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06ba4, #0084c9 33%, #0084c9 67%, #006ba4)"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color: #fff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2000 | 2007 | 2018 | 2019 | ||
제1차 | 제2차 | 제3차 | ||||
<rowcolor=#000,#FFF> 평양 6.13-6.15 | 평양 10.2-10.4 | 4.27 | 5.26 | 평양 9.18-9.20 | 6.30 | |
판문점 선언 재확인 | 9월 평양공동선언 | 종전 의지 재확인 | ||||
김대중 | 노무현 | 문재인 | ||||
김정일 | 김정은 |
<keepall> {{{#!wiki style="padding: 5px 10px; background: linear-gradient(to right, #006ba4, #0084c9 33%, #0084c9 67%, #006ba4)" {{{#!wiki style="margin: 0 -10px -5px; color: #fff; min-height:calc(1.5em +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5px -1px -11px" | ||||
방향 | ||||
남한 주도 | 흡수통일 · 북진통일 | |||
남북합의 | 평화통일 · 남북연합 | |||
북한 주도 | 적화통일 · | |||
기타 | 영구분단 · 제3국 주도(한미합방 · 한중합방) · 북한 분할 | |||
영향 | ||||
남북통일의 이점 | ||||
과제 | ||||
경제 (통일 비용) | 군사 | 정치 | 행정 (행정구역·치안) | |
외교 | 교육 | 인프라 (교통·남한) | 스포츠 | |
위화감 | 수도 (후보지) | 급변사태 | ||
노력 | ||||
정상회담 | 2000년 · 2007년 · 2018년(1차 · 2차 · 3차) | |||
남북합의 | 7.4 남북 공동 성명 · 남북기본합의서 · 6.15 남북공동선언 · 10.4 남북공동선언 · 판문점 선언 · 9월 평양공동선언 | |||
관련 인물 | 통일운동가 | |||
관련 문서 | ||||
한반도기 · 남북관계 · 6.25 전쟁 · 통일반대론(근거) | }}}}}}}}}}}} |
<colbgcolor=#00224f> 2000 남북정상회담 2000年 南北頂上會談 2000 Inter-Korean Summit | ||
일시 | 2000년 6월 13일 ~ 6월 15일 | |
장소 | [[틀:깃발|평양시 | ]][[틀:깃발| ]][[북한| ]]|
주최 | [[틀:깃발| | ]][[틀:깃발| ]][[북한| ]]|
참석 | 남 | 북 |
대통령 김대중 | 국방위원장 김정일 | |
영부인 이희호 | 위원장 부인 공석[1] | |
결과 | 6.15 남북공동선언 |
[clearfix]
1. 개요
2000년 6월 13일부터 6월 15일까지 대한민국 김대중 전 대통령이 북한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과 평양에서 진행한 회담.2. 진행
KTV - 2000 벽을 넘어 |
추진위원장은 박재규 전 통일부장관이었으며, 외교부 장관, 국가정보원장, 국무조정실장, 청와대 경제수석·외교안보비서관 등이 위원에 포함됐다. 준비기획단엔 통일부 차관(단장)과 각 정부부처 차관급 및 청와대 경호처장·의전비서관 등이 참여했다.
1948년 한반도가 분단된 이후로, 두 당국의 대표가 처음으로 만난 회담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은 남북한관계사의 이정표로 남을 6.15 남북공동선언을 발표했다. 한반도 평화 조성과 햇볕정책의 결실과도 같은 이 회담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생애 전반에 걸친 한국 민주화 운동과 함께 노벨평화상을 수상하는 것에 영향을 미쳤다.
정상 회담 이후 남북 이산가족 상봉, 금강산 관광, 북한의 남한 주최 스포츠 경기 행사 참가 등 민간 교류 사업이 본격적으로 진행됐다. 남북 당국 간 회담이 지속했으며, 북한은 일본, 미국과도 화해 분위기를 유지하며 국교 정상화 교섭에 나섰다. 김정일의 조기 서울 방문도 예견됐으나 국제 정세의 급변 및 대한민국 국민 정서에 의한 국내의 반감 등으로 실현되지 않았다.
3. 6.15 남북공동선언
자세한 내용은 6.15 남북공동선언 문서 참고하십시오.4. 여담
- 당시 청와대 홈페이지에는 회담의 진행과정과 성과 등에 대해서 자세히 서술하여 일반에 공개했다. 15대 청와대 웹기록 참고.
- 남북이 회담을 협상하는 과정에서 북한 측이 남한 측 인사들에게 금수산태양궁전 참배를 끈질기게 요구한 것이 밝혀졌다. 결국에는 철회되었지만 이 사실이 대중들에게 바로 알려졌다간 사회 분위기도 그렇고 어렵게 조성해 놓은 남북관계가 깨질게 분명해서 숨겼다가 회담 후 4년 후인 2004년에 공개했다.
- 정상회담을 앞두고 북측은 조선일보와 KBS의 북한 방문을 불허한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그러나 김대중 대통령은 대통령 전용기에 기자들을 무조건 태우라고 지시했고, 결국 조선일보와 KBS도 대통령 전용기를 타고 평양에 도착해 정상회담을 취재할 수 있었다. 김 전 대통령은 회고록에서 “남한은 민주국가이다. 민주국가에서 언론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은 말이 안된다. 정상회담을 하는 것 자체가 서로의 체제를 인정하는 것이고 누가 수행취재를 가느냐는 우리가 결정하는 것이다. 취재기자 선별까지 양보하면서 정상회담을 할 필요는 없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 회담을 진행하기로 해놓고 정작 북한이 준비에 매우 비협조적으로 나오자, 당시 청와대와 국정원 내부에선 북한의 법적 국가원수인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이 나오는 것 아니냐는 비관이 나왔다고 한다. 실제로 준비협상에서 북한에서도 그런 운을 계속 띄웠기 때문에 회담의 의미가 크게 퇴색되는 것 아니냐는 기류가 형성됐다. 그러다가 출발 3일 전 새벽 북한에서 '궁중요리를 먹어볼 수 있는가?'라는 급전이 들어오자 김정일이 직접 나온다는 판단 아래 분위기가 급변했다. 왜냐하면 저렇게 뜬금 없이 궁중요리를 먹을 수 있냐는 질문은 유일하게 김정일만 할 수 있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당시 청와대에서는 가능하다는 답전을 보냈고, 해외 출국이 예정돼 있던 궁중요리 전문가 한복려를 설득[3]해 궁중요리 만찬을 준비했다.
- 이렇게 어려운 과정 속에 섭외된 한복려는 롯데호텔, 워커힐호텔, 신라호텔, 국립극장 지화자 식당의 조리사들을 구성된 특별 셰프팀을 이끌고 방북하여 만찬용 음식을 준비하였다. 요리 연구가로서 방북한 김에 북한 음식 문화에 대해 큰 관심을 보였는데 인민들의 일반적인 음식은 당연히 맛볼 수 없었으나, 연회용 음식을 먹어보고 간은 싱거웠고 맛은 담백했는데 사흘째 식사를 하고나서야 그 깊은 맛을 느꼈다고 평가했다. 그리고 의외로 서양 요리와 중국 요리의 강한 영향력을 확인하였다. # 한편 북한 측은 냉면 비법까지 가르쳐줄 정도로 대단히 협조적이었다고 한다. #
- 회담을 진행하면서 외교 관례에 따라 남북간의 선물을 교환하였다. 이 중 화제를 모은 것이 바로 개였다. 남한에서는 북한에게 '평화'와 통일'이라는 이름의 진돗개 한 쌍을, 북한에서는 남한에게 '자주'와 '통일'이라는 이름의 풍산개 한 쌍을 선물하였다. 이 중 풍산개는 남한으로 들여온 후 '우리'와 '두리'란 이름으로 바뀌었다. 풍산개들은 과천 서울대공원 동물원에서 사육하다가 2013년에 노환으로 자연사했다. 북한에 보낸 진돗개들은 평양의 조선중앙동물원에서 사육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은 북한의 핵과 미사일 문제를 김대중 전 대통령이 김정일에게 제기한 것에 감사를 나타내고 남북 정상회담에서의 합의가 김 대통령 개인뿐 아니라 세계 평화를 위해서도 대단한 승리라고 칭송하기도 했다.[4]
- 한국에서는 아무런 관심도 없었지만 당시 북한에 생존해 있던 6.25 국군 포로들은 귀환에 대한 큰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1993년 비전향 장기수였던 리인모가 북한으로 송환되어 자신들도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6.15 남북공동선언에서 자신들의 송환과 관련된 아무 내용도 없자 자신들이 조국에게 잊혀졌다는 사실을 깨달은 국군 포로들은 크게 절망했다고 한다. 한 국군 포로 자녀 탈북민의 아버지는 창고에서 목을 매 자살했다고 한다.# 정작 남한 내 비전향 장기수 63명은 6.15 남북공동선언에 따라 북한으로 송환되었는데 그 대가로 국군 포로의 송환을 추진하지 않은 것은 지금까지도 크게 비판받고 있다. 당시 국군 포로들은 60-70대의 나이였으므로 송환되었다면 그나마 남은 여생을 고향에서 보낼 수 있었을 것이다.
5. 둘러보기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calc(1.5em +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5px -1px -11px; word-break: keep-all;" | 주요 역사적 사건 | |
<colbgcolor=#ccc,#333><colcolor=black,white> 김일성 시대 | 해방 (1945) ·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설치 (1945) ·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 설립 (1946) · 북조선인민위원회 설립 (1947) · 제1기 북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 (1948)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창건 (1948) · 북·남조선로동당 합당 (1949) · 6.25 전쟁 (1950~1953) · 박헌영-리승엽 간첩 사건 (1953~1955) · 8월 종파사건 (1956) · 중국 인민지원군 철수 (1958) · 재일교포 북송 (1959~1984) · 조소동맹조약 (1961) · 조중동맹조약 (1961) · 갑산파 숙청 사건 (1967) · 1.21 사태 (1968) · 푸에블로호 피랍사건 (1968) ·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 (1968) · 7.4 남북 공동 성명 (1972) · 사회주의헌법 제정 (1972) ·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1976) · 아웅 산 묘소 폭탄 테러 사건 (1983) ·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 (1987) · 제13차 평양세계학생축전 (1989) · 남북기본합의서 (1991) · 남북 유엔 동시 가입 (1991) · 북일수교협상 (1991~1992) · 제1차 북핵 위기 (1993~1994) · 서울불바다 발언 사건 (1994) · 김일성 사망 (1994) | |
김정일 시대 | 남북정상회담 무산 (1994) · 고난의 행군 (1994~2000) · 북미 제네바 합의 (1994) ·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 (1996) · 심화조 사건 (1997~2000) · 제1연평해전 (1999) · 남북정상회담 (2000) · 조미 코뮤니케 (2000) · 제2연평해전 (2002) · 새로운 경제관리개선조치 (2002) · 북일정상회담 (2002~2004) · 6자회담 (2003~2009) · 제1차 핵실험 (2006) · 남북정상회담 (2007) · 제2차 핵실험 (2009) · 화폐개혁 (2009) · 천안함 피격 사건 (2010) · 연평도 포격전 (2010) · 김정일 사망 (2011) | |
김정은 시대 | 제3차 핵실험 (2013) · 장성택 처형 사건 (2013) · 5.30 조치 (2014) · 제4차 핵실험 (2016) · 제5차 핵실험 (2016) · 김정남 피살 사건 (2017) · 제6차 핵실험 (2017) · 김성일 사건 (2017) · 남북정상회담 (평양공동선언) (2018) · 북미정상회담 (2018, 2019) ·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폭파 사건 (2020) · 반체제 정당 조직 적발 사건 (2021) · 코로나 대유행 (2022) · 연평도 해역 포격 사건 (2024) · 지린성 북한 노동자 폭동 사건 (2024) · 반체제 세력 출현 사건 (2024) · 오물 풍선 살포 사건 (2024)ㆍ2024년 북러정상회담 (2024)ㆍ북한 외교관 연쇄 탈북 사건 (2024)ㆍ주러시아 북한 관전무관 폭사 사건 (2024)ㆍ평양 무인기 대북전단 살포 사건 (2024)ㆍ북한의 경의선·동해선 남북 연결도로·철도 폭파 사건 (2024)ㆍ북한의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참전 (2024) | |
역사왜곡* | ||
항일무장투쟁 | 타도제국주의동맹 (1926) · 카륜회의 (1930) · 명월구회의 (1931) · 조선인민혁명군 (1932) · 민생단 사건 (1932~1936) · 남호두회의 (1936) · 미혼진회의 (1936) · 동강회의 (1936) · 조국광복회 (1936) | |
6.25 전쟁 | 전쟁 발발 책임 · 승패 인식 | |
백두혈통 우상화 | 김응우 (제너럴 셔먼호 사건) · 김형직 · 강반석 · 김정숙 · 김정일 출생지 왜곡 | |
관련 서적 | 미제와 일제의 조선침략 죄행 · 백두혈통 우상화 교과서 · 세기와 더불어 · 조선력사 | |
* 괄호 안의 연도는 북한의 주장에 근거한 연도이며, 실제 역사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단체 및 사건이거나 실제와는 다른 연도일 수 있음. | ||
상위 둘러보기 틀로 이동하기 |
[1] 당시 김정일에게는 비공식적인 부인 고용희가 있었지만 여러 이유로 인해 전면에 등장하지는 못했다.[2] 아마 대한민국 정부의 대변인 역할을 맡아 당시 문화관광부의 장관이 발표를 한것으로 추측된다. 참고로 현재에도 대한민국 정부의 대변인은 문화체육관광부장관이다.[3] 당시 한복려는 프랑스 파리의 리츠 파리 호텔에서 전통 한식과 궁중 요리를 소개하는 행사에 참석할 계획이었고, 여기에는 프랑스 문화 당국의 장관과 대통령 참석이 예정되어 있었다. 그래서 처음에 청와대에서 한복려에게 연락을 했을 때 해외의 국가 원수가 참석하는 행사가 선약되어 있어서 정상회담 준비에 응할 수 없다고 거부했었다. 그러자 당시 외교 당국이 급히 총동원돼 프랑스 대통령궁과 직접 교섭해 양해를 받았고, 이를 한복려에게 전달하자 마지못해 응했다고 한다.[4] 김대통령 핵,미사일 등에 대해 클린턴 미국 대통령과 전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