이 일본인 납치 문제에 대해 사과하기도 했다.[20] 아베 신조 당시 관방장관 역시 고이즈미와 동행하여 2차례 평양을 방문했는데, 이때 그가 일본인 납치자 문제를 부각시켰다는 얘기가 있다.[21] 의외일수도 있겠지만 이런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중단했던 것이 2007년 1차 임기를 보내고 있던 아베 신조였다. 이후 총리가 한국, 중국과의 외교관계 악화를 우려해 직접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하는 걸 자제하는 것이 자민당-민주당 정권을 가리지 않고 유지되다가 2013년 2차 임기를 맞이한 아베가 직접 이 관례를 깨고 다시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했다. 하지만 이 참배로 인해 미국과 유럽연합에게 경고를 받게 되었고, 이후 일본은 현직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는 최대한 자제하고 있다.[22] 경술국치 후 100년 만에 나온 간 나오토의 간 담화가 가장 진보적인 입장을 갖고 있지만, 사실 고이즈미가 무라야마 담화를 후퇴시키지 않고 계승한 것만 해도 대단한 것이다. 10년 뒤 2015년에 나온 '아베 담화'의 후퇴를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23] 아베 신조는 고이즈미 내각에서 내각관방장관을 지냈으며, 파벌도 똑같은 청화회(모리파) 출신인지라 고이즈미의 제자라 봐도 무방하다.[24] 1965년 이래 일본 황실에는 공주만 줄줄이 9명이 태어났고, 나루히토 황태자와 마사코 황태자비 내외는 오랜 불임 끝에 2001년 겨우 아이코 공주를 낳았다. 그래서 여성 천황이나 여계 천황 허용도 검토했던 건데, 2006년 나루히토 황태자의 남동생 후미히토 친왕이 늦둥이 아들 히사히토를 낳으면서 유야무야 되어 버렸다.[25] 이 부분을 보고 고이즈미가 극우 유권자들과 영합한것 아니냐고 주장할수는 있다. 사실 이건 과거사 인식에 하자가 있는 인물들과 우익 유권자들이 넘쳐나는(이중 극단종자는 세키호타이 사건 같은 신문사 테러를 저지르기도 했다) 일본 정치판에서 많은 정치인들이 겪는 딜레마이기도 하다. 천황이 전쟁에 책임이 있다고 발언했다 총격맞은 시장까지 있는 판국이니. 21세기 들어선 이런 물리적 테러 행위 자첸 줄어들었지만, 넷우익들이 기승이다. 즉, 자기 정치 활동에 차질을 안 빚기 위해 개인적 소신과 무관하게 혹은 소신을 바꿔가면서까지 떠벌리는 측면도 있는 것.[26] 다나카 마키코가 1998년 자민당 총재선거 정국에서 고이즈미를 헨진이라 부르면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27] 다만 후술되어 있듯, 2013년에는 3남의 결혼식에서 온 가족이 30년 만에 처음으로 만났다고 한다.[28] 일본에서는 전국시대의 3영걸이라 불리는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 3명 중 누구를 닮았는지로 정치인이나 기업인을 평가하는 경우가 많다. 입지전적인 인물이지만 신분과 외모에 컴플렉스가 많았던 히데요시, 최종 승자이지만 음흉하고 속이 검은 이미지가 강한 이에야스보다는 호방한 성격에 부정적인 이미지가 가장 적은 노부나가의 인기가 제일 높기에 노부나가를 닮았다는 게 대개 최고의 칭찬이기 마련.[29] 하시모토는 고이즈미의 게이오기주쿠대학 선배다.[30] 실제로 그런 말을 한 적은 없다는 것이 정설이다.[31] 참고로 그때 '가지가지' 드립을 치다가 질의를 하고 있던 간 나오토 당시 민주당 의원은 어이없다는 말투로 "총리도 참 가지가지 하시네요."라고 맞받아쳤다.[32] 쇼잔은 자민당 소장파 의원들이 탈당하여 만든 신자유클럽의 지지자였다.[33] 여담으로 원판 성우가 한국계 미국인 배우로 유명한 다니엘 헤니였다. 뭐, 한국인 캐릭터라는 고고도 한국계 미국인 배우 제이미 정이 녹음하고, 일본에서는 일본 성우 아사노 마스미가 녹음했지만 말이다.[34] 중선거구제 하에서의 지역구[35]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의 마지막 중선거구제.[36] 소선거구제 하에서의 지역구[37] 2차 내각.[38] 3차 내각.[39] 원본은 2005년 부산광역시에서 열린 APEC 정상회담 기간에 있었던 한-일 정상회담 당시 찍은 사진이다.[40] 물론 고이즈미는 현재 80대 초반으로 이명박 전 대통령, 후진타오 전 주석, 마틴 스콜세지, 폴 매카트니 등과 비슷한 연령대다. 해당 인물들 전부 지금은 백발이 되고 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