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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토 에이사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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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가타 아리토모 이토 히로부미 가쓰라 다로 사이온지 긴모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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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라우치 마사타케 하라 다카시 다카하시 고레키요 가토 도모사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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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모토 곤노효에 기요우라 게이고 가토 다카아키 와카쓰키 레이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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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간 기시 노부스케
동생 사토 에이사쿠
2대 <rowcolor=#D7003A> 장남
아베 신타로
3대 <rowcolor=#D7003A> 차남 (아베가) 삼남 (기시가)
아베 신조 기시 노부오 (입적)
아베 아키에 기시 치카코
4대 <rowcolor=#D7003A> 손자
기시 노부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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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The Nobel Prize.png 일본의 역대 노벨상 수상자 29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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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 이름 연도·부문 사유 비고
유카와 히데키
(湯川 秀樹)
1949
물리
중간자의 존재 예측 최초 수상
도모나가 신이치로
(朝永 振一郎)
1965
물리
양자 전기역학의 기초 연구
가와바타 야스나리
(川端 康成)
1968
문학
소설 《설국 문학상 최초 수상
에사키 레오나
(江崎 玲於奈)
1973
물리
반도체와 초전도체의 터널효과 발견
사토 에이사쿠
(佐藤 榮作)
1974
평화
비핵 3원칙 제창 평화상 최초 수상
후쿠이 겐이치
(福井 謙一)
1981
화학
화학 반응의 궤도함수 대칭 해석 화학상 최초 수상
도네가와 스스무
(利根川 進)
1987
생리의학
항체 다양성의 유전학적 원리 해명 생리의학상 최초 수상
오에 겐자부로
(大江 健三郎)
1994
문학
소설 《개인적인 체험》
시라카와 히데키
(白川 英樹)
2000
화학
전도성 고분자 물질 개발
노요리 료지
(野依 良治)
2001
화학
키랄 촉매에 의한 비대칭 반응 연구
고시바 마사토시
(小柴 昌俊)
2002
물리
우주 중성미자 검출과 관련한 선구자적 연구
다나카 고이치
(田中 耕一)
2002
화학
생체고분자의 질량 분석을 위한 연성 탈착 이온화 방법의 개발 과학분야 학사 출신 최초 수상
고바야시 마코토
(小林 誠)
2008
물리
CP 대칭깨짐 원리 발견
마스카와 도시히데
(益川 敏英)
난부 요이치로
(南部 陽一郎)
일본 출생
미국 국적
시모무라 오사무
(下村 脩)
2008
화학
녹색 형광 단백질 GFP 발견 및 개발
스즈키 아키라
(鈴木 章)
2010
화학
팔라듐 촉매교차결합법(스즈키 커플링 / 네기시 커플링) 개발
네기시 에이이치
(根岸 英一)
히키아게샤
일본 국적.
야마나카 신야
(山中 伸弥)
2012
생리의학
유도만능줄기세포(iPS) 개발
아카사키 이사무
(赤﨑 勇)
2014
물리
청색 LED 발명
아마노 히로시
(天野 浩)
나카무라 슈지
(中村 修二)
일본 출생
미국 국적.
오무라 사토시
(大村 智)
2015
생리의학
회충 감염의 새로운 치료법 발견
가지타 다카아키
(梶田 隆章)
2015
물리
중성미자 진동 관측
오스미 요시노리
(大隅 良典)
2016
생리의학
자가포식(오토파지) 매커니즘 연구
가즈오 이시구로
(石黒 一雄)
2017
문학
소설 《남아 있는 나날 일본 출생
영국 국적
혼조 다스쿠
(本庶 佑)
2018
생리의학
음성적 면역 조절 억제를 통한 암 치료법 발견
요시노 아키라
(吉野 彰)
2019
화학
리튬 이온 배터리 개발
마나베 슈쿠로
(真鍋 淑郎)
2021
물리
기후 변화에 대한 신뢰성 있는 예측 모델 제시 일본 출생
미국 국적.
일본 국적을 취득한 적이 없는 일본계 외국인 수상자는 포함하지 않은 집계이다. 다만, 리위안저 (1986년 노벨화학상 수상)는 대만일치시기의 일본 국적 출신이지만 편의상 제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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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Nobel_Prize.png
노벨평화상 수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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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d9f51 {{{#!folding [ 펼치기 · 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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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5555,#aaaaaa
<rowcolor=#cd9f51> 1901 1902
파일:스위스 국기.svg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파일:스위스 국기.svg 파일:스위스 국기.svg
앙리 뒤낭 프레데리크 파시 엘리 뒤코묑 샤를 알베르 고바
<rowcolor=#cd9f51> 1903 1904 1905 1906
파일:영국 국기.svg - 파일: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국기.svg 파일:미국 국기(1896-1908).svg
윌리엄 크리머 국제법학회 베르타 폰 주트너 시어도어 루스벨트
<rowcolor=#cd9f51> 1907 1908
파일:이탈리아 왕국 국기.svg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파일:스웨덴 국기.svg 파일:덴마크 국기.svg
에르네스토 모네타 루이 르노 클라스 아르놀드손 프레데리크 바예르
<rowcolor=#cd9f51> 1909 1910 1911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파일:벨기에 국기.svg - 파일: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국기.svg
데스투르넬 드 콩스탕 오귀스트 베르나르트 국제평화국 알프레트 프리트
<rowcolor=#cd9f51> 1911 1912 1913 1917
파일:네덜란드 국기.svg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파일:벨기에 국기.svg 파일:적십자 기.svg
토비야스 아서르 일라이휴 루트 앙리 라퐁텐 국제적십자위원회
<rowcolor=#cd9f51> 1919 1920 1921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파일:스웨덴 국기.svg 파일:노르웨이 국기.svg
우드로 윌슨 레옹 부르주아 얄마르 브란팅 크리스티안 랑에
<rowcolor=#cd9f51> 1922 1925 1926
파일:노르웨이 국기.svg 파일:영국 국기.svg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프리드쇼프 난센 오스틴 체임벌린 찰스 G. 도스 아리스티드 브리앙
<rowcolor=#cd9f51> 1926 1927 1929
파일:독일 국기(3:2 비율).svg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파일:독일 국기(3:2 비율).svg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구스타프 슈트레제만 페르뒤낭 뷔숑 루트비히 크비데 프랭크 켈로그
<rowcolor=#cd9f51> 1930 1931 1933
파일:스웨덴 국기.svg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파일:영국 국기.svg
나탄 쇠데르블룸 제인 애덤스 니콜라스 버틀러 노먼 엔젤
<rowcolor=#cd9f51> 1934 1935 1936 1937
파일:영국 국기.svg 파일:나치 독일 국기.svg 파일:아르헨티나 국기.svg 파일:영국 국기.svg
아서 헨더슨 카를 폰 오시에츠키 카를로스 라마스 로버트 세실
<rowcolor=#cd9f51> 1938 1944 1945 1946
파일:국제연맹기(1939).svg 파일:적십자 기.svg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파일:미국 국기.svg
난센 국제난민 사무국 국제적십자위원회 코델 헐 에밀리 발치
<rowcolor=#cd9f51> 1946 1947 1949 1950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파일:Quaker_star-T.svg 파일:영국 국기.svg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존 모트 퀘이커 봉사협회 보이드 오어 랠프 번치
<rowcolor=#cd9f51> 1951 1952 1953 1954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파일:UN기.svg
레옹 주오 알베르트 슈바이처 조지 마셜 난민고등판무관사무소
<rowcolor=#cd9f51> 1957 1958 1959 1960
파일:캐나다 자치령 국기.svg 파일:벨기에 국기.svg 파일:영국 국기.svg 파일:남아프리카 연방 국기.svg
레스터 피어슨 도미니크 피르 필립 베이커 앨버트 루툴리
<rowcolor=#cd9f51> 1961 1962 1963 1964
파일:스웨덴 국기.svg 파일:미국 국기.svg 파일:적십자 기.svg 파일:미국 국기.svg
다그 함마르셸드 라이너스 폴링 국제적십자위원회 마틴 루터 킹
<rowcolor=#cd9f51> 1965 1968 1969 1970
파일:유니세프 로고.svg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파일:국제노동기구 로고.svg 파일:미국 국기.svg
유니세프 르네 카생 국제 노동 기구 노먼 볼로그
<rowcolor=#cd9f51> 1971 1973 1974
파일:독일 국기.svg 파일:미국 국기.svg 파일:베트남 국기.svg 파일:일본 제국 국기.svg
빌리 브란트 헨리 키신저 레득토 사토 에이사쿠
<rowcolor=#cd9f51> 1974 1975 1976
파일:아일랜드 국기.svg 파일:소련 국기(1955-1980).svg 파일:영국 국기.svg 파일:영국 국기.svg
숀 맥브라이드 안드레이 사하로프 베티 윌리엄스 메어리드 코리건
<rowcolor=#cd9f51> 1977 1978 1979
파일:국제앰네스티 로고.svg 파일:이집트 국기(1972-1984).svg 파일:이스라엘 국기.svg 파일:인도 국기.svg
국제사면위원회 안와르 사다트 메나헴 베긴 마더 테레사
<rowcolor=#cd9f51> 1980 1981 1982
파일:아르헨티나 국기.svg 파일:UN기.svg 파일:스웨덴 국기.svg 파일:멕시코 국기.svg
아돌포 에스키벨 난민고등판무관사무소 알바 뮈르달 알폰소 가르시아
<rowcolor=#cd9f51> 1983 1984 1985 1986
파일:폴란드 국기(1928–1980).svg 파일:남아프리카 연방 국기.svg - 파일:미국 국기.svg
레흐 바웬사 데즈먼드 투투 핵전쟁방지국제의사회 엘리 비젤
<rowcolor=#cd9f51> 1987 1988 1989 1990
파일:코스타리카 국기.svg 파일:UN기.svg 파일:티베트 국기.svg 파일:소련 국기.svg
오스카르 아리아스 유엔 평화유지군 달라이 라마 14세 미하일 고르바초프
<rowcolor=#cd9f51> 1991 1992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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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웅산 수치 리고베르타 멘추 넬슨 만델라 프레데리크 빌럼 데 클레르크
<rowcolor=#cd9f51> 1994 1995
파일:이스라엘 국기.svg 파일:이스라엘 국기.svg 파일:팔레스타인 국기.svg 파일:폴란드 국기.svg
이츠하크 라빈 시몬 페레스 야세르 아라파트 조지프 로트블랫
<rowcolor=#cd9f51> 1995 1996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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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그워시 회의 카를로스 벨로 조제 하무스오르타 조디 윌리엄스
<rowcolor=#cd9f51> 1997 1998 1999
- 파일:아일랜드 국기.svg 파일:영국 국기.svg 파일:국경없는의사회의 로고.svg
지뢰금지국제운동 존 흄 데이비드 트림블 국경없는의사회
<rowcolor=#cd9f51> 2000 2001 2002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파일:UN기.svg 파일:가나 국기.svg 파일:미국 국기.svg
김대중 유엔 코피 아난 지미 카터
<rowcolor=#cd9f51> 2003 2004 2005
파일:이란 국기.svg 파일:케냐 국기.svg 파일:국제원자력기구 깃발.svg 파일:이집트 국기.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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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히로카와 코센
제2대
사토 에이사쿠
제3대
마스다 고네시치
제4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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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대
사토 에이사쿠
제6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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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대
이시이 미쓰지로
분당파 자유당 간사장(1953-1954)
초대
고노 이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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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하토야마 이치로
2대
이시바시 단잔
3대
기시 노부스케
4대
이케다 하야토
5대
사토 에이사쿠
6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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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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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대
아소 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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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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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시다 후미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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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정대신 (1949~2001)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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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대
다무라 분기치
3대
사토 에이사쿠
4대
다카세 소타로
5대
쓰카다 주이치로
6대
다케치 유키
7대
마쓰다 다케치요
8·35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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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대
이시바시 단잔
10·11대
히라이 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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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나카 가쿠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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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라오 유타카
14대
우에다케 하루히코
15대
스즈키 젠코
16대
고가네 유키테루
17대
사코미즈 히사쓰네
18대
데시마 사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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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자와 규타로
20·21대
고이케 신조
22·23대
도쿠야스 진조
22·23대
도쿠야스 신조
24대
코오리 유이치
25대
신타니 도라사부로
26·27대
고바야시 다케지
28대
고모토 도시오
29대
이데 이치타로
30대
히로세 마사오
임시대리
다나카 가쿠에이
31대
미이케 마코토
32대
구노 추지
33대
하라다 겐
34대
가시마 도시오
8·35대
무라카미 이사무
36대
후쿠다 도쿠야스
37대
고미야마 주시로
38대
핫토리 야스시
39대
시라하마 니키치
40대
오니시 마사오
41대
야마우치 이치로
42대
미노와 노보루
43대
히가키 도쿠타로
44대
오쿠다 게이와
45대
사토 메구무
46대
사토 분세이
47대
가라사와 슌지로
48대
나카야마 마사아키
49대
가타오카 세이이치
50대
무라오카 가네조
51대
오이시 센파치
52대
후카야 다카시
53대
세키야 가쓰쓰구
54대
와타나베 히데오
55대
고이즈미 준이치로
56대
미야자와 기이치
57대
칸자키 다케노리
임시대리
하타 쓰토무
58대
히카사 가쓰유키
59대
오오이데 준
60대
이노우에 잇세이
61대
히노 이치로
62대
호리노우치 히사오
63대
지미 쇼자부로
64대
노다 세이코
65·66대
야시로 에이타
총무대신으로 계승
67대
히라바야시 코조
68대
가타야마 도라노스케
}}}}}}}}}}}}

{{{#!wiki style="margin: 0 -10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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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e5e5e5
민부·대장경 (1869~1885)
초대
마츠다이라 슌가쿠
2대
다테 무네나리
-
오키 다카토
3대
오쿠보 도시미치
4대
오쿠마 시게노부
5대
사노 쓰네타미
6대
마쓰카타 마사요시
전전 대장대신 (1885~1947)
1·3·5·8대
마쓰카타 마사요시
1·3·5·8대
마쓰카타 마사요시
2·4·9대
와타나베 구니타케
1·3·5·8대
마쓰카타 마사요시
2·4·9대
와타나베 구니타케
1·3·5·8대
마쓰카타 마사요시
6대
이노우에 가오루
7·12대
마쓰다 마사히사
1·3·5·8대
마쓰카타 마사요시
2·4·9대
와타나베 구니타케
-
사이온지 긴모치
10대
소네 아라스케
11대
사카타니 요시로
7·12대
마쓰다 마사히사
13대
가쓰라 다로
14대
야마모토 다쓰오
15·17대
와카쓰키 레이지로
16·21·28·31·33대
다카하시 고레키요
15·17대
와카쓰키 레이지로
18대
다케토미 도키토시
19대
데라우치 마사타케
20·24대
쇼다 가즈에
16·21·28·31·33대
다카하시 고레키요
22대
이치키 오토히코
23·30대
이노우에 준노스케
20·24대
쇼다 가즈에
25대
하마구치 오사치
26대
하야미 센지
27대
가타오카 나오하루
16·21·28·31·33대
다카하시 고레키요
29대
미쓰치 주조
23·30대
이노우에 준노스케
16·21·28·31·33대
다카하시 고레키요
16·21·28·31·33대
다카하시 고레키요
32대
후지이 사다노부
16·21·28·31·33대
다카하시 고레키요
34대
마치다 추지
35대
바바 에이이치
36대
유우키 도요타로
37·44대
가야 오키노리
38대
이케다 시케아키
39·45대
이시와타 소타로
40대
아오키 가즈오
41대
사쿠라우치 유키오
42대
가와다 이사오
43대
오구라 마사쓰네
37·44대
가야 오키노리
39·45대
이시와타 소타로
46·48대
쓰시마 준이치
47대
히로세 도요사쿠
46·48대
쓰시마 준이치
49대
시부사와 게이조
50대
이시바시 단잔
전후 대장대신 (1947~2001)
-
가타야마 데쓰
51대
야노 쇼타로
52대
구루스 다케오
53대
기타무라 도쿠타로
-
요시다 시게루
54대
이즈미야마 산로쿠
-
오야 신조
55·61-62대
이케다 하야토
56대
무카이 다다하루
57대
오가사와라 산쿠로
58-60·63대
이치마다 히사토
55·61-62대
이케다 하야토
58-60·63대
이치마다 히사토
64대
사토 에이사쿠
65-66·71-72·75대
미즈타 미키오
67-69대
다나카 가쿠에이
70·73-74·78대
후쿠다 다케오
65-66·71-72·75대
미즈타 미키오
70·73-74·78대
후쿠다 다케오
65-66·71-72·75대
미즈타 미키오
76대
우에키 코시로
77대
아이치 기이치
-
다나카 가쿠에이
70·73-74·78대
후쿠다 다케오
79-80대
오히라 마사요시
81대
보 히데오
82·91-92대
무라야마 다쓰오
83대
가네코 잇페이
84·86-87·90대
다케시타 노보루
85대
와타나베 미치오
84·86-87·90대
다케시타 노보루
88-89·105-107대
미야자와 기이치
84·86-87·90대
다케시타 노보루
82·91-92대
무라야마 다쓰오
93-94·103대
하시모토 류타로
95대
가이후 도시키
96대
하타 쓰토무
97대
하야시 요시로
98-99대
후지이 히로히사
임시대리
하타 쓰토무
98-99대
후지이 히로히사
100대
다케무라 마사요시
101대
구보 와타루
102대
미쓰즈카 히로시
93-94·103대
하시모토 류타로
104대
마쓰나가 히카루
88-89·105-107대
미야자와 기이치
재무대신 (2001~)
초대
미야자와 기이치
2대
시오카와 마사주로
3-5대
다니가키 사다카즈
6대
오미 고지
7·8대
누카가 후쿠시로
9대
이부키 분메이
10대
나카가와 쇼이치
11대
요사노 가오루
12대
후지이 히로히사
13대
간 나오토
14대
노다 요시히코
15대
아즈미 준
16대
조지마 고리키
17-20대
아소 다로
21·22대
스즈키 슌이치
}}}}}}}}}}}}

{{{#!wiki style="margin: 0 -10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000,#e5e5e5
외무경 (1869년~1879년) · 외무사무총재 (1873년)
초대
사와 노부요시
2대
이와쿠라 도모미
3대
소에지마 다네오미
4대
데라시마 무네노리
5대
이노우에 가오루
전전 외무대신 (1885년~194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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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대
이노우에 가오루
6대
이토 히로부미
7대
오쿠마 시게노부
8대
아오키 슈조
9대
에노모토 다케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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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
무쓰 무네미쓰
11대
사이온지 긴모치
12대
오쿠마 시게노부
13대
니시 도쿠지로
14대
오쿠마 시게노부
15대
아오키 슈조
16대
가토 다카아키
17대
소네 아라스케
18대
고무라 주타로
19대
가토 다카아키
20대
사이온지 긴모치
21대
하야시 타다스
22대
데라우치 마사타케
23대
고무라 주타로
24대
우치다 고사이
25대
가쓰라 다로
26대
가토 다카아키
27대
마키노 노부아키
28대
가토 다카아키
29대
오쿠마 시게노부
30대
이시이 기쿠지로
31대
데라우치 마사타케
32대
모토노 이치로
33대
고토 신페이
34대
우치다 고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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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대
우치다 고사이
35대
야마모토 곤노효에
36대
이주인 히코키치
37대
마쓰이 게시로
38대
시데하라 기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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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대
다나카 기이치
40대
시데하라 기주로
41대
이누카이 쓰요시
42대
요시자와 겐키치
43대
사이토 마코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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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대
우치다 고사이
45대
히로타 고키
46대
아리타 하치로
47대
하야시 센주로
48대
사토 나오타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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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대
히로타 고키
50대
우가키 가즈시게
51대
고노에 후미마로
52대
아리타 하치로
53대
아베 노부유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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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대
노무라 기치사부로
55대
아리타 하치로
56대
마쓰오카 요스케
57대
도요다 데이지로
58대
도고 시게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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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대
도조 히데키
60대
다니 마사유키
61대
시게미쓰 마모루
62대
스즈키 간타로
63대
도고 시게노리
전후 외무대신 (1945년~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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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대
시게미쓰 마모루
65대
요시다 시게루
66대
가타야마 데쓰
67·68대
아시다 히토시
69·70·71대
요시다 시게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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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73·74대
오카자키 가쓰오
75·76·77대
시게미쓰 마모루
78대
이시바시 단잔
79·80대
기시 노부스케
81·82대
후지야마 아이이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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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84대
고사카 젠타로
85·86대
오히라 마사요시
87·88대
시이나 에쓰사부로
89·90대
미키 다케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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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대
사토 에이사쿠
92·93대
아이치 기이치
94대
후쿠다 다케오
95·96대
오히라 마사요시
97대
기무라 도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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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대
미야자와 기이치
99대
고사카 젠타로
100대
하토야마 이이치로
101·102대
소노다 스나오
103대
오키타 사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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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대
이토 마사요시
105대
소노다 스나오
106대
사쿠라우치 요시오
107·108대
아베 신타로
109대
구라나리 다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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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대
우노 소스케
105대
미쓰즈카 히로시
106대
나카야마 타로
107·108대
와타나베 미치오
109대
무토 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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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대
하타 쓰토무
117대
가키자와 고지
118대
고노 요헤이
119·120대
이케다 유키히코
121대
오부치 게이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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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대
고무라 마사히코
123·124·125대
고노 요헤이
126대
다나카 마키코
127대
고이즈미 준이치로
128·129대
가와구치 요리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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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131대
마치무라 노부타카
132·133대
아소 다로
134대
마치무라 노부타카
135대
고무라 마사히코
136대
나카소네 히로후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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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138대
오카다 가쓰야
139대
마에하라 세이지
140대
에다노 유키오
141대
마쓰모토 다케아키
142대
겐바 고이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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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144대
기시다 후미오
145·146대
고노 다로
147-149대
모테기 도시미쓰
150대
기시다 후미오
151대
하야시 요시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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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대
가미카와 요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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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 펼치기 · 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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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e5e5e5
1기 상공대신 (1925~1943)
초대
다카하시 고레키요
2대
노다 우타로
3대
가타오카 나오하루
4·6대
후지사와 이쿠노스케
5대
나카하시 도쿠타로
6대
다와라 마고이치
7대
사쿠라우치 유키오
8대
마에다 요네조
9대
나카시마 구마키치
10대
마쓰모토 조지
11대
마치다 추지
12대
가와사키 다쿠키치
13대
오가와 고타로
14·18대
고도 다쿠오
15대
요시노 신지
16대
이케다 시게아키
17대
핫타 요시아키
14·18대
고도 다쿠오
19대
후지와라 긴지로
20대
고바야시 이치조
임시대리
가와다 이사오
21대
도요다 데이지로
22대
사콘지 세이조
23대
기시 노부스케
24대
도조 히데키
2기 상공대신 (1945~1949)
25대
나카지마 치쿠헤이
26대
오가사와라 산쿠로
27대
호시시마 지로
28대
이시이 미쓰지로
임시대리
가타야마 데쓰
29-30대
미즈타니 조사부로
임시대리
요시다 시게루
31대
오야 신조
32대
시나가키 헤이타로
통상산업대신(1949년~2001년)
초대
시나가키 헤이타로
2·6·17대
이케다 하야토
3대
다카세 소타로
4대
요코오 시게루
5대
다카하시 류타로
7대
오가사와라 산쿠로
8대
오카노 키요히데
9대
아이치 기이치
10·11·12대
이시바시 단잔
13·14대
미즈타 미키오
13·14대
미즈타 미키오
15대
마에오 시게사부로
16대
타카사키 타츠노스케
2·6·17대
이케다 하야토
18대
이시이 미쓰지로
19대
시이나 에쓰사부로
20대
사토 에이사쿠
21·22대
후쿠다 하지메
23·24대
사쿠라우치 요시오
25대
미키 다케오
26·27대
칸노 와타로
19·28대
시이나 에쓰사부로
29대
오히라 마사요시
30대
미야자와 기이치
31대
다나카 가쿠에이
32·33대
나카소네 야스히로
34·36대
고모토 도시오
35대
다나카 다쓰오
34·36대
고모토 도시오
37대
에사키 마스미
38대
사사키 요시타케
38대
다나카 로쿠스케
39대
아베 신타로
41대
야마나카 사다노리
42대
우노 소스케
43대
오코노기 히코사부로
44대
무라타 케이지로
45대
와타나베 미치오
46·47대
타무라 하지메
46·47대
타무라 하지메
48대
미쓰즈카 히로시
49대
가지야마 세이로쿠
50대
마츠나가 히카루
51대
무토 가분
52대
나카오 에이치
53대
와타나베 고조
54대
모리 요시로
55대
구마가이 히로시
임시대리
하타 쓰토무
56대
하타 에이지로
57대
하시모토 류타로
58대
츠카하라 슌페이
59대
사토 신지
60대
호리우치 미쓰오
61대
요사노 가오루
62·63대
후카야 다카시
64대
히라누마 다케오
경제산업대신 (2001년~현재)
{{{#!wiki style="margin: -16px -11px" }}}
1·2대
히라누마 다케오
3-5대
나카가와 쇼이치
{{{#!wiki style="margin: -16px -11px" }}}
6대
니카이 도시히로
7·8대
아마리 아키라
9·10대
니카이 도시히로
{{{#!wiki style="margin: -16px -11px" }}}
11·12대
나오시마 마사유키
13대
오하타 아키히로
14대
가이에다 반리
15대
하치로 요시오
{{{#!wiki style="margin: -16px -11px" }}}
16대
에다노 유키오
17대
모테기 도시미쓰
18대
오부치 유코
19·20대
미야자와 요이치
21대
하야시 모토오
{{{#!wiki style="margin: -16px -11px" }}}
22·23대
세코 히로시게
24대
스가와라 잇슈
25·26대
가지야마 히로시
27·28대
하기우다 고이치
{{{#!wiki style="margin: -16px -11px" }}}
27·28대
하기우다 고이치
29대
니시무라 야스토시
30대
사이토 겐
}}}}}}}}}}}}

{{{#!wiki style="margin: 0 -10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000,#e5e5e5
내각관방장관 (1947~)
초대
하야시 조지
2대
니시오 스에히로
3대
도마베치 기조
4대
사토 에이사쿠
5대
마스다 가네시치
6대
마스다 가네시치
7대
오카자키 가쓰오
8대
호리 시게루
9대
오카타 다케도라
10-12대
후쿠나가 겐지
10-12대
후쿠나가 겐지
13-15대
네모토 류타로
16·17대
이시다 히로히데
18대
아이치 기이치
19대
아카기 무네노리
20대
시이나 에쓰사부로
21·22대
오히라 마사요시
23-25대
구로가네 야스미
26대
스즈키 젠코
27·28대
하시모토 도미사부로
29대
아이치 기이치
30·31대
후쿠나가 겐지
30·31대
후쿠나가 겐지
32대
기무라 도시오
33·34대
호리 시게루
35·38대
다케시타 노보루
36·37대
니카이도 스스무
35·38대
다케시타 노보루
39대
이데 이치타로
40대
소노다 스나오
41대
아베 신타로
42대
다나카 로쿠스케
43대
이토 마사요시
44대
미야자와 기이치
45·47·48대
고토다 마사하루
46대
후지나미 다카오
45·47·48대
고토다 마사하루
49대
오부치 게이조
50대
시오카와 마사주로
51대
야마시타 도쿠오
52대
모리야마 마유미
53대
사카모토 미소지
54대
가토 고이치
55대
고노 요헤이
56대
다케무라 마사요시
57대
구마가이 히로시
58대
이가라시 고조
59대
노사카 코켄
60·61대
가지야마 세이로쿠
60·61대
가지야마 세이로쿠
62대
무라오카 가네조
63대
노나카 히로무
64·65대
아오키 미키오
66대
나카가와 히데나오
67-69대
후쿠다 야스오
70·71대
호소다 히로유키
70·71대
호소다 히로유키
72대
아베 신조
73대
시오자키 야스히사
74대
요사노 가오루
75대
마치무라 노부타카
76대
가와무라 다케오
77대
히라노 히로후미
78대
센고쿠 요시토
79대
에다노 유키오
80대
후지무라 오사무
81-83대
스가 요시히데
84대
가토 가쓰노부
85·86대
마쓰노 히로카즈
85·86대
마쓰노 히로카즈
87대
하야시 요시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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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국 제61-63대 내각총리대신
사토 에이사쿠
佐藤栄作 | Satō Eisaku
파일:사토에이사쿠.jpg
<colbgcolor=#0230ae><colcolor=#c3c965> 출생 1901년 3월 27일
야마구치현 쿠마게군 타부세정
사망 1975년 6월 3일 (향년 74세)
도쿄도 미나토구
도쿄지케이카이의과대학 부속병원[1]
재임기간 제61대 내각총리대신
1964년 11월 9일 ~ 1967년 2월 17일
제62대 내각총리대신
1967년 2월 17일 ~ 1970년 1월 14일
제63대 내각총리대신
1970년 1월 14일 ~ 1972년 7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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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230ae><colcolor=#c3c965> 부모 아버지 사토 히데스케[2]
어머니 사토 모요
형제 형 사토 이치로[3], 기시 노부스케
누나 4명[4], 여동생 3명[5]
배우자 사토 히로코
자녀 장남 사토 류타로[6]
차남 사토 신지[7]
손주 손자 사토 에이지, 손녀 사토 미치코, 사토 미카
증손주 증손자 사토 에이스케
친인척 조카 기시 노부카즈, 아베 요코
조카사위 아베 신타로
외종손 아베 히로노부, 아베 신조
종손 기시 노부오[8]
종증손 기시 노부치요
손녀사위 아다테 마사시
학력 쿠니키 심상소학교 (졸업)
야마구치 중학교 (졸업)
제5고등학교[9] (졸업)
도쿄제국대학 법학부 (독일법학 / 학사)
정당

지역구 야마구치 2구 (중선거구)
의원 선수 10 (중)
의원 대수 24, 25, 26, 27, 28, 29, 30, 31, 32, 33
약력 고등문관시험 합격
철도성 관료
운수성 철도총국 장관
운수성 차관
제4대 내각관방장관
중의원 의원
제3대 민주자유당 정무조사회장
초대 자유당 정무조사회장
제2·5대 자유당 간사장
제3대 전기통신대신
제3대 우정대신
제4·21-22대 홋카이도개발청 장관
제7대 건설대신
제3대 자유민주당 총무회장
제64대 대장대신
제22대 통상산업대신
제12·13대 과학기술청 장관
제5대 자유민주당 총재
제91대 외무대신(내각총리대신 겸직)
제61-63대 내각총리대신
칭호 종1위
대훈위 국화장경식
도쿄제국대학 법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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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2.1. 총리로서의 활동
3. 한국계 도래인 후손 설4. 가족관계5. 선거 이력6. 여담7.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일본정치인, 제61~63대 총리. 7년 8개월을 재임하며 훗날 외종손자 이전까지 전후 최장 재임 총리였다. 8년 가까운 그의 집권기간동안 일본은 미국으로부터 오키나와를 반환받았고, 더불어 미국, 소련 다음 가는 경제대국으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하였다.[10] 또한 이 시기 자유민주당최전성기라고 평가받았다.

기시 노부스케 전 총리의 친동생이며[11] 고노에 후미마로 내각 밑에서 일했던 마츠오카 요스케 외무대신은 그의 백부뻘 되는 사람이다. 그리고 부인은 외사촌지간이다.[12] 또한 일본 역사상 최장 집권 총리인 아베 신조의 외종조부이기도 하다.

영향력과 존재감에 있어서 형인 기시 노부스케, 역대 최장수 참의원 의장인 시게무네 유조(重宗 雄三)와[13] 더불어 조슈 고산케(長州御三家)라고 불리었다.[14]

별명은 인사의 사토(人事の佐藤), 귀 밝은 에이사쿠(早耳の栄作)다. 별명이 아예 쇼와의 요괴였던 형 기시 노부스케가 그랬듯이 이 사람도 주도면밀한 정치가였다. 그 외에 형과는 다른 잘생기고 위엄있는 얼굴덕에[15] 정계의 단주로(政界の団十郎)[16]라는 별명 또한 유명했다. 젊은 시절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실제로 형보다 외모가 훨씬 낫다.

비핵 3원칙[17]을 내세운 공로로 1974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는데, 이로써 일본인으로서 최초이자 유일한 노벨평화상 수상자가 되었다. 형은 전범재판에까지 회부된 인물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참 아이러니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2. 생애

파일:사토 에이사쿠 1.jpg
도쿄제국대학 재학 시절
파일:Kishi_Family.jpg
형 기시 노부스케 가족, 사촌 요시다 히로시와[18] 함께한 사토(맨 뒤)
파일:사토 에이사쿠 2.jpg
철도성 시절[19]

1901년 야마구치현 타부세정(田布施町)에서 양조업을 영위하던 사토 히데스케의 3남으로 태어났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양조장은 대개 지역 유지가 경영했고 사토의 집안도 그랬다.[20] 공부를 매우 잘했기에 명문 구제 야마구치 중학교구제 제5고등학교를 거쳐 도쿄제국대학 법학부를 독일법 전공으로 졸업했다. 사실 그의 큰형 이치로와 둘째형 기시 노부스케도 이름난 수재들이었는데, 고향에서는 사토 삼형제를 가리켜 '머리는 위에서부터, 배짱은 밑에서부터'라고 일컬었다.

1923년 12월 고등문관시험 행정과에 합격하였고 1924년 4월 대학 졸업 후 철도성[21] 관료로 입성했다. 그러나 '해군 창설 이래 최고의 수재' 라고 불렸던 큰형 이치로나 일찍이 혁신관료로 주목받아 출세가 빨랐던 둘째형 기시에 비해 사토는 출세가 상당히 늦고 관료 경력에 곡절이 많았다. 1938년 철도성 감독국 철도과장, 1940년 감독국 총무과장, 1941년 감독국장, 1942년 감리국장, 1943년 운수통신성으로 개편된 뒤 자동차국장을 거쳤는데 육군의 고위 인사나 도큐의 총수 고토 게이타(五島慶太)등과 마찰을 빚고서 1944년 오사카철도국장으로 좌천된다. 이 자리는 본성 국장 출신자가 갈 자리가 아니었기에 좌천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이게 전화위복으로 작용한다. 오사카에 좌천되어 있던 덕에 1945년 패전 후 연합군에 의해 공직 추방을 당하지 않았던 것이다. 형 기시는 만주국의 고관을 지냈고 특히 도조 히데키 내각의 대신으로 입각한 경력 탓에 몇 년간 공직 추방을 당했다. 고위직이 쓸려나간 덕에, 그전부터 친분이 있었던 요시다 시게루에게 발탁되어[22] 1946년 운수성 철도총국 장관을 지내며 전쟁으로 붕괴된 철도망의 재건과 국철노조의 공세에 수완을 발휘하였고,[23] 1947년 가타야마 데쓰 내각에서도 운수성 차관을 지냈다. 이후 가타야마 내각의 실력자 니시오 스에히로(西尾末廣)로부터 내각관방차장[24] 취임을 제의받았지만 거절하고 아시다 히토시 내각이 붕괴된 후 출범한 2차 요시다 내각에서 비의원의 신분으로 1948년 내각관방장관에 취임한다. 이걸 보면 이미 그때 사토는 관료로서의 업무능력뿐만 아니라 정치력도 인정받았던 듯 하다.[25] 1949년 치러진 전후 최초로 치러진 중의원 총선거에서 무난하게 당선되었는데 이때 친우들이 많았던 사회당으로 출마하려고 했다가 형의 일갈에 일본 자유당 소속으로 출마했다고 한다. 이후 자유당 간사장 임기 중 비리 스캔들로 잠시 태클이 걸린 것 빼고는 꽤 무난한 출세 가도를 달려왔다. 형인 노부스케가 내각총리대신에 오르자 대장대신을 맡았고, 라이벌이케다 하야토 휘하에서도 통상산업대신을 맡는 등 요직을 많이 맡았다.

사실 사토의 집권엔 사법적인 운도 따랐다. 대표적으로, 그 유명한 '지휘권 파동'으로 살아남은 주인공이다. 당시 조선업 진흥을 위해서 조성한 기금의 정치자금 유용을 놓고서 수사를 진행하던 도쿄지검 특수부는 사토를 체포하려 했으나 요시다의 압력을 받은 이누카이 다케루[26] 법무대신이 검사총장에 대한 수사지휘권을 발동해서 사토에 대한 체포를 저지했다. 그리고 지휘권을 발동한 이누카이는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임해 버렸다… 이로 인해 여론의 반발이 일었고 이어진 선거에서 여당이 좋지 못한 성적표를 받으면서 6년 간 집권했던 요시다 내각은 붕괴했다. 이후 일본에서 법무대신의 수사지휘권은 사실상 사문화되었다. 한편 이때 호되게 당한 일본 검찰은 이 일을 교훈 삼아 후일의 록히드 사건 수사에서는 철저히 비밀유지를 해가며 다나카를 죄어 들어가 기습적으로 체포에 성공했다.

사토가 총리 자리를 의식하기 시작하면서 이케다와의 관계가 틀어지기 시작했는데, 그의 일기에서도 날이 갈수록 이케다에 대한 표현이 냉소적으로 변하는 걸로 보아선 상당히 불편한 관계였던 듯 싶다. 그러다가 이케다가 후두암으로 사임하자 자민당 총재 자리에 올랐다. 자동적으로 총리 자리 획득.[27]

총리에 취임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국행. 가서 논란거리가 남아있었던 오키나와를 돌려받기 위해 린든 B. 존슨 대통령과 회담했지만 신통치 않자 오키나와로 달려갔다. 거기서 오키나와 주민들에게 일본은 당신네들을 한시도 잊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나서 다시 밀사를 통해 미국과 재협상 돌입. 그런 식으로 계속 밀어붙이자 지친 리처드 닉슨 美 대통령은 1972년 오키나와를 일본에게 돌려줬다. 이때 핵무기도 빼고 군대만 남기기로 합의한 일명 비핵 3원칙을 대대적으로 선언했고 이 공로를 인정 받아 1974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28]

오랜 기간 집권하였고 더욱이 집권 이래의 목표였던 오키나와 반환 완수라는 업적을 남기고 영광스러운 퇴진을 하였지만 그 이면에는 후계자를 정할 때 상당히 골머리를 앓았는데, 사토는 원래 후계자로 후쿠다 다케오를 점찍어두고 있었다. 그러나 정치 실세로 급성장한 다나카 가쿠에이를 막지 못했고 각복전쟁이 일어나는 걸 무력하게 지켜보았다. 어느새 커버린 계파원 다나카 가쿠에이의 힘을 보고 질려버린 사토는 총리 자리를 내던지듯이 사임하였다.

다만 형인 기시가 대놓고 다나카 혐오를 보인 탓에 겉으로만 다나카를 견제했을 뿐, 뒤로는 다나카를 은근히 지원했다는 주장도 적지 않다. 실제로 사토는 다나카가 10회 참의원 선거의 패배[29]와 정치자금 문제로 후쿠다 다케오와 미키 다케오 등으로부터 공격을 받을때 다나카에게 힘을 실어주었기 때문이다. 이후로도 자민당 원로회의에서 다나카를 씹어대는 형 기시와 말싸움까지 벌일 정도였다고. 이 무렵 다나카는 사토를 방문한 자리에서 눈물까지 흘렸다고 하며, 사토는 퇴임 후 가진 인터뷰에서 "후쿠다는 형 기시의 직계라고 보는게 정확하고, 나의 직계는 다나카"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총리 자리에서 물러나고 1974년 노벨평화상까지 수상한뒤 1975년, 74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30]. 최후가 약간 어이없는데 5월 19일 요정 신기라쿠[31]에서 열린 야마구치현 출신 정재계 실력자들의 모임인 장영회에 참석하였다가 뇌졸중으로 쓰러져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깨어나지 못하고 약 3주 뒤 사망하였다. 사후 대훈위국화장경식과 대훈위국화대수장이 동시에 추증됐다.

2.1. 총리로서의 활동

파일:external/www.weblio.jp/souri61.jpg
61대 총리 취임 후
파일:external/cache6.amanaimages.com/23023000984.jpg
각료 인선 후 기념 촬영을 한 사토 에이사쿠 내각의 모습

1964년 11월부터 1972년 7월까지 7년 8개월(2798일)동안 집권했다. 이는 총 재임 기간으로는 아베 신조, 가쓰라 다로에 이은 3번째 기록이며, 연속 재임 기간으로는 2020년 8월 24일에 아베 신조에게 경신당하기 전까지 최장 기록이었다.#[32] 이케다 하야토와는 구마모토 제5고등학교 동창이자, 요시다 시게루의 휘하에서 정치 생활을 해낸 요시다 스쿨 세대[33]. 그러나 총리 자리를 두고 동기나 친구 따위의 감정은 젖혀둔 채 사토가 총리 자리에 올라가는 시절은 지키려는 이케다와 뺏으려는 사토의 난투극으로 얼룩졌다.

전후 일본에서 가장 오랜 기간 집권한 영광을 누렸지만, 명문가 출신, 엘리트, 완벽주의자에 공무원 시절 생긴 깐깐한 성격까지 더해서 대중의 인기를 크게 받진 못한 케이스였다. 사토의 위엄있는 외모 또한 대중적 인기에는 오히려 마이너스가 되었다. 사토의 화려한 배경과 더불어 평범한 국민들 입장에서는 굉장히 거리감 있는 인물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게다가 사토는 입이 매우 무겁고 정책 결정 과정이나 인사(人事)에 있어서도 보안 유지를 중시하여 언론을 통해 적극적으로 정책을 홍보한 전임 총리였던 이케다 하야토와는 다르게 언론과도 사이가 별로였다. 오죽하면 언론계에선 '아와시마(淡島, 사토의 자택 소재지)[34]에 특종은 없다'는 말이 유행하였을 정도였다고 한다.

사토 사임회견 당시 이야기다. 깐깐한 성격 탓에 언론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사토는 사임회견에 신문사 기자들은 오지 않게 하라고 지시를 내려놨는데, 이게 싸인이 맞지 않아서 결국 신문사 기자들이 우루루 몰려와 회견을 기다렸다. 하지만 기자들을 본 사토의 반응은 매우 냉담했고, 급기야 "TV는 어디 있어! 신문사들 앞에서 이야기하기 싫어! 기자들은 나가! 난 국민과 직접 대화하겠다!"라고 소리쳤다. 그러자 신문사 기자들은 보란듯이 모두 빠져나갔고, 때문에 총리 사임회견이라는 빅 이벤트 장소에 남은 건 사토와 그의 보좌관 몇, 그리고 그를 촬영하는 TV 카메라맨 뿐이었다는 매우 훈훈한(?) 이야기. 하지만, 정작 당시 일본 국민들도 총리 사임에 별 관심이 없었다. 여기서 총리사임 기자회견 당시 모습을 볼 수 있다(약 1분 17초쯤 부터). 우루루 빠져나가는 신문기자들과 텅 빈 회의실에서 혼자 기자회견하는 모습이 일품이다.

이를 방증하듯이 사토 집권 시기에 자민당의 득표율이 50%대 중반을 기록하는 압도적인 수준에서 40%대 후반으로 우려할 정도로 떨어졌다. 하지만 운이 좋게도 일본 야당 지지기반이 다당화되어가며[35] 자민당과 사회당 득표가 동시에 떨어지는 덕분에 일단 현상유지는 가능했다. 공명당, 공산당, 민사당의 득표율과 의석이 불어나는데 반해 사회당의 의석수와 득표율은 오히려 떨어졌던 것. 사실 1960년대 중반부터 도쿄도를 비롯한 상당수 지자체에서 야당이 집권했지만 이러한 경향이 중/참의원 총선거로까지 이어지지는 않았다. 자민당 약세지역인 대도시에서도 야당 후보들이 각개각패 당하는 형국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사토는 마지막 선거인 1971년 참의원 선거에서 63석을 확보하는데 그치면서 낮은 인기를 확인했고, 지지율이 20%대로 떨어지면서 임기를 마감했다.

50년대 자민당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부총재 오노 반보쿠[36] 이누카이 다케루[37] 전 법무 대신을 가리켜서 얼굴만 희멀건 쭉정이라고 무시하고 다녔는데, 이누카이의 은혜를 입은 사토가 이누카이에게 안부 인사 한번 다녀오지 않은 것을 친우인 오키 신지로 과기청 장관을 통해 알고는 격노하면서 이누카이를 자파로 초빙하였다. 이후 오노는 사토가 이누카이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은 것을 보고는 대놓고 반 사토를 외치고 다녔는데, 정작 사토는 장례식이 끝나고 반년 후에 이목을 숨겨가며 은인인 이누카이의 집으로 와 문상을 했다고 한다.

실제로 오노 반보쿠와는 견원지간이었다. 사토는 오노를 가리켜 지성없는 나니와부시(浪花節)[38], 오노는 사토를 가리켜 거만한 관료라고 서로 씹어댔다. 오노의 추모회에서는 서민적인 이미지의 오노가 반짱이라고 불리는 것처럼 자신도 에이짱이라고 불렸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나중에 "따로 칭찬할 거리가 없잖나." 라며 그저 서민적인 친근함 외엔 볼 게 없어서 그런 별명이 붙은 거라는 말도 했다. 실제로 후에 개그맨 출신 정치인인 요코야마 노크가 '에이짱'이라 불렀더니 무지하게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고 한다.

사실 사토가 총리, 총재가 되고 대파벌의 장으로 성공한 데는 다나카 가쿠에이라는 부하의 존재도 컸다. 사토는 다나카를 부려서 당내의 정보를 철저히 긁어모았고, 그것을 토대로 정치활동을 했다. 1950년대에 사토에게 붙은 별명인 "귀 밝은 사토"는 다나카의 헌신이 아니었다면 붙여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사토는 중의원에서 야당 의원의 질의에 대한 답변 도중에 "다나카는 나의 오른팔"이라고 공개적으로 언급할 정도였다.[39][40]

요약하면 사토는 대중적인 스킨십에는 워낙 취약해서 그다지 인기가 없었다. 그럼에도 사토가 장기 집권을 할 수 있었던 비결은 첫째, 막대한 자금 동원력[41]. 둘째, 교묘한 당내 역학관계 조정과 실력자들에 대한 인사[42][43]. 셋째, 참의원 내 자민당 세력에 대한 확고한 통제[44], 넷째는 야당 지지층의 다당화 경향으로 인한 일본사회당의 세력 약화, 마지막으로 경제 호황을 들 수 있다.[45]

3. 한국계 도래인 후손 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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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 - 합의사항49
토론 - 합의사항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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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건>
* 토론 관리 방침의 근거 신뢰성 순위 7순위 이상의 근거자료 위주로 서술하고, 그 외 한국계 도래인 설에 대한 주관적 의견은 최소화하여 서술한다.
* 사토 에이사쿠와 아베 신타로, 아베 신조가 공개 석상에서 한국계 도래인인지 아닌지를 직접 발언한 내용이 없음을 서술한다.
* 사토, 아베 가문이 도래인 후손이라는 내용이 명시되어 있는 일본 내 역사학적 기록이 확인되지 않음을 서술한다.

4. 가족관계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아베 신조/가족관계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5. 선거 이력

연도 선거 종류 지역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49 제2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야마구치 2구

52,850 (16.2%) 당선 (1위) 초선
1952 제2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60,875 (17.8%) 당선 (2위) 재선
1953 제2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68,386 (20.5%) 당선 (1위) 3선
1955 제27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63,229 (19.1%) 당선 (1위) 4선
1958 제2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72,545 (19.7%) 당선 (2위) 5선
1960 제2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74,830 (21.2) 당선 (1위) 6선
1963 제3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94,785 (26.0%) 당선 (1위) 7선[46]
1967 제3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88,859 (22.5%) 당선 (1위) 8선[47]
1969 제3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96,979 (23.1%) 당선 (1위) 9선[48]
1972 제33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66,282 (15.2%) 당선 (2위) 10선[49]

6. 여담

파일:external/news.xinhuanet.com/121909809_11n.jpg
총리 시절 기자회견을 하고 있는 모습
[clearfix]

7.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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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케이카이는 한자로 자혜회(慈恵会)라 읽는다. 때문에 한국에서는 자혜회병원이라는 이름으로도 많이 불린다.[2] 혼전성은 기시.[3] 해군 중장[4] 타케코, 코마, 오토요, 치요코.[5] 미사오, 토시코, 야스코.[6] JR서일본 이사, JR서일본호텔개발 회장, 데이고쿠 석유 고문 등 역임[7] 정치인. 운수상, 통산상 등 역임[8] 원래는 외종손이지만, 형 기시 노부스케의 양손자로 입적하여로 종손이 되었다.[9] 1949년 신학제 개편 때 구마모토대학에 통합되었다. 평생의 원수 이케다 하야토 총리와 동문이다.[10] 1969년 일본이 서독을 추월해 제1세계 2위의 경제대국이 된 시기가 사토 에이사쿠 집권기이다. 일본이 소련까지 추월하고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이 된 것은 1986년의 일로, 이후 2010년 중국에게 추월당할 때까지 20년 이상 세계 2위 자리를 유지했다.[11] 기시 노부스케와 사토 에이사쿠 형제의 아버지의 본성은 기시였는데, 데릴사위로 오면서 성을 사토로 바꾸었다. 하지만 기시 노부스케는 부친의 원래 성인 기시를 형제 중에 홀로 이어받았고, 사토 에이사쿠는 외조부와 아버지의 성인 사토를 이어받았으므로 형제끼리 성이 다른 것이다.[12] 사촌혼에 대해 한국이나 중국 등 일부 나라는 법으로 금지하고 있지만, 사촌 항목을 봐도 알 수 있듯 사촌혼을 인정하는 국가는 의외로 많다. 아니 한국 중국 미국 일부 주들 정도를 제외한 전세계 대부분 국가들에서 허용된다. 물론 현대화되면서 유럽이나 일본도 젊은 세대들 사이엔 사촌혼이 상당히 터부시되는 경향이 있지만, 그래도 사촌혼이 우리나라처럼 그리 이상하게 받아들여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간 나오토 총리가 사촌혼을 했다가 일각에서 멸시받은 사례도 없지는 않다.[13] 당시 참의원을 가리켜 시게무네 왕국이라고 할 정도였다.[14] 비슷하게 이들의 야마구치현 선배들인 이토 히로부미, 야마가타 아리토모, 이노우에 가오루를 한데 묶어 조슈삼존(長州三尊)이라고 불렀다.[15] 젊었을때 요정을 가면 게이샤들이 사토를 무더기로 따랐다고 한다.[16] 일본 가부키의 최고 명문가인 이치카와 종가 나리타야의 당주가 대대로 습명하는 '이치카와 단주로'에서 따온 별명. 이치카와 단주로는 그 시대 가부키계에서 절대적인 위치를 가지는 당대 최고의 가부키 배우로 여겨지기에, 단주로라는 이름이 미남의 대명사로 쓰인다.[17] '핵무기를 만들지도, 가지지도, 들이지도 않는다'고 선언[18] 요시다 시게루의 사위였다.[19] 형 기시 노부스케도 젊은 시절엔 콧수염을 길렀었다. 둘 다 종전 후 이미지 쇄신을 위해 밀었다.[20] 원래 집안에 대대로 양조의 권리가 인정되었고, 이 권리를 일시적으로 다른 곳에 대여하고 있었으나 1898년경 부친이 야마구치현청 공무원을 퇴직한 뒤 양조장을 시작했다. 어린 시절 지역에서 사토 가의 도련님으로 유명했던 모양.[21] 43년 운수통신성으로 개편된다.[22] 사토의 사촌동생이 요시다의 사위였다. 즉 전후 일본의 이름난 명문들중에서도 손꼽히는 요시다 가문과 기시-사토 가문은 혼맥으로 연결되는 규벌(閨閥)을 이룬다고 할 수 있다.[23] 이때 사토와 더불어 해운총국 장관을 지내며 철도의 사토, 해운의 아리타라고까지 불렸던 거물 관료가 아리타 기이치(有田喜一)였지만 아리타는 훗날, 요시다 시게루 대신 아시다 히토시의 요청에 응하였고 결국 사토와 비교하면 굉장히 평범한 정치인으로 머물렀다. 그래도 각료를 세차례나 지낸 정계의 중진이었다. 사토가 워낙 거물로 성장해서 그렇지...참고로 아리타가 처음 입각한게 사토 정권때였다.[24]내각관방 부장관[25] 내각관방장관은 한국의 국무조정실장, 대통령비서실장의 역할이 합쳐진 요직으로 내각에서도 핵심 자리이며 당연하지만 조정력이 탁월한 인물이 맡는다.[26] 자유주의자로서 다이쇼 데모크라시 시대의 최후 총리였던 이누카이 쓰요시의 외아들이었다. 참고로 다케루는 1920년대 내내 소설가로 꽤 나갔던 경력이 있다.[27] 이케다도 내심 사토가 자신의 뒤를 잇길 바랬는지 사토가 총재로 지명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비서관인 이토 마사나리에게 "잘됐다, 사토라면 내가 편하지"라고 말하였다고 한다.[28] 하지만 훗날 알고보니 이게 다 거짓 아니냐얘기도 나돌고 있다.[29] 이때 다나카는 선거에 500억엔에서 1천억엔을 동원하였다고 한다.[30] 그야말로 부와 권력과 명예 세가지 분야에서 모두 최고까지 다 누렸다고 볼 수 있다.[31] 일본에서 가장 비싼 요정으로 아쿠타가와상나오키상의 심사가 열리는 곳으로도 유명하다.[32] 요시다 시게루보다도 더 긴 총리 생활을 하였다.[33] 이케다를 정계로 끌어들인 게 사토라고 알려져 있다.[34] 현재의 세타가야구 다이자와(世田谷区 代沢). 다케시타 노보루 등도 거주하던 도쿄의 손꼽히는 부촌이다.[35] 일본의 선거제도가 중선거구제였기 때문에 제1야당에게 표를 몰아주는 식의 투표행태가 먹히지 않았던 측면도 있다. 물론 소선거구제라해도 2012년 이후의 일본에서는 다당화 경향이 뚜렸히 나타나기는 한다.[36] 한국에는 역도산의 후견인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37] 5·15 사건으로 살해당한 이누카이 쓰요시 전 총리의 아들이다. 극동국제군사재판 당시 증인으로 출석하기도 했다.[38] 일본의 악극 중 한 종류로 라쿠고와 달리 샤미센의 반주에 따라 이야기의 내용을 가창과 말로 전달하는 형태였으며 메이지 시대에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주로 서민적 의리와 인정에 호소하는 작품이 많았다.[39] 이미 사토 집권기부터 사토파의 정치자금은 사토4:다나카6의 비율로 모금되고 있다는 소문이 돌 정도로 파벌 내부에서 다나카의 비중이 매우 컸다.[40] 조선 의옥(造船疑獄) 사건 경험 때문인지는 몰라도 사토는 본인이 직접 정치자금을 만드는걸 상당히 꺼렸다.[41] 사토의 풍부한 자금은 부하 다나카 가쿠에이, 경제 4단체를 중심으로 일본 경제를 장악한 재계 주류의 전폭적인 사토 정권 지원에서 기인한다.[42] 인사의 사토라는 별명이 여기서 나온 것이다. 더불어 고노 이치로, 오노 반보쿠등 사토에 맞설만한 당인파 거물들이 잇달아 죽은 이유도 컸다.[43] 이에 대해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총리는 "가와시마 쇼지로(川島正次郞), 호리 시게루(保利茂), 후쿠다 다케오, 다나카 가쿠에이등의 명마를 잘 다루어 장거리를 완주하였다"고 평가하였다.[44] 당시 참의원의장이던 시게무네 유조(重宗 雄三)는 천황이라 불리울 정도로 참의원내에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고 이를 통해 자민당 총재 선거 때마다 80표 이상을 동원하며 이케다, 사토 정권을 지탱하였다.[45] 유명한 이자나기 경기가 사토 집권 시기다.[46] 1964.11.09~1967.02.17 제1차 내각[47] 1967.02.17~1970.01.14 제2차 내각[48] 1970.01.14~1972.07.07 제3차 내각[49] 1975.06.03 사망[50] 사망 당시 67세였다. 일본이 세계에서 평균 수명이 가장 긴 국가임을 감안하면 67세 사망은 단명이나 다름없다.[51] 2012년에 TBS에서 10부작 드라마로 제작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