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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2-29 13:51:15

노나카 히로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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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대
마스다 가네시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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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2대
후쿠나가 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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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카이도 스스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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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86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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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임한 직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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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나카 히로무
제43대
다나카 히데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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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공안위원장 (1948년~195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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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지 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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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오키 긴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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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본국 제47대 자치대신 및 제56대 국가공안위원장
일본국 제63대 내각관방장관
노나카 히로무
野中広務 | Nonaka Hiromu
파일:노나카 히로무.png
출생 <colbgcolor=#ffffff,#191919>1925년 10월 20일
파일:일본 제국 국기.svg 일본 제국 교토부 난탄시
사망 2018년 1월 26일 (향년 92세)
교토부 교토시 시모교구
재임기간 제48대 자치대신
제56대 국가공안위원장
1994년 6월 30일 ~ 1995년 8월 8일
제63대 내각관방장관
1998년 7월 30일 ~ 1999년 10월 5일
제38대 오키나와개발청 장관
1999년 1월 14일 ~ 1999년 10월 5일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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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3333cc> 학력 구제 교토부립 소노베 중학교 (졸업)
(現 교토부립 소노베 고등학교)
소속 정당

지역구 舊 교토 2구 → 교토 4구
의원 선수 7 (중)
의원 대수 36[1], 37, 38, 39, 40, 41, 42
약력 일본국유철도 오사카철도국 직원
중의원 의원 다나카 고우 비서
소노베정의회 의원 (3선)
소노베정장 (2선)
교토부의회 의원 (3선)
교토부 부지사
사회복지법인 교토 태양의 동산 이사장
舊 교토부 제2구 중의원 의원
자치대신 겸 국가공안위원장
교토부 제4구 중의원 의원
내각관방장관 겸 오키나와개발청 장관
자유민주당 간사장
전국토지개량사업단체연합회 회장
}}}}}}}}}

1. 개요2. 생애3. 여담4. 소속 정당5. 선거 이력

[clearfix]

1. 개요

1925년(다이쇼 11년) 10월 20일에 태어난 일본정치인. 교토부 출신이다. 대학도 못 나온 부라쿠민임에도 전쟁 후 중의원 의원 비서를 거쳐 소노베정[2]의회 의원부터 시작해서 행정에 종사해 소노베정 정장, 교토부의회 의원, 교토부 부(副)지사를 거쳐 중의원 의원이 되고, 마침내 자유민주당 간사장 자리까지 오르는 등 한때 정치적 영향력이 상당했으나 고이즈미 준이치로와 총리 자리를 두고 하시모토 류타로, 후지이 다카오를 내세워 두 차례 대리전을 펼치고 전부 패하였다. 구 교토 2구가 지역구였으며, 소선거구제로 개편된 이후에는 교토부 제4구가 지역구였다.

2. 생애

1925년 교토부 난탄시에서 태어났다. 교토부립 소노베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1943년에 오사카시의 철도관리국에 취직했으며, 당시 사토 에이사쿠를 만났었다. 1945년 3월에 일본군에 입대하였고 일본이 패전하자 다시 철도관리국으로 돌아왔다. 전쟁 후 청년단 활동을 하면서 당시 똑같이 각지에서 청년단 활동을 하던 다케시타 노보루, 하마다 고이치[3]와 알고 지냈다. 중의원 의원 다나카 고우의 비서를 거쳐서 1951년부터 소노베정의원으로 정치 경력을 시작했다. 이후 정의원 3선, 정장 재선, 부의회 3선을 거쳐 1978년부터 교토부 부(副)지사를 지내고 1983년 舊 교토 2구 지역구를 바탕으로 중의원에 등원한다. 1994년 무라야마 내각에서 처음으로 국무대신 직을 맡는데, 보직은 자치대신과 국가공안위원장이었다. 1998년엔 내각관방장관을 지내고 2000년엔 중의원 7선으로 자민당 간사장에 오른다.

노나카는 2001년 자민당 대표 선거에서 총리 후보중 하나로 꼽혔으나 고사하고[4], 대신 하시모토 류타로를 밀었다. 그러나 하시모토 류타로는 고이즈미 준이치로의 돌풍에 밀려 패배한다.

2003년에 자민당 대표 선거에서 다시 자기가 밀던 후보인 후지이 다카오가 고이즈미에게 패배하자 정계 은퇴를 한다. 2009년부터는 리츠메이칸대학의 객원교수로 출강하고 있다. 2011년엔 자민당을 탈당했다.

아소 다로가 자기 파벌의 회합 자리에서, 자민당 총리 후보 중 하나였던 노나카 히로무를 비난하면서 한 발언이 "노나카 히로무 같은 부라쿠민을 일본 총리로 세울 수는 없다"였다고 한다. 아소는 일본 신분 사회상의 최상위계급 출신으로, 그의 여동생(노부코 비)이 천황가에 시집갈 정도의 집안이었고, 평소에도 약자뿐 아니라 일반 국민에 대해서도 멸시하는 시선을 여러 차례 드러낸 바 있다. 저 말에 격분한 노나카 히로무는 자민당 총무회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総務大臣に予定されておる麻生政調会長。あなたは大勇会の会合で『野中のような部落出身者を日本の総理にはできないわなあ』とおっしゃった。そのことを、私は大勇会の三人のメンバーに確認しました。君のような人間がわが党の政策をやり、これから大臣ポストについていく。こんなことで人権啓発なんかできようはずがないんだ。私は絶対に許さん!

총무대신에 예정된 아소 정조회장[5], 당신은 대용회 모임 자리에서 "노나카 같은 부라쿠민 출신을 일본 총리로 세울 수는 없지"라고 말했다. 나는 이 사실을 대용회 구성원 세 사람에게 이미 확인했다. 너 같은 인간이 우리 당의 정책을 하고, 앞으로 차기 (총리)대신에 가까워지고 있다. 이딴 걸로 인권 계몽 따위를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나는 절대 용서할 수 없다!" 우오즈미 아키라, <노나카 히로무 차별과 권력(野中広務 差別と権力)> 2003년 9월 11일

그냥 읽어도 분노가 느껴지는데, 한가지 고려해야 점은 노나카의 출신지이다. 노나카는 교토 출신으로, 타테마에가 일상인 일본인들조차 교토 사람들의 타테마에를 한번에 눈치채기 어려워한다고 한다. 당연히 노나카도 이 교토식 타테마에가 몸에 배였을 것인데, 그런 노나카가 이렇게 크게 분노한 것은 그냥 격노한 수준이 아니라 그야말로 너죽든 나죽든 사생결단을 내자는 수준인 셈이다. 더욱이 당시 노나카는 77세의 나이로 노회한 정치인이었는데, 이런 노나카를 아소가 출신을 가지고 걸고 넘어져서 폭발하게 한 것이었다.

노나카는 부라쿠민 출신으로 정계를 입문했을 때 자신이 부라쿠민 출신임을 밝히고 부락해방동맹 등의 사회운동과 거리 두기를 했다. 2003년에 아소 다로가 "천한 부라쿠민 출신인 노나카가 총리를 해선 안 된다"고 중세식 신분차별을 한 적이 있다. 이에 노나카가 격분하여 아소 다로를 규탄했고, 노나카의 규탄에 아소 다로는 얼굴이 새빨갛게 상기되어 아무 말도 못했고, 훗날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해명했다.[6]

2018년 1월 26일 교토시 시모교구에서 향년 9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3. 여담

노나카가 부라쿠민이어서 총리가 못되었다는 얘기가 한국 인터넷에 널리 퍼졌으나 사실이 아니다. 노나카는 자민당 대표 선거(총리 선거)에 나온 적도 없고, 노나카가 밀던 후보가 패배한 건 고이즈미의 개혁론이 먹혀들어서 그런 거다. 물론, 부라쿠민 출신인 노나카가 밀어준 사람이라는 점때문에, 그의 계파 소속 정치인들이 은근히 무시당했을 가능성은 있다. 부라쿠민 못지않게 차별받는 계층인 재일 한국인 출신인 아라이 쇼케이가 뇌물수수 혐의로 기소되자 그 충격으로 자살했는데, 그 직전에 "나는 자이니치(재일 한국인)라서 억울하게 당했다!"라며 절규했다는 걸보면 충분히 가능한 얘기다[7].

1999년 경 "노나카는 정치권에서야말로 거물 관방장관으로 높으신 분이지만, 동화사회에서 자신의 지위는 낮다. 이노우에 잇세이 의원이나 우에다 다쿠미 전 의원이 훨씬 견고한 지반을 가지고 있다"고 괴소문이 나간 적이 있다(...).

노나카의 본가는 교토의 망간 광산으로 끌려온 조선인 징용자 가운데 탈출한 자들을 숨겨줬다고 한다. 어린 시절에 노나카를 돌봐준 사람도 조선인 여성이었다[8]. 노나카는 아래와 같이 말한 바 있다.
"한반도에서 끌려온 사람들이 학대받는 걸 몇 번이나 보아 왔다. 나에게는 (그 사람들에게) 매우 지독한 꼴을 당하게 했다는 죄악감이 있다. 그런 것들을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에 불식시키고, 한반도와의 신뢰관계를 만들어두고 싶다."
「朝鮮半島から連れて来られた人たちが虐待を受けた姿を何度も見てきた。僕には大へんひどい目にあわせたという罪悪感がある。そういうものを我々が生きとる間に払拭して、朝鮮半島との信頼関係をつくっておきたいんや」

북한이나 중국에 대해서도 다른 일본 정치인보다 우호적인 편이다. 납북 일본인 문제를 들어 북한에 대한 식량지원을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인도적 차원의 문제라며 발언하기도 했다. 다만 북한을 방북했을 땐 이런 나라엔 다신 오고 싶지 않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위안부난징 대학살을 인정하며 센가쿠 열도 문제 등에 대해서도 중국 측을 배려하여 발언했다.

자민당 정치인 중에서 상당히 리버럴한 편이었다. 같은 자민당 소속인 가토 고이치(加藤紘一, 1939-2016)[9]와 더불어 자민당 내 좌파라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10]. 전쟁을 겪은 세대라 전쟁이나 일본의 보통국가화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편. 2009년엔 정치적으로 오랜 적이었던 일본 공산당의 기관지인 아카하타와 인터뷰를 하기도 했으며, 노나카가 세상을 떠났을 때 일본 공산당 공식 SNS에서도 이 기사를 인용하며 애도의 뜻을 표하기도 했다.

다나카 마키코에게 '동안(もなか)인지 배(おなか)인지'라고 노나카의 성씨(のなか)로 언어유희를 당했다.

한신 타이거스의 팬이며 부부별성을 가능케 하는 정책을 추진하기도 했다.

4. 소속 정당

소속 기간 비고


? - 2010 정계 입문
정계 은퇴


[[무소속(정치)|
무소속
]]
2010 - 2016 탈당


2016 - 2018 복당
별세

5. 선거 이력

<rowcolor=#fff> 연도 선거 선거구 정당 득표수(득표율) 당락 비고
195? 소노베정의회의원 선거 소노베정

? (?%) 당선 (?위) 초선
195? 재선
195? 3선[11]
1958 1958년 소노베정장 선거 소노베정장 당선 (1위) 초선
1962 1962년 소노베정장 선거 재선
1967 제6회 통일지방선거 교토부의회
후나이군 선거구
당선 (?위) 초선
1971 제7회 통일지방선거 재선
1975 제8회 통일지방선거 3선
1983 제36회 일본 중의원 의원 보궐선거 (구) 교토 2구 121,890 (25.9%) 당선 (2위) 초선
제37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36,357 (18.8%) 당선 (1위) 재선
1986 제3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43,809 (19.0%) 당선 (2위) 3선
1990 제3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56,085 (17.8%) 4선
1993 제4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29,402 (15.4%) 5선[12]
1996 제4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교토 4구 100,703 (48.82%) 당선 (1위) 6선
2000 제4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21,439 (53.02%) 7선


[1] 보궐선거로 당선.[2] 현재는 난탄시로 흡수.[3] 하마다 야스카즈의 아버지[4] 아마 부라쿠민 출신이라는 점 때문에 당내 반대파들의 질시를 받을 것을 우려했을 공산이 크다. 게다가 출신 성분을 떠나서, 생년월일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상당히 고령의 나이라서, 일본 총리라는 막중한 자리에 부담을 느낀 탓도 있었다.[5] 정책조사회장. 당 정책위원회 의장쯤 되는 자리다.[6] 아소 다로 본인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해명했으나, 몇몇 의원의 증언이나 허구한 날 망언을 일삼는 그의 성격상 실제로 했다고 보는 견해가 많다.[7] 아라이 쇼케이의 죽음도 석연치않은 부분이 꽤 있는데, 단순한 뇌물수수범의 변명이라기엔 한국이나 일본이나 검사들을 동원해서 정적에게 표적수사를 지시해서 누명을 씌워 탄압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아라이 본인은 노나카 히로무랑은 달리 전형적인 보수 정치인이었지만, 어쨌든 재일 한국인 출신이 자민당 내에서 승승장구하는 걸 꼴보기 싫어한 자민당 내 주류 계파에서 검찰 측에 아라이를 표적수사하라고 지시했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8] 일제강점기부터 부라쿠민한국인들은 일본인들에게 차별받는 신세라는 공통점 때문에 동병상련을 느끼고 서로 협력하는 일이 잦았다. 때문에 노나카 일가가 한국인과 관련한 이런 훈훈한 일화가 있는 건 사실 당연하다고 볼 수 있는 부분이다. 물론, 부라쿠민 출신으로서 똑같이 차별받는 주제에 자기는 혈통상 그래도 일본인이라는 이유로 한국인을 차별하고 다니는 병맛 나는 인간들도 적지 않게 있었다.[9] 민주당 소속의 중의원 가토 고이치(加藤公一, 1964-)와는 다른 인물이다.[10] 딱히 이상할 건 없는게, 오늘날에는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 시절만 해도 좌파 성향 인사들이 대거 자민당에 가입하여 포괄정당으로서의 성향을 띄기도 했기 때문이다. 노나카 히로무는 이 시기에 정계에 몸 담았던 사람이었던지라, 그 영향을 안 받을래야 안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일이 벌어진 이유는 자민막부 소리가 나올 정도로 자민당의 정계에서의 영향력이 너무 강해서, 독자적인 정당을 차려서 군소 정치인 취급받고 묻혀지느니, 차라리 집권 여당으로 들어가서 내부에서의 개혁을 이루자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한국한나라당의 리즈시절에는 이런 경향이 좀 있었다.[11] 1958.? 사퇴 (소노베정장선거 출마)[12]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의 마지막 중선거구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