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임 지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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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국 제60대 운수대신 | |
일본국 제59대 통상산업대신 | |
<colcolor=#fff><colbgcolor=#3CA324> 일본국 제35-41, 43대 중의원 의원 사토 신지 佐藤信二 | Satō Shinji | |
출생 | 1932년 2월 8일 |
야마구치현 쿠마게군 타부세정 | |
사망 | 2016년 5월 3일 (향년 84세) |
도쿄도 세타가야구 | |
학력 | 도쿄도립대학 부속고등학교 (졸업) 게이오기주쿠대학 법학부 (법학 / 학사) |
정당 | |
의원 선수 | 9 (중), 1 (참) |
의원 대수 | 35, 36, 37, 38, 39, 40, 41, 43 (중) 10-11 (참) |
지역구 | 舊 야마구치 2구 → 야마구치 2구(주고쿠 블록 비례대표) |
악력 | 일본강관[1] 사원 8선 중의원 오키나와 개발 정무차관 제60대 운수대신 제59대 통상산업대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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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의 정치인. 전직 일본 총리 사토 에이사쿠의 차남이다.2. 생애
1932년 2월 8일 야마구치현 쿠마게군 타부세정에서 정치가 사토 에이사쿠와 사토 히로코(佐藤寛子)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유년 시절 아버지를 따라 일찍이 도쿄로 이주했고, 도쿄도립대학 부속고등학교를 거쳐 게이오기주쿠대학 정치학부를 졸업했다. 이후 일본강관 주식회사(현 JFE)에 평사원으로 입사해 과장까지 승진했고, 1974년 아버지의 정당인 자유민주당으로부터 참의원 선거 출마 요청을 받아 일본강관을 퇴사했다. 1974년 제10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 전국구 후보로 출마해 전체 17위로 당선되었다. 당선 이후 오키나와 개발 정무차관직에 임명되었다. 1976년 아버지 에이사쿠가 급성 심부전으로 사망하자 사토 에이사쿠 후원회의 요청을 받아 차기 중원선에 후계자로 지명되었다.1979년 제3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구 야마구치 2구에서 "(부친) 에이사쿠 11회째의 선거"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전체 1위로 당선되어 중의원 진출에 성공했다. 이후 아버지의 파벌인 주산회의 계보를 잇는 목요회(다나카파)에 가입했고, 1984년 다나카파 분열 당시에는 다케시타 노보루의 경세회에 소속되었다. 1992년 사가와 규빈 사건으로 다케시타파가 하타 쓰토무의 개혁포럼21과 오부치 게이조의 오부치 그룹으로 분열되자 노나카 히로무, 나카무라 기시로 등과 함께 오부치파에 잔류했다.
1988년 다케시타 개조내각에서 제60대 운수대신으로 첫 입각했고, 1996년 제2차 하시모토 내각에서 제59대 통상산업대신에 오르며 2번째로 입각하였다. 1998년 일본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에서는 헤이세이 연구회의 오부치 게이조의 출마를 반대하며 독자 출마한 가지야마 세이로쿠를 지지하며 파벌을 탈퇴했다.[2] 하지만 가지야마는 오부치의 득표율에 절반인 득표율로 3위 중 2위로 낙선했다.[3]
2000년 제4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자민당 현직 의원으로 야마구치 2구에 출마했으나 신지의 고종사촌인 마츠오카 마츠오의 지반을 이어받은[4] 민주당의 히라오카 히데오에게 밀려 낙선해 당시 정계에 충격을 주었다. 이후 2003년 제43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도 히라오카에 밀려 비례대표 당선에 만족해야했다.
2005년 제4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를 앞두고 불출마 선언과 함께 정계은퇴를 선언했고, 후계자는 지명하지 않은채 갑작스럽게 은퇴했다. 그러자 자민당 야마구치현련에서는 후임 후보로 야마구치현 현의원 출신인 후쿠다 요시히코를 공천했고, 후쿠다는 그해 선거에서 히라오카를 누르고 당선됐지만 이와쿠니시 시장 선거 출마를 위해 2년 반 만에 중의원직을 사퇴했다.
2008년 사토는 중화민국의 총리인 천수이볜에게 일화의원간담회(日華議員懇談会)[5]의 전 회장으로서 오랜 세월 동안 일본과 대만의 우호에 기여한 공적을 받들어 히라누마 다케오와 함께 대수경성훈장(大綬景星勲章)을 수여받았다.
2009년 도쿄도 세타가야구에 위치한 사저에 보관하고 있던, 1972년 부친 사토 에이사쿠와 미국 대통령 리처드 닉슨의 비밀 합의서를 공개하였다. 합의서의 내용은 오키나와 반환에 있어 유사 시 미군이 오키나와에 핵병기를 비핵 삼원칙에 위반해 반입하는 것을 용인하는 내용이었다.
2016년 5월 13일, 도쿄 세타가야구의 병원에서 심부전으로 인해 향년 8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사후 정3위가 수여되었다.
3. 소속정당
소속 | 기간 | 비고 |
| 1974 - 2016 | 입당 정계은퇴 사망 |
4. 선거이력
연도 |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1974 | 제10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 | 전국구 | | 23,332,773 (44.3%) | 당선 (17위) | 초선[6] |
1979 | 제3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구 야마구치 2구 | 85,619 (19.0%) | 당선 (1위) | 초선 | |
1980 | 제3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85,186 (18.8%) | 재선 | |||
1983 | 제37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71,610 (15.6%) | 당선 (4위) | 3선 | ||
1986 | 제3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81,939 (17.4%) | 당선 (2위) | 4선 | ||
1990 | 제3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81,023 (16.6%) | 당선 (4위) | 5선 | ||
1993 | 제4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75,735 (15.8%) | 당선 (3위) | 6선[7] | ||
1996 | 제4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야마구치현 제2구 | 81,108 (38.61%) | 당선 (1위) | 7선 | |
2000 | 제4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97,355 (44.29%) | 낙선 (2위) | |||
2003 | 제43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91,087 (42.87%) | 당선 (2위) | 8선[석] |
5. 여담
- 좌우명은 우공이산이었다.
- 아내 가즈코는 도쿄가스(東京瓦斯) 사장과 회장을 20년 가까이 지내며 가스업계에 군림한 안자이 히로시의 장녀이다. 안자이 가는 미키 다케오 가문, 하토야마 가문 그리고 미치코 상황후의 친정 쇼다 가문 과도 혼맥을 맺었기에 사토 가는 안자이 가를 통해 일본 황실과도 연결된다.[9]
6. 둘러보기
기시·사토·아베 가문 | |||
{{{#!wiki style="margin:-0px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 <colcolor=#fff><colbgcolor=#D7003A> 1대 | <rowcolor=#D7003A> 아베가 | 기시·사토가 |
아베 간 | 형 기시 노부스케 동생 사토 에이사쿠 | ||
2대 | <rowcolor=#D7003A> 장남 (아베가) | 차남 (사토가) | |
아베 신타로 | 사토 신지 | ||
처 아베 요코 | |||
3대 | <rowcolor=#D7003A> 차남 (아베가) | 삼남 (기시가) | |
아베 신조 | 기시 노부오 (입적) | ||
처 아베 아키에 | 처 기시 치카코 | ||
4대 | <rowcolor=#D7003A> | 손자 | |
기시 노부치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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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日本鋼管, 현재는 JFE엔지니어링(JFEエンジニアリング)[2] 여담이지만 이 당시 초선의원이었던 스가 요시히데도 파벌을 탈퇴해 현재까지 무파벌 신분을 유지하고 있다.[3] 3위는 고이즈미 준이치로.[4] 참고로 마츠오카는 고노에 후미마로 내각에서 외무대신을 지낸 마츠오카 요스케(松岡洋右, 1880~1940)의 조카로, 아버지 미츠오와 장인 사카모토 미노루가 히카리시 시장과 중의원을 지냈기 때문에 지역민들에게 적지 않은 인지도가 있었다.[5] 일본 - 타이완 의원 간담회[6] 1979.9.16 의원직 사퇴 (중의원 선거 출마)[7] 일본 중의원 선거의 마지막 중선거구제.[석] 석패율제 당선[9] 사토-기시 가는 또 다른 경로를 통해 황실과 연결이 되는데 사토 에이사쿠의 사촌동생이 요시다 시게루의 집안에 장가를 가서 이를 통해서도 황실과 연결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