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국 제97대 대장대신 | |
<colcolor=#fff><colbgcolor=#3CA324> 일본국 제33-42대 중의원 의원 하야시 요시로 林義郎 | Hayashi Yoshirō | |
출생 | 1927년 6월 16일 |
야마구치현 시모노세키시 부네정 | |
사망 | 2017년 2월 3일 (향년 89세) |
도쿄도 주오구 | |
학력 | 토요우라 중학교 (졸업) 구제 제1고등학교 (졸업) 도쿄대학 법학부 (법학 / 학사) |
정당 | |
의원 선수 | 11 (중) |
의원 대수 | 32, 33, 34, 35, 36, 37, 38, 39, 40, 41, 42 |
지역구 | 舊 야마구치 1구 → 비례 주고쿠 블록 |
악력 | 통상산업성 공무원 통상산업대신 비서관 통산성 중공업국 산업기계과장 경제기획청 정무차관 제97대 대장대신 제62대 후생대신 일중우호의원연맹 회장 일중우호회관 회장 자유민주당 세제조사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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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의 전직 정치인. 하야시 요시마사 내각관방장관의 부친이다.2. 생애
1927년 6월 16일 일본 야마구치현 시모노세키시 부네정에서 중의원 의원 하야시 요시스케(林佳介, 1900.7.18-1987.11.9)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야마구치현립 토요우라 중학교,구제 제1고등학교를 졸업, 도쿄대학 법학부에 입학한뒤 1950년 졸업했다. 그리고 같은해 통상산업성의 공무원으로 취직해 통상산업대신 비서관, 통상산업성 중공업국 산업기계과장을 역임했다.1969년 통상산업성을 퇴사하고 자민당에 입당해 정치인 생활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해 12월 열린 제3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농림대신, 자치대신 겸 국가공안위원장을 지냈고 요시다 시게루의 최측근이도 했던 스토 히데오(周東英雄)의 후계자로 구 야마구치 제1구에 입후보해 3위로 첫 당선에 성공했다. 하야시가 3위로 당선된 이유는 기시 노부스케 전 총리의 사위인 아베 신타로의 기반이 두터웠기 때문이다.[1]
하야시는 당선 이후 사토 에이사쿠 총리의 파벌인 주산회(사토파)에 가입했고, 1972년 사토파가 다나카 가쿠에이에게 넘어가자 목요회(다나카파)의 결성에 참가했다. 이후 경제기획정무차관, 대장정무차관, 자민당 경리 국장 등의 직책을 역임했다.
1982년 11월 제1차 나카소네 야스히로 내각이 출범하자 후생대신 직에 임명되면서 첫 입각했다. 당시에는 통상산업성 관료 출신 정치인이 드물었기에 국제금융정책을 중심으로 한 정책통 의원으로 이름을 떨쳤다. 이후 다나카파 내에서 가네마루 신, 다케시타 노보루와 함께 당인파 의원 대표로 활동했고, 미야자와 기이치가 결성한 범 보수 정책회인 히라카와회의 사무국장을 맡아 미야자와와의 친분을 쌓았다.
1986년 다나카파의 분열 당시에는 다케시타를 중심으로 한 경세회의 창설에 참여하지 않고, 니카이도 스스무, 에사키 마스미 등의 중진의원들과 함께 니카이도 그룹을 결성했다. 1989년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에서는 니카이도 그룹 대표로 굉지회(미야자와파)의 지지를 얻었으나 경세회의 지지를 받은 가이후 도시키에게 밀려 낙선하였다.
1990년 제3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이후 니카이도 그룹이 해산하자 하야시는 미야자와 기이치의 파벌인 굉지회로 이적했다. 가이후 내각 ~ 미야자와 내각 시절에는 PKO 법안 특별위원장에 임명되어 PKO 법안 통과에 매진했다.
1992년 미야자와 개조내각 발족 시 대장대신에 임명되었다. 이 후 자민당 세제조사회장을 맡으며 자민당 세조에 큰 영향력을 끼쳤다. 1996년 제4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를 앞두고 아베 신타로 전 외무대신의 차남인 아베 신조와 지역기반(시모노세키시)이 겹치자 당시 초선 의원인 아베가 지역구로, 9선 중진 의원인 하야시는 주고쿠 비례구로 전출되었다.[2] 2000년에는 훈1등 욱일대수장을 수여 받았고, 이듬해인 2001년 자민당 금융조사 회장에 취임했다.
2003년 차기 중의원 선거에 불출마를 선언하고 정계를 은퇴했으며, 이후 주간 우호 연맹 의원 회장을 맡으며 조용히 여생을 보내다 2017년 2월 3일 향년 8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3. 소속 정당
소속 | 기간 | 비고 |
| 1969 - 2017 | 정계입문 정계은퇴 사망 |
4. 선거 이력
연도 |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1969 | 제3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구 야마구치 1구 | | 71,447 (19.6%) | 당선 (3위) | 초선 |
1972 | 제33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75,004 (19.7%) | 당선 (2위) | 재선 | ||
1976 | 제3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76,806 (21.1%) | 3선 | |||
1979 | 제3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87,578 (23.3%) | 4선 | |||
1980 | 제3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86,948 (21.7%) | 5선 | |||
1983 | 제37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71,472 (18.7%) | 6선 | |||
1986 | 제3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81,312 (20.3%) | 7선 | |||
1990 | 제3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87,473 (21.2%) | 당선 (3위) | 8선 | ||
1993 | 제4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65,709 (16.3%) | 당선 (2위) | 9선 | ||
1996 | 제4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비례 주고쿠 블록 | 1,578,140 (-%) | 당선 (4위) | 10선 | |
2000 | 제4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364,938 (-%) | 당선 (3위) | 11선 |
5. 기타
- 하야시 요시로의 부친인 요시스케는 재선 중의원 의원, 산요전기, 시모노세키 정밀공업 등의 기업의 중역을 맡았고, 증조 할아버지인 하야시 헤이시로(林平四郎, 1857-1941)는 사업가이자 야마구치 현의원, 중의원 의원을 역임하였다.
[1] 하야시의 당선 동기로 자민당에는 오자와 이치로, 하타 쓰토무, 모리 요시로, 와타나베 고조, 와타누키 다미스케, 하마다 고이치, 일본사회당에는 도이 다카코, 일본공산당에는 후와 테츠조 등 일본 정치 역사에 이름을 남긴 거물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하여 이해 총선에서 첫 당선된 국회의원들은 꽃의 쇼와 44년(1969년)조(花の昭和44年組)라는 별칭이 붙었다.[2] 2022년 아베 신조 총리가 아베 신조 피살 사건으로 인해 사망하자 지역구인 야마구치 4구가 인구수 감소로 야마구치 3구에 통폐합 되었는데, 3구의 현직 의원이 요시로의 장남인 하야시 요시마사 라는 것을 생각하면 참 묘한 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