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12px" | <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ececec,#ccc><tablebgcolor=#ececec,#ccc> |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관련 문서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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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젝트 | 우란프로옉트 | ||
생애 | 생애 | ||
소속 | 뮌헨 대학교 괴팅겐 대학교 | ||
관련 학자 | 닐스 보어 · 막스 보른 ·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 막스 플랑크 · 아르놀트 조머펠트 | ||
저서 | 부분과 전체 · 물리와 철학 |
{{{#cd9f51 {{{#!wiki style="padding: 5px 0 0; margin:-5px -10px; background: linear-gradient(to right, #582d2d, #663334, #663334, #582d2d)" {{{#!wiki style="display: inline-table; min-width:25%; min-height:2em" {{{#!folding [ 20세기 ] {{{#!wiki style="margin:-5px -1px -5px; word-break:normal" {{{#555,#aaa | <rowcolor=#cd9f51> 1901 | 1902 | 190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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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베르너 카를 하이젠베르크 Werner Karl Heisenberg | |
출생 | 1901년 12월 5일 |
독일 제국 바이에른 왕국 뷔르츠부르크 | |
사망 | 1976년 2월 1일 (향년 74세) |
서독 바이에른주 뮌헨 | |
국적 | [[독일| ]][[틀:국기| ]][[틀:국기| ]] |
직업 | 이론물리학자 |
분야 | 입자이론(양자역학) |
학력 | 뮌헨 대학교 (물리학 / 1923년 박사) 괴팅겐 대학교 (1924년 하빌리타치온) |
지도교수 | 아르놀트 조머펠트 막스 보른[1] |
수상 | 마테우치 메달 (1929) 버나드 메달 (1930) 노벨물리학상 (1932) 막스 플랑크 메달 (1933) 왕립학회 외국인 회원 (1955) 국립과학원 외국인 준회원 (1961) |
배우자 | 엘리자베스 슈마허 (1937년 결혼) |
자녀 | 7명 |
종교 | 개신교(루터회) |
서명 |
[clearfix]
1. 개요
독일 태생의 이론물리학자. 20세기 초에 양자역학이 탄생하는데 일조한 핵심 물리학자[2] 중 하나로서, 이런 업적으로 불과 31살에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했다. 그가 발표한 불확정성 원리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과 더불어 물리학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조차 그 명칭은 대강 알 정도[3]로 유명하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나치가 추진한 핵개발 계획인 우란프로옉트에 참여[4]하는 등, 과학자로서의 명암이 매우 뚜렷하다.2. 생애
하이젠베르크는 1901년 12월 5일에 독일 뷔르츠부르크에서 태어났다. 1920년부터 4년 동안 뮌헨-루트비히-막시밀리안 대학교와 괴팅겐-게오르크-아우구스트-대학교에서 물리학과 수학을 공부했으며[5], 1923년에 뮌헨에서 박사 학위를 획득하고 1924년에 괴팅겐에서 교수 자격증을 획득했다. 그 후 1927년부터 1942년까지 라이프치히 대학교의 물리학과 교수로 활동했다.
20세기 초의 양자역학 확립에 큰 공을 세웠으며, 특히 중요한 업적으로는 그 유명한 불확정성 원리가 있다. 또, 양자역학의 기술 방법인 '행렬역학'을 고안해 냈는데 이 업적으로 겨우 31세라는 젊은 나이에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하게 된다.[6][7] 나중에 폴 디랙에 의해 행렬역학은 에르빈 슈뢰딩거의 파동역학과 수학적으로 동일하다는 점이 밝혀진다. 똑같은 현상을 서로 다른 방법으로 기술한 셈이다.
그 외에도 원자핵이 중성자와 양성자로 구성된다는 이론도 하이젠베르크가 주창했고, 다체문제나 강자성 연구 등 중요한 연구를 많이 했다. 그러나 실험에서는 빵점짜리 과학자였다.[8] 실제로 이 때문에 박사 학위를 받지 못할 뻔했다. 박사학위 자격 구두 시험에서 감독관이었던 실험물리학자 빌헬름 빈(Wilhelm Wien)[9]이 모두 실험물리 문제를 내는 바람에 한 문제도 대답하지 못했고, 같이 감독관으로 있던 이론물리학자 아르놀트 조머펠트(Arnold Sommerfeld)가 하이젠베르크가 대단한 천재라고 바득바득 우겨서 겨우 합격할 수 있었다.[10][11]
이러한 조머펠트는 하이젠베르크의 학부 시절 지도교수이기도 했는데, 그는 하이젠베르크의 재능을 일찍 눈치채고 신입생 시절부터 수준 높은 교육을 시켰으며, 보어나 아인슈타인과 만날 기회를 만들어주기도 했다. 조머펠트의 문하는 후일 노벨상 수상자 7명을 배출하는 등 뛰어난 인재가 모이는 곳이었고 하이젠베르크는 나중에 '조머펠트에게 물리학에 대한 희망을 배웠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12][13][14] 조머펠트의 도움으로 보어의 세미나에 참가[15]한 하이젠베르크는 세미나에서 보어에게 상당히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고, 보어는 여기에 깊은 인상을 받는다. 보어는 세미나가 끝난 후 하이젠베르크와 함께 산책을 하면서 하이젠베르크가 제기한 문제들에 대해 토론했고, 나중에 자기와 함께 연구하자고 제안한다. 하이젠베르크는 입학한 지 2년이 채 못 되는 대학생이었지만, 아인슈타인에 버금가는 위대한 학자 보어의 눈에 든 것이다. 한편 아인슈타인과의 만남은 그 후 몇 년 뒤에 이루어졌는데 하이젠베르크는 이때의 토론에서 훗날 자신에게 노벨상을 안겨줄 불확정성 원리에 대한 결정적인 힌트[16]를 얻는다. 그 내용은 하이젠베르크의 저서 부분과 전체에 자세히 나온다.[17]
음악에도 조예가 깊어 피아노 연주 실력[18]이 수준급이었다고 하며 어려서부터 상당한 수준의 철학 교육도 받았다. 이 때문인지 양자역학의 철학적 문제에도 큰 관심을 기울였다. 때때로 하이젠베르크를 물리학자이자 철학자로 소개하는 인명 사전도 있을 정도.[19] '물리학과 철학'[20] 이라는 책을 내기도 했으며, 자서전격인 '부분과 전체'에서는 양자역학에서 제기되는 온갖 철학적, 윤리적, 사회적, 정치적, 종교적 주제가 다루어진다.[21]
종전 뒤 나치 부역 혐의[22]는 무죄로 처분되었고, 1946년부터 1970년까지 막스 플랑크 연구소(Max-Planck-Gesellschaft)에서 소장으로 일했으며 1976년 신장암으로 인해 75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늘그막에 두 학생이 하이젠베르크에게 찾아와 자신들의 이론에 대한 의견을 물은 적이 있다. 그는 그들에게 그딴 쓰레기 이론은 집어치우라고 말했고, 학생들은 낙심하여 돌아갔다. 그 "쓰레기 같은 이론"은 힉스장에 관한 이론이었고, 학생들의 이름은 힉스 이론을 제안한 제럴드 구럴닉 박사와 칼 헤이건 박사다.
또한 생전에 쿼크에 대하여 회의적 입장을 가졌던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23]
그의 손자인 베냐민 하이젠베르크는 영화감독을 하고 있다.
3. 우란프로옉트 참여
자세한 내용은 우란프로옉트 문서 참고하십시오.미국이 주도한[24] 핵개발 계획이 맨해튼 계획이라면, 나치 독일이 추진한 핵개발이 바로 우란프로옉트였다. 나치 독일의 핵개발은 1939년 경부터 시작했으니, 영국(1940년)이나 미국(1939~1941)보다 일찍 시작했다.
하이젠베르크는 불확정성 원리 발견 등으로 그 역량을 인정받아 우란프로옉트의 중심 인물이 되었다.[25] 그리고 당시 미국에선 하이젠베르크의 명성에 힘입어 나치의 원자폭탄 제조 가능성을 과대평가하기도 했다. 그러나 종전 후 밝혀진 바에 의하면, 하이젠베르크는 고의든 아니든 당시 핵연구에 관한 실수란 실수는 모두 저질렀다고 한다.[26] 어쨌든 나치 독일이 패망할 때까지 핵무기를 끝내 완성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27]
카이저 빌헬름 협회에서 우란프로옉트하에 원자로 연구와 핵무기 제조 가능여부에 대해서 하이젠베르크와 오토 한[28]과 같은 과학자들이 연구를 시작했다. 1942년 6월 4일 나치 수뇌부 앞에서 원자력의 군사적 의미를 밝힐 때, 그들은 핵무기 제조를 위해서 우라늄235가 필요하며, 자연계에서 이를 정제하여 농축하는 것이 기술적으로 어려우며, 너무 비용이 많이 든다고 설명했다.[29] 하지만 그 자리에서 그들이 연구 중에 발견한 플루토늄에 대해서는 일체 언급을 하지 않았다.
애초에 하이젠베르크와 나치 독일이 핵무기를 만들 능력이 없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링크. 당시 전황이 독일에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었기 때문에 나치는 핵 무기 개발에 큰 관심이 없었고, 또한 하이젠베르크를 비롯한 대다수의 연구진들이 실험이나 엔지니어링에는 무지(혹은 무관심)한 이론물리학자였다.[30] 심지어 하이젠베르크는 핵 개발에 중요한 존재인 원자로[31]의 필요성조차 그다지 인지하지 못했다고 한다. 또한 우란게획의 핵심은 핵을 이용한 폭탄이 아니라 핵분열을 이용한 에너지 획득이었다. 이는 전쟁기간 내내 나치독일이 에너지 수급문제에서 고생했으며 심지어 알베르트 슈페어의 게르마니아 계획까지도 차질이 빚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에너지가 욕심나서 소련으로 쳐들어가다가 코카서스 유전지대로 방향을 틀었을 정도이니 질량대비 거의 무한하다 할 수 있는 핵 에너지는 나치에게 굉장히 매력적인 분야이고 이것을 전함에 실을 수 있을 정도로 소형화 할 수 있다면 전황에 도움을 줄 수 있을 거라 믿었다.
하이젠베르크가 일부러 사보타주를 했다는 설도 있는데, 전후에 그는 원자로 연구비를 타먹으면서 핵무기 개발은 기술상이나 비용상의 이유로 어렵다는 핑계를 대며 시간끌기를 했다고 주장했다. 또한 자신의 스승 닐스 보어에게 슬쩍 나치의 핵폭탄 개발 정보를 넘겼고 이를 닐스 보어가 훗날 연합국으로 도망쳐서 독일의 핵폭탄 개발 현황에 대해 알려줄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32] 이에 관련해 인하대학교 차동우 교수의 '교양 물리'란 책에서는 연합군이 '나치가 핵무기를 먼저 만들지도 모른다'는 아인슈타인의 편지를 받고 부랴부랴 핵무기를 만들어서 그걸로 추축국에게 항복을 받고 나치 독일의 과학 연구소를 습격해 봤는데, 다행히도 나치 독일의 과학부 장관이었던 하이젠베르크가 양심적인 사람이라서 핵무기를 일부러 만들지 않고 있었다고 서술하기도 했다. 당시에도 많은 물리학자들은 핵개발이 이루어지면 엄청난 위력을 발휘할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미국의 핵개발 계획인 맨해튼 계획도 독일이 먼저 핵을 개발하면 연합국 측이 크게 밀릴 것을 예상하고 시작한 것이다.
하이젠베르크의 책 《부분과 전체》를 보면 이 부분에 대한 설명을 볼 수 있는데, 애매한 중언부언이 많아 그대로 신뢰하기는 힘들다. 그러나 이 책에서 하이젠베르크는 나치에 일관되게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자신을 찾아온 나치 당원 대학생에게 나치의 유대인 박해를 비판하거나, 유대인에 동정적이던 독일 과학자인 막스 플랑크[33]에게 어떻게 하면 히틀러를 막을 수 있는지 자문을 구하기도 했다. 그는 다른 동료 과학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진지하게 이민을 고민했다고 서술한다.[34]
하이젠베르크의 나치 부역 여부 및 그 진정성에 대해서는 아직 논란이 많고, 특히 독일 과학사 연구가와 미국 과학사 연구가 사이의 좋은 논쟁거리이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가 나치에 부역했다는 사실 자체에는 동의한다. 다만 1992년 영국이 보관 중이던 제2차 세계 대전 직후 팜홀에서 포로로 억류되었던 독일 과학자들의 녹취록이 공개되었는데, 여기서 하이젠베르크 및 그의 동료들은 나치에 적극적으로 협력하진 않았다고 증언하고 있다.[35]
물론 이 녹취록만으로 그가 무죄였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연합군이 도청용 마이크와 녹음기를 이용해 포로들의 대화 내용을 도청, 녹취한다는 것은 이미 1940년 10월 영국 포로수용소를 탈출한 프란츠 폰 베라에 의해 상세히 보고되었으며 이와 관련해 국방군 방첩부는 1941년 6월 11일, 포로수용소에 수감될 시에 도청에 주의하라는 행동지침을 전군에 하달했다. 하이젠베르크가 포로로 억류된 시점에서는 최말단 사병부터 고위 장성까지 도청될 위험에 대해 알고 있었다.
허나 대부분의 포로들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심지어 장성급들까지) 금방 경계를 풀고 동료 혹은 영국군이 심어놓은 프락치[36]를 상대로 군 기밀부터 자기가 저지른 전쟁범죄까지 술술 불긴 했다. 처음에는 정훈용 영화 '철조망에 갇힌 군인들'에서 본 내용을 서로 상기시켜주며 도청에 조심하자고 하다가 이내 경계를 풀고는 자신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수다를 떨고는 했던 것이다. 숨겨진 도청용 마이크를 향해서 말이다. 하지만 하이젠베르크는 일반 병사들과는 입장이 다르긴 했다. 도청의 위험에 대해서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고 자기가 만들려던 무기가 얼마나 끔찍하고 용납되기 어려운 물건인지도 자각하고 있던 그가 동료들과 함께 6개월간 철저하게 연기를 했을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하지만 하이젠베르크 이하 독일 핵물리학자들이 일본에서 폭발한 핵폭탄의 폭발 규모만 가지고도 사용된 핵물질의 양을 가늠 할 수 있을 정도로 정통 했었고 핵이 전쟁에 사용 될 수 있다고 생각한 점은 방향이 잘못되었을뿐 기본 전제는 옳았다는 결과를 도출한다. 게다가 많은 이들이 간과하는 것이 미국 정도나 되니까 핵폭탄을 만들어 시험하고 실제로 투하 할 수 있었다라는 것이다. 하이젠베르크의 경우는 한 번 터지고 말 폭탄에 그렇게 많은 인력과 자금과 에너지를 갈아넣는다는 발상을 하지 못했다. 그만큼 나치독일의 전쟁 경제사정이 빡빡했기 때문이다.
하이젠베르크의 경쟁심을 생각한다면 독일 사정으로 충분히 개발 할 수 있는 폭탄을 개발하지 않은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었다. 다만 만들 가능성이 아주 작아서 외면한 것이지 만약 미국처럼 대규모 경제를 돌릴 여건이라면 독일도 어떤 형태로든 폭탄에 도달했을 것이다. 또한 미국과 독일의 사정이 다른것이 만약 독일이 핵을 쏘아야 한다면 그것을 자기네들이 정복하고 다스릴 땅에 떨어질 것이고(당시 항공기 성능으로는 초장거리 전략폭격은 고려대상이 아니었다.), 미국은 남의 나라 땅에 떨구는 것이라 폭탄사용에 대한 주저함이 적었던 것이다.[37] 하이젠베르크가 의도했든 아니든 나치 독일의 우란프로옉트는 결국 실패했다.
4. 저서
4.1. 부분과 전체
아마 대학이나 대학원에 다니는 이과생일 경우에 부분과 전체라는 그가 집필한 책을 제목[38]만이라도 들어 봤을 것이다. 이 책은 그와 그의 지인이 여러 주제를 가지고 토론을 하는 방식으로 쓰여져 있고, 과학 외적으로 하이젠베르크의 사생활에 대해서도 기술되어있다.이 책은 하이젠베르크가 대학에 입학하기 전 18살때부터 노년까지를 회상하며 쓴 자서전이다 보니 여러 명의 기라성같은 과학자[39]들이 나오고, 그 과학자들의 이론과 사상, 철학적 입장과 그 당시의 시대인 20세기 초반의 독일과 유럽 및 미국의 정치 상황까지 상세히 나온다. 따라서 이 책을 읽기 전에 2차 세계대전에 대한 역사적 상황과 양자역학에 대한 기초적인 정성적 내용 정도는 알고 읽는 것이 좋으며, 그렇지 않으면 읽기 어려운 책이다.[40]
그러나 이 책만으로 하이젠베르크의 삶을 모두 알기에는 부족하다. 그가 왜 교수가 되었는지[41], 노벨물리학상 수상 당시의 그가 어떤 상태였는지에 대해서는 서술되어 있지 않다.
한국에서는 서커스 출판사에서 정발되었는데, 유영미 번역가가 번역했으며, 김재영 서울대 물리학과 교수가 감수를 맡았다. 또한 지식산업사에서 출간한 고려대 김용준 교수가 번역한 책도 있다.
4.2. 물리와 철학
5. 이야깃거리
- 대학 동창인 볼프강 파울리와는 매우 친했다고 한다. 그의 저서인 부분과 전체에 따르면 이와 관련한 일화가 나온다. 볼프강 파울리는 죽을 때까지 그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 그의 스승으로는 닐스 보어, 조머펠트, 막스 보른이 있다.[42] 그중 닐스 보어와 특히 친밀하게 지냈는데, 그와 함께 여행을 가거나 휴가를 보냈다고 한다. 그러나 2차 대전 중 잠시 나치의 포로로 있던 유대인인 닐스 보어와 그가 나눈 대화는 나치의 핵무기와 관련한 것이었는데 외부에 알려지지 않아 영원한 비밀로 남겨져 있다. 이에 관해서는 주로 두 가지의 설을 논한다. 첫 번째 가설은 그가 보어에게 나치의 핵 개발이 거의 완성되었으니 맨해튼 계획에 참여하지 말고 미국과 유럽을 제외한 다른 나라로 이민을 가라는 가설이다. 두 번째 가설은 그가 보어에게 자신이 나치의 핵 개발을 의도적으로 늦출테니 빨리 맨해튼 계획에 참여하라는 가설이다. 두 가설의 공통점은 그가 스승인 닐스 보어의 안전을 생각했다는 것이다.
- 젊은 시절 청년운동에 가입하여 활동했다. 젊은 대학생들끼리 하이킹을 하거나 노동자들에게 과학 강연을 하는 등, 오늘날 '청년운동'이라면 연상하기 쉬운 거창한 정치-사회적 가치에 관한 것보다는 소박한 일들을 주로 하였다.
- 의외로 나치 독일이 주관한 군사훈련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고 한다. 특히 기관총 사격을 좋아했으며, 군 복무에 대해선 '등산에 불과하며, 단지 부사관들의 존재 때문에 조금 힘들 뿐' 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 미국의 시리즈물 '브레이킹 배드'의 주인공 월터 화이트가 사용하는 가명 '하이젠버그'는 하이젠베르크의 영어 발음이다. 해당 작품이 크게 히트한 덕분에 물리학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한테도 인지도가 좀 올라갔다.
- 바이오하자드 빌리지의 악역 칼 하이젠베르크의 이름도 이 사람의 이름에서 따왔다.
- 부인인 엘리자베스 슈마허는 영국의 경제학자 에른스트 프리드리히 슈마허의 여자형제이다.
[1] 하빌리타치온 지도 교수[2] 코펜하겐 학파의 3대장 중 하나다. 그 3대장은 닐스 보어, 막스 보른, 베르너 하이젠베르크다. 이들 모두가 노벨상을 수상했다.[3] 물론 그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대충 자연이 불확정하다는 식으로 이해한다. 이러한 인식은 상대성 이론도 비슷하다. 이런 사례 중 유명한 것은 엔트로피, 카오스 등이 있다.[4] 핵개발을 일부러 실패했다 주장하여 나치부역혐의는 무죄처분을 받았다. 자발적 참여라기보다는 전시 상황에 따른 강제 징용에 가깝다.[5] 이때 뮌헨 대학교에서 한 살 위인 볼프강 파울리를 만나 친해지게 된다.[6] 하이젠베르크는 이 엄청난 걸 만들어내고도 그게 수학에서 말하는 '행렬'이라는 걸 잘 몰랐다고 한다. 그러다가 수학자 출신 물리학자 막스 보른이 이걸 알아보고 정리하여 파스쿠알 요르단과 함께 논문을 출판하게 된다.[7] 행렬역학이 수학적 엄밀성을 갖추게 된 데에는 막스 보른의 역할이 컸지만, 하이젠베르크만 노벨상을 수상하게 되어 막스 보른은 이를 무척이나 아쉬워했다. 하지만 결국 나중에 그도 다른 업적으로 노벨상을 수상한다.[8] 우란프로옉트에서 후술하겠지만, 바로 이 점이 그의 경력에 큰 영향을 주었다.[9] 흑체복사에서의 변위 법칙 발견으로 노벨물리학상 수상[10] 결국 빈은 조머펠트의 주장을 받아들여서 하이젠베르크의 박사 학위 자격을 인정했지만, 비꼬는 말 한마디를 남겼다. '대체 이론물리학 하는 놈들은 뭘 하는 놈들이길래 시대를 뛰어넘은 천재가 매년 한 명 이상씩 나오는 거지?'.[11] 하이젠베르크는 불과 31세에 노벨상을 탄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실제로 대단한 천재가 맞기는 맞다.[12] 대학에 입학할 무렵 하이젠베르크는 수학과 물리학 사이에서 고민했었다고 한다.[13] 처음에는 원주율이 초월수임을 증명한 것으로 유명한 수학 교수 린데만을 찾아가 본인이 독학으로 바일의 저서인 '공간 시간 물질'을 공부했다고 말했으나, 린데만은 비꼬는 말투로 '그 책을 다 공부할 정도면 수학을 공부할 필요가 없겠다'고 대답했다. 이 대답은 다양하게 해석이 가능한데, 우선 그 정도 어려운 책을 학부초년생인 하이젠베르크가 독학으로 마쳤다는 말에 불신의 의미로 비꼬는 대답을 한 것일 수도 있고, 바일의 책이 순수수학이 아닌 수리물리학 서적이었기 때문에 그 책을 흥미롭게 읽었다면 수학이 아닌 물리학으로 관심이 쏠린 것이니 수학을 전공해봤자 소용 없을 거라는 의미였을 수도 있다. 아니면 린데만 자신은 순수 수학자였으므로 하이젠베르크의 말에 반감을 가져서 비뚤어진 대답을 했을 수도 있는데, 애초에 하이젠베르크가 린데만을 방문한 목적이 대학원생 이상을 대상으로 하는 린데만의 세미나에 학부생인 자신도 참석하게 해달라고 주제 넘는 부탁을 하기 위함이었기 때문이었다. 반면에 조머펠트는 바일의 저서를 공부했다는 하이젠베르크의 대답에 그 정도면 필요한 매우 높은 수준의 수학적 능력을 성취한 것이라고 인정해주었다. 자세한 내용은 하이젠베르크가 쓴 부분과 전체에 상세하게 나온다.[14] 20세기 초에 워낙 쟁쟁한 물리학자들이 많아 조머펠트는 상대적으로 덜 유명하지만 그도 절대 무시 못할 업적을 남긴 사람이다. 또한 젊은 학생들의 선생으로서도 매우 뛰어났다. 아인슈타인은 조머펠트가 이 점에서 '경탄할 만하고 비상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이야기했다. 이렇게 뛰어난 학생을 지도한 스승으로서 유명한 경우는, 수학자인 카를 바이어슈트라스가 유명하다.[15] 형편이 어려웠던 하이젠베르크에게 조머펠트가 세미나 장소까지의 기찻값까지 대주었다고 한다. 한편 하이젠베르크는 세미나 장소에서 자신의 물건이 거의 모두 들어있는 가방을 도둑맞아서 돌아온 후에 알바 비슷한 일을 하며 한참 고생하기도 했다.[16] 이론이 무엇을 실험할 수 있는지를 결정한다는 취지의 말이었다.[17] 물리에 대해서 잘 모른다면, 알기 힘든 어려운 내용이다.[18] 그의 부인도 피아노 연주로 꼬셨다는 일화가 있다.[19] 사실 당시 유럽 출신의 다른 많은 물리학자들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보어는 철학자라고 해도 좋을 만큼 양자역학의 철학적 의미에 대해 깊이 연구했다. 하이젠베르크가 나중에 자신의 스승들에 대해서 '조머펠트에게는 물리학에 대한 희망을, 보른에게는 수학을, 보어에게는 철학을 배웠다'는 말을 남겼을 정도. 슈뢰딩거는 쇼펜하우어와 인도 철학에 조예가 깊었다. 슈뢰딩거의 저서 '정신과 물질'을 보면 그의 철학적 내공을 짐작할 수 있다. 아인슈타인이 철학자 마하의 이론에서 상대성 이론에 대한 영감을 얻은 이야기는 매우 유명하다. 한편 미국의 물리학자들은 이런 철학적 성향이 좀 적고 대체로 실증주의적 경향을 보인다.[20] 물리학과 철학은 사유적인 측면에서 깊은 관계가 있다.[21] 그래서 자서전치고는 내용이 매우 어려운 편이다.[22] 나치 독일의 핵개발 계획인 우란프로옉트에 참여[23] 이는 생전 양자역학에 회의적이었던 알베르트 아인슈타인과 비슷하다.[24] 영국, 캐나다도 참여. 연합국 사이에서도 핵개발은 극비였다. 소련에게도 비밀이었는데, 스탈린은 스파이를 동원해 어느 정도의 정보는 이미 알고 있었다.[25] 다만, 맨해튼 프로젝트의 과학자들을 사실상 이끈 오펜하이머와 같은 지위는 아니라, 대표 과학자였다.[26] 여기에는 후술되어있듯 개발을 지연시키고자 의도적으로 그랬다는 사보타주설과 진짜 무능력설 등 여러 설들이 있다.[27] 다만, 맨해튼 계획도 나치 독일 패망 이후 결실을 맺을 수 있었다. 1945년 7월에 첫 트리니티 실험이 성공했고, 그로부터 불과 1달도 안되어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뜨릴 수 있었다.[28] 핵분열을 최초로 실험.[29] 실은 벨기에에서 4천 톤의 우라늄 광석도 획득했고(물론 이걸 농축화시키지 않으면 의미가 없긴 하다), 점령한 노르웨이의 수력발전소에서 추출할 수 있는 중수(핵분열시 나오는 중성자의 감속제로 쓸 수 있다) 탱크도 있었지만 이 중수 탱크는 2차대전 당시 연합군 측에서 특공대를 보내 폭파했으며(첫 번째는 영국인들, 두 번째와 세 번째로는 노르웨이인들 포함) 중수를 이동하는 배도 같이 수장했다.[30] 실제로 하이젠베르크는 박사학위 자격 구두 시험의 실험물리와 관련한 문제에서 0점을 받았다. 사실 이론 물리학자 중에 실험을 못하는 경우는 드문일이 아니다. 파울리가 대표적이며 맨해튼 계획의 책임자인 오펜하이머도 실험에는 재능이 없었다.[31] 원자로가 있어야 핵폭탄에 개발에서 가장 핵심적인 연쇄반응제어와 임계질량 측정등이 가능하다. 또한 증식로를 이용 할 경우 우라늄238의 분열을 통한 플루토늄의 획득이 가능하다.[32] 다만 이점에 대해서는 닐스 보어의 주장은 상반되어 있어 정말로 하이젠베르크가 닐스 보어에게 고의로 핵폭탄 개발에 대한 정보를 누설했는가는 하이젠베르크의 핵무기 개발 적극성에 관한 논란의 쟁점이 되고 있다.[33]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아들이 사형당했다.[34] 전반적으로 하이젠베르크의 인생과 그의 주변 사람들을 살펴본다면 그가 딱히 히틀러에게 호의적일 이유는 없다. 그에게 가장 중요한 스승인 닐스 보어는 어머니가 유대인이었고, 그의 조교 또한 유대인이었으며, 그와 함께 일하던 많은 독일 과학자들이 유대인이었다. 또한 그는 젊었을 적 유대인이라고 시달린 아인슈타인의 강연을 들으러 가고 그와 계속해서 학문적 교류를 한 것과 아인슈타인을 높이 평가한 점을 보아 유대인에 대해서 악감정은 없었던 듯 하다.[35] 여담으로 데이비드 보더니스의 교양 과학서 《E=MC^2》에서는 하이젠베르크가 핵개발에 열성적으로 뛰어든 비윤리적인 과학자로 묘사되지만 해당 항목에서도 알 수 있듯 이런저런 설 중 하나일 뿐 정설은 아니다.[36] 정보를 캐내기 위해 일부 협조적인 독일군 포로를 활용했다.[37] 실제로 미국에서 꾸려진 원자폭탄 폭격위원회에서 피폭후보지를 정할때 도심에 산이나 언덕이 없어 폭발 효과를 감소시키지 않고,폭발의 효과와 위력을 충분하게 관찰하기 위해 미군의 공습을 적게 받아 피해가 적을 곳을 골랐다고 한다.[38] 제목에 한정한다면, 이 제목 자체는 그의 불확정성 원리와 더불어 매우 잘 알려져 있다.[39] 아인슈타인, 보어, 파울리 등등[40] 특히 과학적인 내용을 수식이나 그림 없이 인물 간의 대화로만 서술하다 보니 아무런 배경 지식 없이 읽으면 무슨 소리인지 알기 어렵다.[41] 하이젠베르크는 20대라는 젊은 나이에 라이프치히 대학의 교수로 임용되었다.[42] 이들 세 스승 가운데 보어와 보른은 노벨상을 받았고, 특히 보어는 맨해튼 계획에도 동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