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임한 직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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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국 제44대 우정대신 | |
일본국 제32-41대 중의원 의원 오쿠다 게이와 奥田敬和 | Okuda Keiwa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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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A2128> 출생 | 1927년 11월 26일 |
이시카와현 이시카와군 미카와정 (현 하쿠산시) | |
사망 | 1998년 7월 16일 |
도쿄도 치요다구 | |
학력 | 와세다대학 정치경제학부 (졸업) |
자녀 | 장남 오쿠다 겐(奥田 建)[1] |
의원 선수 | 10 (중) |
의원 대수 | 32, 33, 34, 35, 36, 37, 38, 39, 40, 41 (중) |
당적 | |
약력 | 호쿠리쿠신문사 기자 이시카와 현의회 의원 10선 중의원 제44대 우정대신 제40대 자치대신 제50대 국가공안위원장 제65대 운수대신 자민당 국회대책위원장 태양당, 민정당 당 고문 |
1. 소개
일본의 전 정치인이다. 1980년대 자민당 다케시타파를 대표하는 다케시타파 칠봉행의 일원 중 한명이었다.2. 생애
1927년 11월 26일 일본 이시카와현 이시카와군 미카와초(현 하쿠산시)에서 태어났다. 이시카와현립 가나자와 중학교를 졸업후 병사 사관 후보생을 양성하는 육군예과사관학교를 수료했다.[2]이후 가나자와시에 위치한 구제 제4고등학교[3]를 졸업한 뒤 와세다대학 정치경제부에 진학했다. 대학 재학 당시에는 작은 체구를 의식해 레슬링부에 소속된적이 있었다.
대학 졸업 이후 이시카와현의 지역 신문사인 호쿠리쿠 신문사에 취직, 총리관저, 통상산업성, 운수성의 출입 기자로 활동했다. 1958년 호쿠리쿠 신문사를 퇴사하고 아버지의 회사에 들어가 경영업무에 종사하였고, 1967년 자유민주당 소속으로 이시카와현의원 선거에 입후보 한뒤 당선되어 본격적으로 정계에 입문했다.
1969년 제3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를 앞두고 이시카와현 제1구의 중의원 사카타 에이이치(坂田英一, 1897-1969)의 사망과 이무라 시게오(井村重雄, 1903-1972)의 은퇴로 공백이 생기자, 자민당 이시카와현련은 현의원인 오쿠다를 차기 중의원 선거 후보자로 옹립한다. 이때 전직 산케이신문 기자 출신이었던 모리 요시로도 보수계 무소속으로 첫 당선, 이시카와 정계의 패권을 놓고 다툰 모리오쿠 전쟁(森奥戦争)의 시작을 열었다.[4]
당선 이후 다나카 가쿠에이의 파벌인 목요회에 입회했고, 다나카파의 중견 의원으로 성장하면서 1983년 제2차 나카소네 야스히로 내각 출범 시 제44대 우정대신에 임명되면서 첫 입각에 성공했다. 같은 시기 다나카파의 거물이었던 다케시타 노보루가 독자 계파인 창정회를 결성해 다나카파를 분열시킬 계획을 세우자, 오쿠다는 다나카의 측근이었던 오자와 타츠오와 친분이 깊다는 이유로 창정회 결성에 제외되었다.
이후 다나카 가쿠에이가 뇌졸중으로 쓰러지고 목요회가 다케시타의 경세회와 니카이도 스스무의 니카이도 그룹으로 쪼개지자, 오쿠다는 타무라 하지메와 함께 중도파의 입장에서 목요회의 분열을 막으려는 방법을 모색했으나, 이 방안이 실패로 돌아가자 경세회에 정식으로 합류하였다.
1990년 제2차 가이후 도시키 내각에서 제50대 국가공안위원장 겸 제41대 자치대신으로 임명되었고, 가이후 내각 이후 들어선 미야자와 내각에서 제65대 운수대신에 임명되며 체급을 더욱 키워나갔다. 1992년 경세회가 분열되자 하타 쓰토무의 개혁포럼 21에 참여했고, 이듬해 하타가 자민당을 탈당해 신생당을 창당하자 이에 참가했다.
오쿠다는 자민당의 중진에서 비자민계 정치인으로서 이시카와현에서 야권이 급성장 할수 있도록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실제로 그가 자민당을 이당할 시 휘하 지방 의원, 당직자 대부분을 이끌고 나가 자민당 가나자와시 지부가 한동안 궤멸 상태에 있었고, 1994년 이시카와현 지사 선거에서 최초로 보수 분열 선거가 치러지는 등 자민당 텃밭인 이시카와현에서 현정계의 재편을 도모했다.
1994년 신진당 결당을 거쳐 소선거구제 재편 이후 처음으로 열린 1996년 제4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자민당이 후보를 옹립하지 않은 상태에서 압도적인 격차로 당선되었다.[5] 총선 직후 신진당이 선거 패배로 인한 당내 갈등으로 산산조각 나자 태양당 - 민정당에 합류해 당의 고문을 맡았고, 1998년 민주당의 창당되자 신진당 시절 부터 함께했던 하타의 측근으로 활동했다.
한편 이 시기 부터 지병인 위암이 악화되어 투병생활을 지속하다가 여름 부터 병세가 급속히 악화되었고, 결국 1998년 7월 16일 위암으로 인해 향년 7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케이와의 사후 그의 지반은 장남 오쿠다 켄에게 계승되었다.
3. 소속 정당
소속 | 기간 | 비고 |
| 1967 - 1993 | 정계입문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1993 | 당내 의견 차이로 인한 탈당 |
| 1993 - 1994 | 창당 |
| 1994 - 1997 | 신설합당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1997 - 1998 | 정당 해산 |
| 1996 - 1997 | 창당 |
| 1997 - 1998 | 합당 |
| 1998 | 합당[6] 사망 |
4. 선거 이력
연도 | 선거 종류 | 지역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1969 | 제3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구) 이시카와 1구 | | 49,014 (13.84%) | 당선 (3위) | 초선 |
1972 | 제33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67,627 (18.27%) | 재선 | |||
1976 | 제3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89,311 (27.30%) | 당선 (2위) | 3선 | ||
1979 | 제3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81,125 (28.75%) | 4선 | |||
1980 | 제3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11,216 (30.18%) | 5선 | |||
1983 | 제37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85,597 (26.55%) | 6선 | |||
1986 | 제3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98,666 (26.13%) | 7선 | |||
1990 | 제3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34,161 (33.25%) | 당선 (1위) | 8선 | ||
1993 | 제4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 141,614 (37.54%) | 9선[7] | ||
1996 | 제4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이시카와 1구 | | 87,329 (49.36%) | 10선[8] |
5. 여담
[1] 오쿠다 케이와가 1998년 사망하면서 케이와의 지역구였던 이시카와 1구를 세습받았으나, 자유민주당의 프로레슬러 출신 정치인 하세 히로시와 이시카와 제1구를 주고받는 세습 정치인 치고는 불안한 입지를 가지고 있던 도중 2011년경 노다 내각에서 국토교통부대신에 임명되었으나, 이후 민주당이 박살나면서 제4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하세에게 더블 스코어로 패배한 이후 정계를 은퇴했다. 2021년 6월 22일 심근경색으로 사망.[2] 일본 육군예과사관학교는 1887년 일본 육군유년학교라는 이름으로 독일 제국의 사관 후보생 제도를 본따 최초로 설립되었다. 이후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통합과 분리를 반복하다가 1937년 중일전쟁으로 인한 학생수의 증가로 육군예과사관학교로 독립되었다. 1945년 8월 미군의 대공포 투하로 학교가 전소되면서 일본의 패전과 동시에 사실상 해체되었고, 종전 이후에는 구 일본군의 군수물자 처리 장소로 활용되었다.[3] 가나자와대학의 전신 학교[4] 이 당시 오쿠다의 라이벌이었던 모리 요시로 이외에도 오자와 이치로, 하타 쓰토무, 가지야마 세이로쿠, 와타나베 고조, 하마다 고이치, 후와 테츠조, 도이 다카코, 요코미치 다카히로 등 일본 정치사에 한 획을 그은 거물 의원들이 대거 배출되었다 하여, 1969년(쇼와44년) 총선에서 첫 당선된 국회의원들은 꽃의 쇼와44년(1969년)조(花の昭和44年組)라는 별칭이 붙었다.[5] 자민당은 당시 연립정당인 민주당 후보를 추천했다.[6]
, , 와 신설 합당[7]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의 마지막 중선거구제.[8] 1998.7.16 임기 중 사망
, , 와 신설 합당[7]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의 마지막 중선거구제.[8] 1998.7.16 임기 중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