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d9f51 {{{#!wiki style="padding: 5px 0 0; margin:-5px -10px; background: linear-gradient(to right, #582d2d, #663334, #663334, #582d2d)" {{{#!wiki style="display: inline-table; min-width:25%; min-height:2em" {{{#!folding [ 20세기 ] {{{#!wiki style="margin:-5px -1px -5px; word-break:normal" {{{#555,#aaa | <rowcolor=#cd9f51> 1901 | 1902 | 190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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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피에르 퀴리 Pierre Curie | |
출생 | 1859년 5월 15일 |
프랑스 제2제국 파리 | |
사망 | 1906년 4월 19일 (향년 46세) |
프랑스 제3공화국 파리 | |
묘소 | 팡테옹 |
국적 | 프랑스 제2제국1859~1870 프랑스 제3공화국1870~1906 |
직업 | 물리학자, 화학자 |
학력 | 파리 대학교 |
수상 | 데이비 메달 (1903) 노벨물리학상 (1903) 마테우치 메달 (1904) 엘리엇 크레슨 메달 (1909) |
배우자 | 마리 퀴리 (1895년 결혼) |
자녀 | 이렌 졸리오퀴리 이브 퀴리 |
서명 |
[clearfix]
1. 개요
아내인 마리 퀴리와 함께 찍힌 피에르 퀴리의 사진 |
프랑스의 물리학자. 그 유명한 마리 퀴리의 남편. 그러나 단순히 유명인의 남편이 아닌 그 스스로도 훌륭한 과학자였다. 학자로서의 경력 또한 피에르가 선배였고, 생전에는 오히려 아내 마리가 남편의 명성으로 덕을 보는 입장이었다. 단지 불의의 사고로 일찍 세상을 떠나면서 더 오래 활동한 아내의 명성에 가려졌을 뿐이다.
라듐은 범죄자들 손에 들어가면 위험한 물질이 될 수도 있습니다.[1] 그래서 우리는 오늘 바로 이 자리에서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합니다. 자연의 비밀을 캐는 것이 인류에게 얼마나 도움이 될까. 그 비밀을 안다고 하더라도 제대로 활용할 수 있을 만큼 인류는 성숙한가?
- 1903년 노벨물리학상 시상식에서
- 1903년 노벨물리학상 시상식에서
2. 일생
파리에서 태어난 피에르 퀴리는 16세에 파리 대학교에 입학, 수학과 물리학을 전공하였다.19살 때 연인을 잃은 충격으로 평생 독신으로 살겠다고 결심했지만 35세의 늦은 나이에 8살차였던 마리와 사랑에 빠졌다. 폴란드 출신 이민자였고 여성이었던 그녀를 프랑스 과학계의 기득권들이 인정하지 않았을 때 그녀의 곁을 지켰다. 노벨물리학상도 원래는 퀴리 부부 공동의 연구였음에도 남편인 피에르만 수상 대상자였다가, 이를 안 피에르가 끈질기게 청원을 내서 부부 공동 수상으로 변경되었다고 전해진다.
1895년 마리와 결혼하고, 서로 깊이 사랑하며 행복하게 살았다. 마리 퀴리가 남긴 '내 사람 피에르 퀴리'에 따르면 피에르 퀴리는 자상한 남편인 동시에 자연과 과학의 꿈을 사랑하며 연구에 정진했던 성실하고 독창적인 과학자였다고 언급한다.
노벨상 수상 후 파리 대학교 교수에 위촉되었으나, 1906년 4월 19일 아침에 대학으로 출근하던 중 교통사고로 급사하였다. 향년 46세. 당시 비가 와서 앞이 잘 안 보였는데, 술이 덜 깬 마부가 마차 바퀴로 그를 깔고 지나가서 현장에서 즉사한 것.
이후 마부는 '어느 미친 놈이 자살하려고 뛰어들었다.'고 횡설수설했는데, 사고현장에 있던 어느 사람이 "신문에서 본 노벨상 수상자를 닮았다"고 증언하면서 경찰이 와서 소지품을 보고 피에르 퀴리임을 확인하자 사람들이 몰려와서 그 마부를 두들겨팼다고 한다.[2] 경찰들이 막지 않았으면 죽었을 것이라고. 이 마부는 피에르 퀴리를 죽인 살인죄로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았다. 그마저도 사람들이 참수형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엔 단두대가 아직 현역으로 사용되고 있던 시절이었다. 다만 고의범이 아닌 과실범이었기에 무기징역으로 그쳤던 것으로 보인다. 이 마부는 사건 22년 후인 1928년 옥사해 대가를 치렀다. 물론 말이 과실범이지, 실제로는 음주운전으로 인한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과실치사)이기에 현대 기준으로 봐도 동정의 여지가 전무한 악질범인 것은 사실이다.
남편을 잃은 후 마리 퀴리가 쓴 일기장에는 "당신 없는 삶은 잔인하고,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는 번민이자, 바닥없는 고뇌이며, 끝없는 비탄입니다."라고 쓰여 있었다.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은 11년만에 비극적으로 끝난 것이었다.
나중에 알려진 사실이지만 시신을 의사들이 검안한 결과 이미 방사선에 몸이 오래 노출된 탓에 그의 몸 상태는 말이 아니었다고 하며[3] 그토록 건강이 악화되지 않았더라면 문제의 마차를 충분히 피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한다.[4] 이 사실은 오래전부터 알려져서인지 1981년에 나온 국민서관 위인전 만화 퀴리부인에서도 나왔다. 통증으로 잠을 못 자던 남편 피에르가 아무래도 우리 둘 누가 먼저 죽더라도 남은 사람은 계속 라듐 연구를 멈추지 말라고 아내 마리에게 당부하는 장면이 나왔는데 남편 장례식을 끝낸 뒤에 마리는 남편이 생전에 남긴 당부를 기억하며 홀로 연구를 하기 시작한다. 만화 주석글에서도 피에르 퀴리는 사후에 부검으로 몸 상태가 엉망이라 오래 살지 못했을 거라고 하던 사항이 나왔다.
3. 업적
파리 대학교에서 수학, 물리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파리 대학교 교수와 과학 아카데미 회원을 역임하였다. 상술한 1903년 노벨물리학상 외에 1901년 루카스상, 1895년 프란테상을 수상하였다.결정물리학계에서는 광물학을 전공한 형 자크 퀴리와 함께 결정 연구를 하여 1880년 압전 현상[5]을 발견하였고, 이 연구를 위하여 새로운 전기계인 '퀴리전기계'를 고안하였다.
이후 물질의 자기적 성질의 연구를 하여, 상온에서 1400도까지의 온도 영역에 걸친 물질의 자기화를 조사하여 자기 감수율이 온도에 반비례한다는 '퀴리의 법칙'을 발견하고 퀴리온도[6]를 확립하는 등 자성물리학 분야의 발전에 공헌하였다.
마리 퀴리와 결혼 후, 방사선 연구에 흥미를 느끼고 아내와 공동으로 연구를 진행하여 우라늄화합물의 방사선이 원자적 성질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새로운 물질탐구에 노력하여 라듐과 폴로늄을 발견한다. 또한 방사성 붕괴에서 열에너지가 발생한다는 것을 최초로 발견한다. 피에르 퀴리는 방사선에 대한 여러 중요한 성질을 밝혀낸 공로로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하였다.
정리하자면 피에르 퀴리도 결정학과 전자기학, 방사선 연구의 선구자로, 아내의 후광에 빛이 바랬을 뿐이지 역사에 남을만한 과학자였다. 뿐만 아니라 피에르는 자신보다 한참 후배였고, 외국인이었으며, 아직 여성에게 덜 개방적이었던 당대 과학계에서 아내 마리를 학자로서나 인격적으로나 동등하게 대해주었다. 만약 피에르가 충분히 장수하며 계속 활동했다면, 마리 퀴리 못지 않게 기억됐을 수도 있다.[7]
요컨대 오늘날 세계 과학계의 존경을 받는 위대한 과학자 마리 퀴리 부인의 존재는 선배이자 남편 피에르의 진심어린 도움, 사랑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는 학자로서도, 남편으로서도 모범적인 사람이었다.
4. 자녀들
피에르 퀴리는 그 가족들의 능력자 기질로도 유명하다. 특히 피에르의 딸들 역시 범상치 않은 삶을 살았다. 장녀 이렌 졸리오퀴리는 부모의 뒤를 이어 과학자가 되었고, 차녀 이브 퀴리는 피아니스트 겸 저널리스트 겸 작가로 활동하였다. 그리고 피에르 퀴리의 장녀와 첫째 사위 프레데리크 졸리오퀴리 역시 노벨상을 받았고, 둘째 사위 헨리 라부아스 주니어도 그와 아내 이브가 창립한 UNICEF가 노벨평화상을 수상하면서 UNICEF 대표 자격으로 노벨상 수상식에 참석했다. 퀴리 부부까지 합치면 한 집안에 노벨상 수상자만 5명! 진정한 노벨상 집안이라 하겠다. 엄친딸 엄친아 가족들에 비해 유일하게 노벨상을 수상하지 못한 차녀 이브가 자신은 가문의 수치라며 드립을 칠 정도. 물론 이브는 노벨상만 못 받았지 이들 못지 않게 자기 분야에서 많은 업적을 쌓았고, 전미도서상 등 많은 상 역시 수상한 능력자다.[1] 라듐은 아니지만, 퀴리 부부가 발견한 다른 원소인 폴로늄은 범죄에 이용된 적이 있다. 물론 라듐 항목에서 볼 수 있듯, 생활용품과 식품 등에 오용되었다.[2] 마차가 머리를 깔고 지나가는 바람에 인상으로 그임을 파악할 수 없었다.[3] 뼈가 약해져 있었고 신체 장기들도 많이 망가졌었다고 하며, 사고를 안 당했어도 길어야 몇 년 정도의 시한부 인생이었다고 한다.[4] 실제 2020년작 영화 마리 퀴리에서는 마차가 오는 순간 피에르의 시야가 흐려지며 몸이 말을 듣지 않아 사고를 당하는 장면이 나온다. 추정일 뿐이지만 영화에서는 피에르 퀴리가 건강악화로 마차를 피하지 못했다는 설을 채택했다.[5] 특정 물질의 결정에 일정한 방향으로 압력을 가하면 그 압력에 비례하여 전기가 발생하는 현상. 압력을 뜻하는 그리스어 piezein에서 유래하여 영어로는 piezoelectricity라고 한다. 20세기 전기전자공학의 발전에 기반이 되는 효과로 이 효과를 응용한 압전소자는 전화기 부터 RPG-7의 전기신관까지 굉장히 널리 쓰이고 있다. 피에르 퀴리는 이 발견만으로도 노벨상을 받을 만한 업적을 세운 셈.[6] 물질이 자성(磁性)을 잃게 되는 온도. 이 온도 이상으로 올라가면 강자성체(强磁性體)가 상자성체(常磁性體)로 변화하거나, 강유전체(强誘電體)가 자발 분극을 잃는다.[7] 다만 방사선 피폭으로 인한 건강악화가 심한 상태였으니 사고사하지 않았어도 오래 살기는 힘들었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