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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韓民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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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국
日本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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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한국과 일본 단순 비교3. 한국과 일본의 안보 관계4. 한국과 일본의 갈등 원인
4.1. 과거사 문제4.2. 중요도에서 다소 뒤로 밀리는 양국관계4.3.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4.4. 일본의 내적 오리엔탈리즘
5. 한일관계에 영향을 끼치는 국제 변수
5.1. 북한5.2. 중국5.3. 일본과 다른 국가
6. 2000년대 이전까지
6.1. 삼국시대 이전6.2. 삼국시대
6.2.1. 백제 유민들의 신라에 대한 원한?
6.3. 남북국시대6.4. 고려 시대6.5. 조선 시대
6.5.1. 조선 전기6.5.2. 조선 후기6.5.3. 개항기
6.6. 8.15 광복 이후6.7. 1997년 미일가이드라인 논란
7. 2000년대 이후
7.1. 정치7.2. 경제 교류
7.2.1. GDP7.2.2. 1인당 GDP7.2.3. 대일 무역적자 추이7.2.4. 대일 전체 수출의존도 추이7.2.5. 대일 전체 수입의존도 추이7.2.6. 대일 부품 수입의존도 추이7.2.7. 대일 소재부품 적자 추이7.2.8. 무역 분쟁
7.3. 군사 교류
7.3.1. 한미일 삼각동맹
7.4. 여론, 언론
7.4.1. 한국의 내셔널리즘
7.4.1.1. 한국의 내셔널리즘 발생과 경과
7.4.2. 일본의 내셔널리즘
7.4.2.1. 일본의 내셔널리즘 발생과 경과
7.5. 문화 교류
7.5.1. 언어7.5.2. 종교7.5.3. 일본의 한국 문화7.5.4. 한국의 일본 문화7.5.5. 식문화 교류7.5.6. 엔터테인먼트 산업
7.6. 교통 교류
7.6.1. 항공 노선
7.7. 과거사
7.7.1. 야스쿠니 신사/신사 참배7.7.2. 일본의 피해자 행세7.7.3. 일본 극우사관
7.8. 영토 분쟁
8. 미래
8.1. 긍정적 전망8.2. 부정적 전망
8.2.1. 한국의 대안 전략과 한계8.2.2. 일본의 대안 전략과 한계
8.3. 결론
9. 역대 정상회담 목록10. 참고 문헌
10.1. 관련 기사
11. 관련 문서
11.1. 간접적 의미의 관련 항목

[clearfix]

1. 개요

한국어 한일관계(韓日關係)
일본어 [ruby(日韓関係, ruby=にっかんかんけい)][1]
영어 Japan-South Korea relations[2]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65년-2024년 역대 한일정상회담 파일:일본 국기.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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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일본의 관계. 한국에서는 '한일관계', 일본에서는 '일한관계'(日韓関係; 닛칸칸케이)라고 칭한다.

한국인에게 있어 일본인은 유전적으로 가장 유사하며[3] 한반도일본 열도가 지리적으로 가까운 만큼 수천년간 정치·경제·사회·문화적으로 많은 영향을 주고받았다.[4] 또한 두 나라 모두 땅덩이가 적당히 좁아서 CCTV가 도처에 깔려있어 경찰이 빠르게 도착할 수 있고 민간인의 무기소지를 엄격히 제한하고 있으며 섬나라이거나 사실상 섬나라라서 육로로 도망치지도 못하기에 전 세계적으로 최고 수준의 치안을 가진 선진국이 되었다는 공통점도 있다.

신라대 왜구의 침입부터 삼국통일 전쟁시기 백강 전투를 거치며 두 나라의 관계는 항상 긴장이 조성되었으며 고려 말 왜구의 침입, 임진왜란 등을 거치며 양국 관계는 악화일로를 걸었다.

조선 말기에는 일본에서 정한론이 일었고 강화도 조약을 시작으로 한반도에서 청일전쟁, 을미사변, 러일전쟁을 일으킨 끝에 일제강점기를 거치기도 하였다.

현대에는 광복 이후 미국의 주도 하에 아시아의 반공국가 포지션으로 협력해야 할 필요가 생겼고, 1965년 한일기본조약으로 국교가 정상화되었다. 그러나 영토 분쟁(독도 영유권 분쟁), 일본의 과거사 청산 문제, 일본 우익 정치인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 한일 무역 분쟁 등으로 인해 비교적 최근인 2010년대까지도 한국과 일본 간의 외교 마찰이 지속되었다. 그나마 2020년대에 들어 신냉전 시대가 도래한 이후로는 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하는 중이다.
상호 교류가 대단히 활발하고 협력 관계도 이어지고 있지만 한편으론 양국 간의 충돌도 빚어지는 등 관계가 상당히 복잡한 특수성을 가지고 있다.[5] 이 때문에 양국에서 상대국에 파견하는 주한/주일 대사 자리는 각국 외교부에서도 손꼽히는 요직인 동시에 업무가 대단히 어렵고 힘든 자리로 꼽힌다.

2. 한국과 일본 단순 비교

<colbgcolor=#fff,#444> 대한민국 일본국
면적 100,444km² (명목상 223,646km²)[6] 377,975km²
인구 51,256,511명 122,629,432명
수도 서울특별시 도쿄도
언어 한국어 일본어
명목 GDP[7] $1조 8,699억 (12위) $4조 701억 (4위)
1인당 GDP[8] $36,132 (30위) $32,859 (36위)
1인당 PPP[9] $62,960 (26위) $53,059 (36위)
국가경쟁력[10] 20위 38위
IMF 분류 선진국 선진국
민주주의지수 8.03 (24위)[11] 8.33 (16위)[12]
언론자유지수 72.11 (43위) 64.37 (71위)
정치형태 공화제 / 대통령제 입헌군주제 / 의원내각제
국가원수 윤석열 대통령 나루히토 천황[13]
정부수반 이시바 시게루 내각총리대신

3. 한국과 일본의 안보 관계

자세한 건 한일안보협력 항목을 참고.

4. 한국과 일본의 갈등 원인

결론부터 말하자면 일본의 과거 일본 제국 시기의 행보, 이후 각국 정부에서 반일 감정과 반한 감정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행태, 일본 정치권은 과거 일본 제국 시기 자신들이 일으켰던 전쟁에서 원폭을 맞았다는 이유만으로 피해자라고 주장 및 미화하여 주변국에 불신을 주는 것이 원인이다.

한국은 한일병합조약을 애초부터 불법이었다고 보지만 일본은 당시 기준으로는 합법이었으나 현재 기준으로는 불법인 것으로 본다. 이후 박정희 정부와 합의를 맺은 한일기본조약을 통해 돈을 받아냈지만 식민지배 피해자들에 대해서도 한국은 "정부 간 배상이 끝났다는 것은 동의하지만 그 당시 논의되지 않았던 문제와 개인적 배상은 아직 남아있다"는 입장이지만 일본은 "개인 배상청구권은 인정하나 그것을 국가가 외교적으로 보장하는 것은 안 된다"는 입장이다. 이는 단지 양국의 입장을 간단하게 추린 것이며 실제로는 훨씬 복잡하다. 애초에 한일기본조약이 '이미 무효'라는 '중의적인 표현'을 써서 애매하게 맺은 조약인 데다 한국 행정부사법부의 입장이 다르고 일본도 행정부마다 과거사를 바라보는 해석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어찌보면 박정희 정부가 경제발전에 급전이 필요한 나머지 확실하고 명확하게 선을 긋지 않은 게 화근인 것이다.

대한민국 정부는 일제로 인한 피해가 입증된 이들에게 보상금을 지급했다. 청구권자금 백서에서는 1976년까지 민간인 청구권 보상금액은 약 86억 7천만 원으로 청구권자금 중 5.9%이며 징용으로 인한 사망사례 9500여 건에 대한 보상액이 약 28억 6천만 원이었다.# 훗날 참여정부는 보다 많은 피해자들에게 훨씬 증액한 금액으로 보상하였는데 일본 정부가 주도한 직접적인 보상은 미비하고 오히려 과거사 만행을 부정하려 드는 움직임이 팽배하며 전범기업들의 책임 및 보상 논란 등으로 지금도 첨예한 갈등이 자리 잡고 있다.

먼저 한국의 입장에서는 일본 우익 정치인들이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하거나 독도 영유권 주장, 식민지배 역사 자체를 부정하는 모습을 보이는 등의 각종 망언 등을 해도 이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는 일본 정부에 피로감을 느끼는 상황이다. 한국을 위시하여 일본 제국주의의 피해국들에서 군국주의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지는 욱일기를 굳이 고집하는 것이나, 잊을 만하면 터져나오는 우익들의 혐한 어그로 등도 주된 원인이다. 특히 일본은 정부 차원에서는 자신들의 제국주의 시절 악행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사죄했지만 "한일관계는 미래지향적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명목 하에 과거사를 은근슬쩍 미화하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이는 한국뿐 아니라 동북아 여러 국가들의 강한 반발을 사고 있으며, 부실한 역사 교육으로 인해 왜곡된 역사관을 주장하는 듯한 발언이 일반 일본인들 사이에서도 꾸준히 나온다. 인터넷에서의 우익들의 준동을 이끌어내는 악순환은 덤.

반면, 일본 입장에서는 한국에게 한일수교한일기본조약을 기점으로 유무상 8억 달러를 제공했고 이것이 한강의 기적을 만든 성과의 기반들 중 하나가 되었으며, 이미 총리가 여러 번 사과했다는 걸 모르는 일반 한국 대중들과 그런 대중들을 대변하는 정치권에서는 이러한 사실이 없었다는 것으로 인식하거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또한 한국 정치권이 반일정서를 민주화를 이룩한 21세기에서조차 정치적으로 이용하는데 진절머리가 난 상황[14]이다. 일본 언론에서 흔히 표현하는 '한국 피로' 현상을 느끼는 것이다.

다만 한일 양국이 민주주의 국가인 이상, 외교정책을 세울 때나 평가할 때나 각국의 국민정서를 완전히 무시하고 이익만을 따지기는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실제로 물질적인 배상을 통해 과거사를 완전히 청산할 수 있다는 지극히 실무적 태도로 접근하는 일본과 달리, 한국은 일본의 진심어린 사과와 상호 간의 신뢰 회복을 우선시한다.

문제는 이러한 견해 차이가 오랫동안 평행선을 달리면서, 한국 정부로서도 "보상 받았으니 다 끝난 문제고 건전하고 우호적인 한일관계를 구축하는 데 방해가 되는 과거사는 이제 그만 거론합시다" 하고 넘어가기에는 "일본의 역사적 과오와 조상들이 당한 피해가 돈 몇 푼에 팔아넘길 수 있는 거냐"며 아직도 배상액이 부족하다는 반발이 나오는 실정이고, 반대로 일본 정부로서도 이제 와서 다시금 사과하고 배상하기에는 "우리는 전쟁 가해 세대도 아닌데 왜 아직까지도 한국한테 금전적인 배상을 해야 하냐"는 냉소적인 태도가 한일관계 개선에 걸림돌이 되는 것이다.

이렇듯 민주주의 국가인 양국에서 서로를 향한 불신감은 개인이 일본 제품을 불매하거나 여행을 가지 않는 수준의 영향력뿐만 아니라 실질적으로 국가 정책을 결정하는 정치 영향력까지 행사하고 있다. 때문에 전체적인 맥락을 고려하고 차근차근 문제를 풀어가지 않으면 특정 요소를 우선시하여 급격하게 관계가 호전되는 상황은 기대하기 어렵다.

정치 체제뿐 아니라 고전적인 국가 간 갈등을 일으키는 문제인 영토 문제로 독도 문제가 있다. 실제로 일본 대사관 홈페이지에 접속해 보면 알겠지만, '다케시마는 일본국의 영토이며 한국이 불법적으로 점령하고 있음'을 정말 다양한 언어로 번역해 놓았다.[15]

4.1. 과거사 문제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일본/과거사 청산 문제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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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간의 과거사 문제는 1875년 운요호 사건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운요호 사건의 결과 조선은 1876년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여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자 최초의 불평등 조약을 체결했다. 이후 일본의 발전, 조선(1897년 이후 대한제국)과 중국의 혼란, 영국러시아 제국그레이트 게임이 진행되면서 조선에 대한 일본의 간섭은 날이 갈수록 심화되었다. 대한제국은 1905년 을사조약으로 일본의 보호국이 되었고, 1910년 한일합병으로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한반도의 식민지 상태는 일본이 태평양 전쟁으로 패망한 1945년까지 지속되었다. 이른바 과거사 문제에서 문제가 되는 기간은 1875년부터 1945년까지, 특히 식민통치가 이루어졌던 1910년부터 1945년까지이다. 임진왜란이나 고려 말 왜구의 침입, 원나라의 일본원정까지 소급되는 경우도 있으니 이것은 한국과 일본 양측에서 서로에게 전반적인 적대감을 표출할 때 부차적으로 언급되어 적대감을 강화하는데 사용되는 정도이며 실제로 1875년 이전 사건들이 양국간 갈등의 원인이 되거나 또는 과거사 문제의 일부로 취급되는 경우는 드물다.

한국과 일본의 과거사 문제에서 쟁점이 되는 사안은 일본에 의한 국권 피탈, 한반도의 자원과 노동력 착취, 관동대학살을 비롯한 조선인 학살, 태평양전쟁 당시 위안부 문제 등이 있다. 한국은 이 문제들에 대해 일본의 진실한 사죄와 적절한 보상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입장이고, 1965년 한일기본조약은 개인청구권을 소멸시키지 않았다는 입장이다. 또한 일본의 조선 통치에서 지배와 착취의 측면을 부각한다. 반면 일본은 한일기본조약을 통해 청구권 문제가 모두 해결되었고[16] 자신들은 이미 적절한 사죄와 보상을 했다는 입장이며, 일본의 조선 식민지배가 한반도 근대화에 일정 부분 관여했다는 식민지 근대화론을 옹호하는 모습을 보인다.

4.2. 중요도에서 다소 뒤로 밀리는 양국관계

―한·일관계 회복 가능성은.

▷해결책이 없다. 일본에 대한 중국과 한국의 증오는 뿌리가 너무 깊다. 내가 아는 한 현재 상황에서 일본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강한 나라인 일본이 근본적으로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만약 한국이 일본과의 관계 개선을 원한다면 한국 쪽에서 변화가 이뤄져야 한다. 그러나 그럴 가능성 역시 낮다. 중국이 매우 강해져 양국에 위협이 되면 중국을 봉쇄하기 위해 한·일 협력이 이뤄질 수 있을 것이다.
존 미어샤이머 시카고대 교수, 2015년 매일경제와의 인터뷰에서
"韓, 경제보다 안보를 보라…中 배드가이 vs 美 굿가이"
―한일 관계는 어떻게 보나.

“중국의 위협이 커질수록 한국과 일본이 더욱 긴밀히 협력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공통의 위험이 있을 때는 적대적 관계를 맺고 있는 국가도 더 가까이 협력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동아시아에서 한미일 동맹이 구축돼 있지 않기 때문에 한일 관계를 개선하기 더 어렵다. 중국이 한국과 일본을 위협하는 더 강력한 국가가 되고 있는 만큼 한국과 일본이 협력하게 될 것으로 생각한다.
존 미어샤이머 시카고대 석좌교수, 2022년 1월 1일 동아일보와의 신년 인터뷰에서
“한국은 中과 무덤 위서 춤출지, 美 핵우산 유지할지 자문해야”

냉정하게 말해 양국 관계가 평행선을 달리는 것은, 아직까지는 서로가 서로에 그다지 아쉽지 않은 관계라서이기도 하며, 여기에는 아이러니하게도 중국 견제를 위해 누구보다 한일관계 개선을 바라는 미국의 영향력이 크다.

일본에서의 반한은 한국과의 외교적 마찰로 인해 국민감정이 나쁘다는 정도이지만, 한국은 현실적으로 일본에 비해 국력이 밀리는 데다[17] 실제 일본에게 식민지배를 당한 역사적 경험 때문에 국민감정에 더해 일본에 대해 실존적인 위협으로 바라보기도 한다.[18]

한일관계 개선은 가해자였던 일본이 피해자였던 한국의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움직여야 하는데, 일본 입장에서는 미국이 존재하고 쿼드대만 등으로 해양 방위선을 구축한 이상 자신들이 먼저 한 수 굽힐 만큼 한국이 아쉽지는 않다는 것이 문제다. 일본이 변하지 않는다면 한국이 먼저 변해 일본에게 맞춰줘야 하는데 문제는 한국도 굽혀가면서 그럴 생각은 전혀 없다. 한국에게 있어 일본은 더 이상 과거 1980년대처럼 세계 최강을 넘볼 정도로 넘사벽의 국가도 아니고, 한국에게 위협이 되는 국가 중 북한은 사실상 위협이라고 하기도 민망할 정도로 국력 차이가 크게 벌어졌으며, 실질적인 위협이 될 수 있는 중국은 한미동맹이 건재한 이상 한국을 함부로 건들지 못한다. 무시할 수 없는 이웃나라인 중국도 일본에 과하게 접근하지 말라고 경고하는 마당이니, 한국 입장에서도 굳이 과거의 치욕과 현재의 영토 분쟁을 감수하면서 일본과의 관계 개선을 할 필요를 잘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19]

국제정치학자 존 미어샤이머 역시 이 점을 지적하며, 한일관계의 개선은 결국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서나 가능할 것이라고 점쳤다. 즉, 중국의 부상 등 양국의 안보적 협력이 매우 절실하게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혹은 그러한 과정을 거쳐 상호 신뢰가 회복되지 않는다면, 한쪽의 일방적인 양보를 통한 한일관계의 개선은 현실적으로 일어날 가능성도 낮고 딱히 그렇게까지 추구할 만한 것도 못 된다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2020년대 이후 신냉전 시대가 도래하며 중국의 패권주의적 행보가 심해진 데다가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더욱 밀착하는 북중러, 북한의 핵무장 및 무장강화로 인해 한국과 일본 양국은 과거사 앙숙을 일단 접어두고 협력을 강화해야 한다는 여론이 힘을 얻게 되었고, 이로 인해 한국의 반일/혐일 감정과 일본의 반한/혐한 감정이 과거에 비해 어느 정도 줄어들었다. 또한 일본 정치권의 우경화아베 신조 피살 사건, 통일교 게이트, 정치자금 논란으로 인한 아베파들의 몰락 + 중도우파 성향의 기시다 행정부 + 친서방 일색인 윤석열 정부 정책[20] 덕에 이전에 비해 많이 옅어졌으며, 한일 양국의 MZ세대들을 중심으로 상대 국가에 대해 호감을 표하는 사람들이 늘었기 때문에 한일관계는 앞으로 개선될 가능성이 높아졌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여전히 일본은 틈틈히 독도 문제나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LINE야후 지분매각 논란 등등 반일 정서를 만들 사안을 계속 던져주고 있으며, 한국 내에서도 이로 인해 정치적인 충돌이 발생하는 등 갈등은 지속되고 있다.

맨 위 문단에 나온 존 미어샤이머 시카고대 교수의 인터뷰 또한 2015년 인터뷰에서는 한일관계 개선에 대해 회의적인 의견을 내놓았지만[21], 비교적 최근인 2022년 인터뷰에서는 한일관계 개선에 대해 긍정적인 의견을 내놓았다.

4.3.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

일본은 한국 영토인 독도를 자신들의 영토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영유권 주장으로 인해 한국과 일본의 관계는 자주 경색되었다. 한국 입장에서야 독도는 확고하게 지배하고 있는, 완전한 한국 영토이며 이를 뒷받침할 역사적 증거도 많으니 일본의 이러한 행보가 현실성 없는 비이성적인 행위임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도발이 있을 때마다 강하게 항의하는 식으로 일관하고 있다.

반대로 일본은 독도 문제에서 열세에 있는 위치다 보니 자존심과 감정에 호소하는 식으로 분쟁을 일으킨다. 한국이 여유만만한데 비해 일본은 더욱 강하게 독도를 도발하고 툭하면 국제사법재판소로 가자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그래서 잊을만하면 한국의 영토에 대해 일본 측에서 도발적인 발언을 하다보니 한국에서 일본을 신뢰하기 어렵게 되었다.

지리적으로 일본은 섬나라이고 한국은 반도국가라는 것도 영토 관념에 있어 차이를 만드는 점 중 하나이다. 섬나라는 주어져 있는 섬으로 곧 영토가 규정되는 반면 반도는 영토로서의 형상이 반은 주어져 있고 나머지 반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즉 바다와 맞닿은 부분은 눈에 보이는 한계선으로서 확실하게 그 경계를 보여주지만 대륙과 맞닿은 부분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영토를 규정하고자 하는 마인드 자체가 섬나라와는 달라지게 된다. 일본이 독도를 자국의 영토라고 주장하는 것은 독도가 한국과 마찬가지로 배타적 경제수역 안에 포함된 섬이기 때문인데, 섬나라에서 영토는 기본적으로 주어진 것(자연국경)임에 비해 반도국에 영토는 뺏길 수도 있고 뺏을 수도 있는 것이다. 거기에 기본적으로 반도국은 대륙에 대해 방어적인 입장을 취하면서 가지고 있는 것을 최대한 빼앗기려 하지 않기 때문에 한국도 마찬가지로 독도 문제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게 되는 것을, 일본은 그런 한국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고 비난하는 일이 생기는 것이다. 일본이 독도를 자국령으로 주장하는 근거 중 하나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독도가 명기되지 않았다는 것인데, 일본은 "서류에 나와 있지 않았으니까 우리 땅"이라는 거고, 한국은 "옛날부터 자연법상으로 인정받은 땅이었다"라는 입장이다. 경제적인 부분에서 봤을 때는 양국 모두 겹쳐지는 경제수역 안에서는 공평하게 조업을 할 수 있고 그렇게 하기도 한다.

4.4. 일본의 내적 오리엔탈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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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제국을 건설하고 경제적으로 세계 2위까지 올라갔던 일본의 근대화 성과는 일본을 여타 아시아 국가들과 이항대립적 구도로 분리하는 의식과 깊은 연관이 있다. 일본을 문명으로, 여타 아시아는 야만으로 비정한 이 의식은 일종의 내재화된 오리엔탈리즘 담론이다. 특히 한국은 만주와 함께 일본의 가장 핵심적인 식민지였기에 이 담론의 중핵에 위치한다.

이 때문에 서구가 오리엔트를 바라보는 열등한 존재라는 인식은 일본인들이 한국에 대해 떠올리는 대표적인 심상이기도 했다. 제국의 차등적인 식민 권력 하에서 형성된 이러한 오리엔탈리즘적 시각은 일본이 장악한 헤게모니 속에서 생산된 학문적, 문학적인 텍스트를 통해 권위를 얻었으며, 다시 이를 기반으로 재생산되며 하나의 담론을 형성했다. 물론 이는 한국의 국력 및 경제력이 크게 성장함에 따라 많이 사그라들었지만 그 잔영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어느 정도 남아 있는지라 일본인들의 대외의식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5. 한일관계에 영향을 끼치는 국제 변수

5.1. 북한

우선적으로 북한과의 관계를 염두에 두게 되는데, 이는 북한을 놓고 한국과 일본이 느끼는 체감상의 접근성이 극명하게 차이를 보이기 때문이다. 국군과 일본 자위대의 설계자는 미국이라고 할 수 있는데, 설계 구조상 하면 좋은 게 당연한 동맹은 안 맺고 서로 싸우고 있는 상황은 북한에 대해 한국이 느끼는 위협과 일본에 대해 한국이 느끼는 위협의 크기가 그다지 다르지 않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실제로 전쟁이 일어날 미약한 가능성보다 이 가능성 자체를 일본이 카드로 사용할 수 있게 될 가능성에 대해 한국은 우려를 느끼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일본 군대를 한반도 내에 들이는 것은 국민 정서상 불가능한 일에 가까우며, 되려 일본의 신 군국주의에 빌미를 줄 공산이 있는 것으로 보여도 한국 입장에서는 이상할 게 없다. 실제로 역사에 비추어 봐도, 일본 군대가 한반도 내에 들어와서 좋았던 일이 없었다.[22] 그나마 좋지도 나쁘지도 않았던 일이라면 백제부흥운동 당시 원군으로 온 정도 뿐이다.

북한의 핵은 실제로 쏘게 되면 외교적으로도 수세에 몰리게 되고 UN을 적으로 돌리게 된다. 따라서 북한이 한국을 향해 핵을 쏘는 순간 미국이 북한을 향해 가지고 있는 모든 가용전력을 동원해 보복에 나설 것이다. 무엇보다 현대전에서 핵무기는 대량인명살상을 하는 도시공격용이 아니라 고도로 요새화된 미사일 사일로, 군사기지를 사전에 파괴하는 용도로 사용된다. 도시공격은 굳이 핵무기가 아니더라도 데이지커터(Daisy Cutter)나 기화폭탄으로도 충분히 값싸고 방사능 걱정 없이 핵과 같은 효과를 볼 수 있다.

물론 북한이 가지고 있는 대량살상무기는 큰 위협이다. 우리가 북한을 경계하는 이유는 북한이 가진 생화학무기, 더티 밤을 비롯한 대량살상무기를 사용하는 전쟁이 발발하게 되면 한반도 자체가 전후 회복이 불가능한 죽음의 땅이 되어 버릴 우려 때문이다. 여기에 한반도에 살고 있는 몇 천만의 인구가 그대로 난민이 되는 것은 덤이다. 하지만 북한이 한국에 대량살상무기를 마구 사용해봤자 북한이 승리해서 적화통일에 성공하긴 커녕 한국과 미국의 보복공격으로 북한이 지도에서 지워질 게 확실하니 어디까지나 대량살상무기는 위협용 겸 최후의 수단일 뿐이다.

정치적으로도 한국에 대한 군사적인 도발을 정치적 프로파간다로 써먹으면서, 한국을 인질 삼아 미국에 원조를 해달라는 식으로 써먹는 북한은 한국에 있어서 상당한 부담이 되고 있다. 북핵문제를 생각하면 한국과의 관계를 넘어서 세계적인 골칫덩이나 마찬가지. 게다가 북한의 이러한 행보는 결과적으로 일본의 재무장에도 힘을 실어주고 있다. 과거사 부정이나 역사 왜곡, 영토 분쟁 등의 문제로 걸고 넘어지는 작금의 일본 정부가 보여주고 있는 행태를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단순히 과거사 문제와 영토 분쟁에서 편을 들어준다는 정도를 가지고 대한민국의 안보를 수시로 위협하고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직접적으로 위해를 가하며 자국 주민들을 대상으로 인권유린을 펼치는 불량 국가 북한을 좋게 평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런 이유로 대한민국 정부도 북한을 일본보다 훨씬 더 경계한다. 다만 일본이 한국과 동떨어진 이해관계를 추구하게 된다면 한국도 이에 대해 어느 정도 경계할 수밖에 없다.

5.2. 중국

문제는 중국인데, 중국의 경우에는 지상뿐만 아니라 해상에서도 확장을 지속하고 있다. 대표적인 증거가 바로 항모와 원자력 잠수함 건조. 중국에서는 자국의 영해를 수비하기 위함이라고는 하지만, 항모가 애당초 수비용으로 운용하는 함선도 아닌데다가 오히려 항모와 원잠의 경우에는 바다 건너에 있는 적을 타격하는 것이 목표인 공격용 함선이다. 당연히 중국의 주장을 곧이 곧대로 믿는 국가는 하나도 없다.

현재 서 태평양 연안의 중국 포위망은 자연스럽게 남쪽은 미국 주도 하의 호주 등 동남아 국가. 센카쿠 열도 중심의 중부는 일본이 맡는 쪽으로 진행되는 상황이다. 미국은 제주 서쪽의 남-서해 중심의 북부는 한국이 맡는 것을 바라고 있다.

중국의 경우, 현재 중국은 한국 입장에서는 개입하기 좋은 발전 단계 중인 시장이다. 여기에 한국과 중국의 무역규모는 한국과 일본의 무역규모보다 커지게 되었다. 물론 대중무역은 실제 시장에 대한 수출보다는 중간재가 많고 중간재의 성격상 언제든 대체할 수는 있지만 한국 경제가 중국 경제에 개입할 수 있다는 것은 중요한 변수로 작용한다.

일본의 경우에는 긴밀하게 내부에서 연결되어 있는 자본의 존재로 인해 미국의 글로벌 기업이나 대형 펀드조차도 철수를 하고 있는 상황에 한국 경제가 직접적으로 개입할 여지가 있다고 판단할 여지가 없다. 그런 한국에 있어 일본의 시장은 중국의 시장과는 전혀 다른 성격의 시장인 것이다. 그런 이유로 중요도에 있어서 우선순위가 달라지게 된다는 것이다.

문제는 중국과의 경제적 협력에 대한 미국과 서구권의 입장이다. 미국은 2차 대전 이후로 현재에 이르기까지 국제 시장의 룰을 자의적으로 조절할 가능성을 가진 세력에 대해 견제를 아끼지 않았다. 이는 곧 이러한 판단에 근거한 행동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과 이어진다. 즉 한국에서 일어난 전쟁에 개입해 한국과 함께 싸웠던 미국에 있어서 한국이란 나라는 자신들이 지키게 된 나라라는 가치를 지니게 된다. 그리고 그런 나라에서 자발적으로 경제적 이해관계에 근거한 거래를 하려고 하는 것을 마냥 못마땅하게 취급하기가 어려운 것인데, 문제는 그 상대, 즉 중국이 국제 시장의 룰을 자의적으로 조절할 가능성을 가진 세력이라는 사실이다.

여기서 미국의 입장이 난처해지게 되었던 것. 이에 더해 미국 자신이 그렇게 나서서 싸워온 결과로서 안정된 무역 체제와 국제적인 자본망의 존재로 인해 하드파워로 인한 직접적인 견제만으로는 충분치 않게 되었고, 그 결과로 외교와 자본에 대한 개입이라는 카드를 쓸 수밖에 없는 상황. 그런 와중에 한국이 AIIB에 먼저 가입을 해버렸고, 일본은 이에 거리를 두고 있는 상황이니 미국 입장에서 일본은 당장 급한 불은 꺼주고 있는 존재로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다.

최근에는 그렇게 우선순위가 변동한 결과로 이런 식으로 직접적인 비난마저 하게 되었다. 동시에 중국에 대한 외교적 견제에 지나치게 열을 올리고 있는 일본에 대해서도 한국이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역사 문제에 대해 마찬가지로 공세적 태도를 취하고 있다.

여기에 한국의 입장에서 본다면 중국은 역으로 일본을 견제하기에 더없이 좋은 카드로 보이나 문제는 중국 역시 국가 규모에 비해 국제 사회에서의 영향력이 매우 미약한 국가[23]이며 무엇보다 중국은 국제 사회에서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는 미국과 좁게는 지역적 헤게모니를 두고 넓게는 냉전을 방불케하는 서방 진영과 반서방 진영의 대립에서 반서방 진영 내 가장 큰 축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이 중국을 일본을 견제하는 카드로 사용하기엔 국력 차이는 물론이고 같은 서방 국가와의 대립을 해결 하기 위해 반서방 국가와 협력한다는 점에서 서방의 공조를 얻기가 힘들다. 체제 차이, 인권 탄압 등으로 소소한 마찰을 겪긴 해도 중국과의 경제적 협력으로 얻을 수 있는 이득을 감안해 사실상 명분상의 대립 정도로 그쳤던 이전과 달리 미국의 본격적인 견제와 화웨이 사태로 중국은 사실상 서방 주요국 대부분과 대립하고 있다.

중국 역시 한국을 한미일 삼각 공조를 무력화시키는 카드로 한국의 장단에 맞춰주는 것 뿐이기 때문에 한국으로서는 중국 노선을 고려하기엔 무리가 있다. 실제로 박근혜 정부에 들어 중국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결과 미일관계의 격상을 가져와 외교적으로 고립되고 실리는 별로 없이 운신의 폭이 좁아진 경우만 봐도 알 수 있다.

5.3. 일본과 다른 국가

한국은 중국의 위협으로부터 일본을 막아주는 방파제 역할과 대륙의 문물을 전해주는 역할을 해왔지만 오히려 그와 별개로 정한론 등의 사상을 가지고 '일본을 겨누는 칼'이라고 주장하면서 한반도를 노렸던 전례가 있다.

전 세계에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제국주의 시절의 일본이 아닌, 현재의 일본에 대한 대중적 인식이 나쁜 나라는 한국, 북한, 중국 외에는 별로 없다. 어차피 북한처럼 특별히 문제를 일으키는 나라가 아니라면, 원래 멀리 떨어진 국가들 간의 인식은 대체로 국력과 선진화도에 비례하는 편이다. 특히 일본처럼 문화, 경제 대국에 정치적으로도 제1세계의 핵심인 나라가 좋은 이미지를 갖는 건 어찌보면 당연한 것이다.

까놓고 말해 한국에서 형제의 나라 운운하는 터키세르비아 같은 동유럽 국가들이나 그리스, 아르메니아에겐 죽일 놈이고, 미국도 한국에는 시혜적인 동맹국이지만 쿠바처럼 18~20세기 미국의 경제적 종속을 당했던 중남미 국가들이나 중동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다. 독일이 유럽에서 갖는 이미지 역시 한국인이 가지는 이미지 마냥 긍정적이지는 않다. 요지는 한국이 일본을 경계한다고 해서 세계의 다른 지역 국가들도 그래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물론 일본의 세계적인 이미지가 좋다고 해서 과거 주변국들에 저질렀던 전쟁범죄에 대한 책임이 덜어지는 것도 아니며 친일 성향의 국가들도 구 일제의 과거사와 관련해서는 분명히 선을 긋는다. 다만 어디까지나 각자의 입장에서 평가가 나오는 것이고 사안에 대한 관심 크기가 달라지는 것이다.

일본과 마찰을 빚고 있는 국가는 우리나라 외에는 북한[24], 중국과 러시아 정도인데 각각 독도, 센카쿠 열도, 쿠릴 열도의 영토 분쟁이 현재진행형이라는 공통 분모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북중러 모두 본질적으로는 반서방 국가이며, 특히 북한은 한국과 국가 정체성을 두고 다투는 주적이기 때문에 진영 논리상 일본이 북한과 서로 가까워지는 데도 한계가 있다. 게다가 러시아는 중국과 달리 한국과 같이 영토분쟁 지역을 실제로 점유하고 있는 상황이며 무엇보다 주 활동 영역이 동북아가 아닌 중앙아와 동유럽이다.

실제로 최근 들어 일본은 러시아와의 경제적 교류를 통해 러시아와의 관계를 복원하려 힘쓰고 있다. 북한 문제로 인해 지지부진한 시베리아 횡단철도 연결사업을 일본이 홋카이도를 통해 연결하여 선점하려는 시도 뿐 아니라 북방 영토 역시 러시아의 어려운 경제 사정을 이용해 대규모 사업을 진행 중이다. 애초 러시아는 쿠릴열도가 문제인 것이니까. 일본이 러시아와의 관계에 공을 들이는 것 역시 일본의 생각으로는 한국과의 관계가 그간 미국과의 관계 강화를 통해 어느 정도 주도권을 갖게 되었으니, 이제 러시아와 관계를 강화하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으며, 중국에 대해 실질적으로 견제를 할 수 있는 국가 역시 러시아이기 때문에 일본 입장에서 러시아와 관계를 강화하려는 것은 결과적으로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일본의 의도라고 볼 수 있다. 다만 중국 견제의 경우 러시아반미라는 기치를 아직도 고수하고 있기에 일본이 친미 노선을 버리지 않는 이상 힘든 상황이다.

한국도 대러 관계에 힘쓰려고 하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직접적인 접촉이 없는 이상 경제적 의도이다. 그리고 북한의 존재 때문에 일본에 같이 대항한다던가, 중국을 견제한다든지 하는 것은 힘든 상황이다.

그리고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 역시 중국에 대해서는 비난을 끊이지 않는 것과 비교해 러시아에 대해선 완화된 표현으로 언급하는 것만 봐도 오월동주 관계인 중국과 러시아의 연결고리를 끊기 위해선 러시아의 역할이 중요함을 트럼프 역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크림반도 사태 이후 경제적 제재로 곤란을 겪고 있는 러시아는 중국에 북한처럼 천연가스의 몇십년 채굴권을 내주며 중국에게 자금지원을 요청하는 상황에 놓여있다. 자존심 강한 러시아 푸틴 대통령이 어떤 심경을 갖고 있을지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위에서 언급한 반미 감정은 아직도 남아있다. 사실 이렇듯 러시아와 중국은 중소 국경 분쟁과 같이 사소하게 다투면서도 미국에 있어서는 연합하는 사이라 자존심으로 어쩔 관계가 아니다.

6. 2000년대 이전까지

현대의 한일관계에서 고대부터 근세 역사까지의 영향력은 생각보다 미미하다. 즉, 근현대에 있었던 일제강점기에 형성된 반일감정이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16~17세기 조선임진왜란 직후 병자호란을 겪게 되어 반일보다 반청감정이 주류를 이뤘음에도[25] 병자호란이 지금 반중감정의 근원이 되지 않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

또한, 임진왜란 이후에도 에도 막부와의 국교를 정상화하고 조선 통신사를 파견하는 등 일본과의 관계가 회복되기도 했다. 이와 같이, 현대의 한일관계는 근대 이전의 관계 악화와 소강, 회복 사례와는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 메이지 유신 이후 이루어진 일본의 한국 식민지화 및 현대에도 이어지는 일본의 과거사 청산 문제 등이 현재 한일 간 갈등의 뿌리라고 볼 수 있다.

또한, 한국에서 일제강점기와 같은 일본의 일방적 수탈이 벌어진 것은 근현대사 이후고, 일본이 개화하여 아시아 최강의 국력을 갖추기 전까지는 딱히 일본에 비해 한국이 그렇게 꿇릴게 없었고 오히려 앞서나가던 시기도 있었으므로 그저 얻어터지기보다는 한대 맞으면 한대 돌려주는 대등한 관계에 속했다. 실제로 통일신라시대 신라구의 존재나 원간섭기 여몽연합군 출정, 여말선초 대마도 정벌 등 한국에서 일본을 공격한 사례도 제법 있었다.

후술한 내용에서 일본과의 갈등이 벌어진 '사건'들이 여럿 언급되지만 평온하게 지낼 때에는 굳이 언급할 만한 별다른 사건이 없었다. 즉, 무조건 우호적인 사이도 아니었고 악화일로의 관계만도 아니었다.

6.1. 삼국시대 이전

구석기 시대엔 한반도와 일본이 육지로 연결되어 있어서 한반도에 있던 사람들이 일본으로 많이 건너갔다. 대략 1만여년 전에 바닷물이 상승하여 일본과 한반도가 완전히 분리된다.

일본의 조몬 시대는 한국으로 치면 신석기 시대쯤인데, 조몬 토기의 경우 한반도 후기 신석기 토기 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아 어느 정도 서로간에 교류가 있었을 것이며, 일본산 흑요석이 한반도 남부에서 발견됨으로써 고고학적으로도 증명되었다.

야요이 시대를 보면 야요이인이 도래인 계통이고, 그들이 한반도 출신이라는 것은 규슈 북부에서 발견되는 야요이인의 유골과 고대 한국인의 DNA 유사성이나 고대 한반도의 것과 매우 유사한 유물 등 강력한 증거들이 뒷받침하고 있다. 고고학적으로 무덤 양식이나 유물 등을 통해 본다면 야요이 시대와 가장 관련이 깊은 지역은 고대 한반도이다.

여기까진 교류가 있었더라도 한일 양쪽으로 국가 단위의 교류라고 말하기 어려운 관계다. 이 이후로는 본격적으로 국가 단위의 관계로 넘어간다.

삼국시대 이전 국가라고 하면 고조선, 밖에 없는데, 이 둘은 기록으로 남은 역사가 매우 적다. 그 적은 기록 중에서도 외교 쪽은 중국, 한나라와의 관계 뿐이지 일본에 대해선 어떠한 기록도 없다.

고조선의 지정학적 위치상 일본과 직접 교류는 힘들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한일 양쪽으로 남아있는 유물을 통해 추정해봐도 고조선 - 일본과 서로 연결되는 유물은 그냥 없다고 봐도 되기 때문에 교역도 거의 안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지정학적 위치상 일본은 고조선보단 한반도 남부에 있었던 과 교역했을 것으로 보이지만, 교역했다는 역사 기록도 없고, 서로 간에 교역했다는 유물도 없다.

다만 한참 이전인 신석기 시대 때도 한일간에 교역했다는 게 증명되는 만큼, 그보다 후세 시대인 진국과 일본은 서로 교역했을 가능성은 꽤 높다.

6.2. 삼국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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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이 각국의 상황에 맞게 일본과 서로 다른 관계를 구축하였고 이러한 관계 양상은 시기에 따라 변화했다.

고구려광개토대왕 시기 왜와 백제의 침입을 받은 신라를 돕기 위해 원군을 파견해 왜와 싸운 이력이 있으나 고구려의 제1 주적은 위나라, 당나라, 수나라, 전연, 후연, 숙신, 돌궐, 부여 등 중원 일대와 만주, 요동 지역의 여러 국가들과 이민족들이었고 제2 주적 역시 남부에 접한 백제, 신라, 가야 등이었고 왜와는 물리적 거리가 있어 장기간의 대립은 없었다. 오히려 고구려 후기에는 담징이 일본 열도에 건너가서 호류사의 벽화를 그려주는 등 왜와 감정이 나쁠 이유가 없었고 삼국시대 말기에는 고구려 또한 적국인 신라의 후방에 위치한 왜와 사신을 주고 받으며 우호 관계를 모색하며 고구려-백제-왜의 삼국 연합으로 신라를 고립시키고자 했다. 왜의 입장에서도 백제에만 의존하는 기존의 외교 전략에서 탈피해 또 하나의 대륙 세력과 우호 관계를 맺는 것이 도움이 되었기에 대 고구려 관계를 중시했다. 고구려 멸망 후 많은 고구려 귀족들과 유민들이 일본 열도로 이주했고 고구려 마을을 이루고 살았는데 사이타마현의 고마 신사가 바로 그 흔적이다.

백제의 경우 전반적으로 일본의 전신인 야마토 왕권과 매우 친하게 지냈다. 한반도 계열 국가 중 일본과 가장 친한 국가를 선정하면 백제가 제일 먼저 언급될 정도. 백제와 왜의 우호관계는 근초고왕 시기부터 시작하는데 백제가 한창 전성기를 구가할 이 무렵 근초고왕은 아들인 근구수왕을 보내 백제 국왕의 칠지도를 선물했고 이로서 백제 왕실과 왜 왕실은 동반자 관계로 성장할 수 있었다. 양국은 백제는 왜에게 선진적인 기술을 제공하고 왜는 정치지형상 불안정한 백제를 유사시 군사적으로 지원하는 방향으로 상호 보완적 관계를 형성했다. 또한 백제는 국왕의 자제들을 일본에 보내 본국의 왕에게 변이 일어날 때 이들은 이 일에 휘말리지 않게 하고 왕의 급사시 신속하게 후계자가 귀환해 백제 국왕 자리를 계승할 수 있게 시스템을 마련해 놓았고 왜 역시 파견된 백제의 왕족들을 통하여 백제와 중국의 선진 문물을 전수받을 수 있어 서로에게 윈윈이었다.

이들이 또 왜국 정치에도 상당히 관여했는데 백제 입장에서는 파견된 왕족들이 왕에 오르기 이전에 정치를 먼저 배움으로써 훗날 백제 국정 운영에 도움이 될 수 있었고 왜국 입장에서는 중요한 정치 파트너가 생긴다는 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백제와 왜의 우호관계는 이는 야마토 정권의 군사적 지원을 보면 알 수 있다. 백제의 전쟁을 돕기 위해 아신왕 때 대규모 병력을 파병한 기록들이 나오기도 한다. 성왕관산성 전투 당시에도 가야와 더불어 백제를 지원했다. 백제가 멸망하려고 하자 자기네 군주의 즉위식까지 미루고 대규모 병력을 백강 전투 때 백제를 지원한 걸 보면 마지막까지 동맹을 유지하려는 모습을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백제와 왜 사이에도 감정의 골은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26] 7세기경 들어 왜는 백제의 영향력에 벗어나 자체적으로 중국과 통교하려는 움직임을 보였고 백제 역시 이러한 왜의 태도에 불만을 가졌었다. 백제 무왕 시기 즈음엔 당에서 일본으로 귀국하던 왜국 사신이 동봉하던 당 황제의 친서를 백제가 강탈한 적도 있을 정도였고 이 때문에 왜는 일본서기에 백제를 '신의 없는 나라'라고 비난하는 기록을 남기기까지 했다. 이렇듯 백제와 왜 사이에서도 불협화음은 존재하였다.

결국 왜는 각종 연유들로 인하여 백제에 일방적으로 의존하던 대 한반도 정책을 삼국 모두와 독자적으로 외교하는 노선으로 변경하고자 했다. 여기에는 백제가 대 신라전쟁에 집중하게 되면서 한반도의 정세가 변화하기 시작했다는 점이 가장 컸다. 이 시기의 백제는 신라를 공격하기 위해 국가 정통성, 영토 문제로 치고박고 싸우기 바빴던 고구려와도 연합을 맺고 함께 신라를 공격하였다. 고구려-백제의 유화적인 분위기 덕분에 고구려-왜의 교류도 보다 수월해 질 수 있었다. 반대로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이게 된 신라도 이를 타개하기 위해 아래 후술된 신라-왜 사이의 문제점들을 뒤로하고 왜에게 화친의사를 내비치니, 왜의 입장에서는 굳이 백제 하나만 붙들고 있을 이유가 없어졌다. 하지만 고구려-왜의 교류는 애초에 백제의 조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고, 예전부터 쌓여 온 왜의 반 신라 감정이 일순간에 사라지는 것도 아닌데다가 기존 친 백제계 정계인사들의 영향력이 여전하다보니 신라와의 관계가 눈에 띌 정도로 호전되지도 않았다. 결국 왜는 백제 멸망 후 백제부흥군을 지원하는 등의 기존 외교노선과 비슷한 행보를 보인다.

신라의 경우 대한해협을 사이에 두고 왜와 맞닿아 있었고, 교류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왜구들이 자주 신라를 노략질하여 감정의 골이 깊었다. 이들 왜인의 노략질 기록은 신라 건국 박혁거세의 기록에도 나올 정도로 오래됐으며, 문무왕이 대왕암에 묻힌 것도 바다를 건너 오는 왜인들을 막으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또한 왜가 하필이면 나제동맹 기간을 제외하고는 원수 사이였던 백제의 동맹이었기 때문에 가끔은 백제-가야-왜 3국 연합이 신라로 침입해 들어와 경주를 약탈하고 신라를 괴롭히기도 하였다. 이때문에 신라인의 반일 감정은 상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왜 역시 대 신라 감정이 안 좋았고 이는 삼국사기일본서기에 모두 실린 박제상의 이야기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그러나 왜계 신라인인 호공이나 일본 출신일 가능성이 있다는 석탈해, 일본의 왕이 되었다는 연오랑, 신라왕이 조상이 되었다고 적혀 있다는 일본 황실의 시조인 진무의 형 이나히노미코토, 신라에서 강림한 뒤 일본으로 건너왔다는 스사노오, 신라에 도래했다는 천일창 등의 기록들을 보면 감정싸움과는 별개로 인적, 물적 교류가 성행했을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사실 세계사적으로도 서로 밀접한 관련이 있는 집단들 간에 사이가 나쁜 경우는 적지 않다.

또한 7세기 중반에는 신라 역시 삼국통일 이전에 왜와의 우호적 관계를 조성할 필요성을 느꼈고 왜 역시 백제와의 적잖은 갈등으로 신라와의 관계 개선을 물색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무렵에는 서로 사신도 자주 왕래하였고 나름의 친선관계를 맺기도 하였다. 때문에 일본 내부에서도 친신라 노선의 세력을 일시적으로 득세하기는 했으나 결국 백제 멸망 즈음의 왜국의 정권을 전통적인 친백제 노선을 고수하던 보수 세력이 잡게 되면서 양국의 노력은 흐지부지되었고 결국 663년 백강 전투에서 적으로서 대면하게 된다.

그 외에 가야의 경우 역사가 부실해 자세한 내막을 알기는 어려우나 가야의 여러 소국들이 일본 열도와 가깝다는 지리적 이점을 이용해 일본에 철기를 전수하고 막대한 경제적 이익을 얻은 것으로 보인다. 일본 내에서도 가야계 유물이 현재까지도 많이 발굴되고 있다.

다소 논란이 있으나 반도 일본어설에 근거하면 가야를 비롯한 한반도 남부 지역에 열도계 주민들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며 고고학적으로도 열도계 유적들이 한반도 남부에서 꽤나 발견된다. 또한 일본 규슈에서도 가야를 비롯한 한반도계 유적들이 발견되기도 했다. 이를 두고 문화 교류에 빗대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것은 피상적인 이해일 뿐으로 당시 상황에 대한 올바른 설명이라 보긴 어렵다. 이 시기에는 현재의 한일 양국 정체성의 원류가 될 두 문화가 한쪽이 우위를 점하면서 반도와 열도에 혼재하였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 이후 한반도의 열도계는 점차 다수를 점한 한국계에 동화, 흡수되었고 일본 열도에서는 반대의 현상이 발생했을 것이다. 현재의 국경과 심리적 장벽을 걷어내면 지리적으로 인접한 한반도 남부와 일본 규슈에서 동질적인 문화집단이 포착되는 것은 오히려 더 자연스러운 일이다.

6.2.1. 백제 유민들의 신라에 대한 원한?

노태돈 서울대 교수는 '삼국통일전쟁사'에서 망국의 한을 품고 일본으로 이주한 백제 고위층이 일본의 정사(正史)인 일본서기를 쓰는 데 직간접적으로 관여하여 신라를 부정적으로 보는 역사관을 일본인들의 마음속에 심었고, 이것이 지금의 한일 갈등에도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취지의 기술을 했다. 일본서기는 8세기 초에 고사기 다음으로 간행된 역사서인데, 이 책에서 신라에 대해 부정적으로 기술한 대목은 그대로 일본에서 국가적, 국민적, 공식적 對신라관-對한국인관으로 굳어졌다는 이야기이다. 1970년대 한국 주재 일본 대사관에서 근무한 적이 있는 외교 평론가인 오카자키 히사히코(岡崎久彦)는 한국의 역사 및 정치에 대해 기술한 '이웃나라에서 생각한 것'이란 책에서 노태돈 교수와 비슷한 의미에서 '백제의 망령'이란 표현을 사용했다.

즉, 일본서기에 쓰인 역사관을 배우고 자란 일본인들은 백제에 대하여는 좋은 감정을, 신라(한국)에 대하여 좋은 감정이 있을 수 없다는 주장. 실제로 일본서기의 집필진은 가야와 백제를 자신들의 편으로, 신라를 주적 내지 속국으로 간주하는 서술 방법을 택하고 있다. 신라가 한반도를 통일한 뒤에는 이런 적대감과 경멸감이 한민족에 대한 감정으로 바뀌어 오늘날 한일 민족 감정의 한 축이 형성된 것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백제가 멸망하기 한참 이전에도 신라는 일본과 적대했기 때문에, 멸망한 백제의 왕족이 일본서기에 끼친 영향으로 인해 일본이 신라를 비롯한 한반도 국가들에 대한 적대감이 생겼다고 보기는 힘들다. 게다가 저자들이 백제의 역사서를 참고했던 것은 분명하지만 백제를 마치 왜의 속국이었던 양 자기들 입장으로 왜곡해서 기록하는 등, 백제인들이 일본서기 편찬에 주도적으로 개입했다고 볼 수 없는 정황도 있다. 그리고 역사를 보더라도 신라 이외의 한반도 국가들과는 대체로 관계가 양호한 편이었다. 허구한 날 싸우던 유럽의 이웃나라들과 비교하면 더더욱 그렇다. 어디까지나 주장의 하나로 참고만 할 것.

6.3. 남북국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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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가 멸망한 후 일본은 발해와 가깝게 지냈지만 신라와는 비교적 긴밀한 관계는 아니었다. 물론 나당전쟁 이후 신라와 당의 국제 관계가 파탄나면서 신라가 일본과의 우호관계를 물색하였고 잠시 양국간 우호관계가 이어지기는 하였지만 향후 발해가 건국되고 신라가 당과의 관계를 회복하면서 양국 간 관계는 다시금 예전처럼 소홀해졌다.

하지만 통일신라 시대에도 후대인 고려, 조선시대보다 압도적으로 많이 일본과 교류하고 있었다. 삼국사기 등 한일 양국의 사료를 종합해 보면 670년부터 779년까지 1세기 동안 신라에서 일본으로 사신단이 39차례나 파견됐고, 동시기 일본 사신단은 신라를 25차례 방문했다. 사신단의 규모에 있어서도 성덕왕 2년(703)에 204명의 사신단을 파견했다는 기록을 참고하면, 압도적으로 많은 횟수까지 감안했을 때 1회에 3~5백명을 파견한 조선 통신사에 크게 밀리지 않는다.[27] 다만 교류는 교류일 뿐 국가 감정은 많이 안 좋은 편이었다. 한편 통일신라 후기에는 신라구가 일본 해안을 노략질하는 일이 벌어지며 삼국시대 내내 지속되었던 왜구의 신라 침입이 역전되는 현상도 발생하곤 하였다. 사실 현행 국사 교육에서는 아주 짧게만 언급하고 지나가는 부분이지만,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하고 중앙정부의 통제력이 회복될 때까지 신라구의 일본 약탈은 계속되었으며 헤이안 시대 일본의 대외정책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심지어 고려왕조와도 건국 후 약 100여년간 공식 교류가 거의 없었을 정도였다.

발해는 중국의 당과 한국의 신라를 견제하기 위해 일본과 우호 관계를 맺은 바 있다. 발해 초기 고왕 시절에는 발해의 국력이 많이 약해 일본에 조공까지 하였으나 점차 무왕과 문왕 시기를 거쳐 발해의 국력이 많이 강성해지자 동등한 국제관계로 전환되었다. 일본은 발해와의 동맹을 이용해 신라 침공을 구상하며 발해의 참여를 독촉하지만 실익 혹은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발해는 비협조적인 태도로 일관해 이 계획은 좌절된다. 한편 5경 중 하나인 동경용원부를 통해 해상로인 일본도가 뻗어있어 이 곳을 통해 발해와 일본은 관계를 맺어왔다.

6.4. 고려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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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전기에는 한일 역사상 가장 교류가 없었다고 할 정도로 교류가 적었다. 이전의 신라, 발해 보다도 교류 횟수가 적다. 벽란도에 송나라, 심지어 아라비아 상인들도 왔을 정도로 송나라와 교류는 많았지만, 일본과 교류는 매우 적었다. 그나마 성종 이후, 문종 때는 교류가 늘은 편.

고려시대 당시의 일본은 헤이안 시대, 가마쿠라 막부, 무로마치 막부 시대였다. 헤이안 시대의 일본은 당과 신라라는 이웃나라들이 쇠락해가는 것을 목격하고 있었으며, 곧 이들과의 교류를 서서히 차단함과 동시에 국풍 문화를 고집하는 시기였다. 이 시기에 외국의 것을 부정한 것으로 여기는 국수주의는 보편적인 풍토로 자리잡았고, 이는 외국 사절의 방문에도 극도로 인색하게 되는 계기로 작용했다. 당장 후백제의 사절부터가 문전박대를 당했고, 통일 이후 통교를 위해 찾아온 고려 사절들도 '번국의 예를 안 지켰다'(...)느니 하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려 왕실의 행사에는 일본인들을 포함한 외국인들도 참석하고 있었으니, 국가간 공식 관계가 수립되지는 않았어도 교류는 어느 정도 있었던 듯하다.

서로 간에 무역 정도나 하던 양국 사이에 커다란 변화가 온 건 몽고의 등장 때문. 몽골 제국이 일본을 침략할 때 고려군과 함께 쳐들어가는 바람에 양국은 마찰을 빚었다. 외국 정규군에게 침공당해 본 것이 역사상 처음이었던 일본인들은 이 전쟁을 매우 충격적으로 받아들였고, 민간에서는 무쿠리코쿠리(むくりこくり, 일명 '몽골 고구려') 귀신 괴담까지 등장할 정도로 두려움을 느꼈다고 한다.

이후 여말선초에 극성이었던 왜구는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6.5. 조선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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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1. 조선 전기

무로마치 막부가 지방 세력들을 제압한 후 한일 관계는 교린 관계로 그럭저럭 평온하게 유지되었다. 변효문신숙주 등이 일본에 사신으로 파견되었고, 세종의 대마도 정벌 이후 15세기 중후반에는 왜구가 한반도를 노략질하는 일은 줄어들었다.

조선이 15세기에 이르러 외교적 안정과 평화를 맞으면서 내치에 집중했던 반면, 일본은 오닌의 난이 발발하여 무로마치 막부가 통제력을 잃고 전국시대로 접어들었다. 각자도생을 꾀하던 일본의 지방세력 중 서일본의 세력일 수록 경제적 이익을 구하여 조선과의 교류에 힘쓰는 경우가 많았는데, 한 해에 일본에서 건너온 사절단이 6,000여명에 이른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활발하였다. 이들은 조선 정부의 환심을 사기 위해 저자세를 취하여, 조선을 '상국'이라 부르고 국왕을 '황제 폐하'라 칭하는 등[28] 몸을 낮추었으며, 조선 역시 일본에 대한 우월의식을 확립할 수 있었다. 세조는 "야인왜인은 모두 우리 번리(藩籬)이며, 우리의 신민이다"라고 말했는데, 이것이 조선 지배층들의 일본에 대한 일반적인 생각이었다.

그러나 일본과의 통교는 작고 큰 참화를 불러오기도 했는데, 16세기에 삼포왜란, 을묘왜변이 발생하여 조선이 피해를 입기도 했다. 이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을 통일하면서 이전의 일본의 저자세가 사라져서 조선 정부로서는 크게 당황하였으며, 그가 일으킨 임진왜란이라는 전면전까지 발발했다. 선조가 수도 한성을 버리고 북으로 피난을 나서고, 명나라의 손을 빌려 간신히 일본을 패퇴시키는 등 이 과정에서 많은 이가 일본군 또는 전염병으로 죽거나 다치고 국토도 황폐화되었다. 당연히 조선과 일본과의 관계는 최악으로 떨어져 버렸다.

그러나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리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군대를 보내지 않은 사람이었기에 조선 측에서는 새로운 승리자가 된 그와 적대를 할 이유가 없어 광해군1년인 1609년 빠른 관계 회복을 원했던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가 멋대로 국서 바꿔치기 주작을 하였지만 어찌 되었든 기유약조를 맺어 국교를 재개하게 되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일본의 마지막 막부 정권인 에도 막부를 열었다.

6.5.2. 조선 후기

하지만 왜란 직후 병자호란이 터지고 인조가 청나라 황제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사태가 벌어지면서 반청 감정이 앞서게 되고, 조선은 조선 통신사 등을 정례화하는 등의 노력으로 일본과 함께 교린 관계를 유지한다.

하지만 임진왜란 이전 조선 수도로 파견된 일본 사신의 왕랫길을 일본군이 그대로 침략 루트로 써먹는 바람에 조선 측은 일본 사신의 한성 진입은 커녕 동래 왜관 이외의 출입을 엄금하였다. 반면 일본은 조선통신사에도까지 불러 네덜란드인들에게 난학을 배울 때 한 대접조차 초월하는 융숭한 접대를 하였다. 막부가 국가 재정에 무리수를 두면서 통신사를 대접한 것은 국력을 과시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시기에 따른 추이는 있으나 대체적으로 수평적이었던 한일 관계가 기울어진 건 일본이 개화를 하면서 조선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국력을 구축한 근현대사 시기부터이다.

6.5.3. 개항기

근대 이후 한일 관계는 급격히 일방적인 쪽으로 바뀌게 된다. 일본은 쿠로후네 사건을 통해 개항한 시기가 조선의 개항보다 훨씬 빨랐다. 게다가 조선이 개혁개방에 지지부진한 사이 메이지 유신을 통해 급격히 발전한 일본 제국은 막부 시절의 쇄국정책을 버리고 제국주의적 팽창으로 조선을 위협했다. 이에 따른 첫 결과물이 바로 운요호 사건강화도 조약이다.

청일전쟁, 러일전쟁에서 승리하고 열강으로 부터 한국의 식민지배를 인정받고, 을사조약, 정미7조약을 체결하고, 한일병합으로 대한제국은 멸망하고 일제강점기가 시작되었다. 당연히 한국의 반일 감정은 급속히 오르게 된다.

6.6. 8.15 광복 이후

1945년 태평양 전쟁의 결과로 광복을 맞은 조선에서 일본에 대한 감정은 역대 최악이었다고 보면 된다.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은 친일파 청산을 위해 조직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를 자신의 정권 장악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방해하다가 결국 친일파 청산이 완료되지 못한 채 해산당해 훗날 좌파 진영에게서 친일파 소리를 들어먹게 되었지만 사실은 대한민국 대통령을 통틀어 가장 대외적으로 강경한 대 일본관계를 유지하였다. 본인부터 독립운동가 출신이기도 하고.

이승만 정권은 해방 과정에서 다소 애매한 위치에 놓인, 오늘날까지도 분쟁의 씨앗이 되고 있는 독도를 일본이 미군정의 통치로 인해 손을 쓸 수 없는 틈을 노려 수복하였다. 다만 애매하다는 말은 한반도 및 부속 도서로서 한국이 돌려받았는가, 아니면 연합국 군정의 점령지로 남았는가의 문제일 뿐, 행정구역에서 제외당한 일본 정부가 엉뚱하게 가타부타 뭐라 할 여지는 전혀 없다. 미국이 독도를 요구한다면 모를까. 결과적으로 독도를 한국이 실효지배함으써 독도 분쟁에서 우위에 설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주었지만 동시에 일본 입장에서는 두고두고 이를 가는 원인이 되었다.

또한 6.25 전쟁 당시 미군정 치하의 일본이 경찰예비대(구 일본군, 지금의 자위대)를 파견하려 하자, 이승만은 일본군이 한반도에 상륙하면 총부리를 북한군에서 일본군으로 돌리겠다는 발언을 해서 대놓고 파견하지는 못했다.[29] 낙동강 방어선까지 몰려가면서 대한민국 멸망 직전의 상황까지 왔음에도 일본에 대해서는 여전히 초강경으로 나섰다.

1953~1956년 사이에 일본 해상보안청독도에 대한 무단침입을 시도했고 1954년에는 독도대첩으로 사상자까지 발생할정도의 무력충돌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승만 정부 시절에도 일본과 국교를 정상화해 보상금을 받아 경제발전에 쓰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이승만 정부는 일제의 피해로 22억 달러의 손실을 당하였다며 이를 청구하였으나 일본은 근거가 없다며 한국에 남겨진 일본인 재산을 돌려달라는 역청구권까지 제시하며 거절하였다. 1953년 10월 회담에서 일본의 대표 구보타 간이치로는 일본의 한국 지배는 유익한 것이었으며 일본이 아니더라도 중국이나 러시아의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고 발언하였다. 당연히 회담은 결렬되었다. 1957년 일본은 이 발언을 취소하고 다시 회담이 열렸지만 1959년 일본 정부가 재일 한국-조선인을 북한으로 송환하자 일시 중단되는 파국을 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친일반민족행위자 처벌을 막고 친일파 청산을 주장하던 독립운동가들을 빨갱이로 몰아 결국 청산에 실패했다. 이승만은 독립운동가 출신이긴 했지만 지지 기반이 미약했던지라 친일파 청산을 막았을 뿐 아니라 친일파 출신 인사들을 적극적으로 등용했기 때문.

1960년 4.19 혁명 이후 장면 정부가 들어서고 회담이 개최하였지만 지지부진하였고 박정희 정부가 들어서면서 한일 관계는 새 국면을 맞는다. 조속한 경제성장이 절실했으나 돈이 없었던 한국과 미국의 강력한 요구, 그리고 과거 문제를 청산할 필요성이 있었던 일본 정부의 이해관계 일치로 인해 한일기본조약을 체결함에 따라 한일 간 국교정상화가 이루어졌다. 이를 통해 유무상 8억 달러를 받았고, 일본은 표면적으로나마 과거사 문제를 완전히 청산할 수 있었으나 내부적으로는 과거사와 해당 조약에 대한 해석의 차이가 발생해 한일관계가 꼬이는 원인을 제공하고 만다.

과거사 문제를 비롯해 정치적 문제까지 겹친 박정희정부 시절 일본과의 관계가 다시 끊어질 뻔한 초대형 사건이 터졌다. 조총련을 위시한 재일 한국인(조선인)들 간의 이념적 갈등으로 인한 문제, 1973년 8월 8일 김대중 납치 사건으로 크게 항의를 받았으며 이듬해 민청학련 사건에 일본인 2명이 구속되었고 북한-일본을 왕래하던 만경봉호에 승선해 북한의 공작지도원과 면담을 하는데 남조선 대통령 암살은 김일성의 명령인 혁명과업으로 성공해야 한다며 당부하고 이에 주석 님의 혁명 과업을 위해 기필코 성공하겠다고 대답한 재일 한국-조선인 문세광이 1974년 8월 15일 국립극장에서 열린 29회광복절 기념행사장에 난입해 영부인을 암살한 박정희 저격 미수 사건을 일으켰다.

당시 노신영 외무차관은 다음 날인 16일 주한 일본 대사를 소환해 문세광에게 일본인 명의의 여권을 발급한 데 대한 공식 해명을 요구하는 동시에 김호룡 당시 조총련 오사카지부 정치부장 등 일본 내 공범에 대한 철저한 수사를 촉구했으나 일본의 수사가 정부가 기대한 것에 미치지 못하고 일본 내에서는 내정간섭을 받고 있다는 여론이 조성되어 당연히 국내에는 반일 여론이 거세졌고, 주한일본대사관주변에 매일 같이 시위대의 항의집회가 벌어지고 자칫하면 흥분한 이들에게 점거당할 수 있어 김종필 당시 국무총리는 데모 대의 대사관 접근 금지 조치를 내렸다.[30] 이러한 때 한국 정부는 을미사변을 파헤쳐 공론화할 것을 지시하며 일본과의 단교까지 고려한 것으로 밝혀졌다. '박 대통령 저격' 배후 수사 한·일 첨예 대립 이러한 사태는 다나카 가쿠에이 수상이 1965년 한일국교정상화 당시 외무장관을 맡았던 시나 에츠사부로를 특사로 파견해 일본의 책임 인정과 한국 수사기관과 협조한다는 내용의 친필을 전달해 일단락되었다.[31]

1973년의 김대중 납치사건[32]과 1980년의 5.18 민주화운동 등 군사정권 시기의 폭정과 사회적 혼란은 일본인들에게는 충격으로 받아들여졌으며, 이를 두고 당시 일본인이나 일본 언론들은 한국을 보고 "식민지 통치 시기가 더 행복하지 않았느냐" 식의 망언을 할 정도로 한국을 얕잡아 보는 인식이 팽배하게 되었다.[33] 실제로 일본에서 활동하는 넷 우익 중에는 이 시기의 기억이 강하게 남아있는 중노년층이 있다고 한다.

당연히 이는 한국에 알려지면서 반일 감정의 소재로 활용되었다.많은 이들이 모르거나 언급이 잘 안 되는 것이 있는데 독립유공자들을 발굴하고 국민적으로 이와 관련된 교육을 적극적으로 처음 시행한 것은 권위주의 정권들이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이래 처음으로 국가 유공자에 대한 보상이 실시되었다. 일제강점기 독립유공자들이나 6.25 전쟁 유공자들의 공적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1962년안중근, 강우규, 윤봉길, 이준(열사), 김구 등을 포함한 18명을 건국훈장-대한민국장에, 이봉창, 나석주, 신돌석, 신채호, 장인환, 홍범도, 지청천 등을 포함한 58명을 건국훈장 대통령장에 수훈하였다.

1968년 4월 박정희 대통령이 "일제 때에 변형된 조선 왕조의 도로 중심축을 복원하기에는 돈이 너무 많이 들어가니 일본이 가장 무서워 할 인물의 동상을 세우라는 지시를 내려 이는 지금의 광화문에 조성되어있는 이순신 동상이다. #

1982년 일본 고교 역사 교과서 검정 당시 문부성이 한국에 관련된 내용을 일본 측에 유리한 형태로 수정하면서 역사왜곡 이슈가 터졌다. 한국 내 여론은 독립운동과 같은 역사를 보존하고 후대에 알려야 된다는 여론이 비등해졌고, 500여억 원의 국민성금으로 지금의 독립기념관을 건립하였다.[34]

이러한 정치적 문제들을 보면 험악한 관계를 유지했다고 착각하기 쉽지만, 냉전이라는 국제정세에서 북한, 중공, 소련이라는 공동의 적에 대항을 해야 하는 공통점으로 안보 공조체계를 이루어 표면적으로는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고 볼 수 있다. 무엇보다 경제적 분야에서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이 근현대의 일본은 한국으로서는 선망의 대상이었고, 반대로 일본으로서는 한국이 눈에 들어올 이유가 없었다.

한국의 경제는 1977년 무렵 중진국 수준에 진입하고 아시아의 네 마리 용이라 불리며 주목받고 있기는 했지만, 일본은 이미 1970년 오사카 만국박람회를 기점으로 선진국에 진입한 상태였다. 또한 1980년대에는 1980년대 일본 거품경제의 문제가 드러나기 전까지 미국을 뛰어넘고 최고의 경제대국이 될 것이라는 전망까지 받고 있던, 경제력과 국력 면에서 절정기에 있는 나라였다. 당시 한국 기업들은 일본의 제품과 경영전략을 벤치마킹하기 바빴고, 미국식 경제모델[35]을 받아들인 경제관료와 달리 일선 기업인들은 일본 모델을 택했는데, 1990년대 중반까지 성행했던 평생고용제도나 연공서열제, 사업다각화, 장인정신, 잇쇼켄메이, 직장가족주의, 인사관리제도 등이 일본에서 배워온 것이다. 특히 삼성전자의 경영전략은 1980년대까지 줄곧 일본 기업 모방이었으며, 롯데그룹처럼 재일교포가 세우거나 진출시킨 기업들은 일본식 경영제도가 몸에 밴 경우가 있었다. 일본 상품이나 일본 문화의 경우 수입이 금지되어 있어 쉽게 접할 수는 없었으나, 암암리에 부유층들을 중심으로 퍼져나갔다.

위에서 설명한 1965년을 기점으로 선진 기술과 자본 부품 소재들이 쏟아져 들어와 이를 조립.가공해 미국 시장에 파는 당시 태평양 삼각 경제구조로 불리던 "양국은 경제적으로는 대단히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였다.[36]

1980년대에는 정치적인 관계도 매우 호전되었다. 1983년 나카소네 야스히로가 현직 수상으로 처음으로 한국을 공식방문[37] 하여 정상회담을 하였고 1984년 전두환 대통령은 국가원수로서 처음 일본을 방문하였다. 이승만 대통령과 박정희 대통령도 일본 방문을 했으나, 이들은 공식적인 차원에서 방문한 것이 아니었다. 이 자리에서 히로히토 천황은 전두환 대통령과 만찬에서 “금세기의 한시기에 있어 양국간의 불행한 역사가 있었던 것은 진심으로 유감이며 다시는 되풀이돼서는 안 된다"는 언급을 하였다.전두환1984년 방일 때 일왕 과거사 ‘첫 언급’ 이유는

1988 서울 올림픽에도 일본이 참가했는데 가나다순으로 입장했기 때문에 ㅇ으로 시작하는 일본은 비교적 후반부에 입장했고 중국보다 먼저 입장했다. 이 대회에서 일본은 금메달 4개, 은메달 3개, 동메달 7개를 획득했다. 그러나 쇼와 덴노가 올림픽 개막 후 얼마 안 되어 쓰러지는 바람에 바로 옆 나라에서 올림픽이 열렸는데도 일본에서는 올림픽 열기가 식어 버렸다.

1990년대에는 한일 관계에 긍정적인 사건들이 있었다. 1995년 '무라야마 담화'를 통해 일본 정부가 전쟁과 식민 지배에 사과를 표명했고, 1998년 일본 정부궁내청에서는 1998년 10월 7일, 김대중 대한민국 대통령이 일본을 국빈으로 방문했을 때 만찬 자리에서 처음으로 아키히토 일본 천황한반도에 대한 '고통'과 '사과'라는 단어를 처음으로 공식 석상에서 언급한 것이 그 예다.아키히토 일본국왕 발언일본 국왕 김대통령 초청 만찬서 한국 고통 사과

하지만 1990년대에도 결코 우호적인 관계로 일관된 것이 아니었다. 1995년 11월 8일에 전해진 에토 다카미 총무청 장관은 "한일합방은 나라의 힘이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단행된 것이었다. 더구나 일본은 한일합방을 통해 한국에 좋은 일을 많이 해준 것이 학교도 도로도 지어주었다. 창씨개명도 강제로 진행되지 않았다"라는 발언을 하였다. 에토 다키미의 발언 며칠 후 열린 1995년 11월 14일 김영삼장쩌민의 정상회담 직후 기자회견에서의 발언을 화근이었다. 김영삼 대통령이 “난징대학살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라고 묻자 장쩌민은 “어렸을 때 내가 직접 봤는데도 일본은 그런 일 없었다고 잡아뗀다"라고 했다. 이에 김 대통령은 “일본 정치인들의 망언이 계속되고 있다. 버르장머리를 고치겠다"라고 했다. 일본은 경악했다. 대통령 외교비서관으로 현장에 있었던 유 전 장관은 “이 발언이 IMF 행을 불렀다"라고 한다.22년전 IMF 위기는 일본 은행에 의해 터졌다.

6.7. 1997년 미일가이드라인 논란

파일:미일가이드라인.png

1997년 9월, 미국과 일본이 미-일 방위협력 지침을 19년 만에 개정해서 일본 자위대가 해외에 군사 개입할 수 있는 길이 열려 논란을 빚기도 했다.

자위대의 한반도 진출 법적 근거를 마련한 미일 가이드라인에서 일본은 97년 7월 캄보디아 자위대 수송기 파병을 통해 다른 아시아 국가들의 반응을 떠보고 한반도 북핵위기시 자위대의 한반도 합법적 군사활동 근거를 이 법안을 통해 공식화하기도 했다. 미일 대등한조건서 군사협력

1년 5개월만의 개정협상 끝에 합의된 미-일 방위협력 지침에는 일본 주변사태에 관한 항목이 새로 등장했는데 이 규정에 따라 일본의 육·해·공 자위대는 미군을 지원한다는 명목 아래 군사적 역할의 범위를 사실상 해외로 확대할 수 있게 됐다. 미국과 일본은 일본 주변의 개념이 지리적인 것이 아니라는 외교적인 수사를 합의문에 명기했다. 그러나 가장 먼저 한반도, 그 다음은 중국과 대만간의분쟁을 상정한 것으로 일본군 해외군사 개입의 근거를 마련한 셈이다.

우선 미국은 일본과 방위 협력을 강화함으로써 전력을 극대화하고 군사비부담을 덜 수 있게 된다. 일본 측은 군사 안보 면에서의 역할 증대를 노려 자국방위라는 기존의 동맹 틀을 의도적으로 깼다. 당시 일본 내에서는 신 방위협력에 대한 위험 론이 고개를 들고 있으며, 국민적 합의 과정 없이 안보를 종속화시켰다는 비난도 만만치 않았다.

미국과 일본은 유사시 주변 사태의 대상국이 된 한국과 중국에 사절을 보내 군사팽창주의의 우려를 해명한다는 방침이다. 그러나 과거사를 청산하지 않은 일본이 미국의 대리 역할을 구호처럼 평화와 안전을 위해서만 수행할지, 전쟁 피해 대상국들의 시선은 예사롭지 않아 논란을 빚었다.미국.일본 방위협력지침 개정, 주변국들의 우려 높아져

최첨단 장비로 무장돼있는 육상과 해상 그리고 항공을 포함하는 일본의 자위대 병력은 모두 20만3천 앞으로는 새로운 가이드라인에 따라서 아시아와 태평양 전지역에 출동할 수가 있게 됐으며 자위대가 맡게 될 후방지원은 우선 미군의 전투지원을 위해서 일본 열도의 군사기지 뿐만 아니라 민간공항과 항만시설을 미군에게 제공하게 된다. 또한 무기와 탄약을 비롯해서 전쟁수행에 필요한 일체의 물자와 연료를 일본의 자위대가 수송을 맡게 된다. 아울러 미군기와 함정의 수리와 정비도 일본이 담당한다.

달라지는 자위대의 역할 가운데 주목할 만한 것은 위기에 처한 미군의 수색과 구조작전에 자위대가 참여한다는 사실이다. 긴급한 사태일 때는 적지에도 들어가는 상황도 예상할 수 있다. 미국-일본 방위협력지침 확정; 일본의 군사적 역할 확대

당시 미일가이드라인에 대해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후보는 "미일가이드라인의 골자는 유사시 자위대한반도에 진출하여 직간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려하는 것이 큰 문제"며 "주권국인 한국의 동의 없이 이런 법안이 통과된 것과 우리정부의 무관심과 무능에 분노할일"이라고 김영삼 정부를 비판했다.남북정상회담 개최될 것 김대중후보 발언 김대중 후보는 유사시 자위대의 한반도 군사개입에 대해 한국의 사전동의가 있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혀 자위대의 한반도 군사개입에 대해 조건부허용 입장을 내놨다. 97대선 정책대결로

7. 2000년대 이후

7.1. 정치

7.1.1. 역사를 둘러싼 양국 대중여론의 괴리

21세기 초반 한일관계 악화의 최대 원인은 과거사를 둘러싼 인식 차이이다. 독도보다도 큰 원인이다.

양국 모두 민주주의 통치 체제를 가진 국가인고로 여론의 괴리가 없다면 역사 문제로 말미암은 국가적 외교 마찰도 벌어지지 않는다. 외교 실황, 언론, 교육이 형성하는 국민 여론의 양국간의 괴리와 그 괴리가 심화된 이유에의 분석을 후술한다.
7.1.1.1. 한국
한국으로서는 제국주의 시기의 식민통치의 굴욕과 해방 후 후유증으로 한반도 분단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등 과거사에 대한 부정적인 배경을 깔고 들어가고 있다. 거기에 전범들이 안치된 야스쿠니 신사 참배부터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전쟁범죄 미화, 근현대사를 둘러싼 일본의 역사왜곡, 일제강점기에 대해 식민지 근대화론을 주장하는 등 일본에게 유리한 해석, 독도 영유권 주장 등을 지켜보며 일본이 과거사 청산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인식을 가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비록 일본 정부 차원에서는 고노 담화무라야마 담화 등을 통해 여러 차례 사과를 하기는 했으나, 극우 인사들이 지속적으로 이를 뒤집어 버리는 망언을 일삼아 온 데다 국가 차원에서도 이를 적극적으로 제지하지 않는 상황이기도 하다.

사실, 재일교포들이 오늘날에도 일본 사회에서 그리 좋은 대접을 받지 못하는 이유 역시 일제강점기 시절에 일본 제국이 조선을 식민지로 강제병합하고 내선일체를 선동하고 주장했으면서도 정작 조선인들에게는 일본 국적을 전혀 주지 않은 채 2등국민으로 대놓고 차별을 했던 것이 근본적인 원인이다.[38] 결국, 오늘날 일본인들이 재일 한국인을 멸시하고 차별하는 사회적인 문제점은 과거 일본 제국 시절에 재일 조선인들을 일본인으로 동화시키지 않았기 때문에 벌어진 부작용이다. 결국 재일 조선인들을 적극적으로 일본 사회에 편입시키지 못한 일본 제국의 무책임한 행태와 불편한 진실이 가져온 문제점인 것이다.

그리고, 아베 신조 정권에서 한국 외교의 이중성을 문제 삼아 양국 간의 현안들에서 모조리 강짜를 부리는 태도는 결국 내로남불이라는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 한국 내에서 반일 감정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다 보니 일본 내 지한파가 설 자리가 점점 줄어드는 것처럼, 일본 역시 한국 국민들의 시선이 점차 개선되고 있는 상황에서 상식적인 국민들조차 "이건 좀 아닌데"라고 고개를 저을만한 언사들만 반복하면서 한국의 지일파에게 외교적인 지지를 보내주지는 못할 망정 도리어 설 자리를 잃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로, 일본의 재무장이나 평화헌법 폐기, 과거사 배상 문제에서의 입장, 독도 분쟁 등은 한국인이 아니라면 객관적으로 어느 정도 용인해 줄 수도 있는 문제다. 하지만 군국주의를 옹호하거나 의외에서 식민지 수혜론을 주장하거나 후쿠시마산 수산물 수입을 강요하는 식의 태도는 국적을 떠나 상식적인 사람이라면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이고, 일본 내에서도 비상식적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한국의 문제가 외교에 지나치게 도덕률을 주입하는 것이라면, 일본의 문제는 외교에 도의를 지나치게 배제하고 실익만을 쫓는다는 것이다. 잘못된 건 잘못된 거고, 그걸 해결하려면 잘못을 바로잡으려고 노력해야지 정상적인 다른 부분까지 일부러 망가트릴 필요는 없는 것.

이명박 정부천황에게 직접 사과를 요청하고 문재인 정부가 전 정부의 협약을 부정한다면 그것은 정부끼리의 다툼으로 끝나야지 과거사 자체를 부정하고 사과의 필요성이 없다는 주장의 타당한 이유가 될 수는 없다.

또한 한일기본조약에서 소멸시킨 청구권은 한일합병과 그 이후 일제강점기에 발생한 일본인의 불공정한 재산·권리 취득 및 국가 간 법률 문제에 대한 것이며, 개개인을 대상으로 저질러진 불법 행위를 총망라하는 개념인지는 여전히 법적인 해석이 나뉘는 상황이다. 게다가 한일기본조약은 물론이고 위안부 합의 역시 일본의 과거사를 둘러싼 수많은 망언이나 위안부 소녀상 설치를 방해하는 등의 극우적인 행보를 죄다 용인하겠다는 뜻은 아니다. 과거사를 문제삼지 않겠다는 것은 아무리 넓게 해석하더라도 이를 통해 금전적인 보상을 요구하지 않겠다는 의미일 뿐, 과거사를 잊고 완전히 없었던 일로 무마하자는 의미가 결코 될 수 없다. 이건 강도강도질을 해놓고 재판도 끝났는데 계속 자신을 비난한다는 이유로 피해자 앞에서 범죄 사실 자체를 부정하는 수준의 논리이다.

한편 일본은 자신들이 애써 만든 자산들을 모조리 강탈당했다는 인식이 있다. 해방 이후 미군정은 본국 정부나 총독부가 건설한 사회간접자본 민간인이 설립한 기업들을 전혀 보상하지 않았다. 3년 후에 성립된 한국정부가 인수하거나 귀속 불하로 자산가들이 기업체들을 헐값으로 매수하였는데 당시 일제가 만들어놓은 자산을 3000억으로 추산되어 1948년 정부 세출의 9배에 달하는 거액이었다.# 1965년 기준으로 물가는 28배 증가 했으므로 "8조4000억"에 해당한다. 소비자 물가지수와 상승률 당시 달러당 300원 정도였던 시장환율 기준으로 환산하면 "280억 달러"다. 물론 일제가 만든 시설들과 기업들은 6.25 전쟁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고 대다수가 유실되어 이를 제외하고 계산해야 하지만 1950년대 당시에는 주요 대기업체 89개 중에서 40%(36개사)를 차지할 정도로 비중이 높았다.

이런 사유로 일본은 1965년 국교정상화 회담 당시에 이에 수혜를 입은 한국 측이 어떠한 형식으로든 보상을 하라는 요구를 했다. 그러나 바로 이런 적산 문제야 말로 한일기본조약으로 배상 논의가 끝난 부분에 속한다. 조약 체결 이후에 일본이 정부 차원에서 새삼스럽게 적산의 소유권을 정식으로 주장하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다.[39]

과거 한일관계는 경제개발 년대에 대일 유화책에 힘입어 국민감정과는 별개로 외교적으로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1965년 한일기본조약 이래 양국의 수교와 본격적인 교류가 시작되었으나, 한국은 냉전이라는 시대적 배경 속에서 북한·중국·소련의 공산블록에 맞서 생존을 도모해야 했던 처지였다. 이는 미국의 강권아래 이루어진 것이었으며 당시 우리나라는 큰 혜택을 보았다. 물론 이후 사죄 면에서 고노 담화, 무라야마 담화 및 총리 친필 친서 등 일본 정부의 노력도 어느 정도 있었고 배상 측면에서도 한일기본조약에 따른 "독립 축하금" 3억 달러와 5억 달러의 유상 차관, 그리고 일본에게 받은 건 아니지만 미국을 위시한 제 1세계 선진국으로부터 아시아여성기금, IMF 지원금 등을 계속 지원받았기 때문에 일본을 마냥 적대할 명분은 딱히 없었다.

참고로 2018년 한국의 외환보유고 규모는 4,200억 달러 가량이나, 1960년대와 직접적인 비교는 불가하다. 당시 일본의 외환보유고는 18억 달러였다. 그리고 유상 차관은 일종의 대출이라고 보면 된다. 반드시 상환해야 하며 차관을 상환하지 못할 경우 독일이 그리스에 그랬던 것처럼 국고 압류가 들어간다.

당시 주변 환경도 녹록치 않았는데, 당장 양쪽 모두 미국의 동맹이며 냉전 구도에서 함께 소련 및 북한을 견제해야 했고, 소련 붕괴 이후에도 어느 정도 상황을 수습한 러시아와 급팽창하는 중국을 견제해야 하는 숙명이 있었다. 때문에 일본과의 공조에 균열이 갈 정도의 적대는 미국의 지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당시 한국에게도 매우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미국의 동맹국인 양국이 상대국을 노골적으로 적대시하면 먼저 적대시한 쪽이 미국의 눈치를 받게 될 것은 안 봐도 비디오이기 때문이다. 이러다보니 한일관계는 독도 등 몇몇 분쟁 요소가 있었음에도 한국이 경제적으로 크게 성장한 80~90년대를 기점으로 크게 회복되어 아베 2차 내각 출범 이전까지 나름 괜찮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이는 간 나오토 정권 당시 도호쿠 대지진이 터졌을 때 한국에서 민관을 가리지 않고 일본에 물자 및 자금을 지원하던 모습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여론이 오래 가지는 못했는데, 한국의 여론은 그 본격적인 이유를 도호쿠 대지진 후속 조치의 미비로 출범한 아베 2차 내각의 과거사 부정 행보 때문으로 본다. 한국은 지진 당시 지원을 안했다고 조작하는 일본 언론, 이른바 '다케시마의 날' 따위를 지정하면서 영토 문제로 지속적으로 도발해오는 일본 정치권, 731비행기에 탑승하고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하는 일본 총리를 지켜보았고, 식민지배 피해자로서는 이러한 일련의 일본 정책 변화에 당연히 적개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사실 한국의 입장에서 보자면 양국관계의 급냉각은 이미 예정되어 있던 일이다. 일본의 '노력', 이른바 '저자세 외교'는 사실 경제적 지원이 주를 이루고 있다. 실제로 한국도 6.25 전쟁 직후 세계 최빈국 수준에서 재기하기 위해 한푼이 아쉬운 시절에는 일본에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90년대 한국의 경제규모는 일본의 1/20 수준을 따라잡았고, 2000년대 중반 일본의 1/10 수준까지 따라잡았으며, 아베노믹스를 위시한 강도높은 양적완화로 인한 착시라는 주장도 만만찮지만 일단은 2017년 기준으로 일본의 1/3까지 따라오게 되었다. 이렇듯 한국 경제가 크게 성장해 선진국 대열에 들어선 현 상황에서는 경제적 지원이 크게 와닿을 수가 없는 상황이다.

특히 한국은 일본의 저자세 외교가 진정성이 부족하다 주장하는데 그 근거는 일본이 야스쿠니 신사 참배 등을 강행하며 자국의 전통문화를 중시해달라는 식의 콧대높은 모습을 보인 점, 그리고 위안부 소녀상에 대한 고압적 태도를 보인 점 등을 이유로 삼는다.

이후 이명박, 박근혜 두 정권의 대일 스탠스의 이면에 미국이 영향력을 행사했음이 드러나면서 미국의 입장에서도 섣불리 한국에 압력을 행사했다가는 한국 내에 잠재되어 있던 반미 감정을 건드릴 수 있을까 조심스러운 형국이다. 당장 박근혜 정부가 대일관계의 레버리지로 중국을 활용하려다 미국의 압박을 맞고 부랴부랴 급조한 협약이 2015년 한일 위안부 문제 협상 합의이고 이를 한국 국민들이 잘 아는 상황이다. 오죽하면 문재인 대통령과 트럼프, 아베 사이의 정상 회담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대놓고 '일본은 한국의 동맹이 아니다.'라고 발언했고, 트럼프도 속으로는 어떻게 생각했을지는 몰라도 이해한다라는, 한국을 두둔하는 발언을 해줬을 정도다.

그리고 미국 고위 군사 관계자들이 줄곧 주장해 온 한미일 군사 동맹에 대해서도 입장차만 재확인한 채 귀국했는데 한국 측에 강한 항의를 하지 않은 점 또한 미국이 일본이 한국의 역린임을 알고 일단은 조심스럽게 대한다는 해석에 힘을 실어준다. 이 점은 일본이란 나라가 한국의 역린이기 때문에 한미일 군사동맹은 불가능하다는 입장이라는 것이다.

무엇보다 한일 간의 과거사 갈등을 단순히 한국인들이 과거에 집착한다는 식으로 매도할 수는 없다. 일본은 단순한 체급으로 비교해 봐도 한국의 실효지배 면적의 3.8배, 인구의 2.5배 가량을 보유하고 있고, 세계 4위의 경제대국이자 UN을 비롯한 국제 사회에 외교적으로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세계적 강대국이다. 중국과 마찬가지로 일본은 우리가 단독으로 어떻게 해 보기는 버거운 상대이며, 그렇기에 우리는 큰 틀에서는 한미동맹으로, 보다 작은 틀에서는 남북관계·한중관계 개선을 통해 일본을 견제해 왔다.

그러므로 '일본이 제국주의 시절의 과오를 분명히 인식하고 반성하지 않는다'는 인식은 곧 "훗날 외교적인 상황이 변화할 경우, 일본이 한반도에 대한 야욕을 다시 드러낼지도 모른다의심으로 이어진다. 즉, 우리가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고 앞으로도 역전의 가능성이 별달리 보이지 않는 북한, 그리고 외교적인 목표 자체가 완전히 달라서 주적으로 삼기보다 오히려 전략적인 제휴를 시도해야 할 대상인 미국·중국·러시아와는 달리, 일본은 한국을 위협할 역량이 있음은 물론이고 대륙 진출을 꿈꾸는 섬나라의 지정학적 특성상 미국이 흔들리거나 한미동맹이 사라진다면 상황에 따라 한반도에 또다시 강력한 영향력을 끼칠 가능성이 충분한 국가라는 것이 문제이다. 이미 한국은 역사적으로 임진왜란, 일제강점기라는 사건들을 통해 현실적으로 겪어보기도 했다.

때문에 한국이 한일관계에서 전향적인 모습을 보여주려면 지난 세기의 영·프처럼 양국이 부딪칠 때는 부딪치더라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서로 연대해서 공통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싸울 것이라는 신뢰가 필수적이며, 이러한 신뢰 관계는 단순히 배상금 같은 숫자놀음이 아니라 군국주의·제국주의가 판쳤던 자신들의 어두운 과거에 대한 일관된 반성과 한국민들의 정서를 이해하고자 하는 진지한 노력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일본은 대북문제나 대중 관계 설정을 두고 연일 한국에게 '한미일이 공조해야 한다'는 식의 주장을 펼치고 있으나, 정작 자신들의 태도는 과거사에 대한 반성에서는 한참 떨어져 있음은 물론 고작 10년도 채 되지 않은 외교적 충돌을 견디지 못해 외교청서에서도 "미래지향적 관계"를 지워 버리고 손바닥 뒤집듯 하는 행위를 하고 있다. 당연히 이런 행동이 반복되면 될수록 한일관계에서 상대적으로 국력이 약한 처지인 한국으로서는 일본에 더 큰 위협을 느낄 것이고, 설사 이후에 다른 총리가 집권해서 사과한다 해도 언제 또 적대적으로 돌아설지 모르기 때문에 점점 더 방어적이고 보수적으로 접근할 수밖에 없다. 서로 간의 파탄의 원인이 될만한 잘못을 고치지 않고 상대방이 먼저 양보하기를 바라는 태도는 일본도 사실 한국과 별반 차이가 없는 것이다.

아베 신조 총리의 당선 직후에는, 이유는 불투명하나 다케시마의 날 지정 등의 외교공약을 하나도 안 지키면서까지 한일관계의 완화에 나서고 있다. 굳이 새로 들어설 박근혜 정부와 각을 세워봤자 피곤하기만 하고, 둘 다 국내의 경제문제를 해결봐야 하는 만큼 서로 신경을 쓸 일이 없다는 게 좋다는 생각인 듯하다. 이로써 한일관계는 다시 진정 측면에 접어들었다.

그런데 보편적으로 한일관계는 한국의 정권 초기에는 우호적 분위기로 흘러가고, 한국 정권 후반기에 악화되어가는 점을 감안한다면 한국의 새 대통령 당선인이 나온 현재 우호적 분위기가 조성되는 것은 어느 정도 예상이 된 일이었다. 일본은 의원내각제 국가라서 정권 교체시기가 일정치 않으므로, 기준은 한국 대선이 될 수밖에 없는 일이다. 노무현 대통령 재임기인 2005년 독도문제가 심각하게 터졌을 때 정도가 유일한 예외이다.

결론적으로 한국 대중의 일반적인 입장을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7.1.1.2. 일본
상당수의 일본인들은 일본 우익들의 잇따른 과거사 부정 망언보다는 한국 정부가 과거사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면서 일본에게 금전적으로 무리한 요구를 하는 것이 한일관계 악화의 주요 원인이라고 생각하며, 이는 당연히 상당수 한국인들의 인식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실제로 2010년대 중반 이후 현재까지의 일본 내 주류 여론은 ''일본이 한국에게 더 이상 과거사를 이유로 저자세로 나갈 필요가 없다"로 요약할 수 있으며, 이러한 인식은 '한국을 신뢰할 수 있는가' 등의 문항으로 이루어진 설문조사에서도 드러난다. 아사히 신문처럼 그나마 한국에 가장 우호적인 편인 좌익 언론지에서조차 2018년 시점에서는 한국에 대한 우호 여론이 거의 자취를 감춘 상황이다.

오늘날의 한국인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내용이지만, 1965년 한일수교를 맺은 이래 일본 정부는 한국에 꾸준히 우호적인 자세를 유지하면서 한국에 나름대로의 성의를 보여온 바 있었다. 설명할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에 응하여 한국에서의 대일 여론 또한 시간이 지날수록 그럭저럭 개선되어가고 있었고, 실제로 1990년대 후반~2000년대 초중반 한국의 대일정서는 전반적으로 우호적인 편이었다.[42] 일례로 동일본 대지진 당시 한국은 일본의 예상을 초월하는 피해에 대해 국민들이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의 인도적 지원을 보내기도 하였고, 한국의 아이돌 및 배우들이 본격적으로 일본에 진출해서 활동하던 시기도 2000년대부터이다.

심지어 과거 아베 1차 내각 시절의 아베 신조는 대표적인 친한파 정치인이었다. 지금과 같이 우익 정치관을 드러내지도 않았고, 한국의 국립현충원에 일본 총리 사상 최초로 참배하며, 일본의 과거사 문제와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도 한국과 적극적으로 협력하여 해결하겠다는 의지를 밝히거나 제2차 세계대전에 자의에 상관없이 끌려간 사람들에 대한 위로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밝히는 등, 과거 무라야마-고노 담화가 이루어지던 시절과 비교해서도 크게 다르지 않은 스탠스를 유지하며 한국의 이해를 구하면서 상호호혜적인 관계를 구축하기를 원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인들이 이 사실에 대해 잘 모르는 이유는, 한국 미디어에서 이 사실에 대해 제대로 조명을 하지 않고 "그런게 있다 카던데 신경 쓸 건 아니다" 식으로 흘러 넘겼기 때문이다. 민족주의와 진영 논리에 따라 진실보다는 구독자들의 입맛에 맞는 기사들만 찍어내다 보니, 일본의 역사 왜곡에 비판하면서도 정작 우리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는 부분들은 숨기기 급급했던 것이다. 단적인 예로 한일기본조약은 과거사 갈등에서 일본 측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가장 큰 근거이며, 한일 관계를 논리적으로 이해하려면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사항임에도 불구하고, 정작 한국 내에는 그 내용은 커녕 그런 게 존재하는지조차 정확히 모르는 사람들이 대다수이다. 또 1990년에 아키히토 천황의 '유감(遺憾)이다', '통석(痛惜)의 염(念)을 금할 수 없다'와 같은 발언에 대해 한국인들이 무작정 분개하는 것도 일본인들이 체면을 위해 '사죄' 같은 직설적 표현을 피하고 우회적 표현을 쓰는 고유 풍습[43]을 몰라서 그런 것이다.

한일 국교정상화를 이룬 이 조약은 광복 이후 단절된 외교 관계를 복구시키고, 오랜 식민 지배와 전쟁을 겪으며 발생한 각종 청구권·보상권 문제를 해결하고자 체결된 조약으로, 한일 양국의 관계 개선에 대한 강한 의지를 반영하는 조약이기도 했다.냉전이라는 구도하에서 동북아진영을 반공 진영으로 묶으려는 미국의 의도는 일본으로 거액을 지급하도록 압박하였다. 이전의 문서에 나오는 "하여간 배상금은 실제로도 포항제철 설립, 소양강댐 건설에 사용되어 경제 발전에 큰 역할을 하였다, 일본 자본으로 인한 경제적 기여가 어느 정도 있었음에도" 이러한 서술들은 수박 겉핥기이다. 한국사회의 저변에는 일본에 거액을 받았지만 개발도상국으로 남아있는 국가들과 다르게 어떤 식으로 투자하여 농업 후진국에서 고도로 공업이 발달한 선진국 대열로 이끌어낸 한강의 기적에 이어 2000년대[44]선진국에 진입해 유일하게 일본을 우습게 보는 한국인이라는 조크가 발생하게 만들 정도로 어떻게 기여하게 되었는지 모르는 이가 너무 많다.

하여간 한일 관계가 악화된 가장 큰 요인 중 하나는 배상 유무에 대한 의견 차이, 직관적으로 말하자면 한일기본조약에 대한 양국의 인식 차이이다. 사실 한국에서 수십년이 흐르도록 배상을 요구하는 여론이 꾸준히 나오는 것에는 한국 정부의 책임이 크다고 볼 수 있는데, 1965년 당시 한일기본조약이 양국 정부 간 밀실 협약으로 추진되어 협정 내 정보가 양국 간에 서로 다르게 전달되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한일 국교정상화 과정은 국내의 반대 여론을 수렴하고 설득하는 절차가 결여되었기 때문에, 수많은 반대에 부딪친 것은 사실이다.[45]

당시 박정희 정부는 배상금을 직접 피해자들에게 전달하겠다는 일본 정부에 한국 정부가 전달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 배상금을 대표해서 받아온 뒤, 배상금을 배분할 의무를 소홀히 하여 피해자들이 일본이 배상을 하지 않았다는 착각을 하게 만들었다. 배상금은 국가 기반 시설과 같은 경제 자금으로 이용되었으며, 위안부 피해자들은 물론 일제강점기 당시 일제에 의한 피해자들에게는 한 푼도 돌아가지 않았다. 한일관계 악화에 일본의 책임을 추궁할 수는 있겠지만, 이러한 부분은 명백하게 한국 정부의 실책이었던 것이다.

대한민국은 제3공화국 시절 일본 정부와의 수교를 시작으로 여러 차례 배상과 사과를 제안받았으며, 이를 수락하였다. 비록 제3공화국 이래 헌법이 여러 차례 개정된 것이 사실이기는 하나, 대한민국은 여전히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1948년 수립된 제1공화국 정부에 그 정통성을 두고 있으며 국제사회의 모든 권리와 의무들 역시 이로부터 계승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제6공화국이 기존의 정파와 적대적이라 할지라도, 한일기본조약 공식 파기 선언을 천명하지 않을 거라면 그에 따르는 의무도 계승해야 하는 것이다. 65년 맺은 조약으로 문제점이 있다면 이는 제3공화국을 계승한 현대 대한민국 정부가 직접 해결해야 하는 것이고, 국가 발전을 위해 사용해 전국민에 혜택이 돌아가게하고 이를 계승한 오늘날의 한국 정부가 그렇게 발전된 조국의 과실에서 나아가 더 늦기 전에 다소 부족한 직접적인 보상액을 지급하는 것이 합리적인 귀결인 것이다.

이러다 보니 일본에서는 한국의 정치권에서 반공과 더불어 반일 정서를 정치적으로 이용하였다는 비판을 제기하고는 한다. 이는 한국에서도 제기되는 비판이기도 하다. 한국 국민들의 반일 정서는 항상 불씨로 남아있었으며, 실제로 이는 선거철마다 반일 정서를 선거 전략에 써먹는 정치인들을 중심으로 되살아나곤 했다. '한국만 모르는 중국과 일본'이라는 한국과 중국에서 근무한 일본 외교관이 쓴 책에 이와 관련된 일화가 나온다. 선거철에 국회의원 후보가 연설을 하는데, 그 내용이 "일본 놈들을 모두 때려 죽이자"와 같은 내용이었으며, 연설을 끝마치고 내려온 후보에게 왜 그런 연설을 한 것이냐고 묻자, 후보는 별 것 아니라는 듯 웃으며 "정치질이다" 라고 말했다고 한다.[46]

이명박 정부도 레임덕이라는 내정 문제를 해결하려고 아키히토 천황에게 사과를 요구한다는 외교적인 무리수를 던졌다. 정상회담과 같은 공식적인 외교 석상에서의 조율을 거치지 않은 채 미디어 앞에서 일국의 국가원수를 직접적으로 지칭하여 이런 발언을 하는 것은 심각한 외교적 결례이다. 최근 일본 정부가 문재인을 직접적으로 지칭하여 위안부 합의 판결에 실력행사를 하라고 요구했던 것이 외교 결례로 비난받았던 것과 마찬가지의 상황.

게다가 입헌군주제 국가의 군주들은 선출직 정부수반보다 의전상 살짝이나마 높은 대우를 받는 것이 외교가의 전통이며, 심지어 2차 세계대전에 대해 직간접적으로 책임이 있는 쇼와 덴노와는 달리 아키히토 덴노는 일본의 과거사를 반성하고 평화헌법의 가치를 인정하며 반전주의를 설파하며 A급 전범 합사 이후 야스쿠니 신사에는 얼씬도 하지 않은 인물이다.[47] 극우는커녕 항상 주변 국가들에 사죄와 반성을 표명해 온 대표적인 유화파 인사에게 단지 국내 지지율을 이유로 직접적인 공격을 가한 셈이며, 천황이 실권이 거의 없으니 망정이지 아키히토가 조금만이라도 삐딱선을 탔다면 일본 내 친한파의 최고 구심점을 혐한으로 돌려버렸을 가능성도 있는 최악의 악수였다.

박근혜 정부 때는 한일 정상간의 셔틀 외교마저 끊겼다. 문재인 정부에 대해서는 일본의 보수·진보 언론과 정부가 합세하여 다같이 자신의 지지율을 위해 반일 감정을 활용한다는 비판을 하고 있다.# 특히 일본의 대표적인 친한 성향의 진보 언론인 아사히 신문마저 문재인 정부가 반일 감정을 정치적으로 이용한다며 비판하는 상황이다. 난형난제격으로 "일본 정부가 지지율이 떨어지면 북풍이나 '한국 때리기'로 대중을 자극한다" 는 동일한 맥락의 비판 또한 한국 내에도 존재한다.

그러나 어쨌든 산업 태동기부터 이어진 교류로 한일 각국의 경제의 상호 의존도는 크게 증가하였다. 중국의 부상과 북핵 리스크 등 외교안보 상의 문제에서도 한미일 3국의 이해관계가 어느 정도 일치하는 편이었다. 대일 부품 의존도와 같은 직접적인 부분부터 네이버 라인 등 자본의 교류까지 워낙에 얽힌 부분이 많은지라, 한 쪽의 경제에 이상신호가 감지되면 나머지 쪽도 크게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는 구조다.

때문에 한미일 3국은 미국의 강력한 중재 하에 일본의 과거사 청산과 한국의 입장 변화를 이끌어낼 불가역적이고 새로운 협약을 준비하였으며, 대신 과거 한일기본조약이 밀실 조약으로 추진된 점이 한일관계 악화의 큰 요인임을 인지하였기에 이전의 전철을 밟지 않도록 대외홍보 면에서 만전을 기하여 매우 시끌벅적하게 진행되었다. 이것이 2015년에 이루어진 위안부 협상이다.

일본에서는 이 협상을 두고 "또 호구같이 돈 뜯긴다"는 자국민의 반발을 무릅써야 했다. 당장에 일본에선 한일기본조약을 통해 배상을 끝냈다고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후의 사죄와 배상은 일본 정부가 아닌 개개인의 사죄와 배상의 형식으로 진행된 것. 그러나 정작 한국에서는 또 한번의 밀실조약 비슷한 것으로 부정적인 인식을 얻게 된다.

단 대외홍보에 만전을 기한 덕에 해당 협상은 어쨌든 진행 절차부터 세세한 내용까지 양국의 모든 국민들이 너무나 잘 알게 되어 버렸고, 외교적인 대북 접근이 무위로 돌아가고 중국이 점점 더 위협적인 모습을 보이는 등 시국이 심상치 않다 보니 한국에서도 냉정하게 덮을 부분은 덮고 가자는 입장이 과거보단 힘을 얻고 있기는 하다.

아베 2차 내각이 과거사 부정 등으로 한국의 공분을 사던 시절에도 일본의 여론은 "지지를 철회하지는 않겠으나 입은 다물었으면 좋겠다"라는 여론이 과반을 차지했다. 물론 산케이 신문 등 우익 언론지에서는 다소 다른 양상을 보였으나 최소한 중도 우파를 견지하는 요미우리 신문 등에서의 여론조사에서는 일관적인 스탠스를 견지하고 있었다. 즉 일본 국민들은 아베의 경제 정책을 지지하여 아베 2차 내각의 자민당을 지지했고, 경제 성장의 실적을 평가하여 이후에도 자민당을 지지했지만, 그렇다고 아베의 사상까지 동조하지는 않겠다는 의견이 다수였다.

오히려 재특회 등 과격 극우단체의 시위에도 불만이 쌓인 시민들이 반-시위대를 구성하여 대립한 사건까지 있었다. 물론 이들의 성향 뿐만 아니라, 이들이 평소에 차에 확성기와 욱일기를 달고 질주하는 등 소음을 일으킨 점도 불만에 한 몫 했다.

어쨌거나 한국과의 관계 개선이 필요하다는 점에 대해서는 일본도 수긍하는 사실이지만, 아베 2차 내각에서는 과거 이명박, 박근혜 정부보다 더욱 강경한 대일 입장을 취하는 문재인 정부의 태도를 한일관계 개선의 주된 걸림돌로 받아들이고 있다. 게다가 일본의 군사적인 우경화를 두고 한국의 문재인 정부 및 민간의 인식이 지속적으로 악화일로를 걷는 반면, 일본과 아베 내각으로서도 당면한 주적인 중국의 커져가는 패권주의에 맞서려면 재무장을 포기할 수 없는 처지인지라 서로가 점점 더 양보할 수 없는 분위기로 가고 있는 상황이다.

아베 신조 총리 부터가 "덴노 헤이카 반자이"를 외치고 전차와 전투기에 올라타며 고노 담화를 부정하는 듯한 발언을 함으로써 한일관계를 냉각시키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실권을 가진 정치인이 아닌 나루히토 현직 천황 역시 황태자 시절 UNSGAB의 명예총장 자격으로도 대구에서 열렸던 세계 물 포럼에 참석하지 못했을 정도로 한일관계는 냉각된 상황.

결론적으로 일본 대중의 일반적인 입장을 정리하자면

7.1.2. 2012년

2012년은 한일관계가 본격적으로 악화되기 시작한 해이다.

1999년 이래로 일본 내에서의 한국 관련 여론은 '친근감을 느낀다'는 여론이 '친근감을 느끼지 않는다'는 여론보다 우위에 있었고 이런 추이는 거의 10년 이상 이어져왔으나, 2011년~2012년동안 불과 1년이라는 짧은 기간 내에 이런 여론은 180도 반전된 것이다.

2011년 10월까지만 해도 일본 국민의 여론은 한국에 대해 친근감을 느낀다는 여론(62%)이 친근감을 느끼지 않는다는 여론(35.3%)보다 거의 2배에 달하는 추이를 보여주었으나 2012년 10월경 동일 기관에 의한 동일한 여론 조사 결과, 한국에 대해 친근감을 느끼지 않는다는 여론(59%)이 친근감을 느낀다는 여론(39.2%)을 압도하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 일본내에서 한국 관련 여론을 악화시킨 주요사건으로는 2012년 이명박 대통령 천황 사과 요구, 2012년 이명박 대통령 독도 방문, 위안부 평화비 논란, 쓰시마 불상 도난 사건 등이 있다.

파일:korjpn_2012.jpg
출처
한·일 국민의 상대국 호감도, 월드컵·독도 등 고비마다 ‘출렁’, 2015-06-04, 한겨례

한국내에서도 2012년을 기점으로 일본에 대한 우호여론은 최악으로 치달았는데, 동아일보·아사히신문 공동조사를 보면, 1984년 ‘일본이 좋다’는 한국인은 22.6%, ‘싫다’는 한국인은 38.9%였다. 하지만 2011년 말 조사(2012년 1월 발표)에선 한국인 중 ‘일본이 좋다’가 12%, ‘싫다’가 50%로 나타났다. 2013년 시작된 동아시아연구원·겐론엔피오의 연례 상호 인식조사를 보면, 이해 ‘일본에 좋은 인상을 갖고 있다’는 한국인은 12.2%, ‘좋지 않다’는 76.6%로 조사됐다.

7.1.3. 2013년

기어코 2013년 2월 22일 아베 정권이 일을 저질렀다. 박근혜 정부가 공식 출범하기 불과 3일 전이다. 시마네 현 독립 행사였던 다케시마의 날 식전 행사에서 내각부 정무관(중앙정부 차관급 인사) 시마지리 아이코(島尻安伊子)를 보냈다.연합신문

이로써 양국의 관계는 더욱 더 악화되었다. 그러나, 같은 날 미국 워싱턴 D.C. 전략국제문제연구소에서 특별강연을 하던 아베가 자신의 조부 기시 노부스케 전 총리와 당시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의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과의 인연을 언급하면서 한일관계의 완화를 원하는 발언도 했다한국일보

게다가 2013년 4월 22일, 아소 다로 부총리 등 각료 몇 명이 야스쿠니 신사 참배문제 때문에 한국은 한일 외교장관 회담을 전격 취소했다. 하지만, 일본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국회의원 168명이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해서 우경화의 속도를 한 층 높였다.

여기에다 2013년 9월 일본 수산청 관계자가 한국의 수산물 금지조치에 항의하기 위해서 방한을 하고 WTO에 제소하겠다고 하자, 한국내에서 반일혐일을 부르게 하는 자초를 낳기도 하였다. 정작, 같은 조치를 위한 중국이나 미국에 관해서는 침묵을 하더니 국력이 약한 한국에 대해서는 오히려 강하게 나가고 있으니 국민들의 반일감정혐일정서도 이를 계기로 더욱 심해져 갈 것으로 예상되었으며, 일부에서는 "일본과의 완전한 국교단절, 일본상품 불매운동과 경제투자 전면금지" 등으로 초강경으로 대응하자는 목소리도 있었다. 물론 단교 같은 요구가 이뤄질 확률은 거의 없다. 미국이 가만 있을 리 없는데다 국교가 단절될 경우 현재로서는 한국이 불리하다.

실제로 일부 어민들이나 어촌 종사자들 사이에서는 이를 계기로 혐일 성향을 드러내었던 경우도 있었다. 잘못은 일본 측이 한 것인데, 일본 때문에 오히려 자신들이 손수 생산한 수산물 및 해산물이 팔리지 못하게 되니 어민들 사이에서는 이미 혐일정서가 드리운 상태였으며, 특히 동해안 지역 어민들이 이 문제로 혐일성향을 드러내는 것으로 알려졌다. 수산물 종사자들조차도 일본놈 때문에 한국 어촌이나 어민들이 졸지에 죽게 생겼을 지경이라며 억울함을 호소할 정도다. 그래서 "쪽바리 네놈들 때문에 우리가 다 죽게 생겼다. 이 놈들아!"하는 식의 일본에 대한 반일감정이 심하게 폭발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 역시 할 말이 있는 것이 동해 지역 한국 관할권의 수역에서 어족 자원이 씨가 말라가자 한국 측 어선들이 공공연히 일본쪽 수역으로 몰래 넘어와 어업을 하고 있는데 이로 인해 일본 쪽에서도 해양 순시선을 보내 경고하는 등 일본 어민들 입장에서도 한국에 대한 불만이 상당수준 존재하는 상황이다.

2013년 12월 26일,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하면서 다시금 관계 악화에 기여하였다. 심지어 아베 신조 한국 비하 발언 논란까지 나오면서 한일관계 상황이 더욱 악화되고 있는 중이다.

당분간 한일관계는 경색을 유지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실제로도 한국은 제일 싫어하는 국가 순위 1위를 일본으로 꼽는 반면 일본은 제일 싫어하는 국가 1위로 중국을 꼽는다. 하지만 후술되겠지만 2014년 설문조사에서 싫어하는 국가 순위에서 항상 중국과 더불어 한국이 포함되며 점점 반한 수치가 올라가고 있다고 뉴스에서 보도됨에 따라 낙관적인 전망을 하기에는 어려워 보인다.

그동안 일본에서 중국을 싫어했던 이유는 한국은 표면적으로는 반일감정이 높지만 구체적인 행동으로 이를 투영시킨 경우는 없었기 때문이며, 중국은 정부와 민간 모두에서 구체적인 행동으로 반일감정을 드러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2010년대 들어 이명박 대통령의 일왕 사죄파문, 중국과 연대하여 위안부 성노예 지정 등 한국이 국제사회에 반일감정에 대한 구체적인 행동을 시도하고 있기 때문에 반한감정이 일본에서 높아진 것이다. 물론 정치 체제도 다르고 적대감 면에서 월등히 높은 중국을 여전히 더 싫어하긴 한다.

어차피, 일본으로서는 적어도 현 상황에서는 굳이 한국과의 관계를 크게 개선할 필요성과 명분도 없고, 한국도 역시 명분이 없는 상황에서 일본과의 관계개선에 적극적으로 나설 필요도 없다. 게다가, 중국과의 관계도 일단은 서로 이용해 먹는 일반적인 국가간의 관계라서 더욱 그렇다.

결국,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자 항간에서는 한일관계가 악화된 대신 한중관계에 친밀감이 짙어진다는 것과 한국일본보다는 중국에게 무게를 둘 것이라는 전망도 나왔는데, 현재의 중국 역시 일본센카쿠 열도 문제로 갈등하고 있고 한국독도 문제와도 맞물려서 한국중국 사회에서 반일감정이 생기고 양국이 이렇게 동병상련에 있는 입장에서 양국관계가 더욱 친밀해질 것이라는 설도 있다. 적의 적은 나의 친구 게다가 경제에 있어서도 독도 문제와 맞물려서 백지화될 처지에 놓인 한일 FTA 체결 추진이나 통화 스와프를 축소한다거나 한국 국채매입을 하지 않겠다는 일본에 비해서 중국한국한중 FTA 체결 시행 등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려고 하는 등, 한중관계가 활발하게 나가는 것과 비교해봐도 대조적이다.

다만, 한중간의 지정학적인 문제 때문에 한국이 일본과의 관계에 신경을 안 쓴다고 해도 중국과 어느 정도 이상으로 긴밀해지기는 어렵다. 당장 두 나라가 상대 입장에서 생각을 해 봐도, 답이 뻔히 나오기 때문이다. 게다가 중국에게 있어 한국의 지정학적 가치를 생각한다면 한국으로서는 최악의 경우 결국 중국이 아닌 일본과 손을 잡게 되어 있다. 한일 FTA도 결렬은 됐지만 한일 FTA는 한국에게 득보다 실이 많아 결렬된 측면이 크다. 그리고 한중일 FTA, RCEP, TPP등으로 우회로를 찾고 있다.

다만 일본은 중국이 주도하는 경제체제에 대해 외교상으로는 참여한다고 언급은 하지만 실제 가시적인 성과나 노력은 전혀 보이고 있지 않으며 미국과 일본이 주도하는 체제인 TPP에 오히려 중점을 두고 있다. 또한 한국이 지나치게 중국의 경제체제에 접근하는 것에 대해 미국이 간접적인 불만을 표시하고 있으며 한국이 중국과의 관계강화에 힘쓰는 동안 미국과 일본은 엄청난 수준의 관계격상을 이루었고, 한국은 미/일간 관계 강화로 인해 소외될 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을 갖게 되어 뒤늦게 미국과의 관계 강화로 회귀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7.1.4. 2014년

결국 2014년 4월 4일 일본 측에서 한국에 기어코 삼연벙 3연타를 때려버렸다. 우선 2002년 한일월드컵 공동개최 사실을 삭제하고 독도를 "한국이 불법점령중인 지역"으로 왜곡해서 서술한 초등학교 교과서를 검정통과했으며, 일본 외교부는 독도를 자국의 영토로 기술한 홈페이지를 작성하였고,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은 '다케시마'(일본에서 주장하는 독도의 이름)는 일본의 영토이며 한국이 불법점령중임!!이라는 망언을 날렸다.

7.1.5. 2015년

2015년 1월부터 아베 내각은 역사교과서에서 위안부와 강제징용 등의 서술 삭제를 허가하고 독도가 일본 영토라는 영문 동영상을 만들어 배포하는 등 다시금 수위 높은 도발을 자행해 한일 수교 50주년을 무색하게 하고 있는 중이다.

박근혜 정부 출범 2년차 시점에 단 한번도 한일정상회담도 없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현재 한일관계의 외교상태가 점점 나빠지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이와는 반대로 중국과는 박근혜 정부 출범 이후 5회 정상회담을 하였고 한중 FTA와 창립국 가입은 포기했지만 중국 주도의 AIIB 가입을 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상황을 보면 정부의 대중국 정책이 대일본 정책보다 상대적으로 중시됨을 알 수 있다.

2015년 6월 21일, 윤병세 외교부 장관이 21일 한·일 국교정상화 50주년 기념일을 맞아 처음으로 일본을 방문했다. 일본 주간지에 따르면 이에 대해 아베 총리가 "내가 말했잖아. 기다리기만 하면 한국이 스스로 찾아올 거라고."라고 말했다고 한다. “위안부 문제는 3억엔이면 해결된다, 그러나 이것은 돈 문제만은 아니다” # 아베 총리의 발언에 대한 진위는 돈을 주면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돈이 문제가 아니라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그리고 실제로 한일 위안부 협상에서 비슷한 액수인 10억 엔으로 일본은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으로 종결지었다. 돈으로 해결되지 않는 문제니 외교적으로 강력한 구속어구를 통해 국제법 적으로 입막음을 해버린 것이라 볼 수 있다.

7.1.6. 2016년

2016년 북핵 국면에서 일단 협조체제는 강화되어가는 상황이다. 박근혜 정부가 지난 3년간의 친중 정책이 그 정점을 찍었던 2015년 전승절(중국) 참석 이후 6개월도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터진 북한의 4차 핵실험 사태 이후 실패했다는 것이 명백하게 입증됐으며 중국과 공조를 통한 대일 강경책 또한 일본의 역사 수정 움직임에 그리 도움이 되지 않았음과 동시에 박근혜 정부의 대일 강경책으로 내놓은 정책들의 한계성들을 2015년 내내 체감한 상황이다.

거기다 사드 배치 국면에서 중국이 북한의 편을 들면서 한국에 대해 노골적인 주권침해와 내정간섭이나 다름없는 발언들을 쏟아내면서 예전부터 누차 제기되었던 중국위협론에 대한 인식이 매우 현실적으로 다가왔다. 이에 강경하게 대응하기 위해서는 미국이 주도하는 대중국 포위망의 핵심이나 다름없는 한미일 국가간의 공조가 필수적이라, 그간의 강경책은 모두 접어두고 일단 한일관계 개선을 모색해야 한다는 주장이 점차 힘을 얻고 있는 중이다.

물론, 일본이 역사왜곡을 하는 움직임이 또 다시 한 번 반복된다면 걸림돌로 작용한다. 당장에 일본은 체결된 위안부 협상에서도 자국 내에서 협의하지도 않은 헛소리나 하고 있고, 한국 정부에서 이에 반발하면서 항의를 하는 것이 현재의 정국이라고 할 수 있지만 빠른 시간 내에 한일관계가 개선되는 것은 더더욱 어려워 보인다.

특히 임기 말 오바마의 히로시마 피폭지 방문이나 아베의 진주만 방문 등 과거사를 매듭짓고 미일관계는 밀월 관계를 한층 강화하는 모습이다. 이는 최근 한국 박근혜 정부의 친중국 행보로 인해 중국과 대립하는 미국의 심기를 불편하게 한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2016년에는 부산에 위치한 일본영사관 앞에 위안부 소녀상이 설치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동구청측과 시민단체 사이에 충돌이 일어났고, 이후 일본은 여기에 크게 반발하고 있다. 자세한 건 소녀상 항목을 참고할 것.

7.1.7. 2017년

2017년 3월 24일, 일본 문부과학성은 한국 정부가 독도를 불법점거하고 있고 한일정부가 위안부협의를 했다는 내용을 담은 교과서를 무더기로 통과시켰고,# 2018년과 2019년부터 일본의 모든 초중고생들이 배우게 되면서 다시 갈등이 시작되었다.# 거기에다 고대사까지 왜곡했다는 비판도 생겼다.# 게다가 문재인 정부 주도로 위안부 합의 TF가 발표되자 일본은 재협상은 있을 수 없다며 거세게 반발하기도 했다.

7.1.8. 2018년

2018년 2월 27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UN 인권이사회 자리에 호리이 마나부 일본 외무성 정무관은 "위안부 문제에 대해 본격적으로 사실조사를 했지만 얻을 수 있는 자료에선 일본군이나 관헌에 의한 강제연행을 확인할 수 없었다." 라며 위안부 강제동원이 날조라는 주장을 늘어놓았다. #

최근 북한 김정은이 비핵화 의지를 밝히고 남북관계가 급격히 개선되면서 일본의 대북 역할론을 내세우던 아베 신조의 정권의 정치, 외교적 입지가 축소되는 중이다. 과거 일본이 한국에게 고압적일 수 있었던 이유가 사고뭉치 북한을 견제함에 있어 일본이 필수적인 존재이니 한국은 어쨌든 일본에 손을 벌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북한의 태도 변화 이전까지만 해도 대북 유화책을 제시하던 한국에 대해 코리아 패싱 논란이 나올 정도로 미일 양국이 신나서 북한을 후려치던 형국이었기 때문.

그런데 이러한 대북제제에 대한 무조건적 강경노선의 결과는 북한의 핵무기 완성이었다. 일본은 이와 더불어 일본만의 독자 제재까지 추진하려 하고 있었다. 오히려 한국의 유화책이 북한의 핵무기 폐기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아지자 일본이 적잖게 당황하는 눈치. 특히 칼자루를 쥔 북한이 한중미 3국과 협상하겠다며 일본을 배제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일본이 무력하게 이에 끌려가는 모습이 지지율 하락에 영향을 미쳤다.

다만 아베 내각 지지율 하락은 북한 이슈보다는 총선 이후 잠잠해졌던 모리토모 학교 비리 사건이 재점화된 점이 큰 영향을 미쳤다. 결국 일본은 이후 진행되는 남북정상회담에서 납북자 송환 문제에 대한 언급을 한국에 요구하며 매우 고압적이던 기존의 태도를 다소 누그러뜨렸다.

하지만 미국 정계에서 잇달아 리비아식 해법으로 북한을 무장해제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리비아에서 호의호식하던 카다피가 어떤 꼴이 됐는지 생각해 보면 사실 미국의 입장은 크게 변함이 없음을 알 수 있다. 핵무기 치우면 도와주겠지만, 핵무기 안 치우면 죽는다는 뜻. 이에 북한이 크게 반발했는데, 미국을 비판하는 와중에도 트럼프는 비판하지 않으면서 여지를 남겨두고 있었다.

이렇게 분위기가 묘해지자 다시 역시 북한은 믿을 수 없는 국가라는 여론이 확산되고 아베 정권에 대한 대북 역할론 압박도 다소 누그러졌다. 게다가 5월 남북고위급회담이 무산되고 풍계리 핵실험장 폐쇄 참관에 한국 기자를 배제하려 하는 등 남북관계도 다시 경색되면서 이러한 기조는 더욱 강해졌다. 다만 북한이 막판에 맘을 돌려 풍계리 핵실험장 폐쇄 참관에는 간신히 참가했다 자세한 내용은 2018년 북미정상회담 참조.

2018년 10월 30일, 한국 대법원이 강제징용건에 대해 신일본제철에 배상 최종 판결을 내렸다. 이에 일본 정부나 정치권, 우익 지지자들이 심한 반발을 하고 있다. 일본 정부에서는 벌써 국제사법재판소로 끌고 가네 마네 하는 이야기가 나오며, 한국 조선업계의 한국 정부 공적자금 지원에 대해서도 딴지를 걸기 시작하였으며, '대한민국 광복 기념 티셔츠'를 트집잡아 넷우익발 방탄소년단의 일본 방송 활동 제지 탄원 파동도 일으켰다. 한국은 에미넴의 랩 가사가 똑같이 히로시마 나가사키 원폭을 언급한 것에는 일본이 침묵한다고 이중적인 일본의 피해자 행세라며 비판하고 있다. 강제징용 판결로 인해 2018년 연말의 한일관계는 다시 급속히 경색될 것으로 보인다.

막상 연말에는 김앤장이 미쓰비시 그룹의 변호를 맡고 양승태와 직접 대면했다는 소식으로 시끄럽다. 이렇듯 한일 양국은 서로간 뿐만 아니라 서로 내부의 입장 정리와 문제 해결에도 골머리를 썩히고 있다. 일본의 경우 아베 신조총리가 전 정부들의 사죄 행보를 부정하고 역사 왜곡을 적극 추진하는 등의 행동 등.

그와는 별개로 2018년 하반기 들어서 아베 신조문재인 양국 정상은 직접적인 마찰을 피하고 위와 같이 '정부 대 정부' 식으로만 싸우고 있다. 전략적인 방치 외교인 셈.

2018년에는 강제징용공 배상에 관한 한일기본조약의 시선차이, 한일 레이더 갈등, 위안부 합의의 사실상의 파기로 인해 한일관계는 상당히 악화되었다.

강제징용 판결에 불만을 가진 일본이 한국에 대해 제재을 가진다고 하지만 경제적 제재를 가지면 일본에게도 타격이 만만치 않을 뿐더러 한국의 대일의존도도 예전같지 않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다. 그래서, 다카스기 노부야 전 한국후지제록스 회장을 비롯한 일본 국내의 경제 전문가들도 경제보복 무용론이 나오는 상황이다. 일본도 이를 아는지 한국의 TPP 가입 거절 쪽으로 가고 있는 상황이다.

후쿠시마 수산물 수입 금지에 대한 WTO 2심 판결에서 한국의 손을 들어주는 등 그동안 일본의 외교력에 밀려 제대로 한일관계에서 주도권을 잡지 못하는 것을 감안하면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일본은 외교청서에서 한일관계에서 '미래 지향적'을 빼고 북일관계에서 '북한의 압력'을 삭제했다.# 또한, 한국에 대해 '전략적 이익을 공유하는 가장 중요한 이웃'이라는 표현 역시 지난해부터 없어졌다. 그 외 징용 문제나 독도 문제 등 다른 여러 쟁점에 있어 기존의 입장을 고수했다. 쉽게 말하면, 진전은 없고 오히려 중국이나 북한에 호의적으로 서술하고 한국만 겨냥해서 책임을 물렸다.

7.1.9. 201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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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5월 20일에는 일본 정부가 공식적으로 강제징용 문제에 대해 중재위원회 설치를 한국 정부에 요청했다. 한국 정부는 이에 대해 신중히 검토한다는 입장을 밝힌 상태다. #이에 대한 분석기사

동년 7월 1일에는 일본이 한국을 상대로 반도체 부품 관련 수출 규제를 실시한다. 이것은 강제 징용 관련 한국 대법원의 판결에 반발한 경제 보복이란 우리나라의 시선이 있고 이에 대해 한국 정부의 후속조치가 있을 전망이다. 사실 한일관계가 좋았던 적은 매우 드물었고 매번 티격태격하던 수준이었는데 이제는 악화일로로 치닫고 있으며 두 나라의 관계회복은 더욱 어려워지고 있다.

제25회 일본 참의원 통상선거에 맞춰 일본 국내 여론을 결집하기 위한 정략이라는 분석도 있지만, 30년간 한국통인 후카가와 유키코 와세다 대학교수는 일본의 보복은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주장했다.

7월 한국갤럽의 여론조사에서 우리 국민의 일본 호감도는 12%로 1991년 이래 28년만에 최저치로 떨어졌다. (95% 신뢰수준, 표본오차 ±3.1%포인트) 다만 일본인에 대한 호감도는 호감 41%, 비호감 43%로 2015년도 조사(호감 40%, 비호감 47%)보다 소폭 올랐다.

한일간의 갈등속에서도 한국을 방문하는 일본인 관광객들이 늘어나며 사상 최고치에 근접했다.# 그리고 한류의 영향으로 한국어를 배우면서 TOPIK을 응시하는 일본 여성들이 늘어나고 있다.# 한국어를 배우는 일본 젊은층도 10년새에 증가했다.## 10월 들어서는 일본인 관광객이 20개월만에 감소했다.#

일본인들이 2019년에 한국에 대해 느끼는 친밀감은 최저수준인 것으로 나타난 반면, 중국에 대한 친밀감은 높아졌다고 마이니치 신문이 보도했다.#

7.1.10. 202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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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경제 교류

한일 교역 갈수록 위축…국제금융위기 이후 최저 수준

수많은 수치들이 존재하지만 아주 간단하게 요약할 수 있는데, 경제 부분에서 한일관계는 양국의 국민감정과 외교적 갈등과는 별개로 매우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원복 교수가 저술한 먼나라 이웃나라 일본편과 같은 어린 아이들이 보는 교양/시사책 등에서도 기본적으로 언급된다.

1950년대에 6.25 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은 한국을 지원하기 위해 일본에 군수물자 공장을 건설하였다. 이로 인한 전쟁특수는 일본이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황폐화된 경제를 빠르게 재건하는 데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한국은 일본의 경제성장정책을 모방하여 대기업 위주의 수출경제 정책을 수립했고, 이는 경제적 성공을 거둬 한강의 기적을 이룬다. 물론 그 이면에는 한일간의 연대를 통한 동아시아 반공 전선을 구상하려는 미국의 의도가 있었고, 일본과의 기술 및 경제협력은 초창기 한국의 경제성장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50]

2000년대 이후, 일본과의 경제적인 접점은 점차 감소하고 있는데, 이는 중국동남아시아, 기타 신흥국이 성장하면서 한국 경제에 갈수록 비중을 늘리기 때문이다. 한국 경제에서 일본이 차지하는 비중은 계속 줄어드는 실정이다. 한국이나 일본이나 점차 경제적 관계가 다변화되는 추세에 있다.

7.2.1. GDP

명목 GDP로 비교한 것이다. 단위는 달러.[51][52]
연도 한국 일본 한국:일본[53]
1960 20억 443억 0.05
1965 30억 910억 0.03
1970 89억 2,090억 0.04
1975 216억 5,128억 0.04
1980 653억 1조 1,279억 0.06
1985 1,013억 1조 4,274억 0.07
1990 2,834억 3조 1,966억 0.09
1995 5,666억 5조 5,456억 0.10
2000 5,977억 4조 9,684억 0.12
2005 9,716억 4조 8,315억 0.20
2010 1조 1,930억 5조 7,591억 0.21
2011 1조 3,072억 6조 2,331억 0.21
2012 1조 3,353억 6조 2,724억 0.21
2013 1조 4,346억 5조 2,123억 0.28
2014 1조 5,557억 4조 8,970억 0.32
2015 1조 5,385억 4조 4,445억 0.35
2016 1조 5,795억 5조 36억 0.32
2017 1조 7,104억 4조 9,308억 0.35
2018 1조 8,240억 5조 369억 0.36
2019 1조 7,506억 5조 1,487억 0.34
2020 1조 7,444억 5조 487억 0.35
2021 1조 9,415억 5조 1,031억 0.38
2022 1조 7,987억 4조 3,006억 0.42
2023 1조 8,394억 4조 2,308억 0.43
2024 1조 8,699억 4조 701억 0.46

60년대 이래로 경제 규모는 최대 30배에 이르기까지 차이가 났으나, 일본이 잃어버린 10년으로 성장을 멈춘 사이 한국이 열심히 따라와 2013년에는 4배까지 그 차이를 좁혔다.

그리고 일본이 이 시기를 전후로 아베노믹스를 위시한 강도높은 양적완화를 실시하면서 2015년에는 연중 엔달러 환율이 120엔 후반대를 기록하는 등 33%에 달하는 달러 기준 명목 GDP가 증발하여 한국은 일본과의 차이를 3배까지 좁힐 수 있었다.

2024년 기준, 한국이 일본보다 1인당 GDP가 10% 높고 한국과 일본의 인구가 2.4배 정도 차이나기 때문에 한국의 GDP는 일본의 절반을 조금 밑도는 수준이다.

사실 일본의 양적완화 상황은 한국에도 달가운 상황은 아니다. 당시 엔저로 일본 수출기업들의 실적개선과 이전 잠재성장률보다는 웃도는 성장을 통해 10년 이상 만성적인 디플레이션 상황에서 벗어나 경제 활성화가 가능했다. 다만 현재 2018~2019년 기준으로는 그 효과도 미미해져 일본은 다시 성장률이 둔화되고 있다.

그런데 왜 한국은 양적완화를 못했는가 의문이 들 수 있다. 그 이유는 이명박 정부 당시 강만수의 "원없이 돈 써봤다"로 대표되는 사전 합의 없는 초보적인 양적완화를 진행하는 실책을 저질렀기 때문이다. 결국 미국이 환율조작국 지정을 검토할 정도로 미국이 이에 진지하게 대응하게 만들었다. 결국 환율조작국 지정은 피할 수 있었으나 대신 한국은 박근혜 정부에서부터 양적완화를 실시할 운신의 폭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하지만 영국의 브렉시트 사태, 트럼프 당선으로 인한 불안감 등 국제사회의 여러 악재가 안전자산인 엔화에 대한 선호를 끌어올려 엔화 가치가 환율시장에서 다시 높아지는 상황이 발생하였다. 그 결과 환율 변동폭만큼 일본의 명목 GDP가 다시 증가하였다.

2008년의 세계적인 경제위기가 수습된 2010년 이후로는, 한국은 연 2~3%대의 경제성장률을 꾸준히 기록하였고, 일본은 연 0~1%대의 경제성장률을 꾸준히 보였다. 양국 다 잠재성장률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국의 경제규모 격차가 상당히 요동친 것에 관해서는, 딱히 한국이나 일본 둘 중 한 곳의 경제성장이 흔들린 결과라고 보기 보다는 일본의 강력한 양적완화 정책[54]이 큰 영향을 주었다고 보는 해석이 옳다.

7.2.2. 1인당 GDP

아래 표는 각각 각국의 물가 및 실질구매력 차이를 반영한 PPP 기준 1인당 GDP와 명목 달러환율 환산 기준의 1인당 GDP 비교이다.
1인당 GDP(PPP)[55] 1인당 GDP(명목)[56]
연도 한국 일본 한국:일본[57] 연도 한국 일본 한국:일본[58]
1980 2,172$ 9,157$ 0.24 1980 1,715$ 9,659$ 0.18
1985 4,114$ 14,005$ 0.30 1985 2,482$ 11,816$ 0.21
1990 7,553$ 20,325$ 0.37 1990 6,610$ 25,896$ 0.26
1995 12,207$ 24,250$ 0.50 1995 12,565$ 44,210$ 0.28
2000 16,806$ 27,440$ 0.61 2000 12,263$ 39,173$ 0.31
2005 23,469$ 32,357$ 0.73 2005 19,398$ 37,819$ 0.51
2010 30,985$ 35,531$ 0.87 2010 23,077$ 45,136$ 0.51
2015 37,908$ 40,959$ 0.93 2015 28,737$ 35,006$ 0.82
2016 39,567$ 40,641$ 0.97 2016 29,274$ 39,411$ 0.74
2017 41,001$ 41,409$ 0.99 2017 31,601$ 38,903$ 0.81
2018[59] 43,021$ 42,725$ 1.01 2018 33,433$ 39,819$ 0.84
2019 44,619$ 43,448$ 1.02 2019 31,902$ 40,548$ 0.79
2020 44,819$ 42,273$ 1.06 2020 31,728$ 40,133$ 0.79
2021 48,935$ 45,279$ 1.08 2021 35,142$ 39,933$ 0.88
2022[60] 53,570$ 48,810$ 1.09 2022 33,590$[61] 34,360$[62] 0.97
2023 59,348$ 54,103$ 1.10 2023[63] 34,653$ 34,554$ 1.00
2024 62,960$ 53,059$ 1.18 2024 36,132$ 32,859$ 1.10

1인당 GDP를 들여다보면, 일본의 성장이 정체된 20여년간 한국은 지속적으로 성장하여 2022년에 들어서 한국의 1인당 명목 GDP와 환율과 물가 차이를 반영한 구매력 환산(PPP) 1인당 GDP의 차이는 상당히 줄어들었다.

참고로 1995년 일본의 1인당 명목 GDP는 43,445$, 1인당 PPP 1인당 GDP는 23,750$였다. 이는 당시 명목 기준 1인당 GDP에서 세계 3위로,[64] 영국의 2배, 미국과 프랑스의 1.7배, 독일의 1.5배였다.

반면 1995년의 한국의 경우 선진국 단계에 접어들고, 1998년 외환위기를 맞기 직전의 시기였다. 이때 한국의 명목 1인당 GDP는 12,332$, PPP 기준 1인당 GDP는 12,134$로 각각 일본의 28%, 51%에 불과했다. 당시 일본이 초 엔고 상황이었음을 감안해도, 명목과 PPP를 둘 다 고려했을 때 당시 한국인의 경제력은 일본인의 경제력의 절반 수준에도 못미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듯 과거의 한국인과 일본인의 경제력 차이는 일본이 한국을 압도하는 수준에 있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한국은 지속적인 경제 성장을, 일본은 장기 침체를 겪으며 양국간 격차는 크게 줄어들었다.

OECD는 2020년 3월 3일, 2017년부터 한국의 구매력 기준 1인당 GDP(PPP)가 일본을 추월했음을 발표했으며, 이후 한국과 일본의 격차는 더욱 벌어진다고 한다.#

2022년 10월 기준, 일본의 1인당 명목 GDP는 34,358$, PPP 기준 1인당 GDP는 48,810$이다. 2022년 10월 기준, 한국의 1인당 명목 GDP는 33,591$, PPP 기준 GDP는 53,570$로 각각 일본의 97%, 109%이다.

2023년 이후로 거의 모든 경제 지표 상에서 우리나라 국민의 생활 수준은 일본을 넘어섰다. 이미 2013년에 실질 임금[65]에서 일본을 추월했고, 2018년 1인당 PPP를 추월했으며 2023년에는 1인당 GDP마저 일본을 추월하였기에 확실하게 앞서 있다는 것이 중론이다. # 요약하자면 한국 직장인이 일본 직장인보다 지갑으로 떨어지는 임금이 더 높고 그 임금으로 살 수 있는 것들도 훨씬 다양하다는 소리다. 다만, 한국과 일본 모두 장기 저성장에 빠져 있으며 일본의 1인당 GDP는 최근 몇 년 동안 급격하게 하락세를 겪고 있기 때문에 이것이 다시 반등되면 역전당할 가능성도 존재한다.

7.2.3. 대일 무역적자 추이

파일:대일수지.jpg
연도 대일 무역적자
2010년 361억 2,000만 달러
2011년 286억 4,000만 달러
2012년 255억 7,000만 달러
2013년 253억 6,700만 달러
2014년 215억 3,000만 달러
2015년 202억 8,000만 달러
2016년 231억 1,000만 달러
2017년 283억 달러
2018년 240억 7,500만 달러
2019년 191억 6,000만 달러
2020년 208억 4,000만 달러

7.2.4. 대일 전체 수출의존도 추이

연도 일본에 대한 수출의존도
2012년 7.1%
2013년 6.2%
2014년 상반기 5.7%

7.2.5. 대일 전체 수입의존도 추이

연도 일본에 대한 수입의존도
2009년 15.3%
2010년 15.1%
2011년 13.0%
2012년 12.4%
2013년 11.6%
2014년 10.2%

7.2.6. 대일 부품 수입의존도 추이

2013년 기준 대일 부품 수입의존도 추이 (단위: %)[66]
연도 일본에 대한 부품 수입의존도
2001년 28.1%
2002년 28.1%
2003년 28.4%
2004년 27.5%
2005년 27.1%
2006년 25.6%
2007년 24.4%
2008년 23.3%
2009년 25.3%
2010년 25.2%
2011년 23.6%
2012년 23.0%
2013년 20.8%
2014년 18.2%
2015년 17.2%
2016년 17.8%
2017년 17.3%
2018년 16.3%
2019년 15.8%
2020년 16.0%

소재, 부품은 대일무역 수지 적자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다만, 2011년 도호쿠 대지진 이후 수입은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는데 비해, 부품 국산화의 진척과 지진으로 인한 공급 불안정 우려로 수입선을 유럽 등 다른 곳으로 돌린 결과, 그 영향이 나타나고 있다. 관련기사 2014년에도 한국의 대일 무역적자가 11년만에 최저를 기록하면서 특히 소재, 부품 분야에서 대일 무역적자액은 2012년 243억달러 적자에서 2013년 205억달러, 2014년 163억달러로 감소하고 있다. 2015년 1분기 대일 부품 수입의존도는 17.1%로 역대 최저치를 경신했다. 2016년 상반기 대일 부품 수입의존도는 17.1%였으나 2016년 전체는 17.8%를 기록하였다. 2017년은 17.3%으로 다시 감소했다. 2018년은 16.3%으로 역대 최저를 갱신했다.

7.2.7. 대일 소재부품 적자 추이

대일 소재부품 적자 추이 (단위: 1억 달러)[67]
연도 부품 무역적자
2001년 105
2002년 118
2003년 139
2004년 159
2005년 161
2006년 156
2007년 187
2008년 209
2009년 201
2010년 243
2011년 228
2012년 222
2013년 205
2014년 163
2015년 142
2016년 146
2017년 160
2018년 151
2019년 141.5
2020년 153.7

7.2.8. 무역 분쟁

2019년 일본 아베 정부에 의한 한국에 대한 경제제제가 실행되어서 큰 논란이 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한일 무역 분쟁 참조.

7.3. 군사 교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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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www.mod.go.jp/20131209_ph003.jpg

2013년 12월 일본에서 열린 초급장교 교류행사. 한국군주일미군, 자위대의 위관급 장교들이 참석했다.

일반 한국 국민들이 감정적으로는 인정하고 싶지 않아 하지만, 정부차원에서는 군사적으로 간접적인 그리고 실질적인 교류가 오고가고 있다. 1950년대부터 함께 미국을 필두로 한 반공전선을 수행했으며, 자위대의 출범에는 6.25 전쟁 당시 한반도로 파병된 주일미군의 공백이 컸다. 6.25 전쟁 이후 53년을 방위청으로 지낸 방위성이 성급으로 격상되는데는 북한의 도움이 컸다. 그러나 이러한 군사교류의 대부분은 미국의 반강제적인 압력에 의해 이뤄지는 경우가 많다. 당장 우리나라가, 단독으로 일본과 대규모 군사교류를 갖는 경우는 전무하며 대부분 미국의 요청(및 좌판을 깔아 주선함)에 의해 이뤄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파일:external/www.sisainlive.com/3374_6735_2714.jpg
김용환 인천해역방어사령관에게 경례하는 해상자위대원들. 해상자위대 소속의 연습함대가 2007년에 인천에 왔을 때 찍은 사진이다.

파일:/image/001/2007/03/14/kp1_070314053900.jpg
2007년에 방한했을 당시 국립서울현충원에서 분향하는 일본 사이토 다카시 통합막료장.

연합작전은 하지 않지만 위관이나 영관, 사관생도 등의 인적교류는 이미 빈번하게 이뤄지는 편이다. 2000년대 들어서는 자위대 간부후보생학교의 후보생들이나 따라온 자위관들이 국립서울현충원을 참배하기도 했는데, 현충원은 일본군과 싸우던 독립운동가들이 묻힌 곳이기도 하다. 야스쿠니 신사는 절대 무리지만 일본에서 순직자 대체 추도시설이 생길 경우, 한국의 정부 관계자가 참배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치도리가후치 전몰자 묘원미국은 밀고 있다.

당의 군사위원회가 정부의 국방기능을 앞서는 북한이나 중국과 달리, 한국이나 일본은 미국의 군사 시스템을 받아들이고 있다. 합참 등이 그렇다. 정복도 비슷한 편이다.

장기적으로 볼 때, 북한이나 중국 등에 대한 견제 노선으로 한국군자위대가 손을 잡자는 주장이 있다. 다만, 과거의 역사적인 문제나 독도같은 영토분쟁의 문제 때문에 앞으로의 일본 정부가 모든 과거사 문제를 해결하고, 독도 영유권 주장을 포기하지 않는 이상 불가능에 가깝다. 게다가, 2010년대 기준으로 한중관계가 밀월관계라고 불릴 정도로 급진적으로 우호적인 관계가 되어 가고 있는 반면에, 일본과는 서로 못죽여서 안달난 상태가 되어가고 있다보니 한국군과 자위대가 손을 잡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사드논란 이후에 중국과의 관계가 악화되어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사실 지리적으로 볼때 순망치한의 관계라 아무리 한일관계가 악화되도 그건 국민여론만 그렇고 군사적 교류는 지속되고 있었다.

일단, 중국이 북한에 끼치는 영향력이 절대적이기 때문이고, 거기다 중국과의 무역에서 얻는 경제적 이익이 굉장히 큰 우리나라가 중국을 상대로 일본과 손을 잡을지는 심히 미지수다. 당장, 최근 일본이 반대하고 난리친 안중근 기념관 설립에서 우리나라와 중국이 연대체제를 구축했다지만, 이건 그냥 일본이 막장이었던 것이고.

현안을 덮어두고 군사적인 부분에서 이익만 챙기자는 식으로 갈 수도 있겠지만, 사실 미국의 입장에서도 한일관계는 상당히 민감한 문제이기도 하다. 당면한 적국인 중국을 견제해야 하는데 자국의 동맹국들인 주요 파트너인 한국일본의 사이가 점점 나빠지고 있으니까 말이다. 2013년 11월 주일대사로 부임하는 존 F. 케네디의 딸 캐럴라인 케네디의 부임 행사에서 미 국무장관존 케리"제발 저 두 국가 좀 어떻게 해봐라."고 이례적으로 거론을 했다. 보통은 덕담 수준만 오가는 자리다.관련기사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는 미국의 대아시아 외교 실패가 원인이다. 미국은 한일 양국이 민족주의적 성향이 강한 나라라는 점을 간과한 데다가, 아직까지 일제 강점기라는 역사는 한국인들에게 잊을 수 없는 가까운 역사라는 점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로 인해, 한일 양국에서 역사 갈등 문제가 터졌을 때, 미국은 애매한 반응만을 보여주었는데, 이로 인해 일본은 '미국이 우리 편을 들어주는구나.' 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고, 아베 신조 정권의 탄생을 계기로 더욱 막나가는 도발을 하게 된 것이다.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이 저지른 각종 만행들과, 위안부, 독도문제는 단순히 '일본이 왜곡하는 역사를 재조정' 하는 문제가 아닌, 양국의 국가관계를 재조정하고, 나아가 한국의 국가적 정체성에 대한 문제이기 때문에 한국은 결코 저 문제들에 대해서 양보를 할 수 없는 것이다.

이명박 정권 시절 정부차원에서 추진하던 한일 군사정보포괄보호협정이 사실상 이명박 정권 시기에는 실패로 돌아갔지만, 2014년 12월에 결국 미국의 중재로 북한 관련 정보에 대해서 양국이 미국에 정보를 요청하면 미국이 중간에서 나눠주는 식으로 공유하는 한미일 정보공유 약정을 맺었다. 그런데 이 약정도 이명박 정권 때 정부 주도로 단독 처리하려다가 들켜서 결국 '매국노냐?'는 욕을 먹은 것처럼 국방부가 단독으로 서명한 뒤에 국회에 보고해서 국회 국방위와 네티즌들에게 욕을 무수히 먹었다. #

박근혜 정권 시절 위안부 협상 체결 이후 한일 군사정보포괄보호협정이 이루어졌으며 북한과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한-미-일 간의 군사협력이 강화되는 추세이다. 박근혜 정권은 2015년까지만 친중일변도 였고 심지어 중국 열병식까지 참가했지만 북한의 핵 실험 사태가 터지자 후 중국에게 SOS을 요청했다.

하지만 중국은 말로만 유감이다 하고 북한을 방임하자 미국과 사드배치 협상을 시작했으며 친중에서 친미로 급격하게 선회했다. 한국,미국,일본관계에서 완전히 수세에 몰려 버린 박근혜 정권은 미국의 압력과 중국의 위협에 결국 근 1년 만에 위안부 합의, 사드 배치 논란,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을 처리했으며 국민의 반발과 중국의 반발은 덤이였다. 이미 중국과는 척을 졌고 미국에게는 진정성을 의심을 받는 상태에서 또 다시 사드 배치를 무효화한다던가 이러면 정말 중국에겐 얕보이게 되며 호구처럼 볼것이다.

한일 군사정보포괄보호협정 체결 이후 일본은 한술 더떠서 상호군수지원협정(ACSA)까지 추진해야 한다고 말한다. 상호군수지원협정(ACSA)까지 체결하면 한국군이 일본본토에, 일본 자위대가 한국에 진입할 수 있게 된다는 말이다. 중국의 북한 방임속에 한-미-일간의 3각 연대는 국민감정과 다르게 공고해지는 중이다.

한국 정부에서 제주도 국제 관함식에서 욱일기를 자제해달라고 하자 해상자위대는 차라리 불참하겠다, 예의가 없다며 그냥 달고 참석하겠다고 밝혔다. MBC, SBS 그러나 이에 대응해 한국측에서 좌승함을 독도함으로 변경하자 불참을 선언했다. 자세한 내용은 제주 국제관함식 자위대 욱일기 논란 참조.

2018년 12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두달간 4회에 걸쳐 일본 해상초계기 저공위협 비행 사건이 일어났다.

그리고 2020년대에 들어 신냉전 시대에 접어들면서 중국의 패권주의식 외교가 심해지고 북중러 3국이 밀착하는 모습을 보임에 따라 한국과 일본이 군사협력을 강화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7.3.1. 한미일 삼각동맹

마크 리퍼트 대사는 한미일 삼각동맹 강화를 제안하였으며, 서서히 한미일 삼각동맹을 강화해 나가는 모습이 보인다. 이는 사실 중국의 팽창정책과 미국의 국방 예산 삭감이 원인이다. 현재 한국과 일본은 미국 중심의 동맹체제에 공동으로 소속되어 있으며 미국을 중간에 징검다리로 놓고 있는 군사우호적 관계다. 미국의 계획은 기존의 한미+미일동맹에 한일동맹까지 완성하여 삼각동맹을 이룬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미국은 동아시아에서의 동맹체제를 더 견고하게 만들고 나아가 비용도 절감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미국한국주한미군을 배치하고 일본주일미군을 배치했다. 미국은 한국과 일본 안보에 필수적 존재이며, 그 점에서 한일관계 개선을 가장 바라고 있다. 그런 미국의 의견을 한국과 일본은 무시할 수 없다. 2016년엔 한국은 위안부 협상과 사드배치를 했다. 한국은 국내 여론 반발과 중국의 반발로 홍역을 겪었고 일본 또한 지지층인 극우들에게 많은 비판을 받았지만 두 국가 모두 강행했다.

다만 일본의 극우층이 반발한 이유는 1965년 한일 협정을 통해 일본 외환보유고의 절반 이상인 6억 달러를 유/무상 차관형식을 통해 지급하였는데, 이번 위안부 협상을 통해 10억 엔의 위로금을 전달하는 것으로 결정되자 '그때 돈 줬는데 왜 또 주냐'는 반응이 나온 것이다. 하지만 그 대신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인이라는 외교상 가장 강력한 구속어구를 달아 한국과의 외교에서 위안부 문제는 완전히 종결될 것이다는 설득을 통해 이러한 불만을 잠재울 수 있었다.

이러한 상황을 볼때 국민 감정은 나빠도 국가간의 관계는 한층 더 진전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한국의 사드 배치에 중국은 반대하는 입장을 보였지만, 일본은 환영을 했다. 사드 배치에 반대하는 중국과 러시아, 그와 반대로 환영하는 일본

얼마전 한국과 일본은 한일 군사정보포괄보호협정을 체결하였으며 일본은 한술 더떠서 상호군수지원협정(ACSA) 까지 추진해야 한다고 말한다. 상호군수지원협정(ACSA)까지 체결하면 한국에 일본 자위대가 상륙 할 수도 있게 된다는 것이다.한일정보보호협정 체결에 일본 군국주의 확대를 우려하는 중국, 한일군사협정으로 한중관계 냉각 우려

한일관계가 국민감정은 좋지 못하지만, 최근 위협적 행보를 하는 북한, 중국에 의해 정치, 군사적 협력은 가속화 되어가고있다. 그리고 한국은 중국에게 군사정보포괄보호협정 체결 의도를 보였지만 중국은 침묵 중이다.

일본은 동아시아에서 한국이 다시 미국 편에서 적극적인 자세를 취하기를 원하는 것으로 보인다.

다만 야 3당에서는 박근혜 정부위안부 합의, 사드 배치 논란,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에 대해서 모두 비판적이지만 야당이 정권을 잡는다고 해도 쉽게 변하긴 힘들다. 한 번 합의하기로 결정한 걸 파기한다는 건 국제 관계에서 신뢰를 저버리는 행동이다. 외교는 국민 감정만으로 하는 게 아니다. 위안부 합의, 사드 배치 논란,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 전부 다 미국이 압력을 넣어서 달성시킨 거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일본의 아베 정권 또한 위안부 합의를 하고나서 한국에게 10억엔을 뜯겼다는 비방도 듣는 중이다. 북한의 핵개발은 중국의 묵인 하에 지금도 계속 되는 중이다. 사드배치 논란 때 중국은 역시 북한의 우방이란 걸 한국은 체감했고 갈수록 미국과의 관계를 더욱 절실히 필요로 할 것인데 미국의 의중이 들어간 저런 조약들을 미운털이 박힌 한국이 정권 바뀐다고 손바닥 뒤집듯이 파기하는 건 어렵다고 본다. 황교안 권한대행은 “이미 미국과 국제적으로 사드 배치와 관련한 약속이 있고, 우리 필요에 의해서 사드를 배치하고 미국의 제안을 우리가 받아들인 상태에서 바꾸기는 쉽지 않다”고 발언, 황교안 "사드배치, 유예해도 중국 입장 바뀌지 않아"…내년 배치 입장 고수, 황교안 "사드 유예 안 돼...신속 배치해야"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에대해서 빈센트 브룩스 주한미군 사령관은 용감한 결단이라고 했고 연합뉴스

위안부 합의에대해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위안부 합의가 정의 , 용감한 결정이라고 했었다 경향신문

2017년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 또한 마찬가지로 센카쿠 열도까지 보호한다고 천명했다. 트럼프·아베 정상회담…“센카쿠 열도 안보 대상” 중국 견제

박근혜 정권은 2015년까지 친중일변도 였고 심지어 중국 열병식 까지 참가했지만 북한의 핵 실험 사태가 터지자 후 중국에게 SOS을 요청했다. 하지만 중국은 말로만 유감이다 하고 북한을 방임하자 미국과 사드배치 협상을 시작했으며 친중에서 친미로 급격하게 선회했다. 중국은 게거품을 물며 발광했고 미국 또한 미중사이 간을 본 한국을 섭섭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박근혜 중국 열병식 참석에 대한 서구권의 반응 박근혜 중국 열병식 참석에 대한 미국과 유럽의 반응

이명박 정권 시절만 하더라도 정권 말기에 천황 사죄 발언으로 한일관계가 급속도로 냉각되었지만 미국은 한국과 일본 사이에서 중립을 지켰다. 그러나 박근혜 정권은 지나친 친중정책을 펼쳤고 그로 인해 미국은 일본 편을 일방적으로 들어주게 되었으며, 2016년 5월 오바마의 히로시마 원폭지 방문으로 이어진다.오바마의 히로시마 방문 소식에 불편한 한국, 일본 아베 총리를 박근혜 대통령보다 우선,하지만 중국견제 위해 한일 양국을 화해하도록 강요, 미-일 동맹이 아시아 지역에서 가장 중요하며, "역내 평화와 안정을 유지하기 위해 절대적"이라는 미국 국방부 카터 장관의 발언 미국-일본은 가장 긴밀한 친구라는 미국 태평양 군사령관 해리스의 발언, 오바마의 히로시마 원폭지 방문 및 피폭자들 위로, 한국인 원폭 피해자 위령비 헌화는 하지않음, 최근 한술 더 떠 아베가 진주만 방문과 더불어 오바마의 미일 동맹 칭송으로 화답

2016년 12월 아베 총리가 진주만 방문시 오바마 대통령은 "미·일 관계는 세계 평화의 주춧돌이며 두 나라의 동맹은 어느 때보다 굳건하다"고 선언, 태평양 전쟁 참전 용사 자격으로 미/일 정상 기자회견장에 참석한 미국 노병은 "아베는 최고다. 사죄할 필요 없다." 라고 까지 말하기도 하였다. 다시 말해 아베의 진주만 방문은 미국 참전 용사 및 미국 대중들의 시각에서 매우 좋은 인상을 주었음에는 틀림없는 사실이다. 트럼프 대통령 또한 트럼프 “美·日 안보동맹 확고, 트럼프 “미국은 100% 일본과 함께한다”, 펜스 부통령 또한 펜스 美부통령 "미국은 100% 일본과 함께 할 것"

한국,미국,일본관계에서 완전히 수세에 몰려버린 박근혜 정권은 결국 근 1년 만에 위안부 합의, 사드 배치 논란,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을 처리했으며 여론의 반대를 무릅쓰고 강행하는 이유 역시 미일관계가 한국이 예상하는 범위 이상으로 격상되고 있어 자칫하면 한미일이 동등한 관계로서 3각외교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미국과 일본 간에만 긴밀한 외교가 이루어지고 한국은 참여하지 못하고 미/일간 협의 후 결과에 대한 통보만 받는 들러리가 될 수 있다는 불안감이 작용했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이미 중국과는 척을 졌고 미국에게는 진정성을 의심을 받는 상태에서 또 다시 사드 배치를 무효화한다던가 이러면 정말 중국에겐 얕보이게 되며 호구처럼 볼것이다. 그리고 미국에겐 믿을 수 없는 국가로 취급당할 것이다. 현재 쟁점이 되는 외교 사안은 크게 3가지 사안으로, 2015년 한일 위안부 문제 협상 합의, 주한미군 THAAD 배치 논란, 그리고 한일 군사정보포괄보호협정 문제이다.

그 중 위안부 문제 협상 타결은 피해자인 위안부 생존자분들도 원하지 않고, 대내외적, 특히 같은 서방 국가에서도 비판점이 나왔던 만큼, 효력을 정지해도 여기까지는 미국이 수긍할 수도 있다. 반면 나머지 두 사안은 이미 대중국 경계선을 펼치고 한미일 공조체계를 굳히려는 미국의 의중이 반영되었고, 이미 체결된 사안인 만큼 차기 정부에서 두 사안의 효력을 정지시켜 버리면, 그만큼 미국과 관계가 악화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이미 한국은 박근혜 정부 초기의 친중정책으로 인해 미국과 관계가 다소 틀어져 있다가 북핵문제가 터지고 중국과 관계가 다소 틀어지면서 이를 통해 미국과 관계 개선을 도모한 상황이다.

전 주한 미대사가 사드 배치 철회시 한미 동맹 약화 언급, 미국 백악관에서 한국 사드 배치는 변동 없다고 단언, 미 국방부 대변인의 사드 배치는 계속되며 최대한 빨리 배치하려는 우리의 노력도 계속된다”는 발언,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에 대한 미국의 반응, 한일 위안부 협상이 중대한 협상이라는 미국, 한일 위안부 협상을 대폭 환영하는 오바마, 미국의 압력이 들어간 위안부 협상 美 하원의원, '한미일 3각동맹 중요성 재확인' 결의안 발의"

미국과 중국을 자꾸 언급하는 건 한일관계는 미국과 중국의 영향을 매우 크게 받기 때문이다.

사드 배치에 대해서는 야권(민주당계)쪽에서도 안희정 도지사 매일경제 인터뷰 , 안철수 의원 연합뉴스 인터뷰중에서 언급 , 문재인 # 전 대표도 취소가 어려운 건 인정했다.

하지만 안희정 도지사는 이걸로 한일관계에서 미국의 도움을 받아야 된다고 했고 이재명 시장은 일본에 대해서 적성국가라고 하기도 했었다.연합뉴스 일본은 군사적 적성국 그리고 안희정 도지사는 한일관계에대해서 투트랙 전략을 허락해 달라고 국민에게 호소했다. 뉴스 영상

'''사드 재배치 논의를 한다며 2번씩이나 중국으로 가는 민주당 의원들, 중 외교부 간부 “한국 사드 배치땐 단교 버금가는 조치”, 中, 사드 보복 사실상 시인…, 中 사드보복에 '대응' 선포한 정부… 한중관계 '인내의 끝'?, 김장수 주중 대사 "사드 배치는 변수 아닌 상수"

위안부 합의가 된지 1년째에도 야권 대선주자들은 파기, 재검토를 주장하고 있긴하다. # 외교 관계는 유동적이기 때문에 합의는 물론이고 그보다 중요도가 높은 조약 또한 파기되거나 재검토될 가능성은 언제나 존재하기에 이는 나중에 가봐야지 알 일.

일본측에서는 이를 두고 한국이 정치적 이득을 얻기 위해 실현 가능성이 거의 없는 일본 관련 이슈를 정치적으로 이용하여 일본과의 외교 관계를 흔들기 때문에 한국과의 관계에서 유화적인 접근을 포기한 이유라고 말하며, 한국측의 주장은 일본이 한국을 제대로 된 외교 객체로 보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들이 생각하는 유화적인 단계가 한국측에 있어서는 철저하게 강압적이고 표리부동한 모습으로 비춰진다는 것이라고 이야기 한다.

하지만 일본이 주요 외교 상대국인 중국과 미국에 대해 여당인 자민당과 야당인 민진당 모두 비슷한 노선을 견지하고 있으며 한국에 대한 입장만 다소 차이가 있지만 이는 지지세력의 성향 차이에서 오는 문제이며 그럼에도 최근까진 전향적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한편 한국의 경우 중국과 미국에 대한 외교적 노선이 여당과 야당 모두 완전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다음 대통령이 어느 당 소속이었냐에 따라 외교 노선과 방향이 큰 폭으로 변하는 등 일관성이 결여되어 있다. 하지만 일본과의 관계에서만큼은 한국의 야당과 여당 모두 표면적으로는 중립적 스탠스를 보여주지만 전향적인 방향으로는 결코 가지 않는 형태이다.

과거 노무현 전 대통령이 독도를 다케시마, 동해를 평화의 바다라고 발언하여 당시 엄청난 정치적 타격을 받은 바 있다. 물론 사실은 2010년 일본 고이즈미 총리와의 한일 정상회담 이후 가진 기자회견장에서 일본측 기자가 '다케시마 문제'에 대해 언급한 질문에 대한 답변을 하는 과정에서 (일본인들이 말하는) '다케시마' 라고 발언한 말 실수일 뿐이며, '평화의 바다' 역시 2006년 아베 총리와의 전화통화에서 동해를 평화의 바다라고 가칭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단순한 의견 전달에 그친 문제였으며 이를 보도한 언론사 역시 세계일보 단 한 군데 뿐이라 신뢰성 면에서 문제가 많은 기사일 뿐이다. 다시 말해 단순한 말 실수와 확인되지 않은 신뢰성 낮은 기사였음에도 그것이 일본과 관계된 이슈였기에, 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진위와는 상관없이 엄청난 정치적 공격에 직면해야 했다.

일본이 최고 동맹국이고 한국은 하나의 중요한 파트너로 차등화 한다는 미국 국무부 장관 렉스 틸러슨 세계일보, 그 후에 아니라는 부인기사가 나오긴 했지만, 립서비스일 경우도 충분하다. 원래 외교적 언사를 직접적으로 하는 경우가 드물다는 걸 생각해 보자.

물론 몇 년 사이 미일간의 행보는 한미관계보다 더 밀착해왔던게 사실이다. 박근혜 정권 시절 친중외교의 여파로 미일관계가 한미관계보다 한층 더 돈독한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2015년까지 꿈쩍도 안하던 한국이 여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한일 위안부 협상이나, 한일군사정보호협정을 급속도로 체결했는데 이러한 조약에 미국이 개입했다는 의혹이 드러났다. 미국이 이러한 조약들을 한국에게 반강제한 것을 볼때 당시 오바마 행정부가 동아시아에서 일본을 더 중시한 것은 사실로 보인다. '아베-바이든 통화, 위안부 합의 美 압력 확인', '속전속결' 한·일 군사협정…미국 '입김'

2017년 3월부터 북한 문제가 국제적인 이슈로 급부상하면서 미일 간의 공조가 긴밀하다는 점을 국제 사회에 부각시켰다.트럼프, 아베와 35분 통화…"北 도발 대응 모든 선택지 검토" 심지어 (아무리 탄핵정국인점을 감안해도) 한국은 한반도 문제 당사자임에도 전화통화에서조차 배제되는 모습이다.트럼프, 日아베와만 통화…한국은 왜 뺐을까?

2017년 10월 중국이 사드 보복을 중단하는 조건으로 한국이 3불 약속, 1. 사드 추가배치 관련해서 우리 정부는 검토하지 않고 있다. 2.우리 정부는 '미국의 MD체계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정부 기존 입장에 변함이 없다. 3. 한미일 삼국간 안보협력이 군사동맹으로 발전하지 않을 것임을 분명하다란 조건을 제시해 # 당분간 한미일 3각 동맹은 힘들어졌다.

2017년 9월 문재인 현 대통령은 미국은 우리의 동맹이지만 일본은 동맹이 아니다라는 입장을 한·미·일 정상 업무오찬에서 공식적으로 밝혔다. 이에 대해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이해한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2018년에 와서 남북관계와 북미관계가 급격히 완화되고 화해무드가 조성됨에 따라, 정말로 한일동맹의 필요성은 더욱 옅어졌고, 거꾸로 일본이 소외되는 모습도 나오고 있다. 자세한 건 재팬 패싱 문서 참고.

한편 일본 해상초계기 저공위협 비행 사건이 일어난 뒤 2019년 일본의 대한국 수출 통제 관련에서도 한일 군사정보포괄보호협정을 비롯한 한-일 간 군사공조에 금이 가고 있는 형편이다. 참고로 삼국간 동맹이라고 볼 수 있는 한미일동맹은 실존하지 않는다. 한미동맹, 미일동맹을 묶어서 미국을 축으로 한-미-일 동맹이라고만 부를 수 있을 뿐이다. 자세한 건 한미일관계 문서 참고.

표면상 일본이 한국에 "군사 물자"라면서 수출 통제를 걸고 화이트리스트에서 배제하는 원인이 한국에 대한 안보 관련 불신 문제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 심지어 사린가스 이야기까지 나왔는데 이는 한국을 옴진리교에 비교하는 단어 선택이다. #

청와대에서는 지소미아를 재검토하겠다고 발표한 상황#이었는데, 결국 2019년 8월 22일 협정 연장을 하지 않겠다는 것으로 청와대 측이 밝혔다. 그렇게 되면 사실상 2019년을 끝으로 이 협정은 종료되는데, 2020년 8월 24일자로 정상가동되어 재연장되었다.

7.4. 여론, 언론

한국인들 입장에선 임진왜란, 일제강점기 등 역사적 특수성 때문에 일본에 대한 국민감정은 좋지 못하다. 다만 경제성장 과정에서 일본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일본의 성공신화에 대해 칭찬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국민감정상 대외적으로 내비치지 못했다. 그래서 일본 얘기만 나오면 견해는 둘로 갈라지며, 일본에 대해 어떤 얘기를 해도 칭찬은 커녕 야단만 맞았다. 그래서인지 교양만화가 이원복 교수 등 일부 학자들은 민족 감정과 과거사 콤플렉스에 집착해 일본을 '일본'으로 보지 말고 지천에 널린 외국 중의 하나로서 객관적으로 봐야 된다는 견해를 펴기도 했다.
극단적이고 배타적인 성향이 표출되기 쉬운 인터넷으로는 앙숙이지만, 인터넷을 벗어나 오프라인에서 한국인, 일본인과 사람 대 사람으로 섞어보면 역시 같은 문화권의 이웃나라 사람이라 그런지 다른 외국인에 비해 쉽게 친해지고 서로 잘 지내는 경우도 많다. 당연한 소리지만, 일본 정부가 과거사를 숨기는데 급급해하고 재특회, 넷 우익 같은 정신이 나간 혐한 세력들이 아무리 활개치고 있다고 하더라도 대다수의 사람들은 다소의 성향 차이는 있을지언정, 그냥 자신의 삶을 주도적으로 살아가는 우리들과 똑같은 사람들이다. 그래서 처음 만난 외국인들끼리 대놓고 얼굴 붉히면서 적대시하고 무작정 싸움을 거는 행동은 선진국에 살고 있다는 자부심을 갖고 사는 나라의 국민으로서 어울리지도 않고 품위도 없는 행동이다.

그리고, 일본인들 중에는 한류 문화를 좋아하면서 한국에 대체로 호감을 가지게 되는 사람도 많고 마찬가지로 한국 역시 일본의 오락 문화를 접하면서 일본에 호감을 가지는 사람들이 많은 편이다. 사실 사람 사는 곳이 생각보다 다 비슷비슷하듯이 사람들의 생각도 만나보면 의외로 비슷비슷하다. 한일문화 교류가 궁극적인 목적이었던 프로듀스 48이 성공적으로 한국과 일본에서 흥행한 것이 대표적일 것이다.

기본적으로 한국인과 일본인이 모이더라도 웬만한 정치병 환자들이 모인게 아니라면 비교적 친절한 사람들이 대부분이라서 잘 지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본에서 일본 연예인들이 한국 문화를 즐긴다면서 매국노라고 배척당하는 일은 한국에서는 절대로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설령 한국 연예인들이 일본 문화를 즐긴다면서 배척당하고 비판하는 일이 있다고 쳐도 "문화는 국경없이 즐기는 건데 니네가 무슨 상관이냐?" 처럼 반발하는 반응도 나온다. 그리고 언론에서도 비중있게 "외국 문화를 이유없이 배척해서는 안 된다" 처럼 비판을 하는 사설도 나올 것이다. 당장 한국에서도 일본에서 만든 비디오 게임도 좋아하고 일본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많다.

외국인 입장에서는 사실 한국인이 사는 생활이나 일본인이 하는 생활이나 별반 차이가 없어서 쉽게 구분이 불가능하다. 단지 일본이 한국보다 더 유명하니까, 한국 사람한테도 일본어로 먼저 인사하는 것일 뿐이다. 유학생이나 관광객에게 사건 사고가 나면 일본인으로 뉴스가 나갔다가 한국인으로 정정되는 경우도 흔하고, 드물게 한국인으로 뉴스가 나갔다가 일본인으로 정정되는 경우도 존재한다. 태권도가 초기에 외국에서 보급되었을 때도 가라데 도장인 줄 잘못 알고 왔다거나 현대나 대우와 같은 자동차나 삼성과 LG와 같은 전자제품도 현지인들이 이름 없는 일본 기업의 제품인 줄 잘못 알고 사서 보급되기 시작하였다는 일화도 흔하다.

물론, 양국 간의 기본적인 감정이 안 좋은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고 각국의 왜곡된 역사교육 등으로 인해서 잘못된 정보를 알고 있거나 그로 인해 트러블이 생기는 경우도 종종 있지만, 국가 간의 감정을 굳이 개인과 개인 간의 인간관계에 끌어들여야 할 이유는 없으며, 오해가 있다면 무작정 다투거나 반발을 하기보다는 제대로 된 대화와 이해를 통해서 서로를 알고 바로잡는 게 최선이다. 사실, 현실적으로는 '민감한 부분'은 애당초 서로 안 건드리고 지나가는 게 편하긴 하다. 애초에 한국인과 일본인 관계에서 부정적인 얘기를 양해없이 꺼내는 것은 서로 간에 시한폭탄이나 다름없다.

전혀 안 그럴 것 같지만 일본의 장년, 노년층 중에는 일본과 한국의 근현대사비슷하게 보며 동질감을 느끼는 분들이 많다. 한국인 입장에서 보면 "도대체 이게 무슨 개 풀 뜯어먹는 소리인가?"라고 하겠지만, 일제강점기라고 해서 일본인들이 다 잘 살았던 것은 아니었고 오히려 대다수의 일본인들 역시 군부독재 체제하에서 고생을 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일제의 군부독재 체제하에서 고생하는 사람들의 우환을 표현한 대표적 작품으로 만화 맨발의 겐이 있다. 읽어보면 좋은 책이고, 권장도서이기도 하니 꼭 읽어보자. 당시의 일본이 얼마나 단단히 맛이 가버린 상태였는지에 대해서 한국에서 만든 작품들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상세하고 신랄하게 그려져 있다.

일본의 우경화가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버블경제 붕괴와 일본의 국채 문제가 복합적으로 터지고 그 결과 일본이 장기 디플레이션으로 경제가 침체되는 동시에 한국이 본격적으로 경제성장을 마무리하고 국제적으로 선진국으로 인정받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그 이전까지만 해도 일본은 우경화는 커녕 전범들을 다 잡아 족쳐야된다느니, 기성세대들의 전쟁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비참하게 살고 있다느니 하는 식으로 전범들을 상당히 혐오했다. 당연히 이 당시의 교과서에는 일본의 근현대사가 지금에 비해서는 비교적 자세히 나오는 편이었으며, 역사왜곡 역시 상당히 적었다.

일본의 근대화 이후의 정치체제는 명목상 민주주의 체제였지만 다이쇼 데모크라시는 장식이었을 뿐, 치안유지법 때문에 사실상 귀족 중심의 독재와 지역연고 코드인사로 굴러갔다. 여기서 치안유지법이란 일본판 국가보안법으로 애초에 이 쪽이 원조다. 한마디로 일본 내의 공산주의자들을 때려잡기 위해서 만든 법이다. 나중에는 정부를 비판하는 언론들과 지식인들까지 이 법으로 탄압했다

하지만 이는 촌숙(村塾,손슈쿠) 또는 정경숙(政經塾, 정치경제학원)으로 대표되는 일본의 독특한 정치문화에서 비롯된 것이다. 일본의 정치체제는 메이지 유신을 계기로 서구에서 급하게 민주주의를 들여온데다가 일본 특유의 장인정신이 합쳐져 정치인 조차 세습계층 중 하나로 인식되었다. 이는 현재까지도 그 잔재가 남아서 일본에서는 혈연이나 학연으로 지역구를 물려받는 정치인의 비율이 타국에 비해서 높은 편이다.

얼마 전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바 있는 요시다 쇼인의 송하촌숙(松下村塾,쇼카손슈쿠)처럼 정치인들이 자신의 이름을 내건 '정치학교'를 세워 정치 지망생을 모집하고 그 중 될성싶은 문하생을 자신의 정치 파벌에 소속시켜 성장시켜주는 문화이다. 물론 정치 지망생 외에도 정치에 관심있는 일반인들도 일정 수강료를 내고 세미나나 정치인의 정치 강연을 들을 수 있다. 최근 도쿄 도지사로 당선된 고이케 유리코가 자신의 정치학원인 '희망의 학원'을 세워 화제가 되기도 했는데, 왜냐하면 정치인이 자신의 정치 학원을 만든다는 것은 본격적인 거물급 정치인으로 나가겠다는 일종의 선언이기 때문이다. 쉽게 말하자면, 한국의 친박, 친문 처럼 자신만의 정치파벌을 만들고 자신이 그 중심에 서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1930년대 후반부터는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을 통해 더욱더 막장으로 흘러갔다. 이 당시의 일본은 2.26 사태 등으로 군부가 완전히 정권을 장악한 상황이었으며, 1900년대부터 미쳐돌아가던 군부의 병폐들이 정계를 넘어 민간사회로까지 퍼져나가던 상황이었다.

이 와중에 전쟁을 일으켜서 식민지를 수탈한 돈은 모두 높으신 분들과 재벌들의 호주머니로 들어갔으며, 메이지 유신 이후 인구 급증과 산업화의 부작용으로 인해 일본 국민의 대다수의 생활수준은 거의 나아지지 않고 여전히 어렵기만 했다. 서구 열강들이 미리 겪었던 산업혁명의 부작용들이 일본에도 발생한 것이지만, 시민혁명을 겪어보았던 노동자들이 차티스트 운동 등으로 국가에 시위하던 서구 열강과 달리 일본은 이 당시 아직까지 계층의식이 남아있었고, 국가에 대항하는 것을 비국민이라는 이름으로 낙인찍어 반역자 수준으로 바라보며 탄압하는 일본 사회의 분위기로 인해 대다수 서민들의 삶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서민들은 한반도, 만주, 몽골, 중국 등지의 개척단에 반강제로 끌려나갔다. 지역마다 인원을 할당해서 할당된 인원을 채우지 못할 경우, 세금 감면을 안해주거나 자치단체 보조금을 깎았다. 이때 떡밥으로 내건 것이 세금 감면, 중국인, 조선인에게서 빼앗은 농토 지원, 군 면제였다. 하지만, 패색이 짙어진 1943년 이후에는 농토 지원 그런거 없었고, 개척단이고 뭐고 얄짤없이 다 징집해갔다.

태평양 전쟁에서는 막장 상관으로 유명한 일본군 장성들 휘하에서 강제징집된 젊은이들이 헛되이 목숨을 버리다가 결국 패망하게 된다. 패전 이후 식민지에 남아있던 일본인들이 소련군이 밀고 내려오면서 중국, 한국 등에 강제로 남게 되어서 온갖 수모를 겪었다.

그나마 한국에서는 국교 정상화가 빨라서 60년대, 중국은 국교 정상화가 된 80년대에야 남북 이산가족 상봉을 할 수 있었지만, 북한에 있는 잔류 일본인들은 생사조차도 불분명해졌다. 미군의 폭격으로 본토는 폐허가 되었으며, 1945년 이후에는 GHQ 군정 하에서 1958년 전쟁 이전의 경제수준으로 회복 선언을 할 때까지 반쯤 식민지 상태를 13년 정도 경험을 한다.

물론 당시 일본인들의 평균적인 생활수준은 식민지였던 한국인이나 중국인의 생활수준보다야 훨씬 나았고, 생활이 어려워서 개척을 하러 갔다는 농토 역시 식민지 주민으로부터 강제로 빼앗아서 사용한 것이다. 식민지였던 한반도에 거주한 경험이 있는 일본인 세대들은 한국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한다. 식민지 한반도에서 부유하게 살며 재산을 모았으나 일본 패망 이후 일본으로 쫓겨갈 때 하나도 가져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일본에서 빈털터리로 다시 시작해야 했는데 일본에서 차별에 시달렸다고 한다. 보통 한국에서 제일 가까운 규슈 쪽에 정착했는데, 이들을 히키아게샤 라고 한다.

조선 총독부와 일본 정부의 도움이 매우 컸음에도 자신들은 맨주먹으로 조선에 와서 자수성가했다고 느끼고 있으며, 지금도 본인 재산을 완전히 몰수를 당하고 쫓겨난 생각을 하면 이를 간다고 한다. 하지만, 식민지에서 모은 재산의 당위성은 둘째치더라도 '일본인들의 재산을 몰수한 주체'는 '한국'이 아니라 '주한미군' 이었으니 더더욱 아이러니할 따름이다. 그래서 당시에는 한국에 귀화를 시도하려는 일본인 대지주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미군정의 반응은 쿨하게 "NO! 니네 일본은 패전국이고 우리 미국은 승전국이니까 일본의 모든 재산은 전부 우리 미군정이 압수합니다. 절대로 한 푼도 가져갈 수 없으니 죽고 싶지 않으면 하루빨리 조선에서 꺼지세요."라는 반응이었다고 한다.

사실, 히키아게샤들도 하루 빨리 조선을 떠나지 않으면 성난 조선의 군중들에게 집단으로 린치를 당해 두들겨 맞고 죽어나갈 판이었다. 실제로 2차 대전에서 독일이 패전한 이후, 복수심에 눈이 멀어버린 소련군은 베를린을 점령한 이후부터 독일 남성들은 머리채를 잡혀서 폭행한 뒤 총으로 살해당했으며, 독일 여성들도 8살짜리밖에 안 되는 나이어린 여자아이나 80세 이상의 노인들까지 닥치는대로 붙잡아서 강간을 하고 살해까지 저지르는 끔찍한 비극이 벌어졌다. 이처럼 패전국의 국민들은 잔혹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특히 일제강점기동안 일본의 억압적인 통치로 인해 일본에 대한 적개심은 매우 강했다. 미군정은 이렇게 몰수한 재산을 신한공사란 형식을 통해 한국에 돌려줬고, 이는 농지 개혁 등의 밑바탕이 된다. 이와 관련된 이야기는 조선을 떠나며라는 책도 읽어볼만하다.

일본 국민들도 기나긴 전쟁으로 인해 얻은 것보다는 잃은 것이 많았으며, 한국인이 듣기에는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로만 들리는 '우리도 전쟁 피해자'라는 일본인의 항변은 이러한 일에서 기인한 것이다. 실제로 현재 우리나라 대부분의 재벌들의 기초는 일본이 패망 이후 한국에서 철수하면서 남겨두고 간 공장을 불하받아 설립한 '적산기업'이 대부분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스스로 피해자 운운하는 것은 당연히 어불성설이다. 일본의 제국주의 침략에 제대로 반대하기는 커녕 전쟁으로 떨어지는 콩고물이나 좀 얻어먹으려고 침략 전쟁을 옹호한 사람들이 당시 일본 국민이므로 자업자득이기 때문이다. 자세한 것은 일본의 피해자 행세 문서 참고.

심지어 2010년대에 와서도 반성은 커녕 일제가 저지른 흑역사를 미화하고 얼버무리며 피해자인 척하는 몰지각한 일본 정부와 혐한 세력은 언급할 가치조차 없다. 개개인이 그렇게 생각을 하는 것이야 넘어간다고 치더라도 국민 전체를 대표하고 이끄는 정부가 이런 몰상식하기 짝이 없는 주장을 대놓고 주장한다면...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2010년 ~ 2011년 정도까지만 하더라도 일본인 60% 정도가 한국을 좋아하고 있었으며 한국이 세계에 미칠 영향이 부정적인가에 대한 대답도 당시 설문에 응한 나라 중 제일 최저치인 9%였다. 거기다, '신뢰할 수 있는 나라 사람은 어느 나라 사람인가'에 대한 설문에 한국이 '자국민인 일본인보다 더 신뢰 가능하다'고 답한 사람이 대다수였으며 신뢰 못할 나라 1위는 중국이었다. 물론, 스포츠 경기 때 제일 지기 싫은 나라에는 1위를 차지했었다. 당연하지만 나쁜 쪽이 아닌 선의의 라이벌 쪽으로 말한 대답이였다.

이처럼, 이 시기에는 일본은 한국을 매우 좋아하고 있다. 심지어 이 당시에는 삼성이나 LG같은 한국의 대기업들과 일본 기업 등을 비교하면서 한국이 승승장구하고 일본이 침체하는 기사가 나가면 '역시 한국 형님', '한국은 형님국가니까...' 하는,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드립들이 댓글로 달리기도 했었다. 물론 이때도 넷우익, 혐한은 있어서 '한국의 날조' 라거나 '일본 기술을 베낀 것' 이라는 정신승리나 하는 댓글들도 많기는 했지만 일반적인 감정은 그정도까진 아니었다면, 현재는 우경화가 진행되고 인터넷 커뮤니티 대부분이 혐한 세력에 점거당한 지금은 그러한 혐한성 댓글 비율이 훨씬 강해지고, 일반적인 감정에서도 한국에 대한 감정이 상당히 나쁜 수준으로 올라왔다. 이 당시에 중국이 센카쿠 열도 문제로 한창 격한 반일 시위를 벌이고 있을 때였다. 어느 정도였나면 일본 기업이면 전부 다 때려부수는 데다가 일본 물건, 일본 자동차를 이용하고 있던 사람을 때려죽였을 정도다. 일본 입장에서는 이러한 중국보다는 한국이 더 낫다고 생각한 여론이 대다수였다.

실제로 저 당시 일본인이 한국인을 신뢰한다는 여론조사는 무려 60% 이상인 반면 한국은 일본이 싫다는 응답만 70%가 넘었으며 일본에 대한 신뢰도도 25% 정도밖에 안됐다. 이 정도면 진짜 일본이 짝사랑하고 있었던 수준이다.

2013년에는 위에서 서술했듯이 여러 요인으로 인해 양국 관계가 악화되어서 11월, 일본 국민 58%가 한국에 친근감을 느끼지 못한다고 답했다. #

당연히 이를 본 국내의 반응은... 다만 여기서 말한 '친근감'이라는 게 상당히 애매한 기준이 될 수 있다. 일본인들과 별 탈 없이 지내더라도 일본이라는 나라에 대해 친근감을 갖는 것이 힘든 사람들도 있기 때문이다.

이와 반대로 한국 국민들의 대부분이 독일에 대해 호감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지만 정작 독일의 설문조사에서는 한국에 대한 호감도가 매우 낮은 편이다. 물론 이 설문조사에서 한국과 북한을 구분짓지 않고 조사를 한 맹점은 있지만... 애시당초 서구권에서 단순히 Korea라고 하면 아직까지도 한국과 북한을 구분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2014년에 일본에서 조사한 통계에 따르면 '한국을 신뢰한다'는 사람이 16%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고, 한국은 못 믿을 나라라는 응답이 72%로 조사되었다. 이제는 비단 아베 신조의 문제만이 아니라 보통의 일본인들조차 한국을 잠재적 적국으로 간주하기 시작했다는 방증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한국 내에서 중국의 초강대국화에 따라 병자호란 이후의 조선이나 냉전 시기핀란드처럼 일단 중국과 친하게 지내면서 일본에 반격할 기회를 노리자는 의견도 존재하는 게 사실이긴 하다.

안보를 잘 아는 일반인들조차도 인접국과의 관계를 잘 운영하는 방법에 대한 정보를 접할 때 웬 핀란드라는 희귀한 나라가 언급되는지 어리둥절한 사람들이 많다. 핀란드가 2차 세계대전때 엄청 고생했다는 것 자체가 한국에는 잘 알려져있지도 않으니 일반인들 수준에서는 익숙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2015년 1월쯤에 조사한 결과에는 60%가 넘는 일본인들이 한국에 호감을 느끼지 못한다는 결과가 나왔다. 물론 이 통계자료를 본 한국인들도 일본을 향해 공격적인 발언을 서슴지 않는다. 이는 시간이 지날수록 한국과 일본의 관계가 나빠지고 있다는 결정적인 증거이다.

마찬가지로 한국인들의 일본을 바라보는 시각도 점차 나빠지고 있다. 2014년 3월 한국 프레시안한국을 위협할 국가에 대한 여론조사를 통계한 결과 한국 국민 사이에서 한국을 위협할 국가 1순위로 일본이라고 응답한 사람이 많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2위가 중국이고 3위는 북한이었다.

특히 북한의 경우 이산가족 상봉 등이 이뤄진 후 설문된 조사였기 때문에 일본이나 중국보다 위협도가 하락했다. 북한의 경우는 어차피 국력 수준이 뻔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무시되는 측면도 있다. 당장 김정은이 수시로 정전협정 파기, 전쟁 준비 등을 떠들지만 한국에서는 별 반응이 없다. 하지 못한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2014년 4월 아사히신문 여론조사 결과 한국인 67%가 일본을 혐오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이 같은 결과는 한국인들 사이에서 일본일본인을 보는 시각이 반일감정을 넘어서 혐일(嫌日)화가 되어가고 있다는 결과로 온라인뿐만 아니라 실제 한국인들 사이에서도 혐일이 생겼음을 입증하고 있고, 이와는 반대로 일본에 대한 한국인들의 호감도는 불과 4%에 그친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이 저렇게 나오니 결국 실제 한국인들 사이에서도 단순한 반일감정을 넘어서 점차 일본과 일본인에 대한 혐오와 증오심을 적극적으로 드러냈다는 결과이기도 하다.

2014년 기준으로 봤을 때 일본에 대한 전반적인 국민 정서상으로도 '자신들이 아시아 최고인 양 떠드는 놈들'로 보기 시작했다는 의미이며, 한국 정서상의 대대적인 혐일화(嫌日化)가 시작되었다는 수치다. 여기에 미국이 애매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이는 미국의 명백한 동북아 외교 실패다.

미국에서도 오바마 정부를 비판하는 세력에서 꼭 한번씩 언급하는 수준으로 불거졌다. 이로 인해 한국에서는 중국의 성장을 눈여겨보고 소극적인 친중파가 생겨나기 시작했으며, 지금도 역사관련 한일갈등 문제가 불거지면 친중파들이 인터넷에서 날뛰곤 한다.

하지만 이건 미국 내에서의 한 관점일 뿐이며, 웬디 셔먼 전 미 국무부 차관보의 '값싼 박수' 발언처럼 한/일간 관계의 불협화음으로 결집되지 못하는 한미일 3각공조 난항의 주된 책임으로 한국을 직접 거론하는 등 오바마 정부의 친일본적 외교와 미일관계 격상에 대한 원인이 한국의 반일감정 때문이라는 시각도 존재한다.

미국의 경우는 자국이 태평양 전쟁의 승전국이기고 하고, 한반도에 미군정을 수립하기 이전까지는 일제강점기와 한국의 상황에 대해서는 아예 모른다고 봐도 될 정도로 상황파악이 안 된 상황이었다. 미국이 한일간의 역사갈등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한 것은 빨라야 1990년대, 늦으면 2000년대 중반부터이며, 그마저도 한국에 비해 국제적 영향력이 큰 일본의 입김과 미일간 이해관계로 인해 일본에 유리한 쪽으로 상황파악을 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미국이 이 시기와 관련하여 한국의 편을 확실하게 들어주는 경우는 위안부와 같이 인륜적으로 문제가 있는 전쟁범죄거나, 아스쿠니 신사 참배와 같이 자국과도 연관되는 역사적 문제인 경우에 한해서이며, 나머지의 경우는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거나, 아예 관심도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결과적으로 미국의 미적지근한 태도는 일본이 진짜로 한국을 침략하여 철저하게 파괴할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생겨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최근 친중 지지 여론이 높아진 건 이런 점에서 일본과 미국 둘 다 나쁘고 미국이 지켜줄 가능성이 없으면 차라리 상대적으로 나은 중국에 붙자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늘어난 데서 비롯된 것이다. 심지어 일부는 국방백서나 군 장병 정신교육에도 북한과 함께 일본도 한국과 한민족을 위협하는 주적으로 지정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아도 이미 적개심은 강하게 퍼져있다. 즉 대적관 교육이 없어도 적개심이 번질 정도로 일본 정부의 태도가 막장이라는 것이다. 이는 일본 정부의 태도 변화에서 기인된 결과이다. 이전 일본 민주당 내각이나 자민당 내각에서와는 달리 아베 내각에서는 한국을 오로지 '비즈니스 파트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정도로 치부하고, 대신 상위 관계라 할 수 있는 서방 진영, 미국, 러시아와의 관계를 강화하여 한국과 중국 같은 반일 국가와의 관계에서 주도권을 얻는 방향으로 외교 방향을 개편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미국과의 관계가 최고 수준으로 격상되어 오바마 대통령이 히로시마 위령비에 참배를 하고 '과거의 적이 최고의 친구가 되었다'와 같이 한국 들으라는 식의 립 서비스를 해주는 수준까지 그 친밀도가 높아졌다. 또한 한일 정보보호협정, 위안부 문제의 '최종적, 불가역적' 합의와 같은 외교적 이익을 죄다 얻고 있는 중이다.

이후 아베가 오랜 기간 미국과의 관계에 크게 공을 들였음에도 이후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일본을 방일했을 때 공개석상에서 “미국과 일본의 무역은 공정하지도 개방되어 있지도 않으며 미국은 오랜기간 대일무역적자 겪었다고 공개적으로 지적 했으며 일본이 아직도 추진중인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은 올바른 대답이 아니라는 공개적인 거절을 당했다. 일본이 AIIB에서 끝내 가입을 거부하고 TPP를 추구하는등 미일관계에 오랜기간 공을 들였음을 결국 미국은 일본의 입장을 노골적으로 뭉개는 요구들을 하며 자신의 입장을 일본에게 관찰시키는데 성공한 것.

트럼프가 이처럼 일본에게 접대 받으면서도 자신이 얻어야 할 이득을 얻는데 성공한 결정적인 요인은 현재 일본이 이미 미국과의 관계를 최우선으로 설정하고 힘을 실어왔기 때문에 미국이 요구하는 것을 대부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제대로 공략한 것이다. 결국 이명박 정권 이후 미국과의 관계에 소홀해졌던 한국은 그렇다 쳐도 미국과의 관계 개선에 가장 크게 공을 들였음에도 일본은 한국과 똑같이 미국의 무역적자 개선 요구를 받아야만 했다.

무엇보다도 일본과 아베에게 가장 뼈아픈 것은 이번 방일로 TPP 추진 동력을 완전히 상실했다는 것이다. 과거부터 미국에게 공을 들여왔음에도, 트럼프는 아베의 극진한 접대와 여러번 이어진 호의적인 제스처와 벌언들에도 불구하고 TPP를 단칼에 잘라 거절했다. 그리고 이는 여러번 언급되었듯이, 트럼프가 미일외교에서 갑에 해당하는 위치에 있는 것이 미국이며, 현재 동아시아 국제관계상 일본은 미국을 절대로 거역할 수 없다는 것을 제대로 파악했기 때문이다.

다만 TPP는 '포괄적/선진적 환태평양 제휴협정(CPTPP)'으로 개편되어 추진될 예정이고 일본과 호주, 캐나다 등 미국의 최우방국이 다자협정을 주도하고 있어 큰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더욱이 애초부터 트럼프는 대통령 선거때부터 TPP에 부정적이었고 미국 공화/민주당 모두 TPP에 대해 호의적인 편이 아니었기에 예상된 결과라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더욱이 트럼프의 아시아 순방에서 한국과 중국과는 달리, 일본에 대해선 과거의 발언을 재차 언급하는 수준에 그쳤다. 미국 군사무기 구매야 일본이 늘 하던 것이었고 무역 불균형 언급 역시 트럼프가 대통령 후보시절부터 해왔던 발언들의 연장선일 뿐, 실질적 조치를 요구받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반면 한국은 한미FTA의 조속한 재협상, 막대한 경제협력 금액이라는 실질적 청구서를 받았으며, 중국은 3자리 조단위의 경제협력금액 청구서를 받았다

조기 선거로 묻혔지만 이미 일본은 올해 2월 초 미국에서 열렸던 미일 첫 정상회담 전에 일본의 미국 경제 기여도를 강조하며 10년간 4500억 달러 규모의 시장 및 70만명 고용 창출 효과를 위한 경제협력 투자를 발표하였다.(미국의 인프라 프로젝트에만 17조엔(1500억 달러)이 투자된다.) 하지만 아직도 개선이 안 되고 있는 미국의 엄청난 대일무역 적자에 크게 불만을 가지고 있는 트럼프는 이미 올해 초 엄청난 액수의 경제협력금액을 약속받았음에도 이번 아시아 순방에서 또다시 자동차 산업과 미국 무역적자에 대해 공개적으로 불만을 드러낸 것이다.

2015년 2월에는 일본 공명당에서 재일 한국인들에 대한 혐한 정서와 한인들의 피해 조사를 실시할 정도로 일본 내의 혐한 정서와 그에 대한 위험수위는 계속해서 증가하고 있다. 관련기사 거기다 이 기사의 댓글을 보면 알 수 있지만 한국 내 혐일감정도 점점 강도가 높아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상황이니 적어도 현재로선 한일관계의 개선은 그저 요원할 수밖에 없으며, 멀리 갈 것 없이 현재 양국 관계가 매우 좋지 않은데다 양국 국민들이 상대방에 대한 감정이 서로 나쁘다는 것은 따로 확인하지 않아도 확실한 상황이다.

2015년 2월 갤럽 조사에 의하면 한국인의 일본에 대한 호감도는 17%에 불과했다. 이는 역대 조사 중 가장 나쁜 수치로, 현재 한일관계가 얼마나 나쁜지 알려주는 것. 그러나 일본인에 대한 호감도는 40% 정도로 일본이라는 나라 자체보다 높다. 아마도 일본 시민 개개인은 괜찮다고 생각하는 듯 하다. 세대별로 보았을 때에는 일본에 대한 호감도가 가장 높은 20대(29%)에서는 20%를 넘겼으나, 가장 낮은 60대 이상(9%)에서는 한 자릿수로 떨어졌다.

일본인에 대한 호감도의 경우 20대(56%), 30대(43%)에서는 호감이 비호감보다 높았으나, 60대 이상의 경우 67%의 응답자가 일본인에 호감이 가지 않는다고 대답했고, 호감이 간다는 비율은 25%에 불과했다. 사실 세대별 경향은 옛날(1992년) 여론조사를 봐도 비슷하게 나타났다. 6페이지 참조

광복절에 조사한 설문조사에서는 한국을 위협할 위험한 국가 투표에서 일본이 13%를 차지했는데, 이는 북한 56%, 중국 16.2%보다 낮은 수치다. 북한의 경우에는 최근에 도발은 물론 사건사고도 꾸준히 일어나는데다 엄밀하게 정전 중인 적성 국가이기때문에 가장 크게 와닿으며 중국은 일본보다는 강대국인 데다가, 엄연히 다른 진영의 공산권 국가인데다가 북한의 뒷배나 다름없기에 북한과 세트로 엮어서 적으로 여기는 여론이 많다.

한편 일본의 경우 일본의 군사력을 대단하다고는 생각해도 무섭다고 느끼지는 않는다. 직접적으로 피부로 위협을 느끼는 북한, 중국과 달리 일본은 과거사 문제가 많을뿐 현재 직접적으로 군사적 위협이 되는 요소는 훨씬 적기 때문이다. 또한 일본은 대량살상무기로 분류되는 대륙 간 탄도탄과 같은 순수 공격용 무기에 대한 보유를 평화헌법에 따라 금지하고 보유하고 있지 않은 반면 한국은 미사일의 보유량과 기술력이 상당한 수준에 도달해 일본을 앞선 면도 있다.

하지만 일본이 최근 2017년 방위비 책정에서 대학에서의 군사지원 연구 비용을 전년도 2016년 대비 18배나 늘렸는데, 최종적으로 약 1800억 원 가까이 책정되었다. 또한 평화헌법 개정 및 군사무기 수출을 신 성장동력으로 지정, 독려하는 상황이라 무기의 개량 및 대량 생산이 가능해진다면 일본의 군사력에 대한 평가도 다소 달라질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또한, 대륙 간 탄도탄 역시 일본이 자체 개발한 고체연료 로켓인 엡실론 로켓이 있기 때문에 기술적으로 무기화 전환은 단시일 내에 가능할 것이란 시각이 지배적이다. 그리고 최근에 북한의 꾸준한 핵실험과 미사일 도발로 말미암아 순항미사일 등으로 일컬어지는 ‘적 기지 공격 능력’ 확보에 대하여 일본 정치권 차원에서 논의가 활발해진 상태이기도 하다.

또한 자민족 우월주의로 가득한 중국이나 세계가 인정하는 꼴통 집단인 북한과 달리 서방 자유진영의 일원인 일본은 그나마 합리적인 대화가 가능하기도 했던 것도 원인이 있다. 물론 일본도 과거사, 영토문제에서 점차 감정에 매몰된 발언들을 내뱉고 대중의 인기를 얻기 위해 다른 나라들을 자극하는 행동들을 자주 번복하면서 신뢰도가 상당히 낮아지고는 있다.

다만 그래도 중국처럼 국력만 믿고 대놓고 막나가지 않고 그럴 힘도 없는 데다가, 어찌되었든 중국이라는 강대국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한일간 협력이 필수적이라는 점에서는 양국의 의견이 일치하기 때문에 아직까지 남북한마냥 관계가 철천지원수가 되지는 않았다.

'한류의 성지' 신오쿠보에서도 거리를 찾는 한국인 관광객들은 보기 힘들어졌다. 한국 관련 가게가 차례차례 문을 닫기 시작했고, 한식 전문점들도 문을 닫기 시작했다. 점점 일본 내의 혐한 감정이 높아지고 더욱이 한국의 국민 감정 악화로 한국인 관광객이 크게 줄어들면서 친한 일본인과 한국인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한 시장이 자리를 잃은 것이다.[68] 중국인 관광객의 비중이 높아지면서 그 자리를 중화요리점과 중국 관련 상점, 면세점 등이 차지하기 시작했다고 한다.[69]

물론, 이는 일본 내 반한감정이 원인이라기 보단 일본을 찾는 중국 관광객의 수가 워낙 급증하여 한국 관광객을 대상으로 운영하던 상점들이 중국 관광객을 대상으로 하기 위해 업종을 바꾼 탓이다. 실제로 한국 관련 점포가 사라진 자리에 중국 관광객을 대상으로 한 상업건물이 대신하고 있는 상황이다.[70]

하지만 한국과 관련된 상품들이 장사가 잘 된다면 같이 겸업하면 될 문제인데 한국 대상의 상업만 쇠퇴한다는 건 결과적으로 일본 내 반한감정과 한국의 반일감정으로 한국 관련 장사가 일본 내에서 신통치 않아졌다는 의미이다. 물론 겸업이라는 것이 그리 쉬울리가 없기에 양자택일로서 인기있는 것을 택할 수밖에 없다.

또한 한때 잘 나갔던 한국 스마트폰(삼성 갤럭시 등)들도 '한국 상품이라면 안 산다.'라고 하는 등 극단적인 반한 불매의식이 커지면서 삼성 측은 결국 대외적으로 사명을 갤럭시 모바일 커뮤니케이션즈로 바꾸고, 신형 갤럭시 S6 | S6 엣지를 비롯한 모든 제품에 삼성 로고를 빼는 극단의 조치를 써서야 일본에서 팔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물론, 로고를 제거하는 정책은 일본뿐만 아니라 우리나라를 비롯한 전세계에서 공통적으로 하는 정책이기 때문에 반론을 해야 된다.#

사실, 이런 일본 소비자의 반응은 과거 플라자 합의 전 일본의 자국제품 선호로 인한 미국의 압력때와도 유사하다. 특별히 반한감정이 높아졌다기 보단 일본 소비자의 성향이라고 보는 게 지배적이다. 물론, 애플의 아이폰과 같은 예외도 있긴 하지만 대체적으로 일본 소비자들은 과거부터 사용하던 브랜드만을 계속 쓰는 보수적인 소비패턴으로 유명하기 때문에 외국산 제품이 힘을 쓰지 못한다.

그리고, 2019년 현재는 2015년 당시보다 혐한 세력이나 반한 감정은 많이 줄어들었지만, 정치적으로는 북한의 비핵화로 인해 아직 냉담한 상태이기도 하다. 하지만, 문화적으로는 3차 신한류 시대가 왔다고 부를만큼 한류 바람이 다시금 뜨고 있는 중이다.

이로 인해, 나이가 어린 학생들과 20대 청년들의 한국에 대한 인식은 상당히 좋은 편이다. 그러나, 장년층인 40대 이상 연령층에서는 여전히 반한감정을 가진 사람들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고[71] 지금의 어린 학생과 청년들이 한국에 대해 우호적으로 생각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많다. 특히 40대는 자민당 집권의 혜택을 가장 많이 받은 세대이자, 잘못된 역사교육으로 인해 인터넷에서 물의를 빚는 주범(?)으로 꼽힌다.

2019년 1월 21일 니혼게이자이신문에서 실시한 일본인이 가장 싫어하는 나라를 묻는 설문에서 한국이 61%로 북한, 중국에 이어 3위를 차지했다. 응답자의 연령대가 높아질수록 한국을 싫어한다는 비중이 늘어나, 특히 60대에서는 70%에 달했다고 한다.

한국 언론들이 그러는 것처럼 2010년대 이후로 일본 언론들이 나라의 척도를 비교할 때 일본과 한국을 특별히 비교하는 경우가 많은데, 일본이 중국에 지는 것만은 그럴만 하다고 느껴도 유독 한국에게 지는 것만은 상당히 굴욕적인 일로 느끼는 풍조가 있기 때문이다. 평균 임금이나 1인당 GDP(PPP 포함)가 한국보다 낮아졌다는 이유로 "가난한 나라가 된 일본"이라며 오버하는 자극적인 기사가 나오기도 한다.# 일본의 젊은이들은 구세대에게서 물려받은 '한국은 개발도상국'이라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태어나기 전부터 시작된 기나긴 경제정체를 체감하면서 일본경제가 황혼기를 넘어서 밤에 접어드는 것이 아니냐는 불안감을 느끼고 있다는 분석이 있다.#

이러한 현상은, 현재 일본 가정의 10~20대 밀레니엄 세대와 50대 이상 부모 세대들의 갈등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밀레니엄 세대는 어릴 때부터 한국 문화를 즐기게 되어 역사나 정치 문제에 덜 영향을 받는 반면, 1960~70년대 일본과 한국의 격차가 컸던 시기의 기억이 남아 있는 중장년층들은 정치적 문제에 영향을 받아서 한국의 인식이 급격히 악화된 것이다. 결국,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높아진 위상과 발언권이 일본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상승했다는 것이 못마땅한 것이다. 딸은 아빠 몰래 한국 갔다···요즘 일본 '혐한 세대갈등' 기사가 대표적이다.

한국에서도 이 점은 일본과 마찬가지이다. 한국의 기성세대인 1980년대 이전 출생자들은 일본이 2위의 경제대국이었던 시절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으며, 동시대에 현격하게 낮았던 한국의 위상에서 비롯하여서 일종의 열등감에 가까운 감정을 가지고 있었기에 반일감정이 강하지만 일본의 위상이 많이 내려가고 한국의 위상이 상당히 올라간 시절만을 기억하는 10-20대는 반일 감정도 적고, 일본 문화를 즐기는 경향도 과거 세대에 비해서 상당히 강한 편이다. 오히려 젊은 세대에서는 중국에 대한 비호감도가 일본에 대한 비호감도보다 높아졌다. 이점은 일본의 군사력에 대한 인식 차이에도 영향을 미친다. 기성세대는 일본의 군사력이 언제든지 한국에 투사될수 있다고 생각하는 비중이 크며, 심지어 북한의 침공 가능성보다 더 높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신세대들은 경제적인 침략은 몰라도 군사적인 침략 가능성은 의미없는 가정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사실 한일관계의 정치적인 문제는 제쳐두고, 상당수의 일본인들도 한국과 일본이 서로 주적인거 마냥 으르렁거리고 대립하는 분위기는 이제 바뀌었으면 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지금의 한일관계 수준보다 유럽의 영국-프랑스 관계, 독일-프랑스 관계 정도의 약간의 라이벌 의식 수준으로 변하길 원한다고 한다. 그리고, 일제강점기를 제대로 경험한 사람은 한국이나 일본에서도 나이가 90대 초중반 이상 아니면 거의 없기도 하다.

역사적 사실 자체를 잊어선 안 되겠지만 사회문화적으로 서로 문화교류와 영향력을 많이 주고 받으면서 동질성이 강한 이웃국가이면서 정치, 경제, 외교적으로 긴밀하게 연결된 제1세계 우방이니 분위기를 전환시켜서 화해하고 교류하는 것이 한국과 일본 양국에 득이 되면 득이 되지 실이 될 일도 없다. 그리고,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이웃국가끼리의 무조건적인 혐오 의식은 그만두고 지양해야 되고 바뀌어야 하는 것이 맞다. 무엇보다도 한일 양국은 중국의 부상을 견제하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2019년 이후에는 한일 무역 분쟁으로 인해 한일양국의 여론은 더더욱 악화되었다.

이렇게 최악으로 몰렸던 한일관계는 자민당 내 온건파인 기시다 후미오가 일본의 총리가 되고, 한미동맹 강화와 한일관계 개선을 내세우는 윤석열이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되면서 한일 양국, 특히 일본 정부와 언론이 반색하고 있는 분위기다. 실질적으로 한일관계가 좋아질 지는 지켜봐야 할 대목이다. 그러나 반색하는 것도 소수의 친한파 네티즌 사이에서만 그치고 있으며 다수의 네티즌들은 "이명박 때처럼 일본과 친한척 하며 일본을 이용하려고 한다"라는 의견으로 입을 모으고 있다. 무엇보다 윤석열 정권 내 요인들이 대부분 이명박 정부 출신이라는 점에서 일본 정부와 일본인들이 가지는 불신감은 상상을 초월한다.

결국 비교적 친아시아적 외교를 표방한다는 하야시 요시마사 외무대신 역시 모테기 시대 때와 대비해 윤정권에 별반 다를바 없는 태도를 취하고 있고 기시다 후미오 총리도 "노력 해결의 의지가 보이지 않으며 기만적이다"라고 평가했으므로 아무리 윤석열 정부가 친일적인 입장을 표방한다고 하더라도 양국간 한일 관계 해결 가능성은 높지 않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2022년 7월 8일, 막후에서 혐한 정서를 주도해온 아베 신조가 사망했으므로 자민당 내 친한파 정치인들이 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기회가 생기기도 하였다. 이에 따라 온건파로 알려진 고노, 기시다, 하야시, 모테기 등이 어떻게 한일 관계를 대할지는 좀 더 지켜봐야 할 듯 하다. 그 이전까지는 아무래도 아베의 눈치를 보느라 한국에 대한 무시를 강요받은 측면도 있었기 때문.[72]

결국 까놓고 이야기하면, 국제적인 분위기나 경제 사정에 따라서 서로에 대한 호감과 비호감이 오락가락한다.

7.4.1. 한국의 내셔널리즘

한국은 일본에 비하면 비교적 독자적인 근대 국민국가를 이룬 기간이 짧은 데다가 단기간에 급속도로 발전한 경제인프라, 소냉전이나 다름없는 분단 상태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많은 부분이 점진적으로 바뀌어 가는 현재 진행형이다.

특히 민족을 다루는 부분에 있어서 혈통의 동질성을 상대적으로 중히 여기는 동아시아의 전통적인 공동체적 문화와 남북한으로 나뉜 분단 상태를 적극적으로 이용하여 한쪽으로 뭉치는 방향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기 때문에 민족(한민족)의 동질성을 정치 사회적으로 강조하는 경향으로 흘렀으며, 이로 인해 국적만을 기준으로 삼는 서구권식의 유연한 피아 구분은 아직까지 보편적인 것으로서 여기기 어려운 상황이다.

물론 서구권의 경우에도 언어가 통하거나 조상이 같은 범 문화권의 경우(예를 들어 영미권, 히스패닉 등등) 동질성을 좀더 느끼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전근대적인 혈통 구분개념과 적극적인 한 민족 개념은 완전히 옅어진지 오래다. 옛부터 워낙 많은 혼혈과 지역적으로 많은 인구가 오고감이 많았기에 이런 것들보다는 현재 본인이 속한 국적 자체만 따지는 경우가 많으며 국적을 바꾸거나 이중국적을 취득하는 개념도 훨씬 간편하게 생각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상대적으로 아시아계 이민자가 영미권유럽에서 아직까지도 이방인 대우를 받는 경우가 많은데 그 이유는 낯선 인종이라는 이유도 있지만 유독 아시아계 인종이 외국에 나가서도 같은 민족, 혈통끼리만 뭉치려는 경향이 유독 강하여 이들 사이를 타 인종이나 타 문화권의 사람들이 비집고 들어가기가 워낙 까다로웠기 때문이다.

단적인 예로 최근 들어서는 매우 옅어지긴 했지만 불과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한국인이 국적을 바꾸거나 이민을 가는 등의 행위 자체를 쉽사리 납득하지 못하거나 매우 극심할 때는 민족과 국가를 버린 사람들이라고 혹평까지 하는 경우가 더러 있었으며 국적이 다르고 자란 국가적 환경이 다르면 실상 외국인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재외동포를 같은 민족성을 공유하는 동지로 인식하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현재 한국인들 사이에서 외국인 범죄로 인해 인식이 좋지 못하고 대중문화에서도 부정적으로 그려지기 일쑤인 조선족에 대한 이미지는 불과 2000년대만 하더라도 지금과는 달랐다. 순박한 연변 처녀가 서울로 상경하여 겪는 로맨스 드라마나 조선족에 대한 신파 드라마가 미디어의 주류였으며 엄연히 국적이 다른 외국인임에도 불구하고 같은 한국말을 하고 조상이 같다는 이유로 감싸주는 듯한 분위기가 만연했다.

결과적으로 혈통이 다른 이방인과 조상이 같은 한반도계 민족을 태생적으로 구분하게 되는 경향을 따르는데, 여기서 한국이 뚜렷하게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방향 중 하나가 식민지배를 했던 일본과의 민족성을 철저히 구분하는 것이다. 일본도 미국에 철저하게 깨지고 식민지를 해방시켜야 했던 경험 때문에 한국과 민족성이 섞이는 것을 경계한다.

다만 국제화 시대를 맞이하고 서구권의 문화와 생활방식(개인주의의 확산, 민족주의와 공동체 의식의 쇠퇴)에 더욱 익숙한 신세대들이 등장함에 따라 현재 한국은 민족에 대한 가치관을 기존의 한국계 혈통만이 아닌 한국 국적을 갖고 한국의 가치관을 수용하는 국민으로 점차 전환하는 반면 일본은 한국에 비해서 다소 그렇지 않은 차이점이 있다.

이게 가능하게 된 근본적인 원인은 한국이 혈족에 대한 가치관과 태도가 아이러니하게도 일제강점기6.25 전쟁을 파란만장하게 겪으면서 자연스럽게 약화되었기 때문이다. 오랜 기간 식민지배를 겪으며 눈앞의 이익을 위해서 민족을 배반하거나 하루 아침에 높은 신분의 인물들이 일본인과 민족반역자들에 의해 몰락하는 장면을 숱하게 목격했고, 같은 민족임에도 불구하고 이데올로기 차이로 서로 죽고 죽이는 6.25 전쟁의 끔찍한 참상을 겪으며 혈통도 혈통이지만 무엇보다 뜻이 맞아야 우리 편이라는 의식이 한국에서는 생겨났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과거 역사를 통한 인식의 변화가 2010년대 이후부터는 한 단계 더 발전하여 비록 점진적이긴 하지만 서구권의 유연한 가치관에 더 가깝게 된 것이다.

반면 일본은 역사적으로 혈족에 대한 가치관이 재구성될 만한 역사적 계기가 없었기 때문에, 혈족 문화가 현재에도 잠재적으로 이어지고 있다. 한국의 경우에도 기본적으로 한민족이라는 인식을 기반으로서 두고 있긴 하지만, 사회 경제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이주를 당연한 것으로서 받아들이고 있는 나라이기 때문에 그 민족의 기준을 혈족으로만 환원시키지 않고 타 문화의 이질적인 부분을 수용할 수 있는, 일본에는 없는 유연함이 생겨났다.

일본은 그게 근본적으로 매우 힘든데, 당장 현재 한국에서 나타나는 다문화에 대한 반대 여론은 유럽이나 미국과 비슷하게 민주적 가치관을 무시하는 일부 타자에 대한 반감, 그리고 노동과 사회적 계층 문제를 포함한 경제적인 원인이 큰 반면, 일본은 최근들어 바뀌는 추세이긴 하지만 불과 수십년전만 해도 아예 외부인을 내부로 받아들인다는 발상 자체가 크게 존재하지 않았다.

물론 외부인을 내부로 받아들인다는 발상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예로부터 지리적으로 가까운 한국이나 중국을 중심으로 외교는 물론 인적교류가 활발했던 데다 1858년에 일본과 미국 간에 체결된 통상 조약인 미일 수호 통상 조약과 유럽 5개국과의 협약을 통해 1899년 폐지되기 전까지 츠키지, 요코하마, 카와구치, 고베, 나가사키, 하코다테 등 외국인들에게 제약이 있기는 했지만 여러 지역에 외국인 거류지가 존재하였으며 근현대에 들어선 지금도 일본에 오는 외국인들이 점점 많아지고 외국인과의 통혼도 잦아짐에 따라 혈통으로 기준을 보는 것이 점점 옛말이 되어가는 추세이다.

독일인 의사 시볼트와 일본인 게이샤인 오다키 사이에서 나온 딸인 '구츠모토 이녜'는 이후 일본인 최초의 여성 서양 의사가 되기도 한다. 일본은 대체적으로 자국인과의 피가 섞이고, 일본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갖고 있다면 대체적으로 일본인으로 인정해 주는 경향이 있다. 그렇기에 이러한 조건에서 다소 동떨어진 자이니치와 같은 재일 외국인 집단에 대해 다소 경시하는 스탠스를 취하는 것이라 보는 시각도 있다.

다만 이 부분은 정말 일본인 스스로가 특별하다고 생각하여 아시아 사람들을 일방적으로 배척하거나 차별이 심한지는 반일감정이라는 특수성을 가진 한국에서 보다 일본에 거주하는 아시아 사람들의 이야기나 통계를 참고하는 것이 좋다. 재일교포는 한일관계의 특수성이 큰 원인이고 일본의 인기 아이돌 그룹 노기자카 46에서 미얀마 혼혈이 인기 멤버이다. 말인 즉슨 여전히 타국에 비해 폐쇄적이긴 하지만 세계 정세 변화와 세대 교체에 따라서 일본 내부의 인식도 조금씩이나마 바뀌어 가고 있다는 점이다.
여러 가지 요인들이 얽혀 있기 때문에 그 원인에 대해서는 모두 파악하기 어렵지만 명확하게 다른 점이 있다면 일본은 타자를 내부로 받아들이지 않더라고 그들의 존재와 자신의 존재를 뚜렷하게 구분할 수 있는 명확한 공공성이 있고, 한국은 이를 구분하는 한에서 가능한 다소 옅은 공공성이 있다는 것이다.
7.4.1.1. 한국의 내셔널리즘 발생과 경과
위에서 언급한 일본과의 철저한 민족성 구분을 통한 내셔널리즘 구축에 대해서 세부적으로 더 설명하자면 이는 과거 일제강점기 시절 구 일본 제국에 대한 반발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국가적인 움직임에는 타당한 근거가 있다. 수 세월 동안 영국의 식민지 시기를 거쳤던 인도인이 영국식 사회구조를 따라가려 하지 않고 스스로의 민족성을 따르듯이 한국 또한 그렇게 본래 자신들만의 특성을 부각하는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이다. 굳이 미국이나 일본을 제외한 여타 선진국을 따라가려는 사람들에 대해 그렇게까지 안 좋게 보는 사람들이 많지 않기는 하지만 이들 또한 예외는 아닌데, 한일 간에는 민간 교류도 잦다 보니 그 구별 지점을 확실히 해야 한다는 정치적인 흐름은 막대한 힘으로서 작용하기에 대다수 국민들은 이에 동조하게 된다.

하층민으로 갈수록 이러한 흐름에는 면역이 없어서 더 민감하게 반응하기도 한다. 특히 저소득층이나 상대적으로 현실 정치에서 이렇다 할 영향력을 갖추지 못한 계층의 경우에는 내셔널리즘(민족주의) 말고는 믿을 수 있는 구석이 없기 때문에 극단적으로 자국과 그외 국가들의 혈통에 결벽증적인 태도를 보이는 경우가 많다. 여기에 자본을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이 없거나 자유롭게 여행을 다니지 못하는 사람들은 국가에서 제공하는 말을 필터 없이 그대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기도 하다. 일단 그렇게라도 하면 최소한 자기 자신의 정치적 스탠스는 갖출 수 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에서는 누구나 자신의 정치적 스탠스를 결정해야 하고 이는 사람들이 계급 투표를 하지 않는지에 대한 이유이기도 하다. 계급투표는 암묵적으로 자신의 스탠스를 하위 계급으로 환원시키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평등을 요구하기 때문에 누구나 국가 앞에서는 평등하다는 것이 내셔널리즘을 가능케 하는 원동력이다.

다만 최근 들어서는 수출 위주의 경제로부터 구축한 정치 판도에 한계가 드러나기 시작하고 있어서 기존까지 고수해오던 가치관이나 정치적 스탠스가 위기 상황에 봉착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때문에 기존의 해방 이후 한국을 지탱해오던 내셔널리즘을 구성하기 위해 필요한 타자와 자신을 구분하는 기본적인 패러다임으로서의 타 민족에 대한 증오가 다시 중요한 코드로서 작용하고 있기도 한 것. 현재 신 자본구조가 구 자본구조와 부딪치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기에 한국과 마찬가지로 전 세계적으로 문제가 있던 지역들이 하나 둘 터져 나오고 있다.

이는 비단 일본에 대한 반발로부터 성립시키는 작용으로서의 내셔널리즘에만 해당하는 국소적인 얘기가 아니다. 해방 이후 미국식 판도를 따라가고 있었던 한국으로서는 미국의 이해관계와 직결되는 반이슬람주의와 이와 정반대 편에 서 있다고 볼 수 있는 개신교와 같은 종교를 공격함으로써 만들어내는 내셔널리즘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식으로 종교를 향하는 반발과 일본을 비롯한 타국에 대한 반발에는 국가를 통합하기 위한 내셔널리즘의 구성이라는 구조적인 상동성이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는 것. 이러한 요구가 현실 정치에 반영되기도 하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이를 무시할 수도 없는 실정이다. 이민자의 수용조차도 민족의 개념에서 혈통주의만을 포기할 뿐, 기본적으로 독일식의 동화정책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게 현실이다.

7.4.2. 일본의 내셔널리즘

일본은 이미 19세기 말부터 근대화/산업화를 아시아에서 가장 빠르게 이룬 국가이며 다이쇼 데모크라시라 불리며 20세기 초반에 한때 아시아에서 가장 수준 높은 민주주의를 가졌다고 평가받기도 하였던 국가이다. 하지만 시대의 한계상 당시 일본이 이룬 민주주의도 민족의 동질성과 일본 민족에 대한 자긍심과 우수함을 강조하는 흐름으로 흘러갔다. 물론 이 때문에 일본 또한 외국인과 일본인을 철저하게 구분하게 되는 경향을 보였다. 그리고 이후 군국주의로 흘러가면서 이러한 성향이 적극적으로 강조되었다. 귀축영미도 그러한 것들 중 하나.

최근 한국뿐 아니라 중국, 러시아 등에서도 일본의 내셔널리즘이 점차 부정적으로 흘러가고 있다고 우려하는 추세이다. 그리고 이것은 일본의 우방인 미국도 예외가 아니다. 이러한 움직임은 일본의 전범자들이 안치되어 있는 야스쿠니 신사 참배 등을 통한 아시아 국가들에 대한 대대적인 도발에서도 보이고 있다.
다만 보이는 것과 달리 현재 일본 내에서도 일본의 이러한 흐름에 대해 마냥 긍정적이지는 않다. 내셔널리즘과 강경한 흐름을 부추기는 정부의 일부 정책들과 정치인들에 대한 반발이 상당히 거세다. 모리토모 학원 스캔들도 원래 이를 파고들은 정치인이 해당 학원의 포스터를 보고 우익 성향의 학원이 아닌가 라는 의심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게다가 일본 정부에서도 일부 정책을 제외하곤 인종차별과 혐오발언에 대해 결코 약하지 않은 제재를 내리고 있다. 혐한도 인종차별로 분류하여 처벌을 올려버렸다. 이에 일본 우익에서 강하게 반발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본에서 이러한 움직임이 소수냐 하면 결코 그렇지 않으며 일본 사회에 여전히 만연해 있다. 결국 시대에 아주 뒤쳐진 어린 아동들에 대한 현 정부에 대한 찬양 및 주변 국가에 대한 반발을 하도록 강요하는 것등이 발생하여 일본 사회 내에서도 논란이 되었다.

한국의 내셔널리즘이 기성 세대와 노년층에게서 더욱 강하게 나타나고 젊은 세대로 갈수록 해외와의 잦은 교류 등으로 인해 낮아지는 경향이 있는 반면 일본은 반대로 젊은 세대에서 내셔널리즘이 강해지고 나이 든 세대가 내셔널리즘에 부정적인 영향을 보이는 패턴이 조금씩 확인되고 있다.

이는 일본의 기성세대가 당시 일본 제국의 극단적인 내셔널리즘에 의해 일어난 2차 대전과 그 여파로 인해 초토화된 국가상태를 직간접적으로 경험하며 내셔널리즘에 대한 두려움과 경계심을 가지게 되었다. 반면 젊은 세대의 경우 버블 붕괴 이후 사회에 진출하면서 경제적인 어려움, 불안정한 미래 등으로 인해 과거의 일본 제국, 1970, 80년대의 경제 호황시절과 같은 일본의 전성기 시절로 무슨 수를 써서라도 돌아가야 한다는 극단적인 성향에 의해 내셔널리즘이 강해지는 경향으로 해석되는 경우가 많다. 대부분의 나라에서 경제가 불안할수록 내셔널리즘이 강해지는 현상을 보인다.

다만 이를 일본의 젊은 세대 전체가 다시 민족주의적 성향을 강하게 띠면서 더 나아가 과거의 전체주의화로 경도되어 간다고 단정지어 해석하는 것은 지나친 확대 해석이다. 우경화와 정치적으로 극단적인 움직임이 심해졌다고는 해도 여전히 일본의 5ch, 넷 우익의 활동을 배제하면 이런 현상이 일본의 사회적 주류라고 하기 힘들다. 당장 한국의 일베저장소워마드 같은 극우 사이트만으로 한국의 청년, 청소년 세대가 모두 막장이라고 단정지으면 안 되는 것과 궤를 같이 한다.

또한 교류가 오프라인으로 비교적 한정적이었고 정보 수집에 대해서도 느렸던 과거와는 다르게 당장 스마트폰으로 인터넷이나 유튜브 몇 분 들여다보고도 국제적인 정세와 세계의 흐름을 발빠르게 알아차릴 수 있는 글로벌리즘 시대이다 보니 일본인들 사이에서도 일본만이 갖고있는 단점이나 고리타분함에 대해서 자기 비판을 하거나 이제는 바뀌어야 된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매우 많아졌다.

당장 위에 언급된 5ch같은 막장 사이트에서 조차도 자국인 일본의 모든걸 추앙하거나 무조건 뭉치려는 민족주의, 공동체주의적 성향보다는 한국의 헬조선처럼 일본을 중세잽랜드라고 멸칭으로 부르며 자국의 단점이나 문제점에 대해 서슴없이 비판, 비난을 하는 경우가 상당하다.

단순히 우경화의 조짐이 보인다고 해서 과거 일본 제국처럼 회귀한다는 발상은 어찌보면 너무 단순한 해석일 수 있으며 그렇다기엔 전후 일본의 평화주의 교육이 전 세대적으로 보편화되어 과거처럼 한데 뭉치려는 경향이 확연히 약해진데다가 위의 한국의 내셔널리즘 문항 내용을 확인하면 알 수 있다시피 그렇게 폐쇄적이고 외부에 경계심이 강했던 일본 민족사회 조차도 글로벌리즘과 교통 통신 기술의 발달에 따라 활발한 다문화적 교류나 이방인을 사회 내부로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 점진적으로 개방되어 감을 알 수 있다.

일본 우경화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5ch에서 조차도 아베 정권의 징병제 도입에 대해 단순히 검토해 보겠다는 기사가 나오자마자 엄청나게 반발을 하며 격렬하게 비판을 할 정도로 우경화 된다고 해서 과거의 일본 제국처럼 국가와 정부의 명령을 정언명령처럼 따르던 전체주의 시기의 국민성과는 확실히 차이점이 보인다.

넷 우익들의 성향은 한 마디로 한국의 일베저장소와 같은 자국과 자국 정부 비하까지 포함하는 모두까기 성향의 막장성일 뿐이다. 이들에게 철저하게 국가에 의해 통제받고 이를 중심으로 뭉치려는 성향은 거의 없다. 진정한 의미의 내셔널리즘을 통한 공동체 전체주의화와는 거리가 멀다는 얘기. 한 마디로 입만 산 허세 쫄보들이다
7.4.2.1. 일본의 내셔널리즘 발생과 경과
일본 또한 한국과 마찬가지로 철저한 민족성 구분을 통한 내셔널리즘이 국가에 의해 주도되어 구축 되었다.

근현대사에서 일본의 내셔널리즘의 발생과 경과의 흐름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몇가지들이 있다. 하나는 메이지 유신천황으로 상징되는 일본의 근대화 과정에서 국가에 의해 주도된 내셔널리즘, 일본의 제국주의 시기, 세계대전과 여기서 비롯된 수많은 침략 전쟁을 치르면서 국가에 의해 강행되고 강요된 내셔널리즘이다.
메이지 유신에서 천황에 대한 위치 격상 및 인식 전환을 위한 노력은 국가의 주도에 의해 인위적으로 이뤄졌다.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천황에 대한 일본 사회의 모습이였는데 학교에서는 메이지 정부의 의해 천황과 관련된 신화들이 언급하고 가르쳤으며 천황의 사진과 초상화인 어진영(御眞影)을 모셔 놓고서는 일본 국민들로 하여금 천황을 섬기게 만들었다. 불타는 학교에 그 어진영을 구하려고 뛰어들어갔다 죽는 교사의 일화가 전설적인 미담으로 그려졌다.

이후로도 이러한 천황에 대한 영향력은 상당히 크게 남아서 제2차 세계 대전 때는 다이호가 피격당해서 함내에 화재가 발생했는데도 함내에 걸린 어진영을 다른 구축함에 옮기겠다고 해서 화재유폭-굉침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는 일이 나올 정도였다. 이러한 적극적인 장려의 영향은 현재 일본에 아직도 남아있는데 현재까지도 일본 천황 대한 비판은 평가에서 제외대상이며 평가하는 것이 금기시 되는 사회 터부가 되었다.

일본의 제국주의 시기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과정에서 타국과의 전쟁에서 결속력을 굳건하게 유지하고 자신들의 침략 전쟁의 당위성을 위해 내셔널리즘이 더욱 활기를 치게 된다. 이러한 정치적인 흐름은 너무나도 거대한 힘이여서 이에 대한 우려나 반발은 별다른 변화나 제고의 여지를 끌어내지 못하고 그대로 내셔널리즘의 흐름에 휩쓸려버렸다. 식민지 독립을 주장했던 일본공산당도 이 때문에 탄압당했다.

전쟁 중 일본의 일본과 일본 민족의 정체성은 끊임없이 강조되었고 최우선시되는 가치관이였으며 프로파간다로 교전중인 상대국에 대한 적대적이고 배타적인 프로파간다는 국가에 의해 장려되어 널리 퍼져나갔다. 그리고 당시 일본국민들은 국가의 프로파간다에 별다른 저항없이 철저하게 세뇌되었다. 그 유명한 비국민(非國民 非国民: ひこくみん)이란 표현도 이시기에 나왔다.

이 프로파간다는 실제로도 상당한 부작용을 야기했는데 태평양 전쟁 시기 동남아시아에 있던 일본 민간인들이 미군에 투항하는 것을 거부하고 집단 자살하였다. 사이판 전투가 대표적. 이 사건은 사실 또 다른 불씨를 가지고 있는데 일본 천황이 직접 일본 민간인들에게 자살을 권했다는 논란이 있다.

오키나와 전투에서 일본내에서 미군을 두려워한 일본 주민들이 집단 자살을 하였던 것도 한 예가 될 수 있다. 하지만 해당 집단 자살은 더 큰 논란을 몰고 왔는데 미군이 두려워서 일본 주민들이 집단 자살한게 아니라 일본군들이 자국 민간인들을 집단 학살하는 것에 관여되었다는 폭로가 터져 나왔다.

사실 과거는 물론 지금도 일본 또한 하층민으로 가면 갈수록 전통적인 내셔널리즘에 대해 비판은 커녕 그대로 휩쓸려 나갔었다. 물론 부라쿠민은 예외. 부라쿠민은 오히려 이러한 내셔널리즘으로 인한 차별의 피해자에 속한다. 다만 하시모토 도루 같은 예외도 있다. 부라쿠민 항목 참조.

특히 저소득층이나 상대적으로 현실 정치에서 이렇다 할 영향력을 갖추지 못한 계층들의 경우에는 내셔널리즘 말고는 내세우거나 자신들이 사회에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에 이에 유독 집착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으며 이것이 도가 지나쳐 자국의 역사에 사소한 비판과 이의제기도 용납하지 못하는 병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넷우익이 대표적이다.

일본의 폐쇄적이고 외국과 외국인에 대한 배타적 성향의 내셔널리즘은 시간이 가면 갈수록 허물어지고 있다. Japanese only로 상징되는 폐쇄적인 외국인에 대한 거부가 암암리에 묵인되어왔던 과거와 달리 온라인 등을 통해 속속 공개되고 있다. 이에 대해 외국의 비판과 함께 일본 내에서도 부끄럽다, 개선해야 하는 문제점이라는 반성이 점차 대두되고 있으며, 일본에서 일하고 있는 외국인 노동자들의 숫자는 날이 가면 갈수록 증가하고 있다. 이는 일본의 저출산 문제로 인한 인구 감소와 노동력 부족이 크다. 일본 정부에서도 혐한등 증오 발언들에 대해 인종 차별로 규정했으며, 우익성향의 혐한 단체들에 의해 적극적으로 이뤄지는 헤이트 스피치에 대해 명예훼손 등으로 속속 손해배상이 이뤄지고 있다.

주의할 점은 이러한 변화와 별개로 일본은 강경한 내셔널리즘에 대해 소극적인 태도를 고수하고 있다는 점이다. UN 등에서 인종차별 금지법을 권고했지만 이에 대해 일본 정부는 표현의 자유를 운운하며 거부해왔다. 결국 논란이 점점 커지자 이를 견디질 못하고 2016년에 헤이트스피치 대처법이 시행되었다.

7.5. 문화 교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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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일본은 문화 부문에서 떼어 놓기 힘들다. 주력산업이 상당 부분 겹치기 때문에 경쟁관계가 형성되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한국 기업과 일본 기업은 B2B로 얽히고설켜 있다. 삼성전자가 자사 제품에 쓰일 부품을 생산하는 일본 중소기업들을 먹여살린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삼성전자에 납품하려고 서로 경쟁까지 할 지경. 한국도 일본 부품이 없으면 자국에서 구하기 힘든 부품이 많고 유럽에서 구할 수는 있겠지만 수송비용에서 이익을 많이 까먹는다. 또한 일본의 기업들도 한국에서만 구할 수 있거나 한국에서 싸게 구할 수 있는 부품을 대량으로 사용하는 중이다.

21세기 이후로 중국 시장이 성장해나가면서 중국과의 협력에서 얻는 이득 또한 높아지고 있는데, 중국의 기술력과 자본력, 시장 규모 등은 계속 성장하고 있다. 그래서 장기적으로 보자면 양국 모두 한국이나 일본보다 중국에서 사업하길 선호한다. 이는 한국과 일본을 가리지 않고 나타나며, 돈이 흐르는 대로 경제 주체가 움직이는 것은 경제학적으로 당연한 수순이다. 이 때문에 중국위협론처럼 중국의 독재정치, 경제적 위협, 유한양행을 비롯해 한국의 많은 기업들이 중국 측에 기술이 유출되거나 핵심 인력이 스카우트돼 버리는 등 중국이 모든 곳을 집어 삼킬 것이라는 경계심이 점차 성장하고 있다. 중국이 워낙 괴물처럼 커져가는 탓에 경제적인 틀도 급속히 변화하고 있다.

양국의 정치적 감정과는 달리 상호간의 방문객 수는 계속 증가하고 있다.기사 부산에서는 일본으로, 후쿠오카에서는 한국으로 당일치기 여행을 가는 경우도 많은데 부산과 일본 후쿠오카는 비행기로 50분 정도에 닿기 때문.

세계의 여러 이웃 국가들 중에서도 한국, 일본만큼 서로에 대해 알고 관심을 가지는 나라는 매우 드물다. 당장 유튜브 등 다양한 SNS들에서도 나타나지만 한국 국민과 일본 국민은 서로를 매우 의식하고 있고 라이벌, 적, 동료, 친구 등등 부정적인 측면에서든 긍정적인 측면에서든 한국과 일본은 다양한 관계로 엮여있는, 도저히 떼려야 뗄 수 없는 나라다.

이러한 문화적인 교류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다수있다. 한국 내에서도 일본으로의 문화컨텐츠 수출을 단절해야 말하는 사람들도 있으며 보통 일본 젊은이들은 한국 문화에 관심이 없다며 정신승리를 하며 자국혐오를 일삼는 사람들도 있으나 사실 실상은 그 반대이다. 일본내에서도 우익사관들과 극우들이 제일 우려하는 것이 한국의 문화가 깊숙하게 일본에 침투하는 것이다.

반면 현재 우리나라의 20대 남성들이 보수진영에 가까운것처럼 일본의 중년 남성층도 그러한 성향이 강하며 그러한 사람들은 한국이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는 서방진영의 우방국이라는 인식보다 아직도 전쟁중이며 사상을 확립하지 못한 혼란한 나라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이러한 사람들의 특징이 한국과의 친목도모를 흡사 중국, 북한과의 친목을 도모해야 한다는 말과 동급으로 국익에 해가 된다고 생각하는 것.[73]

서울랜드은하철도 888은 일본의 센요공업사에서 제작했다.

한국 취업 시장에서 토익을 반영할 때, 일반적으로는 대한민국과 일본에서 치른 정기시험의 성적표만 인정된다.[74] 또한, 일부 한국인들은 TOEFL, GRE, LSAT 등의 시험을 보러 일본으로 가기도 하며 MCAT는 한국에 시험장이 없어 일본으로 가서 치러야 한다.

한국과 일본은 워킹홀리데이 협약이 체결된 관계이다.

한국의 2030세대를 중심으로 일본에 대한 호감도가 높아지고 있다.#

7.5.1. 언어

양국내에서 언어 교류가 자주 이뤄지고 있다. 한국에서 일본어는 주요 외국어 중의 하나이고[75] 일본에서도 한국어는 주요 제2외국어 중의 하나에 속해 있다. JLPT, JPT가 한국에서 실시되고 TOPIK이 일본에서 실시되고 있다. 최초의 한국어 어학시험인 한글능력검정시험은 일본에서 만들어져 시행되고 있다. 일본에서 한류의 영향으로 한국어를 배우면서 TOPIK을 응시하는 일본 여성들이 늘어나고 있다.# 한국어를 배우는 일본 젊은층도 10년새에 증가했다.## 일본에서 TOPIK을 치른 수험자 수가 40,000명을 넘었다.# 일본 어학서적 중 한국어 비중이 12%를 차지해 영어 다음으로 2위를 차지했다.# 심지어는 부산 사투리를 다룬 책도 있다.

한국 대학내에는 일어일문학과가 설치된 대학들이 존재하며 대부분의 우리나라 중학교, 고등학교 내에는 제2외국어 시간에 일본어, 중국어 과목중 한가지를 선택해서 가르치거나 둘다 가르치고 있다. 한국 고등학교에서 일본어 과목이 도입된 것은 1973년으로 의외로 늦은 편이다. 한국외대는 1961년에 일본어학과를 설치했다. 일본내 대학에서 한국어학과가 설치된 대학들이 존재하며, 교양과목 중에도 한국어 과목이 있는 곳이 있다. 다만, 일본 대학의 한국어 과목은 대학마다 다른 명칭을 쓰는데 한국어(韓国語), 조선어(朝鮮語), 한국조선어(韓国・朝鮮語), 코리아어(コリア語), 한글어(ハングル語) 등등 명칭이 다양하다. 일본 대학에서 조선어 과목이라고 표기한 경우가 흔하다보니 조선어 대신 한국어로 표기하려는 움직임이 있다.#

한국 수능에 일본어 과목이 시행되고 있는 것처럼 일본 공통테스트에도 한국어 과목이 있다. 한국 입시의 일본어 과목은 1970년대 예비고사 때부터 대학입학 학력고사까지 있었고, 1990년대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 잠시 폐지되었다가 2000년에 제2외국어/한문 영역의 한 과목으로 부활했고[76], 일본 입시의 한국어 과목은 센터시험 시절인 2002년에 도입되었다. 인원 수는 한국 수능의 일본어 과목이 1만 358명이 응시했던 데 반해 일본 공통테스트의 한국어 과목은 1,000명도 안 되는 매우 적은 응시자를 보였다.[77] 공통테스트 한국어 과목은 어문규정 없이 잘못된 발음을 묻는 문제가 있다.

2024년 11월 7일, 한국에서 중국어의 인기가 떨어지고 있는 반면, 일본어의 인기가 높아지고 있다고 일본 언론들이 보도했다.#

7.5.2. 종교

한일 양국의 종교 교류도 꾸준한데 한국 기독교가 일본에 꾸준히 선교를 보내는 것도 유명하다.#

통일교 같은 경우 오랫동안 자민당의 주요 인사들과 교류하면서 반공, 승공을 모토로 교세를 크게 확장하였다. 통일교 같은 경우 한국보다 일본에 더 신자가 많을 정도이다.

반대로 천리교, 창가학회 같은 일본 종교가 한국으로 진출하기도 했다. 2007년 보도에 따르면 한국인 4%가 일본계 종교 신자라고 한다.#

7.5.3. 일본의 한국 문화

문화 부문의 경우 두 국가는 친밀해지고 있었으나 2010년대 중반 이후 일본의 혐한이 강해지면서 과거에 비해 한류 열풍은 전성기에 비해서 상당 부분 식었다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 그러다가 2020년대 초에는 젊은층을 중심으로 일본 내에서 한류가 다시 뜨기 시작했다. 한국 역시 애니메이션, 게임 같은 서브컬처 문화에서는 덕후층이 형성이 되어있으며, 일본 역시 한류의 영향으로 한국 영화나 한국 아이돌의 수십만 장의 앨범이 판매된다.

문화적으로는 한국에 예전보다는 친밀함을 느끼는 사람이 늘어나긴 했지만, 대중적이라고 하기에는 좀 애매한 부분들이 많다. 양국에서 큰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는 것은 음식문화 정도이나 일본 장기 '돼지김치우동 사건'에서 볼 수 있듯이 오히려 한국 음식을 먹는 것에 대한 일본 국내의 인식은 악화되고 있다. 예를 들면 아베 전 총리는 한국 음식점을 자주 찾는 것으로 유명한데 방문할 때마다 일본 우익에게 까인다(...).[78]

하지만, 2017년부터 번지기 시작한 3차 신한류 열풍이 일종의 변수가 되고 있다. 자세한 것은 일본의 한류 문서 참조.

한류의 영향 등, 현재진행형으로 한국 여행을 오는 일본인도 많은 편이다. 2016년 9월까지 일본의 방일 관광객 수가 1978만 명으로 연내 2천만 명 돌파를 눈앞에 두고 있는데, 이중 과반수가 중국과 한국 관광객이다. 2020 도쿄 올림픽까지 관광객 4천만 명을 목표로 하는 일본 입장에서 한국 관광객의 증가는 목표 달성을 위해 가장 중요한 문제이다.

한일 간의 갈등 속에서도 한국을 방문하는 일본인 관광객들이 늘어나고 있다.# 일본의 10대 ~ 20대 젊은 층에서는 한국산 화장품과 패션이 인기를 끌고 있다.#

2020년 4월 19일에 카카오는 출시 4주년을 맞은 일본 만화 플랫폼 픽코마가 3년 연속 거래액이 두 배 이상 증가하는 고속성장을 이어가며 올해 첫 흑자가 예상된다고 밝혔다.#

한일 간의 갈등이 시작되고 있지만, 일본 내에서 한국 드라마의 인기는 높은 편이다.#

배우 현빈이 슈칸아사히의 표지모델이 되면서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의 폭발적인 인기와 함께 일본에서 재점화하는 신한류의 주인공으로 소개됐다.# 또한, 달고나 커피와 K-POP 등의 인기가 이어지고 있다.# 일본에서 '사랑의 불시착'이란 한국 드라마가 인기를 끌면서 신드롬에 가까운 현상을 일으키고 있고 심지어 모테기 도시미쓰 외무상도 한국 드라마인 '사랑의 불시착'을 시청했다.#1#2#3

일본 작가의 한국 드라마 그림전이 열렸다.#

2020년에 일본을 휩쓴 유행어 대상 후보에 한국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제4차 한류붐'이 올랐다.#

일본 언론에서 한국의 대중문화 콘텐츠의 성장에 대한 분석 기사를 보도했다.#

산케이신문이 한국 만화의 일본내 인기에 대해 일본 만화 산업이 일본내에서 쇠퇴할 수 있다는 우려를 표했다.#

일본의 젊은이들 사이에서 한국어 붐이 일어나고 있다.#

2022년 1월 28일에 일본정부관광국은 한일 양국 간 자유로운 여행 재개를 기원하는 뜻에서[79] 일본 드라마를 활용한 관광 홍보 스토리텔링 영상을 공개한다고 밝혔다.#

일본인들이 한국을 방문할 때 가장 많이 가는 곳은 서울[80]과 부산[81] 이라고 한다.

일본의 신문 프레지던트가 한국 드라마가 일본에서 인기가 많아지고 있는 것에 대해 집중보도했다.#

3월 13일에 일본에서 고교생이 참가하는 한국어 말하기 대회가 3년만에 오프라인으로 개최됐다.#

3월 25일에 일본 도쿄한국문화원은 도쿄 신주쿠구 소재 문화원 한마당홀에서 양국 청년 전통음악가들이 펼치는 독주와 협연 무대를 개최한다고 밝혔다.#

일본에서 2~30대를 대상으로 한국 에세이와 베스트셀러 등이 인기를 끌고 있다.#

TWICE가 도쿄돔에서 3연속 공연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주오사카한국문화원은 5월 28일에 2022 K-POP 챌린지를 개최한다고 밝혔다.#

일본 오사카한국문화원은 7월 23일 오사카시 쿨재팬파크오사카TT홀에서 2022 K-팝 커버댄스 페스티벌을 개최한다고 밝혔다.#

주일 한국 대사관과 문화원이 K팝 오디션을 개최했다고 밝혔다.#

네이버웹툰 바른연애 길잡이가 일본에서 드라마로 방영되기로 했다.#

7.5.4. 한국의 일본 문화

포켓몬스터,드래곤볼, 도라에몽, 짱구, 원피스, 명탐정 코난, 나루토 같이 일반인들도 보는편인 만화들은 한국 출판 만화 시장이 몰락한 이후 웹툰이 주류가 되기 전의 공백기에는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1990~2000년대에는 만화라고 하면 일본 만화밖에 없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한국 웹툰이 성장한 다음에는 인지도에서 밀리며 게임 역시 온라인 게임에 많이 밀린다. 그러나 수익면에서는 일본 만화가 여전히 강세이며 게임 또한 콘솔 비디오 게임 시장에서는 높은 퀄리티로 평가받는 경향이 크다.

한국 내에서 일본 공산품의 영향력이나 문화적 영향력은 오히려 과거에 비해 떨어졌다. 서브컬쳐가 그 명맥을 유지하는 정도이고, 그럼에도 과거에 비해 밀접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방송매체를 통한 잦은 노출과 일상화로 보는 게 맞다. 과거 왜색문화라 치부해 방송출연조차 금지되던 것과는 달리, 각종 프로그램에서 일본 관련 여행이나 문화콘텐츠를 방송하며, 일본인 연예인의 출연, 아이돌 그룹 멤버 등 친숙하고 가치중립적으로 꾸준히 대중들에게 노출되었기 때문이다.

관광 산업에서도 그렇다. 국적별로 따져보면, 일본을 가장 많이 찾는 관광객은 한국인이었고 현재도 꾸준히 일본에 관광을 가고 있으며[82], 엔화가 강세인 엔저 현상 시절 한국을 가장 많이 찾는 관광객 또한 일본인이었다. 다만 2013년부턴 한국을 가장 많이 찾는 관광객 수는 중국인에게 내주었다. 물론 그렇다고 일본인 관광객이 적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중국인이 넘사벽으로 많을 뿐이다.

2019년 한일 무역 분쟁으로 인한 한국 내 일본 상품 불매운동코로나19의 확산으로 한국에서 일본 문화의 흐름이 크게 바뀌었다. 관광의 경우 안 그래도 포화상태라 점차 정체되던 일본 여행이 직격탄을 맞았으며, 코로나19의 여파로 경제나 문화 부문에서 교류가 끊기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코로나19가 어느 정도 극복이 된 2022년부터는 일본 여행과 경제, 문화 교류가 다시 활성화되고 있다. 특히 일본의 J POP이 다시 부활하면서 그전까지 일부 마니아만 좋아했던 일본 음악이 점점 양지로 올라와 한국에서도 인기를 끄는등 음악적인 부분에서 깊은 영향을 받기 시작했다.

7.5.5. 식문화 교류

21세기에 들어 한국 요리일본 요리의 접점이 많아지면서, 양국의 요리는 서로에게 많은 인기를 얻고 있다. 먹거리로는 대동단결. 개인에 따라 다르지만, 일본 요리 상당수가 한국인들의 입맛에도 잘 맞고, 한국 요리도 매운 요리를 제외하면[83] 일본인 입맛에 잘 맞는 요리가 많다.

일본에서는 한국의 삼겹살삼계탕 등이 알려져있다. 일본 도쿄에는 한국식 삼겹살집이 굉장히 많다. 한국을 방문한 일본 관광객들 중엔 한국 막걸리 맛에 빠진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한국식 양념을 곁들인 양념 치킨 맛에 빠진 일본인들도 많다. 일본 내에서는 일본인 입맛에 맞게 변형된 김치인 '기무치'도 잘 알려져 있다.

앞의 요리들 만큼 일본에서 널리 알려지진 않았지만, 한국의 간장게장은 많은 일본인들이 상당히 좋아한다. 특히 간장게장은 일본인들이 대중적으로 좋아하는 들쩍지근한 맛의 간장과 해산물의 요소를 충족한데다 게장에 쌀밥을 비벼먹는 것이 많은 일본인들의 입맛에도 잘 맞기 때문인 듯하다. 한국의 비빔밥처럼 요리를 쌀밥과 '비벼먹는' 문화는 일본인들이 한국적으로 여기는 요소이다. 카레라이스도, 동(일본식 덮밥. 대표적으로 '규동' 등)도 일본인들은 '비비는' 것이 아닌 곁들여 '떠먹는' 느낌이 강하기 때문이다.

비빔밥도 인지도가 늘어가고 있다. 일본의 비빔밥은 한국의 비빔밥보다 고추장의 맛이 덜 자극적인게 특징이다. 한국의 부침개, 지짐류 역시 일본의 한국 가정식 가게에서 만날 수 있다.

한국의 명란젓과 김 역시도 일본인들이 좋아하는 식품 중 하나이다. 명란젓은 본래 한국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요리이고, 한국산 은 일본에 한화(韓貨) 500억원을 훌쩍 넘게 수출 될 정도로 인기가 많다. 다만 이 경우들은 "한국에서 수출하는 것", "한국 요리에서 기원한 것"이며 "외국 요리로서 일본인이 즐기는 한국 요리"가 아니므로 식문화 교류에는 해당하나 한식의 확산으로서는 모호하다 할 수 있다.

실제로 일본 인기 아이돌 아라시의 멤버 사쿠라이 쇼는 한 예능프로에서 퀴즈를 맞추고 난 후 상으로 받은 설렁탕과 같이 나온 반찬 깍두기를 먹고는 그 맛에 반해버렸다. 이후 계속 깍두기만 집어먹다가 어느 출연자에게 "설렁탕 먹으라고!" 라는 잔소리를 듣고는 설렁탕을 먹었다. 물론, 설렁탕 맛도 극찬했다. 삼계탕은 일본의 인기 남성 아이돌 그룹 아라시마츠모토 준이 굉장히 좋아하는 요리이다. 일본 예능방송에서 '오골계 삼계탕'이 소개된 적이 있었는데 진공팩으로 포장되어 가정에서 즉시로 조리가능하게 레토르트형으로 판매하고 있다고 한다. 준이 맛을 보고는 당장 주문하자고 할 정도로 좋아했다.

한국에서는 일본의 화과자사케등을 백화점에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으며, 일본 맥주 역시 어느 편의점에나 있을만큼 흔하다. 스시우동, 일본식 돈가스, 나베(일본식 전골), 라멘, 일본식 덮밥(규동 등) 가게 등도 길에서 쉽게 접할 수 있다. 일본 가정식의 경우 오코노미야키오차즈케, 오니기리(일본식 주먹밥)도 만날 수 있다. 일본에서 기원한 왜간장은 21세기 한국 요리에서 곧잘 쓰인다. 일본의 발효식품인 미소(일본식 된장국)와 낫토도 한국에 잘 알려져 있다.

한국의 겨울 길거리 간식 중 빼놓을 수 없는 붕어빵의 원형은 일본에서 건너온 것이며 카스테라, 카레라이스도 일본에서 기원한 것이다. 다만 정확히 카스테라는 포르투갈을 통해 일본으로 건너가 변형되어 동아시아 전역으로 퍼진 물건이고, 카레 소스는 인도-영국-일본을 거쳐 변형되어 구 일본군의 짬밥(...)으로 쓰이던 것이 기원이다. 카레 소스를 쌀밥에 부어 먹은 것이 카레라이스의 시작이다. 일본식 덮밥요리와 인도식 향신료, 영국식 소스 개념...??의 만남인 셈. 여기다 김치를 곁들여 먹으면 한국식 발효 채소와의 만남이다. 이렇게 보면 카레라이스는 한일교류를 넘어 만국 교류의 대표적 예시인 음식인 셈.

이외에도 간식류는 가다랑어포(가쓰오부시)를 친 타코야키가 잘 알려져 있으며, 모나카 역시 일본 과자이다. 일본식 말차, 다도의 유입은 차 애호가들에 의해 한국의 전통 다례와 만나 고려시대 이후로 위축됐던 한국 차(茶) 문화의 한 흐름이 되었다.

한국에서 1980년대부터 지금까지 인기있는 오리온 밀크 카라멜의 경우 일본 모리나가제과사의 기술 제휴를 통해 만들어졌었고, 한국 과자 칸쵸빼빼로의 원류는 일본 과자 팟쿤쵸, 포키로 여겨지고 있다. 이런 사례를 아는 일부 일본인들은 일본에 대한 한국의 지적재산권 문제로 여기고 있다. 한국이 일본 제품을 배꼈다는 것. 제품화된 과자류의 형태, 맛 등이 비슷한 것을 지적재산권 침해로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식품류는 미국의 문파이(Moon pie)와 한국의 초코파이, 미국의 게토레이와 일본의 포카리 스웨트 사례처럼 다른 제품의 특징을 벤치마킹한 경우가 흔하며, 우연히 비슷한 경우도 많다. 때문에 무조건 한국이 일본 과자를 베꼈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일본에 없는 맛을 한국 회사에서 개발해 판매하기도 하기 때문. 비판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으나, 쉽게 "표절"따위로 결단지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단적으로 초코 막대 과자의 경우, 한국의 빼빼로가 일본 과자 포키를 벤치마킹했다고 여겨지지만 일본의 포키 데이는 한국의 빼빼로 데이를 일본이 벤치마킹 한 것이다. 돈 되는 건 서로 보고 따라하는 거지 뭐

일본에서는 반한(反韓)감정에 의한 한국 음식에 대한 거부감이 존재한다. 단순히 특정 한국 요리가 입에 안 맞는 경우라면 해당 음식에 대해서만 거부감을 표시하는 게 일반적인 일이다. 일부 일본인들의 한국음식에 대한 거부감, 경계심은 한국 음식의 맛에 대한 거부감이 아닌 반한 감정에 기인한 것이므로 문제가 된다.

"사쿠라장의 애완 그녀"라는 일본 애니메이션에서는 삼계탕이 나왔다는 이유만으로 일본 우익의 큰 반발을 샀고, 2017년에는 쇼기(일본식 장기 게임) 기사 후지이 소타가 대국 중 점심에 돼지김치우동을 먹었다는 이유로 일본내에서 '자이니치'냐는 극우들의 어처구니없는 비방(誹謗)을 들었다. 참고로 자이니치라는 것은 재일동포, 즉 재일조선인 내지는 재일한국인이라는 뜻으로 본래 비하의 의미는 없으나 저렇게 줄여 사용하면 일본 내에서 차별적인 뉘앙스로 쓰인다.

일본은 2010년대 이후 확산되는 우경화 분위기 속에 한국 음식을 좋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다만 참고할 만한 공신력있는 통계가 없으므로 한국 음식을 좋지 않은 시선으로 보는 일본인들이 '늘어나고' 있다고 완전히 단언할 수는 없다.

당연히, 위와 같은 사례의 경우는 "햄버거 먹으면 미국 사람, 파스타 먹으면 이탈리아 사람"과 같은 엉터리 논리와 다를게 없는 한심하고 어리석은 생각이다. 설령 반한정서를 지니고 있는 사람이라도, 정상적인 일본인들은 당연히 한식을 먹는다는 이유로 이상한 비방을 하진 않는다. 한식의 인기와 인지도 자체는 일본에서 증가하고 있으나 반한 감정으로 인해 한식의 위상 상승에 대한 견제나 반감도 동시에 늘어나고 있다고 정리할 수 있겠다.

한국에서도 반일감정 때문에 일식의 확산을 경계하는 경우가 소수 있다. '일식의 확산'과 '한류'를 고찰한 연관 기사, 누군가가 삼일절에 홍대 앞 일식집 테러 기사, 모르고 명란젓을 일본 기원 요리처럼 설명했다가 한국 악플러들과 극우들의 심각한 악플 공격을 받은 친한(親韓) 일본인

다만, 두번째 삼일절 일식집 뉴스는 많은 이들의 심증을 배경으로 주목된 사건으로, 정황이 명확히 밝혀지지는 않았음을 명시하자. 그러나 심증대로 저 사건이 삼일절의 애국심을 일식에 대한 극단적 배타성으로 드러낸 것이라면 굉장히 잘못된 일이다. 삼일절이 범민족적 평화 독립운동의 의의를 지녔음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다. 당장 일식집을 운영하는 멀쩡한 한국인 사업가, 요리사들도 많다는 것을 생각하면 저 사건을 저지른 사람의 애국심은 참으로 비뚤어진 애국심이 아니라 할 수 없다. 일반적으로 한국에서 일식집에서 스시 같은 일본 요리를 먹었다는 이유로 대놓고 친일반민족행위자라고 비난하지는 않는다.

예를 하나 들자면, 한국에서도 중국집이 동네마다 많이 대중화가 되어있는 것은 그냥 한국인 사장이 레시피를 배워서 장사를 하는 것이고 딱히 중국을 좋아해서 중국 요리를 만드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중국 요리를 좋아하는 한국인이 짜장면, 탕수육, 만두, 중국의 고급 술을 자주 먹는다고 죄다 친중성향이 있어서 그런 것이라고 판단하는 것은 매우 성급하고 잘못된 것이다. 반대로, 중국 요리와 중국산 고급 술을 좋아하는 한국인이라도 반중 성향이 없으리라는 법은 없다. 결국, 한국에서는 남들이 먹는 것으로 누가 뭐라고 간섭하는 것을 굉장히 기분나쁘게 여기면서 "내가 맛있어서 먹는 음식인데 도대체 너가 무슨 권리로 참견이냐?" 라는 반응이 나온다.

이처럼 한국에서 아무리 반일감정이 심해도 일본 요리에 대한 배타성, 혐일 시위 또는 혐일 서적이 유행하는 국제적인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하면, 일본에서 일어나는 한국 요리에 대한 배타성, 혐한 서적과 혐한 시위등의 대두는 한국과 굉장히 대조적이다. 이렇게 식문화 교류에서도 드러나는 양국의 차이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앞으로 복합적이고 다원적인 사회학적 분석이 필요할 듯하다.

애초부터 한국에서는,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린다" 라는 속담에서 드러나듯이 식사를 상호간섭의 불가침같은 영역으로 간주하고, 먹거리에 관한 쓸데없는 참견을 보이는 것을 꺼리는 경향이 두드러지기 때문에 반일감정이 있더라도 일식 취향에 대해 비난을 하지않는다는 의견이 있다. 애초부터 한국에서는 "밥 먹었어?", "식사는 하셨습니까?" 같은 표현으로 상대방에게 안부를 묻거나 인사를 할 때 쓰는 것처럼 식사하는 것을 매사에 중요한 것으로 여긴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더더욱 그렇다.

하지만, 일본도 '메이와쿠(미혹)'라 하여 남에게 민폐를 끼치는 것을 극도로 꺼리는 성향이 있는데, 이는 남이 선호하는 요리에 대해 참견하는 것도 민폐를 끼치는 것이므로 하지말아야 한다고 예상한다면, 반감을 지닌 상대국에게 지나치게 배타적 태도를 보이는 것은 그냥 일부 한심한 종자들의 민폐로 보는 것이 가장 적절할 것이다.

7.5.6. 엔터테인먼트 산업

사실 일본 대중문화 개방 문서를 봐도 알 수 있듯 합법적으로 개방되기 전에도 이미 음성적으론 일본 문화가 꽤 유입되어 있었으나, 1990년대 후반 일본 문화가 양성화되기 시작하고 21세기 들어 여행이 자유로워졌다. 그 결과 문화적으로는 많이 가까워졌다. 정부에서 일본 문화를 차단하기는 했지만, 워낙 음지에서 받아들여 온 것이 많은 탓에 더 빨리 가까워질 수 있었다. 한일문화 개방 이전 전자상가에서 일본산 만화, 게임, 잡지, 음반을 구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일본 여행이 완전히 자유로워진 것도 생각보다 그렇게 오래되지는 않았다. 2005년 전까지만 해도 일본 여행을 하기 위해서는 여행비자를 발급받아야만 했다. 그리고, 2005년 아이치 세계박람회가 개최되었을 때 일본 정부가 한시적으로 한국인의 무비자 입국을 허용한 뒤, 이듬해부터 90일 이내의 체류에 대해 무비자 입국을 완전히 허용했다. 이 때를 기점으로 일본 여행이 국내여행처럼 쉬워지기 시작했다.

일본 애니메이션의 경우는 아예 1960년대 말부터 한국에서 수입을 시작했는데, 한국이 직접 애니메이션을 제작할 수 있는 역량도 부족했던데다 검열 문제도 심각했고 높은 제작비 탓이 주요 이유 중의 하나다. 대표적인 것이 마징가Z, 베르사유의 장미, 우주소년 아톰 등이 있다. 다만 왜색을 최대한 배제하고 로컬라이징을 철저히 했기 때문에, 이 시대 만화를 보던 어른들 중에서는 아직도 일본 만화를 국산 만화로 잘못 알고 있는 경우도 꽤 있다.

만화, 드라마와 예능 프로의 경우 2000년대 이전만 해도 일본의 것을 대놓고 베끼거나 표절한 것이 매우 많았다. 물론 일본의 TV 프로그램들도 미국이나 유럽의 TV 프로그램을 베끼는 경우가 많았고, 대체적으로 방송 포맷 표절뿐만 아니라 대중문화, 상품 등의 표절은 미국/유럽 → 일본 → 한국 → 중국 순으로 이어져 온 건 사실이다. 따라서 당시의 한국 예능 프로의 경우는 일본의 만담 문화에서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한국의 예능 프로는 일본의 예능 프로와 그 양상이 비슷했다. 이는 당장에 한국 예능의 대부로 불리는 이경규도 일본식 만담 개그에 영향을 받았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게다가 이러한 표절 문제는 지금도 가끔씩 보인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서 표절 문제는 한국보다는 중국이 가져가고 있는 중이다.

일본의 넷 우익 사이에서는 한국 지상파 방송에서 "일본 드라마가 아직도 방영될 수 없다는 사실"이 논란거리라고는 하는데 이는 그들의 잘못된 주장일 뿐이다. 게다가 일본 대중문화 개방이 완전히 이루어져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지상파 방영이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일본 드라마에 대한 대중적인 관심과 인기가 적은 데다가 심의를 비롯한 여러 가지 문제로 인해서 지상파 PD들이 굳이 시간대를 내어서 일본 드라마를 편성할 이유가 없을 뿐이다. 결국, 인기가 있으면 충분히 방영되는데 인기가 없어서 방영하지 않을 뿐이다. 반대로, 현재 일본의 방송국에서도 죄다 한국 드라마를 방송하면서 도배를 해놓는 것도 아니다.

반대로 지상파에서 '경쟁력이 있는' 일본 애니메이션은 한국에서 계속 수입하고 방영해온 것을 보면 '일본이라서'가 아니라 그냥 '재미가 없어서'인 것을 알 수 있다. 인기가 없는 다른 나라 드라마를 수입해서 자국 드라마를 제치고 틀어주는 나라는 전 세계에서도 사실상 거의 없다. 대표적으로 동남아에서 한국 드라마가 꽤 인기 있다고는 하지만, 방송국에서 전부 한국 드라마만 방영하지는 않는다. 사실, 한국 드라마가 중국, 일본, 동남아 심지어 중동 등에서까지 방영되는 것은 자국의 드라마보다 재미가 있어서 화제가 되거나, 한국 배우들이 유명세를 등에 업은 경우가 많으며 동남아 국가들이 자체적으로 고퀄리티의 드라마를 제작할 수 있는 여력이 쉽게 안 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일본 원작 드라마의 현실적이지 못한 스토리나 감정 표현이 한국 시청자 취향과는 다소 동떨어져 있는 편이라 받아들이는 데에 어려움이 있다는 부분이 있다. 대표적인 사실로 여왕의 교실이나 노다메 칸타빌레의 경우만 보더라도 원작에서 보이는 과장된 감정 표현, 지나치게 현실적인 재현에서 오는 거부감으로 인해, 주로 한국 취향에 맞게 리메이크하여 방영하였다. 특히, 노다메 칸타빌레의 한국 리메이크판은 혹평을 면치 못했다.

게다가 노부나가 콘체르토와 같은 역사물의 경우, 작중에서 등장하는 키노시타 토키치로, 즉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같은 한국인들이 싫어하는 것이 당연한 역사적인 인물들이 상당히 카리스마가 있고 비중도 있는 매력적 역할로 등장하는 등, 정서적으로 매우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도 간과할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만화나 드라마를 한국판으로 로컬라이징 하는 노력은 계속되고 있는 중인데 대표적인 작품들이 바로 하얀거탑올드보이였는데, 올드보이는 성공적인 실사 영화화로 인해 원작이 다시 재조명된 경우다. 반대로 한국에서 일본으로 들여오는 매체 역시 일본에서 로컬라이징이 되기도 한다. 가장 빈번한 것이 웹툰의 드라마화가 되고 있다.

그러나, 항간에서는 드라마 시청자 대부분이 성인 및 중년층이 많은 편인데다가 이들 사이에서는 일본문화에 호응적인 젊은 층과는 다르게 아직도 반일정서가 강하게 남아 있어서 드라마의 주된 시청층이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을 의식하여 방영하지 않는다는 일설도 있는데 위에서 이미 반박된 사실이다.

게다가 한국 배우가 나오는 것과는 다르게 일본 배우가 나오는 편인데다가 국내에서는 일본 배우에 대한 인식이 매우 없는 편인데다가 굳이 방영을 하더라도 드라마의 주된 시청층인 성인 및 중년층들의 이질감과 반발을 부를 것을 우려하여 방영할 이유가 없다는 일설도 있다. 당장에 헐리우드 스타까지 출연하는 미국 드라마도 한국에서 거의 방영을 안 하고 있는데 굳이 일본 드라마를 편성할 이유도 없다. 애초부터 2022년 기준으로 현재 일본은 세계적인 드라마 강국도 아니며, 이미 한국보다 몇 수 이상 수준이 뒤쳐져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하지만, 2016년 상영한 영화 곡성에서 쿠니무라 준이 출연했는데, 조연이긴 했어도 주연에 버금가는 열연을 펼쳤다. 그리고 이 작품으로 쿠니무라 준은 2016년 청룡영화상 남우조연상을 수상했으며, 동시에 그는 한국 내 영화시상식에서 최초로 수상한 외국인 배우 1호라는 기록까지 남겼다.

또한 한국 연예계에 강남, 오타니 료헤이, 후지이 미나 등 상당수의 일본 출신 연예인들이 진출하고 있으며, 급기야 요즘 한창 주가를 날리는 아이돌 걸그룹에는 무려 세 명의 일본인 멤버들이 포진해 있을 정도. 그러나, 이들은 한국 연예계에서 철저히 한국 문화에 맞추어 활동하기 때문에 다국적 이상의, 일본 문화가 직접 유입된 사례라고 보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긴 하다. 하지만, 보아가 일본 음악계에 진출했을 때도 철저하게 일본어를 직접 구사하고 일본어로 된 노래를 부르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현지화된 활동을 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애니메이션은 어린이들과 청소년 그리고 젊은이들이 보는 것이었고, 개방 이전에는 한국식 분위기로 수정한 후 방영하도록 국내의 별도 심의를 거쳐야만 방영이 허용될 정도였지만 드라마는 실사판인데다 나이가 어린층보다는 성인층 특히 중장년층이 본다는 점 때문에 사정이 다르다.

이러한 심의 문제 때문에 수입된 애니메이션의 대부분이 일부가 잘린 채 수입되며, 일본에서는 아무 문제도 없어서 15세 판정을 받는 애니메이션이 한국에서는 19세 판정을 받는 경우도 많다. 대표적인 사례가 사쿠라장의 애완그녀에서 작중 마시로가 '섹스 해 본적 있어?(セックスしたことある?)' 이 한 마디 대사와 작중 마시로의 노출신 때문에 19세 판정을 받았다. 어차피 볼 사람은 보게 되지만, 그냥 한국의 심의 체계가 원래 그렇다는 것이다. 하지만, 에로망가선생은 15세로 방영했으니 많이 나아지기는 했다.

또한, 중장년층 대부분이 일본 문화를 자연히 받아들이는 젊은층에 비해서 아직도 일본에 대한 매우 큰 적대감을 갖고 있는 편인데다가 한일문화 개방 이후에도 일본에 대한 강한 적개심이 있어서 굳이 방영할 필요가 없다고도 할 수 있다. 물론, 방송사의 시청률 하락의 문제도 있는데 드라마의 시청률 대부분은 이들 중장년층에게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다만, 한국 드라마 시청률이 중장년층에 달려있었던 것은 90~00년대 이야기이며 최근에는 20~30대 젊은 여성층이 프라임시간대 드라마의 시청률을 주도하는 상황이 되었다. 물론, 아직까지는 전체적으로는 중장년층이 주도하는 시청률이 더 높은 편이지만, 각 방송사마다 주력으로 런칭하는 프라임 시간대 드라마 시청률은 20~30대 여성층이 주도하는 편이다. 그러므로, 현재 일본 드라마는 2~30대 한국 여성층이 선호하는 취향과는 다소 거리감이 있기 때문에 이들 계층의 일본 문화 선호도와는 크게 상관없이 일본 드라마가 한국에서 원작 그대로 방영하여 성공을 거두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7.6. 교통 교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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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은 한국의 도시들 중 일본으로 당일치기 여행을 가장 많이 가는 도시인데, 이유는 부산에서 일본까지는 비행기로 1시간 이내에 닿기 때문이다. 또한 인천, 부산에서 북아메리카오세아니아로 가는 비행기는 거의 무조건 일본 상공을 통과한다.

그 외 한국의 다른 공항들과 일본 내 공항이 양국을 잇고 있다. 또한, 양국을 잇는 선박 노선도 존재하지만, 일반적으론 비행기를 통한 교류가 많이 있다.

쓰시마 섬은 지리적으로 한국과 인접해 있어서 배를 통해 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2024년 9월 18일, 일본정부관광국은 8월에 일본을 찾은 한국인이 1위를 기록했다고 밝혔다.#

2024년 10월 17일, 일본을 찾은 한국인 관광객이 1,000만명에 달할 것으로 보이지만, 방한 일본인 관광객의 수가 300만명에 채 되지 않을 것으로 전망되면서 여행 선호도에서 차이를 보였다.#

제주-도쿄 노선, 제주-오사카 노선이 존재하기 때문에 제주도를 찾는 일본인 관광객들이 많아지면서 제주를 찾는 일본인 관광객 70%는 국내 다른 곳이 아닌 제주만을 찾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일노선을 통해 왕래한 관광객들의 수가 2천만명 이상을 돌파했다.#

7.6.1. 항공 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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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과거사

한일 관계에서 과거사 논란은 핵심적이다. 한일관계의 주요 쟁점중 하나인 일본군 위안부 문제들도 궁극적으로, 과거사 문제이다. 또 한국인들은 1998년 10월 이전까지 일본이 과거사에 대한 사과를 말하고자 해도 '유감'이나 '통석의 념' 같은 말을 쓰자 한국 입장에선 진정성이 없다고 분노하는데, 교양만화가 이원복 교수는 2000년 저서 <새 먼나라 이웃나라> 일본 1탄에서 일본인들이 체면을 지키고자 과격한 표현을 우회적으로 에둘러 말하는 특성에서 비롯됐다고 봤다.

일본 정부와 한국 정부의 정치는 물론 문화 교류에서도 과거사가 문제시 될 정도. 심지어 일본 문화를 좋아하는 덕후라고 일컫는 사람들조차도 자신들이 일본 문화와 서브 컬처를 좋아하는 것과 별개로 일본 과거사 문제에 대해 날선 비판을 세우는 사람들이 많다. 이것은 극우 미디어물의 범람과 관련이 있다.

7.7.1. 야스쿠니 신사/신사 참배

대표적인 것이 야스쿠니 신사와 일본 정치인이나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방문, 참배. 한일관계는 물론 중일관계가 잠잠했다가도 순싯간에 나락으로 처박히게 만드는 주요 요인이다. 일본에 대해 긍정적인 사람도 야스쿠니 신사 참배에 대해선 학을 떼게 만든다. 기껏 일본에 대해 반감이 잠잠해질려다가도 신사 참배 한번에 바로 급상승하기 때문.

야스쿠니 신사는 그 자체로도 심각한 문제점들을 가지고 있으며, 때문에 이에 대해 총리가 자국 추모시설을 방문하는 것에 왜 왈가왈부 하느냐 내정간섭이다라고 치부하고 한국과 중국에서 조용히 넘어갈래야 넘어갈 수 있는 문제가 결코 아니다. 자세한 것은 야스쿠니 신사 참조.

7.7.2. 일본의 피해자 행세

한일관계 악화에 영향을 끼치는 또다른 요인중 하나. 다만 한국과 마찬가지로 일본과도 동맹인 미국에서도 이것은 결코 그냥 넘어가지 않고 바로바로 비판하고 문제시 삼는다. 해당 사항은 일본의 피해자 행세 참조.

7.7.3. 일본 극우사관

일본의 우익 성향의 정치인들과 학자들은 태평양 전쟁을 비롯한 일본 제국의 근현대 행보에 대한 반성과 사과는 일본을 필요 이상으로 깎아내리는 자학사관으로 규정한다. 당연히 이 또한 장기적으로 한국과 중국에 대해 일본의 강경한 태도와 이에 대한 여론에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

7.8. 영토 분쟁

한국과 일본 사이에 있는 영토 분쟁 또한 주된 갈등의 사안이다.

자세한 것은 독도, 독도/논란 참조.

8. 미래

日韓交誼 善作紹介(일한교의 선작소개): 일본과 한국의 교의는 서로를 잘 아는 것에 있다.
- 안중근

한국일본중국과 함께 서로가 서로의 가장 가까이에 위치한 이웃나라이며, 유사 이래 각국의 역사적인 고비마다 때로는 우호적인 형태로, 때로는 적대적인 형태로 관계를 맺어 왔다. 그러나 일본은 전국시대를 거쳐 강력한 군사력을 확보하고 통일된 국가를 형성하면서 한반도 국가의 국력을 능가하기 시작했고, 개화기에 접어들면서 메이지 유신으로 빠르게 근대화에 성공하고 조선을 강제병합한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일본 제국은 패망했고 한반도는 다시 독립을 쟁취하였다. 그리고 전후 미국은 인위적으로 역내 세력 구도를 재편성하였으며 일본은 주변 국가들이 부진하는 사이 미국의 보호 아래 엄청난 경제 성장을 일구어내며 다시금 세계적인 선진국으로서의 입지를 확고히 했다.

장제스 스스로도 인정했듯이 중화민국의 승리는 압도적인 인력과 국토를 이용한 지연전의 결과였을 뿐 내부적인 발전도는 일제에 비할 바가 되지 못했다. 게다가 승자인 중화민국국공내전의 패배로 자신들의 승전국으로서의 입지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 때문에 지난 한 세기 동안 일본의 외교적 목소리에 직접적으로 클레임을 걸 수 있는 아시아 국가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으며, 20세기 전반기에는 유럽 열강들, 후반기에는 미국과의 외교를 통해 간접적으로만 일본을 제어할 수 있었다. 그 동안 신생 대한민국은 광복에 이어 분단전쟁을 겪으며 최악의 스타트를 끊었으나, 불과 반 세기도 안 되는 짧은 기간 내에 산업화와 민주화를 모두 달성하며 지역강국으로 발돋움하는 데 성공했다. 역시나 일본과의 역사적 악연이 깊은 중국 역시 개혁개방을 추진한 덩샤오핑 이후 빠르게 발전하며 오늘날 역내 패권은 물론 세계 패권마저 꿈꾸는 강대국으로 성장하였다.

지난 한 세기 동안 일본이 가졌던 독보적인 입지는 역설적으로 자신들의 어두운 역사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하는 근본적인 원인이 되었고, 일본이 각국에 남긴 역사적 상흔은 냉전의 유산과 함께 여전히 한일관계를 비롯한 동북아 정세를 지배하고 있다. 그러나 과거와는 달리 동북아시아 내에서 일본의 독보적인 지위는 더 이상 유지되지 못하는 상황이며, 한일관계의 흐름 역시 궁극적으로는 이러한 세력균형의 변화라는 측면에서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20세기 전반기의 한국은 나라를 빼앗긴 상황이었기 때문에 역내 최강국이던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중화민국과 연대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하였으나, 일본이 주변국을 압도적인 무력으로 합병할 능력을 상실한 현 시점에서는 한중 연대의 의미는 과거에 비해 많이 퇴색된 상황이다. 또한 20세기 후반기의 한국은 경제적으로 낙후된 상황에서 북한과 중국의 위협에 맞서 스스로를 지키기 어려웠기에 미국의 주도 하에 한일관계를 개선하는 방향으로 나아갔으나, 현 한국은 주적인 북한을 압도하며, 북한을 제외한 주변국들 역시 한국과의 1대1 전면전을 함부로 시작하지 못할 정도의 군사·외교적 레버리지를 확보한 상황인지라 굳이 일본에 원치 않는 양보를 할 필요 또한 없는 처지이다. 게다가 일본이 20세기 전반에 가졌던 동북아시아 내의 군사 패권을 상실하였음이 명확하고 미국 중심의 질서에 재도전하기 보다는 순응하는 길을 택한 현 시점에서, 한일간의 주요 이해관계는 주로 역사·문화·경제적인 측면에서 얽혀 있을 뿐 한국 입장에서든 일본 입장에서든 일본 열도 혹은 한반도를 군사적으로 점령할 의도도 역량도 동기도 명분도 전혀 존재하지 않는 상황이다.

따라서 대한민국으로서는 국가 정체성을 걸고 대립하는 북한[84]이나 스스로 역내 패권을 추구하고 그 첫 타자로 한반도를 눈독들이고 있는 중국[85]에 비한다면 일본 문제는 아무래도 상대적으로 부차적일 수밖에 없다. 때문에 미래의 한일관계는 20세기를 제외하고 역사적으로 항상 그래왔듯 역내 다른 국가인 미국, 중국, 북한과의 외교적 상황에 따라 유동적으로 전략적 우호와 전략적 경계 사이를 맴도는 형태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첨언하자면, '부차적인 관계'라는 것이 반드시 우호 혹은 적대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한일관계의 중요성 자체가 동북아시아 다른 국가들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낮을 수밖에 없다는 의미다. 예컨대 한국의 외교에서 남북통일은 헌법에 명시된 대로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최우선 목표이다. 그러므로 중국과의 관계개선을 위해 북한에 대한 흡수통일 정책을 포기한다는 건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다. 한미동맹 역시 안보를 위해 반드시 필요하므로, 예컨대 한러관계를 아무리 우호적으로 끌어올리더라도 미국과의 관계를 희생하는 외교는 결코 하지 않는다. 반면 일본과의 관계는 북한이 도발하고 중국을 견제할 필요가 있을 때는 좋아졌다가, 한중관계가 개선되고 남북이 화해무드를 이루면 나빠지고, 다시 미국한테 뭔가 양보를 얻어내야 할 때는 좋아지는 식으로 계속 상황에 따라서 바뀌며 전개된다.

즉, 한국의 입장에서 대일관계는 타국과의 최우선순위 외교 목표들을 이루기 위한 일종의 외교적 카드로서 활용되는 것이지, 그 자체가 최우선순위 외교 대상은 아니라는 것이다. 역사 속 한반도 국가들도 중원이나 만주의 대륙세력과는 끊임없이 전쟁과 교류, 침략과 복속을 주고받으며 직접적인 관계를 맺어온 반면, 일본과는 몇 차례의 전란기를 제외하면 적당히 줄 거 주고 받을 거 받으면서 데면데면하게 지냈던 편으로, 이는 한일관계의 특수성을 떠나 반도국가와 열도국가로서의 지정학적 특성이라 할 만하다.[86]

8.1. 긍정적 전망

오늘날 한국일본아시아에서 단 둘[87]뿐인 대형 선진국이며, 서방세계의 일원으로서 정치, 경제, 문화를 비롯한 모든 면에서 밀접하게 교류하고 있다.

반면 중국공산당 일당독재·권위주의·국가자본주의·중화 패권주의를 내세우며 인권·민주주의·자유주의·시장경제·다자주의로 대표되는 서방세계의 가치들에 정면 도전하고 있고, 북한은 급작스런 공산권의 붕괴가 불러온 안보위기와 날이 갈수록 더해지는 내부 불만을 잠재우고자 핵무기를 개발하는 등 위협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다. 중국북한이 비록 알려진 것처럼 혈맹관계는 아닐지라도 같은 편에 서 있음을 부정하기는 어렵고,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면 경제적으로 포화된데다 체급의 한계가 명확한 한일 어느 쪽도 반서방진영의 점증하는 위협을 단독으로 관리할 역량이 없다. 따라서 현재의 신냉전 구도가 지속된다면 시간이 지남에 따라 한일관계는 자연스럽게 개선될 것이며, 장기적으로는 군사동맹이나 그에 준하는 동맹관계로 발전할 가능성이 높다고 볼 수 있다. '민주주의 국가 간에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민주평화론 역시 이런 관점을 뒷받침하는 근거이다.

오늘날 한일관계의 부정적인 인식 대다수를 차지하는 일제강점기 문제는 이를 직접 겪었거나 윗세대를 통해 직접 전해들은 세대가 사망하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결국 조금씩 옅어져 갈 가능성이 높다.[88] 또한 현대 한국의 경제·외교적 영향력은 더 이상 국제적으로도 무시하기 어려운 수준이며, 군수산업 능력 역시 조선 시대나 구한말처럼 약하기는 커녕 세계 10위권의 무기 수출국으로 올라선 지 오래다. 즉, 우리가 과거와 같이 방어자의 입장을 견지하는 한 한국을 직접적으로 침공할 역량이 없으며, 결정적으로 과거와는 달리 오늘날의 양국은 같은 진영에 속해 있기에 그럴 명분조차도 존재하지 않는다.[89] 반면 한일 양국의 적국 혹은 가상적국이자 적개심을 가감없이 드러내는 북한과 중국의 위협을 관리하는 것은 현실적인 과제이다. 수백년 넘게 싸워댄 영국프랑스조차도 독일의 위협 앞에 손을 잡을 수밖에 없었듯 역사적인 은원은 현실의 총칼 앞에서 무력화될 수밖에 없다.

다행스럽게도 과거사 문제를 제외한다면[90], 한일관계의 현안들은 역내 다른 대국관계에 비해 덜 심각한 편이다. 예컨대 독도 영유권 문제는 양국의 국민감정 때문에 쉽사리 건드리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메탄 하이드레이트같은 독도 해저의 천연자원 이권과 관련된 문제들이 있다고는 하나, 이건 해저 밑이면 넘쳐나는 관계로 어디까지나 있으면 좋다는 거지 굳이 한일관계를 파탄내는 것까지 감수하면서 해결해야 할 정도로 절실하다고 보긴 어려우며 국가감정과 별개로 경제학적 채산성이 정말 높은지에 대해서는 말이 많다. 정 공동개발이 필요하다면 역으로 일본 측이 협상 우위를 가진 7광구 채굴권과 연계한다거나 하는 식으로 얼마든지 타협할 수 있기도 하고. 실제로 일본은 독도 문제에 대해 "공인하지도 부정하지도 않는다"는 한일기본조약 당시의 암묵적 입장을 상당 기간 유지해왔다.

다른 중요한 현안인 일본의 재무장을 둘러싼 논쟁도 마찬가지이다. 기실 서독나치의 잔재를 아직 완전히 벗어던지지 못한 1950년대에 이미 독일연방군을 창설하고 정상국가화를 이루었던 것을 생각하면, 일본의 재무장은 그 자체로 막을 명분이 뚜렷하지는 않다. 게다가 국제정치학에서 현실주의 이론의 대전제 중 하나는 "모든 국가는 자국의 의지를 관철한 군사력을 보유할 수 있으며 보유한다."는 것이고, 실제로 이를 강제적으로 억눌렀을 때의 부작용은 베르사유 조약에서 이미 드러났다. 게다가 한국으로서도 유사시 조선인민군은 어찌저찌 막는다 쳐도 인민해방군과 싸우기 위해서는 현실적으로 자위대의 도움을 받지 않을 수 없으며, "한국은(=한미동맹 단독으로는) 중국을 막기 어려우며" "재무장을 한 일본은 중국에 맞서 더 큰 도움이 되는" 이상 우리에게도 마냥 부정적인 일이라고만 보기는 다소 어렵다. 현재처럼 한일관계가 극한으로 나빠진 상황에선 힘들겠지만, 지금처럼 중국의 위협이 가속화되면서 한국이 일본의 입장을 이해하고 일본도 한국의 안보 불안을 해소시킬 대안을 제시한다면[91] 협상이 불가능한 일은 아닌 것이다.

그 외의 자잘한 분쟁들도 마찬가지이다. 2019년 한 해 이슈로 떠올랐던 일본의 대한국 경제보복 역시 명분이야 어쨌든 본질적으로는 강제징용, 즉 과거사(일제강점기, 일본의 전쟁범죄) 문제와 얽혀 있는 사안으로, 일본이 딱히 이득을 보는 것도 없이 제 살 깎아먹기를 하면서 한국을 때린 치킨게임 상황인지라 과거사 갈등이 해결되면 어떤 식으로든 간단히 풀릴 가능성이 높다. 후쿠시마 수산물에 관한 논란 역시 처음부터 일본 측의 논리에 헛점이 많은 상황이었던지라, 한국이 WTO에서 승소한 뒤로는 다소 반발은 했어도 별다른 잡음 없이 유지되어오고 있다.

반면 한국 내에서 북한이나 중국의 군비 확충은 찬반여부를 떠나 "당연히 그럴 줄 알았다"는 식으로 받아들여지며, 항의하고 비난은 할지언정 한일관계에서 일본의 재무장처럼 지속적인 외교현안이 되지는 못하는 편이다. 기본적으로 한미동맹은 북한과 중국을 가상적국으로 상정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이 군대를 확충하는 것에 대해 우리가 씨알도 먹히지 않을 외교적 반발을 하느라 진을 빼느니 그냥 거기에 맞서 우리도 군사력을 증강하고 대비 태세를 갖추는 것이 훨씬 경제적임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영토분쟁의 대상 역시 일본과는 독도라는 섬 하나, 중국과는 서해 해상수역(과 산 하나)에 불과하지만, 북한과는 전 국토를 두고 분쟁을 하고 있는 상황이다. 게다가 북일관계에서 현재진행형인 납치 문제같은 걸 생각하면 한일관계의 현안들은 사실 비교적 "사소하다"고까지 말할 수도 있다. 아무리 한일관계가 악화되어 막장이 되어도 일본이 한국을 겨냥해서 미사일을 발사해 민간인들에게 피해를 입히거나, 한국 정부가 일본인을 납치해 생사도 알려주지 않고 돌려보내지도 않는다거나 하는 상식 외의 일들은 최소한 벌어지지 않는다. 역설적이지만 그렇기에 일본이 최근 수출규제라는 예상치 못한 강경책을 꺼내들자 한국 내부에서 반발심리가 격화되었던 것이기도 하고.

장기적으로 볼 때, 외교란 본질적으로 과거의 진실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의 국익을 취하는 것이다. 예컨대 문재인 정부에서 6.25 전쟁이나 북한의 대남 도발 대신 김정은의 인간적인 모습들을 부각시키는 반면 한일관계에서는 위안부 문제를 비롯하여 과거사를 끊임없이 들추는 것도, 결국 문재인 정부가 남북한관계를 개선하고 일본을 압박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대북외교에서 국민을 설득하기 가장 좋은 이미지와 대일외교에서 일본을 압박하기 가장 좋은 명분을 찾아 도구로 삼은 것에 불과하다. 이와 반대로 박근혜 정부북한의 비인간적인 면모를 부각시키는 한편 한일 군사정보포괄보호협정이나 위안부 문제에서 지나치게 양보한다는 비판을 받아가면서까지 합의를 추진했던 것도, 박근혜 정부의 관점에서는 우리를 배신한 중국북한을 견제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일본에 접근해야 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요는 만일 과거의 진실보다 더 시급한 현재의 문제가 닥친다면 그에 걸맞은 명분을 찾고 그 후 그에 걸맞은 상대에게 적용하는 것이 곧 외교이며, 현재의 신냉전 구도 하에서 중국의 성장이 지속됨에 따라 패권의식과 내정간섭이 심해지고 북한분할안 같은 극단적인 안보 위기가 정말로 현실화된다면 국민적인 여론이란 자발적인 인식변화에 의해서든 통제와 검열에 의해서든 쉽게 뒤바뀔 수 있다는 것이다.[92]

과거사 문제는 한국이 일본을, 그리고 일본의 관점에서는 일본이 한국을 적대할 만한 충분한 사유이기는 하나, 한일 양국이 공동의 위기에 놓였을 때까지도 양보 없이 서로에게 칼을 겨누게 만들 정도의 일은 결코 아니라고 볼수있다. 그리고 그 외의 사안들이 당장은 실현 불가능할지라도 대부분 양국이 어느 정도 만족할 수 있는 출구전략이 존재하는 만큼, 한일관계는 장기적으로 우호적인 방향으로 나아가리라는 예측이 어느 정도 가능하다.

8.2. 부정적 전망

일본은 지속적으로 한국의 영토인 독도의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일본의 도발은 한국이 일본을 신뢰하지 못하게 만든다. 독도는 그 배경이 어찌되었든 한국이 수십년 간 실효지배 중이며, 이성적으로 판단했을 때 일본의 영유권 주장은 합리적인 근거가 부재하다. 일본의 영유권 주장은 지나치게 현실을 무시하고 정치적 자존심을 앞세운 감정적인 몽니라고 할 수 있다.

일본 정부의 행위는 한국 여론이 일본을 불신하게 만들고 있다. 민주주의 국가 간에는 전쟁이 일어나기도 쉽지 않지만, 동시에 민족주의적인 민주주의 국가들에서 여론은 무시하기 어려운 파급력을 지니기도 한다. 유럽의 실례를 보면, 연합국은 나치즘이 여전히 독일 정계를 위협하던 50년대에 서독의 재무장을 용인했으며, 로베르 슈망 등 당대의 지식인들은 베르사유 조약의 실패를 교훈삼아 독일에 과도한 전쟁 배상금을 요구하거나 영토를 빼앗는 대신 EEC의 형태로 서로의 경제적 약점을 해소할 수 있는 동조화(커플링)을 추진하였다. 반대로 독일 역시 폴란드의 그단스크(구 단치히)나 프랑스의 알자스-로렌(구 엘자스-로트링겐), 러시아의 칼리닌그라드(구 쾨니히스베르크) 등 실지에 대한 영유권 주장을 영구적으로 포기하면서까지 과거의 적성국에게 신뢰를 주려 노력했다. 그럼으로써 오늘날 영프독 3국은 사소한 갈등이 있을지언정 유럽 공동체라는 끈끈한 관계를 형성하는 데 성공했으며, 독일은 추축국의 멍에를 넘어 실질적인 유럽 연합의 리더 역할을 맡고 있다. 한일 양국의 문제는, 서로가 양보하면 더 큰 이득을 볼 수 있는데도, 상대를 지나치게 불신하며 눈앞의 이해관계에 집착하여 한 발도 물러서지 않고 뻐팅긴다는 것이다.] 도움이 될지라도, 과거사 문제로 인해 양국 간 국민감정이 돌이킬 수 없이 악화되면 이성적인 판단을 해야 할 다른 부분에서까지 감정적으로 충돌하며 더 큰 재앙을 초래할 수 있는 것이다. 당장 아베 신조가 자국 중견기업들의 공급망을 희생시키면서까지 한국에 경제 보복의 칼날을 들이민 것이나 코로나 시국에서 지극히 상식적인 방역 협력조차 한국에서는 "주지 말자", 일본에서는 "받지 말자"는 식으로 국민적 반감을 사고 있는 것이 그 실례이다.

이처럼 갈등의 골이 깊어질수록 인기없는 국익을 운운하기보다 화끈한 강경책으로 자신의 지지율을 높이려는 정치꾼들이 득세하기 좋은 환경이 된다. 국내 정계에서 지일파로 통하던 사람들도 한 번 말 잘못했다간 친일파로 몰릴까봐 의견을 표출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고, 일본 자민당 내에서도 지한파는 자국민들에게 자이니치 소리나 들으며 배척당하고 있다. 안와르 사다트 이집트 전 대통령이나 이츠하크 라빈이스라엘 전 총리의 비극적인 사례가 시사하듯, 이런 분위기에서는 지도자가 설사 이성적으로 판단하여 타협점을 찾아내더라도 정치적인 문제로 밀어붙이지 못하고 결렬될 가능성이 높다.[93] 실제로 한일 양국에서 민족주의 정서에 편승했던 문재인 정부와 아베 신조 정부를 거치면서 양국에 혐한·혐일 감정이 팽배해졌고, 이러한 상호 불신은 대일관계에 전향적인 태도를 보이는 윤석열 정부와 역시 온건파라는 평가를 받는 기시다 후미오 정부가 등장한 2022년 현 시점까지도 여전히 해소되지 못한 채 양국 관계개선의 걸림돌이 되고 있는 실정이다.

한일관계에 변회를 줄만한 나라는 미국중국인데, 두 나라의 상황을 보면 한일관계의 개선이 필요 없는 상황이다. 우선 미국의 경우, 미국은 한국과 일본이 협력하길 바라긴 하지만, 그 이상의 관계 개선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중국을 견제할 정도면 충분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중국의 경우, 한국과 일본 모두 중국과의 관계를 중시하므로 중국과 대립한다는 상황 자체가 만들어지기 힘들다. 한국과 일본 모두 경제를 중국에 상당 부분 의존하고 있으므로, 대립구도를 만들길 꺼린다.

게다가, 앞서 언급한 '궁극적 동맹' 시나리오는 어디까지나 신냉전 구도가 현재처럼 지속되어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붙는다. 한국일본 모두 중국의 지역 패권 장악 시도에 대응할 방도가 한일관계 강화 이외에도 없지 않고, 20세기 중반에 비해 국제정세가 많이 달라진 이상 한미일 대 북중러의 신냉전 구도가 반드시 고착화되리라는 법도 없다는 것이다.

8.2.1. 한국의 대안 전략과 한계

먼저 한국의 경우 북한 문제가 있다. 지정학적인 관점에서 북한과 중국이 약화되면 약화될수록 무조건 좋은 일본의 입장과는 달리, 한국은 북한을 견제하면서도 일정 부분 끌어안고 가야 하는 복잡한 처지에 놓여 있는데다 통일 문제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중국과의 관계 역시 정도 이상으로 포기하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극단적인 예로 일본 입장에서는 "한반도 교두보의 일부를 되찾는 대신 북중의 강대국화를 허용한다"와 "한국을 반중동맹에 완전히 끌어들이고 자국이 그 주도권을 장악한다"는 두 선택지가 주어진다면 후자가 더 국익에 부합한다. 열도국가의 최우선 목표는 대륙에서의 단일 패권을 견제하며 역내에서 자국이 경제적으로 쌓아올렸던 영향력을 유지하는 것이며, 일본의 예에서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 확대는 궁극적으로 이를 이루기 위한 수단일 뿐이기 때문이다.[94] 반면 한국은 "대미, 대일관계의 부분적 등가교환을 대가로 한 북한과의 통일"과 "반북-반중 선봉에 서는 대가로 얻는 신뢰할 만한 한일동맹 체결" 사이에서 골라야 한다면 전자가 더 우선순위에 놓여 있다. 반도국가의 최우선 목표는 통일을 통한 대륙으로의 경제적인 (그리고 어쩌면 먼 미래에는 군사적이 될지도 모르는) 진출 가능성이며, 한국의 예에서 일본은 근본적으로 이를 이루기 위한 유용한 도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중국의 도전에 맞서 지난 한 세기 동안 역내에서 누려온 지위를 부분적으로라도 유지하려 드는 일본과는 달리, 한국은 현실적으로 생존에 더 방점이 찍힐 수밖에 없는 처지이므로 오히려 중국의 신흥 패권에 어느 정도 전향적으로 협력할 여지가 남아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친중 정책을 펼치고 문재인 대통령이 중국몽에 동참하니 어쩌니하는 발언을 했던 것도 부분적으로는 이런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다. 비록 한국과 일본 모두 미국의 영향력 아래 있지만, 일본은 엄연히 인구 1억에 세계 4위의 경제력을 지닌 강대국으로서 미국 중심의 질서를 인정하되 부분적으로 역내 패권을 추구하는 전략을 펼치고 있으며, 실제로 일본이 동남아와 중동, 유럽 등지에서 중국과 외교전을 벌이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보아야 한다. 반면 우리는 현재로서는 수출에 의존하는 국가이기 때문에 통일되기 전까지는 중국과 일본이라는 두 국가의 틈바구니에서 독자적으로 역내 질서를 선도할 만한 역량이 없으며, 통일된다 치더라도 중국 대륙이 분열되지 않는 한 기껏해야 중립국화 정도나 시도할 수 있을 뿐이다. 즉, 한국의 입장에서는 민주화되고 선진화된 중국으로부터 오늘날 캐나다 정도의 위치만 보장받을 수 있다면 갈아타기도 고려해 볼 만하지만, 일본의 입장에서 중일관계미국러시아의 관계처럼 양국의 체제나 국민감정과 상관없이 지정학적인 관점에서 전략적 동반자 이상으로 나아가기란 어려운 상대라는 것이다.

무엇보다 신냉전 구도 하에서 한미일 동맹이 현실화되면 결국 최전선은 일본이 아닌 한국이다. 이미 냉전 질서로 인해 6.25 전쟁을 겪은데다 오늘날에도 징병제를 비롯해 상당한 사회적 비용을 감내하고 있는 우리 입장에서는, 다른 선택지가 있다면 굳이 일본과의 친교에 안달할 이유가 없다.

예컨대 북한을 어떻게든 개방시켜서 서방진영으로 끌여들여 우리가 제어할 수 있는 완충지대를 만들고, 장기적으로는 중국에 맞선 남북미일 동맹을 형성하는 방안을 생각해볼 수 있다.[95] 이렇게 된다면 겉으로는 한미일 삼각동맹과 별 다를 바 없어 보일지 모르나, 같은 한민족이자 한반도 국가로서 부분적으로 이해관계를 공유하는 북한을 동맹 내에 끌어들임으로서 우리의 발언권이 커짐은 물론, 중국과 직접적으로 국경을 맞닿아야 하는 부담 역시 덜어낼 수 있다. 말하자면 동구권의 붕괴 이후 NATOEU가 취한 동진 전략과 유사하다.

반대로 중국민주화와 선진국화가 이루어진다면 중국과의 관계개선을 추구할 수 있다. 이 경우에도 미국이 완전히 쇠락하지 않는 한 한미관계는 유지되어야겠지만, 만일 한쪽의 편에 서되 다른 쪽과도 사이가 나쁘지 않은 형태의 중립 외교를 유지할 수 있다면 한일관계는 파국으로 치닫더라도 별 신경쓸 필요가 없는 상황이 될 것이다. 상황은 좀 다르지만, 인도가 중국을 견제하면서 미국, 러시아와 모두 친밀하게 지내고, 러시아가 중국의 우호국가이지만 중인관계에서 일방적으로 한쪽 편을 들기보다는 오히려 중국 견제에 인도를 이용하는 것을 생각하면 된다. 여기서 인도, 중국, 미국, 러시아를 각각 한국, 일본, 중국, 미국으로 치환하면 된다.

과거 문재인 정부가 한일관계를 희생하되 한미관계를 관리하면서 남북관계한중관계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이러한 대안외교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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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한국이 대일관계의 대안으로 고려하는 대북 접근 전략과 대중 접근 전략 모두 현재로서는 명확한 한계가 존재한다.

먼저 북한의 경우, 수령 절대주의 체제 아래에서 막강한 권력을 누리고 있는 지도부가 굳이 자신들의 권력 기반을 위협할지도 모르는 개방에 응할 동기가 부족하다. 대한민국의 민주화 운동 역사에서도 드러나다시피, 외부의 자유로운 문물을 접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지식인들이 늘어나면 억압적인 체제에 대한 도전 역시 필연적으로 증가하게 마련이다. 게다가 북한의 현 실태를 감안하면, 설령 김정은이 의지를 갖고 개방을 밀어붙이더라도 중국처럼 인민들에게 체제에 대한 불만을 잠재울 초강대국으로서의 자부심을 주지도, 한국처럼 불만을 뛰어넘을 폭발적인 성장을 제공하지도 못할 가능성이 높다. 아무리 한국과 중국이 돕는다지만, 끝없는 글로벌 경기침체 속에서 오랜 폐쇄정책으로 기본적인 인재풀조차 부족한 북한이 마약에 시달리는 국민들을 데리고 베트남 수준까지라도 끌어올릴 수 있다면 다행일 것이다. 덧붙여 경제적으로는 여전히 가난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상황에서, 사회적으로는 운신의 폭이 더 넓어지면서 김씨 일가가 저질러온 패악질의 증거들을 직접 목격하게 된다면, 과연 북한 주민들이 가만히 있을까? 반대로 김정은이 그런 상황을 감내하고 개방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그런 관점에서, 우파 일각의 지적처럼 한국의 대북 접근은 북미일 동맹이니 일본의 대안이니 하는 원대한 구상과는 달리 김정은의 호주머니로 들어가며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로 끝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게다가 북한이 설사 주민들의 불만을 잠재우고 성공적으로 개방한다 해도, "국제사회의 정상국가로 복귀하고 경제도 어느 정도 성장한 북한이 과연 한국의 의도대로 움직여 줄 것인가?"는 전혀 다른 문제이다. 북한의 지도부가 한국의 전략에 호응하여 남북미일 동맹 구상에 가담하려 든다면 과연 중국은 가만히 있을까? 이 동맹이 누가 봐도 중국을 겨냥하는 게 분명한 이상, 중국의 선택은 국경이 인접한데다 (아마도) 남북미일 중 가장 약한 고리일 북한에 무력을 행사해 정권을 교체하는 것이 될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사이가 험악해졌을 한일과 그걸 중재하기 바쁠 미국은, 아직 진의를 확신할 만큼 충분한 신뢰가 쌓이지 않은 북한을 제대로 지원해주기 힘들 것이다.

여기서 북한에게는 다른 선택지가 있다. 역사적인 이유로 나쁘지 않은 사이인 중국을 등에 업고, 발전된 국력과 정상국가화된 자국의 지위를 이용해 납북 일본인 문제 등을 해결해 주는 조건으로 독자적인 북일관계 개선을 추구하며 한국을 고립시키는 것이다. 일본으로서는 한국이 자국 대신 북한을 택함으로써 발생하는 안보 불안을 해소할 수 있고, 북한으로서는 중국의 안전망을 벗어나지 않으면서 잘만 하면 적화통일의 꿈을 이룰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니 성사 가능성이 결코 낮지는 않을 것이다. 게다가 북한은 민주국가가 아니기에 (과거 박정희가 그랬듯) 국익에 부합한다면 과거사쯤은 얼마든지 덮을 수 있다고 생각할 것이고, 북일관계의 현안 대부분은 북한의 공격적인 외교에 기인하므로 정상국가화된 북한으로서는 충분히 양보할 수 있을 가능성이 높다. 한국으로서는 현재의 답답한 신냉전 구도보다도 더 최악의 상황에 직면하는 셈이다.

그렇다면 중국의 경우는 어떨까? 우선 서구 학계에서는 천안문 사태 이후 중국의 경제성장과 생활수준 향상이 자연스럽게 민주화를 유도하리라는 희망적 가능성에 이미 회의적으로 돌아선지 오래다. 중국인들이 공산당 일당독재의 종식을 진심으로 지지한다 해도 넘어야 할 산이 많은 판국인데, 아직까지 중국인들의 대다수는 대국굴기를 이루어내 중국을 G2로 부상시킨 현 체제에 순종적인 모습을 보인다. 게다가 시진핑 주석 시대에 들어서는 중국 특유의 권력견제장치인 집단지도체제조차 위협받으며 마오쩌둥 시대로 퇴보하는 게 아니냐는 지적까지 나오는 처지다. 즉, '민주화되고 선진화된 중국'과 협력한다는 선택지는 당장 지금 이 순간에도 표류하고 있는 한일관계의 대안으로 삼기에는 너무나 먼 미래의 이야기이다.

게다가 중국이 선진국화되고 민주화되었다 하더라도 미국이 주도하는 서방 세력에 편입될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현재 중국의 팽창과 미국 견제 심리는 사회주의 이념에 기반한 이념적 반미라기보다는, 과거 조상들이 누렸던 초강대국의 지위를 회복하려는 움직임에 가깝다. 비슷한 예시로 소련 해체 이후 부분적으로나마 이념적인 색채를 청산하고 민주화가 이루어졌지만, 그럼에도 반미 감정 및 미국에 대한 라이벌 의식은 전혀 식지 않은 러시아를 들 수 있다. 사실 "구 패권국과 신 패권국 간 힘겨루기란 반드시 충돌로 이어진다"는 현실주의 이론은 민주주의에 대한 어떠한 고려도 담고 있지 않으며, 그나마 문화적 동질성을 공유한다는 대영제국미합중국 간 헤게모니 전이조차도 알려진 것과는 달리 세계대전 직전까지 서로를 상정한 작전 계획까지 세워놓을 만큼 불신 속에서 이루어졌다. 뿐만 아니라 제2차 세계 대전 도중 일본 제국에 맞서 싸운 연합국이던 미국중화민국 역시 전쟁 전략과 전후 처리를 두고 몇 차례 충돌한 바 있으며, 만약 국부천대가 없었다면 심각한 갈등으로 비화될 소지도 있었다. 이러한 일련의 사례들을 감안하면, 중국이 민주화되고 선진화되더라도 미국과 대립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물론 해당 시점에서 미중관계가 어떻든 한국의 입장에서는 민주화되지 않은 현재의 중국보다는 더 안정적인 외교를 할 가능성이 커지기야 하겠으나, 중국에 접근하는 만큼 미국과 멀어져야 한다는 근본적인 딜레마는 해결하기 힘들 것이고 결국 그 차분은 일본이나 북한 같은 주변국과의 관계로 메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8.2.2. 일본의 대안 전략과 한계

일본 입장에서는 '"믿지 못할 동맹'에 집착하느니 아예 한반도를 포기하고 미일관계를 확고히 하며 스스로 신냉전의 선봉에 서는 비용을 감내한다"는 선택지가 있다.

일본은 지난 하반세기 내내 한국과의 관계 개선에 나름대로 의욕을 보여온 바 있으나 한일관계는 여전히 답보 상태이다. 일본 정계에서는 그 책임을 박정희 대통령과 박근혜 대통령으로 이어지는 위안부 합의에도 불구하고 한국 국내의 정권교체를 이유로 이를 부정하거나 비판하는 말바꾸기, 그리고 이명박 전 대통령이나 문희상 의원의 천황 사죄요구 발언같은 무의미한 도발 등에 돌리는 편이며, 이런 사건들이 연이어 발생하면서 한국과의 직접적인 우호 관계는 어렵다는 입장이 점점 힘을 받고 있다.

사실 우리는 피해자의 논리에 입각하여 일본이 잘못했으니 당연히 사과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일본은 일단 잘못은 잘못인데 구체적인 청산은 어디까지나 도덕률이 아닌 외교논리 안에서 처리해야 한다는 쪽이다. 그러니까 한국 입장에서는 '당해보지 않은' 일본이 뻔뻔하게 오리발 내민다고 불평하지만, 일본 입장에서는 아무튼 현 시점에서 서로 국익을 두고 셈을 해보면 '좀 양보할 수 있을 만한' 문제들까지도 과거사를 이유로 양보를 안 하는 한국이 이해가 안 되는 것이다. 사실 이건 누가 옳고 그름을 따지기 전에 양국의 경험적 가치관에 따른 차이에 가깝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후 서구적 외교, 즉 "국익을 최우선에 두고 다른 모든 명분은 이를 합리화하기 위한 도구로 이용하는" 외교로 20세기 전반기에 막대한 성공을 거둔 역사적 경험이 있다. 반면 한국은 조선시대 500년을 지배해온 성리학적 관념의 영향으로 눈앞의 이익보다는 옳고 그름과 명분을 최우선에 두는 경향이 있다.[96]

예컨대 비스마르크가 엠스 전보를 조작해서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을 일으키고 승리했던 걸 두고, 누군가는 "독일 제국의 통일이라는 민족의 염원을 위해서 기민한 전략을 취한 국제 외교가의 영웅"이라 평할 것이고, 누군가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하지도 않은 말을 명분삼아 전쟁을 일으키다니 못 봐줄 전범이다"고 평할 것이다. 정답은 없지만, 전자는 일본의 스탠스에 가깝고, 후자는 한국의 스탠스에 가깝다. 오늘날 국제외교의 근간이 되는 유럽사를 살펴보면 이러한 기만과 배신의 역사가 수도 없이 많으며, 아편전쟁처럼 정말 우리가 봐도 이건 아니다 싶은 수준의 전쟁이 아닌 다음에야 "당하는 사람이 바보" 정도의 입장을 견지해 왔다. 반면 조선 사대부들은 임진왜란의 구원을 명분삼아 구한말까지도 명나라 마지막 황제인 영력제에게 제사를 지내곤 했다. 이런 인식의 차이구한말 조선의 파멸과 일본의 도약을 불러왔지만, 동시에 일본의 전쟁 범죄와 오늘날까지도 지속되는 피해자 행세를 유발하기도 했으며, 또한 전 세계가 과거사를 청산하고 나아가는 와중에 유독 한일이 과거사 문제로 마지막까지 대립할 수밖에 없는 근본적인 원인이기도 하다.

물론 이러나저러나 일본 입장에서 한국은 지정학적으로 대륙 세력으로부터 일본을 보호해 주기 딱 좋은 위치에 있고, 문화적 동질성도 짙은데다 경제·군사적으로도 무시할 수 없는 국력을 갖춘 최적의 동맹 파트너이기는 하다. 그러나 단순히 반중동맹 파트너만을 놓고 보자면 호주인도, 동남아시아 국가들 같은 대안이 없는 것도 아니고, 이들의 국력이 한국보다 특별히 부족하지도 않으며, 일본은 한국과는 달리 막강한 경제력과 문화력을 바탕으로 잠재적 파트너들과의 우호관계를 구축해 둔 상황이기도 하다. 즉, 일본은 주요 현안들에서 굳이 양보하면서 애써 못 믿을 동맹에 들러붙기보다 한국이 대륙 세력에 접근하는 것을 내버려두되 한미관계를 흔들면서 미일관계에서 상대적인 이익을 얻고, 한국이 열도를 직접적으로 겨냥하지 않도록 최소한의 관리만 하면서 실질적으로는 직접적인 역내 이해관계의 충돌이 없는 외부의 중견 강소국들과 연대하겠다는 것이다.

게다가 일본이 한국 대신 신냉전의 최전방에 서게 된다는 것은 곧 일본이 직접적인 안보 위협을 받는다는 의미로, 보통의 일본인들에게는 불편한 일이겠으나 일본 정치를 장악한 우파들로서는 필생의 숙원인 보통국가화를 이루어낼 최고의 명분이기도 하다. 실제로 최근 일본의 언론 보도 등에서 한미동맹을 음해하려는 시도가 종종 포착된 바 있으며, 아베 신조 정부는 북한중국에 더해 한국에도 은근히 '못 믿을 국가'의 이미지를 씌우면서 '조국 일본이 주변국들로부터 위협을 받으니 하루 빨리 스스로를 보호할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는 논리를 바탕으로 재무장, 평화헌법 폐기, 보통국가화의 단계를 착착 밟아나갔다.

만약 한국이 대일관계를 경시하고 대미관계마저 일부 희생하면서 대륙세력에 접근했는데 정작 중국이나 북한이 예상했던 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면, 혼자서 독고다이가 불가능한 한국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이 기존보다 저자세로 미국과 일본에 다시 손을 벌릴 수밖에 없다. 게다가 한국은 민주국가이기 때문에 국내정치에서의 반대 세력이 이러한 외교적 실패를 가만히 보고 있을 리도 없다. 이 부분에서는 아베의 계산법이 정확하게 먹혔던 것이 전승절 참석으로 한창 중국과 밀월관계를 가지다가 사드 배치 논란으로 뒤통수를 맞고 일본에 많은 양보를 할 수밖에 없었던 박근혜 전 대통령의 케이스가 있고, 문재인 전 대통령 역시 남북정상회담북미정상회담이 궁극적인 실패로 판명된다면 파멸적인 역풍을 받으며 다음 정권은 전통적인 관계로 회귀할 수밖에 없다.[97]

2019년 일본은 중국의 직접적인 위협을 줄이고 한국의 미일동맹에 대한 외교적 의존도를 높이기 위해 아베 총리가 직접 중국 TV에 나와서 신년 인사를 중국어로 발표하고 정상회담은 물론 실무자급 회담을 급격히 늘리는 등 중일관계 개선을 시도했다. 한일관계 개선이 아닌 대안외교 쪽으로 선회를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일본의 이러한 전략적 의도를 장기적으로 방어하지도 설득하지도 못한 채 외교적 실패를 거듭한다면 한반도 문제에 중국과 일본이 직접적으로 개입하여 우리의 운명을 결정지어버리는 역사의 비극이 반복될 가능성도 있을 것이다.[98]

이에 대해서는 한국의 국력이 과거보다 충분히 강해져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견해도 있는데, 현재 한국이 경제·군사적으로 자기 방어가 가능하다는 건 어디까지나 북한, 일본, 그리고 한미동맹 유지를 전제로 중국과 일대일로 맞붙었을 때의 이야기이다. 만일 한미관계가 소원해진 상태에서 중국과 일본이 모종의 형태로 작당한다면 한국으로서는 예나 지금이나 이를 막을 능력이 없다는 것이 문제이다.[99]
일본의 외교 방식이 꼭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일본이 자국의 입장만 고집하며 한국을 국제사회의 비이성적인 플레이어로 몰아가는 것은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는 기본 진리를 망각한 태도이다. 모든 교류가 그렇지만 외교 역시 서로를 이해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가난하고 낙후된 채 동맹 없이 고립된 북한의 안보 불안을 이해하지 못하면서 파탄국가라고 으름장 놓는 것만으로 북핵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것이 자기 기만에 불과하듯, 민주국가인 한국을 상대하면서 한국인들의 가치관을 이해하지 못한 채 겉으로 드러나는 떡만 몇 개 던져주고 무조건 과거를 덮으라고 강요하는 것 역시 일본의 외교적 오판에 불과하다. 과거사가 국민정서에 직결된 만큼 도덕률을 떠나 해결하려는 행보는 오히려 한일관계에 있어서 개선의 지름길을 차단하는, 일본 스타일로 말하자면 "비합리적인" 실책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냉전의 영향으로 서독폴란드 간 과거사 갈등이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던 상황에서, 빌리 브란트는 돈이니 조약이니 하는 것들 대신 폴란드에서의 무릎꿇기 한 번으로 여론을 반전시켰다. 오늘날 폴란드는 NATO의 가장 충실한 전위대가 되었고, 프랑스 정도를 제외하면 나토의 대러시아 방위를 책임지는 국가이다. 물론 동유럽은 러시아와 인접한 이상 군축이 어차피 불가능[100]한 처지라, 경제적으로 서유럽을 따라잡기 전까지는 독일을 위시한 서유럽의 경제강국들이 안보에 더 투자해줬으면 하는 속내가 있긴 하다.[101] 또한 노르드스트림 문제[102] 및 민주주의 문제[103]에서 서유럽과 갈등을 빚고 있는 것도 사실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쨌거나 폴란드나 다른 동유럽 국가들은 독일의 "더 적극적인 목소리"와 "러시아에 맞선 안보 기여"를 견제하기보다는 오히려 요구하고 있다.

사실 한국인이 한국의 국익을 좇기는 하지만, 극단적인 국수주의자들을 제외하면 일본이 한국에게 모든 것을 양보하지 않는다고 비판하지는 않으며 일본 또한 자국의 국익을 좇을 권리가 있다는 정도는 인정한다. 폴란드가 독일과 경제나 무역에서 대립한다고 독일을 적성국 취급하지는 않는 것처럼, 한국인들의 불신도 삼성이 일본 기업들과 경쟁한다는 이유나 대일적자가 크다는 이유 따위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일본이 협상 대상인 것과 그렇지 않은 것들을 구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독일은 전후 꾸준히 나치 청산을 위해 노력하는 한편, 동프로이센을 위시한 영토 문제에서도 이웃나라들을 자극하는 발언은 자제해 왔다. 이런 노력들이 인정받았기 때문에 주변국에서도 독일 통일과 유럽연합 내에서 독일의 패권을 큰 저항 없이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즉, 독일은 동유럽과 국익을 두고 서로 부딪힐 때는 부딪히더라도, 최소한 동유럽에게 과거와 같은 팽창주의적 행보로 안보 위협을 끼치지는 않으리라는 확신을 주는 데 성공했다. 반면 일본은 제국주의 침략을 끝까지 긍정하거나 모호한 태도로 일관하며, 단순한 국익의 충돌을 넘어 안보 측면에서의 불신을 자초하고 있다.[104]

물론 독일도 과거사 문제에서 모두 깔끔한 것은 아니고, 애초에 국제정치에서 도덕을 따지는 건 미련한 일이 맞긴 하다. 그러나 적어도 독일은 자국과 이해관계가 얽혔거나 손잡아야 할 국가들에게는 확실하게 양보를 했다. 냉정하게 말해 나미비아는 독일의 대러전선에 도움을 줄 수도 독일의 안보나 경제에 위협을 가할 능력도 없는 국가고, 그러니 과거사 반성도 지지부진할 수 있다. 그러나 최소한 폴란드이스라엘, 러시아는 적으로서든 동지로서든 영향력이 있는 국가이니, 독일도 매듭지을 건 지어야 미래를 도모할 수 있다는 실리적인 판단을 한 것이다.[105]

그렇다면 여기서 일본에게 한국이 정말 "불필요한" 국가인지를 따져봐야 하는데, "한국이 정말 일본이 무시할 만한 수준의 국력을 가진 국가인가?", "일본이 단독으로 중국의 부상이라는 지정학적 위협을 막을 수 있는가?", "일본 주변에 한국을 대신할 만한 위치의 파트너가 있는가?"의 세 가지 질문 모두 결국 답변은 No로 귀결된다는 것이 문제이다. 하다못해 한국이 가난한 후진국이던 5~70년대면 모를까 현 시점에서의 한국은 결코 일본이 무시할 만한 국가가 아니며, 그렇다고 적대 진영에 속한 국가도 아니다. 그렇다면 5~70년대에야 나몰라라 했더라도, 적어도 현 시점에서는 인식을 재고하는 것이 일본의 국익에도 진정 "합리적인" 판단이다.

객관적으로 일본은 문화대국이자 경제강국이며, 한국은 물론 일제에 피해를 입었던 다른 아시아 국가에서도 일본 문화를 즐기고 일본인과 교류하는 사람들이 많다. 일본의 체제 역시 일당우위제라는 한계는 있지만 어쨌든 자민당이 거둔 성과와 야당의 무능에 근거한 정당한 절차의 국민 투표로 이뤄지는 선진 민주주의로 인정받으며, 최소한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는 한국대만, 호주, 뉴질랜드 정도와 함께 민주주의의 모범이 될 수 있는 국가이다. 그리고 그러한 위치야말로 한미일과 북중러가 얽힌 동북아시아에서 일본이 원하는 그림에 가깝고, 또한 일본 입장에서도 가장 이익이 되는 구도이다. 그러한 관점에서 보면 일본은 독일처럼 민주국가들 간의 지역 동맹체를 통해 역내 질서를 주도하는 위치에 설 수 있는 잠재력이 있으나, 자국의 어리석은 판단으로 인해 스스로 그 기회를 걷어차고 있는 셈이다.

게다가 일본의 한반도 포기 및 대안외교 전략은 어디까지나 일본이 가진 '선택지'일 뿐이다. 일단 군사적인 면부터 살펴보자. 일본 열도와 한반도가 얼마나 가까운지를 상기해본다면, (미국을 제외하고) 저 멀리 떨어진 국가들과 친목을 다져본들 한국을 적대함으로써 발생하는 열도의 안보 불안을 해소하는 데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음을 금방 깨달을 수 있다. 호주나 인도, 대만은 저 멀리 떨어진 일본이 인접국과 벌이는 분쟁에 개입할 의지도 역량도 이유도 없으며, 그 대상이 중국이나 북한도 아니고 역시 같은 서방세계의 일원이자 선진국인 한국이라면 더더욱 그러하다.

설사 한국이 반일이 아닌 중립을 취한다 해도, 한국이 일본 열도의 방파제가 되어주지 못한다면 일본은 직접적으로 북한과 중국의 공세에 노출되는데, 과거의 일본이면 모를까 현재의 일본은 순수 외교전에서조차 중국에게 우위를 점한다고 장담하기 어렵다. 게다가 한국과 한미동맹이 단독으로 중국을 견제할 수 없듯 일본과 미일동맹 역시 마찬가지이다. 미일동맹의 해상전력이 강력하기는 하지만 육상전력은 그에 미치지 못하고, 과거 프랑스[106][107]이 영국을, 그리고 미국이 일본을 상대로 보여주었던 것처럼, 열도는 고립과 봉쇄에 취약하다. 그나마 영국은 식민지라도 있으니 버텼지, 산지인데다 식량자급률도 바닥인 일본으로서는 답이 없다.

이에 더하여 미국이 이런 꼴을 가만히 내버려둘 가능성도 적다. 한미일 삼각 공조는 21세기 미국의 동북아 전략에서 가장 중요한 기틀이다. 일본이 싫답시고 한국이 자청해서 미국과 일본을 걷어차고 중국에 붙는다면 모를까, 그런 상황도 아닌데 일본이 한국 싫답시고 한국을 중립 혹은 적이 되게 만들면 미국으로서는 동북아시아 최대의 주한미군 기지와 더불어 가장 강력한 육군 강국이자 산업지구를 상실하는 셈이다. 일본이 그 반대급부를 미국에게 제공할 수 있다면 모를까, 현재의 일본은 경제와 군사 양면에서 그럴 능력이 부족하다. 30년 전과 달리 지금 일본의 경제는 미국에 뭘 제공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고, 굳이 뭘 제공한다 치더라도 반도체 등 첨단 산업 분야가 활성화된 한국이 더 가망성이 있다.[108] 또 일본 육상자위대가 한국 육군 수준으로 재무장하는 건 이미 한 번 뒷통수를 맞은 전례가 있는 미국으로서도 꺼림칙한 선택지일 뿐이며, 일본 스스로도 징병제를 포함해 엄청난 사회적 비용을 감수해야 한다.

대신 일본이 북한이나 중국에 접근한다는 선택지도 있지만, 그건 바로 윗 단락에서 서술된 "북한과 중국이 자기네들 뜻대로 움직여 주리라는" 착각을 반복하는 꼴일 뿐이다. 당장 한일 갈등의 가장 큰 주범인 과거사 문제는 북한 및 중국과의 문제이기도 하며, 그나마 남북통일을 이루기 전에는 패권을 추구할 의도도 능력도 없는 한국과는 달리 중국은 이미 역내 주도권을 두고 일본과 경쟁하고 있는 사이이다. 게다가 일본은 대만, 티베트, 위구르 등 중국이 민감하게 여기는 소수민족 인권 문제와 관련해서 한국보다 적극적인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일본은 중국에 접근해봐야 믿을 수 없으니 이처럼 중국을 견제할 명분론적 레버리지를 버릴 의향은 없을 것이고, 역으로 중국도 이런 일본의 의도를 신뢰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게다가 중국 입장에서 '미일동맹에게 버림받은 한국'은 애매한 사안들에서는 중립을 지키며 중일관계 문제에서만 간간이 자국 편을 들어줘도 충분한 도움이 될 만큼 매력적인 파트너이고, 어차피 경쟁해야 할 일본보다는 당연히 이쪽을 택할 가능성이 높다. 미국의 반발도 문제다. 일본이 미국의 안전 보장과 경제적 파트너쉽 모두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역사적인 정책 선회를 할 생각이 아니라면, 한국이 그러하듯 중국을 이용할 수는 있으되 그 이상으로 나아가기는 어려운 것이다.

무엇보다 일본이 한일관계를 완전히 포기하고 대안외교로 완전히 전환했다고 보기도 어렵다. 사실 과거사는 주변국과의 갈등을 떠나 일본사를 제대로 정립하는 취지에서라도 언젠가는 객관적인 시각으로 바라보아야 할 문제[109]이고, 일본 우파가 재무장과 개헌을 숙원으로 삼든 말든 핵무기도 없는 일본이 다시금 세계대전을 일으켜봐야 파멸만이 기다릴 뿐이다. 격차가 여전히 존재하기는 하나 한국이 느리게나마 조금씩 성장하는 반면 일본은 정체를 벗어나지 못하는 상황에서, 안 그래도 몇 없는 동북아의 "정상국가"와 등을 돌리는 대가로 뭘 얻는다기엔 일본이 얻을 수 있는 게 너무 빈약한 셈이다.

아베 신조 전 총리는 한국에 배타적인 태도를 보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여전히 한국에 대한 관계개선 의지를 표명했고, 자국의 목표는 거칠게 말해 "한국이 일본에게 먼저 숙이고 들어오도록 하는 것"이지 "한국을 적대하는 것"이 아님을 여러 차례 분명히 했다.[110] 그렇다는 것은 적어도 일본 정부 역시 한일관계가 비생산적으로 표류하고 있으며, 현 상태가 결코 정상이라거나 "뉴 노멀"처럼 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실제로 대한(對韓) 강경파였던 아베 신조가 총리직에서 물러나고 상대적으로 중립적인 성향을 지닌 스가 요시히데가 신임 총리로 취임했으며, 미국 대선에서도 동맹을 중요시하는 조 바이든이 당선되면서 한일관계 역시 코로나 19 팬데믹이나 2020 도쿄 올림픽 등 산적한 현안들에서 협력이 필요하다는 공동의 인식 하에 점차 해빙기를 갖고 있다.

그런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일본의 "대안 외교 전략"이란 어쩌면 일본이 한국의 양보를 유도해내기 위한 블러핑의 일종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가장 합리적일지도 모른다.

8.3. 결론

일본과 한국의 관계가 불행했던 것은 약 400년 전 일본이 한국을 침략한 7년간과 금세기 초 식민지배 35년간입니다. 50년도 안 되는 불행한 역사 때문에 1500년에 걸친 교류와 협력의 역사 전체를 무의미하게 만든다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 일본에게는 과거를 직시하고 역사를 두렵게 여기는 진정한 용기가 필요하고, 한국은 일본의 변화된 모습을 올바르게 평가하면서 미래의 가능성에 대한 희망을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김대중, 1998년 10월 8일 일본 국회 연설[111]
일본과 손을 잡아라. 독일은 프랑스와 16번을 싸웠다. 독일 사람들은 지금도 프랑스에 한이 맺혀 있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우리 콘라트 아데나워 총리가 프랑스 드골 대통령을 찾아가 악수했다. 한국도 그렇게 했으면 좋겠다. 그것이 공산주의를 막는 길이기도 하다.
1964년, 루트비히 에르하르트 독일 총리. 박정희 대한민국 대통령에게 한 조언.
이처럼 한일관계는 가까워지면 참 좋기야 하지만, 한국 입장에서는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인 대안 외교에 비해 분명 안정적이긴 하나 현상유지 이상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한계가 있고, 일본 입장에서는 여전히 미해결 상태인 과거사 청산 문제와 맞물리며 자국의 합리적인 국익 추구에 안 내도 될 불협화음을 낼 가능성이 높다는 한계가 있다.

위 김대중의 연설처럼 김대중은 일본이 (1998년 당시 기준으로) 평화헌법을 준수해온 점을 높이 사고, 일본이 과거사를 직시해야 한다고 얘기하면서 짧은 불행한 역사 때문에 훨씬 긴 기간에 걸친 한일간 교류의 역사를 무의미하게 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하지만 아베 신조 정권 당시 아베는 과거사를 부정하고, 헌법을 개정하여 재무장을 하려고 하는 등의 시도를 계속 했다. 그나마 자민당 내 온건파인 기시다 후미오 총리가 집권한 이후로는 일본의 우경화가 옅어지면서 이러한 역사수정주의적 행태도 줄어들었다.

안타깝게도 한국이든 일본이든 지역 정세에 종속된 처지에서 현재의 한계를 벗어나기는 어렵고, 각국의 입장을 부정하면서 상대에게 무조건적인 양보를 요구해 본들 받아들여지기는커녕 당연히 관계만 더 악화될 가능성이 높다.

반면 한일관계의 대안으로 거론되는 한국의 '친북-친중' 전략이나 일본의 '인도-태평양' 전략 모두 장밋빛 가능성을 상회하는 명확한 위험성이 존재하기에, 양국 간의 인식과 교류를 적당한 수준에서 유지·관리하다 보면 정세가 변함에 따라 다시 양국이 친밀해지는 상황이 올 것이다. 오랜 라이벌이던 영국프랑스가 양차대전에서 공동의 적을 두고 협력하면서 서로를 이해하고 친교관계를 유지하기 시작했고, 독일프랑스제2차 세계 대전을 겪은 뒤 이념적으로 청산할 건 청산하고 용서할 건 용서한 뒤에 유럽연합으로 뭉칠 수 있었듯, 한일관계의 궁극적인 미래는 결국 공동의 적인 북한과 중국 문제가 어떠한 형태로 풀리고 일본의 역사 청산이 어떤 식으로 진행되는가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외교란 '상대국의 이익과 자국의 이익을 합치시키는 것'이라는 격언이 있다. "당연한 소리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 속뜻은 "상대국이 양보할 수 없는 것은 애초에 요구하지 말라"는 것이다. 서로 복잡하게 얽힌 현대 국제 사회에서는, 아무리 강한 국가라도 상대방을 완전히 무시하면서 자국의 입장을 일방적으로 강요하기는 어렵다.[112] 게다가 당장 위력을 동원해 원하는 것을 얻어낸다 할지라도, 상대국이 거기에 수긍하지 못하면 언제고 복수를 노릴 것이다.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처참히 무너진 프랑스나 제1차 세계 대전에서 굴욕적인 결과를 받아든 독일은 패배와 처우에 수긍하는 대신 "다시 한 번 더"를 외쳤고, EU를 통해 공동 번영의 가능성이 제시된 뒤에야 비로소 증오의 연쇄를 끊을 수 있었다.[113]

외교란 상대의 입장을 이해하고, 상대도 이만하면 그래도 설득할 수 있겠다 싶은 조건들을 찾으며, 그 조건들 가운데 우리에게 가장 유리한 조건을 제시하는 것이다. 한일관계도 마찬가지다. 한국은 일본을 설득할 수 있는 조건 가운데 한국이 가장 유리한 조건을 찾아야 하고, 일본은 한국이 중시하는 기준들을 존중하며 일본의 이익을 최대화해야 한다. 그러려면 결국 서로의 버킷리스트에서 더 중요한 것과 덜 중요한 것을 나누고, 필요하다면 양보해야 하는 것들을 양보하는 대신 상대도 받아들일 수 있는 몇 가지 조건을 덧붙이는 식으로 접근해야 한다.[114] 물론 한일 각국이 독도와 과거사, 역사 교과서와 위안부 배상, 한일기본조약과 후쿠시마산 수산물 등 온갖 현안들에서 어디에 중점을 더 둘지는 정부의 성향에 따라 달라지겠으나, 적어도 어느 쪽이든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으려 하면 한 발자국도 나아갈 수 없다. 외교를 제로섬 게임으로 하려 들면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저 격언의 진정한 의미이다. [115]

다만 착각하지 말아야 할 부분이 하나 있는데, 2차 세계대전 후 프랑스가 관대하게 독일을 용서한 적은 없다. 프랑스는 당연히 베르사유 조약 그 이상의 처벌을 내려 독일 경제를 파탄내고 독일 분할에도 강력하게 목소리를 냈지만 프랑스는 이미 이빨 빠진 호랑이라서 힘이 없었고, 결과적으로 FDR의 미합중국과 스탈린이 이끄는 소련에 비해 드골의 자유 프랑스는 단 한 줌의 발언권도 없었기 때문에 미국과 소련이 독일을 어떻게 처분하든 간에 개입을 할 능력이 없었던 것이다. 아니, 오히려 스탈린은 미국에 의해 묵살되기는 했으나 프랑스 역시 전범국이다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이는 프랑스가 독일에게 부역해서 독소전쟁의 배후지 역할을 했다는 이유에서 나온 발언이었으나. 그렇게 나오면 독소 불가침조약을 체결하고 독일의 재무장을 적극 지원해온 소련 역시 전범국이라는 논리가 성립하므로 미국에게 무시당하기는 했으나 아무튼 독일의 처분에 프랑스는 쥐꼬리만큼의 목소리도 내지 못했다. 심지어 미국과 소련은 프랑스군이 전후 독일을 점령하는 것조차 거부했으나 아직 대영제국 시절의 미몽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미국과 소련 사이에 프랑스와 영국이 뭉쳐 캐스팅 보트 역할을 한다는 전략을 세웠던 영국 정부가 자기 점령지를 떼어줘 가면서 점령군 지위를 부여했을 정도로 연합군 내의 발언권은 처참한 실정이었다.

마찬가지로 68혁명 이전의 독일에서는 나치 출신 인사들이 여전히 고위직에 앉아 있었으며 나치에 대한 반성도 전혀 이뤄지지 않고 있었을 뿐 아니라 전쟁으로 잃어버린 알자스-로렌과 현재 폴란드 영토인 구 독일령 영토들을 돌려받아야 한다고 요구했으며 이것은 단지 우익 일부의 주장이 아니라 독일 국민 대부분의 보편적 정서였다. 오늘날 과거반성 잘 하는 독일의 이미지는 68혁명을 통해 독일의 나치 잔재가 모조리 갈아엎어지고 서독 총리였던 빌리 브란트가 바르샤바의 위령비 앞에 무릎을 꿇으면서 독일인이 반성을 하고 있긴 하다는 생각을 세계인들에게 심어준 결과다. 그마저도 빌리 브란트는 2차 세계대전의 결과로 폴란드에 넘어간 영토의 영유권을 포기하겠다고 선언했다가 실각할 뻔했다. 한일관계에 직접 대입하자면 일본 총리가 한국을 다시는 침략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만으로 실각할 뻔했던 것. 조금 과장을 섞자면 오늘날 독일의 이미지는 빌리 브란트가 다 만들어준 거나 다름없다.

그리고 그렇게까지 했음에도 불구하고 독일 통일이 이루어질 때 프랑스와 영국 정부는 냉전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패닉에 빠져 동독 정부가 붕괴하지 않도록 소련군을 동독에 투입해달라고 소련에 요청했을 정도로 독일을 경계해 왔다. 즉 프랑스와 영국이 독일에 복수하지 않고 용서한 게 아니라 복수할 힘이 없었을 뿐이며, 미국과 소련이 아니었더라면 베르사유 조약을 따위로 만들어버릴 처절한 복수는 반드시 이루어졌을 것이다.[116] 또한 한일관계에서 일본은 공식적으로는 고노 담화, 무라야마 담화 등을 계승한다는 태도이지만 68혁명과 같이 국민들이 자체적으로 과거 일본 제국 시절의 잔재를 청소한 적도 없으며 일본 총리가 방한해서 독립기념관이나 탑골공원, 현충원 독립투사 묘역 등에서 무릎을 꿇고 일본 제국주의의 과오에 대해 사죄하는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기 때문에 프랑스-독일 관계에 직접 비교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

결론만 말하자면 프랑스와 영국이 독일을 자비롭게 용서한 게 아닌, 냉전의 논리에 따라 미국과 소련이 독일을 용서한 것이며 영국과 프랑스는 미국의 압력에 입을 열 처지가 되지 못했을 뿐 복수심을 버린 적이 없다. 수십 년이 지나 당시의 기억이 흐릿해졌을 때도 독일이 통일을 기도하자 의 벽을 넘어 소련에게 군 투입을 요청할 정도로 독일에 대한 경계심을 거둔 적이 없다. 그리고 독일 역시 국가주의를 공식적으로 포기한 것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도 수십 년 후에 독일 통일이 이루어졌을 때에나 가능했으며, 그마저도 독일 통일을 위해서는 영국과 프랑스를 어떻게든 안심시켜야 할 필요성이 있었기에 독일 통일을 용인받는 대가로 과거의 미몽과 패권주의 노선을 공식적으로 포기했음을 선언하고 국가주의를 억눌렀으며, 그렇게까지 했는데도 네오 나치를 비롯한 극우 세력의 돌출행동이 잊을 만하면 나타나는 것이 독일의 현주소다. 이는 선의가 아니라 필연에서 시작된 것으로, 만일 서독과 동독 정부가 오늘날의 일본 정부처럼 과거사를 부정하는 태도를 보였다면 영국과 프랑스는 군대를 동원해서라도 양국의 통일을 저지하려 시도했을 것이다. 이런 사실을 인지하지 않고 왜 독일은 사죄를 하는데 일본은 하지 않느냐는 식으로 나오는 것은 무의미하다. 독일은 영국과 프랑스의 협조를 구하지 않고는 절대 통일할 수 없는 만큼 아쉬운 게 있으니 정략적 판단을 통해 사죄하는 방향을 잡아야 했고 일본은 분단되지 않았기에 아쉬울 게 없어서 한국에게 강경하게 나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즉 한국은 한국 나름대로 절대 양보할 수 없는 부분이 있고, 일본도 일본 나름대로 자국이 양보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극한 대립을 풀기 위해서는 양국 모두 한발짝 물러서서 양보가 필요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현실적으로 상대가 절대 양보할 수 없다고 하는 부분까지 서로 양보하라고 강요하는 것 또한 외교적으로 바람직한 모습은 아니다. 한국 입장에서는 일본에 대해, 일본 입장에서는 한국에 대해 "쟤들은 이것도 양보를 못하나?"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각자의 기준으로 해석했을 때의 이야기이고, 진정으로 양국이 관계 개선을 원한다면 상대국의 입장과 자국의 입장은 완전히 다를 수도 있다는 현실을 서로 인정하고 그 속에서 각자 양보해야 할 부분은 물러서는 자세가 필요하다. 서로가 서로의 상황을 아예 이해하려 하지 않으면 불신만이 커질 뿐이며, 서로가 서로를 무조건 비정상적인 상대로 규정짓고 대화의 문을 닫아봤자 양국 간에 불필요한 감정만 소모되고 남는 것은 없다. 이 과정에서 어느 쪽의 입장이 옳으니 그르니를 따지는 것은 각자의 도덕적 평가의 영역은 될 수 있어도 외교적으로는 좀 거칠게 말해서 별 의미가 없다. 까놓고 말해서 그래봤자 서로 양보 못하겠다고 뻗대는 게 현실인데 뭘 어쩌겠는가? 외교란 현실을 타협해 나가는 과정이지 각자의 이상만을 고집하여 관철시키는 과정이 아니다. 서로가 도저히 각자의 이상을 양보하지 못하겠다면 계속해서 대립으로 가는 것이고, 반대로 조금씩 양보할 수 있다면 못 미더울 수는 있어도 관계 개선의 길로 가게 될 것이다. 사실 정답은 없다. 어느 한쪽이 양보를 안 하겠다고 해서 다른 한쪽이 이를 강제할 권리를 가진 것도 아니며, 반대로 양보를 한다고 해서 무조건 긍정적인 결과가 나온다는 보장도 없다. 다만 그 과정 속에서 발생할 수 있는 여러 불협화음들을 잘 관리하고 원만히 해결해 나가는 과정이 바로 외교인 것이다. 이건 굳이 한일관계뿐만 아니라 한중관계, 남북관계 등 모든 외교에서 다 적용되는 이야기이다.

한일관계에서 양국이 진정으로 경계해야 할 것은 한일관계를 포기하는 것이 양국에게 최선의 이익이 되는 상황이며, 그런 상황을 막기 위해서는 서로가 서로의 입장을 정확히 이해하고 서로의 외교 우선순위에서 덜 중요한 부분을 양보함으로써 더 중요한 부분에서 도움을 주고 받겠다는 전향적인 접근 자세가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한일이 서로를 잘 아는 것이 교의의 근본'이라는 경구는 과거와 현재, 미래의 한일관계를 관통하는 조언이자 경고라 하겠다.

교양만화가 이원복 교수도 2000년 저서 <새 먼나라 이웃나라> 일본편 1권에서 말하길, 아무리 일본이 한국에 저지른 잘못된 과거사가 있다 하지만 미래 한일관계의 발전을 위해선 양국 간의 과거 감정에 얽매이지 않은 채 과감히 과거를 청산하고 새롭고 긍정적인 관계로 발전시켜야 하며, 한국인 역시 일본에 대해서 공과 과를 분명히 하고 세계 각국처럼 하나의 '외국'으로 봐야 한다는 원론적 주장을 했다.[117]

9. 역대 정상회담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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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번 문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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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참고 문헌

10.1. 관련 기사

11.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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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 간접적 의미의 관련 항목


[1] 한국어 한자음 : 일한관계
발음 한글 표기 : 닛칸칸케-
[2] 알파벳 상 J가 K보다 앞에 있고 국력 또한 일본 쪽이 더 강하다고 평가받기 때문에 일본, 한국 순서로 쓰는 경우가 많다.[3] 민족간의 유전적 거리를 연구한 자료에선 한국인만주족 다음으로 일본인과 가장 근연인 민족으로 나왔다. 그리고 국가 유사성 지수에서 한국과 가장 비슷한 국가로 일본이 나오며, 언어적인 면에서도 한국어일본어는 유사한 편이다. 그러나 둘다 고립어이기 때문에 언어 계통적으로는 영어힌디어보다도 먼 관계이다.[4] 일본인의 뿌리인 야요이인 자체가 한반도에서 건너온 사람들이다. 고대에는 한반도는 일본에 많은 영향을 끼쳤고 중세에는 양국 간의 교류가 소홀해졌다. 근세부터 일본의 국력이 한반도보다 커지면서 양국 간의 세력 균형에 균열이 발생했고 더 이상 한반도와 일본이 수평적 관계가 아니게 되었다. 근대에 들어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의 한반도 침략이 잦아졌고, 이로 인해 일본의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이 더 커지게 된다. 21세기에 들어서는 한국의 국력이 급성장하여 어느 정도는 일본과 대등한 관계로 발전했다.[5] 정확히는 어떤 주제느냐에 따라 다르다.[6] 대한민국은 헌법상 북한한반도 북부을 무단점거하고 있는 반국가단체로 취급하기에, 대한민국의 명목상 면적은 북한까지 포함된다.[7] 2024년 10월 IMF 기준. 출처[8] 2024년 10월 IMF 기준. 출처[9] 2024년 10월 IMF 기준.[10] 스위스 국제경영개발연구원(IMD) 산정. #[11] 아시아 3위.[12] 아시아 2위.[13] 현행 일본국 헌법에는 천황의 국가원수 여부가 명시되어 있지 않고 '일본국의 상징'이자 '일본 국민 통합의 상징'으로만 규정되어 있다. 하지만 사실상 국가원수로 간주되며 의전서열에서 볼 수 있듯 일본국 정부도 천황을 국가원수로 대우한다.[14] 특히 자민당은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 재판이 벌어지자 "한국은 돈 필요할 때면 이미 한일기본조약으로 배상이 끝났음에도 돈 내놓으라 한다."며 불평하는 의원이 있을 정도였고 박근혜 정부의 위안부 합의 당시에도 일본 자민당 내부에서는 반대기류가 매우 높았지만 미국이 한국에게 압박을 넣은 것 + 한국이 미국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 절묘하게 맞물려서 생각보다 적은 금액으로 후환을 없앨 수 있다는 것이 더 저렴하다보니 성사되었다.[15] 물론 프랑스이탈리아 간의 몽블랑 산 영토 분쟁처럼 평화롭게 지내는 나라들끼리도 영토분쟁이 존재하는 경우는 생각보다 흔하긴 하나, 몽블랑 산 분쟁은 적어도 역사 갈등이나 정치적 갈등은 어느 정도 해소된 채로 외교전이나 펼치는 것에 가깝다. 하지만 일본은 상기한 분쟁에 영토분쟁까지 존재하며 심지어 틈만 나면 공개적으로 천명하는 것이 문제이다. 게다가 독도의 역사를 파고들어가면 일본 제국의 제국주의와 직접적으로 맞물려 있기 때문에, 일본 제국의 팽창주의 자체를 반인도적-불법적 행위로 간주하는 한국으로서나 2차 대전 이전까지의 제국주의 팽창에 대해 자국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일본으로서나 더더욱 양보할 수 없는 문제가 되기도 한다.[16] 법리적으로 청구권 자체는 존재하지만, 일본 정부와 일본의 기업들은 그러한 청구권에 응할 법적인 의무가 없게 되었다는 것이 일본 측의 주장이다.[17] 일본이 잃어버린 20년을 겪으면서 많이 추락했다지만 여전히 주요 7개국 정상회담의 일원이자 세계 4위의 경제대국이고, 유엔 상임이사국의 후보 G4에 발을 걸치고 있을 만큼 강대국이다. 한일간의 국력 격차가 예전같이 크지는 않지만, 일본의 경제규모는 여전히 한국의 2.45배 정도이며 서구권에서의 외교적 입지도 훨씬 단단하다.[18] 유럽에도 2차 세계 대전을 겪은 이후 은연중에 독일의 영향력에 대해 경계하는 시각이 존재한다. (2005)(2011) (2016)[19] 한국이 고개를 숙여가며 일본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하는 단계가 오려면 한미 관계만으로는 중국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중국이 강력해져야 하는데, 중국의 국력 성장이 사실상 정체된 현 상태에서 미국을 그 정도로 위협할 수 있는 국력을 가질지는 미지수다.[20] 이는 당연한 것이다. 북중러의 횡포가 심화된 2020년대 이후 시점에서 일본과의 관계 개선은 사실상 불가피하기 때문이다.[21] 그럴만도 한 게, 2015년 당시 일본에는 보수방류(극우) 계통인 아베 신조가 일본 총리 자리에 있었기 때문이다.[22] 임진왜란, 청일전쟁, 동학농민운동, 을미사변, 러일전쟁, 일제강점기[23] 중국은 미국 경제력의 50~60%에 이르는 경제대국이지만 국제 사회의 어젠더에서 주류에 있지 못하다. 해외 군사 투사만 보더라도 중국보다 훨씬 덩치가 작은 영국이나 프랑스, 러시아에 비해 중국의 활동 영역은 극히 제한적이다.[24] 한국 정부의 입장으로는 반정부단체.[25] 대표적으로 북벌론.[26] 현재의 한미 양국 역시 동맹관계임에도 감정의 골이 적지는 않다. 백제와 왜 역시 아무리 동맹일지라도 수백년간 관계를 형성하면서 자연스럽게 서로에 대한 안 좋은 감정도 쌓였을 수밖에 없다.[27] 우선 인구 자체가 신라시대보다 조선시대에 몇 곱절 늘었음을 상기해 보면 된다.[28] 세조와 성종 대의 외교문서에서 빈번하게 발견된다.[29] 비공식적으로 일부 파병하기는 했다.[30]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4090600329201019&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4-09-06&officeId=00032&pageNo=1&printNo=8907&publishType=00020.[31]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4091900329201003&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4-09-19&officeId=00032&pageNo=1&printNo=8918&publishType=00020.[32] 김대중이 납치당한 곳이 바로 일본 도쿄의 호텔이었다.[33] 이와 비슷하게 영국 등 서양 네티즌들이 독립 후 로버트 무가베의 실정으로 망가진 짐바브웨를 두고 '차라리 로디지아 백인 정권 시절이 더 살기 좋았냐'며 로디지아를 미화하기도 한다.[34] 정재정, 『주제와 쟁점으로 읽는 20세기 한일관계사』 (서울: 역사비평사),[35] 공정거래법, 카르텔방지법, 반독점법 등이 대표적이다.[36] K-stat: 한국의 10대 무역국 수출국/수입국 버튼을 누르면 1988년까지 이러한 무역구조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37] 현직 수상의 비공식 방문은 이전에도 있었다. 사토 에이사쿠 수상이 박정희 대통령의 취임식 참석을 위해 방한한 바 있고, 다나카 가쿠에이 수상이 육영수 여사 영결식 참석을 위해 방한한 바 있다.[38] 실제로 이봉창 의사는 조선인이면서도 일본인이 되고 싶었지만, 일본 사회의 직장이나 사회의 여러가지 분야에서도 동등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차별을 당한 분노로 인해 독립운동을 하였다.[39] 미군정이 광복 후 한국 내의 일본의 재산을 처분한 부분도 한국에 있는 일본과 일본 국민의 재산에 대해 미 군정 처분의 적법성을 인정한다고 한 샌프란시스코 조약 제4조가 있으므로 문제가 없다. 실제로 회담 초기에 일본은 적산의 소유권을 주장했으나, 미국이 샌프란시스코 조약에 대한 해석이 담긴 외교문서를 정부에 보내왔다. 내용은 '일본은 대한 청구권을 주장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일본 외무성은 우리 측 회담 대표부에 서한을 다시 보내서, 적산에 대한 소유권 주장을 공식 철회했다.#[40] 프랑스, 폴란드, 베네룩스 3국 등.[41] 독일은 어느 정도는 제국주의 국가들 중 과거사를 대하는 태도가 가장 양호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한국에서의 인식이 무색하게도 독일의 과거사 청산은 어디까지나 나치 독일로서 저질렀던 전쟁범죄에 한정되어 있고, 독일 제국 시절 저질렀던 제국주의적 만행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무관심하다는 비판을 받는다.[42] 물론 2020년대 현재와 비교하면 우호적인 여론이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긴 했었다.[43] 예컨대, 일본에서 엘리베이터 고장이 나면 '고장'이란 직설적 표현이 아니라 '수리중'을 쓴다.[44] 자세한 것은 선진국/대한민국 문서 참조.[45] 이렇게 된 것은 일본 정계의 의사결정 방식과 관련이 있었다. 의원내각제의 일본에서는 당시 정계 실력자들의 합의에 따라 중요한 의사결정이 내려지는 경우가 많은 사정이 있었던 것이다. 이전에도 언급하였지만, 냉전시대 자유진영을 결속시키고자, 일본으로 하여금 배고픈 한국에 막대한 금액을 지급하도록 만들었기에 받은 것이다. 이승만 정부때부터 시작해 15여년간 끌어온 과정은 회담 개최와 결렬 다시 개최하는 과정이 반복된, 세계 외교사를 통틀어 유례가 없을 정도로 줄다리기 협상이었다. 당시 반대 여론에 경청하고 수렴해 설득해가는 과정을 거쳤다면 미국은 별다른 진전을 보이지 않고 시간만 끌어가기 때문에 도움이 되지 않는 동맹으로 판단하여 우리나라가 손해만 보는 상황으로 전개되는 방향으로 흘러갔을 수 있었다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46] 다만 이 부분은 일본의 정치인도 크게 다를 바가 없는 모습을 보이는 경우가 있으며, 특히나 아베 총리의 한일 무역 분쟁에서도 어느 정도 증명되고 있다. 즉 내셔널리즘을 악용하는 것은 한일 양국 모두에게 지적되는 비판점이라는 것이다.[47] 쇼와 덴노도 전후 야스쿠니 신사에 단 한번도 참배하지 않기는 했다.[48] 물론 2020년대 들어 신냉전 시대가 도래한 이후로는 중국중화사상에 입각한 팽창주의패권주의를 내세우며 한국을 상대로 문화침탈을 저지르는 등의 여러 깡패짓을 하면서 한국의 반중감정이 반일감정을 훨씬 뛰어넘을 정도로 심해졌다. 또한 윤석열 정부가 출범한 이후로는 한미동맹 강화와 한일관계 개선을 내세우며 중국, 북한 등 반서방 세력들과 선을 긋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49] 출처[50] 국내 대기업들의 초창기 역사를 보면 일본과의 협력은 빠지지 않고 나온다.[51] 출처[52] 2022년 출처[53] 소수점 셋째 자리에서 반올림하였다.[54] 아베노믹스[55] 2021년 4월 IMF[56] 2021년 4월 IMF[57] 소수점 셋째 자리에서 반올림하였다.[58] 소수점 셋째 자리에서 반올림하였다.[59] PPP 기준 1인당 GDP 추월.[60] 2022년 10월 기준.[61] 4267만 1062원.[62] 441만 2287엔.[63] 1인당 명목 GDP 추월.[64] 1위는 스위스, 2위는 룩셈부르크.[65] 같은 금액으로 구매할 수 있는 서비스나 재화 등[66] 출처: 2013년 7월 19일 산업자원통상부-보도자료, 사무관 김형태[67] 출처: 2013년 7월 19일 김선민[68] 2023년현시점에서 신오쿠보의 메인거리는 한인상점이 주류이다 글쓴이가 아마 잘못 파악한듯한데, 2015년부터 케이팝붐으로 우후죽순으로 생겨났으며 그시기에는 잘되는 가게를 그대로 베껴서 이곳저곳에서 가게를 만들었기때문에 당연하게도 시간이 지남으로써 폐점하는 가게도 늘었다.한인상점이 폐점했다는 이유가 단지 반한감정으로 논리를 도출하기에는 주장의 근거가 빈약하다.[69] 신오쿠보역을 중점으로 좌우로 그 성향이 크게 달라진다. 한쪽은 한인상점이 많은 방면 한쪽은 중국이나 파키스탄, 인도, 베트남 등의 아시아 상점이 많다. 이점은 2023년 4월 시점에서도 변치않다.[70] 앞서 말했듯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난 한인가게는 메인거리가 아닌 신오쿠보와 신주쿠나 다카나노바바까지 생겨났는데 여기서 폐점한 가게들이 중국상점으로 바뀌는 경우는 종종있다[71] 어렵지 않게 찾을 수있는지 어떤지는 명백히 모른다에 가깝다. 향후 국제사회의 관계에 지대한 영향이 미칠지도 모르는 이러한 글에 사족같은 의견을 담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개인적으로 10년동안 살아보며 여러 사람을 만나본결과 젊은 층의 한국에대한 호감도는 높다. 그렇다고 40대 50대 중년층이 한국에 대해 비호감적인것은 어디까지나 케이스바이 케이스였고 혹자는 그런 감정을 받아본적이 손에 꼽힌다.[72] 실제로 기시다 후미오고노 다로는 야스쿠니 신사 참배에 부정적인 반우익 성향이다.[73] 우리나라의 보수진영과도 비슷한 양상인데 북한과의 미적지근한 태도, 중국과의 친목도모를 극좌진영의 공산화라고 생각하는 것과 비슷하다.[74] 이는 일본 토익은 한국 토익과 난이도, 출제 방식 등이 유사하기 때문.[75] 일제강점기의 영향으로 일본어 파생 어휘가 꽤 많이 잔재하며 (리모컨, 공구리, 노가다, 다마네기, 장깸뽀, 즈봉, 바께쓰, 빤스(빤쓰) 등) 할머니, 할아버지들 중에서도 일본어가 유창한 사람이 꽤 있다.[76] 초창기에는 40점 만점, 현재는 50점 만점.[77] 이는 한일 양국의 입시 제도를 감안해야 하는데, 한국 수능은 영어+제2외국어 체제인 반면 일본 공통테스트는 영어, 중국어, 독일어, 프랑스어, 한국어가 모두 외국어 과목인 데다 상당수의 대학에서 영어 이외의 외국어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영어 이외의 외국어 과목에는 듣기평가가 없다.[78] 물론 정치적 스탠스와 별개로 개인의 입맛은 어찌할 수 있는 게 아닌데다 한국이나 일본이나 민주주의 사회에서 문화를 국경 없이 즐기는 건 잘못이 아니기 때문에 대부분의 일본 국민들을 한식을 먹는 아베를 까는 우익을 깐다(..).[79] 다만 한국은 일본인의 입국을 막지 않고 있으며, 일본이 한국인의 입국을 막고 있음을 생각해 보면 일본 정부가 저렇게 기원한다는 것은 좀 모순적이다.[80] 명동거리나 롯데월드 등.[81] 일본에서 수십km 거리의 대도시면서 한국 제2의 도시다. 한국에서 가까운 일본 대도시이면서 많이 찾는 후쿠오카와 비슷한 포지션.[82] 일본의 여름이 덥고 습하기 때문에 홋카이도 정도를 제외하면 여름보다는 가을~겨울 사이 (보통 11월에서 1월 사이)에 많이 간다고 한다.[83] 최근에는 한국 요리가 더욱 인기를 얻으면서 닭갈비, 떡볶이 등 매운 요리를 일부러 찾는 일본인도 늘었으며, 이전에는 일본에서 파는 한국 음식은 매운 맛은 거의 없고 달기만 했다면 최근에는 한국에서 파는 것 못지 않게 매콤한 음식을 파는 경우도 많아졌다.[84] 대한민국은 한반도와 그 부속 도서 전체를 자국의 영토로 규정하며, 6.25 전쟁휴전일 뿐 종전이 아니다. 무엇보다 한국의 대북전략이 남북통일을 기저에 두는 것처럼, 북한 역시 적화통일 야욕을 여전히 포기하지 않고 있다. 즉, 대화를 하든 대결을 하든 남북한은 지리적으로나 정통성으로나 서로에게 실존적 위협이다.[85] 물론 중국은 한일이 아닌 미국을 경쟁자로 상정하고 세계 전략을 추구하는 국가이다. 그러나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고, 중국이 미국을 견제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취하는 태도들조차 주변의 소국들에게는 생존의 위협이 된다.[86] 지정학적으로 유사한 영국프랑스의 사례에서도, 프랑스가 대륙에서 확고한 우위를 점하고 있던 중근세까지는 영국과 사사건건 충돌한 반면, 독일러시아가 부상하고 대륙 패권을 잃은 이후부터는 영국-프랑스 관계 역시 독일이나 소련 등 주변국을 견제하기 위한 도구로 여겨졌다. 기본적으로 반도국가는 대륙의 경쟁자를 모두 제거하기 전까지는 열도국가와의 해상 패권 경쟁보다는 인접국을 막아낼 육군에 먼저 투자하는 것이 우선순위일 수밖에 없다. 이와 반대로 현대 중국이나 나치 독일, 나폴레옹 프랑스처럼 대륙의 유의미한 경쟁자를 모두 제압한다면 필연적으로 해상 패권을 놓고 열도 국가와 충돌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열도국가 입장에서도 아예 대륙 전체를 넘볼 만큼 국력 격차가 압도적이지 않은 다음에야, 애매하게 전력을 분산투자하다 이도저도 안 되느니 대륙에서의 세력 균형 유지에 방점을 찍고 우호국을 만들어 자국의 해상 패권을 위협할 강대국의 출현을 막는 쪽이 훨씬 더 합리적이다. 영국의 위대한 고립(splendid isolation)이 바로 이런 전략적인 판단의 결과물이며, 반대로 일본 제국은 역량을 넘어서는 직접 지배를 시도하다가 해상에선 미국에, 육상에선 중소에 제압당하며 결국 멸망의 길을 걸었다.[87] 도시 국가나 관행적 의미의 국가 또는 준국가까지 포함한다면 대만, 싱가포르, 홍콩, 마카오도 해당되지만, 대만은 미승인국으로 국제사회에서 그 지위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고 싱가포르는 인구 1천만도 되지 않는 도시 국가라 체급이 너무 작으며 홍콩, 마카오는 정식 국가가 아닌 중국의 특별행정구에 지나지 않는다. 서아시아의 선진국인 이스라엘의 경우 대만보다 체급이 작다.[88] 과거에 마찰이 있었던 한국과 몽골, 영국과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이 현재는 악감정 없이 잘 지내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89] 역사적으로도 일본이 한국을 상대로 대대적인 압박을 넣거나 무력 침공을 했던 시기들은 한국의 국력이 상당히 쇠약해져 있거나 근래들어 양국 간 정보가 거의 없거나 교류가 미비했을 때였다. 반대로 양국의 국력이 동등하거나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면 비교적 평화노선을 취하며 활발한 교류와 인적자원이 오가기도 했다. 그런점에서 미루어 볼때 21세기부터 한국과 일본과의 힘의 균형이 한곳으로 크게 치우쳐 있지도 않고 문화 교류는 과거보다 더 활발해졌고, 양국의 우방국이자 군사 동맹국인 미국이 여전히 건재하기 때문에 괜히 쓸데없이 서로에게 칼을 겨누어 손해만 볼 이유는 없다.[90] 사실 6.25 전쟁과 관련해서도 중국에게 침략 행위에 대한 사과조차 전혀 받지도 못했다. 이 점은 일본보다도 오히려 더 심각하다고 볼 수 있는데, 일본은 진정성 논란이 있긴 해도 일단 정부 차원에서는 자신들이 제국주의 시절 저지른 만행에 대해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사죄했다. 반면 중국은 항미원조를 주장하며 6.25 전쟁 개입을 정당화하고 북한의 후견국 노릇을 하고 있으며, 중국의 공산 정권이 붕괴하지 않는 한 중국이 한국에게 사죄하는 일은 없을 것으로 보인다. 이런 관점에서는 과거사 문제조차도 한일관계가 남북한관계한중관계보다 특별히 심각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참고로 러시아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이 방한했을 때 사과 의사를 표현한 바 있다. 다만 한일관계에서 과거사 문제가 적어도 북한이나 중국 등 잠재적 적성국들과의 대국관계에 산재한 문제들만큼이나 강한 폭발력을 갖고 있다는 것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91] 예컨대 기뢰·소해 전력처럼 열도국가의 방위에 필수적인 해상전력에 집중하고 육상자위대해병대처럼 유사시 한반도를 건드릴 수 있는 전력은 제약하기로 약속한다거나, 평화헌법 개헌 논의 과정에서 유사시 한반도 개입을 억제할 조항을 첨가한다거나, 지소미아를 확장시켜 한일이 관련 군사정보를 더 긴밀히 공유한다거나.[92] 혐한이나 혐일감정 따위는 국제질서의 변화에 영향을 미칠 수 없는 마이너한 요소에 불과하다. 2차대전 당시 앙숙이던 영미와 소련도 나치의 발흥 앞에선 손잡았고, 피터지게 싸웠던 독일과 프랑스도 소련의 위협 앞에 불과 10년도 지나지 않아 결국 손을 맞잡았다. 지금 한일이 연성의 반일•반한 정책을 펼치는 것은, 그 판단이 옳든 그르든 양국의 위정자들이 그러한 정책 방향성이 국익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일이 모두 생존을 위해 손잡을 수밖에 없는 위기에 내몰린다면, 그건 곧 중국의 팽창이 미국을 위시한 힘의 균형을 깨부순 준전시 상황을 의미한다. 이런 상황에서는 언론부터가 지금과는 달리 양국의 부정적인 면보다는 긍정적인 면을 보도하도록 검열될 것이다. 당장 2차대전 당시 미군이 "This man is Chinese/Russian. He fights for freedom" 같은 찌라시를 뿌리고, 영국•프랑스 파견 부대에 해당국 국민들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도록 문화교육을 시켰으며, 소련의 눈치를 보아 일시적으로 반공주의 선전물들까지 검열했던 것처럼 말이다. 외교를 결정하는 건 민주주의가 아니라 국제관계학이며, 감정이 외교를 지배하는 나라는 필연적으로 망할 수밖에 없다.[93] 사다트는 이스라엘과 평화 협상을 벌였다는 이유로 자국의 극우 무장세력에 암살당했으며 심지어 라빈은 이스라엘의 전쟁영웅이었지만 팔레스타인과의 평화협정에 불만을 가진 자국 극우파의 손에 암살당했다.[94] 영국이 나폴레옹과 히틀러를 어떻게 대했는지, 그리고 오늘날 유럽의 통합에 어떤 시각을 갖고 있는지 살펴보면 된다. 윈스턴 처칠드골에게 "영국은 둘 중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유럽이 아닌 대서양을 선택할 것"이라고 경고했던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95] 실제 2010년대 들어서 보수우파 계열에서 이런 아이디어가 잠깐 제시된 적이 있다. 지금 북미관계가 교착된 가장 큰 이유는 설사 미국이 북한의 체제를 보장한다고 약속해도, 이미 이라크와 리비아의 사례를 본 북한이 미국을 믿지 못한다는 점에 있다. 이렇기 때문에 단순한 국교수립이나 무역거래 수준을 넘어서 아예 미국이 북한과 군사동맹을 맺자는 것이다. 이것은 당연히 북중 군사동맹의 폐기를 전제로 하기 때문에 미국 입장에선 중국 코앞에 새로운 친미 정권을 만든다는 이점이 있고, 북한에선 그토록 염원하던 미국으로부터의 체제보장을 확고히 받아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이렇게 되면 조선인민군과 주한미군이 서해바다에서 합동군사훈련을 하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 다만 경제와 안보 양면에서 중국의 존재감이 워낙 크다 보니 현실적인 한계도 있는데, 이는 아래 단락에서 후술한다.[96] 이러한 일본의 실리론과 한국의 명분론으로 대표되는 양국 국민들의 가치관 차이에 대해 아주 잘 설명한 책으로 교토대학의 오구라 기조 교수가 수년간의 한국 생활을 바탕으로 집필한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라는 책이 있으니, 구할 수 있으면 읽어 보자.[97] 실제로 2020년 6월 북한에서 민간 차원의 대북전단 살포 자제를 촉구하며 제재하지 않을 경우 남북정상회담을 무위로 돌려버리겠다고 협박하자 몇 시간만에 법 개정까지 검토할 것을 밝힌 바 있다. 지난 몇십년간 인질외교에 도가 튼 북한 정권이 해당 회담 결과물들의 의의를 모를 리가 없다. 트럼프 또한 코로나와 흑인 인권 시위 등으로 개판이 된 국내 정치판을 뒤집으려면 북미관계 외에 마땅한 수가 없어서, 북한이 저 두 회담을 가지고 협박하면 한국과 미국은 아니꼽더라도 말을 들어줄 수밖에 없는 판국이다.[98] 물론 적과의 동침이 계속될 순 없고, 독소 폴란드 분할 이후 독일이 뒤통수를 치며 독소전쟁이 터진 건 사실이다. 그러나 소련이 뒤통수를 맞은 게 고소하다고 해서 죽었던 폴란드인들이 살아 돌아오는 건 아니다? 2차대전에서 폴란드는 소련과 중국 다음가는 막대한 민간인 피해를 입었지만, 그 전쟁범죄의 가해자 중 하나인 소련이 승전했기 때문에 폴란드가 전후 보상을 받기는 했다. 소련에게 빼앗긴 영토를 되찾지는 못했지만 막말로 독일 영토의 절반을 받았는데 그게 합당한 보상이 아닌 건 아니지 않은가. 심지어 소련에 빼앗긴 영토에 비해 독일에게서 빼앗은 영토는 고토 수복이라는 관점을 제쳐놓고 보자면 폴란드에게는 되려 이득인 영토 변경에 가까웠다. 한국으로서는 어디까지나 "독일"과 "소련" - 즉, 일본과 중국이 작당해서 "저 놈부터 조지고 생각하자"는 식으로 한국을 압박하는 상황을 피하는 것이 우선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둘 중 적어도 하나와는 우호 이상의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99] 물론 국제사회가 예전처럼 군사적인 점령과 식민지배를 허용하지는 않겠지만, 국가가 종속국이 되는 방법은 꼭 직접적인 지배만 있는 것이 아니다.[100] 북한중국 등 잠재적 위협 세력을 주변에 두고 있어 경제 사정과 무관하게 군축을 할 수 없는 한국과 마찬가지이다.[101] 이것 또한 5~60년대의 한일관계와 닮아 있다. 당시 한국은 한국전쟁을 겪었던 상황이라 어차피 군축이 불가능했다 보니, 미국은 대신 한국에 일본의 안보까지 부담시키며 일본의 경제를 키우는 데 주력했다. 게다가 일본은 신장된 경제력을 바탕으로 한미일 안보 동맹에서 한국에 우위를 점하려 했다. 그러나 당시 한국의 이승만 정부 입장에선, 일본이 아쉬울 때는 한국의 최전선으로서의 위치를 이용해 놓고 정작 그 덕에 살림이 나아지니 주도권을 장악하려 하는 꼴이라 불편한 기색을 지우지 못했다. 자세한 내용은 한미관계 문서의 제1공화국 부분 참조. 현대 독일-폴란드 관계에서 폴란드도 비슷한 불만을 갖고 있는 것이다.[102] 독일과 프랑스는 값싼 천연자원 수입을 위해 러시아와 손잡고자 했으나, 러시아를 불신하고 러시아와 서유럽의 이해가 일치하는 것을 불안하게 여기는 동유럽에서는 여기에 최대한 어깃장을 놓으며 미국에게 서유럽을 막아달라고 요구했다.[103] 폴란드의 법과 정의당이나 헝가리의 빅토르 오르반 등이 최근 권위주의에 가까운 모습을 보이면서 서유럽의 자유민주주의 국가들의 맹공을 받는 중이다. 유럽연합의 만장일치제를 악용하는 건 덤이고.[104] 물론 미국이 동아시아에 적극 개입하는 상황에서 현실적으로 일본이 한국의 안보를 위협하기는 어려운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민주화 이후의 한국의 정권(좌우파 가리지 않고)이 정권의 지지율을 위해 일본에 의한 안보 위협을 강조하는 면도 있기도 하다[105] 적성국이더라도 마찬가지인데 강력한 적일수록 쓸데없는 명분을 내주는 일은 피해야 한다는 것이다. 독일이 러시아와 매번 대립하면서도 나치 문제에서 만큼은 저자세로 나가고 승리의 날에도 참여하는 것은 그런 이유이다. 러시아의 인권 문제를 비판하려면 적어도 현재의 독일은 깨끗하다 내지는 최소한 깨끗해지려고 노력하는 척이라도 해야 외교 무대에서 말빨이 서는 것이니까.[106] 나폴레옹대륙봉쇄령[107] 카이저마리네무제한 잠수함 작전이나 크릭스마리네 유보트의 봉쇄 작전[108] 아무리 기술이나 역량이 뛰어난 일본이라 하더라도 지금같이 뒤쳐진 첨단 산업 부분을 단숨에 한국과 같은 수준으로 올리기는 어렵다. 더구나 이를 책임져야 할 일본의 대기업은 도산하거나 타기업에 흡수 합병된지 오래다. 더욱 암울한 것은 아직 4G 기반도 못살린 일본의 인프라로선 5G도 언감생심이다. 2020 도쿄 올림픽을 최초의 5G 올림픽으로 치르겠다고 선언했지만 제반기술도 없다보니 한국의 삼성에 의존해야 할 정도로 열악하다.[109] 일본인의 입장에서 보면, 일본 제국은 당대 전세계에서 기술적, 정치적, 군사적으로 가장 빠르게 진보하며 단기간에 열강으로 도약했음은 물론 패권까지 꿈꾸던 제국이었다. 그러나 그런 일본인들의 '자랑스러운 조국'은 어째선지 이길 수 없는 전쟁으로 치달은 끝에 패전하고 해체되었으며, 일본의 진정한 전성기는 아이러니하게도 전후의 민주주의와 평화 속에서 이루어졌다. 겉보기엔 찬란했던 제국이 불과 10여년만에 파멸했던 이유를 이해하려면 군국주의천황제 파시즘의 문제를 파고들지 않을 수 없으며, 모든 문제를 미국이나 연합국, 혹은 세계정세의 책임으로 돌리려는 일본 극우들의 태도는 훗날 자신들의 조국이 같은 기로에 섰을 때 같은 오판 끝에 같은 결론에 도달하게 만들지도 모르는 위험한 정신승리에 불과하다. 한국의 교과서는 구한말 패망사를 폐쇄적인 국정 운영과 당파싸움, 시대착오적인 체제가 낳은 결과라고 가르치며 반성하고, 독립 이후 다시는 세계적인 흐름에 뒤쳐지지 않기 위해 냉전의 최전방에서 자본주의 질서에 적극적으로 가담하며 국제주의적인 선택을 해왔다.(다만 당파 싸움이 무조건 나쁘단 식의 교육은 독재자들이 독재정치를 정당화하는데 이용되었다는 문제점이 있었다. 독재자들은 야당의 비판을 당파 싸움이라 매도하며 야당을 탄압하고 절대 권력을 휘둘렀다. 독재에 맞서는 운동권도 내부비판을 분열책동이라고 찍어누르며 일치단결만을 강조하는 등 당파 싸움을 막는다며 집단주의를 강요했다.) 중국 역시 부패와 자만심이 잉태한 결과물인 치욕의 세기를 반면교사삼아, 시진핑이 발톱을 드러내기 전까지 반 세기 가량 절치부심하며 도광양회의 자세로 실력을 키워왔다. 피해자와 가해자는 입장이 다르니 일본인 입장에서 굳이 식민지배제국주의까지 부정할 필요는 없다 치더라도, 일본의 자칭 우익들이 진짜 자기네 조국의 미래를 생각한다면 적어도 군국주의파시즘, 정신주의에서 비롯된 여러 비이성적인 정책결정 과정, 그리고 그 와중에 저질러진 수많은 전쟁범죄만큼은 정확히 짚고 넘어가야 마땅한 것이다. 누구보다 국가주의적일 구 일본군 내에 해군반성회같은 집단이 괜히 생기는 것이 아니다. 일본인들이 일제 패망사에서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고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다면, 그건 주변국에도 비극이겠지만 결국 일본의 미래에도 심각한 손해를 미칠 뿐이다.[110] 물론 백색국가 제외 및 수출규제 등으로 일본이 한일관계에서 강경하게 나오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동시에 지소미아는 유지해야 한다는 입장을 지속적으로 피력해 왔고, 한국이 지소미아 종료로 위협하자 매우 민감한 반응을 보이며 주일대사를 불러 항의하기까지 했다. 만일 일본이 한국을 정말로 적대국으로 본다면, 지소미아도 일본이 먼저 파기하자고 나서지 않았겠는가?[111] 이 연설은 당시 김대중-오부치 선언이 채택된 후 나온 연설이다. 이 연설에서 김대중은 일본의 과거사 직시, 평화헌법 준수, 한반도 평화정책 지지를 호소했고 위 발언은 그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112] 세계 최강대국이라는 미국조차도 한미 방위비 협상 하나 뜻대로 해결하지 못해 트럼프 임기 내내 질질 끌다가 결국 정권이 바뀌고 나서야 타결했고, 이란을 상대로 한 핵협상 수싸움에서도 기선제압을 당한 형국이다.[113] 만약 2차대전 이후 프랑스가 승자랍시고 독일을 4조각내거나 베르사유 조약 당시처럼 독일 경제를 파괴할 생각만 했다면, 독일 내에서도 당연히 이대론 못살겠다 다시 한 번 붙어보자 하는 국가주의가 재득세했을 것이다. 전혀 사실이 아니다. 프랑스는 2차 세계대전 뒤 독일의 심장이나 다름없었던 루르 공업 지대를 서독에게서 빼앗아 해체하려 했고, 동시에 자를란트 지역을 합병하려 했으며, 당시 서독의 총리였던 콘라트 아데나워는 이에 대해 어떤 대응도 하지 않고 프랑스가 때리는 걸 고스란히 맞았다. 루르 국제 통치령은 영국-프랑스 관계가 소원해지고 미영관계가 친밀해지자 고립 위기를 느낀 프랑스가 독일과의 연대를 꾀하면서 반환된 것이며, 자를란트의 합병은 프랑스 내부의 반대와 현지 주민들의 격렬한 반발로 무산되었을 뿐이다. 실제로 꽤 오랫동안 프랑스는 루르 국제 통치령을 통해서 서독의 경제를 마음대로 주물럭거렸다. 이 역시 잘못되었다. 서독이든 동독이든 특수노정과 패권 도전을 시도하기는커녕 그럴 능력 자체가 없었다. 동독이 소련의 꼭두각시였던 거야 더 말할 것도 없었고, 서독 역시 루르 국제 통치령은 서독의 산업 핵심이었고 이를 점유하고 있는 한 프랑스는 독일의 뒤통수에 장전된 총을 들이대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즉 패권 도전을 하고 싶어도 할 여력이 전혀 없었으며, 만일 패권 도전을 하기 위해 4개국의 통제 밖의 군비증강을 시도하는 순간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군이 본과 베를린을 불태워버렸을 것이다.[114] 예컨대 일본이 독도에 깔짝대는 것이 싫으면 재무장은 용인하고, 대신 재무장이 일본의 니즈를 충족시키는 동시에 한국에게 실질적인 위협이 되지 않도록 몇 가지 제약을 걸 수 있다. 일본도 후쿠시마산 수산물을 팔고 싶으면 자국 역사 교과서는 바꿔야 하고, 대신 후쿠시마산 수산물 안전성 검증 가운데 몇 가지는 한국 정부에서 수행하는 식으로 협상한다거나. 전몰자 추도를 하고 싶으면 하되 야스쿠니 신사 대신 다른 곳에서 하고 거기에 한국이 같이 기부금을 좀 내준다거나, 아니면 일본이 신사참배 하는 대신 한국 독립운동가 추도 사업도 같이 지원한다거나. 전후 독일과 프랑스의 알자스-로렌과 루르 공업지대 철강 산업 공유처럼 한국의 우위인 독도와 일본의 우위인 7광구 해저자원을 연계해서 개발한다거나.[115] 사실 외교는 제로섬 게임이 맞다. 다만 여기에서 하는 말은 외교를 하는 두 당사자 사이에서의 제로섬 게임이 되지 말아야 한다는 것. 다르게 말하자면 결국 성공적인 외교는 외교를 하는 당사자들이 아니라 제 3자에게 최대한의 손해를 입히는 것으로 귀결된다는 것이다.[116] 실제로 독일 7분할, 4분할 등 독일을 갈가리 찢어버리는 계획은 전쟁이 끝나기도 전부터 계속 논의되었으며 독일의 모든 산업시설을 파괴해 독일을 갈가리 찢어 영원한 농업국가들로 나눠버리자는 주장도 나온 바 있었다. 이게 저지된 건 결국 냉전 때문이었지 독일에 대한 용서와는 전혀 관련이 없었다.[117] 물론 세계사를 찾아봐도 한일관계와 같은 관계를 가진 나라들끼리 저런 이상적인 상황이 일어난 경우는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드물기에 현실을 등한시한 속편한 소리라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118] 2020년 11월 15일부터 한국과 일본은 RCEP 회원국이 되었다.[119] 한국도 TPP에 가입할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120] 이 사자성어는 +EU+영연방 연맹국 동맹체를 의미한다.[121] 항목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