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여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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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한국당 (1995.12.6.~1997.11.7.) | 새정치국민회의 (1998.2.25.~2000.1.20.) | → | 새천년민주당 (2000.1.20.~2002.5.6.) (2003.2.25.~2003.9.29.) |
대한민국의 제1야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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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 (1991.9.16.~1995.9.5.) | → | 새정치국민회의 (1995.9.5.~1998.2.24.) | 한나라당 (1998.2.25.~2008.2.24.) |
민주당 | → | 새정치국민회의 | → | 새천년민주당 (흡수합당) |
국민신당 (흡수합당) | ||||
통합민주당 (개별 합류) | → | 민주광명당 (개별 합류) | ||
무당파국민연합 (개별 합류) |
[1] | |
새정치국민회의 | |
<colbgcolor=#f5f5f5,#2d2f34> 한문 명칭 | <colbgcolor=#fff,#1F2023>-政治國民會議 |
영문 명칭 | National Congress for New Politics |
등록 약칭 | 국민회의 |
창당일 | 1995년 9월 5일 |
해산일 | 2000년 1월 20일 (새천년민주당으로 확대 개편) |
선행 조직 | (김대중의 정계복귀로 신당 창당을 위해 민주당내 동교동계 정치인들이 탈당) |
통합한 정당 | [[국민신당(1997년)|]] (1998년 9월 28일 흡수합당)[2] |
주소 |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여의나루로 67 (여의도동) |
총재 권한대행[3] | 이만섭 / 7선 (6·7·10-12·14·15대) |
원내 총무 | 박상천 / 3선 (13-15대) |
사무총장 | 한화갑 / 재선 (14·15대) |
정책위의장 | 임채정 / 재선 (14·15대) |
대통령/총재 | 김대중[4] / 제15대 (1998.2.25.~2000.1.20.) |
의석 수 | 103석 / 298석 |
당 색 | 녹색 (#009A44) |
파란색 (#001D9F) | |
스펙트럼 | 중도 (중도좌파 ~ 중도우파) |
공식 사이트 | 아카이브 |
2000년 1월 20일 기준 |
[clearfix]
1. 본문
1987년 11월 12일 창당한 평화민주당의 구성원과 그 해 12월 대통령 선거 때 김대중 후보에 대해 비판적 지지의 입장을 취했던 진보적 재야 인사들이 주축이 되어 창당하였는데 그 중 이기택 등 통합민주당의 당권파는 제외되었다.
더불어민주당의 법적 전신 정당 중에 가장 최초로 창당된 정당이다. 민주당계 정당의 중시조라고 부를 수 있는 정당이다.
2.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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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창당
1992년 12월 제14대 대통령 선거의 패배를 계기로 정계은퇴를 선언했던 김대중이 1995년 7월 18일 정계 복귀를 선언하고 자신의 계파를 중심으로 민주당을 탈당한 뒤 창당한 정당으로서, 창당과 동시에 동교동계('내외문제 연구회(최대 57석)')를 중심으로 원내 의석 53석을 차지해 제1야당이 됨으로써, 정계는 1여 3야(국민회의, 자유민주연합, 통합민주당(1995년))의 구도로 재편되었다.당시 민주당은 PK를 기반으로 하던 비주류(꼬마민주당 출신)인 이기택 총재가 이끌고 있었다. 이기택 총재는 김대중 전 총재는 2번 떨어졌기에 1997년 대선은 자신의 차례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며, 김대중의 정계은퇴 번복도 마뜩해 하지 않았다. 1992년 대선에서 3당 합당에 동참하지 않고 김대중을 묵묵히 도운 입장에선 당연했던 심정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1995년 첫 민선 지방선거로 확인 한 것은 DJ의 귀환과 JP의 부활이었으며, 특히 김대중이 공천한 조순이 당선되고 자신이 공천한 장경우가 낙선한 것은 결정적이었다. 이미 지선 공천 과정에서도 이기택 총재는 막후 실력자 격인 김대중과 여러차례 갈등했다. 김대중 입장에서도 다음해 총선 공천권을 놓고 '실력행사'는 가능했겠지만, 이미 경기도 지사 공천 과정에서도 각목사태가 벌어지는 등 큰 잡음이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신민당의 역사가 있는 마포당사까지 남겨두고 탈당을 불사한 것은 그런 이유였다.
1995년 7월 28일 당 대변인은 신당의 당명을 「새정치국민회의」로 하기로 결정했다고 발표했다. 앞서 김대중은 "당(黨)이라는 명칭을 쓰지 않은 예로 인도의 국민회의가 있다"고 말하는 등 국민회의 라는 명칭에 애착을 보였으며, 유신정권 시기에는 '민주회복국민회의'를 결성해 민주화 운동을 전개한 적이 있다. 언급된 인도 국민회의는 인도의 자와할랄 네루가 이끌던 중도 민족주의 정당이다. 당 관계자는 "국민회의라는 명칭은 여러 의견을 포용해 국민적 합의를 이끌어낸다는 이미지를 주고, 당이라는 명칭보다 민주적이고 국민적인 이미지를 주기때문에 선택했다"고 설명했다.신당 명칭 「새정치국민회의」로
김영삼의 "신"한국당, 1992년 대선에서의 "'한국병'의 치료사"라는 이미지와 대비되는 "새"라는 조어를 붙인 정당. 일단 평화민주당의 분위기를 빼는데는 성공했다는 평이 당시에 있었다.[6]
국민회의는 대통령 중심제(= 의원내각제 반대)와 중소기업의 육성, 여성부 신설, 국가보안법의 민주질서보호법으로의 대체, 남북연합통일방안 등을 강령으로 삼고, 중산층과 서민 대중을 위한 국민정당을 표방하면서, 중산층의 비판을 무마하기 위한 노선을 채택하였다. 동시에 이는 1990년대 후반 대두된 영국 노동당의 토니 블레어나 미국 민주당의 빌 클린턴의 "신진보주의(신개혁주의)" 노선(소위 제3의 길)의 수용이기도 했다. 대놓고 비례대표 1번을 사학 재단 이사장으로 했을 정도. 같은 시기 신한국당은 개혁을 앞세우며 혁신공천을 내세웠다. 사실 이때는 양당이 모두 중도화 되었던 시기. 어찌보면 좋은 현상일지도 모르나 이 현상은 철새 국회의원의 대량 생산 원인이 되었으며, 반대 급부로 양 진영 모두 비주류가 선명 노선을 주창하면서 갈라져나오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7] 아이러니하게도 이들은 몇 년 뒤 대선 국면에서 상대 진영과 손을 맞잡게 된다.[8]
2.2. 제15대 총선 부진
창당 다음해 치러진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국민회의는 야권 분열로 말미암아 그간 강세지역으로 손꼽혔던 수도권에서 부진하며 79석으로 기대치에 미치지 못하는 결과를 얻었다. DJ 개인은 자신이 전국구 의원이 되는데 고작 1번 차이로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의석이 14석이 늘었고, 여당은 26석이 줄었다"[9]라고 위안했지만, 사실상 100석 이상을 염두에 두었던 것을 생각하면 참패가 맞았다. 반면 여당인 신한국당은 대통령의 임기 후반임에도 개혁공천과 야권분열 덕분에 (예상인 155+a보다는 저조했으나) 139명이나 당선되었으며,[10] 기어이 무소속과 자유민주연합 의원 4명을 모아 157석으로 과반을 달성하고 만다.[11]이런 패배에는 민주당계 야권의 분열이 원인으로 지적되었다. 실제로 새정치국민회의와 통합민주당의 표분산으로 신한국당이 어부지리로 당선된 지역구가 30군데가 넘었으며, 특히 서울 강북과 경기 남부 등 기존 민주당계 정당이 강세를 보이던 수도권에서 이런 일이 많이 벌어졌다.[12][13] 총선 결과 민주당계 야권 전체 의석은 98~95석에서 94석(79+15)으로 오히려 줄었다. 이 모든 게 김대중의 "대통령병" 때문이라며 은퇴 번복과 분당에 대한 비판이 커졌다.
더욱이 이 해 말에는 신한국당의 '제3자 개입'을 막는 등의 내용을 추가한 크리스마스 노동법 날치기가 일어나면서 아쉬움이 커졌다. 이 상황에서도 국민회의는 강경한 장외투쟁을 하지 않음으로써 진보에겐 불신을 살 수도 있는 아슬아슬한 표심 달래기 행보를 지속한다.
한편 자유민주연합은 충청, TK, 강원에서 "녹색 바람"으로 2배로 팽창, 25석을 늘려 50석으로 강력한 제3당이 되었다. 이런 형국은 DJ가 자민련의 김종필 총재와 필연적으로 손을 잡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의원내각제 개헌에 동의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DJP연합이 기획되었는데, DJP연합은 3당 합당에 반대했던 꼬마민주당 출신들 입장에서는 제2의 억지 정계개편이었다. 실지로 1997년 대선이 끝날 때까지 DJP를 반대하는 맥락의 '제3후보론'은 계속 상존했으며, 극단적인 경우로는 DJP에 반대하기 위해 이회창을 지지하는 세력도 있었는데 다름 아닌 김대중이 공천과 선거운동에 힘썼던 조순 서울시장이었다. 조순은 1997년 9월 9일 대선 출마를 선언하고 통합민주당 대선 후보가 되었는데, 이후 지지율이 하락세를 보이자 '3김 정치 청산'을 명분으로 내세우며 이회창 후보와 단일화를 선언하고 사퇴했으며, 이어 통합민주당 잔류파를 이끌고 신한국당과 합당해 한나라당을 창당했다.
2.3. DJP연합과 대선 정국
대선 초기부터 DJP연합을 바탕으로 줄곳 1위로 앞서가던 DJ였다. 한나라당의 후보들은 대선 경선에서 박찬종, 이인제를 필두로 "9룡"이랄 정도로 각축을 벌였으며, 결국 허주 김윤환의 이회창 옹립에 따라 이인제가 패배했다. 그러나 두 아들의 병역 의혹이 불거지면서[14] 이회창의 지지율이 급락하자, 이인제가 전격적으로 신한국당을 탈당해서 국민신당을 창당하고 독자적 대선출마를 선언한다. 보수 성향의 이인제가 제3후보로 출마하면서, DJ 측은 더더욱 호재를 맞게 되었다. 거기에 1997년 외환 위기가 겹치면서 문민정부에 대한 지지는 나락으로 떨어졌다.하지만 이회창의 끈질긴 추격은 계속되었다. 1997년 10월, 총선 참패 후 살 길을 도모하던 조순의 통합민주당(1995년)과 합당하여 한나라당을 창당하고, "이인제 뽑으면 DJ가 된다"는 논리로 이인제의 지지율을 계속 빼왔다. 이회창 후보는 기어이 1달 전 이인제 후보의 지지율을 빼앗으며 2위를 탈환했지만, 추격전 양상이 너무 늦게 시작되어 결국 2위로 낙선했다.
결국 김대중은 39만표(1.6%) 차로 대선 4수만에 간신히 당선되었다. 이 승리는 기존 야당 고정표+DJP연합에 따른 충청도 표와 일부 중도표+이인제 분열 효과+경제위기에 따른 정권교체 열망+권영길(국민승리21) 후보와의 연대를 차단함으로서 얻은 중도표[15]+권영길에서 이탈한 '비판적 지지'의 진보표+"병풍"으로 인한 군복무 병사들의 지지를 모아 얻은 아슬아슬한 승리였다는 평이 많다. 거꾸로 말하면, 이 중 단 한 가지라도 빠졌다면 정권 교체는 일어나기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김대중은 대선 1년 전부터 여론조사에서 근소하게 계속 대선후보 1위를 유지했으며, 1위에 대한 밴드웨건 효과 등과 조순 등 반DJ 민주계가 모조리 3김정치와 정치공학에 반대한다는 논리로 여당에 참여하는 등의 사례도 많았다는 점에서 "김대중이 신승한 게 아니라 이회창이 석패했다"라는 시각도 있다.
여하간 이 선거는 "알고보면 부드러운 남자", "New 김대중"을 내세웠던 1992년 14대 대선과 달리, 1996년부터 밀기 시작했던 "준비된 대통령" 슬로건을 기반으로 한 안정 전략의 승리였다. 대표적인 광고가 DJ DOC의 노래를 패러디한 DJ와 춤을인데, 지금도 노무현의 상록수 기타 연주, 이명박의 국밥 먹방과 함께 가장 성공적인 대선 광고 중 하나로 꼽힌다. 참고로 DJ의 바로 다음 대통령이 되는 노무현이 직접 등장하고,[16]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17]을 연상하는 장면이 나오기에 "5년 후를 예언한 광고"라는 드립도 있다.
"행복한 가정, 안정된 사회, 강력한 국가!"라는 아무리 봐도 보수적이고 여당스러운 선거 구호[18]도 제대로 먹혔다. 한술 더 떠 광고에서 김대중은 젊은 층들에게 딱딱한 느낌을 주는 정권교체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 않고, 자신은 준비되어 있으니 꼭 한번 기회를 달라는 식으로 접근한다. 이른바 '구호(프레임)의 연성화' 전략이었던 것. 또한 DJP 연합 강조를 위해 김종필과 박태준 등 자민련의 보수 인사들도 여러 차례 등장한다.[19]
반면 이회창이 내걸었던 선거 구호는 "깨끗한 정치, 튼튼한 경제" "3김 정치 해소"였는데, 아무리 봐도 진보 성향의 야당에게나 어울릴 법한 구호를 내세웠다고 볼 수 있다. 더불어 처음 실시됐던 TV 토론 역시 DJ의 지지율을 높이는데 한몫했다.
2.4. 재야 운동가 영입
1996년 김대중 총재가 젊은 정치인 영입을 주장하였고 이에 따라서 새정치국민회의에 민주화운동가, 노동운동가 등 재야운동가들이 대거 영입되었다.[20] 김근태가 다수의 재야민주화운동가들을 이끌고 창당에 동참하였고, 오영식, 임종석, 우상호, 송영길[21], 이인영 등 386 학생운동권 출신들이 조직적으로 참여하였다. 노동운동가 출신인 심재권, 신기남 등도 입당하였다.2.5. 민주당계 정당의 대통합
한나라당에서 탈당하거나 신한국당과의 통합을 반대하여 통합민주당에서 탈당한 인사들이 새정치국민회의에 대거 합류했으며, 이인제가 주도한 국민신당 등이 새정치국민회의에 합류하게 되었고 그 결과 범민주당계 정당의 대통합이 이뤄지게 되었다.2.6. 김대중 대통령 당선 - 여당 '국민회의'
그렇게 1997년 12월 18일,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 후보가 40.3%의 득표율로 당선되면서 헌정 사상 처음으로 수평적이고 평화적인 정권교체를 이룩하였고, 1998년 2월 25일 김대중 대통령이 공식 취임하면서 여당이 되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전두환, 노태우의 사면에 동의함으로서 많은 논란이 빚어졌다. 그러나 이에 대해선 김영삼 정부 및 이회창, 김대중, 이인제 후보 등 주요 대선후보 전부 전노 사면을 추진했으며 당시 여야 모두 찬성의사를 밝혔던 것이라 국민회의로서는 전노 사면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던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다. ###김영삼 대통령은 본인이 사면은 자신이 하는 것이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1998년 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는 집권 반년만에 치러진 선거로, 여당이 지방선거에 승리한 첫 사례이자, DJP연합의 위력과시였다. 국민회의는 서울을 포함한 수도권 두 곳과 호남, 제주를 비롯한 6곳에서 승리하였고, 자민련 역시 충청과 인천 4곳에서 승리하여 16개 광역단체 중 10개를 압승했다. 한나라당 역시 영남과 강원 6곳에서 승리했지만, 내용 면에서 서쪽 지역 전역을 석권한 국민회의가 압승이었다. 이 시기가 국민회의의 전성기였다.
김대중 정권은 집권 이후 안정적인 국정운영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정계개편을 추진하였다. 한나라당 출신 의원들을 영입하고 이인제, 이만섭의 국민신당과 합당하는 방식을 통해 여대야소 구도를 만들었다.
1998년 9월 8일 국민회의는 한나라당 유용태, 박종우, 김길환, 송훈석 의원 등을 영입하여 의석수를 101석으로 늘렸다. 이로써 자민련 52석을 합칠 경우 공동여당은 과반보다 3석 많은 153석을 보유하게 됐다. #
2000년 16대 총선을 앞두고 '개혁정당'의 이미지를 부각시키고, 영남권(TK, PK)에서도 의석을 내는 '전국정당'으로 발돋움한다는 차원에서 2000년 1월 20일, 새로 창당한 새천년민주당에 합당되는 형식(흡수합당)을 통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새천년민주당은 과반에 또다시 실패한다.
3. 성향
3.1. 당명
'새정치국민회의'라는 당명에는 3가지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첫째, 국내적으로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등 모든 분애에 온 국민이 참여하는 정치를 표방하며
둘째, 통일에 주도적 역할을 하는 민족통일의 주도권을 가지며
세째, 21세기를 능동적으로 대처하고 새시대를 지향하는 정당이라는 의미을 지닙니다. 또한 국민회의는 국민이 추종하고 따라가는 정당이 아니라 온국민이 참여하는 정당으로 국민의 실체는 중산층과 서민입니다. 따라서 국민회의는 바로 중산층과 서민을 위한 중도 정당임을 당명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첫째, 국내적으로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등 모든 분애에 온 국민이 참여하는 정치를 표방하며
둘째, 통일에 주도적 역할을 하는 민족통일의 주도권을 가지며
세째, 21세기를 능동적으로 대처하고 새시대를 지향하는 정당이라는 의미을 지닙니다. 또한 국민회의는 국민이 추종하고 따라가는 정당이 아니라 온국민이 참여하는 정당으로 국민의 실체는 중산층과 서민입니다. 따라서 국민회의는 바로 중산층과 서민을 위한 중도 정당임을 당명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3.2. 심벌
'새정치국민회의'의 심벌은 새싹, 비둘기가 하나의 나무 형태로 결합된 디자인으로 새싹이 나무로 자라나고 나무가 모여 큰 숲을 이루듯이 정치, 경제, 문화등 모든 분야의 발전을 이룩하겠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비둘기의 비상은 우리민족의 통일과 번영을 약속하는 새정치국민회의의 의지를 상징합니다.
푸른색(새싹)은 국민에게 희망을, 녹색(비둘기)의 맑고 깨끗한 우리의 환경을 상징함으로서 새정치국민회의가 지향하는 미래사회에 대한 기대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비둘기의 비상은 우리민족의 통일과 번영을 약속하는 새정치국민회의의 의지를 상징합니다.
푸른색(새싹)은 국민에게 희망을, 녹색(비둘기)의 맑고 깨끗한 우리의 환경을 상징함으로서 새정치국민회의가 지향하는 미래사회에 대한 기대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3.3. 강령
우리 새정치국민회의는 조국광복운동의 정통성을 계승하고 민주화와 통일운동을 선도해 온 이 나라의 정통민족, 민주세력이 모인 정당이다.
우리당은 21세기 역사적 대전환기를 맞이하여 우리나라의 새로운 도약과 번영을 위해서 참여민주주의와 공정한 시장경제를 바탕으로 중도적 국민정당으로 새롭게 출발한다.
우리 새정치국민회의는 낡은 정치를 버리고 새정치를 추구한다. 새정치는 참여의 정치, 통일주도의 정치, 21세기의 격변에 대비한 정치이다.
우리당 이러한 새정치를 추구함에 있어서 참여민주주의와 의회민주주의를 발전시키고 안정속에 개혁을 실현한다. 우리당은 국민의 참여속에 언제나 국민과 같이 생각하고 행동한다. 우리당은 중산층에게 안정을, 서민에게 희망을, 여성에게 기회를, 젊은이에게 꿈을 주는 정치를 실현할 것이다.
우리 새정치국민회의는 21세기를 앞두고 새정치를 성취하고자 하는 온 국민의 열망을 겸허히 받들어 지혜와 역량을 모아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룩할 것을 엄숙히 천명하면서 1995년 9월 5일 전국대의원대회에서 다음과 같이 강령을 채택한다.
1. 정 치 : 참여의 정치
2. 경 제 : 중소기업 중심의 경제
3. 사 회 : 안정과 꿈과 희망의 건강사회
4. 문 화 : 문화선진국의 지향
5. 교 육 : 지식혁명의 주도와 전인교육
6. 환 경 : 자연과 공존공영
7. 과학기술 : 과학기술전쟁에서의 승리
8. 여 성 : 평등과 참여의 보장
9. 청 년 : 사회의 공동참여자
10. 외교안보 : 자주협력의 외교, 안보체제
11. 통 일 : 점진적이고 평화적인 민족통일
12. 21세기 : 도덕적 선진국가
우리당은 21세기 역사적 대전환기를 맞이하여 우리나라의 새로운 도약과 번영을 위해서 참여민주주의와 공정한 시장경제를 바탕으로 중도적 국민정당으로 새롭게 출발한다.
우리 새정치국민회의는 낡은 정치를 버리고 새정치를 추구한다. 새정치는 참여의 정치, 통일주도의 정치, 21세기의 격변에 대비한 정치이다.
우리당 이러한 새정치를 추구함에 있어서 참여민주주의와 의회민주주의를 발전시키고 안정속에 개혁을 실현한다. 우리당은 국민의 참여속에 언제나 국민과 같이 생각하고 행동한다. 우리당은 중산층에게 안정을, 서민에게 희망을, 여성에게 기회를, 젊은이에게 꿈을 주는 정치를 실현할 것이다.
우리 새정치국민회의는 21세기를 앞두고 새정치를 성취하고자 하는 온 국민의 열망을 겸허히 받들어 지혜와 역량을 모아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룩할 것을 엄숙히 천명하면서 1995년 9월 5일 전국대의원대회에서 다음과 같이 강령을 채택한다.
1. 정 치 : 참여의 정치
2. 경 제 : 중소기업 중심의 경제
3. 사 회 : 안정과 꿈과 희망의 건강사회
4. 문 화 : 문화선진국의 지향
5. 교 육 : 지식혁명의 주도와 전인교육
6. 환 경 : 자연과 공존공영
7. 과학기술 : 과학기술전쟁에서의 승리
8. 여 성 : 평등과 참여의 보장
9. 청 년 : 사회의 공동참여자
10. 외교안보 : 자주협력의 외교, 안보체제
11. 통 일 : 점진적이고 평화적인 민족통일
12. 21세기 : 도덕적 선진국가
*** 중산층과 서민을 위한 새정치5대 목표 ***
1. 국민참여의 정치
2. 중소기업 중심의 경제
3. 안정과 신명의 사회
4. 화해와 협력속의 통일
5. 도덕적 선진국가
1. 국민참여의 정치
2. 중소기업 중심의 경제
3. 안정과 신명의 사회
4. 화해와 협력속의 통일
5. 도덕적 선진국가
4. 민주당계 정당의 중시조
현 민주당계 정당의 직계 정당을 논할 때, 새정치국민회의를 직계 조상 내지 중시조라 보는 견해가 강하다. 물론 1955년 창당된 민주당[22] 혹은 1967년 창당된 신민당 혹은 1987년 창당된 평화민주당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는 주장도 있지만, 현 민주당계 정당의 대표주자인 더불어민주당 스스로가 정당 연혁 직계로 새정치국민회의를 표시하고 있다. 민주당계 정당의 성향이나 구성원들의 성향도 이때부터 확립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이때 형성된 성향(정치적 정체성)이 이후 민주당계 정당들로 이어지면서 이에 맞는 사람은 들어오고 안 맞는 사람은 나가는 형태로 인정 구성원의 성향도 정리되었다는 이야기다. 분명한 것은, 현재까지 민주당계 정당에서 항상 등장하는 "중산층과 서민"을 지지기반으로 내세운 강령은 새정치국민회의를 사실상 시초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23][24]무엇보다 정당 법인의 계승을 기준으로 따질 때 새정치국민회의가 가장 오래된 직계 조상이다. 만약 새정치국민회의 당원이 중간에 한 번도 탈당하지 않고 당원 자격을 유지했다면 ≪새정치국민회의-새천년민주당-민주당(2005년)-중도통합민주당-민주당(2007년)-통합민주당(2008년)-민주당(2008년)-민주통합당-민주당(2013년)-새정치민주연합-더불어민주당≫의 계보에 따라 2022년 현재 더불어민주당 당원에 이르게 된다.[25] 반대로 평화민주당의 당원이 중간에 탈당하지 않고 지금까지 당적을 유지했다면 현재 국민의힘 당원이다.[26] 평화민주당의 후신인 통합민주당이 신한국당과 신설합당되어 한나라당이 되었고, 이 법인이 새누리당을 거쳐 자유한국당까지 이어져오다 새로운보수당, 미래를향한전진4.0과 신설합당하여 미래통합당이 되었기 때문이다. 새정치국민회의는 법적으로는 통합민주당에서 갈라져 나온 분당세력으로 간주된다. 계보적으로는 평화민주당-신민주연합당-민주당(1991년)-(동교동계의 집단 탈당)-통합민주당(1995년)-(노무현 등 국민통합추진회의(통추)계열 탈당)-한나라당으로 신설합당. 즉 정당 법인을 기준으로 보면 새정치국민회의는 분당/탈당인사들이 만든 신규 정당이지만 그 분당/탈당 인사들이 오히려 주류/다수파이고, 잔류 인사들이 소수파인 사례에 해당한다.[27][28]
따라서 민주당계 정당(대표적인 예로 더불어민주당)의 계보를 평화민주당까지 소급하는 것은 '정신적인 계승자'라는 식으로 나름의 합리성이 있기는 하나, 이론의 여지 없이 직계 조상에 해당하는 것은 새정치국민회의부터이다. 평화민주당의 법인적 후신이 한나라당을 따라간 것은 운명의 장난이라기보다는, 민주화 직후 1990년대의 한국 정치는 인맥 중심의 계파에서 이념 기준의 정당으로 격렬한 이합집산을 겪었고, 그 결과가 결국 범민자당계/범민주당계의 두 정당으로 수렴되었기에 당이 쪼개지고 갈라져 다른 정파로 들어가는 상황이 발생하는 것은 피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다만 김대중+동교동계+이후 민주당 주류의 입장에서는 불운하게 당권이 상대편에 있을 때 정파 재집결이 일어났기에 당 법인을 두고 나올 수밖에 없었던 것 뿐이었다.
5. 역대 지도부
5.1. 총재
총재 및 총재권한대행 | |||
{{{#!wiki style="margin: -0px -10px -5px; min-height: 25px;" {{{#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총재 | ||
<rowcolor=#009a44> 제1·2대 김대중 | |||
총재권한대행 | |||
<rowcolor=#009a44> 제1·2대 조세형 | 제3대 김영배 | 제4대 이만섭 | |
}}}}}}}}}}}} |
5.2. 원내총무
원내총무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word-break: keep-all" {{{#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373A3C,#DDD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초대 신기하 | 제2대 박상천 | 권한대행·제3대 한화갑 | ||
제4대 손세일 | 권한대행 유용태 | 제5대 박상천 | |||
}}}}}}}}}}}}}}} |
6. 출신 대통령
대한민국 대통령 | ||||||
번 | 이름 | 대 | 임기 | 선출 방식 | 정당 | |
취임일 | 퇴임일 | |||||
8 | 김대중 (1924 ~ 2009) | 15 | 1998년 2월 25일 | 2003년 2월 24일 | 1997년 대선 직선 40.3% | 새정치국민회의 (1998 ~ 00) 새천년민주당 (2000 ~ 02) 무소속 (2002 ~ 03) |
7. 역대 선거 결과
7.1. 대통령 선거
연도 | 선거명 | 후보자 | 득표수 (득표율) | 결과 |
1997년 | 15대 | 김대중 | 10,326,275 (40.3%) | 당선[29] |
7.2. 국회의원 선거
연도 | 선거명 | 지역구 (비율) | 비례대표 (득표율) | 총 의석 (비율) | 결과 |
1996년 | 15대 | 66 / 253 (26.1%) | 13 / 46 (25.3%) | 79 / 299 (26.4%) | 원내 2당 |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국민회의 전국구 선거포스터 (1996) |
7.3. 지방선거
연도 | 선거명 | 광역단체장 (비율) | 기초단체장 (비율) | 광역의원 (비율) |
1998년 | 2회[30] | 6 / 16 (37.5%) | 84 / 232 (36.2%) | 271 / 616 (44.0%) |
7.4. 재보궐선거
연도 | 국회의원 | 광역단체장 | 기초단체장 | 광역의원 | 기초의원 |
1996년 4월 | 2 / 9 | ||||
1996년 6월 | 1 / 1 | ||||
1996년 8월 | 0 / 1 | 0 / 1 | |||
1996년 9월 | 0 / 1 | 1 / 4 | |||
1996년 9월 | 0 / 2 | ||||
1996년 10월 | 0 / 2 | ||||
1996년 11월 | 0 / 1 | ||||
1996년 11월 | 0 / 1 | ||||
1996년 11월 | 0 / 1 | ||||
1996년 12월 | 0 / 1 | ||||
1997년 3월 | 1 / 2 | ||||
1997년 3월 | 2 / 3 | ||||
1997년 4월 | 0 / 1 | ||||
1997년 7월 | 0 / 2 | ||||
1997년 9월 | 0 / 1 | ||||
1997년 12월 | 1 / 1 | 0 / 1 | |||
1998년 4월 | 0 / 4 | ||||
1998년 7월 | 2 / 7 | ||||
1998년 8월 | 1 / 1 | ||||
1998년 11월 | 1 / 1 | ||||
1998년 11월 | 0 / 1 | ||||
1998년 11월 | 0 / 1 | ||||
1999년 3월 | 1 / 2 | 0 / 1 | |||
1999년 6월 | 0 / 2 | ||||
1999년 6월 | 0 / 1 | ||||
1999년 6월 | 0 / 1 | ||||
1999년 8월 | 0 / 1 | ||||
1999년 9월 | 0 / 1 | ||||
1999년 9월 | 2 / 2 | ||||
1999년 10월 | 1 / 1 | ||||
1999년 10월 | 0 / 1 | ||||
1999년 11월 | 0 / 1 | ||||
1999년 12월 | 0 / 2 |
8. 당가
당가는 1절과 2절로 나눠졌다.
듣기
<1절> 정성으로 키운 나무 울창한 숲이되듯 겨레의 뜻 한데 모아 민족번영 꽃피우고 고난의 밤 지새워도 새아침은 밝아오듯 국민의 슬기모아 일류국가 이룩하세 우리의 이상 내일의 희망 새 각오 새 물결로 새정치 새시대 위한 새정치국민회의 온누리 밝히는 횃불 영원히 타오르리 <2절> 너와 나 손맞잡고 하나되어 달려온 길 겨레의 뜻 한데 모아 조국통일 앞장서세 우리 모두 하나 되어 이땅에 우뚝서서 자유평등 물결속에 인류평화 이룩하세 우리의 이상 내일의 희망 새각오 새 물결로 새정치 새시대 위한 새정치국민회의 온누리 밝히는 횃불 영원히 타오르리 온누리 밝히는 횃불 새정치국민회의 |
9. 관련 문서
10. 둘러보기
{{{#!wiki style="margin: 0px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word-break: keep-all" | 이승만 정부 | 대한독립촉성국민회 (1948.7.~1951.12.) → 자유당 (1951.12.~1960.4.) 한국민주당 (1948.7.~1949.2.) 민주국민당 (1949.2.~1949.11.) 대한국민당 (1949.11.~1951.12.) |
장면 내각 | 민주당 (1960.8.~1961.5.) | |
박정희 정부 | 민주공화당 (1963.12.~1979.10.) 유신정우회^[1]^ (1973.3.~1979.10.) | |
전두환 정부 | 민주정의당 (1981.1.~1988.2.) | |
노태우 정부 | 민주정의당 (1988.2.~1990.1.) → 민주자유당 (1990.1.~1992.10.) | |
문민정부 | 민주자유당 (1993.2.~1995.12.) → 신한국당 (1995.12.~1997.11.) | |
국민의 정부 | 새정치국민회의 (1998.2.~2000.1.) → 새천년민주당 (2000.1.~2002.5.) 자유민주연합 (1998.2.~2001.9.) 민주국민당 (2001.4.~2001.9.) | |
참여정부 | 새천년민주당 (2003.2.~2003.9.) → 열린우리당 (2004.5.~2007.2.) | |
이명박 정부 | 한나라당 (2008.2.~2012.2.) → 새누리당 (2012.2.~2013.2.) | |
박근혜 정부 | 새누리당 (2013.2.~2017.2) → 자유한국당 (2017.2.~2017.3.) | |
문재인 정부 | 더불어민주당 (2017.5.~2022.5.) 더불어시민당^[A]^ (2020.3.~2020.5.) | |
윤석열 정부 | 국민의힘 (2022.5.~현재) 국민의미래^[A]^ (2024.2.~2024.4.) | |
[1] 대통령이 임명하는 국회의원으로 구성되어 있는 교섭단체. [A] 비례대표 득표용 위성정당. |
''' 1996.5.30. ~ 2000.5.29.''' {{{#!wiki style="margin: 3px 0 -5px"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min-width: 33.3%; margin: 0 -10px" {{{#!folding [ 임기 개시 ] {{{#!wiki style="margin: -6px -1px" | 여당 | |||||||||
142석 | ||||||||||
야당 | ||||||||||
79석 | ||||||||||
48석 | 8석 | |||||||||
무소속 15석 | ||||||||||
재적 299석 |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min-width: 33.3%; margin: 0 -10px" {{{#!folding [ 후반기 개시 ] {{{#!wiki style="margin: -6px -1px" | 연립여당 | ||||||||
87석 | 49석 | |||||||||
야당 | ||||||||||
152석 | 8석 | |||||||||
무소속 3석 | ||||||||||
재적 299석 |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min-width: 33.3%; margin: 0 -10px" {{{#!folding [ 임기 종료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연립여당 | ||||||||
98석 | 52석 | |||||||||
야당 | ||||||||||
128석 | ||||||||||
8석 | 3석 | |||||||||
무소속 9석 | ||||||||||
재적 298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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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녹색은 비둘기, 파란색은 새싹이며 이를 하나로 합쳐 보면 단풍잎처럼 보이는 로고이다. 비둘기는 1987년 평화민주당 창당 때도 쓰던 로고였다. 또한 이 정당을 끝으로 2012년 민주통합당 시절까지 민주계 파란색 계통은 끊어졌다가 2013년 다시 민주당으로 당명을 변경하면서 부활한다.[2] 정확히는 해체 후 일괄 합류.[3] 당시 총재 권한대행 직함은 당 대표급이었다.[4] 당 총재직도 겸임했는데, 2001년에 당 총재직이 폐지되기 전에는 여당 총재 직책은 현직 대통령이 당연직으로 겸임했었다.[5] 본래는 임시로 새정치회의라는 약칭을 썼었다(예: 당시 보도1 / 당시 보도2). 그랬다가 이후 약칭을 국민회의로 확정했다. 훗날 천정배가 이 국민회의라는 이름으로 신당을 창당했다가 나중에 안철수의 국민의당과 합쳤다.[6] 평화민주당은 서울과 호남에 너무 치우친 까닭에 지역 정당이라는 이미지가 짙었다.[7] 보수계는 공화계와 민정계가 김종필을 중심으로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하였고, 민주계는 잔류파가 통합민주당으로 남았다. 이들은 각각 원조보수론과 선명야당론을 내세워서 지지를 얻으려 했다.[8] 통합민주당은 신한국당과 함께 한나라당을 창당했고, 자민련은 DJP연합으로 연립정부의 일원이 된다.[9] 혹은 "예상 의석에서 26석이 늘었다."[10] 임기 후반이어도 대통령의 지지율이 낮은 편은 아니었기 때문에 과반은 무리더라도 이 정도 의석은 나올 수 있었을 것이다.[11] 이 당시 국민회의에선 서울 송파구 을 지역구에 소설가 김진명을 공천한 바 있다. 결과는 신한국당 맹형규 후보에게 밀려서 낙선했다. 해당 문서 참조.[12] 자민련도 수도권 여러 곳에 후보를 내보냈지만, 애초에 지역기반이 별로 없던 지역이라 득표율이 저조한 관계로 신한국당이 손해를 보지는 않았다.[13] 이명박 역시 신한국당 후보로 종로구에 출마했는데, 민주당 노무현과 국민회의 이종찬 후보 간 야권 표가 분열되는 바람에 손쉽게 당선된다. 심지어 자민련 후보로는 김을동이 출마했지만 김을동의 득표율은 겨우 6.72%에 불과해 이쪽이 깎아먹은 표의 수는 적었다. 다만 이명박은 선거법 문제로 연루되어 1998년 초 형이 확정되기 전 의원직을 자진사퇴했다. 김영삼 정권의 공정선거 정책의 시범타라는 말도 있다.[14] 이는 결국 16대 대선이 끝나고 결백했음이 하밝혀지게 된다.[15] 1997년 당시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에서 진보정당이 외면받고 멸시받는 풍습이 남아 있었다.[16] 노무현은 당시 국민회의 부총재를 맡고 있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16"'초에 등장한다. 그리고 한술 더 떠 광고 중간에 나오는 지구본은 1999년 지구멸망설을 부정한 것이라고 한다.[17] 선거 직전 해였던 1996년에 공동 개최가 결정된 상태였다.[18] 이는 이후 민주당 대선 후보들의 캠페인에서도 충실히 계승되는데, 2017년엔 문재인 후보가 "나라를 나라답게, 든든한 대통령"을, 2022년엔 (낙선했지만) 이재명 후보가 "위기에 강한, 유능한 경제대통령"을 선거 구호로 내건다. 두 사람 모두 선거 당시 자신의 중앙정치, 지방정치 경력이 축적됐음을 슬로건을 통해서도 강조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런 정치언어, 프레임에 대한 연구는 조지 레이코프 등 언어 학자들에 의해 진행 중이며 한국에서도 연구 결과가 논의되고 있다.[19] 정한용과 함께 등장하는 인물은 추미애 의원이다. 손숙이나 김수미 등은 별도 CF에 등장해 각자의 역할을 했다.[20] 사실 김대중은 평화민주당 시절부터 재야인사들을 적극적으로 영입했다. 그러나, 재야인사들이 어려운 말을 쓰고, 장황하게 하면 바로 끊어버리고 "나 같으면 그 걸 10초 만에 얘기하겠소. 국민을 대표하겠단 사람들이 뭐 그리 어려운 말을 쓰시오?"라고 반문했다고 한다.[21]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22] 더불어민주당이 명시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당의 역사적 시작점이 1955년 신익희가 창당한 민주당이다.[23] "확연하게 두터워진 중산층을 잡아야 한다", "중도까지 지지층을 넒혀야 선거에서 이긴다"는 정치공학적 판단으로 선거의 촛점을 중산층에 두기 시작한게 이때부터이다. 당장 선거를 앞두고 과거라면 기득권층이라면서 외면했을 관료, 군인, 기업인, (친기업성향) 변호사 등을 대거 영입하면서 인적 구성이 바뀌기 시작했다. 그 이전 평화민주당 - 통합민주당 시절에는 강령도 훨씬 진보적이었고, 실제 노동계나 사회단체와의 연대활동도 많았다. 젊은 피 수혈의 대상도 학생운동권, 노동운동가, 인권변호사 일색이었다.[24] 정확히 말하면 민주당계 정당의 구심점 역할을 한 김대중 및 동교동계의 정치적 정체성 자체는 그다지 진보적이지 않았다. 김대중 자신은 이념적인 정치인이라기보다는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탄생한 '명망가' 였고, 김대중의 계파인 동교동계 역시 이 명망가를 중심으로 뭉친 인적 집단이지 특별히 뚜렷한 이념적 지향점을 가진 집단이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일단 김영삼에 비하면 김대중쪽이 상대적으로 좀 더 진보적인 성향을 가진 편이었고, 3당 합당이후 유일 야당 포지션으로 고립된 평화민주당이 거대 여당에 맞서 세를 불리기 위해 재야인사들을 영입하기 시작하자 평화민주당의 '선명 야당' 정체성에 반응한 학생운동, 노동운동 및 시민사회운동 출신의 재야인사들이 이에 호응함으로써 정당의 정체성이 진보적 영역으로 확장된 것이다. 하지만 6공 초기 이 정체성으로 몇 차례의 선거에 임했지만 영 재미를 못 보는 일이 거듭 일어나자 이번에는 반대로 "중산층을 잡고 중도까지 지지영역을 넓혀야 한다"는 새로운 노선에 따라 중도 영역을 향한 정체성 확장이 시작된 것이다. 즉, 김대중계 정치인들의 인맥에 기반한 정치세력이던 평화민주당이 여러 차례의 정체성 확장 과정을 거쳐 <온건 진보(중도좌파)~중도(또는 중도우파)를 포괄하는 빅텐트 정당>으로 거듭나는 과정이 대강 완성된 것이 새정치국민회의 시점이었고, 이때 확립된 정체성이 대강 2020년 현재에 이르는 민주당계 정당의 정체성으로 이어지고 있다.[25] 성장현 전 용산구청장이 이쪽에 해당되는 대표적 케이스.[26] 실제로 이중재의 경우 평화민주당 창당 이후 계속 당적을 유지하였고 한나라당 소속이 되었다. 그의 아들인 이종구도 한나라당에서 3선 의원을 지냈다.[27] 특히 민주당계 정당이 배출한 대통령 2명(당시 정당정치 경력을 시작하지 않은 문재인은 논외)이 모두 국민회의의 후신인 새천년민주당 소속이라 결과적으로는 완벽한 주류일 수밖에 없다.[28] 유사 사례인 열린우리당은 새천년민주당/열린우리당 분당 시기에는 비슷한 구도가 나타났지만, 결국 2008년 통합민주당에서 새천년민주당의 후계 정당과 열린우리당의 후계 정당이 다시 합체하였으므로 이리가건 저리가건 결과적으로 새정치국민회의의 정당 법인 승계는 2021년 현재 더불어민주당까지 이어진 것. 노무현 탄핵 사태로 당세가 폭락한 민주당(2005년)이 한나라당(또는 그 후신 정당)으로 합류하기라도 했으면 결과까지 비슷한 진짜 유사 사례가 되었겠지만, 결국 민주당계 정당 내에서의 이합집산끝에 재통합하였으므로 초기 구도의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결과는 달랐다고 보아야 한다. 역으로 보면, 새정치국민회의 이후 '민주당계 정당'의 정체성이 그만큼 명확해졌기에 심각한 내부갈등에도 불구하고 정당 법인이 민주당계 정당의 범위 바깥까지 나가는 일은 발생하지 않게 되었따고 볼 수도 있다.[29] 자유민주연합 김종필과 선거 연대, 이른바 DJP연합.[30] 대표적인 DJP 연정의 위력 과시 사례로 꼽히는데 부산, 울산, 경남, 대구, 경북, 강원 등 6개 지역을 제외하고는 모두 범여권 세력이었던 국민회의 + 자민련(대전, 충남, 충북, 인천 등 4곳)이 광역자치단체장에서 승리했다. 인구가 적은 강원만 승리했다면 그야말로 영남을 제외한 전국을 석권할 뻔 했다. 이 당시 이루지 못했던 민주당계 정당의 지방선거 석권은 2회 지방선거 이후 20년이 지난 2018년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더불어민주당이 14곳 승리라는 대기록으로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