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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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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82e59><colcolor=#fff> 대한민국 제35대 대통령비서실장
임종석
任鍾晳 | Im Jong-seok
[6]
파일:임종석(더불어민주당).png
출생 1966년 4월 24일 ([age(1966-04-24)]세)
전라남도 장흥군 장흥읍 금산리 신기마을[7][8]
거주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평창동
본관 장흥 임씨(長興 任氏)[9]
재임기간 제16대 서울특별시 정무부시장 (박원순 시정)
2014년 4월 14일 ~ 2015년 12월 22일
제35대 대통령비서실장
2017년 5월 10일 ~ 2019년 1월 8일
서명
파일:임종석 서명.svg
SNS 파일:페이스북 아이콘.svg |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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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82e59><colcolor=#fff> 배우자 김소희
자녀 딸 임동아
학력 안양서국민학교[10] (전학)
서울묵동국민학교[11] (졸업)
태릉중학교 (졸업)
용문고등학교 (졸업)
한양대학교 공과대학 (무기재료공학[12] / 학사)
병역 병역면제 (수형)
종교 가톨릭 (세례명: 프란치스코)
신체 176cm, A형
소속 정당
의원 선수 2
의원 대수 16, 17
약력 한양대학교 총학생회장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3기 의장
청년정보문화센터 소장
새천년민주당 창당준비위원
새천년민주당 청년위원장
제16대 국회의원 (초선 / 서울 성동구 / 새천년민주당)
열린우리당 원내대변인
열린우리당 원내부대표
제17대 국회의원 (재선 / 서울 성동구 을 / 열린우리당)
제17대 국회 전반기 통일외교통상위원회 간사
열린우리당 개헌추진위원회 부위원장
대통합민주신당 원내수석부대표
제17대 국회 후반기 국회운영위원회 간사
통합민주당 원내수석부대표
민주통합당 사무총장
제16대 서울특별시 정무부시장 (박원순 시정)
2018 제1차 남북정상회담 준비위원회 위원장
제35대 대통령비서실장 (문재인 정부)
대통령비서실 외교특별보좌관 (문재인 정부 / UAE 특임)
대통령비서실 외교안보특별보좌관 (문재인 정부)
남북경제문화협력재단 이사장
별명 림종석[13], 함박웃음[14], 플이중[15] }}}}}}}}}
1. 개요2. 생애
2.1. 정치 입문2.2. 문재인 정부 초대 대통령비서실장
2.2.1. 남북정상회담 준비위원회 위원장
2.3. 2019년 이후2.4. 22대 총선 국면
3. 약력4. 논란 및 사건사고5. 소속 정당6. 선거 이력7. 여담8.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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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학생운동가 출신 정치인.

전대협 의장 출신의 거물 운동권으로, 33살에 정계에 입문해 제16·17대 국회의원을 지냈으며, 줄곧 민주당계 정당에서 활동해오다 박근혜 정부박원순 서울특별시장 밑에서 정무부시장으로 있었다.

그러다가 19대 대선 당내 경선 당시 문재인 캠프에 후보 비서실장으로 합류했고, 뒤이어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뒤 문재인 대통령의 첫 대통령비서실장으로 임명되었다.

대통령비서실장에서 퇴임한 뒤 바로 백원우 전 민정비서관, 남요원 전 문화비서관, 권혁기 전 춘추관장 등 문재인 정부 1기 참모진들과 함께 2019년 2월 18일, 더불어민주당에 복당했다.

2. 생애

1966년 4월 24일 전라남도 장흥군 장흥읍 금산리 신기마을에서 아버지 임세기(任世基, 1936. 7. 5 ~ )와 어머니 경주 김씨(1939. 7. 2 ~ ) 사이의 4형제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유년 시절 경기도 안양시로 이주해 안양서초등학교에 재학하다가 5학년 때 서울로 올라와 중랑구 묵동에서 성장기를 보내며 서울묵동초등학교, 태릉중학교, 서울 용문고등학교(33회), 한양대학교 공과대학 무기재료공학과(86학번)를 졸업하였다.

한양대학교 공과대학 무기재료공학과 1학년 때, 노래패에 가담하면서부터 운동권에 뛰어든 것으로 알려져 있고, 1988년 한양대학교 총학생회장이 되어 1989년 한총련의 전신인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일명 전대협 3기 의장을 맡으면서 학생 운동권의 중심으로 활동했다. 전대협 의장이 되면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에 따른 경찰의 지명 수배를 받게 됐는데 10개월간 갖은 방법으로 도망다니다 결국 1989년 12월 경희대학교에서 체포, 5년의 실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문민정부 때인 1993년 특별사면되어 3년 6개월만에 석방되었다.

당시 경찰은 임종석을 검거하기 위해 2계급 특진과 1,000 만원의 현상금을 걸었으며 전국에 10만 장의 수배 전단을 붙였고 연인원 12만명의 경찰을 동원했다. 그런데도 임종석은 신출귀몰, 경찰의 수배망을 따돌리면서 10여 차례의 기자회견과 대학 집회 등에 20여 차례 모습을 드러냈고 임수경의 평양 축전 참가 등을 주도하기도 해서 '임길동'이라 불리기도 했다. 워낙 잘 도망다녀 여장을 하고 다닌다는 소문도 있었는데 안경을 쓰고 다닌 정도였지 따로 변장을 한 적은 없었다고 한다.

1990년 12월 26일 대법원에서 임수경의 밀입북을 몰래 도와 징역 5년, 자격정지 5년 판결을 받게되는데,# 유죄판결에 따른 실형으로 인해 공식적 병역사항은 미필이 되었다. 1993년 5월 원주교도소에서 출소한 이후 8월에 한양대학교 4학년에 복학하게 되고, 1995년 8월 대입 10년 만에 졸업을 하였는데 졸업식에서 총동문회장상과 공로상을 수여받기도 했다.

당시 정치사회상을 잘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는 국가보안법 전과자에게 큰 상을 줬다는 것이 이해가 안 될 것이다. 그러나 임종석은 전대협 의장 가운데 가장 인지도와 영향력이 높은 인물로, 당시에 이미 2000년대 이후의 정치인의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게다가 한국 특유의 학벌주의, 서열 문화의 영향도 있었는데, 서연고 위주로 돌아가던 학생운동판에서 한양대생 임종석이 전대협 의장이 되자 학교 명성이 높아졌다며 한양대 측의 반응이 나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대학총장협의회에서 한양대 총장의 발언권이 세졌고, 대학입시의 합격선이 올라갔다는 얘기마저 돌았다.#

2.1. 정치 입문

1994년 말부터 비정부기구 쪽에서 활동하였다. 가까운 동료들과 만든 청년활동단체인 청년정보문화센터 부소장직을 맡았다.

1995년 모래시계 세대 정계진출 관련 기사들이 많이 나오던 때부터 정계진출 유력 후보로 자주 거론되었다. 그러나 1996년 총선에는 당시 자격이 되지 않아 출마하지 못했고, 이후 1999년 국민의 정부 출범 이후 대규모 사면복권 당시 복권이 돼서야 출마 자격을 얻게 되었다.

1999년 16대 총선을 앞두고 한창 386세대 운동권 출신 영입이 활발할 때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 서울 성동구 지역구에 출마하여[16] 당시 상대후보였던 4선의 이세기 한나라당 의원을 누르고 당선되면서 정계에 본격적으로 발을 들여 놓게 되었다. 다만, 임종석 자신은 의외로 전대협 의장 출신이라는 화려한 경력 비해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의원은 되지는 못하였는데, 이후 2004년 17대 총선에서도 당선되고, 열린우리당 대변인도 했다지만, 당내에서 큰 두각을 나타내거나 거물급 의원으로는 성장하지 못했다.

정계 입문 후 임종석의 의정활동은 국가보안법 폐지, 북한인권법 제정 반대, 대북 교류사업 등에 주로 초점이 맞춰진다. 초선 의원 시절인 2000년 7월 임종석은 국보법 관련 국회 토론회에 참석해 이 같은 발언을 했다. "국가보안법을 폐지하고 보완책으로 간첩죄에 대해 형법상 처벌을 강화하면서 대북 접촉, 통신교류에 대해선 남북교류협력법을 통해 규제하면 된다." 또 2004년 7월에는 의원실 주최로 '국보법 폐지를 위한 간담회'를 열었고, 같은 해 8월 당시 여당인 열린우리당 국보법 폐지 입법추진위원모임에서는 "국가보안법은 위헌적이며 반(反)민주악법의 상징이기에 폐지해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2004년 12월에는 국보법 연내 폐지를 촉구하는 의원단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참여정부 당시 대북송금 특검수사에도 적극 반대했는데, 대북송금 사건김대중 정권 때인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북한에 5억 달러를 불법송금한 사건을 말한다. 2003년 3월, 임종석 등 당시 민주당 소장파 의원이 주축이 된 모임인 '정치를 바꾸는 젊은 희망'은 대북송금 특검 수사 반대성명을 냈다. 같은 해 6월에는 민주당·개혁당(대표 유시민) 소속 의원 61명과 함께 대북송금 특검 수사 마무리를 촉구하는 성명서에도 이름을 올렸다.

2008년 18대 총선에서는 뉴타운 열풍으로 한나라당 김동성 후보에 밀려 낙선하게 되고, 이후 당내에서 계속 활동하면서 재기를 노렸다. 그리고 민주통합당 출범 당시 당 사무총장에 임명되면서[17] 처음으로 비중있는 역할을 맡게 되었지만 문제는 이 당시 임종석이 정치자금법 문제로 재판에 걸려 있었다는 점. 결국 19대 총선 직전 나온 1심 판결에서 유죄가 선고되면서 총선 출마가 좌절되었다. 사실 출마 자체는 할 수도 있었지만, 재판 문제로 인해 당 내에서도 공격이 상당히 많이 나오면서 결국 공천을 반납한 것은 물론 사무총장직까지 사퇴했다. 한명숙 당시 대표가 끝까지 만류했다고 하는데 결국 그는 사퇴를 선택하고 말았다. 여기에는 사무총장으로서 공천권과 관련하여 소위 노이사 공천(친노-이화여대-486 위주 공천)을 주도했다는 공세도 한 몫 했고 실제로도 그런 측면이 강하다. 그가 떠나면서 공석이 된 성동구 을 지역구는 임수경 공천설이 돌았으나, 임수경은 비례대표로 공천을 받았고, 그의 친구인 홍익표 한양대 겸임교수가 지역구를 물려받았다. 그의 사퇴 원인이 된 정치자금법 문제는 2심에서 무죄로 뒤집히면서 최종적으로 무죄 선고를 받았다.

2014년 '(사)남북경제문화협력재단'을 설립하고 이사장으로 활동했다. 해당 재단은 남측 방송을 대리하여 대한민국 내 북한 저작물 이용의 저작권료를 북한에 지불하는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그러나 북한은 국가간 저작권을 존중하는 베른 협약에 가입했음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뿐만 아니라 타 국가의 저작권물 이용에 관해서 저작권료를 지불하지 않고 있고,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형평성 논란이 제기되고 있다. 그리고 2014년 지방선거에서 박원순 시장 캠프에서 활약하면서 서울특별시 정무부시장에 임명되어 2015년까지 재직하였고, 때문에 박원순계의 대표주자 정치인으로 분류되었다.

2014년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중도를 지향해야 한다는 뜻이냐"라는 질문에 "그렇다"고 답했다. 임종석은 당시 야당이던 새정치민주연합이 "노선이나 정책이 상당히 치우쳐있다"며 "과도하게 사회, 정치적 문제에 집착하고, 국가 운영과 관련된 의지에는 소홀하다"고 지적했다.*

이윽고 2016년 20대 총선 출마를 위해 정무부시장 직을 내려놓은 후 은평구 을 지역출마를 선언하고, 정계의 거물이었던 이재오와 겨뤄서 정치적인 재기를 모색하였는데, 그만 당내 경선에서 무명의 신인이었지만 이미 은평구 내에서 기반을 착실하게 만들고 있었던 강병원 후보에게 패하면서 아예 출마 자체를 하지 못했다. 전대협 의장 출신으로 많은 기대를 받으며 정치에 입문했지만, 18대 총선부터 20대 총선까지 세 번의 선거에서 연거푸 고배를 마시면서 10년 넘게 원외에 남게 되었다. 임종석과 함께 국회의원 자리에 도전한 다른 박원순계 정치인들도 기동민을 제외하면 경선과 본선 과정을 통과하지 못했다.

2.2. 문재인 정부 초대 대통령비서실장

그러다가 2017년 문재인 캠프의 비서실장으로 영입되었다. 임 실장은 19대 대선 국면 동안 안정적으로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문재인 당시 민주당 전 대표가 삼고초려 끝에 영입을 했다고 알려졌다. 그래서 일부에서는 박원순 서울시장이 지난 대선 후보 경선 때 문재인 당시 후보를 상대로 극단적인 네거티브 공세를 퍼부었던 이유를 여기서 찾기도 한다. 다만 유시민 작가는 썰전에서 임종석을 박원순계로 분류하는 이 같은 시선에 대해서는 꼭 그런 식으로 분류할 수 있는 건 아니라면서 '편견이다'라고 비판했다.[18]

이윽고 문재인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된 후 문재인 정부 초대 대통령비서실장으로 임명되었다. 2017년 11월, 국회 국감장에서 당시 자유한국당전희경 의원과 충돌하게 되었는데, 전희경 의원은 "주사파 · 전대협이 청와대를 장악했다"면서 "전대협의 강령과 회칙을 보면 미국을 반대하고 모든 외세에 부당하다고 본다. 회칙을 보면 민족과 민중의 근거한 진보적 민주주의 구현을 밝히고 있다. 지금 청와대에 있는 전대협 인사들이 이런 사고에서 벗어났다는 어떠한 증거도 없다"고 임종석 실장을 비판하였는다. 이에 임종석은 실장 이에 대해 "전희경 의원님 말씀에 매우 모욕감을 느끼고, 아주 강력한 유감의 뜻을 표합니다. 5공, 6공정치군인들광주를 짓밟고 민주주의를 유린할 때 전 의원님이 어떻게 살았는지 제가 살펴보진 않았습니다.[19] 그러나 지금 의원님께서 거론하신 대부분의 그 사람들이 인생을 걸고 삶을 걸고 민주주의를 위해서 노력했습니다. 의원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실 정도로 부끄럽게 살지 않았습니다."며 발끈했다.#

'비서실장 자리는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말도 있고, 박근혜 정부 시절 김기춘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이 '왕실장'으로 군림하며 대통령 참모 그 이상의 과도한 권력을 행사한다는 이유로 '기춘대원군'이라는 비판을 받았는데 임종석 또한 이를 반복하고 있다는 부정적 평가가 있다. 이는 논란 문서의 대통령비서실 권한 관련 문단 참조. 반면 장하성 대통령비서실 정책실장, 정의용 국가안보실장과 함께 인수위 기간 없이 시작된 문재인 정부의 초기를 안정적으로 이끌었다는 긍정적 평가도 있다.

그런데 문재인 정부의 내각 구성을 끝나고 청와대가 본격적으로 활약하면서, 자연스럽게 청와대 비서실의 리더인 임 실장이 보폭이 커졌다. 그 덕에 청와대에 머물지 않고 대외적으로 다방면으로 활약하는 해결사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대외적으로는 문재인 대통령의 오른팔로서, 추미애 여당 대표를 예방한 자리에서 장미꽃을 선물하며 당청 불화설을 일축하였고, 추경 통과를 위해 추미애 대표의 '머리 자르기 발언'에 대한 사과를 요구한 국민의당 박주선 비대위원장에게 대통령 대리인으로서 사과하면서 막힌 정국을 해결해 존재감을 보여주었다. 또한, UAE에 특사로 파견되어 양국의 외교적 갈등 봉합에 핵심 역할을 했다. UAE는 UAE 논란으로 야당과 언론에 뭇매를 맞고 있는데도 침묵을 지킨 임 실장을 보고 신뢰를 느꼈다고 한다.#

그러나 비서실장 취임 후 1년차가 되면서 제왕적 비서실 및 자기 정치로 비판을 받았으며, 음주운전, 음주폭행 등의 공직기강 해이가 청와대에서 일어나는데 비서들은 SNS에 집중하고 있다, 겉멋만 들었다는 지적이 여당에서도 나온다. 또한 통신사고가 일어났는데도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자 문재인 대통령이 직접 경고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렇게 이번 정권의 실질적 2인자으로 활약하면서 민주당의 차기 대권 주자 중 한 명으로 꼽히고 있다. 차기 대권 주자로 부상하면서 야권에서 행적 하나하나를 비판하는 일이 부쩍 늘었다. 한편 임 실장에 대한 여론은 긍정평가 48.9% VS 부정평가 38.7%로 드러났다. 긍정평가가 부정평가보다 높긴 하지만, 자기 정치 논란이 일면서 과거에 비해 지지율이 약 10%p 하락했다. 또한 매우 잘 한다, 매우 못한다 등으로 여론이 극과 극으로 갈리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기사

2019년 1월 청와대 인사 개편안을 발표하고 퇴임했다. 후임 비서실장은 노영민 주중대사.

2.2.1. 남북정상회담 준비위원회 위원장

2018 제1차 남북정상회담이 확정된 뒤인 2018년 3월 9일에는, 문재인 대통령이 4월 27일로 예정된 남북정상회담을 준비할 준비위원회를 꾸리라는 지시를 내렸고 임종석 비서실장이 위원장직을 맡게 되었다. 그리하여 남북정상회담에 신속하게 대처할 수 있게끔 준비위원회가 구성된다고 발표되었고, 3월 16일 첫 전체회의를 개최했다.

남북정상회담 준비위는 중요 사항을 결정할 전체회의를 매주 또는 격주에 한 차례 열기로 했다. 준비위 전체회의와 별개로, 실무 논의는 위원장과 총괄간사, 3명의 분과장이 참석하는 분과장 회의에서 논의하며, 이 회의는 주 3~4회 열기로 했다.

2018년 4월 27일, 서훈 국정원장과 함께 오전 남북정상회담장에 자리했다. 서 원장이 김영철 통일전선부장의 카운터 파트였다면, 임 실장은 이번 정상회담에서 김정은 위원장을 가장 곁에서 보좌한 김여정 제1부부장의 카운터 파트로 나선 것으로 보인다.

임 실장은 1달 동안 준비위원장을 맡으면서 회담의 밑그림을 그렸다고 평가받고 있다. 그동안 북측과 꾸준히 사전 의제 조율 작업을 벌여 한반도 비핵화를 뺀 나머지 의제들에 대해선 회담 전에 상당부분을 남북이 합의할 수 있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월스트리트 저널(WSJ)은 이러한 임 실장의 역할에 주목해 1989년 전대협 3기 의장을 맡아 임수경 전 의원의 방북을 주도하는 등 학생운동 시절부터 그가 거쳐온 인생역정을 소개하기도 했다. 또한, 최룡해와 함께 북한의 사실상 2인자로 평가 받고 있는 김여정 제1부부장과 호흡을 맞춘 것이 임 실장이 현재 문재인 정부에서 가지고 있는 위치를 보여준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2018년 9월, 임종석은 국회의장단과 외통위원장, 여야 5당 대표 등 총 9명을 제3차 정상회담에 초청했다. 그러나 자유한국당바른미래당은 "애초 불참의사를 밝혔는데도 불구하고, 회담 며칠 전 언론을 통해 일방적 재초청을 공표한건 정략적 행위"라고 주장하며 불참 의사를 밝혔다. 문희상 국회의장과 이주영, 주승용 국회부의장은 정기국회와 국제회의 등의 일정으로 불참한다고 했다.#

2.3. 2019년 이후

21대 총선에서 종로 출마설이 1월 비서실장 퇴임 이후 수면 위로 계속 대두되면서, 점점 기정사실화가 되기도 했는데,# 6월에는 종로구 평창동에 전세를 얻었다. 다만 현역 지역구 의원인 정세균 전 의장과의 교통정리가 관건이었다.#

그러나 2019년 11월 17일 21대 총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총선 불출마 및 정계 은퇴를 암시하며, 민간 부문에서 통일 운동을 해나갈 것이라고 발표하였다.[20]# 게다가 정세균 전 국회의장도 지역구를 떠나게 되었는데, 개각을 하면서 국무총리로 입각하고 동시에 이낙연 전 국무총리가 해당 지역구를 이어받게 되었다.

21대 총선 기간에는 고민정, 이수진 등 각 지역구 민주당 후보 지원 유세에 참여했다.

2020년 6월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폭파 사건으로 김연철 통일부장관이 사의를 표한 이후, 차기 통일부장관으로 유력하다는 보도가 있었다. 우상호 의원과 이인영 전 원내대표도 차기 통일부장관으로 유력하다는 보도가 있었는데, 우 의원은 임종석이 적임자라고 평가했다.## #

2020년 7월 1일 기준, 서훈을 뒤이은 차기 국정원장으로 거론되었지만, 이틀 뒤 박지원 전 의원이 내정자로 밝혀지고 본인은 외교안보특보로 임명되었다. 북한은 7월 14일 대남선전매체 '우리민족끼리'를 통해 이번 외교안보라인 교체와 관련, "이인영, 임종석 두 사람에게 거는 기대도 많다"고 반응했다. #

2022년 2월에 이낙연 전 민주당 대표의 의원직 사퇴로 공석이 된 종로구 보궐선거에 출마할 수도 있다는 관측이 나오고 있었으나, 민주당이 종로에 공천을 하지 않기로 결정하면서 없던 일로 되었다. 이에 내리 3선을 한 김영종 전 종로구청장은 이에 반발하여 무소속으로 출마했지만 결국 본인도 낙선하고 국민의힘 후보로 나온 최재형감사원장만 더 돋보이는 결과로 이어지고 말았다.

2022년 3월에는 서울특별시장 출마설이 잠시 있었으나 본인이 후보등록을 하지 않으면서 사그라들었다. 그리고 4월에 문재인 정부 전반에 대한 회고 인터뷰를 SBS와 가졌다. 부동산 정책, 외교안보, 조국 사태청와대에 있으면서 겪었던 일의 뒷이야기를 술회하였다. #

2022년 7월 5일, 민주당 전당대회 출마를 준비 중인 이재명을 향해 "대선지방선거에서 패배해 당을 위태롭게 만들고 반성은 커녕 되레 당을 장악하려는 부끄러운 짓을 한다", "염치 없고 기본과 상식을 벗어난 행동에 창피하고 화가 난다"고 주장했다. #
2022년 말부터는 SNS에서 윤석열 정부의 정치보복을 규탄하는 메시지를 내고 있다.

2.4. 22대 총선 국면

22대 총선에서는 전 지역구인 성동구 출마설이 돌고있다. 아무래도 19대 총선까지 임종석의 지역구이기도 했고 당시에도 출마직전 재판으로 인해 갑작스럽게 출마를 포기하고 친구였던 홍익표가 대신 지역구를 이어받았었는데 홍익표가 서초 을로 지역구를 옮기면서 공석이 되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외에 종로구 선거구에도 전략공천 가능성이 점쳐진다. 임종석의 국회시절을 기억하는 다선의원들에게는 좋은 이미지로 기억되고 있으나 지난 총선때까지만해도 원내에 친이재명 세력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다선의원들의 바램과는 다르게 공천이 힘들 가능성도 있다.

2024년 기준 성동구 국회의원 출마설이 돌던 성동 지역위원장 권한대행을 맡고 있는 성동구청장 정원오가 총선 불출마 선언을 하였고, 임종석 전 비서실장의 성동구 출마선언으로 인하여 사실상 확정되었다. 정원오 성동구청장은 차기 서울특별시장 출마를 노리는 것으로 보이며, 임종석 전 비서실장의 출마선언으로 지역구 복귀가 확정되면서 일종의 선거구 출마자들의 교통정리가 마무리 된 셈이다. 현재 성동구에 임종석 전 비서실장의 총선 준비 현수막이 달리면서 사실상 선거운동을 시작하였다. 하지만 친명계로부터 윤석열 정부 탄생의 원흉으로 지목되어 불출마를 종용 받아왔다. 임혁백 민주당 공천관리위원장의 "윤석열 정부 탄생에 기여한 사람들은 책임있는 결정을 해야 한다"는 발언은 이 기류에 더욱 힘을 실었다. #

2024년 2월 8일 오전 9시경, 지도부가 험지출마가 아닌 한 임종석에게 공천을 주기 어렵다는 의사를 표했다는 동아일보 단독 기사가 나왔다.[21]#

2월 22일 오후에는 TV조선에서 컷오프가 사실상 확정되었다는 단독 보도를 내 놓았다. # 임종석 본인은 크게 반발하고 있다.

2월 27일, 결국 임종석이 중구·성동구 갑에서 컷오프되고, 전현희 전 국민권익위원장이 중구·성동구 갑에 전략공천됐다.

공천 탈락 이후 탈당을 선택한 다른 의원들이 있었기에 거취가 주목되었는데, 2월 28일 기자회견을 열고 민주당 지도부에 의결사항 재고를 요청했다. # 우선은 탈당하지 않는 듯 하나 재고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무소속 출마 가능성도 열어둔 듯.

이와중에 임종석이 이낙연 새로운미래 공동대표와 전격 회동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민주당 탈당 가능성이 점쳐지기도 했으나 3월 4일 당의 컷오프 결정을 수용하고 민주당에 잔류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국민일보 기사 #데일리안 기사 #매일경제 기사

이후 중 성동갑 유세현장에서 이재명 대표와 포옹하는 자세를 취하며 화해 분위기를 조성했다. #머니투데이 기사 임 전 실장은 유세 이후 기자들과 만나 '이 대표와 어떤 대화를 나눴느냐'는 질문에 "여러 가지 했다. 좋은 얘기 많이 했다"며, 선대위에서 어떤 역할을 맡을지에 대해서도 "양산으로 내려가 며칠 머무르고 부산·경남 접전 지역에서 최선을 다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임 전 실장은 이날 경남 양산을 찾아 문재인 전 대통령을 예방하는 한편, 낙동강 벨트 유세에 집중하겠다는 계획이다. #파이낸셜뉴스 #뉴스1 기사

3. 약력

4. 논란 및 사건사고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임종석/논란 및 사건사고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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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5. 소속 정당

소속 기간 비고


[[새정치국민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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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9 - 2000 정계 입문


[[새천년민주당|
파일:새천년민주당 흰색 로고타입.svg
]]
2000 - 2003 합당[22]


[[무소속(정치)|
무소속
]]
2003 탈당[23]


[[열린우리당|
파일:열린우리당 로고타입.svg
]]
2003 - 2007 창당


[[무소속(정치)|
무소속
]]
2007 탈당[24]


[[대통합민주신당|
파일:대통합민주신당 흰색 로고타입.svg
]]
2007 - 2008 창당


[[통합민주당(2008년)|
파일:통합민주당(2008년) 흰색 로고타입.svg
]]
2008 합당[25]


[[민주당(2008년)|
파일:민주당(2008년) 흰색 로고타입.svg
]]
2008 - 2011 당명 변경


[[민주통합당|
파일:민주통합당 연두 로고타입.svg
]]
2011 - 2013 합당[26]


[[민주당(2013년)|
파일:민주당(2013년) 흰색 로고타입.svg
]]
2013 - 2014 당명 변경


[[새정치민주연합|
파일:새정치민주연합 흰색 로고타입.svg
]]
2014 합당[27]


[[무소속(정치)|
무소속
]]
2014 - 2015 탈당[28]


[[새정치민주연합|
파일:새정치민주연합 흰색 로고타입.svg
]]
2015 복당

파일:더불어민주당 흰색 로고타입.svg
2015 - 2017 당명 변경


[[무소속(정치)|
무소속
]]
2017 - 2019 탈당[29]

2019 - 현재 복당

6. 선거 이력

<rowcolor=#fff>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2000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성동

[[새천년민주당|
파일:새천년민주당 흰색 로고타입.svg
]]
68,481 (48.39%) 당선 (1위) 초선
2004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성동 을

[[열린우리당|
파일:열린우리당 로고타입.svg
]]
36,467 (49.61%) 재선
2008 제18대 국회의원 선거

[[통합민주당(2008년)|
파일:통합민주당(2008년) 흰색 로고타입.svg
]]
26,718 (46.67%) 낙선 (2위)
역대 선거 벽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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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대 총선 (서울 성동구) 17대 총선 (서울 성동구 을)
파일:림종석 18대.jpg
18대 총선 (서울 성동구 을) }}}

7. 여담

8.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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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관련 특별감찰반 비위 논란 (유재수 감찰 무마 · 울산시장 선거개입 의혹 조국 무혐의 처분)
재판 재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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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회 조국 규탄 집회 · 조국 수호 집회 (비판과 논란)
도서 조국백서 · 조국흑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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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대 누가 한국을 움직이는가 / 대통령에 영향력 있는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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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년대의 각 해마다 시사저널이 각 분야의 전문가 1000명에 칸타퍼블릭과 함께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대통령에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을 선정했으며, 최대 3명까지 중복응답이 가능하였다. 해당 틀에는 1위만 기재함.
2010 2011 2012 2013 2014
미조사
2015 2016 2017 2018 2019
미조사 김정숙 임종석 트럼프
같이 보기: 한국에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종합) / 여권 정치인 / 야권 정치인 / 법조인 / 경제인 / 언론인 / 문화예술인 / 연예인 / 스포츠 스타 / 종교인 / 국제 인물 / NGO 지도자 / 잠재력 있는 정치인 / 대통령에 영향력 있는 인물 / 언론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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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동구 갑 선거구의 제15대 국회의원이다.[2] 성동구 을 선거구의 제15대 국회의원이다.[3] 성동구 갑 선거구의 제17대 국회의원이다.[4] 성동구 을 선거구의 제17대 국회의원이다.[5] 성동구 선거구의 제16대 국회의원이다.[6] 수풀 '림(林)' 등은 본음이 '림'인데 두음 법칙으로 인해 '임'이 되는 반면, 임종석의 성씨인 맡길 '임(任)'은 본음이 이미 '임'이므로 두음 법칙의 적용 대상이 아니다. 북한에서도 '임종석'으로 부르는데(기사) 두음 법칙을 적용해서가 아니라(주지하다시피 북한은 두음 법칙을 적용하지 않는다.) 본음이 '임'이기 때문. 따라서 로마자 성씨 역시 'Lim'이 되기 어렵다. 여권에 '임(任)'을 LIM으로 표기한 일부 사례들(#1, #2, #3)이 발견되긴 하나, 정정을 희망한다는 내용이거나, 엄밀히 따지자면 적절하지 않은 표기라는 걸 알고는 있지만 그냥 살고 있다는 내용이다. 당사자가 의도한 표기는 아니라는 얘기다. 연합뉴스 영문 기사에도 임종석의 성씨 표기가 'Im'으로 되어 있는데, 해당 기사에서 문재인임(林)수경의 성씨는 표기법대로인 'Mun', 'Im'이 아니라 당사자의 표기인 'Moon', 'Lim'으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임종석의 'Im' 역시 표기법을 기계적으로 적용한 결과가 아니라 당사자의 표기를 따른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7] 태어난 곳만 장흥군이지, 성장은 경기도 안양시와 서울특별시 중랑구에서 성장했다.[8] #[9] 문충공파-참판공파 31세 종(鍾) 항렬. 참고로 그 무인시대에 나오는 고려 의종, 명종, 신종의 모후이자 인종의 왕후인 공예태후 임씨의 집안이다.[10] 現 안양서초등학교[11] 現 서울묵동초등학교[12] 2005년 신소재공학부로 통합[13] 해당 별명이 붙은 이유는 하위 문서 참조. 다만 엄밀히 따지자면 적절하지 않은 표현이다. 위 각주에 적혀 있듯 임종석의 성씨 '임(任)'은 두음 법칙으로 인해 '임'이 된 게 아니라 한자 본음이 '임'이기 때문이다. 두음 법칙을 적용하지 않는 북한 문화어에서 '림' 씨가 되려면 林이어야 한다. 그래서 북한에서도 '림종석'이 아닌 '임종석'이라고 부른다(위 각주의 기사 링크 참고). 그런데 북한에서도 헷갈리는지 '림종석'으로 부른 사례가 있는 듯하다. # 아마도 북한이 남한에 비해 한문 교육을 경시하기 때문에 한자를 잘 몰라서 그랬을 수 있다. 실제로 탈북자들이 내려와 국정원에 신원을 넘길 때도 자기 이름의 한자를 모른다고 답하는 사람이 태반이다. 반대로 '림수경'이라고 까이는 임수경은 실제로 林 씨이기 때문에 두음 법칙을 적용하지 않고 한자 본음대로 쓰면 '림수경'이 된다.[14] 직속 상사가 해외 순방 갈 때마다 함박웃음을 짓는 모습이 많이 포착돼서 생긴 별명. 심지어 프로필도 함박웃음이다![15] 오랜 정치경력으로 더불어민주당의 대표 정치인임에도 2선밖에 되지 않은 국회 선수를 조롱하는 별명이다.[16] 그의 모교인 한양대학교가 있는 지역이다. 임종석 외에도 지역구 출신이 아니지만 자신이 나온 대학교나 일했던 공장 소재지 지역구에서 당선된 의원이 있는데 연세대학교 총학생회장 출신인 우상호 더불어민주당 의원과 대우자동차 부평공장 노동자 출신인 홍영표 더불어민주당 의원이다. 우 의원의 지역구인 서대문구 갑 지역에 연세대학교가, 홍 의원의 지역구인 부평구 을 지역에 GM 한국사업장 부평공장이 있다.[17] 당 대표였던 한명숙은 친노 직계인사였고 임종석은 민평련계 인사였다.[18] 박원순은 한나라당-새누리당이 국가 3부의 실질적 인사권을 모두 장악한 다수파 여당이던 시절, 서울시장으로서 범야권 인사들을 두루 등용했다. 변호사 등 전문직이 아닌 재야 정치인들은 어찌 됐든 계속 정치-행정 경험을 쌓으면서 먹고 살아야 하므로, 서울시장이 임명할 수 있는 정무직을 임종석과 같은 인사들에게 맡긴 것이다. 계파를 형성할 수 있는 계기인 것도 사실이지만, 반드시 박원순의 사람이라기보다는 민주당계 주요 인물이므로 기용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19] 굳이 설명하자면, 전희경은 1975년생으로 당시 6월 민주항쟁 때 불과 12살이었던 반면 임종석은 6월 항쟁에서 운동권으로서 시위에 앞장선 대학생이었다.[20] 여담으로 같은 날 자유한국당의 3선 의원이었던 부산 금정김세연 또한 불출마를 선언하게 된다.[21] 주로 송파구 갑 지역이 거론되었다.[22] 새천년민주당에 흡수 합당[23] 열린우리당 창당을 위한 탈당[24] 당내 노선 차이로 인한 탈당[25] 민주당과 신설 합당[26] 시민통합당과 신설 합당[27] 새정치민주연합에 흡수 합당[28] 공직 취임으로 인한 탈당[29] 공직 취임으로 인한 탈당[30] 정작 김유식은 2년 후 대선에서 손학규 지지를 했다. 물론 손학규가 경선에서 떨어진 이후 누구를 지지했는지는 불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