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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제국 제27대 내각총리대신 하마구치 오사치''' | |||
<colbgcolor=#0230AE><colcolor=#c3c965> 출생 | 1870년 5월 1일 | ||
고치번 나가오카군 고다이산촌 (現 고치현 고치시) | |||
사망 | 1931년 8월 26일 (향년 61세) | ||
도쿄부 도쿄시 (現 도쿄도) | |||
재임기간 | 제27대 내각총리대신 | ||
1929년 7월 2일 ~ 1931년 4월 14일[1]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0230AE><colcolor=#c3c965> 배우자 | 하마구치 나츠 | |
자녀 | 2남 3녀 | ||
학력 | 제3고등중학교[2] (졸업) 제국대학 법과대학 (정치학과 / 학사) | ||
정당 | 1915-1916 1916-1927 1927-1931 | ||
지역구 | 고치 1구 | ||
의원 선수 | 6 (중) | ||
의원 대수 | 12, 13, 14, 15, 16, 17 | ||
약력 | 고등문관시험 합격 대장성 관료 제4대 체신차관[3] 제8대 대장차관[4] 중의원 의원 제25대 대장대신 제43대 내무대신 초대 입헌민정당 총재 제27대 내각총리대신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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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 제국의 재무 관료, 정치가이다. 품계는 정2품, 훈일등욱일동화대수장(勲一等旭日桐花大綬章, くんいっとうきょくじつとうかだいじゅしょう)을 받았다. 호는 공곡(空谷)[5].일본 제국 대장대신(29대, 30대), 내무대신(43대), 내각총리대신(27대), 입헌민정당 총재 등을 역임한 당시 일본의 주요 정치가 중 한명. 근엄한 풍채 덕에 '사자 재상(ライオン宰相)' 이란 별명이 있다. 장기간 성실한 대정성 관료 생활을 하였고 총리로서는 상당한 대중적 지지를 등에 업고 대중국 평화외교와 금 해금, 런던 해군 군축조약 참가 등 강력한 긴축경제를 추구하였으나 대공황에 직면하면서 좌절한 인물이다.
2. 생애
2.1. 초기
고치번[6] 나카오카군 오대산(현재의 고치현)의 임업을 하는 집안에서 3형제 중 막내로 태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본래 이름은 유키오(幸雄)로 지어졌지만 그의 아버지가 출생신고 하러 갈 때 가면서 술을 마셔대다보니 관청에 도착했을땐 만취상태라서 이름을 앞뒤 반대로 기입한 게 관청에 수리되어 오사치(雄幸)가 되었다는 일화가 있다.고등학교 때까지는 고치에 있는 학교를 다녔고 제국대학(현 도쿄대학)[7] 법학부로 진학, 1895년 졸업한다. 대학 동창회가 나중에는 정치 네트워크로 발전했다고 한다.
이후 대장성으로 들어가 전매국 장관, 대장성 정무차관 등을 지냈고 1915년 입헌동지회에 입당, 중의원 의원 직에 당선된다. 가토 다카아키 내각의 대장대신을, 제1차 와카쓰키 레이지로 내각의 내무대신을 맡았다.
2.2. 총리 시절
27대 총리 취임 후 |
대공황과 금 해금은 어찌되었든 강력한 대중적 지지를 기반으로 하던 하마구치 내각의 지지도를 크게 추락시켰으며 이 상황에서 밀어붙인 런던 해군 군축조약 채결은 결국 야당과 해군의 격렬한 반대를 사 '통수권 간범문제'를 야기한다. 당시의 일본 법제상 군통수권이 공식적으로는 천황에게 귀속되고 그것을 실질적으로 행사하는 것은 해군성 군령부에게 맡겨져 있었는데 하마구치 내각이 이들의 주장을 수용하지 않고 해군 군축조약을 채결한 것은 잘못된 것이며, 조약 채결 후 국방의 안전을 선언한 것은 월권이자 천황의 통수대권을 침범하는 행위라는 주장. 해군 함대파가 처음 제기한 이 주장에 당시 야당이던 입헌정우회와 우익 세력들이 합류하여 대정부질문까지 던졌던 것이다. 이는 해군 군축조약에 대한 열렬한 대중적 지지 앞에서 함대파였던 가토 히로하루 당시 군령부총장이 사임하고 조약파 제독이 후임 총장으로 임명되고 이후 추밀원에서도 원로인 사이온지 긴모치의 찬성으로 조약이 가결되면서 마무리되었으나, 뒤이은 암살 사건의 이유가 된다.
1930년 11월 14일, 하마구치 총리는 도쿄역에서 천황의 통수권을 침범했다면서 우파 청년 사고야 도메오(佐郷屋留雄)의 총에 맞는다.[9] 즉시 도쿄제국대학병원으로 이송되어 장의 30%를 적출하는 대수술을 받고 목숨을 건지게 된다. 입원 중에는 시데하라 기주로 당시 외무대신이 총리 권한대행을 맡았다. 상처가 호전되면서 1931년 1월 21일 하마구치 총리는 퇴원하였으나 야당인 정우회의 등원 요구를 받았고, 3월 10일 완치되지 않은 몸으로 중의원에 등단해, 11일에는 귀족원 회의에도 참석하였으나 이게 무리가 되어 다시 상처가 악화되어, 4월 4일 재입원하고 5일 수술을 받으면서 총리직 속행 불가능을 인정하고 4월 14일 내각 총사퇴하였다. 이후 완치를 위해 요양하는 등 노력하였으나 차도가 없어 8월 26일 결국 사망한다.
3. 여담
일본 정치인으로서는 매우 드물게도 요정정치나 사전교섭을 통한 타협을 배제하고 정면으로 정국을 풀어나간 정치인 중 한명이었으며 그리고 그것이 먹혔던 것은 강력한 대중적 지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일본에는 이전까지의 군비팽창과 전쟁기조에 반대하는 정치가나 군인들이 여려명이 있었지만 하마구치 오사치처럼 완고하고 강직하게 밀어붙인 인물은 없었다. 그점이 대중적인 지지를 받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하마구치가 사망하면서 일본이 서서히 극렬 군국주의화되기 시작했다.메이지 유신 이후에 태어난 첫 총리대신이다.
[1] 후술된 테러 피해로 인해 시데하라 기주로 외무대신이 1930년 11월 14일부터 1931년 3월 10일까지 약 4개월 동안 내각총리대신 권한대행을 맡았다. 사실 하마구치 총리가 연혁상으로는 여전히 현임이었기 때문에 엄밀히는 권한대행이 아니라 '임시대리'가 되어야 했지만 워낙 입원 기간이 길어 시데하라 외무대신은 사실상 권한대행으로 활동했다.[2] 1949년 신학제 개편 때 교토대학에 통합되었다.[3] 現 총무성 사무차관. 원래 우정성 사무차관이었으나 2001년 중앙성청 개편 때 자치성, 총무청과 통합되면서 총무성 사무차관으로 바뀌었다.[4] 現 재무성 사무차관[5] '인적이 없는 외로운 계곡'이란 뜻이다.[6] 출생 당시 판적봉환으로 도사국은 고치번이 되었다.[7] 현 도쿄대학은 도쿄대학이라는 이름으로 개교했다. 개교 당시의 이 도쿄대학을 구제 도쿄대학, 현재를 신제 도쿄대학으로 구별해 부른다. 도쿄대학은 1886년 제국대학으로 개칭되고 예과가 제1고등학교로 분리되었으나 1897년 교토제국대학이 개교하자 제국대학 간 구별을 위해 도쿄제국대학으로 또 한 번 개칭되었다. 그러나 종전 후인 1947년 제국대학령이 폐지되어 식민지를 제외한 각지의 제국대학들은 '제국'이 삭제되었다. 그리고 2년 뒤에 제1고등학교를 비롯한 구제고등학교들을 도로 통합하여 모두 신제대학으로 개편되었다. 하마구치가 졸업할 당시는 도쿄제국대학으로의 개칭 전이니 제국대학이라는 이름이 맞다.[8] 이노우에 준노스케는 이전 제2차 야마모토 내각에서 대장대신을 역임했었다.[9] 이후 1933년에 사형 판결, 34년에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어, 1940년 11월에 가석방된다. 참고로 이 인물이 바로 야인시대의 사고야마로, 작중에서도 하마구치 암살 사건이 언급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