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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P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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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1차 국민PC 사업
2.1. 탄생 배경2.2. 사양과 가격2.3. 성공2.4. 문제점 및 쇠퇴
3. 2차 국민PC 사업4. 국민노트북PC 사업5. 영향6. 비슷한 사례7.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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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99년 10월 20일부터 2001년 9월 20일까지, 2004년 3월 2일부터 4월 16일까지 총 두 차례 걸쳐서 정보통신부 주도 하에 출시되었던 100만원 이하의 가정용 데스크톱 컴퓨터로, 정부에서는 이를 '인터넷PC'라고 명명했다. 대중적으로 '국민PC'라는 이름이 더 유명했는데, 사업에 참여한 업체들이 인터넷PC의 브랜드 네임처럼 통용했기 때문. ([IT산업 20년 전] 대한민국 정보화 앞당긴 인터넷PC 사업)

당시 셀러론으로 무장한 100만원짜리 보급형 국민PC는 엄청난 판매고를 올렸고, 스펙 좀 타협한 고급형 국민PC도 120~150만원선에서 보급이 되었다.[1][2] 쉽게 말해 지금의 컴퓨터, 인터넷 대중화 특히 가정용 대중화에 한 획을 그은 사업이다. (매일경제, 1999.08.02. 100만원대 '국민PC' 나온다)

초고속 인터넷 서비스가 본격적으로 확산될 시기와 맞물려서, 1990년대 후반까지 잘 나가던 PC통신 쇠퇴기의 원인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지만 직접적인 요인은 아니다. 최초 국민PC의 네트워크 사양도 56Kbps 규격의 모뎀이었기 때문.

2. 1차 국민PC 사업

2.1. 탄생 배경

1998년에 출범한 국민의 정부는 1997년 외환 위기를 극복해야 했다. 그리고 극복 방안의 일환으로 거론된 것 중 하나가 IT 산업 집중 육성이었다. 그런데 IT 산업을 육성하려면 먼저 국민들이 정보화에 적응하는 것이 필요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국민들이 일단 컴퓨터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전제 조건이 필요했다. 참고로 1990년대 초중반 당시 컴퓨터 보급 대수는 1990년대 초반 이전에 비하면 상당히 늘어나긴 했지만 실상을 보면 주로 회사나 학교에서 쓰던 업무용이나 교육용 컴퓨터였고[3], 가구보급률로 따지면 PC통신과 PC게임이 차차 보급되면서 일부 가정에서 여가, 오락용으로 쓰는 경우도 있었지만[4] 1995년 통계로도 여전히 30%대 정도에 그치고 있었다.[5] 그래서 이 당시에는 한 직장, 혹은 한 학교내에서도 컴퓨터를 잘 다룰수있는 사람과 컴퓨터를 다루지 못하는 컴맹이 공존해있었으며, 컴퓨터를 잘 다루지 못하는 나이든 사람들이 후배들한테 업무를 대신 봐달라고 부탁하는 장면들이 당대의 TV프로그램과 만화 등을 보면 종종 나온다.

그간 보급률이 지지부진했던 주요 원인은 역시 높은 진입 장벽과 가격대였다. 1990년대 당시만 해도 다나와, 중고나라 같은 가격 비교 사이트도 없었고[6], 더군다나 인터넷으로 물건을 사기는커녕, 인터넷이란 개념조차 생소했던 시기였다. 그러다 보니 컴맹인 일반 대중들이 컴퓨터 하나 장만하려면 당시엔 당시 기준 200만원 내외 하던 대기업 브랜드 PC를 사거나 용산전자상가처럼 관련 상가나 동네 PC 가게를 찾아가 조립컴을 사는 수밖에 없었는데, 조립컴의 경우 관련 물가에 대한 정보 접근성이 터무니없이 떨어지던 시절이니 운이 좋아 양심적인 업자를 만난다면 모를까 재수없으면 용팔이한테 걸려 돈은 돈대로 뜯기고 고장은 잦은 성능 구린 컴터 사는 호구되기 십상이었다. 이러니 일반 서민들은 컴퓨터 구입을 꺼릴 수 밖에...

그런 와중에 정부가 중소기업도 지원하고 국민들에게 가성비 좋은 컴퓨터도 보급할 겸 해서 입안한 정책이 바로 국민PC였다. 때마침 1997년 4월 1일 야간/할인시간정액제의 시행, 1998년 7월 두루넷HFC, 1999년 4월 하나로통신ADSL을 필두로 당시에는 획기적인 초고속 인터넷 망을 준비하고 있었고, 1997년 3월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PC방스타크래프트리니지의 영향으로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기 시작한 것도 시너지 효과를 발휘했다.

국민PC는 중소기업을 지원한다는 정책과도 맞물려 대기업의 입찰을 제한했기 때문에, 제조업체는 대부분 중소기업으로 총 12개의 업체가 선정되었다. 선정된 업체는 현대멀티캡, 세진컴퓨터랜드, 주연테크, 현주컴퓨터, 컴마을[7], 용산전자상가조합, 멀티패밀리 정보산업, 성일컴퓨텍[8], 세지전자, 엘렉스컴퓨터[9], iDOM엑스정보산업[10], PC뱅크[11]이며, 참여 업체들이 모여서 '인터넷PC협회'를 꾸렸다.[12][13] 참고로 이들 중 현재까지 남아있는 업체는 주연테크 뿐이다.

2.2. 사양과 가격

국민PC가 컴퓨터 없는 사람들에게 컴퓨터를 저렴하게 쓸 수 있게 해주자는 것이 취지였기 때문에 본체 + 모니터 구성의 큰 본체 외에도 키보드, 마우스, 스피커, 운영체제(Windows 98 Second Edition[14], Windows Me) 및 기타 소프트웨어[15]를 함께 구매하는 경우가 많았다. 스피커는 지금이야 많이 저렴해져서 전자제품 매장 뿐만 아니라 다이소에서도 구매할 수 있고 심지어는 완제품 컴퓨터를 한 대 사면 덤으로 끼워주기까지도 하는 물품이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돈을 내고 추가로 구입해야 되는 물건이었다. 국가에서 밀어준 브랜드인지라 판매를 우체국에서 담당했으며, 각 회사의 판매 대리점에서도 구입 가능했다.

사양은 크게 멘도시노 셀러론을 장착한 보급형 국민PC와 펜티엄 III 카트마이를 장착한 고급형 국민PC로, 2000년 6월 12일, 9월 20일, 12월 21일, 2001년 3월 26일, 6월 22일, 9월 20일에 각각 후기형들이 출시되면서 사양이 업그레이드 되었다.#
보급형 국민PC의 표준 사양[16]
메인보드 인텔 440LX/ZX/BX 칩셋이 탑재된 보드[17]
인텔 810 칩셋이 탑재된 보드
VIA 693A 칩셋이 탑재된 보드
프로세서 인텔 멘도시노 셀러론 300~500MHz(초기형)
인텔 코퍼마인 셀러론 600~700MHz(중기형)
인텔 코퍼마인 셀러론 900MHz ~ 1GHz(후기형)
하드 디스크 E-IDE 방식 6.4~10GB(초기형)
E-IDE 방식 20GB(후기형)
메인 메모리 SDRAM 32~64MB[18]
ODD 40배속 CD-ROM
그래픽 카드 ATI 레이지 IIc 4~8MB
트라이던트 블레이드 3D 8MB
인텔 i740 4MB~8MB
S3 그래픽스 트리오 3D 4MB
인텔 810 칩셋 온보드 내장 그래픽 16MB(후기형)
모뎀 / 이더넷 56Kbps 외장형 모뎀
사운드 카드 메인보드 내장형 ESS 마에스트로-3
운영체제 Windows 98 Second Edition, Windows Me
고급형 국민PC의 표준 사양[19]
메인보드 인텔 440ZX/BX 칩셋이 탑재된 보드
VIA 693A 칩셋이 탑재된 보드[20](초기형 및 중기형)
인텔 850 칩셋이 탑재된 보드 (후기형)
프로세서 인텔 펜티엄 III 카트마이 450~600MHz[21](초기형)
인텔 펜티엄 III 코퍼마인 667MHz[22] ~ 866MHz(중기형)
인텔 펜티엄 4 윌라멧 1.3GHz ~ 1.5GHz(후기형)
하드 디스크 E-IDE 방식 15GB ~ 30GB(초기형 및 중기형)
E-IDE 방식 40GB ~ 80GB(후기형)
메인 메모리 SDRAM 64~128MB(초기형 및 중기형)
RDRAM 256MB ~ 512MB(후기형)
ODD 48~50배속 CD-ROM
그래픽 카드 NVIDIA RIVA TNT2 32MB (6개 업체에서 선택)[23]
3dfx Voodoo 3 (일부 모델에서 채택된 사양)
NVIDIA GeForce 2 MX (일부 제조사들만 채택)
모뎀 / 이더넷 56Kbps 외장형 모뎀
사운드 카드 메인보드 내장형
ESS/Crystal 칩셋 외장형
운영체제 Windows 98 Second Edition, Windows Me

먼저 출시된 보급형 국민PC는 모니터 포함으로도 100만원대 이하의 가격을 책정할 수 있는 경우도 많아서 엄청난 판매량을 자랑했다. # 사실 일반적인 인터넷 서핑이나 문서 작업, 가벼운 게임 용도로는 멘도시노 셀러론 CPU의 성능으로 크게 손색이 없었고, 대략 스타크래프트 권장 사양과 비슷하다. 단, 그래픽 카드 성능이 당대 기준으로도 그저 그래서, 보급형을 사더라도 게임 좀 한다는 사람들은 그래픽 카드를 따로 업그레이드 하는 경우가 많았다.

고급형 국민PC는 보급형보다 약 2달 늦게 출시되었다. 유일한 단점은 64MB라는 RAM 용량으로, 당시 고사양 유저 기준으로는 약간 빡빡한 감이 있었기 때문에[24] 추가로 비용을 지불하고 128MB로 업그레이드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이후 국민PC의 정식 사양으로 상향되었다. 때마침...이라고 하기엔 좀 애매하지만 1년 뒤인 2001년 9.11 테러 이후 램값이 똥값이 되어 기존에 64MB로 사용했던 경우 128MB로 많이들 업그레이드 하기도 했다. 그리고 2000년 6월 28일에 GeForce 2 MX가 출시된 뒤에 그래픽카드를 업그레이드 한 경우가 제법 있었다.

또 하나의 아쉬운 점이라면 보급형 국민PC의 네트워크 사양에 보드 칩셋 내장형 이더넷이 채택되지 못 한 것인데, 인텔은 2000년 6월에 발표된 810E2, 815E 칩셋부터,[25] VIA는 2000년 9월에 발표된 Apollo Pro266 칩셋과 2001년 1월에 발표된 KT266 칩셋부터 지원해서 후기형에 볼 수도 있었겠지만, 실제로 채택된 사양은 고급형 국민PC 중에서도 후기형에 채택된 850 칩셋 기반 보드 뿐이었다.[26]

12개 업체의 사양이 정부가 제시한 사양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이는 정부가 사양을 지정해주고 그 틀 안에서 만들도록 지시했기 때문인데 견적만 주고 대충 지시했을 때 어떤 부품이 빠질지는 당시 정부도 잘 알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즉 국민PC의 가격은 모니터의 유무와 크기, OS의 종류(윈도우, 리눅스 등)에 따라 가격이 달라질 수 밖에 없는 구조이다. 당시 가장 인기가 있는 기종인 고급형 본체+윈도우 OS+17인치 모니터의 경우 150만원대에서 구입 가능했고 보급형 본체+윈도우 OS+17인치의 경우 110만원에서 120만원대에 구입 가능했다. 가격은 업체마다 2~3만원 정도 차이가 있었지만 거의 그 정도 선이 유지. 이렇게 모니터키보드마우스OS와 기타 잡다한 프로그램이 딸려오는 식이라, 100만원 미만의 PC를 보급한다는 정부의 생각보다 비싸게 결정되기는 했지만 그래도 가격을 맞춰보았을 때 어느 정도 성능도 내주고 업체의 마진도 적당히 챙겨주는 합리적인 가격선이었다고 할 수 있다.

2.3. 성공

대한민국의 가정용 16비트 및 32비트 PC 보급률
연도 당해 보급 수량 출처
1987년 약 13,000대 #
1988년 약 35,000대 #
1989년 약 90,000대 #1, #2
1990년 약 206,000대 #
1991년 약 360,000대 #1, #2
1992년 약 359,000대 #1, #2
1993년 약 314,000대 #1, #2
1994년 약 407,000대 #1, #2
1995년 약 556,000대 #1, #2
1996년 약 616,000대 #1, #2
1997년 약 676,000대 #
1998년 약 665,000대 #1, #2
1999년 약 974,000대 #
2000년 약 1,917,000대 #
2001년 약 1,846,000대 #

가정용 PC의 보급 수량은 이전까지 완만하게 증가하다가 국민PC 사업을 기점으로 폭발적으로 늘었고,[27] 2000년에 이르러서는 PC 보급률이 70%를 넘어서게 되었다. 그 전에도 가정용 PC가 어느 정도 보급되긴 했지만, 컴퓨터가 없다고 해서 생활을 못하지는 않았고 가격부담 때문에 학령기 자녀가 없는 집에서는 교육용 PC로도 관심이 없어 컴퓨터 살 생각 자체를 잘 안 했다. 1990년대 중반 이후 전화 접속 기반 인터넷이 상용화됐지만, 전화요금제도 오늘날의 정액 무한제가 아닌 종량제라 통신비 부담이 컸고, 그런 방식의 인터넷 접속조차도 주로 컴퓨터를 잘 아는 젊은 사람이 하는 것으로 여겨질 만큼 컴맹인 일반인들은 쉽게 접근할만한 사안이 아니었다. 그래서 컴퓨터를 사도 당시 가장 인기 있는 소프트웨어는 게임 정도를 제외하면 지금 봐선 웃길 수도 있지만 워드프로세서였다.

이 시기에 보급률이 오를 수밖에 없었던 부가적인 이유도 있는데, 동시기 정부가 ADSL 인터넷 보급과 전자정부사업(각종 연금과 세무 업무처리포함)을 진행하고, 전화가 아닌 유선 인터넷 회선을 타고 본격적으로 인터넷뱅킹과 HTS가 일반화되며, 전자우편과 인터넷 포털서비스가 활성화되면서 중소기업과 개인사업자, 그리고 일반 개인까지도 인터넷을 알아야 생활이 가능해지는 시대로 접어들었던 것이다. 이에 따라 정보격차가 무시무시하게 벌어지며 사람들이 받는 압박은 상당했고, 정부로서는 어떻게든 가정의 PC 보급률을 올리고, 컴퓨터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1970년대 이전 출생자들을 재교육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가격을 획기적으로 낮춘 국민PC 붐은 대중들에게 컴퓨터가 생활하는 데 여러모로 편리하다는 인식 전환의 계기도 만들어 컴퓨터를 지금의 필수 가전제품으로 등극시키는 데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 또한, 국민PC가 판매되기 1달 전인 1999년 9월 20일부터 실시된 '국민컴퓨터적금'이라는 소액 대출을 내놓아 소비자의 부담을 줄였다. 이 상품은 우체국에서 대출은 안 되고 예적금담보대출만 취급할 수 있어서 내놓은 꼼수였다. 그래서 추심업무를 할 수 없었던 우체국은 보증보험을 들게 했다. 소비자의 부담을 줄였던 덕분에 약 5개월 만에 약 28만 대의 국민PC가 팔리고 19만여 명의 국민PC 적금 가입자가 생겨났다. 덕분에 당시 중/고등학생들은 집에 돌아가면 스타크래프트를 하느라 바빴다.

기존 PC 시장을 장악하고 있던 삼성전자, 삼보컴퓨터 등 대기업에서도 국민PC의 출현이 어떤 의미인지를 알고 있던 터라 국민PC보다 약간 높은 사양을 가진 제품의 가격을 이전보다 내려서 판매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PC의 보급은 더 가속화되었으며, 결과적으로 국민PC와 ADSL의 만남은 1997년 외환 위기 이후 살 길을 찾던 한국에 IT 정보화 강국이란 새로운 길을 제시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김대중 정부의 IT정책 중 대표적인 성공 사례로 꼽힌다.

당연하다면 당연하지만, 당시 용던이라고 불리면서 호갱님들을 뒤통수치던 용산전자상가도 강한 타격을 입게 된다. 국민PC 사업 이전에는 안정된 서비스나 편리함, 브랜드를 고려하자면 대기업 PC를, 혹은 가격을 고려하자면 조립PC를 선택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런데 대기업보다는 서비스가 떨어지지만[28] 용산보다는 편리하고 가격도 그리 높지는 않았던 국민PC가 등장하면서, 이들은 신용결제나 적금결제가 가능한데다 정가제였던 덕분에 용산보다는 믿음이 간다는 점이 크게 어필되어, 많은 사람들이 구매하게 되었다. 물론 용산 전자상가 내에서도 용산전자상가조합이라는 이름으로 사업에 참여하기는 했지만 크게 재미는 보지 못했을 것이라는 것이 중론이다. 당시에는 현대 멀티캡, 세진 컴퓨터, 현주 컴퓨터가 아직 살아있어서 브랜드 인지도에서 크게 밀렸다는 것이 이유다. 하지만 조합을 결성하고 함께 호흡을 맞추었던 경험은 훗날 용산의 정직한 업자들이 에누리닷컴과 다나와 등에 힘을 함께 실어주는 데 큰 역할을 한다.

2.4. 문제점 및 쇠퇴

국민PC 사업이 마냥 좋은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국민PC가 판매되기 1달 전에 대만에서 921 대지진이 발생하여 컴퓨터 부품 공급에 차질이 생기고 시세가 올라가는 등 사업을 주도한 정부와 사업에 참여한 중소 업체들의 비상이 걸렸다. 유통망이 탄탄한 대기업들은 큰 영향을 받진 않았으나, 대만에서 생산된 부품 의존도가 높은 중소기업들한테는 대처하기 어려웠던 것이 문제.

국민PC 판매 이후에도 물량 배송 지연 문제로 인해, 국민PC를 신용카드로 구매할 경우 수수료를 구매자에게 부담시켜서 설치비를 요구하는 등 일부 업체들의 비양심적인 운영이 초기부터 드러나고 있었다. 결국, 1999년 12월 1일에 현주컴퓨터가 불명예스럽게 퇴출되었는데, 이때까지는 컴퓨터 업계의 성수기라서 일부 비양심적인 업체들의 일탈 수준으로 넘어가 큰 문제가 되진 않았다. 구매자들한테는 호재였지만 중소업체들에게는 악재였던 대기업들의 저가 공세도 역시 성수기에는 그나마 나쁘지 않았으나, 비수기에 접어들면서 참여 업체들의 판매량 급감 → 수익성 악화라는 악순환에 빠지기 시작했다. 2000년 6월 12일에 가격을 내렸지만 이미 대기업들과의 가격 경쟁력이 많이 상실된 상태라 소용 없었다.

2000년 7월 21일에 세진컴퓨터랜드가 부도 처리되었는데, 현주컴퓨터의 퇴출보다도 더 큰 이슈였다. 이것이 국민PC 사업 몰락의 기폭제가 되어 위기설이 돌고 돌자, 발등에 불 붙은 꼴이 된 정보통신부는 7월 25일부터 서비스뱅크가 세진컴퓨터랜드에서 구매한 사용자들의 1차 A/S 수행을 맡고 인터넷PC협회가 2차 A/S를 맡는 등 A/S 상시 감시 체제를 갖추기 시작했다. 2개월 뒤인 9월 20일에 가격이 더 내려가고 성능 업그레이드된 국민PC를 내놓았지만 별 반응이 없었다.

2000년 10월 20일에 정보통신부가 국민PC 사업 1주년을 맞이하여 참여 업체들을 물갈이 해서 정부 주도에서 협회 중심의 민간 주도로 바꾸려는 대안을 제시했지만, 계속된 수익성 악화로 세진컴퓨터랜드에 이어서 11월에 PC뱅크, 컴마을, 엘렉스컴퓨터, 용산전자상가협의회 등 여러 업체들이 대거 포기했다. 12월 21일에 국민PC 라인업을 다양화 했으나, 2001년에 성일컴퓨텍도 포기하는 등 참여 업체들이 계속 줄어들어 남은 일부 업체들만 간신히 버티고 있었으며, 3월 26일, 6월 22일, 9월 20일에 신형 국민PC 라인업과 가격 인하를 연달아 단행하는 등[29] 계속 발버둥 쳤지만 이렇다 할 성과는 없었다.

결국, 한동안 소식이 없다가 2002년 5월 시점에는 인터넷PC협회 웹사이트가 이미 폐쇄된 상태였고, 전화 문의도 안 된 상태로 뒤늦게 알려짐에 따라 1차 국민PC 사업은 쓸쓸하게 끝나고 말았다. (매일경제, 인터넷PC 사라진다)

3. 2차 국민PC 사업

보급형 국민PC의 표준 사양
메인보드 인텔 845 계열 칩셋이 탑재된 보드
프로세서 인텔 셀러론 노스우드 2.6GHz
하드 디스크 E-IDE 방식 40GB
메인 메모리 DDR SDRAM 256MB
ODD 48~50배속 CD-ROM
그래픽 카드 ATI Radeon 7500/8500 계열(초기형)
ATI Radeon 9000/9200/9250(후기형)
NVIDIA GeForce 2 MX & GeForce 4 MX 420 / 440(초기형)
NVIDIA GeForce FX 5200(후기형)
인텔 Extreme Graphics 계열 내장 그래픽(일부 모델 한정)[30]
모뎀 / 이더넷 메인보드 내장형
(100Mbps 지원)
사운드 카드 메인보드 내장형
운영체제 Windows XP Service Pack 1
가격 본체 단독(79만원)
17인치 LCD 모니터 + 본체 통합(129만원)
고급형 국민PC의 표준 사양
메인보드 인텔 865 계열 칩셋이 탑재된 보드
프로세서 인텔 펜티엄 4 노스우드 2.6~2.8GHz (HT 지원)
하드 디스크 E-IDE 방식 80GB
메인 메모리 DDR SDRAM 512MB
ODD 16배속 DVD-ROM
(48~50배속 CD-ROM 기능 지원)
그래픽 카드 ATI Radeon 9600XT(초기형)
ATI Radeon 9550 변종 상품(후기형)
NVIDIA GeForce FX 5700(초기형)
NVIDIA GeForce 6600 GT(후기형)
모뎀 / 이더넷 메인보드 내장형
(100Mbps 지원)
사운드 카드 메인보드 내장형
운영체제 Windows XP Service Pack 1
가격 본체 단독(109만원)
17인치 LCD 모니터 + 본체 통합(159만원)

참여정부 초기인 2003년 12월에 인터넷PC협회의 제안으로 (#) 우여곡절 끝에 2004년 3월 2일부터 국민PC 사업이 재개되었지만[33], (#) 소규모라서 존재감이 별로 없었고 조립 컴퓨터보다 비싼 가격대로 형성되어서 시장에서 주목 받지 못 하고 망했다. (#1, #2, #3, #4, #5) 4월 16일에 성능을 높이고 가격도 낮추는 등 좀 더 다양하게 라인업 해도 마찬가지였다. (#1, #2)

2004년 5월부터 인터넷PC협회가 저조한 판매 실적의 원인들 중 하나였던 구매 자격 요건을 완화해달라고 담당 보험사한테[34] 건의했지만 대금 회수 문제로 난색을 표하다가, 7월 13일에 거절하기로 못 박았고 구매 자격 요건의 완화 요청 시도는 무산되었다. (#1, #2, #3, #4) 결국, 9월 6일에 우체국이 국민컴퓨터적금의 판매를 중단하고 해당 적금이 보급형 디지털TV[35]를 구매할 수 있는 '국민 IT839 적금'으로 통폐합 함에 따라, 2차 국민PC 사업은 사실상 중단되고 말았다. (#1, #2, #3)

4. 국민노트북PC 사업

정부에서는 인터넷PC 사업 성공에 힘입어 2000년 3월 30일부터 인터넷노트북PC 사업도 진행했었다. 브랜드 네임처럼 취급되었던 국민PC처럼 '국민노트북PC'라고도 불렀으며, 가격은 160~240만 원대로 오늘날의 고성능 노트북 가격에 가깝다. 하지만 이쪽은 크게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는데, 데스크탑 국민PC가 초기부터 겪었던 것처럼 국민 노트북 PC 역시 초기부터 물량 공급이 지연되었고, 협소한 하우징 특성상 발열 문제가 논란이 되면서 판매에 적신호가 켜졌다. 다행히 2000년 6월 26일에 성능이 개선된 제품을 낮은 가격에 판매하는 것으로 일단락 되었지만, 결정적인 이유는 데스크탑 컴퓨터 있는데 뭐하러 노트북까지 또 사냐는 인식이 있었을 뿐더러, 노트북 가격도 상당히 비쌌던 시절이었던 것. 대도시의 중심부 학교에서도 2~3대 정도만 보유하고, 학생들은 있다는 것도 잘 모를 정도로 귀하던 시절이었다.

2003년 3월에 런칭된 인텔 센트리노 브랜드로 무선 인터넷 붐을 일으킨 시절에도 '노트북은 데스크탑 컴퓨터보다 비싸서 엄두가 안 나는 품목'으로 취급하는 것은 여전했다. 다행히 2004년에 90만원대 노트북, 2005년 이후에 60만원대 노트북이 처음 등장하고 나서야 기업들이 가격 경쟁에 불 붙으면서 살만한 품목이 되었으며, 가까운 곳에 통학하기 어려운 대학생들에게는 사실상 필수품으로 자리 잡았다.

5. 영향

이 시절 PC의 대중화는 불법 복제네티켓 등 관련 도덕 교육이나 법령이 전무한 상태에서 PC만 팔아, 즉 질적 성장은 고려하지 않고 양적 성장에만 의존해, 인터넷은 말 그대로 불법자료의 천국이 되었고 한 직장에서도 컴퓨터를 다룰수있는 사람과 컴퓨터를 다룰줄 모르는 사람들이 공존해있던 시대라 이 당시의 부모들은 대개 컴퓨터를 잘 다룰 줄 몰라 아이들이 어떤 식으로 컴퓨터를 이용하는지도 모르는 경우가 빈번했기 때문에, 주 사용층인 자녀들이 음란물이나 사행성 게임에 무방비로 노출되는 경우가 많았다.[36] 지금의 촘촘한 19금 규제 같은 것은 존재하지도, 아니, 존재해야 한다는 인식조차 드물던 시절이니, 물론 지금의 인터넷 저질 문화보다야 전반적으로 건전했던 것은 있어서 양지에서는 반말조차 규제를 당하기 일쑤였던 시절이긴 했다. 물론 음지에선 대놓고 뻘드립을 치기 시작하는 등 인터넷 문화가 서서히 양극화되던 시기기도 했고. 세이클럽, 버디버디처럼 채팅 문화도 유행한다.

그런데 오히려 그 덕분에 사람들의 컴퓨터 실력이 일취월장하는 아이러니한 계기도 되었다. 세상에 컴퓨터 사면서 "이제 이걸로 숙제 하면 내 학업 능력이 증진될 거야!" 하면서 기뻐한 청소년이 얼마나 됐을까. 다 영화/애니/게임 등 불법 콘텐츠 내려받으면서 쌓인 노하우와 게임하면서 사운드 드라이버 잡던 실력들이 나중에 과제를 하면서도 발휘된 것이다.(...) 역시 컨텐츠가 빈약한 IT 기기는 사용자를 스마트하게 만들지. 인터넷 보급 초창기만 하더라도 '인터넷 정보검색사 자격증'이란 것이 당당하게 존재하였고[37], 검색 엔진에 키워드를 넣어 자료를 찾아내는 과정을 TV 방송에서 시합까지 벌여 중계하기도 했다. 당시의 검색 엔진은 '장동건'을 치니 '장동 어물시장'[38]이 뜨더라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는 등 자연어처리 성능이 2010년대와 비교하기도 미안할 정도로 빈약해서, 키워드 서치를 위한 키워드를 사용자가 선택하는 것에 따라 검색결과의 차이가 컸다.[39] 또한, 옛날에 도서관에서 사서가 책을 찾는 방식처럼, 키워드가 아닌 카테고리를 이용한 정보검색 능력도 필요했던 덕분에, 질문의 내용을 어느 카테고리에서 찾아야 하는지 아는 것도 정보검색사의 능력 중 하나였다. 컴퓨터활용능력 자격증이나 워드프로세서 자격증 같이 지금에 와서는 별 의미가 없어보이는 자격증들이 당시에는 막연히 '미래의 운전면허증'처럼 여겨졌다는 점을 생각해 볼 때, 당시 아이들에게 엄청나게 강력한 인터넷 학습동기를 유발하였던 불법 유통물 등 음지의 공로는 마냥 무시하기엔 꽤나 큰 수준이긴 했다.

개발도상국 아이들을 위한 OLPC를 이용해서 아이들이 게임이나 불법 유통물, 음란물 등을 보는 비율이 높다는 소식에 한 컴퓨터 관련자는 "저나 당신이나 다수는 그렇게 컴퓨터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지 않았나요? 좋은 현상입니다."라고 쿨하게 넘겼다는 이야기도 있다. KOICA 소속으로 아프리카에서 2년 동안 선생으로 자원봉사하고 온 이도 현지에서 컴퓨터를 접한 아이들이 가장 먼저 하던 것이 게임이나 동영상 관람이었다고 밝혔다. 본능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인터넷 인프라 부족과 낮은 사양 등으로 음란물 접근성은 떨어져 고전게임이나 저화질 영화 동영상의 인기가 폭발했다고 한다.

6. 비슷한 사례

2006년경 독일도 컴퓨터 사용 저변 확대라는 목적으로 컴퓨터를 만든 적이 있었다. 지멘스후지쯔의 합작 회사인 후지쯔 지멘스에서 만든 PC이다. 사양은 다음과 같다.

OS로 Windows XP 미디어 센터 에디션을 설치하고 TV 튜너가 기본 사양에 들어있는 등 유비쿼터스 보급을 위해 만들어진 것 같은 PC로 멀티미디어 관련 사양이 강력하다. 가격은 999유로로, 1500원 환율을 적용했을 때 150만원 수준. 2020년대 현재 기준으로는 가벼운 사무 작업 또는 웹서핑을 제외하면 사용하기 어려운 사양이다. 국민PC와의 출시 간극은 약 7년인데, 그 사이 엄청나게 늘어난 RAM과 HDD의 용량 차이를 비교해보라. 거기다 2006년 이전 시기에 출시된 국민PC는 현재 켜서 고전게임 하나 돌리는 수준이 끝인 반면, 2006년 기준으로 출시된 저 사양은 램을 4GB 이상으로 올려주고 SATA 방식의 SSD만 추가하고 윈도우 XP에서 윈도우 7 ~ 윈도우 10으로 업그레이드하면 웹서핑과 유튜브 시청 정도는 좀 느려도 가능하다는 게 1990~2000년대 컴퓨터 발전이 어마 무시했음을 알 수 있다. 참고로 애슬론X2 5000+는 2006년 3분기쯤이 지나서야 나왔다. 15년 사이에 참 많은 것이 변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되는 사양.

7. 관련 문서


[1] 2020년 기준으로는 150만원이면 6코어 프로세서와 16GB 램, 고가형 그래픽카드는 물론 용량도 빵빵한 고스펙 조립식 컴퓨터 본체 단품을 살 수 있지만, 1990년대에는 이게 지뢰찾기, 카드놀이 같은 기본 게임만 되는 저가형 컴퓨터 가격이었고(관공서에 투입되는 사무용 컴퓨터 가격이 130만원대던 시절이었다) 당시 기준 고사양 게임을 충분히 할 수 있는 물건은 200만원이 넘었다. 성능은 급격히 좋아졌는데 가격은 오히려 낮아진 것.[2] 그리고 20년 이상의 세월 동안 오를대로 오른 물가 상승률을 감안할 경우 현재의 가격으로 환산하면 앞 각주에 서술된 금액에 2~2.5배를 곱해야 한다. 당시에는 400만원으로 경차(자동차)를 살 수 있었다. 현재 물가로 치면 셀러론에 메모리 4GB, 내장그래픽에다 120GB SSD 정도 달린 최하위급 엔트리 깡통 모델이 200~300만원 하고 i5에 16GB RAM, GTX 1650S, 512GB 정도 사양이 500~700만원 하며(그래픽카드 대란이 벌어지는 와중에도 이 정도까지는 안 갔다.) i7, i9이나 RTX xx70 이상급은 준중형차~중형차와 맞먹는 살인적인 가격 탓에 워크스테이션용으로 연구소나 기업에 소량 납품만 되며 아예 개인사용자용으로는 출시조차도 하지 않는 상황 정도로 비유할 수 있다. 가끔 옛날 자료를 찾아보면 정보소외계층 운운하며 다른 친구들은 전부 컴퓨터를 가지고 있는데 자기네 집에만 없는 나머지 소외감 및 집단따돌림 등의 영향으로 자살한 청소년 등의 이야기가 있는데 1990년대~2000년대 극초반 당시에는 국민PC 사업에도 불구하고 그런 경우가 가능했다. 당시 국민PC라고 만든 최저가형 모델조차도 최저임금 노동자의 1~2개월분, 대기업 사원의 2주 분량의 급여에 해당했기 때문에…[3] 국민PC 사업 이전에 정부 주도로 컴퓨터를 보급하기 위한 교육용 컴퓨터 보급 사업이 2차례 진행된 바 있었다. 1983년 5월에 시행된 8비트 컴퓨터 보급을 위한 1차 교육용 컴퓨터 보급 사업과 1989년 6월에 시행된 IBM PC 호환기종을 대상으로 한 2차 교육용 PC 사업이 그것. 다만 1차는 당시 대중 인식, 시대적 한계나 비싼 가격을 잡지 못한 것 등으로 실패했고, 2차는 그래도 중박은 터트렸다.[4] 물론 지금 보면 지뢰 찾기, 카드놀이 수준이긴 했다. 그래도 시간은 잘갔다. 더군다나 PC통신의 이용 요금이 임금 수준이 몇 배로 오른 2020년대 기준으로도 만만한 수준이 아니었다.[5] 1990년대 중반만 해도 한 아파트에 컴퓨터 가지고 있는 집은 손에 꼽을 정도였고, 연간 보급 수량이 가장 높은 시기들을 거쳐간 2000년대 초반에도 PC 없는 집들이 적지 않았다.[6] 다나와는 2000년 2월에 디지털카메라 가격 비교 사이트로 출발했고, 중고나라는 2003년에 사이트를 개설했다.[7] 1999년 9월에 삼보컴퓨터가 대주주였던 나래이동통신에 인수되었으며 삼보컴퓨터의 제품을 OEM으로 공급받았었다. 사실상 삼보컴퓨터의 멀티였었다. 지금은 회사 자체는 망하고 당시 계약했던 일부 사설 컴퓨터 수리점들에 상호가 남아있다.[8] PC케이스와 파워서플라이를 국내에서 생산하던 업체였었는데, 일반적인 ATX 구격을 거꾸로 뒤집어놓은 듯한 케이스(현세대에서 RTX라 불리는 그 규격이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MK2 등 일부 업체에서 이 방식으로 생산한 적이 있었다. 여기서 R은 Rotation을 의미한다.)를 주로 생산했었다.[9] 과거 애플 매킨토시 유통업체였으며, 후에 다른 회사에 인수되어 현재는 봄툰을 운영하는 키다리스튜디오로 바뀌었다.[10] 홈페이지 주소인 idom.co.kr은 다른 이름의 컴퓨터 판매 업체 홈페이지에 연결됐었다가, (그 업체는 2012년 6월 1일자로 폐업했다.) 남양주시 지역 정보 검색 사이트로 연결됐었다가, 웬 미용실 블로그로 연결됐었다가, 2023년 2월 4일 현재는 판매용으로 되어 있다.[11] 2000년대 중반까지 LCD 모니터를 판매하다가 어느새부터인가 조용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12] 한때 http://www.internetpc.or.kr 주소의 웹사이트까지 운영했었는데 국민PC 라인업은 물론이고 가격 정보도 확인할 수 있었다. 물론, 구매 문의는 사실상 전화로 이루어졌다. 당시 전화 번호는 02-3461-1759였다.[13] '인터넷PC방협회'와 헷갈릴 수도 있지만 이쪽은 PC방 업체들의 단체로, 기존의 한국인터넷멀티문화협회와 한국인터넷플라자협회가 2000년 7월 13일에 통합한 협회였다.[14] 1999~2001년 당시 최신 OS이자 2000년대 중반까지도 주류였던 OS였다. 많은 이들이 알고있다시피 2000년 9월에 출시된 Windows Me메모리 유틸리티가 없다면 Windows Vista, Windows 8, Windows 8.1조차 범접할 수 없을 정도의 희대의 망작이었고, 동년대에 출시된 Windows 2000은 성능은 준수했지만 당시 수준으로는 요구 사양도 높은 편이었고 서드파티 업체들도 NT 커널에 대한 지원이 부족해 하위호환 문제도 상당했다. 커널 지원 문제는 2001년 10월에 출시된 Windows XP에도 이어졌다.[15] 문서작성용은 주로 한글 97과 MS오피스 97[16] 초기형(1999년 10월 20일), 중기형(2000년 9월 20일, 12월 21일), 후기형(2001년 9월 20일) 기준[17] 주로 소켓 370 형태의 멘도시노 셀러론 전용 440LX 보드가 많이 쓰였으며 컴마을 제품에 들어간 메인보드의 경우는 ATi RAGE IIc 4MB 그래픽이 온보드 되어 있었다. 그 외에 440ZX, 440BX 칩셋도 사용하였다.[18] 정부에서는 기본적으로는 64MB 이상을 권고했지만, 일부 제조사에서 32MB만 장착하여 판매하는 경우가 있었다.[19] 초기형(1999년 12월 21일), 중기형(2000년 6월 12일, 9월 20일, 12월 21일), 후기형(2001년 3월 26일, 6월 22일, 9월 20일) 기준[20] 693A 칩셋 메인보드의 경우 주로 ECS사의 제품이 많이 들어갔는데 693A 칩셋의 최악의 안정성 + ECS 메인보드 특유의 낮은 내구성으로 인하여 각종 에러나 고장이 잦아서 구매한 사람들이 제대로 피를 봤다.[21] 180nm 공정으로 미세화되고 클럭이 높아지면서 가격대까지 낮춘 코퍼마인 CPU였으면 더 좋았겠지만 출시되기 딱 5일 전에 국민PC가 판매되었기 때문에 코퍼마인 CPU를 처음부터 채택될 수 없었다. 다행히 펜티엄 III 코퍼마인은 슬롯1 타입과 소켓 370 타입이 혼재했기 때문에 코퍼마인으로 업그레이드가 가능했다.[22] 출시 당시 코퍼마인이 나오자 인텔이 카트마이의 생산량을 급격히 줄이면서 물량이 부족해 펜티엄 III 코퍼마인 667MHz CPU를 울며 겨자먹기로 끼워준 셈이지만 가격을 더 받지는 않았다는 듯 하다.[23] EZ2DJ에서 장기간 채택된 그래픽 카드가 RIVA TNT2 M64였다. 그래픽 출력 수준은 채택 초기만 해도 상당한 상급이었다.[24] 2000년 당시 삼성 매직스테이션 데스크탑 중 중급형 기종의 램 사양이 64MB였다.[25] 정확히 따지면, 보드 칩셋의 사우스 브리지인 ICH2부터 82559 패스트 이더넷 컨트롤러가 내장되었다.[26] NVIDIA는 2001년 9월에 출시된 최초 nForce 칩셋부터, ATI는 2002년 7월에 출시된 IXP200, IXP250 칩셋부터 채택되었지만, 둘 다 국민PC의 네트워크 사양에 채택되지 못 했다.[27] 가정용 PC의 당해 보급 수량 TOP 3는 국민PC 사업이 진행되었던 1999~2001년이지만, '전년 대비 증가율' TOP 3는 교육용 PC 사업 전후 시기였던 1988~1990년이었다.[28] 이런 점 때문에 선정된 업체들 중 규모가 작은 중소기업들은 이후 경영난을 겪어, 이때 PC를 산 고객들이 사후 서비스를 받지 못하는 경우도 생겨났다.[29] 이때 출시된 신규 국민PC가 1차 국민PC 사업의 마지막 라인업이었다.[30] 인텔 845 계열 칩셋 메인보드에 내장된 그래픽으로 845G/GE/GV/GL 칩셋이 장착된 메인보드에서 사용하였다. 자세한 내용은 인텔/칩셋/레거시을 참고.[31] 실제 판매 일정으로 2002년 7월에 먼저 Radeon 9000 / 9000 PRO가 출시되었고, Radeon 9700 PRO는 8월, 9700은 9월, 9500 PRO는 11월, 9500은 12월에 출시되었다. 이후 2003년에는 기존 9700 / 9500 계열의 마이너 업그레이드 버전으로 Radeon 9800 / 9600 계열이 출시가 되었다. 2004년에는 변종 모델로 유명한 Radeon 9550이 출시되었다.[32] 2004년 5월에 출시된 ATI Radeon 9550은 원래 Radeon 9600 계열에서 클럭을 더 낮춘 저가형 라인이었으나, 오버클럭이 잘 되어 제조사들이 Radeon 9550을 9600XT나 9500Pro 수준으로 클럭을 높인 변종 제품을 판매하기 시작하여 상위 제품 9600XT, 9500 계열을 팀킬 했을 정도로 저가형/보급형/중급형을 아우르며 3년 동안 대량 판매될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33] 안 그래도 2월 중순에 예정이었던 것보다 밀려서 2월 26일에 겨우 재개했으나, 우체국과 공급 업체 간에 연락망 준비가 미흡한 탓에 더 밀리게 되었다. 1주일 뒤인 3월 9일부터 인터넷 우체국을 통한 판매도 재개되었다.[34] 서울보증보험이(現 SGI서울보증) 맡았다.[35] 당시에는 DTV라고도 불렀다.[36] 물론 지금의 포털처럼 방대한 양의 검색 자료들이 존재하던 시절은 아니어서, 일단은 게임 목적으로 이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여담으로 이런 인터넷 초창기 시절 가장 먼저 등장한 사이트들 중 하나가 연예인 팬클럽 못지 않은 안티 사이트들이었다.(...)[37] 내용이라고 해봤자 무슨무슨 검색 엔진이나 유명 유즈넷/FTP/고퍼 등을 검색하기 수준이었다.[38] 참고로 마장동은 축산물시장으로 유명하다.[39] 지금은 사라진 검색사이트 한미르에서도 핑클을 모델으로 기용하여, "핑클"을 검색했더니 "서핑클럽"이 떴다는 내용의 광고를 내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