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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8 15:45:57

일본 대중문화 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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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일본 문화 받아들이자.”
1995년 4월 12일, 김대중 당시 아태재단 이사장.
당시 MBC 뉴스데스크 KBS 보도자료

1. 개요2. 초기 인식
2.1. 외교적 측면2.2. 각계의 반응
3. 인식의 변화4. 본격적인 한일 대중문화의 개방
4.1. 개방 범위 요약(사실상 폐지)4.2. 영화
4.2.1. 개방 이전4.2.2. 개방 이후
4.3. 만화4.4. 게임4.5. 음악4.6. 방송4.7. 코믹월드 등 일본식 동인 행사 상륙
5. 개방 여파와 현황
5.1. 업계 등지에서5.2. 어린이 및 청소년
6. 만약 지금까지 개방하지 않았다면?7. 미완으로 남을 뻔한 일본 대중문화 개방8. 한국에서의 인기
8.1. 1980년대에서 1990년대까지8.2. 2000년대8.3. 2020년대
9. 어록10.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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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국민의 정부부터 참여정부 기간인 1998년부터 2004년까지 6년 동안 4차에 걸쳐 이어졌던 일본 대중문화 수입 제한 철폐 정책. 이전의 문화체육관광부의 불법적인[1] 내부 지침에 근거한[2] 일본 대중문화[3] 수입 제한 정책은 이 시기부터 제한 범위를 줄여나가 사실상 수입 허용 정책으로 전환했으며, 잔존해 있던 마지막 일본 문화 수입 제한 정책이 완전히 폐지된 것은 윤석열 정부 시기인 2023년에 들어서였다.

2020년대를 기준으로 하면 인터넷이 이미 대중화된지 오래 되었고 외국 분위기를 살린 음식점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등 전 세계의 다양한 문화를 사실상 제한 없이 향유할 수 있기 때문에[4] 의아할 수도 있지만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조금이라도 일본 문화나 일본풍을 띄면 왜색이라고 해서 양성적으로는 금기시되었다.

물론, 한일 대중문화 개방이 본격적으로 되기 이전에 나온 슬램덩크, 독수리 5형제, 피구왕 통키 등에서 볼 수 있듯이 만화애니메이션은 국내 만화잡지 출판사와 방송국에서 수입하여 판매, 방영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일본 대중문화를 아예 접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런 경우는 매우 엄격한 현지화를 거쳐야 했다. 등장인물이름배경을 한국/한국식으로 현지화하는 것은 물론 화면에 등장하는 모든 이미지에서 일본이 직접적으로 연상되는 요소는 한국식으로 바꾸거나 덧칠해야 했고, 기모노, 닌자, 사무라이, 스모 등 어떻게 해도 한국화가 불가능한 요소는 아예 해당 에피소드를 삭제하거나 기모노를 한복으로, 스모를 씨름이라고 대충 둘러대면서 방영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다 보니 저연령층 시청자들 중에서는 당시 저녁시간에 지상파에서 방영되던 애니메이션이 일본 원작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반면 일본어 및 일본 배경, 일본인 가수, 배우, 출연자를 배제할 수 없는 보컬음악, 실사 영화 및 TV 방송은 용산전자상가나 회현동 지하상가 같은 곳에서 일본 문화와 관련 불법복제 비디오나 CD가 음성적으로 많이 돌아다녔기 때문에, 아무래도 대중문화에 끼치는 파급력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지만 일본 문화 자체는 널리 퍼져있는 상태였다. 여기에 마지막 일격을 꽂은 것은 BS방송이라고 부르는 위성방송으로, 정부가 물리적으로 이를 막을 방법이 없었다.[5] 결국, 대한민국에서는 일본 문화가 음성적이고 불법적인 형태로 유입되는 것을 차단하면서, 일본 문화 컨텐츠를 합법적으로 수용하는 방안을 만들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 김대중 정부의 일본 대중문화 개방에 대한 국민들을 향한 설득 이후 일본 문화는 본격적으로 개방되기 시작한다. 굳이 일본 문화 매니아가 아니더라도 지금에 와서는 극단적인 혐일주의자가 아닌 한 좌우 가리지 않고 인정하는[6] 김대중 전 대통령의 업적이다. 동시에 노무현 전 대통령의 업적 중 하나로도 볼 수 있는데, 실제 노 전 대통령은 방일 당시 출연한 한 일본 방송에서 게스트로 출연한 초난강(쿠사나기 츠요시)이 일본 대중문화 개방에 대해 묻자 국가가 문화 분야에 간섭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고 생각한다며 일본 대중문화 개방 정책에 힘을 실어주었다.

국가기록원의 정책 설명은 이곳을 참조.

2. 초기 인식

2.1. 외교적 측면

1945년 8.15 광복 뒤부터 1998년 10월 이전까지 한국은 일본 대중문화를 대량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것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는데, 기본적으로 일제강점기를 겪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당시에 문화말살정책까지 시행해서 우리 문화를 지우려고 했으니 문화만 놓고 봐도 일본에 대한 거부감이 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연유로 한일 간에는 가깝고도 먼 나라라는 인식이 형성된 것이다.

한국은 광복 이후 20년이 지난 1965년이나 되어서야 일본과 국교 정상화가 되었으며, 한일국교정상화 과정에서 한일 정부 간의 견해 차이와 국민들의 반발이 엄청나게 벌어졌을 만큼 과거의 식민지배에 대한 기억이 남아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일본에 대한 사회적인 반감도 높았다. 그래서 국교 수립 이후 정치/경제적으로는 일본과 친밀해졌지만 일본 대중문화 개방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일본학자 이성환 교수의 견해에 의하면 문화교류와 관련된 양국의 입장은 한일 양국 간 국교정상화 과정에서 잘 나타나 있으며, 이는 식민지 지배에 대한 양국의 평가를 그대로 반영해 내고 있다. 한일국교정상화는 '세계에서 가장 긴 협상과정'이라고 잘 일컬어지는데, 이는 같은 식민피해자인 대만이나 동남아 각국이 1950년대부터 일찍 일본과 교류한 것만 봐도 이는 예외적인 모습이었다. 그만큼 두 나라와의 갭은 너무 컸던 것이었다.

이정식 교수는 1950년대 이승만 정권 시기 한일협정 실패 이유로 협상 과정에서 한국인들이 원한 것은 일본인들에 의해 짓밟힌 국민감정을 진정시킬 수 있는 것은 '정신적 화해'를 거론했는데, 한국은 일본에 대해 정신적/도덕적, 통합적, 동양적이었으나, 일본은 법적/실용적 입장을 취하며 단편적이며 서구적으로만 보았다. 고로 한국인은 인간의 고통과 모욕감을 논한 반면, 일본인은 그러한 식민지배가 한국에 가져다 준 물질적 혜택을 거론한 것이다.[7]

그런고로 한일협상에 대한 가장 큰 문제는 식민지배에 대한 인식의 차이였는데, 일본의 식민지배는 한국에 유익하다는 구보타 간이치로(1902~1977)의 망언과 한국 국민을 노예상태로 규정한 1943년 카이로 선언으로 대표되는 양국 간의 갭이 1950년대 한일협상을 난관에 봉착하게 만든 것이다. 이 협상에서 일본 측은 물질적 피해만을 강조하며 법률적 접근을 시도한 반면, 한국 측은 정신적 피해를 강조하며 도덕적 측면 또한 강조했다. 이용희 교수 역시 일본에 대한 저항이 전통적 왜노관(倭奴觀)-상무적 후진문화로 보는 멸시에서 호랑(虎狼)과 같은 수구관이 첨가되어 그 위에 우리보다 앞선 근대국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요인이 겹쳐 민족적 대립의 콤플렉스가 형성되었다고 같은 맥락에서 얘기했다.[8]

이런 민족적 정체성의 손상은 자연스레 일본 식민지배 반성과 사과의 요구로 이어지며, 동시에 한국 사회에서 왜색 지우기와 일본 문화유입 금지 조치로 구체화된 것이다. 이런 인식 구조 하에서 일본 대중문화는 '한국인의 대일 거부감이란 국민정서의 상징이자 일본에 대한 민족적 거부 심리의 최후의 보루'[9]로서 정착해 왔던 것이다. 이런 면에서 보면, 식민지배에 대한 일본의 인식변화가 없는 한은 일본 대중문화의 한국 유입은 아주 곤란했던 것이다.

1963년 2월 13일에 개최된 예비교섭 문화재관계 제1차 회의록 요약본 2페이지에 의하면, 한일회담 당시 문화재관계회의 교섭과정에서 문화교류에 대한 한-일 간 입장에서도 잘 드러나는데, 문화재소위에서 한국은 1905년 이후 식민지배 시기에 일본으로 유출된 문화재 반환만을 전제로 했으나, 일본 측은 문화재 반환을 계기로 문화교류를 협정해 문화개방을 촉진토록 요구했다. 이로 미루어 보아 문화재 교류 의무는 없으나, 문화협력의 견지에서 문화재 인도를 고려한다는 일본 측 입장과 문화교류보다 식민지 약탈문화재 반환이 선결과제라고 하여 반환문화재 품목의 목록제출을 요구하는 한국 측 입장이 맞섰던 것이었다.

재차 일본 측은 문화재 품목 목록과 문화협력 문제를 병행해 토의하고 의정서를 채택하자는 식으로 문화재 문제 해결을 요구했고,[10] 결국 양국의 입장을 절충하여 1965년에 <문화재 및 문화협력에 관한 협정>이 체결되었다. 이 선언에서 양국은 문화교류에 대해 가능한 협력한다는 내용의 선언적 규정을 두었다. 이 회담에서 한국은 일본으로부터 문화재를 되찾아 손상된 민족문화를 회복한다는 의도를 지닌 반면, 일본은 문화재를 반환하는 대신 한국이 일본문화의 유입을 허용토록 하는 전제조건이 깔려있었던 것이었다.

국교 정상화에 즈음해 한국이 일본 문화를 강력히 막아왔던 것에는 신생독립국으로서의 사정 역시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근대 민족국가 성립 전에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식민지 동화정책이라는 미명 하에 민족말살정책을 뼈아프게 경험한 한국으로서는 민족문화 복원이 큰 과제로 놓여있었다. 당대 상황을 고려하면 일본문화 개방은 일본 문화의 일방적 수용으로 직결될 위험이 된다는 현실도 고려되었을 수도 있다.

그 증거로 한일협정 이후인 1965년 6월 28일 대통령비서실박정희 대통령에게 국교정상화에 따른 일본문물 대량 유입 문제점으로 '국내문화 활동 위축과 문화주체성 약화, 가치판단성 기준 동요' 등을 들며 문화재 자체의 대비책과 정부입법 등의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보고한 바가 있었고, 1966년 3월에 정부는 <국교정상화에 따르는 일본의 정신적 침투에 대한 여론>이라는 보고서에서 "일본 문화 도입으로 정신적 피해를 초래할 일본의 독소문화에 휩쓸릴 위험이 있음을 우려함으로써 일본의 퇴폐적 저급문화 및 정신적 침략을 받게 될 일본풍 종교에 대해 경계한다"고 강한 우려를 표했다.

2.2. 각계의 반응

이렇게 위에서부터 일본 문화 개방에 난색을 보이는 가운데, 당시 대학가도 1964~65년 6.3 항쟁한일협정 반대투쟁, 1984년 전두환 방일 반대 투쟁에서 볼 수 있듯 일본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다.[11] 그리고 이러한 사회 분위기는 좌우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일본 문화 개방에 대해 사회적 반대가 심한 것은 당연지사였다. 운동권에서는 종속이론에 근거하여 매판자본 및 일본 종속화 비판, 외세 배격이라는 이유로 일본을 달가워 하지 않았는데, 비슷한 맥락에서 일본 수입차 역시 한국 시장에서는 거의 판매고를 올리지 못했다.

광복회 등 호국보훈 단체와 순국선열 유족회 등 애국 성향 단체들 역시 과거 35년간 한반도를 장악 및 지배하여 한민족을 고압(苦壓)으로 몰아간 왜놈들의 저질적이고 침략적인 문화를 받아들이는 것은 문화 분야에 식민지를 만들어낼 우려가 있다는 의견을 제시하면서 반대했다.[12] 거기에 독도 영유권 및 재일교포 차별 문제까지 해결되지 못한 마당에 일본의 대중문화를 개방한다는 것에 반대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경제적으로도 우려가 있었는데, 일본에게 국가 재정의 반(半)을 파탄시킬 정도로 돈을 퍼줄 대가가 있느냐는 의견도 나왔다.[13] 당시는 일본어를 쓰거나 일본에 대해 긍정적인 발언을 하는 것도 주의깊게 해야 하는 그런 시대였다.

종교계의 반대도 심했는데, 가령 천주교개신교계의 경우 제암리 학살사건이나 신사참배 강요 때문에 앞장서서 일본 문화를 배척했다.[14] 특히 당시 '낮은 울타리' 같은 잡지에서는 대놓고 "일본 문화는 마귀적인 우상 숭배 문화이니 죽어도 들여올 수 없다."는 논지의 글도 있었다.

성균관유교유림[15]도 반발하며 한민족을 말살하고 유교 문화까지 탄압하며 말살하려고 했던 일본의 대중문화를 받아들이는 것은 일본군과 맞서 싸웠던 조상들에 대한 모독행위라고 비판하였다. 그나마 불교계는 대일 교류의 역사가 꽤 됨에도 부정적인 반응이 더 많았다.[16] 원불교와 같은 민족종교도 마찬가지였다.

일본은 성적인 컨텐츠가 당대 한국보다 훨씬 활성화되었던 데다가 이런 종류의 대중문화가 어느 정도 퍼져 있는 상황이었다. 물론 일본 내에서도 이러한 만화나 영화, 드라마에 대해 심의를 강화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지만 일본의 방송국들 대다수가 민영방송이었고 자극적인 내용으로 시청률을 올리려는 민영방송들은 선정성이나 폭력성이 강한 프로그램을 내보냈다.[17] 민영방송이 신문사와 겸업을 하고 있어서[18] 이러한 심의 강화 움직임에 대해 대응을 하였던 것. 거기에다가 이러한 심의 움직임에 대해 문화계 내부의 반발이 강해서 결국 이러한 움직임은 흐지부지되었다.

하지만 1990년대 이후로부터는 범죄 관련 사건 사고가 자주 일어나면서 심의가 강화되어가고 있지만 한국에 비하면 여전히 폭력성이나 선정적인 프로그램에 대해서 관대한 편이다. 더군다나 한국에서 인기를 얻었던 만화 가운데서도 이런 폭력성이나 선정성이 심각한 만화들도 꽤 인기가 있었기 때문에 '일본 문화는 저질 문화'라는 통념이 한국을 지배하던 시기였다.

그 뿐만 아니라 일본에서 제작된 컨텐츠가 아니더라도 왜색이 짙다는 이유로 일본을 다룬 영화가 수입 단계부터 불허되거나 수입했어도 개봉을 허용하지 않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1964년 동아일보는 일본 문화가 유입되는 당시 상황을 미국이 일본을 서부극으로 장악했듯, 일본이 한국에 가하는 "제국주의의 새로운 침략 형태"라며 이러다간 "한국의 얼은 머지않아 일본화된다"고 우려하기도 했다. 일본 문화를 향유하는 주로 중상류 계층에겐[19] "그들은 TV를 통하여 일본화되어 가고 있다"거나 "뒷골목에는 일본의 저속한 잡지가 유통되고 있다"고 비난했다. 기사.

해당 기사를 읽어보면 대중문화 자체보다도 여러 일본어 잔재들이 살아나고 일본 음식과 수입품들이 쏟아져 들어오는 등 전반적인 일류 현상 자체를 경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승만 대통령 재임 시기만 해도 이런 일본산들이 판치지 못했는데, 자유당 말기와 장면 내각부터 이런 흐름이 완화되더니 박정희 정부 들어 심해졌다며, 정부도 이에 당황했는지 제재 강화를 고려하고 있다는 공보부 장관의 말로 기사가 마무리된다. 실제 박정희 정부는 1967년에 한일문화교류 협정을 추진하려고도 했으나, 여론이 좋지 않자 무산시킨다.

이는 일본 문화가 아니더라도 주로 일제, 국산을 막론하고 만화, 애니메이션 자체에 대한 당시 부정적인 사회 인식도 한몫했는데, 1948년 수필가 양미림의 <만화시비>와 염상섭의 <만필의 만화시기> 등과 같은 활자 문학인들의 만화 비판, 그리고 간윤의 만화 검열제 등으로 만화를 '비교육적 저질문화' 취급하며 만화 죽이기에 여념이 없었다. 또 어린이날에 어느 나라 작품이건 상관없이 만화책들을 모아 불량만화라면서 태우는 행사 같은 것도 있었고, 심지어 1980년 8월에는 <방송자율정화방안>의 일환으로 폭력성 만화영화 금지 정책을 실시한 바도 있었다.

이런 사회 분위기에서 만화와 애니를 주 문화 산업으로 키워나가던 일본 문화 같은 걸 개방할 이유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당시의 만화, 특히 일본 만화가 주로 폭력에 포악성을 강조하는 대목이 많고 노출 장면도 잦다는 악평이 있어 일본 문화가 저질 문화로 인식되어 온 것도 더해졌다. 그리고 이런 편견 때문인지 2000년대 초만 해도 건전한 수준의 전연령용 및 아동용 컨텐츠가 들어오면 "이게 일본 만화였어?!"라고 놀라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그 여파로 전 세계적으로 인정받던 구로사와 아키라, 미후네 토시로 등 일본 영화인들, 일본에서 많이 활동한 덩리쥔 등은 유독 한국에서만 대중들에게 전혀 인지도가 없는 상태로 20세기가 지났다.

3. 인식의 변화

사실 1990년대 이전까지는 인터넷이 대중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일본 문화뿐만 아니라 일본에 관한 소식 자체를 객관적으로 접할 수 있는 매체가 별로 없는 시절이다 보니 수입이 허가된 일부 아동급 애니메이션 등을 제외하곤[20] 케이블 방송도 없던 시절 한국 지상파 TV 방송을 타는 것이 제한된[21] 많은 일본 문화들은 성인급으로 가면 알만한 정보가 많이 차단되어 있었다.

물론 이때도 한국내에 음성적으로 들어온 일본 문화로 인해 개방 이전이지만 특히 일본과 가까운 부산이나 대도시인 서울 등 일부 지역에서는 매니아층이 형성되어 있었고, 일본 현지에 비해 시기는 늦지만 유행하는 패션이나 음식 같은 것이 알려지기도 했었다. 문화와 무관하게 일본 제품은 품질을 인증받아 좋은 제품으로 취급되기도 했고. 다만 당시 정서상 일본 문화에 심취한 마니아는 퇴폐 문화를 즐기는 날라리오타쿠 비슷한 취급을 받기도 했고, 불법물 관련해서 경찰서를 다녀오는 일도 있는 등 개인이 뭔가 주체적으로 접할 기회는 거의 없다 보니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일본 문화가 굉장히 왜곡되어 접해지는 측면이 있었다. 여러모로 사회적 시선이 고울리 없었다.
그렇다. 일본문화개방을 우리는 법적으로 승인한 일이 없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일본문화가 경계둑 너머 갇혀 있기라도 한 것인가. 다 아는 사실이 아닌가. 이미 그 둑은 무너졌고 그 검은 안경을 눌러쓴 일본문화가 어두운 통로를 거쳐 서울의 샹들리에 불빛에 버젓이 번쩍이고 있는 것을. 청담동의 어느 카페를 가보라, 그곳은 결코 서울의 카페가 아니다. 일본 그림 아래 일본식 쇼트컷을 한 일본 패션의 여자와 남자가 일본 노래에 푹 젖어 차를 마시고 있다. 물론 10대들이 태반이다. 청담동 뿐만이 아니다. 명동에는 금지된 가요 음반과 금지된 잡지가 줄을 이어 널려 있다. 10대보다 더 어린이들의 놀이대상인 만화 비디오도 거의 일본 것이 압도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찾아서 보는 게 아니다. 그저 길을 걷노라면 쉽게 눈에 띄는 것들이다.
경향신문 1994년 3월 5일자 정동칼럼 <이미 둑을 넘어온 일본문화(신달자 글)>
그렇지만 위의 칼럼에서 보듯이 이렇게 정치권이나 겉으로 드러나는 대중의 부정적인 인식과 다르게 1990년대 접어들어선 사회 개방 분위기나 서서히 늘어나던 PC 보급과 함께 일본 문화가 암암리에 퍼져나갔고, 특히 대도시 지역 청년층들 사이에서는 이미 일본 문화가 알게 모르게 소비되는 중이었다.

참고로 일본 문화의 보편화가 거의 진행되지 않았던 1960~70년대엔 일본의 대중문화인 일본 만화, 영화는 주로 일본 문물에 관심이 많고 일본어가 가능한 지식인 계층이나 일본 출판물을 입수할 수 있던 중상류층들이나 소비할 수 있었던 것들이었다.[22] 그러나 1970년대 후반 쯤 되자 상황이 점차 바뀌게 된다. 1970~80년대 당시 독재정권 하에서 해외여행이 제한되어 있던 한국이라 할지라도, 무역업을 하거나 여러 이유로 해외에 나가는 사람들은 곧잘 일본 물건들을 사서 들여오고 있었고,[23] 보따리 장수나 비공식적인 루트를 통해 어느정도는 해외 상품이 들어왔다. 남대문 중국 대사관 앞에는 해외서적 서점이 꽤 있었는데, 이곳에서는 비록 몇 달 지난 것이어도 일본의 논노를 비롯한 다양한 패션 잡지를 사서 볼 수 있었고, 'Burrn!' 매거진을 구할 수 있었기 때문에 당시 락덕후들도 이러한 상점들을 드나들었다.[24]

물론 당시 상황이 상황인 만큼 몇달 지난 잡지가 들어오는 등[25] 상태는 매우 좋지 않았만 그래도 사서 볼 사람들은 다 사서 봤다. 더군다나 잡지사, 출판사 등에서 돈벌이용으로 일본 서적들을 무단으로 베껴서 출판하는 경우도 제법 많았기 때문에 사실상 일본 문화가 어느정도 펴져있던 상황이기도 했다. 결국, 일본 문화 개방 이전에도 보고 즐길 만한 수준이 되는 사람들은 간접적으로라도 일본 문화를 접하고 있었다.[26]

게다가 부산은 쓰시마 섬에서 넘어오는 일본 TV와 라디오[27] 전파가 잡히는 지역이었기 때문에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일본 음악을 접할 수 있었다. 블루 라이트 요코하마가 유행하기 시작한 지역도 부산/경남이었다.[28] 1980년대쯤 되면 한국이 소비사회로 진입하면서 일본 노래가 다운타운[29]에선 대놓고 유행하기 시작한다. 때문에 이 시기를 1차 일본문화 붐으로 보기도 한다. 나이트 클럽에서는 콘도 마사히코C-C-B, P-MODEL, 안전지대, 마츠다 세이코, Wink, X JAPAN, 나가부치 츠요시 등의 노래가 알게 모르게 울려퍼지기도 했고, 명동과 이태원의 음악 다방에는 자칭 일본음악 애호가들을 드물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다. 심지어 웹툰작가 seri처럼 카드캡터 사쿠라NHK <BS 아니메극장> 류 애니를 접하면서 입덕한 경우도 있다. 다만 부산 시민들 사이에선 1980년 7월에 '일본 TV 안 보기 운동' 같은 걸 벌이기도 했고 1984~1986년경에는 정부가 일본방송 침투에 대해 대책안을 세우려고 했으나,[30] 실효가 거의 없었다.

그리고 일본 문화가 싫다고 해도 가전제품은 일제가 좋다는 사실은 모두가 동의했다. 사실 그 시대에 좀 산다는 사람들치고 소니내쇼날, 워크맨, 조지루시 전기밥솥에 껌뻑하지 않은 사람은 찾아보기가 힘들었다[31]. 이러한 분위기를 중심으로 세운상가, 용산전자상가 등지에서 일본 상품이 유통되면서 덩달아 일본 문화 컨텐츠도 돌아다니기 시작했고, 또한 한국의 빽판 전통에 힘입어, 1980년대에는 복제판 레코드와 테이프가 유통되었고 1990년대에는 복제판 CD나 비디오 등이 유통되었다. 만화책도 이미 1951년 서봉재 화백이 그린 <밀림의 왕자(소년 케니야)>를 시작으로 해적판이 들어와서 성행했다.

일본 애니메이션이나 만화에 대해 논의해 보자면, 이러한 일본 대중문화들을 진지하게 파고드는 오타쿠 문화는 주로 고소득층 소비자들의 문화였다. 이는 1990년대 초중반 PC통신에서 오타쿠는 고급 문화라는 식의 이야기들이 나오는 배경이 되었다. 좀 더 거슬러 올라가면 1980년대 중반 세운상가청계천을 유령처럼 떠돌던 1세대 오타쿠들의 이야기 또한 전설처럼 전해지고 있다.[32]

그리고 한국 내에서도 외국 애니를 접할 기회가 생각보다 많았는데, 자체적으로 애니메이션을 제작하는 것[33]보다 일본, 미국에서 애니 수입하는 것이 훨씬 싸게 먹힌다는 이유 때문에 수입된 일본 애니메이션들이 지상파에서 방영되었기 때문이다. 정확하게는 합작 애니메이션인 황금박쥐TBC를 통해 방영되기 시작되면서 인기를 얻게 되자 TBC에서 본격적으로 일본 애니메이션을 수입 방영하기 시작했고, KBSMBC에서도 이를 따라해 일본 애니메이션을 방영하기 시작했다.

물론 이 당시의 일본 애니메이션들은 뾰로롱 꼬마마녀 같은 예외적인 케이스를 제외하면 당대의 방송심의에 따라서 방송사들이 왜색 분위기, 또는 일본어 서체가 있거나 일본적인 성격이 짙은 부분은 모두 삭제 및 영상편집기술이 빈약했던 당시에는 모자이크나 블러 처리로 대충 수정하는 방법으로 배제, 지명 같은건 도쿄→서울, 요코하마→인천, 오사카→부산, 교토→경주, 고베→울산 등으로 한국적 분위기로 수정하고 캐릭터 이름 역시 모두 한국식으로 수정하고, 이름도 일본식 이름보다는 한국식 이름으로 고치면서 일본 애니라고 인식하는 이들은 별로 없었지만 TV에 방영된 덕에 일본 문화가 어느 정도 친숙해지는 데 기여하긴 했다.[34]

물론, 이에 대하여 자국 산업 육성 등한시 같은 문제 제기도 많았지만, 방송사 내부에서 애니메이션 제작에 대한 인식 자체가 미비했던데다가 애니메이션 제작 자체가 상당히 돈이 드는 일이라 방송심의가 엄격했던 시절이었음에도 일본 애니메이션은 계속해서 방영되었고, 오히려 국산 TV 애니메이션 제작, 방영이 1987년에 와서야 이루어졌다.[35] 그나마 이것도 올림픽 + 시청료 거부 운동의 영향 덕택이었다. 제작 계획 자체는 이미 1970년대부터 있었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미뤄졌다.

애초에 이때는 이런저런 검열하고 수입에도 일정부분 제한을 가하거나 수입금지 딱지를 붙였던 시절임에도 애니메이션 쿼터제 같이 국산 애니메이션을 체계적으로 지원하는 제도가 의외로 존재하지 않았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라 더 그렇다. 정부 부처 지원으로 영화 애니메이션을 지원해 줬다고는 하지만 그것도 무턱대고 지원해 준 것도 아니었다. 각종 민원에도 TV 애니메이션의 제작이 꽤나 오랜기간 동안 이루어지지 않고 그나마 독재의 끝에 다다라서야 겨우 제작에 나선 것을 생각해 보면 상당기간 동안 당시 정부 부처에서 직무를 유기했다고 봐도 무방한 수준이었다. 당대에 이런저런 검열이나 독점 만화출판사 비호 등으로 국내 만화가들의 창작을 제한시킨 행태를 생각해 보면 의외의 행보였다. 당시 시청료를 2500원씩이나 받아먹고 KBS 1TV에서조차 광고를 했던 시절인데 잘 하는 짓이다

거기에 금지에도 불구하고 방송 프로그램의 포맷이나 만화 캐릭터, 작품[36], J-POP 등에 대해서 표절이 대단히 많았다. 특히, J-POP 표절 사례는 일본문화 개방 직전인 1990년대에 극에 달했는데 단적인 예로 이 시절 최고의 그룹이던 룰라는 자신들의 대표곡인 천상유애가 하필 일본가요 표절곡이라는 것이 밝혀지면서 대중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겼다.[37][38] 그 외의 내용은 표절/공식 판정, 빽판, 클로버 문고, 다이나믹콩콩코믹스, 홍수철 등의 문서 참조.

이전까지 유능한 싱어송라이터였던 홍수철은 일본가요 하나를 아주 대놓고 표절해서 히트를 치다가 표절 사실이 밝혀지면서 가요계에서 개망신을 당하고 매장 당했다. 만화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라서, 학습 만화의 대표주자 중 한명이었던 이원복도 초기작에서 치바 테츠야의 작품들을 표절한 바가 있다. 또 위성방송 항목을 참조하면 알 수 있듯, 성인방송 시청을 목적[39]으로 디렉TV재팬이나 스카이퍼팩트의 수신기(셋톱박스)를 밀수입하기도 했다. 결국, 이렇게 무조건적인 차단은 오히려 음성적인 부작용을 키워 나라 망신만 시킬수도 있다는 역설에 따라 개방의 필요성도 요구되기 시작한다.

게임도 1980년대에서 1990년대 전반기에는 콘솔 게임이든 오락실 게임이든간에 일제 위주였고, 1987년에 국산 게임이 나오기 시작한 이후로도 한동안 제대로 성공한 게임이 나와주지 못한 탓에 2010년대까지도 여전히 콘솔 게임은 일본산 게임의 점유율이 높다. 1992년 폭스 레인저가 성공하고 국산 게임이 본격적으로 양산된 이후로는 국산 게임의 점유율이 올랐지만 오락실이나 콘솔 게임은 여전히 일본에서 제작된 것이 많았으며, 국산 게임이라고 해도 일본 게임의 영향을 적지 않게 받은 작품들이 많았다. 1990년대 중후반이 되어서야 국산 게임의 점유율이 올라가게 되었고, 2000년대 와서는 한국과 일본의 게임 수요 방향이 달라지면서 국산 게임의 점유율이 일본 게임을 월등히 앞서게 되었다.

이렇게 상반된 사회적인 분위기 속에서 일본은 문화개방을 거듭 요구했는데, 사실 한국이 식민지배의 기억을 근거로 일본의 대중문화 유입을 막아온 반면, 일본은 반대로 그 식민지 시대의 기억을 지우기 위해 일본 대중문화 개방에 더 열을 쏟게 된다. 한 예로 일본측은 1972년에 '국제교류기금'을 세우고 1987년에는 '국제일본문화연구센터'를 세워 대외 문화정책을 적극 추진하였다. 1980년대 이래 일본은 '패전국'이 아닌 '경제대국이자 국제화된 일본'이라는 대외 이미지 세탁에 열을 올림으로써 추축국이 아닌 '새로운 일본'을 대외적으로 소개해 과거사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씻으려 했다.

더 나아가 일본의 대중문화 유입이 식민지배를 겪지 않은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수용/확산되고 있다는 점을 이용해 '대중문화의 문화외교적 특성'을 발견해냈다. 그 예로 일본 인기드라마 <오싱>은 한국을 제외한 아시아 각국에 큰 인기를 끌었는데, 이 작품을 통해 아시아 각국은 근대사의 고난과 가족애 등을 일본과 공유함으로써 근대 일본제국 시절 부정적 이미지를 벗는 데 어느 정도 기여해 내기도 했다. 이와 같은 특성은 1987년 대만(중화민국)의 일본 대중문화 개방에서도 나타났다.

위와 같은 일본 문화의 확산을 배경으로 하여 1988년 5월에 영국을 방문한 다케시타 노보루 총리는 런던 연설에서 '세계에 공헌하는 일본'을 실현하기 위한 3개 정책 중 하나로 국제문화교류를 역설했으며, 이듬해 9월에는 5년간에 걸친 <국제문화교류 행동계획>을 발표하는 등 문화외교를 적극적으로 추진하려는 자세를 보였다.

한국에선 1980년대 초반부터 일본문화 개방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기 시작했는데, 1981년 한일의원연맹 제9차 합동회의에서 '문화교류기금 설정'이 합의된 이래 1983년 12월부터 2~3년마다 한일문화교류 실무자회의가 정기적으로 개최되었다. 위와 같은 과정 속에서 일본은 대중문화 개방 문제를 본격적으로 제기했는데, 일본은 한일정상회담 등의 기회를 이용해 틈만 나면 한국에 대해 일본문화 개방을 요구했으나, 식민지 지배에 대한 기억을 지닌 국민감정을 앞세운 한국 정부의 반대로 별다른 진전은 없었다. 1983년 1월 한일경협 차관 협상을 타결하기 위해 일본 총리대신으로서는 한국을 처음으로 국빈 방문한 나카소네 야스히로 총리는 "문화적 국경을 없앨 것"을 강력히 요구하고, 이는 "국민적 기반에 입각한 양국 간의 문화교류를 점차 확대해 나가기로 하였다"는 식으로 공동성명에 반영되었다.

서울 올림픽을 앞둔 1988년 3월, 양국은 외무장관회담에서 민간 중심 기구 '21세기한일위원회' 발족에 합의하고 8월에 제1차 회의가 개최되었으나 결국 문화개방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다음해 5월에는 노태우 대통령의 방일 때 재일 한국인 3세의 법적지위 개선 문제와 한국인 원폭피해자 치료/요양기금 지원 문제, 북-일 관계개선 추진 시 사전협의 등에 합의하면서 일본 대중문화 개방이 언급되었다. 이후 1990년 3월 제4차 한일문화교류 실무자회의에서도 일본은 대중문화 개방을 강력히 요구했다.

그러는 가운데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URWTO, 그리고 정보화와 시장개방으로 대표되는 국경 없는 세계, 이른바 '글로벌 시대'가 도래하였다. 이제 정부도 무조건 문화 쇄국주의로만 나갈 수 없게 된 것. 그런 연유로 일본 대중문화 개방에 대한 사회/학문적 담론이 활발하게 이루어졌으며, 1992년에 노태우 정부는 일본의 영화와 음악 개방 의사를 밝혔고, 1994년 1월 31일 공로명 주일대사가 "일본의 대중문화를 음성적으로 들여오는 것보다 양질의 것을 정면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낫다. 이제 일본영화, 음악들의 수입을 적극 검토할 시기가 됐다."라고 얘기를 꺼냈다. 이듬해 2월에 이홍구 국무총리 역시 일본 대중문화 개방의 필요성을 시사해 문화개방은 필연적이라고 언급하였다. 당시 PC통신 글

그러나 1992년 일본 중의원의 PKO법안 통과로 인한 군사대국화 우려를 비롯해 1995년에는 와타나베/시마무라 망언 사건, 조선총독부 청사 철거, 김영삼 대통령의 한중정상회담 회견 발언("일본놈들의 버르장머리를 고쳐주겠다"), 그리고 독도 영유권 문제와 1998년 한일 어업협정 파기 문제로 국민들간의 반일(反日) 감정이 짙어졌다. 일본 관료들의 망언이나 독도 문제가 불거졌을 때, 운동권이나 호국 보훈단체들은 일본 상품들이나 수상 허수아비를 불태우곤 했다.

이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후보가 일본 문화개방을 언급했고, 대통령 당선 이후 실제로 일본문화 개방에 박차를 가했다. 1998년 4월에 문화관광부는 '대통령에 대한 업무보고'에서 일본 대중문화 개방을 공식 확인하고, 5월 13일 '한일문화교류 정책자문위원회'를 설치하여 공식적으로 일본문화 개방을 위한 준비작업에 착수했다.

김대중 정부 발족 이후 한일관계는 전혀 다른 면모를 선보였는데, 일본 정부궁내청에서는 1998년 10월 7일, 김대중 대한민국 대통령의 일본 국빈방문시 천황과 김대중 대통령과의 만찬에서 처음으로 아키히토 덴노가 한반도에 대한 '고통'과 '사과' 라는 단어를 공식석상에서 처음으로 언급함으로써 과거 일본의 모습과 다른 면모를 보였다. (KBS, MBC) 그리고 김대중 정부의 1998년도 방일 이후 정상화된 한일관계와 함께 일본 정부로부터 30억 달러 차관 도입도 구체화시키면서, 마침내 양국 합의하에 일본 대중문화가 1차 개방이 되면서 만화와 4대 국제 영화제 수상 영화를 시작으로 국내에서 일본문화를 공식적으로 접할 수 있게 되었다.

4. 본격적인 한일 대중문화의 개방

1998년 김대중 정부가 일본 문화 대개방을 함에 따라 일본 문화가 한국에 급속도로 유입되었고, 그 영향으로 이후 태어난 한국 청소년 및 젊은이들 사이에서도 때마침 퍼진 인터넷의 발달로 일본 문화나 일본에 관한 내용을 좀 더 효율적으로 접하고 익힐 수 있게 되었다. 참고로 1차 개방은 영화, 비디오, 만화 중 일부를 즉시 개방하는 내용 등을 골자로 삼았다.

이후 계속해서 합의를 거쳐서 조금씩 더 유입시키는 식으로 진행되었는데, 다만 한일간에 마찰이 발생하면 개방이 일시적으로 중단되는 경우가 발생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2001년에는 일본의 중학교 역사 교과서 왜곡문제와 당시 수상이었던 고이즈미 준이치로야스쿠니 신사 참배 문제[40]로 인해 개방이 전면 중단되기도 하였다. 이에 맞춰서 애국 및 호국단체 등에서는 일본 저질문화 퇴출운동 및 대국민 서명운동을 통해서 일본 문화 전면개방 및 수입정책에 반대하는 활동을 하였다.

하지만 이후 한일관계가 경색 국면을 벗어나자 다시 개방은 재개된다.

4.1. 개방 범위 요약(사실상 폐지)

개방되지 않은 분야도 일본 대중문화 수입을 명문으로 금지하는 법률은 현재로선 없기 때문에, 일본 비디오물 부분을 제외한 항목은 사문화 비슷하게 되어버려 위 금지사항의 효력이 거의 작용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일본 문화 전문 채널에선 15, 19금 드라마나 버라이어티 프로들이 버젓이 나오는 것을 볼 수 있다. 다만 영등위의 일본 비디오물 심의 반려 및 영화로 등급분류 신청할 것을 종용하는 행태나 지상파 일부 방송의 일본어 가창 불허 자체 심의 같은 것이 여전히 존재하는 것을 보면, 아직 관습적으론 일부 분야에서 효력이 남아있다고 볼 수 있다. 몇몇 사람들은 한국 공중파(지상파) 방송에 일본 노래가 나오는 건 금지인 걸로 알고 있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오해다. 옛날부터 일본 가수가 한국 공중파 방송에 출연하여 일본어로 된 노래를 부르는 건 아무 문제 없이 송출됐다. 실제로 일본 대중문화 개방 이전부터 많은 일본 가수들이 SBS, MBC, KBS 등지에 출연하여 일본어 노래를 불렀고, 방송됐다.# 이런 오해는 한국에서 J-POP(일본 노래)의 인기가 매우 낮아 그만큼 방송에 노출되는 빈도가 낮기 때문에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결국 마지막까지 실질적인 규제를 가하던 영등위가 일본 비디오물에 대한 규제[42]를 철폐하기로 하면서, 현재 개방 범위 제한이 효력을 발휘하고 있는 곳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4.2. 영화

4.2.1. 개방 이전

영화의 경우 한때 일본색 뿐만 아니라 일본인이 출연하거나 일본 업체가 제작 스태프로 참여해도 일본 영화로 간주되어 상영이 거의 불가능했다.
- 참고: <공연윤리위원회 X파일> - 원본은 송락현이 쓴 하이텔 게시글로, <송락현의 애니스쿨> 1권에도 수록됐다. KBS 뉴스9 기사에서 비슷한 내용이 언급됨.

아래는 왜색 논란으로 개봉 과정에서 잡음이 일었던 영화들이다.

아래는 국내 제작 영화이나, 영화에 포함된 일본 색채로 인해 상영 허용 논란이 일었던 국산 영화이다.#

4.2.2. 개방 이후

미디어캐슬박수엔터테인먼트가 출범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1998년 10월 20일 제1차 일본 대중문화 개방으로 영화의 경우 공동제작 영화(20% 이상 출자 등 영화진흥법상 요건을 충족하는 경우와 한국 영화인이 감독이나 주연으로 참여한 경우), 일본 배우가 출연한 한국영화, 세계 4대 영화제(칸, 베를린, 베니스, 아카데미) 수상작들에 한해 개방했다. 이에 따라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카게무샤>, 이마무라 쇼헤이의 <우나기>, 기타노 다케시의 <하나비>, 한·일 공동으로 제작된 박철수 감독의 <가족시네마> 등이 개방되었다. 비디오물(VHS, DVD 등)은 극장에서 상영된 영화만 비디오 출시를 허용하였다. 정작 영화인들이 우려했던 '시장 10% 잠식' 우려는 기우가 됐는데, <하나비>와 <카게무샤>는 흥행이 부진해 3주 만에 극장가에서 내려갔다. 당시 저조했던 관객층마저도 중/장년층이 절반이 넘었고, 예상 고객인 젊은층들은 전쟁 장면을 기대했다가 지루하다고 평하기도 했다.

1999년 9월 10일 제2차 일본 대중문화 개방으로 정부가 공인하는 국제영화제(70여 개) 수상작과 전체관람가 영화로 확대(애니메이션 제외)되었다. 지금도 회자되는 대표적인 일본 영화 러브레터가 이 정책의 영향으로 한국에 정식 개봉되어 큰 인기를 끌게 되었고, 이외 다수의 영화가 국내에 상영됐다.

2000년 6월 27일 ‘12세 및 15세 관람가’ 등급 영화, 국제영화제 수상한 극장용 애니메이션에 제3차 일본 대중문화 개방이 실시되었고 이 정책의 영향으로 무사 쥬베이가 일본 애니메이션 최초로 상영되었다. 하지만 2001년 7월 12일 일본 중학교 역사 왜곡 교과서 논란으로 정부가 개방 일정 중단을 선언했다.

2002년 말, 한·일 공동 월드컵 축구 대회 등의 성공적 개최로 양국 국민간의 상호 신뢰 관계가 회복, 추가 개방 분위기가 조성되었고 2003년 6월 7일 한·일 정상회담 공동성명, ‘일본 대중문화 개방 확대’ 표명과 4차 개방 계획안이 마련되었다.

2003년 9월 16일에 제4차 일본 대중문화 개방이 실시되었고(방송과 극장용 애니메이션은 보완 조치 마련해 개방 범위를 조율한 뒤 2004년 1월 1일 함께 개방하였다), 2007년에 일본 문화 수입 제한과 관련 규제 조치를 철폐함에 따라 이로써 2007년부터 일본 영화, 음악, 게임 등의 정식 교류가 이루어졌다.[46]

4.3. 만화

1999년 이후 한국판 뉴타입이 창간 및 발행된 시기이자 일본판 라이트 노벨 역시 발행될 수 있게 되었다.

해적판이 아닌 정식 발매는 1989년 12월 아이큐 점프드래곤볼이 시초였다. 1991년 3월 1일부로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가 외국만화 사전심의 확대를 실시함으로써 제한적이나마 일본 만화 정식수입의 길을 열어놓자 12월에 창간한 소년 챔프슬램덩크로 이에 맞섰다.[47]

간윤의 외국만화 사전심의제가 실시되어 일본 만화가 사실상 개방되자 만화 검열제에 의한 표현의 자유 제한에 일본 만화 해적판의 무차별 유입으로 하도 허덕이던 토종 만화계가 위기를 맞음으로써 한국만화가협회(이하 만협)가 이에 반발하는 성명을 발표했고, 4월 2일에 서울 출판문화회관 강당에서 만협 역사상 첫 대외행사인 '만화심포지움: 일본 만화 수입 이대로 좋은가?'라는 제목의 토론회를 개최해 당국의 만화 정책에 대해 호된 비판을 가했다. 이 행사에서 이현세 화백이 발제한 <작가의 입장에서 본 우리나라 만화의 취약점>을 필두로 이희재 화백이 <왜 우리에게 일본 만화가 문제인가>란 요지의 발제를 했고, 만화평론가 손상익도 <현 심의제도의 문제점과 개선방안>을 발표했다.

뒤이어 1992년 5월에 만협은 일본만화가협회 측의 자료 협조를 받아 280쪽 가량의 <일본만화 불법복제 자료집>을 내서 그간 우리 만화계의 고질적 병폐로 여겨 온 음성적인 일본 만화 베끼기 행태를 처음으로 고발했고, 그해 11월 3일부터 서울 파고다공원에서 만협 주도로 만화가 및 관련 인사 3백여 명이 모여 '불법만화 추방 캠페인'을 여는 한편 1993년 4월에 불법복제 만화 제작업체 15개소를 검찰 등 당국에 고발하여 불법 일본 만화 추방운동을 거듭하였으나, 일본 만화의 끊임없는 유입은 막을 수 없었다. 그러나 외국만화 사전심의제 역시 일본 만화 개방으로 잘못 받아들인 대다수 만화 출판인들이 국제저작권협정상 저작권 계약이 불필요한 1987년 10월 1일 이전 발행분을 중점적으로 내려는 등 부작용이 나와 얼마 못 가 중단된 바 있었다.

1998년 제1차 일본 대중문화 개방이 실시되자 일본 출판만화의 수입 제한이 완화되어 그간 번역을 전제로 했던 제한적 수입에서 벗어나 소년 탐정 김전일을 시작으로 일본 이름 그대로 번역해 판매할 수 있게 허용되었다.

이에 맟춰서 대원씨아이가 일본 카도카와 쇼텐과의 라이센스 계약을 통해서 1999년 6월 한국판 뉴타입을 창간하게 되었으며, 광화문 한복판에도 뉴타입 창간을 알리는 현수막도 내걸렸다. 한국판 뉴타입은 1999년 7월호를 시작으로 2015년 6월호를 끝으로 종간될 때까지 16년간 발행하였다.

또한 국내 대형전문서점 최초로 영풍문고가 종로점 매장에 만화서적 전문코너 개설을 통해서 일본 및 한국만화 판매를 전문적으로 하게 되었으며, 후발로 교보문고, 반디앤루니스가 동참하게 되었다. 이전에만 했어도 만화책은 일본 만화는 물론 한국만화도 홍대 한양툰크 같은 소매서점에서만 어렵게 살 수 있었던 편이었다. 사실 영풍문고도 이전에는 만화책을 판매한 적은 있으나 지금같이 전문코너에서 전시판매하는 방식이 아닌 비소설 코너의 구석진 작은 규모의 서가에서 진열하는 방식으로 판매하였다.

4.4. 게임

소니 인터랙티브 엔터테인먼트 코리아한국닌텐도가 출범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아케이드 게임업계와 함께 일본 게임업계의 주류산업을 담당했던 비디오 게임업계는 '수입선 다변화 품목'의 규제 때문에 제대로 된 일본 게임의 수입이 힘든 상태였다.[48] 수입선 다변화 품목은 외국과의 경쟁시 한국이 극도적으로 불리할수밖에 없는 산업분야를 보호하기 위해서, 이에 해당되는 분야의 외국산 수입을 규제하는 것과 비슷한데, 한국에서의 수입선다면화품목 관련 법규가 실질적으로는 대일수입규제책의 일종이었다는 소리도 있다. 그래서 일제 자동차[49][50]는 물론이고, 상당수의 일본제 공산품 역시 수입규제 대상이었다. 물론 수입규제대상에 일제만 있는 것도 아니었으며 당시 한국경제가 지금도 비슷하지만 수출에 목매달던 무역국가였다는 것도 감안해야한다.

하여튼 이 때문에 1980~90년대에도 일본제 게임기(3~4세대 콘솔)가 몇몇은 정식 계약으로 한국에 정발되었지만 상당수는 해외판 기계를 우회수입하는 것에 가까웠다.[51] 이러한 배경 탓에 전부터 일제 게임을 직접적으로 구하는것은 여의치 않았던 상황에 1995년, 음비법(음반 및 비디오물에 관한 법률)이 개정됨에 따라 우리나라 비디오게임 업계 사상최악의 흑역사의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음비법의 개정에 따라 게임 소프트웨어도 법적으로 '비디오물'에 포함됨과 동시에 정품도 불법으로 간주되어 버리는 웃지못할 사태[52]가 벌어졌고, 이에 따라 경찰이 오면 정품인데도 마약을 거래하듯이 눈치보며 거래를 해야 했고, 용산의 보따리상들이 주도하는 정품 블랙마켓시장이 생기게 된다. 이러한 흐름속에서 정품조차 경찰이 단속하니 어차피 불법복제도 같은 불법이니 복제본을 쓰자는 논리가 통용되어 정품시장은 완전히 사라지게 되며, 남아있는 정품도 슈퍼 패미컴파이널 판타지 6가 20만원, 플레이스테이션파이널 판타지 7[53]이 27만에 유통되는 시대가 온 상황이었다.[54]

결국 정품 시장은 북미 시장이 강세인 패키지 게임만 양성화되는 해괴한 상황이 벌어지게 되었다. 이후 인터넷 시대로 가면서 온라인 게임으로 기울어지게 된 것도 덤. 그나마 일본에서 제작된 몇몇 PC 게임은 왜색이나 선정성 문제가 없다면 한국어화를 거쳐 수입되기도 했다. 코에이삼국지 시리즈가이낙스프린세스 메이커 시리즈, 니혼 팔콤이스 이터널 등이 이 당시에 한국어화를 거쳐 국내에 소개된 인지도 있는 일본산 PC 게임들이었다.

그러던 와중 2000년 6월 27일, 3차 개방에서 게임의 개방도 통과되면서 정식으로 게임이 유통되면서 변화가 오게 된다. 이때는 게임기용 비디오 게임과 일본어로 된 게임은 수입이 허가되지 않았으나,[55] 2003년 9월 16일 4차 개방에서 완전 개방되면서 정식으로 일본어로 된 게임이 발매되기 시작했다.[56] 개방 직후에 소니 컴퓨터 엔터테인먼트 코리아의 강희원 대리는 "3차 개방 때 일본어로 제작된 게임 소프트웨어 수입이 허용되지 않아 유럽과 미국 지사를 통해 영문판을 우회공급해 왔다"며 "게임 시장이 개방되면 일본에서 새 게임을 출시한 후 한국 상륙까지 3개월 가까이 벌어지던 시차가 줄어들고, 한글판 게임의 동시 제작도 가능해지는 등의 긍정적 효과를 기대하고 있다"고 이야기하면서 기대를 내비췄다. 이렇듯 업계도 개방에 호응하면서 일본어 음성/자막 게임이 활발히 수입되면서 비디오 게임 시장이 본격적으로 형성되는 계기가 된다.

아케이드 게임의 경우에는 BEMANI 시리즈를 언급할 수 있는데, 국내 정식수입 초기에는 아래에 서술될 음악 부분의 개방이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아서 심의상으로 일본어 보컬곡은 삭제되고 미디음으로 대체되었다. 게임에 따라서 곡이 아예 삭제되거나(ex: Ultimate power, DM Powerful MIX, ありがとね。) 또는 보컬만 삭제되거나(ex: 正論, 시리토리, 밤비나, 愛のしるし, MISS YOU 등) 영어보컬판이 있는 경우 그것으로 대체되기도 했다.(ex: Believe again, LUV TO ME) 물론 2008년, 유니아나가 비마니 시리즈 발매를 재개하면서부터는 곡이 일본어던 뭐던간에 일부 일본지역 한정곡을 제외하면 한곡도 빠짐없이 수록되는 추세이다. 유비트 시리즈에선 하루하루 같은 한국어 라이센스 곡들이, 댄스러쉬 스타덤에선 아예 한국지역 독점으로 다수의 K-POP 음악들도 수록되었다.

그 외 KOF 97~99의 경우 일본어로 된 음성을 대부분 기합소리 내지는 무음으로 교체한 기판도 있었다.[57]

4.5. 음악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락카페, 롤러장, 디스코장 같은 곳에서 뮤직비디오나 음악감상이 이뤄졌고, 역시 형레코드 같은 어둠의 경로를 통해서 일본 뮤지션의 음반을 구할 수 있었다. 일본 대중문화 개방 전에도 소녀대를 비롯한 몇몇 일본 뮤지션이 한국 지상파 방송에 게스트로 출연하여 일본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58]

또한 일본 대중문화 개방 전에 일본 뮤지션이 합법적으로 공연한 적이 있었는데, 바로 티스퀘어카시오페아와 같은 연주밴드들이 정식 공연을 했었다.[59] 순수 기악곡이다 보니 일본어 가사가 나오지 않고, 음악 스타일 또한 이른바 전통적 의미의 왜색이 느껴지지 않는, 모던 재즈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2차 개방에서 처음으로 2천석 이하의 소규모 공연이 허가되었으며, 3차 개방에서 좌석 제한이 철폐되었고, 4차 개방에서 음악 매체의 판매가 허락되었다. 공연 전면 개방 이후에도 한국에서 일본 가수 팬덤 규모가 작기 때문에, 좌석 제한 철폐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은 규모로 일본 가수들이 한국에서 콘서트를 개최했으며, 관중 동원력이 약하여 수익성이 떨어지는지 방한 텀도 매우 길고 공연 빈도가 매우 적다.

거기다가 쿠보타 토시노부 등 영어로 부른 곡의 경우 정발될 수 있긴 했다.# 이후 문화개방이 갓 되던 시점에서도 마찬가지로 영어 곡으로 발매되었다. 대표적인 곡이 쿠라키 마이Secret of my heart. 당시 4차 개방 이전 B ZONE GROUP의 국내 합작법인이였던 BEING MUSIC KOREA에서 북미지사 GIZA USA가 mai.K라는 명의로 발매했던 영어 버전을 국내에서 들여와 팔았다.

몇몇 한국인들은 아직까지도 일본어가 방송되는 것이 금지되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일단 방송법 상에서는 한국에서 일본어를 방송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지는 않다. 이러한 인식은 방송사의 심의 규정상 비공식적으로 일본어 노래를 심의부적격, 편집 등으로 송출을 자제하고 있는데에서 기인한다. 일본 대중문화 개방을 진행한 상황이기도 하고, 실제로 과거부터 일본어로 된 가사의 노래가 MBC, KBS. SBS 방송 3사를 통해서 방송되기는 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일본 가수에 대한 인기와 관심도가 낮은데다 일본 가수를 섭외하는 과정이 거의 없기 때문에 방송에 노출되는 빈도가 낮을 뿐이다. 게다가 후술한 바와 같이 방송사들은 이미 문화체육관광부의 일본 대중문화 제한 조치가 법적 근거가 없다는 이유로 무시하고 있었고, 문체부 역시 방송사에 대해 금지할만한 권한이 없어서 이에 대해 제재를 하지 못했다.

만약에 법적으로 일본 음악이 금지가 되어야 한다면 뉴스라던가 다른 방송 프로그램에서도 일본어가 방송되는 것이 완전히 금지되어야 하며, 일본인들이 한국 방송국에서도 섭외 및 출연도 금지되어야 하고, 처음부터 일본어로 된 단어 자체가 방송되지 않아야 되는데다 전부 한국어 더빙판으로 번역되어서 방송이 되어야 하겠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당연하다면 당연하지만, 2023년 현재 K-POP 아이돌은 일본인 멤버도 있는 상황이므로 더더욱 일본어를 금지할 이유가 전혀 없는 상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어 방송이 금지되었다고 오해를 하고 있는 사람들은 프로듀스 48에서 내꺼야 (PICK ME) 2절에서 일본어 가사가 나오는 것을 보면서 "어? 일본어 가사도 나오네?"라고 신기하다면서 놀라는 경우도 꽤 있었다.

그리고, 타블로가 꿈꾸라에서 m-flo의 노래를 선곡하는 등 엄연히 라디오 방송에서 일본어로 가창된 유명 J-POP 곡들이 송출되고 있었다. 신해철이 과거 진행하던 라디오 프로그램 고스트스테이션에서 일본 노래를 틀었다가 경고를 먹기도 했다. 물론, 이것은 부당한 제재였다.

이에 대해 신해철 본인이 밝히길, 일본어 노래 자체가 금지인 것은 아니지만, 방송국 자체에 영어가 아닌 외국 국적의 노래를 송출하는 횟수 제한규정이 있는데, 그 횟수를 자기 방송같은 대중가요 방송이 아니라 클래식 음악 방송에서 다 써버리고 있다고 코멘트를 했다. 그래서, 정말로 일본 음악이 금지되었다면 처음부터 신해철의 고스트스테이션 라디오 방송까지도 금지되어 사라져야 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도 않았다.

다만, 일본 음악이라고 하더라도 일본어 가사가 없는 연주곡이나 영어로만 부른 곡들은 문제없이 잘 나오고 있다.[60] 국내 방송에서 수많은 일본 덕후 음악이 BGM으로 삽입되는 것은 이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일본 대중문화가 개방되기도 전에 SBS에서 카드캡터 체리라는 일본 애니메이션을 방영해준 적이 있다. 카드캡터 체리 3기가 인기리에 무사히 종영되고, 마지막에 엔딩곡이 흘러나오는데, 원작과 동일하게 'platina' 3기 오프닝 일본어 원곡 앞부분이 약 10초 정도 그대로 흘러나온 적이 있었다. 당시 하이텔이나 나우누리PC통신 애니메이션 관련 동호회에서는 난리가 아니었다.

다만, 비디오로는 공윤이 놓친 건지 종종 일어판 노래가 나오곤 했다. 1993년 무빅스 비디오로 2편까지만 출시한 아르슬란 전기 애니메이션은 일어판 엔딩영상에 일어판 노래가 하나도 안 자르고 심지어 엔딩에 일어 자막, 제작진 자막까지도 하나도 안 잘리고 모두 나왔으며 버블검 크라이시스 트러스트판 비디오에서도 배경 노래에 작긴 해도 일본 노래가 분명히 나왔으며 1994년에 나온 아랑전설 애니메이션 금문영상 출시판에서도 배경음악으로 나오는 일어판 노래는 그대로 나온 것을 비롯하여 여러 사례가 있었다.

애당초 애니메이션은 심의에서 연소자 관람가나 미성년자 관람불가 둘 중 하나만 받는 게 비일비재하므로 걸리지만 않으면 대충 유야무야 넘어가는 경우가 꽤 있었다. 심지어 이를 악용해서 극장에 개봉한 것이 바로 아키라이다.

위 내용은 어디까지나 방송법 상 공식적으로는 일본어 노래가 금지되어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공중파 방송에서 일본어가 포함된 노래가 송출하기 어렵다는 증언과 근거자료가 다수 존재한다. 국민일보 2017년 기사에 따르면 "라디오나 방송에서 일본음악이 문제가 되는 건 일본어 가사 때문이다. KBS 심의실은 일본어 가사가 포함된 곡을 부적격 처리한다. 일본 음악이라도 가사가 없거나 영어로 돼 있다면 상관없다. 같은 이유로 우리나라 노래도 가사에 일본어식 표현이 있으면 KBS 전파를 탈 수 없다." 고 하였다. 공중파에서 일본 가요는 왜 안 나올까?

그리고 해당 내용은 '아이즈원 미니앨범 '컬러라이즈(COLOR*IZ)' 수록곡 중 '반해버리잖아?'라는 곡이 일본어 가사라는 이유로 심의부적격 판정을 받은 것으로 확인할 수 있다. 아이즈원 `반해버리잖아` KBS 방송 부적격판정 "가사 전체 일본어"

또한 일본 관련 보도자료나 방송 내용을 낼 때 일본어 표현은 삭제하거나 편집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방송 관련 부분에서 후술하듯이 컨텐츠에 일본어곡이 포함되어있으면 편집하는 건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일이다. 2019년에는 노 재팬 이후 프로 스포츠에서 일본어 노래나, 일본 가수가 부른 타 언어 노래가 모두 등장 곡으로 금지되었다는 내부증언이 있다. 그리고, 오피셜은 없지만 실제로 최근 몇 년 사이 일본 등장 곡을 쓰는 선수들이 다 노래를 바꾼 것을 보면 신빙성이 있다고 볼 수는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그것보다는, 그냥 일본 측에다 저작권료를 줘야하는 문제 때문에 바꿨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따라서 실질적으로 공중파에서 일본어 노래가 거의 방송되지 않는 것은 일본노래의 국내 인기부족 이유 외에도 국민정서 및 방송사의 심의 경향에 맞추어 일본 노래를 송출하려는 시도 자체를 하지 않는다는 점이 다소 작용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이런 모습은 부당한 행태이므로 지금이라도 반드시 수정해야 한다.

4.6. 방송

투니버스가 개방의 혜택을 누렸으며, 애니맥스 코리아 개국의 시초가 되었고, 광복 65년만에 한일 애니메이션 동시방영 채널 애니플러스가 개국하게 되는[61] 시초가 되었다.

방송에서도 일본 드라마, 영화, 애니메이션 등 일본 영상물이 방영될 수 있지만, 일본어로 된 것은 안 튼다. 이게 일본어 영상물 팬 수가 적어서 지상파 방송에서 안 튼다고 해석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것으로 설명할 수 없는 현상 즉, 일본어 자체를 지상파에서 트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고 해석될 수 있는 상황들이 있다.

2013년 유행으로 번진 진격의 거인 관련 뉴스를 지상파에서도 보도했을 때 오프닝의 일본어 가사는 절대 안 틀었으며[62] Bad Apple 스톱 모션 패러디물을 '소개'했을 때에도 BGM을 다른 것으로 교체했다. Bad Apple 패러디물인데 정작 그 노래를 안 틀다니? 이런 방식으로는 패러디 제작자가 전하고자 하는 바를 제대로 전달할 수가 없다.[63]

가끔씩 일본어 노래가 쓰이는 경우도 있으므로 전면 금지하고 있다기보다는 방송계에서는 웬만하면 일본어가 들리는 음악을 사용하고 있지 않는 풍토가 있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물론 위에서도 설명했듯이 일본어가 방송법으로 금지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케이블 방송/오디오 채널 분야에서는 얼마든지 일본어 음성을 아무런 제약없이 틀 수 있다. 예를 들어, 2010년대 들어 일본 애니메이션의 동시방영을 모토로, 일본 컨텐츠를 원판 그대로인 유지한채 자막을 입히거나 약간의 편집만 하는 케이블 방송국인 애니플러스가 들어섰고, 애니맥스 코리아, 대원방송, 투니버스도 이에 따라 한·일 동시방영 시장에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방송 분야 개방으로 가장 수혜를 많이 받은 분야는 울트라 시리즈, 가면라이더 시리즈, 슈퍼전대 시리즈[64], 그 외 기타 등등의 특촬물, 그리고 아동층을 대상으로 한 애니들이다.

4.7. 코믹월드 등 일본식 동인 행사 상륙

그 동안 국내에서 볼 수 있었던 만화 동아리 ACA 전국만화동아리연합의 자체 행사는 지금의 코믹월드 같이 상업적인 형태가 아닌 만화 매니아들 사이에서 즐겨왔던 소규모 축제에 불과했지만 일본 대중문화 개방을 계기로 1999년 일본의 만화용품 브랜드 델리타의 한국 법인인 에스이테크노[65]의 출범과 동시에 코믹 마켓 등 일본 동인 행사를 벤치마킹한 코믹월드가 동년 5월 서울 동대문에서 처음으로 개최되었으며, 2000년 이후 온리전 형태의 다양한 행사가 발족하는 계기가 되었다. 2005년부터 정부 공식 후원 행사인 한일축제한마당이 매년 개최중이다.

5. 개방 여파와 현황

5.1. 업계 등지에서

처음 개방 정책이 나왔을 때는 일본 문화에 의해 국내 문화가 잠식될지 모른다는 우려섞인 시선도 제법 많았지만, 이러한 우려가 기우였음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출판 만화 시장과 애니메이션 시장 같은 일부 분야를 제외하고는 다수의 영역이 마이너리티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한 예로 영화 시장의 경우 한국에서 개봉한 일본 실사 영화 중 가장 크게 성공한 작품은 대중문화 개방 직후 개봉한 러브레터인데 이 영화의 관객 수는 공식적으로 약 115만 명 수준이며[66] 이후 실사 영화 중에서는 아직도 러브레터를 넘은 사례가 없다. 2003년 이후 거의 매년 천만 관객 돌파 영화가 등장하는 한국 영화에 비하면 아무래도 초라해 보이는 실적이다.

오히려 역으로 일본에서 한류 현상이 두드러지게 되는데, 이는 2000년대 이후 일본 대중문화(드라마, 대중가요, 영화 등)의 영향력이 쇠락한 영향이 컸다. 그렇게 2000년대 초중반 한류 배우들이 떴다면, 2000년대 후반 이후부턴 K팝으로 불리는 보이, 걸그룹들이 일본 가서 히트치고 있는 실정이다. 이는 한국이 아시아는 물론 전세계적으로 봐도 자국 대중매체의 점유율이 높은 편에 속하는 국가인 점과도 무관치 않다.

또한 한일간 대중문화를 개방하면서 한일 합작 영화와 드라마도 제작되었는데, 우선 국민의 정부 시기만 보면 영화 2009 로스트 메모리즈, GO 등과 드라마 프렌즈가 있었다. 그리고 당시 인적 교류도 있었는데, 일본에서 활동한 한국 연예인으로는 가수 보아, 윤하와 배우 윤손하가 있었고, 한국에서 활동한 일본 연예인으로는 가수 초난강과 배우 유민, 그리고 일본인 멤버가 합류한 밴드 Y2K가 있었다.[67]

다만 일본 대중문화 개방은 이 시기부터 보급되기 시작한 인터넷의 영향과 중복되면서 일본 문화 콘텐츠가 대중적인 컨텐츠로 변모하는 계기가 되었고, 일본 게임, 애니메이션, 만화 오타쿠들이 본격적으로 양산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애니메이션 산업분야는, 이런저런 사정으로 인해 한국에 자생적인 시장이 거의 없다시피 한 꼴이니 영향이 없지 않았다. 대한민국/문화 검열 항목을 참조하면 알 수 있듯이 과거부터 이어온 탄압과 투자 지원 제도의 미비로[68] 기반이 매우 부실해 있었던 한국 애니메이션 시장은 일본문화에 완전히 잠식되어서 뽀롱뽀롱 뽀로로 같은 아동 대상 컨텐츠를 제외하고는 발전을 기대하기 힘든 상황이 되었다. 결국 애니메이션 시장에서는 예측이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애초에 한국의 애니메이션 시장 자체가 작다

하지만 이는 상술했듯 한국 애니메이션 산업이 멀쩡히 잘 돌아가고 있다가 일본 애니메이션의 유입으로 망한게 아니라 이미 한국 스스로 '만화는 나쁜 것'이라며 자국의 애니메이션 산업을 스스로 찍어 누르고 있어 한국 애니메이션 산업이 바닥을 기고 있던 상황에서 일본 애니메이션 산업이 들어와 빈자리를 채워버린 케이스라 일본 애니메이션 탓만을 할 수는 없다.[69]

한편, 출판만화 시장의 경우는 상황이 약간 다른데, 초창기 아이큐 점프나 챔프 같은 잡지가 창간될 시기만 하더라도, 드래곤볼이나 슬램덩크 같은 대형 일본 만화를 제외하면 대부분이 한국 작가들의 만화로 채워지던 시기가 있었다. 지금처럼 잡지 대부분을 일본 만화가 잠식하던 때가 아니었다. 다만 그 이전부터 해적판 만화책은 이미 1952년 서봉재 화백의 <밀림의 왕자>부터 암암리에 존재했으며, 한국 만화계에 좋은 의미로든 좋지 않은 의미로든 꽤나 광범위한 영향을 끼쳤다. 2000년대에 인터넷이 널리 퍼지면서 완전히 붕괴된 것이 가깝다.[70] 또한, 1997년 청소년보호법 파동에 따른 청소년유해매체물 지정 및 만화가 기소, 이후 광랜이 보급되고 퍼져나간 불법 스캔본이 널리 퍼지면서 잡지만화시장이 완전히 붕괴되었고, 이에 반비례하면서 2000년대 후반 이후부터는 웹툰과 학습만화가 성장하고 작가진들 대다수가 학습만화나 웹툰계로 이전한 상태다. 심지어 임달영 화백의 예처럼 해외에서 오히려 성공하는 사례도 있었다.

만화와 애니메이션 업계를 제외한 나머지 업계에서는 일본문화 개방으로 노골적인 표절 대신에 포맷이나 아이디어를 돈 주고 사오는 일이 정착되었으며, 이와 동시에 해적판 만화책이나 복제 비디오 등이 사라지는 긍정적인 효과도 보였으나, 그 자리는 마루마루를 위시한 불법스캔 만화와 무단 업로드된 애니 동영상이 해적판의 악명을 물려받았다.

2004년 4차 일본 대중문화 개방 이후로 개방에 전진은 없는 상황. 5차 개방에 대한 논의가 2011년 정병국 문화체육관광부장관에 의하여 벌어졌으나 유야무야되었다. 애초에 인터넷으로 접할건 다 접할 뿐더러 문화 개방을 통해 양국 모두 상당한 발전과 영향력을 가지게 된 관계로 개방 자체에 별로 큰 신경을 안쓰는 것 같다. 즉 더 이상 정부쪽에서 문화 개방을 위해 힘쓰지 않아도 문화 교류의 범위와 규모가 자동적으로 커지고 있다는 이야기다.

2010년대 중후반까지 한일양국의 정세는 냉랭하지만, 문화 분야에선 이미 상당부분 교류가 있었다. 한국의 뮤지션이나 아이돌이 일본에서 음반을 발매하거나 TV출연으로 인기를 얻어 화제가 되었으며, 이에 미치진 못하지만 한국 현지에서도 일본가수의 내한공연을 접할 수 있게 되었다. 한국에선 케이블을 통해 일본 애니메이션, 방송프로그램을 정식으로 시청할 수 있게 되었고 콘솔게임 시장에서도 수 많은 일본 게임들이 한글화를 통한 정식발매가 이뤄진데다 모바일을 통한 일본 온라인 게임의 한국내 서비스까지 가능해졌다.

그 외에 양국의 문학작품들이 출간되어 작가들의 낭독회나 강연을 통한 교류도 넓어지는 실정이다.

5.2. 어린이 및 청소년

사실상 일본 문화, 특히 만화, 애니메이션, 게임의 주 소비층이라 할 수 있는 어린이 및 청소년(이른바 재패니메이션 키드)들은 전 세대인 '헐리우드 키드'의 후예로, 미국식 부와 자유를 향유한 전 세대와는 달리 일본 대중문화 산업의 오락적 기능에만 철저한 행동적 특성을 보인다. 그런고로 월트 디즈니마블 코믹스 같은 수천억 원짜리 미국 만화미국 애니메이션은 이들에게 상대적으로 별 공감을 주지 못했다. 물론 만화가 아닌 디즈니, 마블 영화는 지금도 잘나간다

만화평론가 손상익이 2000년에 쓴 〈망가 vs 만화〉의 견해를 바탕으로 하자면, 이들은 일본 애니메이션 초기 상륙기인 1970년대에 알음알음 생겨나다가 1980년 컬러TV 방송 개시와 VTR 보급에 힘입어 일본 애니메이션이 집집마다 안방극장을 통해 무차별 폭격을 가하면서 이 땅의 어린이들은 '변신 합체'니 '건담'이니 하는 것에 새로운 꿈과 환상을 접했다.

또 1980년 이후에 태어난 이들은 선대 세대들보다 먼저 드래곤볼, 란마 1/2, 천사소녀 네티, 슬램덩크, 슬레이어즈, 세일러 문 등으로 이어지는 '애니판 환상특급'에 빠르게 적응하는 면역 체계를 갖추어 어린 시절부터 일본의 문화를 쉽게 접할 수 있게 되었던 편이었다. 특히, 1990년대와 2000년대 이후에 태어난 이들은 청소년으로 성장하면서 점차 일본 만화와 애니메이션 등을 손쉽게 접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이들에겐 일본 애니는 일상 속에 속속들이 숨어 있다.

또 재패니메이션 키드들의 좋고 싫음의 표현은 명확하다. 아무리 토종 애니나 만화일지라도 일명 노잼이면 고개를 젓는다. 과거 헐리우드 키드들이 그토록 열광한 만화 〈정의의 사자 라이파이〉나 애니 〈홍길동〉에서 열광했던 애국심 넘치는(?) 감상 따위는 그들에게서 찾아볼 길이 없다. 일본의 〈마징가 Z〉를 흉내낸 <로보트 태권 V>와 같은 것들이 아니라면 조금도 흥이 나지 않는다. 그 증거로 일본 애니에 물들지 않은 순수 토종 애니 〈아마게돈〉이 흥행에서 망한 것도 그러하다.

그리고 재패니메이션 키드들은 만화나 애니를 얘기할 때 월트 디즈니, 마블 따위를 입에 담지를 않는다.[71] 그렇다고 하여 토종 만화나 애니를 거론하는 등의 문화 정체성조차 내포하지 않는다. 그들이 주로 달달 외워왔던 얘기로는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라든지 이 작품을 만든 미야자키 하야오에 대한 화제 뿐이다.

또 손상익의 저서 〈망가 vs 만화〉에 의하면, 해당 세대의 특성은 아래와 같이 요약된다.

첫째. 다수의 공감보다는 자신의 취향에 몰입한다. 그건 고도성장기였던 1980년대 3저 호황과 맞물려 탄생한 'ME 세대'의 광범위한 출현과 같은 시기에 나타났다. 그들에게는 '사회의 공통 덕목'이란 건 없다.

둘째. 이들은 일본의 역사적 속성을 부정적으로 보더라도 그걸 일본이 만들어내는 대중 문화에게까지 영향을 미치지는 않으며 "역사를 잊었는가? 일제의 문화는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라는 추상적인 민족주의적 생각이 아닌 완전히 둘을 별개의 사항이라고 생각한다. 일제강점기 35년을 경험한 건 그때 어른들이 잘못해서 당한 일일 뿐, 자신들하고는 무관하다는 식이다. 그들 중 일부는 부모가 사 준 소니 워크맨으로 영어 회화를 익혔고, 어렵게 구한 일본 만화책 원본을 구해다 일본어를 습득하였다.

셋째. 그들은 활자 문화보다 영상매체에 익숙한 감성세대들이며, 문어체 작문보다는 구어체 글쓰기에 더 익숙하여 어린이나 청소년들의 글짓기에까지 '~하고요'가 아니라 '~하구요'로, '삼촌'을 '삼춘'으로 쓰는 만화체 대화 어법이 이들에겐 표준어로 굳어져갔다.[72]

넷째. 이전 세대인 헐리우드 키드에 비해 엄청난 분량의 대중문화 매체를 일상적으로 접한다. 그런고로 나름의 정보 선별과 국제화 감각도 갖춘다. 당위성보다는 보편성, 애국심보다는 세계 시민적 속성이 강하다.

이후 2000년대 온라인 문화의 급속적인 발달로 그동안 TV에서 한국적 분위기로 수정되어 나왔던 일본 애니메이션을 어렸을 때부터 봤던 선배 세대들과는 달리 이후 세대들은 TV뿐 아니라 컴퓨터를 통해서도 일본 애니메이션을 쉽게 접하는 입장이 되었고, 그 결과 고질적인 불법 업로드 및 다운로드 유행과 토렌트 등의 등장으로 이때를 계기로 이들 청소년들을 중심으로 이른바 XXX를 지상파 방송에서 방영한다면 드립과 한국 성우 까대기 현상이 나오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73]

문화개방 이전만 했어도 지금 같이 컴퓨터가 아닌 TV로만 볼 수 있었고, TV로 봐도 대부분 한국 성우진의 육성 녹음으로 나오고 한국적 분위기로 대폭 수정한 개정판으로 애니메이션을 봤던 경우가 많았다는 점을 보면 문화개방이 사실상 그 동안 봐왔던 한국 애니메이션이라고 알고 있던 작품들이 사실은 일본 애니메이션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오해를 풀어내게 된 계기도 되었지만[74], 대신 그 옛날 YWCA 아줌마처럼 돌변한 철부지 일부 청소년들의 더빙까가 극성을 부리고 국내 성우진들이 사실상 명예훼손을 당하게 되는 계기를 방도하게 되었다는 단점도 가졌는데 이것은 사실 인터넷의 발달로 인한 폐해에서 나온 것이다.

할리우드, 알앤비, 소울, 힙합, 패스트푸드 등으로 대표되는 미국 문화 등 서구 문화, 홍콩 영화 등에 밀려 한국에서는 빛을 보지 못했던 일본의 문화가 1990년대에 태어난 청소년들을 계기로 어느 정도 매니아층을 형성하며, 일반화하긴 애매하지만 점차 일본에 대한 환상과 기대를 부풀어오르게 하는 계기를 마련해주기도 하였다. 실제로 명탐정 코난, 짱구 등은 일본을 능가하는 인기를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짱구는 못말려 참조. 참고용 커뮤니티 반응: #

6. 만약 지금까지 개방하지 않았다면?

중국처럼 제한적 규제를 가했을 가능성이 높다. 현재 중국에서 일본 애니메이션은 인터넷 등에서 그것도 요우쿠 등 동영상 사이트에서 공식적으로 올린 것들만 볼 수 있으며, 중일관계좋지 않게 흘러가면 일본 대중문화에 제재를 가하는 등 일종의 보복을 하기도 하는데, 적당히 풀어서 민심을 달래는 동시에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것만 허용하는 것이다.[75] 이럴 경우 한국은 민주국가라는 특성상 보복성 제재를 가할 가능성은 낮겠지만 그래도 일본 대중문화를 접할 수 있는 폭이 줄어들었을지도 모른다. 최근 일본 불매운동만 해도 애니플러스 등에서 일본 애니를 잘만 방영했으며, 별다른 항의도 없었다. 애초부터, 한국의 아이돌 그룹에서도 일본인 멤버들이 활동하고 있는데 제재를 가한다는 것도 말이 안 된다.

만약 정부에서 일본과 관련된 사이트를 유해 사이트로 지정해 차단하면 일부 능력자들 외에는 지금처럼 많은 정보량을 습득할 순 없었을 것이기 때문에 그 여파로 2000년대 후반에 초창기 시절 엔하위키를 지탱해준 상당수 일본 문화 관련 문서들의 탄생 역시 어려웠을 것이다. 물론 일본 대중문화를 개방했음에도 생각보단 파괴력이 약했고, 되려 일본에서 한류가 흥행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굳이 차단하지 않아도 매니아 영역에서 일정 부분 지분을 확보하는 선이었을테지만 말이다.

참고로 1980년대부터는 일본 문화 개방 이전이라도 일본 애니를 보는 것 자체를 막는 조치는 하지 않았다. 단지 한국 TV 안에서 애니를 트는 건 안 된다고 하는 것이다. 물론 당시엔 인터넷이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실상 불법으로 보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지만 말이다. 그래도 2000년대 이후부터는 일반인들도 인터넷으로 일본 애니를 어찌어찌 접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면서 완전개방이 된 2005년 이전까지의 기간에는 반쪽짜리 개방이래도 TV로는 안되지만 인터넷으로 보는 것을 막지는 않았다. 지금 와서는 다들 알다시피 대다수 일본산 애니가 방영을 허용받다못해 한일 동시 방영도 하고 있지만 일부는 선정성 등으로 검열과 경고, 주의 조치를 받기도 한다.[76]

한편, 개방되지 않았더라면 일부 분야에는 혜택이 있었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가령 일본 애니메이션의 경우 TV에서 방영하기 위해 한국어 더빙과 현지화를 거쳐야 하기 때문에 한국 성우들의 활동량은 지금보다 조금 더 늘어날 가능성도 있지만 신빙성이 있는 이야기는 아니다. 반론 측에선 어차피 인터넷 대중화로 불법 공유 등이 생겨 일본 애니를 어둠의 루트로 받아보는 사람들이 늘었을거라 큰 차이 없었을 거라고 추측하기도 하며,지금까지 있었던 일본 드라마 더빙이나[77] 아동용 특촬물 더빙[78]도 수입 금지로 인해 전부 없었던 일이 되므로 그만큼의 국내 성우 활동량은 확실하게 줄어들었을 것이다. 또한, 국내 성우의 활동량이 증가했을지도 모른다는 주장의 맹점은 모든 외국 영상물이 아니라 오직 일본의 영상물만을 대상으로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명화극장의 영화 더빙이 줄어드는 등 일본 영상물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영역에서도 더빙 경향은 줄어들었고, 만약 일본 대중문화 개방을 하지 않았더라면 일본 영화나 드라마 등은 애초에 정식수입도, 방영도 불가능하며, 그러므로 더빙도 불가능했을 것이다.[79]

다만, 상술한 예상과는 별개로, 일본 대중문화 수입 제한 자체가 법적 근거가 전무하기 때문에 행정소송행정심판 등을 통해 무력화되었을 것이다. 행정규제기본법 제4조 제1항에 따르면 행정규제는 법률에 근거해야 하는데, 일본 대중문화 수입제한은 법률에 근거하지 않고 문체부의 내부 지침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7. 미완으로 남을 뻔한 일본 대중문화 개방

파일:[0712]문체부보도자료-개방범위.jpg
사실 많은 사람들이 모르고 있는 사실이 있는데 2023년 7월 12일 전까지 대한민국에서 일본문화는 아직까지도 완전히 개방이 되지 않은 상태였다.

단적인 예로, 일본에서 제작되거나 일본인 감독이 연출한 넷플릭스의 오리지널 콘텐츠는 원칙적으로 영등위에서 등급분류를 받지 않았다.[80]

이는 우리나라가 일본의 비디오물에 전면적인 수입개방을 하지 않았으며, 수입 애니메이션 심의는 TVA방송통신심의위원회, OVA, OTT, 극장판영상물등급위원회가 각각 맡기에 일관성이 없기 때문이다. 김대중 정부 시절 한일 대중문화개방 협상을 벌이면서 일본 극장용 영화(예를 들어 철도원, 러브레터 같은 영화나 스튜디오 지브리 작품, 신카이 마코토 감독 작품 같은 극장용 애니메이션)는 수입을 허용했지만 연속극 형식인 일본 드라마, TV 애니메이션(예를 들어 한자와 나오키, NHK 대하드라마, 에반게리온, 진격의 거인 등)은 케이블 채널에서의 방송에 한하여 제한적인 개방을 허용했다. 즉, 방송사업자(예를 들면 애니플러스, 애니맥스, 대원방송, 채널W)가 방영하는 방송 프로그램이면 수입이 가능하지만, 넷플릭스 같은 부가통신사업자가 방송에 내보내지 않고 자사 인터넷 서비스에 곧바로 런칭시키는 비디오물 형식이면 안된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방송 프로그램이 아닌 일본 비디오물(일드, 애니)은 영등위에서 아예 등급분류를 해주지 않았다. 애초에 방송 외의 수입방영은 안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넷플릭스에서 비디오물에 대한 심의신청을 보면 제작국가란에 일본이 없다는걸 알 수 있다.

과거 국산 OTT에 올라와있는 다수 일본 드라마, 일본 애니메이션은 채널W, 애니플러스, 애니맥스 같은 방송국에서 수입/방영이 되었던 것[81]을 OTT사업자가 판권계약을 맺고 올렸던 것이다. 방송프로그램은 영비법이 아닌 방송법의 규제를 받으므로 영등위를 거치지 않으며 방송국에서 자체심의를 하여 방영을 내보낸 뒤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의 사후 심의를 받았다. 왓챠나 웨이브를 운영하는 콘텐츠연합플랫폼 이름으로 된 등급신청내역을 영등위 홈페이지에서 찾아보기 힘든 이유는 이 때문이다. 다만 부가통신사업자인 넷플릭스가 국내의 어느 방송국과도 제휴하지 않고 자체 제작하거나 국내 최초 공개하는 넷플릭스 오리지널은 방송프로그램이 아니고, 따라서 국내 OTT들과는 경우가 다르다.

OTT 시대가 되었음에도 여전히 영등위는 일본 콘텐츠에 대해서만 자율 심의에서 제외하고 영화로 심의받을 것을 계속해서 유지했으며#, 일본대중문화 수입제한 조치가 아무런 법적 근거 없이 행해져 왔다는 사실이 언론보도를 통해 확인되면서 논란이 되었다. 특히 영등위 관계자가 법적 근거나 명문화된 지침이 있는지 확인해봐야 할 것이라고 답하면서 사실상 아무런 법적 근거 없이 이러한 차별적 심의 관행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파일:일본 비디오물 등급분류 관련 정책 변경사항 알림_page-0001.jpg

선행한 논란의 여파로, 문화체육관광부는 2023년 7월 12일 일본 비디오물에 대한 수입 규제를 폐지한다고 밝혔으며#, 이러한 사실을 영상물등급위원회에 통지했다. 자체등급분류사업자는 즉시 시행하며, 영등위 등급분류는 9월 1일부터 시행된다. 이에 따라 실질적으로 개방되지 않았던[82] 일본 비디오물까지 완전 개방됨으로써 시대착오적이고 초법적이었던 일본 대중문화 수입 제한 조치는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같은 해 9월 11일, 라프텔이 국외비디오물로 심의 신청한 듀라라라!!x2의 OVA 3편이 영등위 사상 최초로 일본 비디오물로서 심의를 통과하였고[83][84], 같은 날 여름을 향한 터널, 이별의 출구 애니메이션 영화의 주제가 피날레(フィナーレ)의 뮤직비디오영상물등급위원회로부터 전체관람가 등급을 받았다. 이 역시 일본 국적으로 사전심의를 통과한 최초의 뮤직비디오이다. 이로써 일본 대중문화 개방 정책에 확실하게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8. 한국에서의 인기

8.1. 1980년대에서 1990년대까지

일본 문화의 정식 수입이 막혀있음에도 불구하고 암암리에 일본 문화를 소비하고 동경하는 사람들이 꽤 있다고 전해진다. 당시로서는 경제적으로도 풍족하고 문화적으로도 다양성이 넘쳤던 일본 문화는 한국인들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고 한다. 이 당시 인기 있었던 일본 연예인으로는 X-Japan, 아무로 나미에 등의 아티스트가 있으며, 이 외에도 Wink, SPEED, Globe, 마츠다 세이코, 나카모리 아키나, 스마프, 킨키키즈 등 여러 아티스트들도 매니아적인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이 당시의 일본 문화 소비는 한국 문화사에 큰 흑역사를 남겼는데, 일본 문화가 정식으로 개방되지 않았고 인터넷이 발달되지 않은 시대라는 것을 악용하여 한국 문화계 전체적으로 일본문화를 표절하는 일들이 대거로 일어났다. 너무 많아서 열거하지 못할 정도이며, 대표적으로 MBC 드라마 청춘이 방송위원회로부터 일본 후지TV 드라마 러브제너레이션의 표절작이 맞다고 판정이 나오는 일도 있었을 정도. 다시는 한국 문화계가 답습하지 말아야 할 시절이다. 되려 현재는 문화적으로 한국이 앞서나가 일본이 한국을 표절하는 사례도 꽤 찾아볼 수 있을 정도가 되었으니 격세지감인 셈.

8.2. 2000년대

한국문화가 일본은 물론 전 세계적으로 맹위를 떨치면서 국내 커뮤니티에 간혹 나오는 주장이 일본문화가 어느 정도 단계를 거쳐 꽤 정식으로 개방된 2000년대 초반 당시에 현재 일본에서 한류가 열풍인 것처럼 한국에서 일본문화가 열풍이었고 메이저였다는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나마 한국에서 일본문화가 메이저급의 인기를 누린 것은 영화 러브레터[85] 정도이며, 애니 같은 경우도 한국 현지화를 통해 일본산인 것을 인식하지 못한 채 인기를 얻은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물론 일본문화가 인기 있었던 것은 맞지만, 많이 쳐줘서 마이너 중에 메이저 정도의 인기였지 주류나 열풍으로 설명될 인기는 결코 아니었다.

이런 황당한 주장을 펼치는 광경을 보고 당시 일본문화를 알음알음 팠던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나서서 결코 열풍이나 메이저급의 인기는 아니었다는 것을 증언하고 있는데[86], 대표적인 증언이 수학여행 장기자랑 때 일본 보이그룹 아라시의 노래를 부른 후 갑분싸가 되어 전교생이 본인의 이름을 알게 되어버렸다는 전설의 증언이 있다.#

실제로 이러한 증언은 지표로도 확인할 수 있는데, 2004년 12월 한국갤럽에서 만 20세 이상의 남녀 616명에게 좋아하는 일본 연예인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580명이 없다, 모른다, 무응답으로 나왔다. 사실상 아예 대중적인 인지도 자체가 없었던 셈.

당시 한국 케이블 시장파이가 넓지 않았던 것을 감안해도, 국내에서 방영된 일본 드라마는 시청률 0%라는 초라한 성적표를 받아들였다.

8.3. 2020년대

일본의 싱어송 라이터 이마세의 <Night Dancer>가 J-Pop 최초로 한국 최대 음원 사이트 멜론에 차트인을 달성하고, 연말 시상식에서도 J-POP Favorite Artist를 수상하는 등 일본 음악이 한국에서 지표적으로 유의미한 기록을 남기는 역사를 썼다. 이마세 외에도 아이묭, 요아소비, 요네즈 켄시 등 싱어송라이터나 밴드를 필두로 한 J-POP 등이 아이돌 음악이 주류가 된 한국 음악시장에서 반사이익으로 인기를 얻었으며, 릴스를 통한 바이럴을 통해서 대중적인 인기에 가속도를 냈다. 하지만 아직 주류가 되었다고 하기에 단언하기 힘든 이유는, 대부분 그냥 노래가 좋아서 노래를 일회성으로 소비하는 것이지 일본 내 한류처럼 가수에 대한 굳건한 팬덤이 구축되었거나 대중적 인지도를 얻었다고 보기는 힘들다. 일본의 가수들이 적극적으로 한국 진출을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9. 어록

일본문화를 막음으로 해서 좋은 문화는 못 들어오고 나쁜 문화만 스며들어와서 폭력, 섹스, 무슨 이런 범죄의 문화들이 오고 있는 것은 상당히 우려할 만한 일이다.
- 김대중 前 대통령, 국무회의에서.
21세기는 문화산업의 시대이며 더 이상의 문화 쇄국정책은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 김대중 前 대통령, 한일정상기자회견에서.
일본 대중문화 개방에 두려움 없이 임하라.
- 김대중 前 대통령, 업무 보고 중에서.
'문화' 두 글자만 씌우면 아무거나 문화적으로 장식되는 양 착각하면서 진실로 아끼고 보존해야 할 전통문화는 막상 설 자리가 없다. 대를 잇지 못해 사라져가는 인간문화재를 아쉬워할 여유조차 없다. 이러한 실정을 감안하면 일본은 차라리 부러운 면을 많이 갖고 있다. 대중문화로 돈을 몽땅 버는 사람은 돈 때문에 치켜세우고, 오랜 전통문화를 새로 가꾸는 사람은 문화적 자존심의 발양으로 우대하는 풍토가 그것이다. 이 기회에 우리도 그런 '이중성'을 수입했으면 싶다. 대중문화를 상품화하는 노하우를 배우고 끝끝내 자기 것을 세우고 지키려는 노력에도 더 주목했으면 한다.
- 경향신문 1998년 10월 16일자 최일남 칼럼 <상품으로서의 日 대중문화>
1998년에 시작한 문화적 개방으로 천문학적인 이득을 본 사례를 알려 드리겠습니다. (중략) 남한은 일본 식민지에서 해방된 이후 정권수립을 거치고 1998년까지 일본과 문화적 교류를 차단하고 있었습니다. 일본은 이미 1950년대부터 국제적으로 존경받는 거장 영화감독들도 많이 배출해서 수준 높은 영화와 대중 예술이 전 세계 관객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고 있었습니다. 1970-1980년대를 거치면서 일본 대중문화에 대한 국제적인 명성들이 한국 청년들에게도 들려왔습니다. 하지만 한국 청소년들만은 일본의 뛰어난 예술성이 돋보이는 영화와 창조성이 넘쳐나는 대중음악의 관객이 될 수 없었습니다. 한국정부가 일본 대중문화의 문을 꼭 걸어 잠그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전까지 한일간 대중 문화개방에 대한 논의가 많이 있었지만 남한 지식인들과 정치인들은 ‘남한 국민의 문화적 정체성과 가치관에 혼란을 줄거다,’ 또는 ‘일본의 폭력물, 선정물과 같은 퇴폐 문화가 남한으로 유입될 거다,’ 남한 대중문화의 질적 저하를 초래’하고, 창의성이 저하 될 거라는 등의 걱정이 더 컸습니다. 하지만 남한 국민들의 역량과 저력에 믿음이 컸던 김대중 대통령은 일본문화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했습니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2017년 기준으로 남한이 일본으로 수출한 대중문화 산업은 1조 9천 억 원이고, 그 반대로 일본이 남한으로 수출한 금액은 2천 3백 억 원으로 남한이 일본보다 8배 이상의 이득을 보고 있습니다.
- 자유아시아방송 2020년 10월 9일자 권은경 칼럼 <닫힌 문을 열고>[87]

10. 외부 링크


[1] 행정규제기본법 제4조 위반.[2] 한 민원인의 정보공개청구에 의해 드러난 사실에 의하면 수입 제한 범위 자체가 어떠한 내규나 지침의 형식으로도 존재하지 않았다는 충격적인 사실이 확인되었다. 아마도 관련 정책을 통보하는 공문 등의 법적 효력이 없는 일련의 문서들을 기준 삼아 자행된 불법적 정책으로 추정된다.#[3] 게임, 영화, 만화, 애니메이션, 노래, 잡지 등.[4] 음란물 같은 것은 규제하기도 하지만, 솔직히 관련 지식이 어느 정도 있을 경우 마음만 먹으면 음란물뿐만 아니라 심지어 국가에서 막아놓은 북한 관련 자료까지도 구할 수 있는 것이 현실이다. 즉, 완전히 막혔다기보다는 회색지대에 있다고 봐야 한다.[5] 신비한 바다의 나디아가 이런 식으로 국내에서 볼 수 있었다.[6] 특히 한류 산업적 측면에서 보자면, 2000년대 들어서 한류가 일본에서 본격적으로 힘을 쓰기 시작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가 된 사건이다. 한일 서로 양국 문화를 수용하면서 선순환 기조가 이뤄진 것.[7] 원 출처: <한국과 일본 - 정치적관계의 조명> - 이정식 저. 교보문고. 1986. p45.[8] 원 출처: <한국민족주의> - 이용희 저. 서문당. 1977. p256~257.[9] 원 출처: 구로다 가쓰히로, <일본 대중문화의 금지와 개방에 대해> - 일본학보 5권 p20(1998).[10] <한일회담 외교 문서 해제집 III> - 국민대 일본학연구소 편. 동북아역사재단. 2008. p912.[11] 다만 1965년 서울대에서 강연을 한 '14대 심수관(임진왜란 때 끌려간 도공의 후손)'의 인터뷰에 따르면 "한일관계가 좋지 않지만 당신들이 36년의 한을 말한다면 나는 360년의 한을 말해야 한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는 미래로 나아갈 수는 없는 것 아닌가”라고 강연장에서 말했다고 한다. 그러자 강연장은 일순 고요해졌지만 좀 지나자 누군가가 일어서 '노란 샤쓰 입은 사나이'를 부르기 시작했고, 이후 모두가 일어서서 노래를 부르며 무대를 향해 걸어와 서로 껴안고 눈물을 훔쳤다고 한다. 이런 일화를 보면 당시 학생들도 무조건적인 반일이나 혐일이라기보다는 사회 분위기나 굴욕적으로 비춰질 수 있는 정치적 요소가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12] 한류가 아시아를 넘어 서구권에서도 제법 파급 효과를 보이고 있는 오늘날과 다르게 이 당시는 일본 문화가 아시아에서는 독보적이었으며, 서양에서도 각광받던 시기였다.[13] 1988 서울 올림픽 항목에서도 소개된 일화이지만, 올림픽 유치 당시 일본의 사주를 받은 러시아(당시 소련) 위원이 한국이 일본에서 받은 차관을 걸고 넘어진 일이 있을 정도였다.[14] 현대 기준으로도 보수적인 신학을 하는 교단들은 대부분 신사 참배에 반대했다. 침례회, 성결교회는 물론이요 장로회 등에서도 숭실대학교, 고려신학교 등이 신사참배를 끝까지 거부하여 자발적으로든 강제로든 문을 닫은 사건도 있었으며 유관순, 김구, 이승만 등 기독교 신자인 독립운동가들도 결코 적지 않았다.[15] 유림계 역시 김창숙 선생이 유림들을 이끌고 독립운동과 민주화 운동을 한 적은 있으나 그러면서도 경학원이나 조선유도연합회 등의 일부 케이스에서 보듯 친일 행적도 있어 그런 말할 처지가 못 된다.[16] 불교 역시 한용운처럼 독립운동을 한 사람도 있지만 이회광, 이종욱 등의 예처럼 친일 부역 전력도 있다.[17] 그래서 개방 직후에 나온 퇴마록 혼세편을 보면 퇴마사들이 지금의 무한도전 수준의 가학성 높은 일본의 개그 프로그램을 보고 거부감을 느끼며 문화충격을 받는 장면이 나온다. 이러한 추세는 동시기 서, 북유럽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유럽은 전체적으로 한술 더 떠서 공영방송부터가 한국인이 볼 때 선정성, 폭력성 짙은 프로그램을 내보내기도 했다.[18] 한국도 1980년 언론통폐합 전까지는 가능했다가 2009년 미디어법 개정 전까지는 법적으로 아예 금지되어 있었다.[19] 사실 당시엔 외국 문화를 접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대도시에 거주하거나 어느정도는 산다는 뜻이었다. 고로 어떤 측면에선 보편화라고 보긴 좀 어려울수도 있는데, 기사가 우려를 섞어 과장한 측면도 있을 것이다.[20] 이런 작품들조차도 방송법과 방송위원회 심의규정에 따라 왜색을 지우기 위해 내용을 한국식으로 대거 수정/삭제해서 방영하는 경우가 많았다.[21] 물론 그러는 와중에도 알게 모르게 일본 방송 포맷이 들어오는 경우는 있었다.[22] 당시 대통령이던 박정희만 하더라도 사석에서는 김재규와 함께 일본 사무라이 영화 등을 즐겨보곤 했다고 한다. 또 사석 술자리에선 일본어로 농담하고 엔카를 불렀다는 증언도 있다. 어찌보면 당연한 것이 박정희는 일제 시절 만주군 장교 출신이다.[23] 이래서 이 당시에 "입으로는 반일을 외치면서 외국 나가기만 하면 코끼리 전자밥솥(조지루시) 사서 들어오는 높으신 분들"에 대한 비판이 많았다. 더욱이 무역업을 하는 부모를 둔 아이들은 일본으로 출장갔던 아버지가 선물로 사온 일본제 초합금 로봇 장난감(그레이트 마징가그랜다이저)을 갖고 노는 등 또래 아이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24] 비슷한 이유로 앙드레 김도 젊은시절 수입 서점을 드나들며 보그지를 구했다고 한다. 당시 한국 락덕후들 사이에서 일본 락은 의외로 인지도가 높았다. 김태원의 밴드 부활은 앨범 속지에 라우드니스지옥으로 보내자라고 써놓기까지 했다.[25] 해외에서 우편으로 보내는 경우 당시에는 1, 2개월이 걸리는 것은 예사였다. 배로 실어 왔으니 당연한 일이다.[26] 이러한 현상은 한국만의 현상은 아니었다. 소련이나 동독 문서를 보면 알 수 있지만, 윗동네처럼 아예 폐쇄된 국가가 아닌 이상에야(심지어 여기도 한국 문화들이 알게 모르게 유행하고 있다.) 어쨌든 해외의 물건들이 어느 정도는 들어오기 마련이다. 일례로 소련의 경우 늑골 문서에 나와 있듯 X레이 필름으로 제작한 조악한 빽판이 암암리에 유통되었고, 서구 국가(핀란드)와 가장 가까운 레닌그라드 등지를 통해 기타나 신디사이저 등이 밀수되기도 했다. 이 기기들과 빽판들은 훗날 내래 인민의 락을 보여주갔어 문서에 나와 있는 수많은 러시아 락밴드들의 모태가 되었다. 이후 페레스트로이카를 기회로 빌리 조엘 등 서구 음악가들이 소련에서 공연을 할 때면 기라성 같은 인파가 모여 떼창을 시전했으며, 1991년 미국의 록밴드 메탈리카모스크바 공연에는 러시아에서 정식으로 음반이 발매된 적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80만명이 운집하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그야말로 거의 모든 사람들이 서구의 영화, 음악, 패션을 즐겼다. 문화적 측면에서만 따지자면 냉전은 일찌감찌 미국의 승리로 끝난 지 오래였다.[27] 중파(AM)방송 한정. FM방송은 당시 주파수 대역이 76~90㎒였기 때문에 이 대역을 청취하려면 5~6(76~88㎒)번 음성부를 들을 수 있는 라디오가 필요했다. TV는 VHF-Low대역만 아니면 전부 수신할 수 있었지만 CATV대역을 지원하면 전부 다 수신할 수 있다.[28] 심지어 이 노래는 1969년 노래다. 해당항목 참조.[29] 당시 지상파나 출판 매체가 아닌, 도시 중심가의 디제이 다방을 중심으로 형성된 신(scene)을 의미. 요즘으로 말하면 인디 또는 언더그라운드라고 할 수 있다.#[30] 해당 사실은 2017년 국가기록원이 공개했다.[31] 심지어 워크맨은 당시 오늘날의 '인싸'들이라면 갖춰야 할 필수품일 정도로 그 위치가 높았다.[32] 실제로 한국 오타쿠의 역사는 대략 1980년대 초중반부터 시작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자세한 내용은 형레코드 문서 참고.[33] 애니메이션 산업이 인력집약적인 특성이 강하다 보니 다른 프로그램에 비해 제작비용이 많이 들어갔고 애니메이션 방영시간대의 광고료도 비싸지 않아서(= 수지타산이 안 맞아서) 방송사 입장에선 애니메이션 제작에 대해 별다른 매력을 느끼기는 힘들었다.[34] 만화의 경우 1990년대에 대박을 친 최고의 베스트셀러 슬램덩크가 한국 청년층을 강타한 바가 있다. 물론 슬램덩크는 일본만화인 것을 대부분 알고 봤다. 많은 어린이들은 걍 이름이 강백호니 당연히 한국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한 것은 함정[35] 그 이전에도 국산 애니메이션 방영이 안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지만 전부 극장판 애니메이션 재방이었다.[36] 심지어 1970년대 당시의 초거대 만화출판사 독점집단인 합동출판사에서 표절을 강요해서 상당수 작가들이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표절작으로 그려내야 했다는 후문도 있다.[37] 당시 룰라의 리더 이상민은 심적으로 고통을 받아 자살시도까지 했었는데, 이상민이 나중에 해명하길... "자살시도가 아니라, 그 때 화가 나서 주먹으로 유리창을 깨서 피가 많이 났었는데 매니저가 보고 놀라서 병원으로 데려간 것이 와전된 것이다"라고 밝혔다.[38] 특히 이 사건이 일본 대중문화 개방를 시행하는데 결정적으로 한몫을 했다는 의견도 있다.[39] 해외방송 시청이나 표절의 목적도 있었을 것이다.[40] 이 행위는 훗날 아베 신조 총리도 따라하게(?) 된다. 심지어 위안부 문제까지 쟁점화시키기도 했다.[41] 후술된 바와 같이 방송사들은 일부 지상파의 과거 사례를 제외하고 일본 대중문화 개방 지침을 법적 근거가 없다는 이유로 무시해왔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애초에 방송사는 방송통신위원회가 관리 감독을 하고 문체부는 아무런 권한이 없어서 어떠한 방식으로든 개방 범위를 강제할 수단이 없었다. 문체부가 표면상으로는 일본 비디오물 규제만 해제했으나, 영등위에 보낸 공문에서도 해당 지침의 법적 근거 부재를 시인한 것으로 보아 문체부에서도 사실상 폐기한 지침으로 보인다.[42] 기존 규제는 등록된 영화상영관에서 상영된 영상만을 비디오물로 수입하는 것을 허용했다. 즉 비디오물을 비디오물로서 등급분류를 받아 수입할 수 없었고 영화로서 등급분류를 받아 영화관에서 상영해야만 비디오물도 수입이 가능했다.[43] 그러나 이 과정에서 애니메이션이라는 이유로 연소자 관람가(전체 관람가) 판정을 받았음과 동시에 잔혹한 장면 때문에 학부모들이 거센 항의를 했고, 나중에 거짓 보고해서 심의를 통과했다는 사실까지 들통나 신문과 뉴스로 보도되면서 결국엔 개봉한 지 1주일 만에 간판을 내려야 했다.[44] 국내에서는 '해협'이란 제목으로 정발.[45] 일본계 미국인 여배우, 1929-2007.[46] 한국닌텐도가 2006년 6월에 설립되었다.[47] 엄밀히 말하자면 틀린 얘기다. 소년 챔프가 처음 내세웠던 만화는 3X3 EYES였다. 이후 고스트 스위퍼, 드래곤 퀘스트 다이의 대모험, 슬램덩크를 차례로 동원해 물량전을 퍼부었다. 이때만 해도 슬램덩크의 인식은 챔프의 일본 만화 4대 천왕 정도였다. 슬램덩크가 폭발적인 인기를 끌며 오늘날까지도 소년챔프를 대표하는 만화로 자리잡은 때는 정대만까지 합류해 5인 체제가 갖춰진 뒤의 일이다.[48] 1997년에 비디오 게임에 대한 수입이 자유화가 되었다.[49] 단, 미군들이 수입한건 SOFA 협정으로 제외. 전매금지 기간만 넘으면 일반인도 구입가능. 물론 기간내 귀국해도 별도의 절차만 밟으면 된다.[50] 1996년에 ~2.5L 디젤세단과 3.0L~ 스테이션 웨건이 허용되었다가 1997년에는 경형 SUV가 허용되었고 1998년에 ~1.5L SUV와 경차, 특수차량이 허용되었다.[51] 대표적인 경우로 당시 현대전자가 닌텐도와 손잡아 유럽판 기기에 일본/북미용 영상규격과 지역코드를 사용한 현대 컴보이와 유럽판 SNES에 일본/북미용 영상규격과 지역코드를 사용한 슈퍼 컴보이, 북미판 닌텐도64에 220V전원부를 제공한 컴보이64를, 삼성전자가 세가와 손잡아 수입한 아시아판의 겜보이슈퍼겜보이(알라딘보이) 시리즈, 북미판 새턴, 피코 시리즈가 있다.이쯤되면 어질어질하다 이런 규격의 차이로 인해 현대전자의 닌텐도 게임기들과 삼성의 세가 게임기들은 8비트와 16비트 시절까지는 일본판 게임이 구동가능하였기에 한계가 명확한 정식발매 소프트웨어 라인업을 보따리 상인이 가져온 일본판 타이틀로 보충 할 수 있었으나, 32비트 시절로 접어들어서는 완전히 북미판으로 바뀌어버려 어지간한 노력이 아니고서는 라인업의 빈약함을 보충할 방법이 사라졌다. 더욱이 게임기 본체 가격 또한 보따리 상인이 풀었던 가격에 비해 1.5~2배가량 비쌌던 탓에 모든 면에서 매력이 사라져버려 소비자에게 외면당한다. 삼성전자가 Nuon 기술로 만든 게임기 엑스티바로 최초 시판했다가 흥행하지도 못해 망했기 때문이다.[52] 애초에 웃지못할 사태는 심의 문제가 있었는데 그 당시 게임 소프트웨어를 심의할수있는 기구가 없었고 심의 기구가 있었더라도 폐쇄 정책으로 인해 일본판이 아닌 북미판으로 우회수입을 해야되는데 시간도 걸리고 경비가 많이 깨지는 북미판을 우회수입할 업자가 몇이나 있을지 생각만 해도 답이 나온다. 거기다가 모든 게임 소프트웨어는 영등위가 맡아서 영화 검열하느라 게임 검열하느라 바빠서 꽤 오래걸렸다.[53] 그나마 1998년 인터내셔널 PC 버전 영문판이 4만원 정도의 가격으로 출시되어 6보다는 사정이 나았다.[54] 이것 때문에 카마에서 수입한 플스는 소매점에서 모드칩을 달았다는 소리가 있지만 언론보도 등을 확인한 결과 자기네들이 달아서 뿌린 것이었다.[55] 90년 중후반 때만 해도 몇몇 아케이드 게임들은 일본어 음성이 완전 삭제되어 입만 뻥끗뻥끗 하는 걸 봐야 했거나, 게임 자체를 아예 뜯어고쳐서 반쪽짜리인 상태로 출시되는 등의 풍평피해를 입기도 했다.[56] 사실 개방 이전에도 일본어로 된 게임이 정식으로 유통된 적이 있었다. 삼성전자에서 유통했던 파이널 판타지 7 PC판이 그것인데, 일본어로 된 간판이 나오는 문제로 제작사에 수정을 요청했지만 그래픽수정으로 인해 게임이 망가진다는 이유 하나로 거부하자 고심 끝에 영상물등급위원회에서는 발매허가를 했다. 자막이 아니라 게임 내 간판이 그런 것이라 자세히 보지 않는 이상 잘 보이지 않는다.[57] 이것은 원제작사인 SNK가 한국용으로 작업한 것으로, 카트릿지 내부의 해당 칩을 교체하여 원본으로 복구 할 수 있다.[58] 소녀대는 1986년 MBC 서울국제가요제에 참가했었다.#[59] 티스퀘어는 1994년, 카시오페아는 1996년[60] 카우보이 비밥의 OST를 맡은 Seatbelts의 음악은 TV, 라디오의 장르를 가리지 않고 자주 나오는 편이다. 특히 Tank!는 도입부만 들어도 알만큼 유명하다. 가사 전체가 영어로 되어 있는 블리치 4기 오프닝곡 Tonight, Tonight, Tonight 역시 일본 밴드 비트 크루세이더의 곡이지만 투니버스 방영 시 그대로 송출되었다.[61] 개국은 2009년 12월이지만 한일 애니메이션 동시방영은 2010년 4월(2분기)부터이다.[62] 모든 지상파 방송에서 진격의 거인 오프닝독일어 가사와 코러스 부분만 틀었다.[63] 그 예시 중 하나가 KBS 2FM/U-KBS MUSIC의 심야식당이다. 다만, EBS는 그런 규정이 없는지 일본 영화를 틀기도 한다.[64] 개방 이전에는 북미 현지화판인 파워레인저 시리즈를 더빙해서 방송했는데, 개방 후에는 파워레인저 다이노썬더를 시작으로 일본 원판을 더빙해서 방송해주기 시작했다.[65] 초창기에는 구세무역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66] 다만 러브레터 개봉 당시는 오늘날과 같은 완전 멀티플렉스 체제가 아닌, 단관 위주에 코엑스 메가박스와 같은 초창기 멀티플렉스가 들어서기 시작한 시점이었으므로, 관객 집계는 서울에서만, 그것도 상당히 부정확한 수준으로 가능한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러브레터가 동원한 115만 명은 오늘날로 치면 400~600만 명과 동일한 수준이다.[67] 한류(韓流)와는 조금 다른게 윤하는 일본에서 먼저 데뷔하였고, 보아와 윤손하도 그 무렵 일본에서 일본 연예인으로서 활동했었으며, 마찬가지로 유민과 초난강도 한국에서 독자적으로 활동한 것이라서 일류(日流)와는 다르다.[68] 문민정부 들어서 극장판 애니메이션을 제작 지원하긴 했으나 심사 지원 기준 미비로 아기공룡 둘리 얼음별 대모험을 제외하면 거의 망하다시피했고 이후에도 지원 제도는 이어져 가고 있지만 아직까지 갈길이 멀다. TV 애니메이션의 경우에는 1998년 이전에는 언론이나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어린이 시간대 미국과 일본 애니메이션 방영에 문제를 제기하는 경우는 많았지만 일단 애니메이션 제작이 그리 수지타산에 맞지는 않았던 것도 있고, 더군다나 방송사에서 애니메이션 제작지원을 강제하는 법안이 마련되지 않아서 반영이 되지 못했다가, 2000년에 들어서야 방송법 개정에 따라 애니메이션 쿼터제가 적용되기 시작했다. 그나마 지상파 애니메이션의 시청률 하락으로 인한 시간대 앞당기기와 케이블 애니메이션 채널에서의 국산 애니메이션 작품 홀대(주로 아동용), 그리고 예능 및 드라마의 대폭 양산과 한국 애니메이션 제작 여건의 부실로 인해 제대로 된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69] 실제로 이미지가 씌이기 전까진 한국 또한 상당한 애니메이션 제작 능력이 있었으나. 자체 2D 애니메이션 산업이 무너진 이후, 사회 분위기를 피해가는 교육용, 아동용 3D 애니메이션이 강세를 띄게 되었으며, 2D는 대다수가 하청으로 돌아섰다. 한국 소비층과 맞지 않았기 때문.[70] 아이러니하지만 해적판 시장이 완전히 멸망했을때가 2000년대 초엽이었는데 저작권법이 정비되어서 철퇴를 맞게 된데다가 이미 인터넷이 있기에 수익이 좀체 날리가 없게 된것이다. 대신 온라인 상에서 스캔본이라는 또다른 해적판이 범람 중이다.[71] 그도 그럴 것이 디즈니는 뮬란 이후 라푼젤 이전까지 영 흥행이 좋지 않아 골골거렸고, 겨울왕국의 대성공 전까진 거의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 마블은 훨씬 상황이 나빠서 영화화 판권을 여기저기에 팔았다가 결국 디즈니에 인수되었다. 그렇다고 인기가 있는 만화나 애니는 거의 없었고,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가 성공하며 겨우 체면치례를 했다.[72] 사실 저 단어들은 만화체라기 보다는 서울 사투리 단어이다. 서울 사투리를 구어체로 사용한 작품이 많았던 것일 뿐이다.[73] 일본 애니메이션이 독일 같은 유럽이나 영미권에서 그들의 성우에 의해 번역될 때는 아무말도 안 하던 사람들이 한국 성우만 까대는 건 객관적으로 동조하기가 힘든 행태이다. 이는 일본 문화를 원류라 생각하고 그 외의 한국 문화를 아류라 생각하여 아류는 반드시 본류로의 역행을 해야만 한다는 사고에 기초한 것인데, 이 사고의 비논리성은 굳이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74] 일본 대중문화 개방 이전의 일본 애니메이션들은 대부분 신문에 미국 애니메이션 회사가 제작했다고 소개되어 적힌 경우가 많았다.[75] 이는 유튜브를 막은 사례에서도 알 수 있는데, 유튜브를 막아 서구권 문화 유입을 조절하는 동시에 자신들이 통제 가능한 중국 기업이 만든 유사 SNS를 국내적으론 중국 인민들에게, 국외적으로는 선전활동으로 풀어버리는 것이다.[76] 대한민국은 일본 애니메이션을 포함한 외국 애니메이션에 대한 심의가 타 국가에 비해 강한 편이다. 대다수의 한국 애니메이션이 아동용인 탓도 있지만.[77] 안봐서 모르는 사람도 많겠지만, '한자와 나오키' 등의 성인 드라마도 상당수 더빙 방영된 바 있다.[78] 1989년에 대영팬더가 초신성 플래시맨 비디오 더빙판을 애니메이션으로 분류하는 편법을 통해 더빙 발매했지만, 애니메이션의 A도 몰랐던 시대였기 때문에 가능한 편법이고, 그마저도 1994년 미국판 파워레인저가 방영된 이후에는 사라졌다.[79]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위 주장은 일본의 애니메이션만을 대상으로 말하는 것인데, 일본 만화를 막는 가장 강력한 명분이 '저질 폭력 일본만화로부터 아이들을 보호하자'였던 것을 상기해 보면 수입을 금지하는 제품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격상시켜 줄 리도 만무하며, 그에 종사하는 성우들의 입지가 오히려 더 나빠질 가능성도 있었다.[80] 그럼 여기서 넷플릭스에 있는 일본 애니메이션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할수도 있지만 이것은 넷플릭스가 애니메이션을 비디오물로 등록하는 것이 아닌 영화로 등록을 해서 그렇다. 예를 들어 진격의 거인이라는 애니메이션이 있으면 넷플릭스에서는 이걸 20분짜리 비디오물 24화로 등록을 하는것이 아니라 24화 전부를 통으로 합쳐 8시간짜리 영화 1편으로 등록을 한 다음에 1화 분량만큼 다시 나누어서 넷플릭스에 올린 것이다.[81] 따라서 방송 프로그램이 된다.[82] 법적 근거가 전무한 관계로 영등위를 제외한 다른 기관들은 이미 일본 대중문화 4차 개방 지침을 따르지 않고 있었다.#[83] 당시 방영되지 않고 블루레이로만 수록된 4.5화13.5화, 19.5화. 3편 모두 15세 이상 관람가로 심의를 통과했다.[84] 단, 영화로 심의받은 일본 작품이 광매체로 발매될 때 함께 수록되는 부가영상에 대한 심의는 비디오물로 심의받는 것을 허용한 것으로 확인된다.[85] 오겡키데스카? 와타사와겡기데스의 명대사는 러브레터를 안 봤어도 아는 한국 국민들이 많으며 각종 패러디에도 등장했을 정도로 대중적인 인기를 누렸다. 영화 관객수라는 지표적인 기록에서도 흥행을 하였다.[86] 그도 그럴 것이 이 세대에 학창시절을 보냈던 사람들은 인터넷의 발달로 전보다 더 쉽게 일본문화를 접했던 세대들이다. BoA의 일본 활동 대성공으로 10대 층에에게 일본문화가 더 친근하게 역수입 되기도 했으며, 다음카페에는 일본TV라는 카페가 꽤 많은 회원수를 보유하고 활성화 될 정도였다.[87] 출처를 생각하면 당연하겠지만 북한의 개혁개방을 촉구한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