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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와 2차대회는 북조선로동당 시절 개막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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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40001><colcolor=#ffffff> 조선로동당 제6차대회 | |
개막 | 1980년 10월 10일 |
폐막 | 1980년 10월 14일 |
개막예고 | 1979년 12월 12일 |
장소 | 4.25문화회관 (평양시 모란봉구역) |
의결내용 | 당내 지도 이념 공식화 3대 혁명 (사상, 기술, 문화)의 성과 총화 사회주의 건설 10대 전망 목표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립 방안 사회주의 완전 승리 전망 제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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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당시 조선로동당 사상, 조직비서였던 김정일이 이 대회에서 정치국 상무위원과 당 중앙위원회 비서에 선출되면서 김일성의 후계자 자리에 공식적으로 오르게 되었다.
2. 3대 혁명
1970년 개최된 조선로동당 제5차대회(이하, 5차 대회) 후 10년 만에 열린 대회였는데, 잠시 5차 대회의 주요 내용을 살펴보면 김일성이 사회주의의 완전한 승리를 위한다는 목적으로 사상, 기술, 문화에서 혁명을 이루는 '3대 혁명'을 제시했는데, 명목적인 의도는 사회주의 제도가 확립되고 다음 공산주의의 낮은 단계로 진입해 들어가려면 가장 큰 3개 분야에서 자본주의의 낡은 유물을 청산하고 새로운 사상과 기술, 문화를 창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것은그 후 1972년 12월, 최고인민회의 제5기 제1차 회의를 소집하여 사회주의 헌법에 3대 혁명의 구체적인 내용을 추가시켜 당에서만 실시하는 것이 아닌 국가 차원에서도 적극적으로 실시할 수 있도록 했다. 이후 1973년 3대혁명소조운동, 1975년 3대 혁명 붉은기 쟁취운동 등을 벌여 아예 모든 인민이 전원 참여할 수 있도록 전사회적으로 확대시켰다. 따라서 6차 당대회는 지난 10년 간의 3대 혁명 사업에 관해 김일성에게 보고하고, 앞으로 더 열심히 하겠다고 다짐하는 대회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2013년 29년 만에 '3대 혁명소조 열성자 대회'가 열려 이 사업이 2021년 현재까지도 건재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3. 사회주의 경제 건설 10대 목표
통일부 통일교육원 참고북한은 5차 대회에서 제1차 6개년 경제개발 계획(1971~1976)을 발표했는데, 1977년에 열린 6기 최고인민회의에서 보고된 바에 따르면 1976년 당시 공업총생산액은 1970년에 비교해볼 때 2.7배 늘어나 원래 제시한 목표 (2.2배)를 초과 달성했다.
그러나 세부적으로 볼 때 주철과 강철, 시멘트는 목표에 도달하지 못해 1976년 ~ 1977년을 완충기로 설정하고 1978년 제2차 7개년 경제개발 계획(1978~1984)을 제시하고 그 와중에 열린 6차 대회에서 "'사회주의 완전승리'가 조선노동당의 당면한 투쟁 과업"임을 밝히면서, 북한은 완전히 승리한 사회주의 사회에 맞는 물질적·기술적 토대를 마련하기 위한 '사회주의 경제 건설의 10대 전망목표'를 제시했다.
사회주의 경제 건설 10대 목표는 전력, 석탄, 강철, 비철금속, 시멘트, 화학비료, 직물, 수산물, 곡물, 해안간척의 10개 항목을 정해 1980년대 북한이 집중적으로 성장시켜야 할 목표로 삼았다.
종목 | 용량 | 종목 | 용량 |
전기 | 1,000억 kwh | 화학비료 | 700만 톤 |
석탄 | 1억 2천만 톤 | 직물 | 15억 미터 |
강철 | 1,500만 톤 | 수산물 | 500만 톤 |
비철금속 | 150만 톤 | 곡물 | 1,500만 톤 |
시멘트 | 2,000만 톤 | 해안간척 | 30만 정보 (10년 간) |
이 목표가 당대회에서 설정된 이후 김정일 당시 당비서가 목표에 박차를 가하기 위해 '80년대 속도 창조운동'을 고안해냈고, 천리마 운동을 계승해 속도전의 원칙을 전면적으로 구현해내기 위한 운동이라고 볼 수 있다.
4. 7차 당대회
김일성은 1985년까지 사회주의 건설을 끝내고 1986년 7차 당대회를 개최하겠다고 선언했었다.그러나 80년대 지나친 군사비용 증가, 연이은 경제정책의 실패로 외채 원금은 커녕 이자도 제대로 못갚는 국가였고 경제상황도 점점 악화되어 가고있었다.
그 상태에서 돈이 많이 들어가는 당대회를 여는것은 불가능했고, 5차 당대회, 6차 당대회가 10년 주기로 열린것처럼 1990년에 열릴수도 있었다.
그러나 1989년 세계청년학생축전으로 북한 경제는 완전히 망가져 버려서 1990년 북한의 국민소득은 80년대 초반 수준으로 회귀해버리고 1991년쯤 되면 자강도, 량강도 지방에서는 아예 배급이 중단되는 지경에 이른다.
따라서 예측되었던 1990년과 김일성의 팔순이었던 1992년에 당연히 열리지 못했고 1994년 김일성 사후의 김정일은 선군정치를 내세운 탓에 조선로동당 전원회의는 1993년 6기 21차 회의를 마지막으로 열리지 못했고, 1995년에 고난의 행군까지 닥치며 북한 경제는 말 그대로 최빈국 중의 최빈국으로 폭삭 주저앉았다. 이후 유훈통치 기간을 지나 1997년~1998년에 기존의 주석제도와 중앙인민위원회는 폐지, 당 회의나 대회를 개최하는 당 정치제도는 사실상 국방위원회와 선군사상에 밀려 제대로 운영되지 못한다.
그렇게 당 전원회의도 열리지 않고 조선로동당 자체가 유명무실해지면서 김정일 생전에는 당 대회는 꿈도 못 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