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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의 우정 민영화(郵政民営化)는 일본의 우편 사업, 간이 생명 보험 사업, 우편 저금 사업의 3대 우정 사업을 민영화하는 것을 목적으로 일본 정부가 1990년대 말부터 2000년대에 걸쳐 시행한 정책이다.2. 민영화 이전
민영화 이전 일본의 우체국은 총무성 산하기관으로서 에서는 우편 업무 외에도 "우편 저금"이라 불린 예금(은행) 업무[1]와 "간이 보험"이라 불린 보험 업무[2]가 이루어졌으며, 1990년대 후반 홋카이도 척식은행과 일본장기신용은행이 파산한 이후에는 이들 은행에 있던 자금 350조 엔이 일제히 전국의 우체국(우편 저금)으로 이동하면서 우체국의 예금 사업 부문 규모가 비대해지는 결과를 낳았다. 따라서 일본 정부는 이 자금을 정부가 대출한 뒤, 정부는 대출한 자금을 민영화 이전의 옛 일본도로공단이나 주택금융공고 등의 특수 법인에 다시 대출해 주어 수익을 내는 방식으로 자금을 운용했다.그러나 이는 자금을 대출받은 특수 법인들이 다른 금융 기관에 비해 높았던 우편 저금의 신용도만 믿고 손익을 크게 고려하지 않은 채 사업을 진행하는 문제로 이어졌다. 그 예로 일본도로공단은 수익성이 저조한 고속도로를 마구잡이로 건설하여 심각한 재정 적자를 떠안게 되었다. 상황이 심각해지자 일본 정부는 우체국이 취급하는 자금을 일본 정부가 이용하는 구조를 없애고, 특수 법인은 가능한 한 민간 기업으로서 스스로 시장에서 자금을 조달해 수익을 올리게 하는 한편 우체국의 업무를 민영화 하여, 우체국이 예금 업무나 보험 업무를 통해 취급하는 자금을 활용해 수익을 창출하도록 하는 방안을 설계하였다.
3. 민영화 과정
3.1. 우정성에서 우정공사로
1996년 제1차 하시모토 내각에서 "행정개혁회의"가 출범하면서 중앙성청(정부부처) 개편 논의가 시작되었다. 이듬해인 1997년 8월에 나온 중간 보고서에서 우정민영화가 주요 안건으로 제안되었다, 보고서는 3대 우정사업 중 우편 사업만 국영으로 남기고 나머지 우편 저금 및 간이 보험 사업은 민영화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그러나 최종적으로는 3대 우정사업 모두 국영을 유지하는 대신 우정성을 공사화하여 정부에서 독립시키는 쪽으로 결론이 내려졌다. 또한 여야 간의 알력으로 인해 우정공사의 직원을 모두 국가공무원이 맡도록 규정했다. 이렇게 우정공사는 정부로부터 독립된 기업체이지만 정부에 소속된 국가공무원이 직원이 되는 기형적인 형태가 되었다. 이 같은 기형적인 구조가 만들어진 배경에는 여당인 자민당의 지지 기반인 전국특정우편국장회(대한민국의 별정우체국의 협회라 보면 이해하기 쉽다.), 은퇴한 우편국장(우체국장)으로 구성된 "다이키노카이"를 비롯해 야당인 민주당의 지지 기반인 우정노동조합, 옛 우정성 관료들의 압력이 존재했다.1999년 5월에는 우정민영화연구회가 발족되어 민영화 계획을 구상했고 그 결과 한 개의 우정특수회사 산하에 우편회사, 은행, 지역별보험회사를 각각 만드는 형태를 제시했다. 2001년 1월 6일에는 중앙성청개편이 실시되어, 우정성의 우정행정과 우정사업부문이 각각 총무성 우정기획관리국과 우정사업청으로 분할되었고. 2003년 4월 1일에 우정사업청이 특수법인인 일본우정공사로 개편되었다.
3.2. 재정관리 위탁의 폐지와 민영화 압박 증대
기존에 우편 저금의 자금 운용은 대장성 자금운용부에서 전액 위탁하고 있었다.[3] 이 위탁 자금의 금리는 시장 금리보다 0.2% 높게 설정되어 있었고, 그 차익은 특수 법인에게 자금을 비싼 금리로 대출해 줌으로써 조달하였다. 이는 결과적으로 "특수 법인에 대한 국민 세금 투입"이라는 비판을 초래하였다.그러나 1997년 제2차 하시모토 내각에 의해 대장성의 자금 위탁 의무가 폐지되면서 우정공사는 자금을 자주적으로 운용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하지만 우정공사의 자금 운용은 원칙적으로 국채 발행을 통해서만 가능했고, 이 국채는 일반 금융 상품과 비교하여 이율이 턱없이 낮았기 때문에 이 상태로는 우정공사의 경영이 이루어질 수 없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대장성 위탁에 의한 비교적 높은 금리로의 대출이 불가능해진 이상, 국채 이외의 금융 상품으로 자금을 운용하기 위해서는 결국 우정공사를 민영화를 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게다가 1990년대 초부터 일본의 우정민영화에 관심을 보여 온 미국의 애플랙 생명보험 등의 보험 업계 및 경제 단체뿐만 아니라 미국 정부가 직접 일본 내 우편 저금과 간이 보험의 폐지 및 민영화를 일본 정부에 요구하기 시작하면서 민영화로의 정책수정 압박이 강해졌다.[4]
3.3. 고이즈미 내각의 우정민영화와 실현
우정 민영화는 개혁의 핵심입니다. 27만명의 우정 공무원의 기득권을 지키면서 대체 어떤 개혁을 할수있다는 말입니까. 우정 민영화는 모든 개혁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2005년 9월 우정 민영화 총선 당시 자유민주당 TV 광고에서.#
고이즈미 준이치로는 내각총리대신에 취임하면서, 우정민영화를 중요 시책으로 올렸다. 실제로 고이즈미 자신도 우정민영화를 행정개혁의 본질이라 칭하면서, 취임 이전 1979년 대장성 정무차관 시절을 시작으로, 미야자와 내각의 우정대신 시절, 제2차 하시모토 내각의 후생대신 시절에 이르기까지 우정민영화에 대한 주장을 굽히지 않아 왔다. 그러나 민영화는 행정 서비스의 저하로 연결된다는 주장이 강해지면서, 야당은 물론 여당인 자민당 내에서도 특정 우편국을 지지 기반으로 하는 ‘우정사업간담회’를 중심으로 강한 반발이 있었다. 결국 우정민영화 관련 법안이 중의원에서 부결되는 상황으로 이어졌다.[5]고이즈미 준이치로, 2005년 9월 우정 민영화 총선 당시 자유민주당 TV 광고에서.#
우정민영화 관련 법안은 제162회 통상국회(2005년 정기국회)에서 일부 수정을 거친 뒤 2005년 7월 5일 중의원 본회의에서 불과 5표 차로 가결 처리되었지만, 8월 8일에 열린 참의원 본회의에서는 부결되었다. 고이즈미 총리를 비롯한 자민당 지도부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중참 양원 표결 모두 자민당 의원들 중에서 반란 투표가 속출했다.
그러자 고이즈미 총리가 이러한 결과에 대해 우정민영화의 찬반 여부를 국민에게 묻겠다고 주장하며, 중의원을 해산하는 사태에 이르게 되었다(우정 해산). 자민당 내 우정민영화 반대파 중 일부는 탈당한 뒤 국민신당을 창당했고, 탈당하지 않고 당내에서 우정민영화 법안 철회를 요구하던 의원들은 당 지도부의 공천을 받지 못해 대부분 무소속으로 총선거에 출마했다. 그러자 자민당은 우정민영화에 반대한 의원들의 지역구에 자객 후보를 공천하는 등 강경 기조를 이어갔다.[6]
그리고 9월 11일에 치러진 44회 중의원선거에서는 연립 여당인 자민당과 공명당이 전체 480석의 중의원 의석 중 3분의 2가 넘는 327석을 획득하는 압승을 거두었다.[7] 자민당은 선거 이후 우정민영화에 반대한 의원들에 대해 당기위원회에서 제명 및 탈당 권고 처분을 내리는 중징계를 부과했다.[8] 이후 소집된 특별 국회에서는 10월 14일에 같은 내용의 법안이 중참 양원 모두에서 가결되었다.
2007년 7월 29일에 민주당이 민영화를 동결해야 한다는 법안 우정민영화동결법안을 167회 국회에 제출한다. 이는 기존 법안의 민영화 실행날짜 10월 1일을 별도로 정한다라고 개정하는 법안으로, 민영화를 자체적으로 1년간 동결처리할 수 있는 법안이었다. 그러나 자민당이 "현재의 법률이나 제도로도 주식을 민간에 매각하기 전에 일본우정그룹의 완전 민영화에 관한 재검토를 실시할 수 있다"라고 주장하면서 이 법안은 심의도 받지 못하고 폐안되었으며, 이후 국민신당의 주도로 3년 동결을 골자로 한 법안을 168회 국회에 재제출했으나 이도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2007년 10월 1일 일본우정그룹이 공식적으로 출범하였다. 출범식에 참여한 고이즈미는 연설을 통해 "종전에 모든 정당이 반대했던 우정민영화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은 국민의 지지가 있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2009년 2월 5일에 중의원예산위원회에서 고이즈미 내각 당시의 우정해산에서 일본우정공사를 소관하는 총무대신이었던 아소 다로 총리가 자신은 반대했다고 밝히며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日자민당 前現 총리싸움에 혼돈 속으로
3.4. 민주당 정권의 민영화 재검토와 주식시장 상장
민주당, 사회민주당, 국민신당 등 3당은 2009년 8월 제4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를 앞두고 공동 정책으로 "우정민영화의 근본적인 재검토"를 내세웠다.총선거에서 압승하며 자민당으로부터 정권교체를 이룬 하토야마 유키오 내각은 연립여당인 국민신당 소속 가메이 시즈카 우정개혁·금융담당대신이 적극적으로 우정민영화 재검토를 주창하였고, 이에 니시카와 요시후미 일본우정 사장이 "정부와 의견 차가 있다"며 2009년 10월 20일 사의를 표명했다. 일본우정은 다음 날인 10월 21일, 차기 사장으로 전직 대장성 사무차관인 사이토 지로를 내정했다.
2010년 5월 8일, 일본우정그룹은 약 20만 명에 달하는 비정규직 중 3년 이상 근속자인 6만 5000명을 정규직으로 채용한다고 발표했다. 또한 총무성의 우정민영화를 검증하는 일본우정 경영 문제 조사 전문 위원회가 작성한 보고서가 발표되었다. 해당 보고서는 일본우정의 전직 사장인 니시카와 요시후미의 경영 수법을 비판하고 거래나 자산의 처분에서 객관적 공평성이 부족했음을 지적했다.
2012년 4월 27일, 제180회 통상국회(2012년 정기국회)에서는 우정민영화법 개정안이 가결·성립되었다. 개정 법률에 따라 2012년 10월 1일자로 일본우정그룹의 자회사인 우편사업 주식회사와 우편국 주식회사가 합병하여 "일본우편 주식회사"로 출범하였다. 따라서 일본우정그룹은 기존의 5개 사 체제에서 일본우정 주식회사, 일본우편 주식회사, 주식회사 유초 은행, 주식회사 간포 생명보험의 4개 사 체제로 개편되었다.
4. 이후
동일본대지진의 여파로 인해 일본 총무성의 재정 상태가 심히 나빠짐에 따라 기존 2017년으로 예상했던 우정3사의 상장이 2015년 11월 4일로 앞당겨지게 되었다. 이후 총무성 보유 지분이 지속적으로 매각되면서 민영화가 진행되고 있다.다만 2019년 간포생명의 사고나 지역 우체국 수익 악화에 따른 폐국에 따른 불편 등이 심화 되면서 사실상 고이즈미 시절의 완전 민영화 계획은 폐기수순에 들어갔다.# 기존 계획과 달리 유초은행과 간포생명의 정부 지분 매각을 포기하고 일본우편을 다시 일본우정에 흡수시킨 뒤 유초은행과 간포생명을 그대로 일본우정의 자회사로 남겨 공공성을 강화화는 쪽으로 선회하고 일본우정에 대한 외자투자 규제조치까지 더해지며 사실상 고이즈미 시기의 계획은 20년만에 좌절되었다.
5. 관련 문서
[1] 대한민국의 우체국 금융부문인 우체국예금도 80년대 까지는 '우편저금' 이었다.[2] 정식명칭은 간이생명보험(簡易生命保険).[3] 한국 우체국예금의 경우 정부 일반회계는 물론 우체국의 우편사업 회계와도 완전히 분리되어 있으며, 우정사업본부가 직접 채권과 주식 거래를 통해 이자를 마련하여 지급한다.[4] 미국 정,재계의 압박은 더욱 거세졌고 이후 고이즈미 내각에서 민영화 드라이브를 진행할 때 미국과의 긴밀한 협의가 진행되었다. 일례로 2004년 9월 22일에 열린 미일 정상회담에서도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직접 고이즈미 총리에게 우정민영화의 진행 상태를 확인하기도 했다. 또한 2004년 10월 14일에 공포된 ‘일미 규제개혁 및 경쟁정책 이니셔티브에 근거한 일본국정부에의 요망서’(日米規制改革および競争政策イニシアティブに基づく要望書), 이른바 연차개혁 요망서에서도 일본 우정 공사의 민영화가 명기되어 있다. 2005년 3월에 발표된 미국 통상 대표부의 ‘통상교섭·정책 연차보고서’에서도 고이즈미 내각이 2004년 9월에 각의(국무회의)에서 결정한 ‘내각의 설계도’(고이즈미 내각의 기본 방침)에 ‘미국이 권고하고 있었던 수정 사항이 포함되어 있다’고 밝혀 우정 민영화에 미국이 어느 정도 관여했음을 알 수 있다.[5] 우정민영화를 지지하는 데에 개인적인 이유가 있었다는 설이 있다.[6] 다만 지역구 기반이 강한 이들이 많아 대부분 무소속으로 당선되었다.[7] 우정해산과 이후 선거는 후일 고이즈미식 극장 정치의 정수라고 평가받았다.[8] 와타누키 다미스케, 가메이 시즈카, 지미 쇼자부로, 가메이 히사오키 등 8명이 제명, 기우치 미노루, 노다 세이코, 다케다 료타 등 26명이 탈당권고, 가지야마 히로시, 고무라 마사히코 등 16명이 경고 처분을 받았다. 이들 중 다수는 후일 제1차 아베 신조 내각이 성립하고 나서야 복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