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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카무라 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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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프랑크 구스타프 헤르츠 장 페랭 아서 콤프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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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윌슨 오언 리처드슨 루이 드 브로이 찬드라세카라 라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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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프강 파울리 퍼시 브리지먼 에드워드 애플턴 패트릭 블래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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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 피치 니콜라스 블룸베르헌 아서 숄로 카이 시그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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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네스 윌슨 수브라마니안 찬드라세카르 윌리엄 A. 파울러 카를로 루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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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몬 판 데르 메이르 클라우스 폰 클리칭 에른스트 루스카 게르트 비니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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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인리히 로러 요하네스 베드노르츠 카를 뮐러 리언 레더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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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빈 슈워츠 잭 스타인버거 한스 데멜트 볼프강 파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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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리퍼드 슐 프레더릭 라이네스 마틴 펄 데이비드 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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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세이 아브리코소프 앤서니 레깃 데이비드 그로스 데이비드 폴리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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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크 윌첵 로이 글라우버 존 홀 테오도어 헨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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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 페르 페터 그륀베르크 고바야시 마코토 마스카와 도시히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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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부 요이치로 찰스 가오 윌러드 보일 조지 스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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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드레 가임 콘스탄틴 노보셀로프 솔 펄머터 애덤 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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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이언 슈미트 세르주 아로슈 데이비드 와인랜드 피터 힉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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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수아 앙글레르 아카사키 이사무 아마노 히로시 나카무라 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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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 이름 연도·부문 사유 비고
유카와 히데키
(湯川 秀樹)
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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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모나가 신이치로
(朝永 振一郎)
1965
물리
양자 전기역학의 기초 연구
가와바타 야스나리
(川端 康成)
1968
문학
소설 《설국 문학상 최초 수상
에사키 레오나
(江崎 玲於奈)
1973
물리
반도체와 초전도체의 터널효과 발견
사토 에이사쿠
(佐藤 榮作)
1974
평화
비핵 3원칙 제창 평화상 최초 수상
후쿠이 겐이치
(福井 謙一)
1981
화학
화학 반응의 궤도함수 대칭 해석 화학상 최초 수상
도네가와 스스무
(利根川 進)
1987
생리의학
항체 다양성의 유전학적 원리 해명 생리의학상 최초 수상
오에 겐자부로
(大江 健三郎)
1994
문학
소설 《개인적인 체험》
시라카와 히데키
(白川 英樹)
2000
화학
전도성 고분자 물질 개발
노요리 료지
(野依 良治)
2001
화학
키랄 촉매에 의한 비대칭 반응 연구
고시바 마사토시
(小柴 昌俊)
2002
물리
우주 중성미자 검출과 관련한 선구자적 연구
다나카 고이치
(田中 耕一)
2002
화학
생체고분자의 질량 분석을 위한 연성 탈착 이온화 방법의 개발 과학분야 학사 출신 최초 수상
고바야시 마코토
(小林 誠)
2008
물리
CP 대칭깨짐 원리 발견
마스카와 도시히데
(益川 敏英)
난부 요이치로
(南部 陽一郎)
일본 출생
미국 국적
시모무라 오사무
(下村 脩)
2008
화학
녹색 형광 단백질 GFP 발견 및 개발
스즈키 아키라
(鈴木 章)
2010
화학
팔라듐 촉매교차결합법(스즈키 커플링 / 네기시 커플링) 개발
네기시 에이이치
(根岸 英一)
히키아게샤
일본 국적.
야마나카 신야
(山中 伸弥)
2012
생리의학
유도만능줄기세포(iPS) 개발
아카사키 이사무
(赤﨑 勇)
2014
물리
청색 LED 발명
아마노 히로시
(天野 浩)
나카무라 슈지
(中村 修二)
일본 출생
미국 국적.
오무라 사토시
(大村 智)
2015
생리의학
회충 감염의 새로운 치료법 발견
가지타 다카아키
(梶田 隆章)
2015
물리
중성미자 진동 관측
오스미 요시노리
(大隅 良典)
2016
생리의학
자가포식(오토파지) 매커니즘 연구
가즈오 이시구로
(石黒 一雄)
2017
문학
소설 《남아 있는 나날 일본 출생
영국 국적
혼조 다스쿠
(本庶 佑)
2018
생리의학
음성적 면역 조절 억제를 통한 암 치료법 발견
요시노 아키라
(吉野 彰)
2019
화학
리튬 이온 배터리 개발
마나베 슈쿠로
(真鍋 淑郎)
2021
물리
기후 변화에 대한 신뢰성 있는 예측 모델 제시 일본 출생
미국 국적.
일본 국적을 취득한 적이 없는 일본계 외국인 수상자는 포함하지 않은 집계이다. 다만, 리위안저 (1986년 노벨화학상 수상)는 대만일치시기의 일본 국적 출신이지만 편의상 제외.
}}}}}}}}}}}} ||

나카무라 슈지
中村 修二
파일:나카무라 슈지.jpg
<colbgcolor=#000><colcolor=#fff> 성명 <colbgcolor=#fff,#191919>영: Shuji Nakamura
일: 中村 修二 (なかむらしゅうじ)
한: 나카무라 슈지
출생 1954년 5월 22일 ([age(1954-05-22)]세)
일본 에히메현 니시우와 군 요츠하마 촌[1]
국적
[[일본|]][[틀:국기|]][[틀:국기|]] →
[[미국|]][[틀:국기|]][[틀:국기|]]
직업 전자공학자
분야 발광다이오드
학력 오즈시립 기타 소학교(졸업)
오즈시립 시타 중학교(졸업)
오즈시립 키타 고등학교 (졸업)
오즈시립 오즈키타 중학교 (졸업)
에히메현립 오즈 고등학교 (졸업)
도쿠시마대학 공학부 (전자공학 / 학사) (1977년)
도쿠시마대학 대학원 (공학연구과 / 석사) (1979년)
도쿠시마대학 대학원 (공학연구과 / 박사) (1994년)[2]
소속 UC 산타바바라 (재료물성학과 / 석좌교수)
업적 청색 발광다이오드의 발명
링크 파일:스코푸스.png

1. 개요2. 생애
2.1. 청색 LED 개발2.2. 니치아 화학공업과의 대립2.3. 노벨상 수상
3. 수상 경력

[clearfix]

1. 개요

나카무라 슈지는 일본계 미국인 전자공학자이다.

에히메현 니시우와군 이카타정[3] 출신, 일본 도쿠시마대학 공학부 전자공학과 출신(공학 박사). 2014년에 아카사키 이사무, 아마노 히로시와 함께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하였다. 공적은 청색 발광 다이오드의 발명.

2. 생애


원래는 이론물리학 혹은 수학 계열의 학부로 진학하고자 했으나[4], 취직을 생각하라는 교사의 조언으로 인해 도쿠시마대학[5] 공학부의 전자공학과로 진학하였다. 졸업 당시의 성적은 최상위권이었다고 한다. 학부 졸업후에 도쿠시마대학의 대학원으로 진학하여 공학연구과로 석사 학위를 취득하였다.[6]

석사학위 취득 후 바로 중소기업이던 도쿠시마의 마츠시타 전기산업에 지원했으나, 학부 및 석사시절 항상 성적이 최상위권이었고 도쿠시마대학 대학원의 추천서도 받았음에도 떨어졌다고 한다. 이유는 졸업논문 주제가 너무 이론적인 내용이라서였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대학원 시절의 지도교수로부터 지적받았다고 한다. 그 후로 교세라에 합격했지만, 이 시점에 이미 아내와 자식이 있었기에 출신 지방에 취직하기를 원해 니치아 화학공업으로 입사하게 된다.

2.1. 청색 LED 개발

적색 LED와 녹색 LED는 생산 과정이 비교적 쉬워 꽤 이른 시기에 개발되어 상업적으로 사용되었지만, 청색 LED는 대량 생산의 기술적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 청색 LED가 중요한 이유는 청색만 개발되면 빛의 삼원색을 모두 확보하여 원하는 모든 색상을 표현할 수 있게 되기 때문에, 상업적으로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곧 개발될 것만 같던 청색은 생각보다 난이도가 어려웠고 몇 년이 지났음에도 프로토타입 정도만 출시되었던 상황이었다. 즉 LED는 당시 반쪽짜리 취급 받던 애매한 기술이었다.

나카무라 슈지는 이 청색 LED의 가능성을 깨닫고 개발에 매달리게 된다. 나카무라 슈지는 재직 중 오가와 노부오 사장을 설득하여 5억엔의 연구비를 지원받는 한편, 아는 사람이 있었던 플로리다 대학교에 교환 연구원으로 연구를 떠나게 된다. 목적은 MOCVD(Metal Organic Chemical Vapor Deposition, 유기금속화학증착장비[7]) 사용법을 익히기 위해서였는데, 그 곳에서 나카무라 슈지는 동료들에게 박사 학위도 없다며 갖은 수모를 겪게 된다. 당시 일본에는 논문 5편을 내면 대학원에 가지 않아도 박사 학위를 주는 논문박사 제도가 있었는데, 단순히 연구 결과를 발표하지 말라는 사내 정책 때문에 아직도 박사 학위가 없었던 것 뿐이었지만[8], 같은 랩실 동료들에게 공돌이 취급이나 당하며 거의 1년간 수모를 당해야 했다. 게다가 MOCVD 사용법도 고장난 MOCVD나 하나 쥐어주고 그거 뜯어보라는 식이었다.

노벨상 수상 직후 연구의 원동력을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대해 "분노다. 그것이 내게 모든 동기부여를 했다."[9] 라고 답했다. 참고로 그의 박사 논문은 "무려" 청색 LED의 세기적인 발명 성과를 정리한 것이다. 2024년 현재는 900편 이상의 논문을 발표하여 박사 학위는 옛날에 취득한 상태이다.

당시 청색 LED 후보 물질로 Zinc Selenide(ZnSe)와 Gallium Nitiride(GaN) 2개가 유력한 후보였는데, 지금이야 당연히 정답이 GaN임을 알지만 당시의 대세는 전자였다. 당시 내로라하는 기업들이 몇 십년간 놀기만 한 것은 아니어서, ZnSe를 이용한 청색 LED의 프로토타입 자체는 개발된 상태였다. 다만 만드는 과정이 어렵고, 가격도 비쌌고, 빛이 미약하여 상업적으로 적합하지 않았을 뿐. 후자는 더더욱 답이 없었는데 이유는 GaN은 ZnSe'보다도' 결정 증착이 매우 어려웠던 데다가, P-type 소자는 물론, 개발했다고 하더라도 그 개발품이 실생활에서 사용할 만큼 밝아야하기 때문이었다. 또한 P-Type 소자의 제조 방법은 ZnSe도 가지고 있는 문제였다.

당시 GaN의 결정 증착법의 난제가 일부 풀린 상황이었기에 나카무라 슈지는 청색 LED 개발을 GaN으로 시도해보기로 마음 먹고 6개월간 매진하였지만 회사에 있는 MOCVD가 적합하지 않다는 결론을 얻게 된다. 나카무라 슈지는 그 수모의 1년간 플로리다에서 MOCVD를 가지고 놀며 이 기계를 마스터한 상태였는데, 이 모욕적인 시기의 경험이 청색 LED 개발에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기존 장비는 증착에 한계가 있어 기계를 스스로 개조하고 테스트한 뒤 이를 반복하는 방법을 통해서 실험을 진행하게 된다.

그러나 연구 도중 연구비를 지원해주었던 오가와 노부오가 은퇴하고 그의 사위였던 오가와 에이지가 사장 자리에 앉았다. 오가와 에이지는 이 "불가능해 보이는 방법"이었던 GaN 연구를 지원할 마음이 없었다. 다른 유수의 대기업이 ZnSe 증착법을 주류로 미는 상황에서 합리적으로 보였을 리가 없었을 것. 오가와 에이지는 나카무라 슈지에게 연구를 그만두라 계속해서 통보하고 명령하지만, 나카무라 슈지는 이를 무시하고 꾸준히 자신만의 연구를 이어가며 사장 오가와 에이지와 대립하게 된다.

나카무라 슈지는 몇 가지의 난관을 타파하여 드디어 청색 LED 개발에 성공, 1992년 세인트 루이스의 한 워크샵에서 "기존 불가능해 보였던 방법", 즉 GaN을 통해서 제조한 청색 LED를 세계에 발표하기에 이른다. 물론 이 LED는 지금 보면 밝지도 않은데다가 순수 파란색이 아닌 푸르스름한 보라색 비슷한 색깔의 LED지만 당시 세계가 받았던 충격은 엄청났다. 얼마 뒤 나카무라 슈지는 몇 차례의 공정 개선을 통하여 순수 청색 LED를 드디어 제조해내기에 이른다.

이에 니치아는 정식으로 기자회견을 열어 "청색 LED" 개발에 성공하였음을 전세계에 공표하게 된다. 이후 1996년, 청색 LED에 형광 물질을 도포, 청색 파장을 흡수하여 순백색을 표현하는 방식의 순백색 LED도 개발에 성공하게 된다. 참고로 백색 LED는 일상 생활의 조명으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상업성은 더욱 뛰어나다. 개발 직후인 1993년 매출 160억엔에서 1996년 280억엔, 그 후 3년 뒤인 1999년은 630억엔(!)으로 뛰게 된다. 현재 니치아의 업계 전방위적 위치는 순수히 이 양반 덕분이다. 나카무라 슈지의 청색 LED 발명으로 니치아 화학공업은 세계 제일의 LED 회사로 성장할 수 있었다.

2.2. 니치아 화학공업과의 대립

청색 LED 개발 후 니치아의 매출은 수직상승하였지만 회사에서 나카무라 슈지에게 준 것은 각 특허당 보너스 2만엔뿐이었다고 한다. 물론 회사 급성장 이후 연봉을 약 $60,000까지 올려줬다고는 한다. 나카무라 슈지의 미국인 동료 연구자는 월급 이외의 발명에 대해 회사에서 얻은 보상이 너무 적다며 그에게 '슬레이브 나카무라' 라는 별명을 붙여줄 정도였다. 이는 상기하였듯이 아마 나카무라 슈지가 상부 명령에 불복종하고 성과를 얻어내는 과정에서 발생했던 오가와 에이지와의 대립 때문으로 보인다.

니치아 화학공업의 오가와 노부오 사장은 초창기에 나카무라 슈지가 하고 싶다는 청색 LED 연구를 위해서 당시 회사 규모로서는 결코 적지 않은 5억엔을 지원해 주는 등 전폭적으로 지지를 해 주었지만 그에 대한 보답은 너무 짰다. 결국 2000년, 나카무라 슈지는 니치아를 그만두고 미국 LED 회사 CREE에 취업하였는데, 니치아 화학공업은 영업 비밀 누설을 의심하여 노스캐롤라이나주 동부지구 연방지방법원을 통하여 나카무라 슈지에게 소송을 걸어, 집은 물론 대학 연구실도 조사를 받게 해 추진하던 연구도 중단되게 하는 등 그를 집요하게 괴롭혔고, 결국 이에 지친 나카무라 슈지는 2001년 일본 법원에 자신의 특허권을 돌려달라고 2천만 달러를 청구하여 맞소송을 걸게 된다. 소의 쟁점은 '회사의 청색 LED 제조법은 나카무라 슈지가 100% 개발한 것'이라는 나카무라 슈지의 주장과, '그 기술은 양산 과정에서는 불필요한 기술'일 뿐이라는 니치아 화학공업의 주장. 이것이 그 유명한 404 특허 사건이다.

소송 결과 도쿄 지방재판소는 나카무라 슈지의 공헌도를 50% 인정하여 그에 해당하는 금액인 2억달러[10]를 지급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참고로 이는 나카무라 슈지가 청구한 금액의 10배이다. 그러나 이후 진행된 항소에서 도쿄 고등재판소는 고작 810만달러[11]를 지급하라는 판결을 내렸고 이 돈은 고스란히 법적 공방 비용으로 지출된다.

니치아 화학공업은 소송이 끝난 2006년, 나카무라 슈지의 특허권을 '양산 과정에서는 불필요한 기술'이라는 이유로 특허를 폐기해버리는 보복성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나카무라 슈지는 항소심 후 '일본의 사법은 부패했고 신뢰할 수 없다'[12] 라고 비판하는 기자회견을 열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노벨상 수상 후 2015년에 한 강연[13]에서 일본 사법제도의 문제점을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그와는 별도로 자신의 연구를 크게 지원해준 오가와 노부오 전 사장은 존경하는 사람이라고 밝혔다. 제 아무리 뛰어난 두뇌와 훌륭한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다고 한들 그것을 실현시킬 돈과 인재를 보는 눈이 없으면 소용이 없기 때문에 오가와 사장의 지분이 결코 적지 않다. 이와 같은 사연이 있어 법적 공방으로부터 수년의 시간이 흐른 노벨상 시상식 소감에서도 오가와 노부오 사장에 대한 감사 인사를 했다. 참고로 오가와 노부오는 2002년에 사망하였다.

이후 "일본을 사랑하지만 일본식 시스템에 실망을 느껴"[14] 미국으로 떠난 나카무라 슈지는 2005년경 "미국 대학에서 교수의 가장 중요한 역할 중 하나는 연구비를 취득하는 일이다. 내 연구 분야의 경우 연구비의 절반 이상이 미국 정부, 미군으로부터 나온다. 하지만 그것을 지원을 받기 위해서는 시민권이 필수적이다."라는 이유로 미국 시민권을 획득, 일본 국적을 포기했다. 일본은 이중국적을 인정하지 않으므로 [15] 자연스럽게 일본 국적이 소실되어 미국인이 되었다.[16]

2.3. 노벨상 수상

법적 공방으로부터 수 년 후인 2014년, 청색 LED 발명의 업적으로 노벨물리학상 수상의 영광을 안았다. 기존 조명 장치인 백열등은 공급되는 에너지 중 95%가 열에너지로 버려지고 단 5%만이 빛의 형태로 에너지를 발산하게 되는데, LED 조명이 기존 백열 조명을 대체함으로써 탄소 저감을 국가 단위로 실현할 수 있고, 이를 환산할 경우 전세계의 자동차가 내뿜는 탄소 50%를 저감한다는 것이 밝혀져 노벨상을 수상하게 되었다. 수상 후 나카무라 슈지는 노벨상 상금 중 절반을 모교인 도쿠시마대학에 기부하였다.링크

참고로 도쿠시마 대학은 지방 국립대에서 노벨상 수상자가 나온 국립대로 지위가 상승했으며, 도쿠시마 대학의 LED 관련 기술 연구는 2020년 현재까지도 상당히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편이다. 관련된 학부는 이공학부 이공학과 정보광 시스템 학과의 광학계. 2016년경부터 이학부와 공학부가 합쳐졌기에 현재는 이공학부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도쿠시마 대학 이공학부 건물 내부에는 나카무라 슈지 박사에 대한 기사들이 수상후 6년이 지난 2020년까지도 여전히 붙어있다.

이후 "좋아하는 일만 해라" 라는 자서전을 출간하기도 하였다.

3. 수상 경력


[1] 지금의 이요정.[2] 박사학위논문 InGaN 고휘도 청색 LED에 관한 연구 (原題:InGaN高輝度青色LEDに関する研究 (1994)).[3] 출생 당시 요츠하마촌[4] 노벨 물리학상 수상 관련 인터뷰에서, 수학은 중요하다는 취지의 발언을 한 바 있다.(해당 유튜브 링크(노벨재단, 영어))[5] 2016년 기준으로 일본 내 대학 순위 28위[6] 교토대학에도 지원했지만, 단 1점이 부족해서 불합격되었다고 한다.[7] 유기 화합물을 증기 형태로 쏴 기판 위에 금속 막을 증착시키는 장치[8] 논문박사 제도. 일본에서 논문박사는 박사학위번호에서 을(乙)호박사로 분류되고 과정박사(갑(甲)호)와 구분된다. 참고로 2019년 노벨화학상 수상자인 요시노 아키라도 논문박사 제도로 오사카대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9] 해당 유튜브 링크(일본 ANNnewsCH, 일본어) . 해당 질문 및 답변 자체는 영어로 이루어졌다.[10] 200억엔[11] 8억엔[12] 해당 유튜브 링크(일본 ANNnewsCH, 일본어). 상당히 격앙된 어조로 발언했다.[13] 유튜브 링크,일본어[14] 2014년 10월 조선일보 인터뷰[15] 정확히는 1984년 12월 31일까지 출생한 선천적 이중국적자에게만 허용하는데, 나카무라 슈지는 여기 속하지 않는다.[16] 2014년 10월 withnews 인터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