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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bgcolor=#0230AE><colcolor=#c3c965> 출생 | 1899년 12월 3일 | ||
| 히로시마현 도요타군 요시나촌 (現 히로시마현 타케하라시) | |||
| 사망 | 1965년 8월 13일 (향년 65세) | ||
| 도쿄도 분쿄구 도쿄대학 의학부 부속병원 | |||
| 재임기간 | 제58대 내각총리대신 | ||
| 1960년 7월 19일 ~ 1960년 12월 8일 | |||
| 제59대 내각총리대신 | |||
| 1960년 12월 8일 ~ 1963년 12월 9일 | |||
| 제60대 내각총리대신 | |||
| 1963년 12월 9일 ~ 1964년 11월 9일 | |||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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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력 | 우미코우토 중학교 (졸업) 제5고등학교[2] (졸업) 교토제국대학 법학부 (법학 / 학사) | ||
| 정당 | |||
| 파벌 | 굉지회 | ||
| 지역구 | 히로시마 2구 | ||
| 의원 선수 | 7 (중) | ||
| 의원 대수 | 24, 25, 26, 27, 28, 29, 30 | ||
| 약력 | 고등문관시험 합격 대장성 관료 대장성 주세국장 대장성 사무차관 중의원 의원 제6대 자유당 정무조사회장 제6대 자유당 간사장 제2·7·19대 통상산업대신 전일본거합도연맹 설립자 및 초대 회장 제55·61-62대 대장대신 제4대 자유민주당 총재 제58-60대 내각총리대신 | }}}}}}}}} | |
1. 개요
일본의 경제관료 출신 정치인. 제58~60대 내각총리대신을 역임했다.내각총리대신 재임 중 소득배증계획 정책을 실시하여 일본 경제 부흥기와 고도경제성장의 기초를 다졌다. 그리고 후임 내각총리대신인 라이벌 사토 에이사쿠와 함께 자유민주당의 최전성기를 연 내각총리대신이었다.
2. 생애
2.1. 정치 입문 이전
舊 교토제국대학(現 교토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1925년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하여, 대장성 관료를 시작으로 공직에 입문하였다. 친구였던 사토 에이사쿠와 마찬가지로 이케다 또한 출세와는 거리가 먼 부침많은 초반 관료 생활을 보내지만[3] 실력을 키우고 인내심 있게 기다려 1941년 교토대 출신으로는 이례적으로 재무부 국세과장까지 올랐다. 하지만 1944년 도조 내각 붕괴되고 이에 따른 실각의 여파로 지방에 좌천되었다. 당시에는 좌천 상황에 매우 낙담했지만, 역설적으로 이 좌천 덕분에 중앙에 남지 않아 전후에 전범으로 낙인찍히는 일을 피했으니 오히려 잘된 셈이다.이때 대장성 내 혁신관료의 대표격이었던[4] 가야 오키노리와 같은 파벌에 속했고 이 인연으로 가야는 이후 이케다 내각에서 법무대신을 역임하기도 했다. 다만 이케다 본인은 혁신관료로 분류되지는 않는다.
아무튼, 전쟁이 끝나자 다시 대장성 본청에서 출세를 시작해 주세국장을 거쳐 1947년 대장성 내 관료 최고의 자리인 사무차관까지 오르게 된다.[5][6] 전후에는 주로 전쟁시 정부가 발행한 국채를 사들인 기업과 개인들에 대한 보상을 처리하는 업무를 담당하였으며, 이후 GHQ의 명령에 따라 새로운 조세제도를 마련하는 일에도 참여하였다. 사무차관에 오른 뒤에는 사회당 출신의 가타야마 데츠 내각의 방침에 따라 산업 국유화와 경제 통제를 위해 마련한 경제안정본부에 배속되었다.
2.2. 정치 입문 이후
이후 퇴직하고 곧 정계에 입문, 요시다 시게루의 오른팔이자 경제 참모로 두각을 나타내었으며 요시다 내각의 주요 각료로서 정책(경제, 산업 분야)에 관여하였다.1949년에는 제3차 요시다 내각의 대장대신, 통상산업대신으로 재직하면서[7] 인플레이션 억제를 위해 닷지 라인이라는 강력한 긴축재정정책을 실행하였다. 때문에 경제가 일시적으로 큰 불황을 겪었는데[8] 이런 상황에서 이케다 대신은 다음과 같은 실언을 한다.
위 발언의 출처는 야당 의원과의 질의응답인데, 실제 발언을 정확히 살펴보면 "부실한 기업은 속히 청산해서 다른 기업의 발목을 잡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하고, 서민들이 보리를 먹게 되더라도 경제기조를 바꿔서는 안된다"는 요지로 언론에 소개된 것과는 의미가 상당히 달랐다. 그러나 이미 언론에서 대서특필되어 많은 사람들의 공분을 자아냈고 요시다 내각의 지지율을 크게 깎아먹는데 일조한 바 있다.
이후로도 중의원의 질의응답에서 예산이나 재정과 관련된 사안은 모두 내 소관이니 자신이 답변하겠다는 말을 하여 당시 일본 정서상 나이도 어리면서 건방지다는 분위기가 조성되어[10] 언론에서 연일 그의 말실수를 보도하며 때리기에 나서는 등 위기에 몰리게 되었다.
결국 1952년 사회당에서 일전의 중소기업 발언을 명분으로 불신임결의안을 제출하였고 여당 내에서 반란표가 나오면서 결의안이 통과된다. 그렇게 일본 헌정사상 유일무이한 국무대신 불신임 사례로 남게 되었다. 이케다는 다음날 사임했다.[11]
대장대신과 통상산업대신 역임 도중 주택금융공단을 설립해 민간 주택 공급을 지원했고, 산업 부흥을 위해 기업을 지원하기 위해 금융공기업인 일본수출은행(現 국제협력은행)과 일본산업은행(現 일본개발은행)을 설립했다. 이 두 기업은 이후 고도성장기에 일본 특유의 호송선단식 경제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이후 일본 최초의 장기신용은행인 일본장기신용은행을 설립했다. 또 본래 재무성에 속했던 전매국을 일본전매공사로, 전전에 철도성이었던 것을 마찬가지로 공기업인 일본 국철로, 정보통신성을 공기업인 일본전신전화공사로 독립시켰고, 전후 최초의 확장재정 예산을 마련하기도 했다.
대장대신 겸 상공대신에서 사임한 후 자신의 편을 만들어야겠다는 필요성을 느꼈는지 측근들을 중심으로 파벌을 형성함으로서 본격적으로 정치행보에 나서게 된다. 이듬해에는 당내 요직인 정치연구위원장으로 취임했고, 그간 쌓아온 인맥, 특히 대장성 출신 인맥을 바탕으로 요시다 내각의 막후 실세로 군림했다. 1953년 중순 한국전쟁이 슬슬 끝나갈 무렵, 미국이 일본에 자체적인 방위력을 갖출 것을 요구하자 동해 10월 요시다 총리의 명으로 미국으로 날아가 방위청 설치, 자위대 설립, 비밀보호법 제정을 요지로 하는 미일상호방위조약 개정 협상을 주도했다.
1954년 조선의옥 사건이 발생하자 동지이자 라이벌인 사토 에이사쿠와 함께 검찰로부터 사건의 핵심 관계자로 지목받는 위기에 처했지만 이누카이 타케루 법무대신이 검찰을 대상으로 하는 수사지휘권을 행사해 수사를 무마하는 초유의 짓거리를 벌이면서 운좋게 살아남았다. 다만 검찰로부터 체포 직전까지 간 사토와 달리 이케다는 참고인 조사를 받은 것이 다라서, 이케다 본인이 정말 사건에 연루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기는 하다. 한편 같은 해 7월 자유당 간사장에 취임했다.
한편 비슷한 시기, 요시다의 독단적인 정국 운영에 분노한 하토야마 이치로 등 당내 비주류파는 시게미쓰 마모루가 이끌던 개진당과 힘을 합쳐 자유당으로부터 뛰쳐나가 새로운 보수 야당을 만들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여기에 요시다파 내 일부가 이 움직임에 찬동할 기미를 보이자 기시 노부스케와 이시바시 단잔 등 해당 인물들을 당으로부터 강제 제명하였다.
1955년 자유당-민주당 합당에 처음에는 완강히 반대하였으나 결국 찬성으로 돌아섰다. 그렇게 55년 체제가 형성되었고, 당의 주도권은 요시다파에서 합당을 주도한 하토야마 이치로 등 구 민주당계로 넘어가게 된다. 이 무렵 요시다는 정계에서 한발 물러난 상태였고 요시다파는 그의 후계자인 이케다와 사토 에이사쿠 두 명에게 계승되었다. 이케다와 사토 에이사쿠는 구마모토 제5고등학교 동창이며, 요시다 시게루의 휘하에서 정치 생활을 해낸 요시다 스쿨 세대. 그러나 내각총리대신 자리를 두고 동기이자 친구[12] 따위의 감정은 젖혀둔 채 후일 이케다가 요시다파를 계승하고 사토가 이케다를 제치고 당파를 찾으려 끊임없이 노력하던 이 시기를 지키려는 이케다와 뺏으려는 사토라는 문장으로 나타날 정도로 당 내 권력투쟁이 매우 심했고 이 일은 후일 이케다가 내각총리대신이 되었어도 계속되었다.[13]
하토야마 내각 하에서는 비주류로 물러나 당내 야당의 포지션을 점하였으나, 1956년 필리핀과 체결한 전쟁피해 배상 협정 당시 내각으로부터 부탁을 받고 협정에 반대하는 대장성을 본인의 인맥을 동원해 압박하여 강제로 찬성하게 만드는 등 여전히 막후 실력자로 남아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하토야마가 미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목적으로 소련과의 국교 정상화를 추진하자 강경하게 반발하여 당이 쪼개지기 직전까지 갔다가 간신히 수습되는 일도 있었다.
1956년 말 하토야마가 사임함으로서 열린 총재 선거에서 이케다는 이시이 미츠지로를 지지하며 일전의 분당 사태 때 악연이 있던 유력 차기 총리 후보 기시 노부스케를 낙선시키려 시도했다. 그러나 혼자서는 기시를 이길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자 3위 후보이던 이시바시 단잔과 손잡고 이시바시를 총재로 추대하는 대신 이케다를 대장대신으로 기용하는 딜을 맺어 기시를 누르고 이시바시를 총재에 당선시키는 데 성공한다. 약속대로 이시바시 내각에서 대장대신으로 임명됨으로서 약 5년만에 대장대신 직에 복귀하였다. 그러나 예상치 못하게 총리로 취임한지 3개월 만에 이시바시가 뇌경색으로 쓰러지며 총리직에서 사퇴하면서 외무대신 기시 노부스케가 총리직을 어부지리로 이어받게 되었다.
기시 내각 출범 이후로도 유임되었으나 5개월만에 개각이 이뤄지면서 축출되었고, 이 무렵 자기 파벌을 정책집단으로 격상, 그 유명한 굉지회를 출범하였다. 1958년 중의원 총선의 결과 출범한 2차 기시 내각에서는 국무대신으로 다시 내각에 입각하였다. 그러나 기시가 경찰관 집무집행법을 개정해 영장과 예방구금령 없는 수사를 허용하려 해 정국이 들썩이자 비주류파와 함께 손잡고 쇄신을 요구하며 기시의 사퇴를 요구하는 등 여전히 대립을 이어갔다.
1959년 2월, 소득배증계획 정책을 처음으로 공식적인 자리에서 발표했다. 동해 6월 2차 기시 개조내각에서 통상대신으로 자리를 옮겼고, 1960년 미일상호방위조약 개정 시도로 인해 안보투쟁이 벌어지자 자위대 출동을 주장하는 등 강경책을 주장했다.
2.3. 내각총리대신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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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각총리대신 취임 후 |
이케다의 소득배증계획은 10년 내에 국민소득을 두배로 늘리는 것을 목표'로 하였고 일본 경제는 연평균 10.9퍼센트씩 성장하여 실제로는 7년만에 목표를 달성하였다. 목표 연도이던 1970년 일본의 국민소득은 1960년과 비교하여 2.8배에 달하였다. 경제는 고도경제성장에 돌입하였으며, 이케다가 내각총리대신 재임 시 국민들의 생활 수준 또한 비약적으로 향상되어 냉장고의 보급률은 84퍼센트, 진공청소기는 62퍼센트, 세탁기의 보급률은 88퍼센트에 달했다.
이케다 집권기간 동안 수출입 또한 순조롭게 증가하여 1960년 40억 달러이던 수출은 1965년 84억 달러로 늘어나고 수입은 1960년 44억 달러에서 1965년 81억 달러로 늘어나 수출이 수입을 넘어섰다.
이케다의 파벌은 정책집단이라는 평가를 들었고 미야자와 기이치, 마에오 시게사부로. 오히라 마사요시, 이토 마사야[17] 등 뛰어난 참모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이케다는 또한 경제계와 학계에도 폭넓은 인맥을 가지고 있어 이들이 소득배증계획 정책을 뒷받침 하였다.
이케다는 호방, 소탈하였고 화법은 명쾌하여 국민들은 이케다에게 친근함을 느꼈다. 내각총리대신으로 집권하던 시기 두 번에 선거가 있었는데 이케다가 내각총리대신 겸 당 총재로서 이끈 자유민주당은 득표율 50% 이상을 모두 넘겼다. 특히 제 29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이루어낸 296석은 자민당이 현재까지 깨지못하고 있는 최대 의석 점유율이다. 또, 이케다는 총리로 재임하면서 자민당 역사상 유일무이하게 데드 크로스[18]를 맞지 않고 정상적으로 임기를 마친 총리이기도 하다. 이케다의 개인적 매력과 정권의 정책적 성과에 대해 국민 대다수가 지지를 보낸 것이다.
이케다 하야토 내각총리대신 재임 기간 동안 최초의 국토개발계획 발표(1962년), 일본의 GATT(現 WTO) 가입(1963년), IMF 가입(1963년) 및 총회(1964년) 개최, OECD 가입(1964년), 도쿄 올림픽 개최(1964년)가 일어났다. 특히 이중 GATT 가입이 중요한데, 일본이 1세계의 자유무역 체제에 가입하게 되면서 외국으로부터의 석유의 무관세 수입이 개시되었고 이로 인해 기존의 석탄 산업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고 점점 사양화되었다. 그리고 이는 사회당의 정치 기반에도 큰 타격을 주었는데 석유 대체 이전의 석탄 산업은 어디에서나 그렇지만 국가의 핵심 기간산업 중 하나이고, 석탄 노조는 일반적으로 혁신계 정치세력의 가장 큰 정치적 지지자이기 때문이다.
도쿄 올림픽 폐막 다음날인 1964년 10월 25일 건강 악화로 사의를 표명하여(실제 퇴진은 11월 9일) 그대로 국립암연구센터에 입원한 후 의외로 차기 자민당 총재로 라이벌이었던 사토 에이사쿠를 지명했다.[19] 그리고 후두암 진단을 받아 치료를 시작하여 한때는 병세가 일시적으로 호전되어 요시다 시게루, 이케다 부부, 사토 부부만이 참석한 가운데 이케다의 쾌유를 기원하는 모임이 개최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65년 8월부터 병세가 악화되어 결국 재입원중이던 도쿄대학 의학부 부속병원에서 사망하였다(향년 65세). 라이벌 사토에게 내각총리대신직과 당 총재직을 스스로 넘겨준 걸 보면 어쩌면 죽음을 예감했을지도 모르겠다.[20]
그의 죽음 이후로도 이케다 가문의 정치는 데릴사위인 이케다 유키히코 전 외무대신, 그리고 외손녀사위인 테라다 미노루 총무대신을 통해 이어지고 있다.
| |
| 네덜란드에서 (1962년) |
3. 선거 이력
| 연도 | 선거 종류 | 지역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 1949 | 제2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히로시마 2구 | | 61,072 (22.8%) | 당선 (1위) | 초선 |
| 1952 | 제2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 90,091 (29.9%) | 당선 (1위) | 재선 | |
| 1953 | 제2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68,387 (25.0%) | 당선 (1위) | 3선 | ||
| 1955 | 제27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62,191 (21.9%) | 당선 (1위) | 4선 | ||
| 1958 | 제2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 83,913 (28.6%) | 당선 (1위) | 5선 | |
| 1960 | 제2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83,817 (28.2%) | 당선 (1위) | 6선 | ||
| 1963 | 제3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74,507 (24.2%) | 당선 (1위) | 7선[21] |
4. 기타
- 보수본류의 적통이라는 평가를 받는 것 치고는 대외관이 강경한 축에 속했고 군비 재무장도 겉으로 주장하지는 않았지만 속으로는 내심 강하게 찬성했다고 한다. 이는 혁신관료로서 대장성 시절 그의 선배였던 가야 오키노리의 영향인 것으로 추정된다.
- 일본 역대 내각총리대신들 중 재계 영향력이 가장 강한 사람[22]이었으며 이를 기반으로 한 자금 동원력도 발군이었다고 한다. 심지어 오늘날 금권정치의 대명사로 통하는 기시 노부스케나 다나카 가쿠에이도 이케다에는 못 미친다는 평가도 있다.
- 정치적 스승 요시다가 외무관료의 대부로서 총리 재임 중에도 외무대신을 겸직하며, 외무성을 장악하고 영향력을 행사했다면 이케다는 대장관료의 대부로서 대장성은 이케다의 직할지로 불렸다고 한다.
- 내각총리대신이 되고 굉장히 효율적으로 언론을 통해 자신과 경제 정책 등을 홍보하며, 언론인과 기자들과도 격의없이 잘지내 이들은 이케다 하야토에게 호의적이었다. 라이벌이었던 사토 에이사쿠가 언론인과 기자들을 싫어했고 내각총리대신이 되어서도 언론과의 사이도 굉장히 안좋았던 것과 달리 이케다 하야토는 이전 국무대신 시절과는 다르게 언론에 중요성을 인식하고 기존과 다른 홍보 전략을 잘 사용하여 인식 전환의 유연성을 가지고 사토 에이사쿠 보다도 먼저 내각총리대신이 될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다.[23]
- 내각총리대신이 되고 마음가짐을 기존과 다르게 하기 위해 재직중 좋아하는 골프도 치지 않았으며, 수상관저에서 진행하는 파티에서 나오는 진수성찬 음식들을 초청받은 사람들만 먹게하지 않고 따로 포장하여 가족들까지 챙겨주어 가지고 가도록 하는 등 최대한 검소하게 지내려 했다는 에피소드가 있다.
- 내각총리대신이 아닌 각료 국무대신인 대장대신 재직 시절에는 굉장히 자신의 주장을 자신있고 스스럼 없이 관철시켰는데 위에 나온 중소기업 도산이나 보리 사건 예시처럼 당시 의회에서 논란이 된 발언도 있지만 끝까지 자신의 장점인 경제분야에 대해 설명하고 좋은 평가를 받은 사례도 있다.
그 순간 질문한 야당 의원도, 듣고 있던 여당 동료 의원, 각료들도 이 발언에 기가 막혀 할 말을 잃었고 일순간 의회 내 정적이 흘렀다고 한다.[24] 이케다 하야토는 신경도 쓰지 않고 자신이 소신이었던 자유 무역 관점에 대해 한마디로 답변을 마치고는 담담한 표정으로 자기 자리로 가버렸다. 이전 보리 발언처럼 큰 비판이 있을 수 있겠구나 했지만 애매한 말투로 요리조리 피해가는 일반적인 관료 출신 정치가들과는 궤를 달리 했다고 생각해 오히려 국민들로 하여금 일반적인 관료 출신 정치인이 아닌 경제통 정치가로서 이케다 하야토를 다시 보게끔 한 긍정적 사례이다.[25]
- 재정, 세무 전문 대장성 관료 출신답게 수치화를 통해 근거를 마련해 정책을 입안했으며 경제 정책은 직접 자신이 계산까지 하여 국민과 기자들에게 상세히 설명해 정책 신뢰성과 명확성을 높이려고 노력했다.
- 일본에서 실시된 각종 역대 전후 내각총리대신 평가 여론조사에서 요시다 시게루, 기시 노부스케, 사토 에이사쿠, 다나카 가쿠에이, 나카소네 야스히로와 같이 높은 순위를 차지하는 경우가 많다.
- 당시 이케다 하야토, 사토 에이사쿠와 함께 자유민주당 내 정치적 라이벌로 뽑힌 오노 반보쿠는 엘리트 관료 출신 정치가를 정말 싫어하기로 유명했다. 그 이유로는 자신이 관료 출신이 아닌 처음부터 정치로 바로 진입한 인물이었고 엘리트 관료들의 특징인 책임을 지지 않으려 하며 자신의 주장을 애둘러 표현하려는 특징을 오노는 굉장히 싫어했던 것이다. 하지만 엘리트 관료 출신인 이케다 하야토에 대해서 만큼은 예외였다. 위에 나온 사례인 레몬 발언 사건처럼 "이케다 하야토 군은 엘리트 관료 출신임에도 정말 소심하지 않다. 세상을 아는 친구라 큰 인물이 될 것"이라고 라이벌인 그를 절찬한 바 있다.
- 대장성 엘리트 관료 출신답게 라이벌이나 상대 파벌이 조각한 내각에 각료(국무대신)로 입각하여도 일단 내각 내에서 견제보다는 맡게 된 직위에 대해 굉장히 성실하고 최선을 다해 수행한다는 평가가 많다. 이건 다른 대장성 엘리트 관료 출신인 후쿠다 다케오, 오히라 마사요시, 미야자와 기이치도 비슷한 평가를 받는다.
- 프랑스 샤를 드골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소니의 최신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자랑하는둥 상황과 맞지 않는 딴소리를 한 덕분에 '트랜지스터 라디오 세일즈맨'이란 비아냥을 들었다. 드골이 측근에게 한 말이었는데 반드골 성향이었던 르 피가로에 누설되었고, 이 기사가 다시 일본 언론에 의해 보도되면서 이케다의 체면은 구겨진다. 그런데 이런 전후 사정을 모르는 한국 내 칼럼니스트들이 반도체 세일즈에 앞장선 내각총리대신으로 미화하는 기사를 쓰는 촌극을 빚어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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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2년 10월 21일, 일본 가나가와현 오다와라시에서 열린 도덕재무장운동(MRA, Moral-Re-Armament) 행사 후 대담에서 김종필이 '일본이 포츠담 선언(1945년 7월 26일)을 빨리 수용했더라면 소련이 대일선전포고(1945년 8월 8일)를 급조할 일도 없었고, 소련군이 한반도로 내려올 일도 없었기 때문에 한반도의 분단에는 일본의 책임도 어느 정도 있다'라는 논지의 말을 하자 이케다 하야토가 김종필의 나이를 묻더니(그 당시 김종필의 나이는 서른여섯)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시기의 지사(志士)를 보는 것 같다'고 말했다고 한다. 김종필이 정확히 누구를 비유하는 거냐고 묻자 '오쿠보 도시미치'라고 대답했다.[26]
- 1963년에 일본공산당의 노사카 산조의 조선 인민에 대한 비도덕적인 행위에 대해 내각총리대신은 진정으로 반성하고 있는가에 대한 답변으로 "조선을 병합한 이후 일본의 비행에 대해서는 나는 견문이 적어 충분히 알고 있지 못합니다."라고 답변해서 논란을 일으켰다.
- 술과 담배를 매우 좋아했고 술은 종류를 가리지 않고 다 좋아했지만 그 중에선 위스키를 가장 좋아했다. 특히 닛카 위스키를 좋아했는데, 닛카 위스키 창업자 타케츠루 마사타카와는 중학교 동창 사이여서 주변 지인들에게 닛카 위스키를 권했다고 한다. 그리고 담배피는 사진이 굉장히 많을 정도로 애연가였다. 죽기 직전까지 금연을 하지 못할 정도였으며 결국 후두암에 걸렸다.
- 요시다 내각의 대장대신 시절 한 해 예산 편성이 끝나면 이케다 하야토는 예산 편성 담당 부서인 대장성 주계국의 직원 한 사람, 한 사람과 회식에서 술잔을 주고 받았다고 한다. 까탈스러운 다른 정치가 각료들과는 달리 앞서 설명에 있듯이 주량이 엄청나고 소탈한 성격의 소유자여서 이케다가 맡은 내각 성, 청의 분위기는 늘 좋았다고 한다.
- 핵무장론자였다. 물론 내각총리대신 때는 아무런 말도 안 했지만 사석에서 특히 술이 들어가면 국가 안보 차원에서 핵무기가 필요하다고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27]
- 다나카 가쿠에이가 양녀의 혼처를 알아보러 다닌다는 걸 알고 이케다가 자신의 조카를 소개해줘 둘을 결혼시켰다. 고로 이케다 하야토와 다나카 가쿠에이는 사돈지간이 된다.
- 히로시마 카프의 광팬이었다. 만년 하위 클래스였던 구단 순위에 짜증내며 당시 4번 타자였던 토요타 야스미에게 직접 전화를 걸을 정도였다.
- 이케다 하야토의 정치 활동에 관해서는 그와 관련된 서적 중에 《이케다 하야토 정치의 계절에서 경제의 계절로》가 출판되어 있으며 가볍게 참고하기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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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iki style="margin: -0px -10px -5px; min-height: 26px;" {{{#fff,#33d6ad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181818,#e5e5e5 | 초대 히로카와 코센 | 제2대 사토 에이사쿠 | ||
| 제3대 마스다 가네시치 | 제4대 하야시 조지 | |||
| 제5대 사토 에이사쿠 | 제6대 이케다 하야토 | |||
| 제7대 이시이 미쓰지로 | ||||
| 분당파 자유당 간사장(1953-1954) | ||||
| 초대 고노 이치로 | ||||
| {{{#!wiki style="margin: 0 -10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000,#e5e5e5 | 1기 상공대신 (1925~1943) | |||||||||
| 초대 다카하시 고레키요 | 2대 노다 우타로 | 3대 카타오카 나오하루 | 4대 후지사와 이쿠노스케 | |||||||
| 5대 나카하시 도쿠타로 | 6대 타와라 마고이치 | 7대 사쿠라우치 유키오 | 8대 마에다 요네조 | 9대 나카지마 쿠마키치 | ||||||
| 10대 마츠모토 조지 | 11대 마치다 추지 | 12대 카와사키 타쿠키치 | 13대 오가와 고타로 | 14대 고도 타쿠오 | ||||||
| 15대 요시노 신지 | 16대 이케다 시게아키 | 17대 핫타 요시아키 | 18대 고도 타쿠오 | 19대 후지와라 긴지로 | ||||||
| 20대 고바야시 이치조 | 임시대리 가와다 이사오 | 21대 토요다 테이지로 | 22대 사콘지 세이조 | 23대 기시 노부스케 | ||||||
| 24대 도조 히데키 | ||||||||||
| 군수대신 (1943~1945) | ||||||||||
| 초대 도조 히데키 | 2대 후지와라 긴지로 | 3대 요시다 시게루 | 4대 토요다 테이지로 | 5대 나카지마 치쿠헤이 | ||||||
| 2기 상공대신 (1945~1949) | ||||||||||
| 25대 나카지마 치쿠헤이 | 26대 오가사와라 산쿠로 | 27대 호시시마 지로 | 28대 이시이 미쓰지로 | 임시대리 가타야마 데쓰 | ||||||
| 29·30대 미즈타니 조사부로 | 임시대리 요시다 시게루 | 31대 오야 신조 | 32대 시나가키 헤이타로 | |||||||
| 통상산업대신(1949년~2001년) | ||||||||||
| 초대 시나가키 헤이타로 | 2·6대 이케다 하야토 | 3대 다카세 소타로 | 4대 요코오 시게루 | 5대 다카하시 류타로 | ||||||
| 7대 오가사와라 산쿠로 | 8대 오카노 키요히데 | 9대 아이치 기이치 | 10·11·12대 이시바시 단잔 | |||||||
| 13·14대 미즈타 미키오 | 15대 마에오 시게사부로 | 16대 타카사키 타츠노스케 | 17대 이케다 하야토 | |||||||
| 18대 이시이 미쓰지로 | 19대 시이나 에쓰사부로 | 20대 사토 에이사쿠 | 21·22대 후쿠다 하지메 | 23·24대 사쿠라우치 요시오 | ||||||
| 25대 미키 다케오 | 26·27대 칸노 와타로 | 28대 시이나 에쓰사부로 | 29대 오히라 마사요시 | 30대 미야자와 기이치 | ||||||
| 31대 다나카 가쿠에이 | 32·33대 나카소네 야스히로 | 34대 고모토 토시오 | 35대 다나카 다쓰오 | |||||||
| 36대 고모토 토시오 | 37대 에사키 마스미 | 38대 사사키 요시타케 | 39대 다나카 로쿠스케 | 40대 아베 신타로 | ||||||
| 41대 야마나카 사다노리 | 42대 우노 소스케 | 43대 오코노기 히코사부로 | 44대 무라타 케이지로 | 45대 와타나베 미치오 | ||||||
| 46·47대 타무라 하지메 | 48대 미쓰즈카 히로시 | 49대 가지야마 세이로쿠 | 50대 마츠나가 히카루 | |||||||
| 51대 무토 가분 | 52대 나카오 에이치 | 53대 와타나베 고조 | 54대 모리 요시로 | 55대 구마가이 히로시 | ||||||
| 임시대리 하타 쓰토무 | 56대 하타 에이지로 | 57대 하시모토 류타로 | 58대 츠카하라 슌페이 | 59대 사토 신지 | ||||||
| 60대 호리우치 미쓰오 | 61대 요사노 가오루 | 62·63대 후카야 다카시 | 64대 히라누마 다케오 | |||||||
| 경제산업대신 (2001년~현재) | ||||||||||
| {{{#!wiki style="margin: -16px -11px" | }}} | |||||||||
| 1·2대 히라누마 다케오 | 3-5대 나카가와 쇼이치 | 6대 니카이 도시히로 | 7·8대 아마리 아키라 | |||||||
| {{{#!wiki style="margin: -16px -11px" | }}} | |||||||||
| 7·8대 아마리 아키라 | 9·10대 니카이 도시히로 | 11·12대 나오시마 마사유키 | ||||||||
| {{{#!wiki style="margin: -16px -11px" | }}} | |||||||||
| 13대 오하타 아키히로 | 14대 가이에다 반리 | 15대 하치로 요시오 | 16대 에다노 유키오 | 17대 모테기 도시미쓰 | ||||||
| {{{#!wiki style="margin: -16px -11px" | }}} | |||||||||
| 18대 오부치 유코 | 19·20대 미야자와 요이치 | 21대 하야시 모토오 | 22·23대 세코 히로시게 | 24대 스가와라 잇슈 | ||||||
| {{{#!wiki style="margin: -16px -11px" | }}} | |||||||||
| 25·26대 가지야마 히로시 | 27·28대 하기우다 고이치 | 29대 니시무라 야스토시 | 30대 사이토 겐 | |||||||
| 31·32대 무토 요지 | 33대 아카자와 료세이 | }}}}}}}}}}}} | ||||||||
| {{{#!wiki style="margin: 0 -10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000,#e5e5e5 | 경제안정본부 총무장관 (1946년~1952년) | |||||||||
| 초대 젠 케이노스케 | 2대 이시바시 단잔 | 3대 타카세 소타로 | ||||||||
| 4대 와다 히로오 | 5대 쿠루스 타케오 | 임시대리 아시다 히토시 | ||||||||
| 임시대리 요시다 시게루 | 6대 이즈미야마 산로쿠 | 임시대리 스토 히데오 | ||||||||
| 7대 아오키 타카요시 | 8대 스토 히데오 | |||||||||
| 경제심의청장관 (1952년~1955년) | ||||||||||
| 1대 스토 히데오 | 2대 야마자키 타케시 | 3대 이케다 하야토 | 4대 오가사와라 산쿠로 | 5대 미즈타 미키오 | ||||||
| 6대 오카노 키요히데 | 7대 아이치 기이치 | 8·9대 타카사키 타츠노스케 | ||||||||
| 경제기획청장관 (1955년~2001년) | ||||||||||
| 1·2대 타카사키 타츠노스케 | 임시대리 이시바시 단잔 | 3·4대 우다 고이치 | ||||||||
| 3·4대 우다 고이치 | 5대 고노 이치로 | 6대 미키 다케오 | 임시대리 타카사키 타츠노스케 | 7대 세코 코스케 | ||||||
| 8대 칸노 와타로 | 9·10대 쿠사미즈 히사츠네 | 11대 후지야마 아이이치로 | 임시대리 이케다 하야토 | 12·13대 미야자와 기이치 | ||||||
| 14·15대 다카하시 마모루 | 16대 후지야마 아이이치로 | 임시대리 사토 에이사쿠 | 17·18대 미야자와 기이치 | |||||||
| 19대 칸노 와타로 | 20대 사토 이치로 | 21대 기무라 도시오 | ||||||||
| 임시대리 다나카 가쿠에이 | 22대 아리타 기이치 | 23대 코사카 젠타로 | 24대 우치다 츠네오 | 25대 쿠라나리 타다시 | ||||||
| 26대 후쿠다 다케오 | 27대 노다 우이치 | 28대 쿠라나리 타다시 | 29대 미야자와 기이치 | |||||||
| 30대 코사카 도쿠사부로 | 31대 쇼지 케이지로 | 32대 고모토 토시오 | 33대 시오자키 준 | 34대 고모토 토시오 | ||||||
| 35대 가네코 잇페이 | 36대 히라이즈미 와타루 | 37대 곤도 테츠오 | 38대 나카오 에이치 | |||||||
| 39대 하라다 겐 | ||||||||||
| 40대 아이노 고이치로 | 41대 오치 미치오 | 42대 타카하라 스미코 | 43대 아이자와 히데유키 | 44대 오치 미치오 | ||||||
| 45대 노다 다케시 | 46대 후나다 하지메 | |||||||||
| 임시대리 미야자와 기이치 | 47대 다카토리 오사무 | 48대 쿠보타 마나에 | 임시대리 하타 쓰토무 | |||||||
| 49대 테라사와 요시오 | 50대 고무라 마사히코 | 51대 미야자키 이사무 | 52대 다나카 슈세이 | 53대 아소 다로 | ||||||
| 54대 오미 코지 | ||||||||||
| 55-57대 이케구치 코타로 | ||||||||||
| 58대 누카가 후쿠시로 | ||||||||||
| 경제재정정책 담당대신 (2001년~2003년) | ||||||||||
| 1대 누카가 후쿠시로 | 2대 아소 다로 | 3대 다케나카 헤이조 | ||||||||
| 내각부 특명담당대신 (경제재정정책담당) (2003년~) | ||||||||||
| {{{#!wiki style="margin: -16px -11px" | ||||||||||
| 4-6대 다케나카 헤이조 | 7대 요사노 가오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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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9대 오타 히로코 | 10·11대 요사노 가오루 | |||||||||
| {{{#!wiki style="margin: -16px -11px" | }}} | |||||||||
| 12대 하야시 요시마사 | 13대 간 나오토 | 14대 아라이 사토시 | 15대 가이에다 반리 | 16대 요사노 가오루 | ||||||
| {{{#!wiki style="margin: -16px -11px" | }}} | |||||||||
| 17대 후루카와 모토히사 | 18대 마에하라 세이지 | |||||||||
| 19·20대 아마리 아키라 | 21대 이시하라 노부테루 | 22·23대 모테기 도시미쓰 | 24·25대 니시무라 야스토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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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25대 니시무라 야스토시 | 26·27대 야마기와 다이시로 | 28대 고토 시게유키 | 29대 신도 요시타카 | |||||||
| 30대·31대 아카자와 료세이 | 32대 기우치 미노루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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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슈 번 출신 유신십걸[2] 1949년 신학제 개편 때 구마모토대학에 통합되었다. 평생의 라이벌 사토 에이사쿠 총리와 동문.[3] 대장성 내에서 비주류였던 舊 교토제국대학 출신이었던 데다가(대장성은 외무성, 내무성과 함께 일본 제국 3대 요직이었고 주로 舊 도쿄제국대학 법학부, 경제학부 출신이 많았다.), 건강 또한 정말 죽기 직전까지 갈 정도로 다양한 합병증이 발생해 몸 상태가 매우 좋지 않아서 부인이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약 6년 간 밀착 간호를 했다. 또한 병가를 쓰는 것이 곧 좌천인 이시대에 총 3년이라는 꽤 긴 시간을 병가로 썼을 정도라 스스로 '대장성에 남을 수 없겠구나'라고 매일 탄식했다. 결국 퇴직하게 되고 3년 간 더 와병 생활을 한 후 건강을 되찾아 등용 방식으로 재채용되었다.[4] 가야 오키노리 이외에도 아오키 카즈오, 이시와타 소타로가 대표격이었는데, 이 3인방을 묶어서 대장성 삼우오(大蔵省三羽烏)로 불렀다.[5] 사무차관 출신으로 총리에 까지 오른 유이한 사례이다. 다른 한명은 사토 에이사쿠.[6] 이케다는 당시 주계국장이던 노다 우이치(노다 세이코 前 총무대신의 조부)를 제치고 주세국장으로서 사무차관에 오른 특이 케이스였다.[7] 원래 요시다는 자신의 도쿄제국대학 시절부터 절친이자 재계의 원로였던 미야지마 세이지로(宮島清次郎)를 대장대신으로 염두에 두고 있었으나 미야지마가 사무차관 출신 초선 의원 이케다를 불러 대장대신으로서 괜찮은지 면접을 본 후 요시다에게 강력히 천거하였다는 일화가 있다. 미야지마는 이후로도 이케다를 매우 높이 평가하여 재계의 후배들과 이케다를 연결하였고 이것이 이케다가 경제계에 거대한 영향력을 구축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8] 이를 닷지 불황이라고 한다. 닷지 불황은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 해소된다.[9] 이 발언은 이케가미 료이치의 만화 작품 생추어리에서도 인용되어 나온다. #[10] 객관적으로 보면 50대 초반이므로 젊은 나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당시 일본 정계의 평균 연령이 상당히 높았다. 게다가 이케다는 정치에 입문하자마자 내각 각료인 국무대신직을 꿰찼으니 다른 정치인들 입장에서는 질투를 불러일으킬 만 했다.[11] 국무대신에 대한 불신임결의안은 통과되어도 사임할 의무는 없다.[12] 이케다가 정계에 입문한 계기가 사토의 추천이다. 이케다 하야토가 총재로 선출된 직후 사토 에이사쿠를 찾아가 고마워하며 차기를 약속했다고 한다.[13] 이케다와 사토의 갈등이 절정에 달했던 시기는 이케다가 당 총재 겸 내각총리대신직을 사토에게서 지키려 했던 1964년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였다. 선거 당시 양측이 뿌린 자금이 그 때 당시 금액으로 100억엔에 달했다. 결국 총재 선거 승자는 자리를 지키려 했던 이케다 하야토로 결정되었다.[14] 일본 최후의 19세기 태생(1899년생) 수상이었다.[15] 아이러니 한 건 안보투쟁 당시 각료들 중 시위대에 가장 강경한 태도를 보인게 이케다였다. 나카소네 야스히로에 따르면 각의에서 전국의 경찰들에게 수당을 듬뿍 주고 도쿄로 불러 모아 시위대를 진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다.[16] 당시 대장대신(現 재무대신)이던 미즈타 미키오가 계획 실무 책임인으로 추진하고 미야자와 기이치가 1962년 경제기획청 장관으로 실무 계획 구성을 참여하였다.[17] 伊藤 昌哉. 원래는 기자였으나 이케다의 권유로 비서관이 되었다. 이케다의 스피치 라이터로서 이케다의 깊은 신임을 받았다.[18] 부정평가가 긍정평가를 앞지르는 것[19] 위키백과에선 이를 이케다 재정이라 부른다.[20] 이케다 하야토는 사토 에이사쿠가 총재로 지명되었다는 소식을 비서관 이토 마사야로부터 듣고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잘됐다, 사토라면 내가 편하지"라고 말했다고 한다.[21] 1965.08.13 사망[22] 특히 이케다와 가까웠던 경제인 4명(나가노 시게오 신일본제철 회장 겸 일본상공회의소 회장, 고바야시 아타루 일본개발은행 총재, 사쿠라다 다케시 닛신방적 회장 겸 일경련 회장, 미즈노 시게오 산케이 신문 회장)을 가리켜 재계사천왕이라 할 정도였고 이들을 중심으로 경제계가 뭉쳐 이케다를 지원하였다.[23] 이케다의 전임자인 기시가 중도 퇴진한 만큼 곧바로 동생인 사토 에이사쿠가 총재선에 나서기 힘들었던 면도 있다.[24] 자기 고향이자 지역구의 농산물을 맛없다고 했으니 정치가로서는 다음 선거에서 표가 떨어질 수도 있는 치명적 발언이다.[25] 이케다 하야토는 단 한마디로 인기에 영합하는 정치가가 아니라 경제만큼은 소신있는 경제통 정치가라는 인상을 심어준 사례로 유명하다.[26] 김종필 증언록[27] 참고로 이케다의 고향과 지역구가 히로시마현이다.
분류
- 일본의 남성 정치인
- 일본 제국의 정치인
- 일본국 내각총리대신
- 일본 재무성 사무차관
- 일본 재무대신
- 일본 경제산업대신
- 일본 내각부 특명담당대신
- 자유당(1950년) 국회의원
- 자유민주당(일본) 국회의원
- 제24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제25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제26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제27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제28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제29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제30대 일본 중의원 의원
- 1899년 출생
- 1965년 사망
- 타케하라시 출신 인물
- 당 대표/일본
- 자유민주당(일본) 총재
- 후두암으로 죽은 인물
- 공무원 출신 정치인
- 고등문관시험 출신
- 교토대학 출신
- 정2위
- 대훈위국화대수장
- 아오야마 영원 안장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