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제국 초대 문부대신 모리 아리노리 森有礼 | Mori Arinori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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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 출생 | <colbgcolor=#fff,#1F2023>1847년 8월 23일 |
에도 막부 사쓰마 번 가고시마시 (現 가고시마현 가고시마시) | |
사망 | 1889년 2월 12일 (향년 41세) |
일본 제국 도쿄부 | |
국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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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 | 도쿄도 미나토구 아오야마영원 |
재임기간 | 초대 문부대신 |
1885년 12월 22일 ~ 1889년 2월 12일 | |
학력 | 초등학교 (졸업·중퇴) 중학교 (졸업·중퇴) 고등학교 (졸업·중퇴) 대학교 단과대학 (학과1·학과2[복수전공] / 재학·학사·중퇴) |
정당 | |
직업 | 정치인, 외교관, 교육인, 법조인 |
1. 개요
일본 외교관, 정치가, 교육자, 법조인. 미국, 영국, 중화권을 왕래하며 근대 일본의 기반을 마련했다. 히토쓰바시대학의 설립자이자, 일본 정부 초대 문부대신이다.2. 생애
일본 가고시마 출생. 외교관, 정치가. 1865년 영국에 유학. 미국을 거쳐 메이지 원년(1868년) 귀국 후, 신정부에서 권판사, 공의소 의장 심의, 제도료 부총재 심의 등을 역임. 미국 근무 후의 1873년에는 명륙사를 설립하는 등, 유럽과 미국의 사상에 대한 일본의 계몽에 힘씀. 1875년에는 히토쓰바시대학 (상법강습소) 설립. 이후 주청 공사, 외무대보, 주영 공사, 참사원 의관 겸 문부성 어용부 등을 역임. 제1차 이토, 쿠로다 각 내각의 문부대신. 대일본제국 헌법 발포 당일, 국수주의자에게 습격을 받아 다음 날 사망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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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 아리노리의 일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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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 아리노리는 1847년 일본 가고시마현의 사무라이 집안에서 태어났다. 영국 유학과 미국 생활을 거쳐 1868년 귀국, 외교관으로 활동했다.
모리 아리노리는 일본 최초 의회인 공의소의 공의소의장 직무대리(公議所議長心得), 의사체재취조어용(議事體裁取調御用), 제도료 부총재 직무대리(制度寮副總裁心得) 등에 임명되어 일본 국가의 초창기 제도 개혁 사업을 담당했다.
모리 아리노리는 1870년 9월 신정부에 다시 임용되었고, 10월에는 주미국대사 격인 주미변무공사(駐米弁務公使)에 임명되어 미국으로 건너갔다. 미국에 주재하던 시절, 모리 아리노리는 일본의 교육을 어떻게 발전시켜야 할지에 대해 깊은 관심을 보였다. 그는 미국의 정치가와 학자들에게 편지를 보내 일본의 교육 정책 수립에 관한 의견을 구했다. 100여명 이상이 답변을 줬고, 이러한 의견 수집을 바탕으로 그는 1873년에 『일본의 교육』이라는 책을 출판했다. 그리고 1875년 상법강습소(현 히토쓰바시대학)를 설립했다.
이토 히로부미와는 1882년 헌법 조사를 위해 유럽을 방문했을 때 처음 만났다. 그 때 모리는 이토에게 일본의 발전과 번영을 위해서는 교육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1884년, 영국에서 돌아온 모리 아리노리는 참사원의원 및 문부성 업무담당을 맡게 되었다. 그러나 그가 문부성에 들어갈 당시, 정부에서 교육제도에 대해 간섭할 수 있는 '개정교육령'이 시행되고 있었다. 본래 1878년에 제정된 '교육령'에서는 서구적 자유주의에 기초한 교육제도가 도입되었으나, 이후 황실과 일부 인사들이 주도해 유교 정신을 교육의 핵심으로 삼는 개정 교육령을 제정했다. 그러나 모리 아리노리는 이렇게 변경된 교육령은 자신의 국가교육 지향과는 거리가 있었다고 봤다.
그 다음 해인 1885년, 몇년 전 모리의 견해에 깊은 감명을 받았던 이토는 그에게 문부성 업무를 맡길 원했다. 그리하여 이토 히로부미의 강력한 지지를 받아 제1차 이토 내각에서 일본 최초의 문부대신으로 취임했다. 취임 이후 모리는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한 기본방침을 확립했다. 그리고 교육제도의 전면적인 개혁에 착수하여 1886년에는 제학교령을 공포했다.
모리와 이토, 두 사람은 당시 발흥하던 자유민권운동이 국가의 안위를 해칠 수 있다고 여겼고, 일본이 서구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하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초월한, 국가를 우선하는 교육과 학문이 필요하다고 믿었다. 모리는 일본의 근대 교육이념을 정립하고, 이를 실천할 구체적 방법을 모색했다. 그는 충군애국정신을 배양하기 위해 집체훈련과 체조, 행군여행 등 군대식 교육을 학교에 도입했으며, 각급 학교에 천황 사진을 걸어놓고 배례의식을 거행하도록 했다.
2.1. 사망
1887년 모리는 통상적인 신토의 예법에 따라 이세 신궁의 외궁을 참배했다. 그런데 그해 11월 신문에는 '이세 신궁의 내궁을 참배한 아무개 대신이 구둣발로 배전(拜殿)에 올라 드리운 발을 지팡이로 젖혀 안을 들여다 보았다.'는 음해성 기사가 보도되었다. 신문 지면에는 누구인지 이름이 나오지 않았지만, 기사를 읽은 독자들은 대부분 모리가 일을 저질렀다고 지레짐작했다고 한다. 특히 이세 신궁의 내궁은 황조신 아마테라스를 모시는 곳이므로 특히 신성시했기 때문에 더욱 공분을 샀다. 모리는 내궁에 발도 들이지 않았고 예법에 어긋난 짓도 하지 않았으므로 억울했을 것이다.[2] 이 사건은 실제로 일어난 것은 아니지만 이세 신궁 불경사건(伊勢神宮不敬事件)이라고 부른다.모리의 비서는 훗날 모리가 받은 음해가 이세 신궁 신직(교직자)의 수작질이라 말하였다. 모리가 신토계와 사이가 매우 나빴기 때문이다. 당시 일본에서는 이세 신궁 같은 대형 신사에서 역서(曆書)를 배포하곤 하였는데, 이런 역서가 달력으로도 쓰였기 때문에 신사 입장에서는 쏠쏠한 자금원이 되었다. 그런데 모리는 신사의 역서 배포를 금지하고 대학에서 현대적으로 계산하여 달력을 배포하게 하자고 주장하였다. 이 주장은 당시 이세 신궁 등의 한 가지 자금원을 없애버리자는 뜻이기도 했다. 안 그래도 급진적인 개화론자라 '학교에서 그리스도교를 가르치려 한다.' 하는 등 음해를 받았던 모리는 신토계와 갈등을 빚었다.
1889년 2월 11일, 문부대신으로서 제국 헌법 반포행사에 참석하고자 관저에서 예복을 입으며 준비하던 모리에게 니시노 분타로(西野文太郎)라는 청년이 방문을 청했다. 니시노는 대신(大臣) 암살에 관한 중요한 이야기가 있다면서 방문을 청해 관저에 들어왔는데, 모리가 옷을 입은 뒤 이야기를 듣고자 2층에서 내려오자 갑자기 품에서 부엌칼을 꺼내 그를 찔렀다. 범인 니시노는 모리를 공격한 직후에 모리의 경호원에게 칼로 역공을 받아 현장에서 사망했다. 모리는 즉사하지 않았기에 의사에게 치료를 받았으나, 이튿날 12일 오전 5시에 향년 만 41세로 사망하였다.
니시노가 범행을 하기 전에 남긴 문서에서 자신이 이세신궁 불경사건 때문에 모리를 죽이려 한다고 설명하였다. 2차대전 패전 이전까지만 해도 많은 일본인들이 니시노에게 공감하고 동정하여 그의 무덤에 많이 참배했다고 한다.
2.2. 연도별 행적
- 1847년 7월 13일(0세) 사쓰마 가고시마 성 밑 마을에서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 1858년(12-13세) 사쓰마 번 학교 ‘조시칸’에서 한자학 수학
- 1864년(16-17세) 사쓰마 번의 양학 학교 ‘개성소’ 입학. 영어 강의 수강
- 1865년(17-18세) 영국으로 밀항하여 유학, 사쓰마번 첫 번째 영국 유학생이 되었다. 런던에서 쵸슈 고걸(이노우에 분타/이노우에 가오루, 엔도 긴스케, 야마오 요조, 이토 히로부미, 노무라 야키치/이노우에 마사루) 등과 만난다. 이후 영국에서 러시아로 건너갔고, 그곳에서 로렌스 올리판트의 초대를 받아 다시 미국으로 건너갔다. 미국에서는 신종 종교가 토마스 레이크 해리스의 교단과 생활을 같이하며 기독교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또한, 미국의 교과서를 수집했다.
- 1868년(20-21세) 귀국 후, 징시 외국관 권판사, 학교 조사를 겸직
- 1870년(22-23세) 쓰시마 막부 내에 영어학 학원을 설립
- 1870년 10월~11월(23세) 요코하마에 번역소를 열고, 번역업 및 외국 무역 거래의 중개업에 종사, 성공을 거두고 있던 야노 지로를 추천하여 외무성에 영입
- 1871년 1월(23-24세) 소변무사로서 미국으로 건너감
- 1872년(24-25세) 미국 중변무사, 이후 미국 대리공사로 승진
- 1872년(24-25세) 영어의 일본어화인 ‘국어 외국어화론’ 주장
- 1873년(25-26세) 뉴욕에서 『일본의 교육』을 출판
- 1873년 7월(25-26세) 미국에서 귀국. 부국강병을 위해 인재 양성이 급선무이고 '국민 각각이 지적으로 향상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유럽과 미국에서 본 ‘학회’를 일본에서 실현하려고 후쿠자와 유키치, 가토 히로유키, 나카무라 마사나오, 니시 아마네, 니시무라 시게키, 츠다 마사미치, 미츠쿠리 린쇼 등에게 호소, 일본 최초의 근대적 계몽 학술 단체인 '명륙사'를 결성하여 초대 사장이 되었다. 회원에는 구 막부 관료인 '개성소'의 관계자 및 '경영의숙' 문하생의 관민 조화로 구성되었다. 학자뿐만 아니라 구 다이묘, 정토진종 본원사파, 일본은행, 신문사, 구 사족 등이 참가했다.
- 1875년(27-28세) 히토쓰바시대학 (도쿄상과대학)의 모태 상법강습소 설립
- 1877년(29-30세) 중국 청나라에서 귀국한 후 외무경 대리로 승진
- 1878년(30-31세) 외무대부로 승진
- 1879년(31-32세) 영국 공사에 임명, 영국에 부임
- 1884년(36-37세) 영국에서 귀국한 후 삼지원 의원과 문부성 유용부를 겸임
- 1884년 12월 14일 "학습원" 강당에서 열린 대일본 교육회의 상시회에서 오오키 요시노리와 함께 연설
- 1885년 12월 22일(38세) 대정관 제도가 폐지되면서 내각 제도가 시작되자, 제1차 이토 내각에서 초대 문부대신으로 취임. 교육행정에서 다양한 개혁을 이뤘고, 이러한 정책은 이후 교육행정에도 이어짐.
- 1886년(39셰) 학위령 발령, 여러 학교 제도 개선
- 1887년(40세) 재혼 및 이세 신궁의 외궁 참배
- 1888년(41세) 구로다 내각이 출범하자 문부대신으로 유임
- 1889년(42세) 제국헌법 반포행사 참석을 위해 관저에서 준비하던 중 피습당해 사망
2.3. 한국 관련 행적
메이지 천황이 구로다를 조선 사절에 임명하기 약 한 달 전인 11월 10일, 외무성 모리 아리노리(森有禮)를 청나라에 파견할 특명전권 공사에 임명한 바 있다. 일본 공사 모리 아리노리와 중국 청나라 북양대신 이홍장[3]은 톈진(天津; 천진)에서 대담하게 되었다. 이들이 회동하게된 이유는 조선이 청나라의 속국인지에 대한 여부를 담판 짓기 위함이었다.모리는 앞서 메이지 천황으로부터 운요호 사건을 조선의 폭거로 규정하고, 이를 명분으로 조선에 파병한다는 사실을 중국 청나라에 통보 및 고지하라는 훈령을 받았다. 메이지 천황은 이에 대해 청나라가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보고 청나라와도 전쟁을 할지, 아니면 조선만 침공할지를 결정할 계획이었다. 모리는 이 회담에서 조선은 중국의 속국이 아닌 독립국임을 주장했다.
모리 아리노리: 조선은 인도와 함께 아시아에 있으며, 중국 속국이 아니다.
이홍장: 조선은 청나라로부터 정삭을 받드는데 어찌 속국이 아니냐?
모리 아리노리: 전세계 각국이 모두 말하기를 조선은 단지 중국에 조공하고 책봉을 받은 것에 불과하며, 중국은 조선으로부터 전량(錢糧)을 받아들이지 않고, 조선의 정치에도 관여하지 않으니 속국으로 치지 않는다.
이홍장: 조선이 중국에 소속된 것이 수천 년임을 어느 사람이 모르나? 청일수호조규의 이른바 ‘소속방토’의 토(土)자는 중국 각성을 지칭하니 이는 내지를 내부 소속이라 여겨 전량을 징수하고 정사를 관여함이요, 방(邦)자는 조선과 여러 나라를 지칭함이니, 이는 외번이고 외속이라 여겨 전량과 정사는 중국 본국에서 관리함이다. 이는 명나라 이전, 예로부터 그러했고 청조(清朝)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다. 어찌 조선이 중국의 속국이 아니라 말하나?
모리 아리노리: (무시) 일본은 조선과 화해하기를 몹시 원하지만, 조선은 일본과 더불어 화해하고자 하지 않는다.
이홍장: 이는 귀국과 화해하지 않으려 하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나라가 작음, 즉 소국(小國)임을 알아 삼가 지키며 감히 응수하지 못하는 것이다. 조선이 각국에 대해 모두 그러하다. 일본에만 그런 것이 아니다.
모리 아리노리: 일본과 조선은 이웃나라다. 그래서 반드시 화해해서 소통하려 하는데, 조선은 어째서 그렇게 하려 하지 않을까?
이홍장: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을 침략한 후 아마도 의혹과 염려가 없지 않을 것이다.
모리 아리노리의 측근: 도요토미 히데요시 이후에 일본과 고려는 일찍이 왕래했는데 중간에 갑자기 끊어졌고 몇 년 전 조선과 사신을 접대하기로 약정한 후, 일본이 의관을 개변한 후, 국서의 제도가 변하자 조선은 국서를 접수하지 않고 있다.
이홍장: 이는 자연스런 현상이다. 조선은 감히 서양과도 통교하지 않는다. 일본이 서양제도로 바꾸니 조선은 스스로 당연하게 의혹과 공포를 일으켜 일본과 왕래한다면, 다른 나라도 즉시 따라 올 것이라 두려워하는 것이다.
모리 아리노리의 측근: 종전에는 사신을 거절하는 데 지나지 않았는데, 근래에 일본 병선이 조선 해변에 이르러 담수를 취하자 조선이 즉시 대포를 발사해 우리 (일본) 군함을 손상시켰다.
이홍장: 일본의 군사 병선이 조선의 해구로 가서 수심을 측량했다. 만국공법에 의하면 해안 10리 이내는 본국의 영토에 속한다고 돼 있다. 일본이 조선과 통상하지도 않았으니, 본래 가까이 가서 측량해서는 안 된다. 조선이 대포를 쏜 것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모리 아리노리: 중국·일본은 서양 나라와 만국공법을 인용할 수 있다. 하지만 조선은 우리와 화약하지 않았으니 공법을 인용할 수 없다.
이홍장: 비록 그렇다고 해도 일본이 가까이 가서 측량해서는 안 된다. 이는 일본의 잘못이 앞에 있는 것이다. 조선이 갑자기 대포를 쏜 것은 작은 잘못이 없다 할 수 없지만, 일본이 또 상륙해 조선의 포대를 파괴하고 조선 사람들을 살상했으니, 이는 또 일본의 잘못이다. 조선은 가만히 있는데, 일본이 조선을 흔드니 어떻나? 사신을 보냈는데 받지 않는 것은 예전에도 있었다. 중국 원나라 때 두 차례 사신을 보내 일본에 갔는데 일본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북조 때 일본이 군대를 이끌고 원나라 사신을 살해했다.
모리 아리노리: (무응답) 이후에 아마도 전쟁을 면하기 어렵겠다.
이홍장: 조선, 중국, 일본은 함께 아시아에 있다. 만약 전쟁을 벌인다면, 조선은 중국의 속국이고 일본이 이미 협약을 심하게 어겼으니, 중국이 어떻게든 처치할 것이다. 우리는 한 대륙에 살고 있으니, 스스로 의혹과 피바람을 일으킨다면 어찌 유럽의 웃음거리가 되지 않겠나?
출처: 「일본사신임유례부사정영녕[4]래서오담절략(日本使臣森有禮副使鄭永寧來署晤談節略) 1875년 12월」
이홍장: 조선은 청나라로부터 정삭을 받드는데 어찌 속국이 아니냐?
모리 아리노리: 전세계 각국이 모두 말하기를 조선은 단지 중국에 조공하고 책봉을 받은 것에 불과하며, 중국은 조선으로부터 전량(錢糧)을 받아들이지 않고, 조선의 정치에도 관여하지 않으니 속국으로 치지 않는다.
이홍장: 조선이 중국에 소속된 것이 수천 년임을 어느 사람이 모르나? 청일수호조규의 이른바 ‘소속방토’의 토(土)자는 중국 각성을 지칭하니 이는 내지를 내부 소속이라 여겨 전량을 징수하고 정사를 관여함이요, 방(邦)자는 조선과 여러 나라를 지칭함이니, 이는 외번이고 외속이라 여겨 전량과 정사는 중국 본국에서 관리함이다. 이는 명나라 이전, 예로부터 그러했고 청조(清朝)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다. 어찌 조선이 중국의 속국이 아니라 말하나?
모리 아리노리: (무시) 일본은 조선과 화해하기를 몹시 원하지만, 조선은 일본과 더불어 화해하고자 하지 않는다.
이홍장: 이는 귀국과 화해하지 않으려 하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나라가 작음, 즉 소국(小國)임을 알아 삼가 지키며 감히 응수하지 못하는 것이다. 조선이 각국에 대해 모두 그러하다. 일본에만 그런 것이 아니다.
모리 아리노리: 일본과 조선은 이웃나라다. 그래서 반드시 화해해서 소통하려 하는데, 조선은 어째서 그렇게 하려 하지 않을까?
이홍장: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을 침략한 후 아마도 의혹과 염려가 없지 않을 것이다.
모리 아리노리의 측근: 도요토미 히데요시 이후에 일본과 고려는 일찍이 왕래했는데 중간에 갑자기 끊어졌고 몇 년 전 조선과 사신을 접대하기로 약정한 후, 일본이 의관을 개변한 후, 국서의 제도가 변하자 조선은 국서를 접수하지 않고 있다.
이홍장: 이는 자연스런 현상이다. 조선은 감히 서양과도 통교하지 않는다. 일본이 서양제도로 바꾸니 조선은 스스로 당연하게 의혹과 공포를 일으켜 일본과 왕래한다면, 다른 나라도 즉시 따라 올 것이라 두려워하는 것이다.
모리 아리노리의 측근: 종전에는 사신을 거절하는 데 지나지 않았는데, 근래에 일본 병선이 조선 해변에 이르러 담수를 취하자 조선이 즉시 대포를 발사해 우리 (일본) 군함을 손상시켰다.
이홍장: 일본의 군사 병선이 조선의 해구로 가서 수심을 측량했다. 만국공법에 의하면 해안 10리 이내는 본국의 영토에 속한다고 돼 있다. 일본이 조선과 통상하지도 않았으니, 본래 가까이 가서 측량해서는 안 된다. 조선이 대포를 쏜 것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모리 아리노리: 중국·일본은 서양 나라와 만국공법을 인용할 수 있다. 하지만 조선은 우리와 화약하지 않았으니 공법을 인용할 수 없다.
이홍장: 비록 그렇다고 해도 일본이 가까이 가서 측량해서는 안 된다. 이는 일본의 잘못이 앞에 있는 것이다. 조선이 갑자기 대포를 쏜 것은 작은 잘못이 없다 할 수 없지만, 일본이 또 상륙해 조선의 포대를 파괴하고 조선 사람들을 살상했으니, 이는 또 일본의 잘못이다. 조선은 가만히 있는데, 일본이 조선을 흔드니 어떻나? 사신을 보냈는데 받지 않는 것은 예전에도 있었다. 중국 원나라 때 두 차례 사신을 보내 일본에 갔는데 일본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북조 때 일본이 군대를 이끌고 원나라 사신을 살해했다.
모리 아리노리: (무응답) 이후에 아마도 전쟁을 면하기 어렵겠다.
이홍장: 조선, 중국, 일본은 함께 아시아에 있다. 만약 전쟁을 벌인다면, 조선은 중국의 속국이고 일본이 이미 협약을 심하게 어겼으니, 중국이 어떻게든 처치할 것이다. 우리는 한 대륙에 살고 있으니, 스스로 의혹과 피바람을 일으킨다면 어찌 유럽의 웃음거리가 되지 않겠나?
출처: 「일본사신임유례부사정영녕[4]래서오담절략(日本使臣森有禮副使鄭永寧來署晤談節略) 1875년 12월」
상기 대화를 살펴보면 이홍장과 모리는 조선의 속국 여부와 운요호 사건의 책임소재를 놓고 논쟁을 벌였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운요호 사건의 책임소재을 두고 벌어진 논쟁 자체로만 보면 이홍장의 논리가 타당했고, 사리에도 맞았지만 모리는 불리할 때마다 청일전쟁 뉘앙스로 전쟁을 운운하며 협박조로 나왔다. 그러자 이에 대해 이홍장은 딱히 대꾸할 말이 없었고, 논리도 빈약했다.[5]
모리와의 회담을 마무리하면서 이홍장은 '도상화기 호무이익(徒傷和氣 毫無利益)'이라는 여덟 글자를 써서 선물로 전달했는데, '쓸데없이 화기를 손상할 시 아무런 이익이 없다'라는 뜻이다. 절대로 조선을 침공하지 말라는 당부였지만, 이런 당부만 가지고는 일본의 조선 침공을 막을 수 없는 청나라가 이빨 빠진 호랑이로 전락했음을 이홍장은 실감했다고 한다. 결국 이후 청일전쟁의 결과로 청나라는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했고, 일본은 조선을 강제병합했다.
3. 주요 업적
3.1. 서구 개념어 자국화
야마토 말에는 추상어가 없기 때문에, 야마토 말을 가지고서는 도저히 서양문명을 일본 것으로 만들 수 없다. 그러므로 이 기회에 차라리 영어를 국어로 채용해야 한다.
<일본의 교육>(1873)[6] 중에서
<일본의 교육>(1873)[6] 중에서
서구에서 발전한 여러 개념 중에서는 당시 아시아에는 없었던 것이 많았다. 아시아에는 없는 개념인 만큼 이를 지칭하는 말도 없었는데, 근대기의 일본에서는 서구를 따라가기 위해 번역어를 아시아의 실정에 맞게 역으로 창조해낼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서구의 사상과 발상, 용어를 도입하고 번역하는 데 있어 니시 아마네, 후쿠자와 유키치, 모리 아리노리 세 사람이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모리 아리노리는 '문명개화'를 기치로 내걸고 메이료쿠샤(明六社)를 결성해 학술적 개념어를 비롯해 일상적으로도 사용하는 개념어를 새로이 고안해 번역했다. 일본은 메이지 시대 계몽기를 거치며 무려 1만 4846가지 단어, 특히 추상적 개념어를 사전에 추가하면서 서양이 만들어 놓은 근대를 흡수해 자신의 것으로 삼는 데 어느 정도 성공할 수 있었다.
지금 21세기 대한민국에서도 많이 사용되는 철학, 예술, 이성, 과학, 기술, 논리학, 심리학, 의식, 지식, 개념, 귀납법, 연역법, 정의, 명제, 분해, 민주주의, 공산주의, 인민, 공화국 등의 개념어가 이때 고안된 번역어이다. 그리고 이러한 번역어를 통해 그간 존재하지 않았던 개념이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일례로 개인, 사회라는 개념은 원래 일본에는 없었지만, 이를 지칭하는 번역어가 새로 생기면서 이러한 개념이 사람들에게 인식되고, 받아들여졌다.
이러한 일본에서 고안해낸 번역된 개념어는 한자문화권에도 전파되어 주변국가들도 이를 통해 해당 개념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본다면 모리 아리노리는 일본을 넘어 중화권과 한반도에도 엄청난 영향을 끼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7]
일본 서구 학술어 자국화 신문명
3.2. 히토쓰바시대학 설립
1875년 8월 상업 교육의 필요성을 주장하며 후쿠자와 유키치의 지지를 얻어 도쿄 긴자 오와리마치에 일본 최초의 비즈니스 스쿨 '상법강습소'를 개설했다. 영국 대사로 재직 중이었을 때, 허버트 스펜서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미국에서 귀국한 야노 지로도 이에 참가했다.같은 해 9월 24일 모리는 사립 학교 상법강습소 개설을 도쿄 회의소에서 도쿄부 지사에게 통보했다. 그러나 그해 11월에 모리는 특명전공사로서 청국으로 파견을 나가게 되자 '상법강습소'의 경영에 관여할 수 없었다. 결국 경영권을 도쿄 회의소에 이양하여 상법강습소는 완전히 국립으로 전환되었다. 이후 시부사와 에이치, 마스다 타카시, 후지지 겐이치로가 경영 위원이 되었다.
상법강습소는 여러 변천을 거쳐 현재는 히토쓰바시대학이 되었다.
3.3. 일본 여성 운동
아리노리는 여성 교육에도 큰 관심을 가졌다. 그는 여성 교육이 국가와 사회의 진보에 큰 의의가 있다고 판단했다. 그의 교육 정책은 경제주의적인 접근과도 연결되었고, 국가나 지방의 재정을 고려하여 교육 투자의 효과를 중시했다. 아리노리는 또한 《명육잡지》에 게재된 ‘처첩론’에서 남녀평등과 부부 대등을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은 당시 언론계에 큰 충격을 주었고, 이후에도 남녀 동권에 대한 논쟁이 계속되었다. 사실상 일본 최초의 여성운동가 중 한명이다.[8]4. 평가
대한민국과 중국 일부에서는 그가 극우라는 주장도 있으나, 객관적으로 모리 아리노리는 일본의 계몽가이자 편향되지 않은 민족주의자였다. 그는 세계를 멀리 내다보는 넓은 시야와 정책 구상력을 바탕으로, 일본의 존위와 발전을 도모하려 했다. 모리 아리노리는 개인의 자유와 인권 존중이 문명 진보를 위해 필요하다고 여겼다.현재 일본에서 모리 아리노리는 "메이지의 여섯 대교육가" 중 한 명으로 손꼽힌다.
[복수전공] [2] 이세 신궁의 외궁과 내궁은 모시는 신령이 다르다. 모리가 참배한 외궁에는 식량의 신인 토요우케를, 내궁에는 황조신 아마테라스를 모신다.[3] 청나라 개혁파에 속하는 주요 인물이었다고 한다.[4] 모리 아리노리 측근[5] 이홍장이 겨우 내세울 수 있는 논리는 "우리는 한 대륙에 살고 있으니 스스로 의혹과 피바람을 일으킨다면 어찌 유럽의 웃음거리가 되지 않겠나?" 정도에 그쳤다.[6] 모리가 미국 공사로 재직하던 시절에 출간한 저서이다. 해당 단락은 국어 외국어화론에 대한 주장으로 이와 관련해 예일 대학교의 언어학 교수 윌리엄 드와이트 휘트니에게 ‘불규칙 동사를 규칙화하여 간략하게 한 영어를 일본의 국어로 할 것은 아닌가’라는 편지를 보낸 적이 있다. 그러나 휘트니는 간략화된 영어에 부정적인 견해를 나타냈고, 일본어 폐지에도 반대했다.[7] 단적인 예로 전통적으로 중국은 대명, 대청 같이 외자로된 국명만 존재하고, 국가체제를 가리키는 수식어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현재 중국의 정식국명인 중화인민공화국에서 인민과 공화국은 일본에서 번역한 일본식 한자어다.[8] 정작 본인은 이혼을 하는 등 여자관계가 순탄치 않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