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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47a0><colcolor=#fff> 대한민국 제23대 광복회장 이종찬 李鍾贊 | Lee Jong-chan | |||
출생 | 1936년 4월 29일 ([age(1936-04-29)]세) | ||
중화민국 상하이시 (現 중국 상하이시) | |||
본관 | 경주 이씨[10] | ||
자 | 계원(桂苑) | ||
호 | 삼인(森人) | ||
현직 | 광복회장 재단법인 우당이회영선생교육문화재단 이사장 김대중평화센터 고문 | ||
재임기간 | 제15대 중앙정보부 기획조정실장 (차관급) | ||
1980년 9월 1일 ~ 1980년 10월 31일 | |||
제8대 정무제1장관 | |||
1988년 5월 3일 ~ 1988년 12월 5일 | |||
제22대 국가안전기획부장 (장관급[11]) | |||
1998년 3월 4일 ~ 1999년 1월 21일 | |||
제22대 국가정보원장 (장관급) | |||
1999년 1월 22일 ~ 1999년 5월 25일 | |||
제23대 광복회 회장 | |||
2023년 6월 1일 ~ 현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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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자매 | 형 이종원 | ||
배우자 | 윤장순 | ||
자녀 | 아들 이철우 | ||
친인척 | 할아버지 이회영 큰할아버지 이석영 작은할아버지 이시영 사촌동생 이종걸 외할머니 전주 이씨[13] 외외종조부[14] 고종[15] 외외증조할아버지[16] 흥선대원군 외외고조할아버지[17] 남연군 | ||
학력 | 서울창신국민학교 (졸업) 경기중학교 (졸업) 경기고등학교 (졸업 / 52회) 육군사관학교 (졸업 / 16기)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 (행정학 / 석사) | ||
종교 | 개신교 (장로회) | ||
신체 | 168㎝, 75㎏, O형 | ||
소속 정당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
의원 선수 | 4 | ||
의원 대수 | 11, 12, 13, 14 | ||
약력 | 육군사관학교 교수 주영국 대한민국 대사관 참사관 (박정희 정부) 중앙정보부 총무국장 (전두환 정부) 국가안전기획부 기획조정실장 (전두환 정부) 국가보위입법회의 의원 민주정의당 창당발기인 민주정의당 조직분과위원장 민주정의당 중앙당 사무차장 제11대 국회의원 (서울 종로구·중구 / 민주정의당) 민주정의당 민족사관정립특별위원회 위원장 민주정의당 원내총무 제11대 국회 전반기 국회운영위원회 위원장 한국방송통신대학 운영위원장 1988 서울 올림픽 조직위원 광복회 고문 제12대 국회의원 (서울 종로구·중구 / 민주정의당) 민주정의당 사무총장 한중문화협회 회장 제13대 국회의원 (서울 종로구 / 민주정의당) 제8대 정무 제1장관 (노태우 정부) 민주자유당 당무위원 제14대 국회의원 (서울 종로구 / 민주자유당) 새정치국민회의 부총재 새정치국민회의 당무위원 제15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위원장 제22대 국가정보원장 (국민의 정부) 새천년민주당 상임고문 한국인터넷멀티문화협회 명예회장 우당장학회 이사장 우당장학회 명예이사장 우당기념관 관장 한국선진화포럼 이사 여천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 이사장 제23대 광복회 회장 | ||
군사 경력 | |||
임관 | 육군사관학교 (16기) | ||
복무 | 대한민국 육군 | ||
1960년 2월 ~ 1971년 | |||
최종 계급 | 소령 (중앙정보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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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前 군인. 정치인.대한민국 제5공화국 당시 민주정의당 원내총무를 지냈으며, 국민의 정부 시절에는 안기부장, 국정원장 등을 지냈다. 독립운동가 우당 이회영의 손자[18]로 유명하다. 전직 5선 국회의원이었던 이종걸 변호사의 사촌형이 된다.[19]
2. 생애
임정 요인들이 환국 전 상하이 공항에서 찍은 사진. 앞줄 가운데 태극기를 든 소년이 이종찬이다. 오른쪽에 눈물을 닦고 있는 중절모 쓴 노인이 이종찬의 작은할아버지인 성재 이시영. |
5.16 군사정변 이후 중앙정보부에서 근무했다. 1971년 소령으로 예편하여 민간인 신분으로 계속 중정에서 근무했다. 중앙정보부에 있을 때에는 정권을 보위하는 조직에 속해 있으면서도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끌려온 이들을 나름대로 존중하는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김지하와 가까운 사이여서 '오적 필화 사건'으로 정권의 어그로를 잔뜩 끌었던 김지하가 1972년에 '비어 필화 사건'을 일으켜 중정의 분위기가 심히 험악해지자 김지하에게 빨리 도망치라고 연락을 하였다.[22] 중정 수사관들로부터 조영래의 인품을 전해 들은 뒤, 1980년 서울의 봄으로 조영래에 대한 수배가 풀리자 “인재를 살려야 한다”며 법원행정처장을 직접 찾아가 조영래를 사법연수원에 다시 들어갈 수 있게 도와주었다.
1980년 5월 17일 밤에 전두환이 5.17 내란으로 김대중을 잡아갈 당시 중앙정보부 총무국장이었다.[23] 다만 이 자체가 신군부의 플랜이었고, 기사에서 보듯이 수사 결과와는 별도로 신군부의 극본은 이미 짜여있었다.[24] 그 후 기획조정실장을 끝으로 중앙정보부를 떠나 국보위 활동과 민주정의당 창당에 깊이 관여했다. 민주정의당 창당 당시에는 윤석순[25]과 같이 사무차장을 역임했다. #
이후 민주정의당, 민주자유당 소속으로 제11대, 제12대, 제13대, 제14대 국회의원에 출마해 당선되었다. 민주정의당 원내총무와 사무총장을 지냈는데, 민정당 국회의원들 가운데서는 드물게 이미지가 좋은 편에 속했다. 심지어는 진보진영에서도 좋은 평가를 받았다. 우당 이회영의 손자라는 점에서 플러스 점수를 받았던 것도 있지만, 성향 자체가 학구적이고 논리적인 데다, 정치적 뚝심과 사람됨, 업무능력 등에서도 인정을 받았다고 한다.
1987년 10월 26일 사료의수집및보존등에관한법률안[26]을 대표발의하였으며, 이 법안은 같은 달 30일에 수정가결되었다.
파일:external/dimg.donga.com/70118556.1.jpg | 파일:external/dimg.donga.com/69852776.1.jpg |
사조직 청죽회 멤버였다.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기사에 의하면 1993년 8월 23일자 기사로 기사가 검색이 된다.# 몇몇 정치계에 잔존해 있던 청죽회의 명단은 신동아를 통해 알려졌다. 당시 원칙적으로 김영삼 정부에서 철퇴로 인한 사조직 청산 작업으로 사라졌어야 했었으나, 무엇보다 덜 알려진 조직이었기에 청죽회 중 일부는 정치계에서 성공하게 된다. 훗날, 국정원장 임동원과 육사 청죽회 시절부터 3년 선후배로 가까운 사이였다.
1995년, 새한국당이 민주당에 흡수합당되면서 민주당 소속이 되었고, 같은 해에 정계에 복귀한 김대중 및 동교동계 정치인들과 더불어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여[27] 부총재 직을 맡았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지역구였던 종로구에 출마하였으나 신한국당 후보에 패하여 낙선하였는데, 이때 당선된 신한국당 후보가 바로 이명박이었다.[28]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 때에는 국민회의 대선기획본부장을 맡아 대선 전략을 총괄했다.
국가정보원 언론문건 파문 당시 거짓말을 한 것이 드러나면서 국가정보원장 자리에서 경질되었다. 그 후 2000년 총선에서 종로구에 출마했다가 낙선하면서 사실상 정치적 생명이 끝나고 말았다.
정계 은퇴 이후 비교적 조용하고 깨끗하게 처신하였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종로구의 자택 1층에서 할아버지 이회영을 기리는 우당기념관을 운영하면서, 독립유공자 후손들의 장학사업과 대학생들의 사회활동을 후원하고 있다. 임시정부 기념관 건립을 추진하고 있기도 한데, 최근 벌어지는 이른바 '역사전쟁'을 의식한 듯 "김구, 이승만이 화해하고, 좌우가 구분되지 않는 기념관을 건립할 것"이라는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
19대 대선 때는 문재인 후보의 선대위에 고문으로 위촉되어 합류하였다. #
2017년 12월 문재인 대통령이 충칭의 임시정부 청사를 방문하였을 때 다른 독립운동가 후손들과 함께 동행하였다. #
다만 문재인 정부가 말기에 다다르고 제20대 대통령 선거가 가까워지면서 다시 보수정당 쪽으로 행보를 선회했는데 국민의힘의 유력 대권주자면서 아들 이철우 교수와 어린 시절부터 죽마고우였던[29] 윤석열이 대선후보가 되자 윤 후보를 지지하는 시국선언에 참여했고 사실상 윤석열의 멘토 역할을 했다.[30]#
2023년 3월 "할아버지 이회영이 일제의 모진 고문에 의해 돌아가셨고 아버지 이규학도 고초를 당한 것을 알고 있기에 독립운동가의 후손으로서 일본에 본능적인 적대감 같은 것이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한국과 일본이 견원지간을 풀지 않으면 동북아의 지속적 불안 요소가 된다"며 한일관계 개선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이어 "1998년 김대중-오부치 선언을 후임자들이 발전시켰어야 했는데 다 헝클어놓았다"고 말했다. 또한 과거사에 대한 일본의 사과에 대해서는 "우리는 계속 사과를 하라고 한다. 그러니 일본에선 '불가역적인 사과', '이번이 마지막 사과' 이런 얘기가 나온다. 이런 사과는 안 받는 게 낫지 않나. 옆구리 찔러 자꾸 받으면 뭐하나. 가해자의 사과도 중요하지만 피해자의 용서도 중요하다고 본다. 이스라엘의 홀로코스트 박물관엔 '용서한다, 그러나 결코 잊지는 않는다(forgive but never forget)'라고 쓰여 있다. 가장 무서운 말이다. 그 말을 일본에 할 때가 됐다고 생각한다."는 의견을 밝혔다. #
2023년 5월 25일 광복회 회장에 당선되었다. #
윤석열 대통령을 후보 시절부터 밀어온 멘토였지만 2023년 8월 육군사관학교 독립유공자 흉상 철거 논란이 일어나면서부터 윤석열 정부를 비판하는 방향으로 자신의 정치적 행보를 선회했다. 이 회장은 공식 성명을 통해 "국방부가 합당한 이유 없이 독립유공자 흉상 철거를 시도한 것은 일제가 민족정기를 들어내려는 시도에 다름 아니"라고 말하며 책임자를 엄중 문책할 것을 요구하였다.# 거기에 더해 민족적 양심을 져버린 귀하는 어느 나라 국방장관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스스로 판단할 능력이 없으면 국방장관자리에서 퇴진하는 것이 조국 대한민국을 위한 길이라고 강도 높게 비판하며 이종섭 국방부장관의 행보를 질타했다.#
2024년에는 독립기념관장에 뉴라이트 인사가 임명되었다는 비판이 이어지자 "용산 안에 일제 밀정 같은 존재의 그림자라도 있는 것 같다"며[31] 정부를 비판했다.# 사도광산 문제에 대해서는 역사를 똑바로 직시하지 않고 감추는 것은 옳지 않다는 태도를 내비쳤다. 이후 광복절 경축식에 불참하겠다는 의사를 밝혔고 # 결국 역대 광복회장 중 최초로 정부 주관 광복절 경축식에 불참한 뒤 효창공원에서 열린 별도 기념식에서 윤석열 정부를 향한 독설을 쏟아냈다.
3. 여담
- 아내인 윤장순과는 상하이에서 막 귀국했을 당시 서울 창신초등학교 3학년 때 만나서[33] 꾸준히 연애하다가 육사 졸업 후에 결혼하였다. 아들은 이철우 연세대학교 로스쿨 교수[34]이다.
- 육군사관학교 입학 당시 독립운동가인 김관오 장군, 민영구 제독의 추천서를 받았다. 당시 일본군 지원군 출신인 생도대장 이용[35]이 추천서를 보더니 "소위 독립운동가 집안이란 건가"란 비하성 질문을 하였고, 고민 끝에 민영구 제독에게 이 사실을 털어놓자 민영구 제독이 동명이인인 이종찬 장군[36]에게 항의했다고 한다. 이미 이 사실과 별개로 육군사관학교에 합격했다.
- 유사역사학 관련 비판을 받는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이덕일 소장의 후원자로 알려져있다. 그 외에도 이런저런 언행으로 국내외 주류사학자들 사이에서 평이 좋진 않은지 일부는 환빠 아니냐는 의심도 제기한다. 사실 이덕일은 한국의 옛 역사를 지나치게 왜곡해대서 문제인 게 많이 큰데, 근대 역사는 잘 설명하는 편이다.
- 2018년 11월에 그동안 모아온 의정활동 기록을 국회도서관에 기증했다. 총 기록은 6,500여점.이종찬 전 국회의원, 평생의 의정 기록물 6,500점 국회도서관에 기증[38]
- 군사정권에서 민주정권까지 보수-민주당계 정당을 죄다 오간 스펙트럼이 넓은 인물이나, 정작 이승만 정권과는 큰 접점은 없는데 의외라면 의외로 토론회를 열고# 이승만 숭모회 고문을 역임하고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이승만에 대해 '공팔과이라 해도 인색한 평가'라고 칭찬하기도 했다.# 상기되어있듯 임시정부 기념관 건립 문제에서도 건립된다면 이른바 '역사전쟁'을 의식한 듯 "김구, 이승만이 화해하고, 좌우가 구분되지 않는 기념관을 건립할 것"이라는 뜻을 밝힌거 보면 좋게 말하면 좌우 구분없이 다 포용하는 역사관[39], 나쁘게 보면 줏대없이 시류에 편승하는 역사관을 가졌다고 볼 수도 있다.[40] 다만 1919년 건국론을 지지하는 만큼[41] 1948년 건국론이 반영된 건국절 논란에는 비판적이고, 이승만을 '건국의 아버지'로써 다룰 이승만 기념관을 '괴물 기념관'이라고 맹비난하기도 했다.#
- 김형석 독립기념관장 임명 논란 당시 윤석열 정부에 대해 강하게 비판하였다. # #
4. 비판 및 논란
4.1. 군사정권 부역 관련
중앙정보부 공채 1기 출신으로 중정 차장보까지 오른 인물이며, 5공 핵심 정치인으로 지내온 이력으로 인해 진보진영으로부터 근 30년간 군사독재정권에 부역하였다는 비판을 받아왔다.2019년 광복회장 출마 당시 항일 독립운동가 후손들과 선양단체들로부터 극렬한 반대를 받았다. 사단법인 운암김성숙선생기념사업회 등 14개 선양단체는 "전두환의 국가보위입법회의부터 광주 학살 이후 민정당 창당발기인으로 참여해 사무총장 등 요직을 거치며 창당 주역임을 자랑으로 사는 사람이 자신의 과거 행적에 대한 반성과 사죄 없이 광복회장 선거에 출마한다는 것은 대한민국 자주독립과 민주주의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 아닐 수 없다"고 비판했다. 또 "광복회장 후보로 등록한 이종찬은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1980년 쿠데타로 등장한 전두환 독재정권에 합류했다'고 한다"며 "이는 마치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이 늘어놓는 변명과 흡사하다"고 지적했다. # #
4.2. 중앙정보부 강제 퇴직 사건
이종찬은 1980년 5월말, 중앙정보부 강제해직 사건을 기획하고 시행하였다. 이종찬 본인의 증언에 따르면 10.26 사태 이후 “10·26사태는 비록 김재규 개인이 저지른 행위이지만 사실 원인을 따지면 중정이 정치에 개입하여 일어난 사건이며, 이 기회에 중정의 국내부서에 대한 대대적인 개편작업을 해야 한다”는 내용의 중정 개편 건의를 올렸다. # 이후 신군부 전두환은 이종찬에게 중정 개편안을 직접 작성하라고 지시하였다. 이에 따라 200여명의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해직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이 사건에 대해서 이종찬 본인도 여러차례 인정하고 해명하였다. # #
4.3. 안기부ㆍ국정원 불법 대량해직 사건
1999년 김대중 정부에서 초대 안기부장 및 국정원장으로 재직하던 시절 안기부ㆍ국정원 강제 해직 사건으로 논란이 되었다. 이 시절 수백명의 국정원 직원들이 해직되었다. 특히 특정 출신(영남 출신)이라는 이유로 유능한 직원들까지 대거 강제 퇴직시키고, 다른 특정 지역 출신만 채용하였다는 논란이 가중되었다.당시 부당하게 해고된 국정원 해직자들은 퇴직 사유별로 국사모와 국강투라는 모임을 결성해 시위 집회를 열고,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당시 피해자들은 피고인 국정원을 상대로 소송을 벌이면서도 소장이나 변론서를 제출할 때조차 국정원의 허가를 받아야 하는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국정원을 상대로 오랜 법정 투쟁 끝에 2003년 승소했다. 2003년 서울 행정법원 1심 재판에서 법원은 이들의 퇴직 과정에 불법성이 있었다며 복직과 배상을 하라는 판결이 나왔다. 다만 당시 재판부는 김대중 정부가 안기부ㆍ국정원에서 특정 지역 출신들만 해직했다는 점과 특정 지역 출신만 채용했다고 주장한 것에 대해서는 자료를 제출하지 않아 법원은 쌍방 주장의 진위를 확인할 수 없었다며 명확한 판결을 내리지 않았고 이에 해직자측은 아쉬움을 표했다.
2011년 언론 인터뷰에서 이종찬은 안기부ㆍ국정원 강제해직 사건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해명했다.
"안기부장, 국정원장으로서 국내정치와 관련 있었던 분야를 도려냈다. 기구가 축소되니 직원들이 많이 나갔다. 나는 두 번씩이나 직원들을 많이 내보낸 사람이 됐다. 물론 원성을 들었다. 그분들에게 밥을 못 먹게 한데 대해서 미안한 감은 있다. 그러나 내가 할 일은 했다고 생각한다."
2011년 6월 10일 연합뉴스 인터뷰
2011년 6월 10일 연합뉴스 인터뷰
출처 : # # # # # #
4.4. 건국 60주년 사업 기념위원회 고문 활동 논란
이종찬은 1948년 건국론은 친일 세력의 식민지배 합법화라는 주장을 펼쳤다.헌데 2008년에는 '건국 60주년 기념사업 위원회'에서 활동한 점이 드러났다. 이종찬은 2008년 이명박 정부 때 당시 건국 60주년 사업 기념위원회의 고문으로 참여했고 재미 교포들을 대상으로 한 건국 60주년 기념 특강도 했다. ###
4.5. 친일 성향 뉴라이트 교수 면접 최고점 부여 논란
이종찬 본인이 “친일 성향 뉴라이트”라고 비판했던 A교수에게 독립기념관장 후보자 최종 면접 당시에는 자신의 최고점을 줬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
5. 소속 정당
소속 | 기간 | 비고 |
| 1981 - 1990 | 창당 정계 입문 |
[[민주자유당|]] | 1990 - 1992 | 합당[42]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1992 | 탈당[43] |
| 1992 - 1995 | 창당 |
| 1995 | 합당[44]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1995 | 탈당[45] |
[[새정치국민회의|]] | 1995 - 1998 | 창당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1998 - 1999 | 탈당[46] |
[[새정치국민회의|]] | 1999 - 2000 | 복당 |
[[새천년민주당|]] | 2000 - 2005 | 합당[47]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2005 - 2006 | 탈당 |
[[열린우리당|]] | 2006 - 2007 | 입당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2007 - | 탈당 정계 은퇴 |
6. 선거 이력
||<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0047a0><tablebgcolor=#fff,#1c1d1f><rowbgcolor=#0047a0> 연도 ||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1981 | 제11대 국회의원 선거 | 서울 1[48] | | 116,279 (48.71%) | 당선 (1위) | 초선[49] |
1985 | 제12대 국회의원 선거 | 84,258 (32.23%) | 재선[50] | |||
1988 |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 서울 종로 | | 46,534 (37.95%) | 3선 | |
1992 |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 [[민주자유당|]] | 41,208 (35.47%) | 4선 | ||
1992 | 제14대 대통령 선거 | 대한민국 | | 후보 사퇴 | ||
1996 |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 서울 종로 | [[새정치국민회의|]] | 32,198 (33.55%) | 낙선 (2위) | [51] |
2000 |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 [[새천년민주당|]] | 32,368 (39.96%) |
역대 선거 벽보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
11대 총선 (서울 1)[52] | 12대 총선 (서울 1)[53] | |
13대 총선 (서울 종로구) | 14대 총선 (서울 종로구) | |
14대 대선 | 15대 총선 (서울 종로구) | |
16대 총선 (서울 종로구) | }}}}}}}}} |
역대 후보 이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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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둘러보기
국가보위입법회의 의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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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재희 | 박명근 | 손세일 | 신상초 | ||
오세응 | 유옥우 | 유한열 | 이종률 | ||
이태구 | 장승태 | 정래혁 | 정석모 | ||
조종호 | 진의종 | 채문식 | 한영수 | ||
학계 13명 | 권이혁 | 김대환 | 김만제 | 김상협 | |
나창주 | 박봉식 | 박승재 | 박일경 | ||
서명원 | 안세희 | 윤근식 | 정의숙 | ||
한기춘 | |||||
국보위 대표 10명 | 김영균 | 노재원 | 박종문 | 서동열 | |
심유선 | 이광노 | 이기백 | 이우재 | ||
정태수 | 조영길 | ||||
문화·사회계 9명 | 권정달 | 김준 | 박윤종 | 박인각 | |
송지영 | 이정식 | 이종찬 | 이호 | ||
정범석 | |||||
법조계 8명 | 김사용 | 김태청 | 윤길중 | 이범렬 | |
이병호 | 이진우 | 임영득 | 정희택 | ||
종교계 8명 | 강신명 | 김봉학 | 서경보 | 이병주 | |
이영복 | 이종흥 | 전달출 | 조향록 | ||
여성계 4명 | 김정례 | 김행자 | 안목단 | 이경숙 | |
경제계 3명 | 박태준 | 유기정 | 정수창 | ||
언론계 3명 | 방우영 | 이원경 | 이진희 | ||
향군 대표 2명 | 이맹기 | 이형근 | |||
노동계 1명 | 정한주 | ||||
재적 81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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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찬 김판술 | 봉두완 김재영 | 이세기 조덕현 | 권영우 심헌섭 | |
성북 | 도봉 | 서대문·은평 | 강서 | |
김정례 조순형 | 홍성우 김태수 | 손세일 윤길중 | 남재희 고병현 | |
구로 | 영등포 | 동작 | 관악 | |
최명헌 김병오 | 이찬혁 이원범 | 서청원 조종호 | 임철순 한광옥 | |
강남 | 강동 | |||
이태섭 고정훈 | 정남 정진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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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 제12대 국회의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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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찬 | 노승환 봉두완 | 이세기 박용만 | 송원영 권영우 | |
성북 | 도봉 | 서대문·은평 | 강서 | |
이철 김정례 | 조순형 홍성우 | 김재광 윤길중 | 김영배 남재희 | |
구로 | 영등포 | 동작 | 관악 | |
조연하 김기배 | 박한상 이찬혁 | 박실 허청일 | 김수한 | |
강남 | 강동 | |||
김형래 이중재 | 김동규 정남 | |||
서울 관악 임철순 의원직 사퇴 (1987.7.19.) 서울 종로·중 이민우 의원직 사퇴 (1987.11.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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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찬 | 정대철 | 서정화 | 강금식 | 조세형 | |
성동 병 | 중랑 갑 | 중랑 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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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 갑 | 성북 을 | 도봉 갑 | 도봉 을 | 노원 갑 | |
이철 | 조윤형 | 신오철 | 이철용 | 백남치 | |
노원 을 | 은평 갑 | 은평 을 | 서대문 갑 | 서대문 을 | |
김용채 | 김재광 | 오유방 | 강성모 | 임춘원 | |
마포 갑 | 마포 을 | 양천 갑 | 양천 을 | 강서 갑 | |
노승환 | 강신옥 | 양성우 | 김영배 | 공석 | |
강서 을 | 구로 갑 | 구로 을 | 영등포 갑 | 영등포 을 | |
남재희 | 김기배 | 유기수 | 장석화 | 나웅배 | |
동작 갑 | 동작 을 | 관악 갑 | 관악 을 | 서초 갑 | |
서청원 | 박실 | 한광옥 | 이해찬 | 박찬종 | |
서초 을 | 강남 갑 | 강남 을 | 송파 갑 | 송파 을 | |
김덕룡 | 황병태 | 이태섭 | 김우석 | 김종완 | |
강동 갑 | 강동 을 | ||||
김동규 | 김중위 | ||||
* 강서 갑 이원배 의원직 상실 (1992.2.28.) * 영등포 을 김명섭 의원직 상실 (1989.5.2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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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동 병 | 중랑 갑 | 중랑 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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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 갑 | 성북 을 | 도봉 갑 | 도봉 을 | 도봉 병 | |
이철 | 신계륜 | 유인태 | 김원길 | 조순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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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춘원 | 박명환 | 박주천 | 박범진 | 김영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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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계동 | 최두환 | 김기배 | 이경재 | 김병오 | |
영등포 갑 | 동작 을 | 관악 갑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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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악 을 | 서초 갑 | 서초 을 | 강남 갑 | 강남 을 | |
공석 | 공석 | 김덕룡 | 김동길 | 홍사덕 | |
송파 갑 | 송파 을 | 강동 갑 | 강동 을 | ||
조순환 | 김종완 | 공석 | 김중위 | ||
* 관악 을 이해찬 사퇴 (1995.6.30.) * 서초 갑 박찬종 사퇴 (1995.6.9.) * 강동 갑 이부영 의원직 상실 (1995.11.1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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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석모 | 이상익 | 최창규 | 김현욱 | 임방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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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식 | 정시채 | 조기상 | 박경석 | 박권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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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명국 | 정순덕 | 유상호 | 신상식 | 이재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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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철균 | 신하철 | 심명보 | 심완구 | 심정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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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남욱 | 조만후 | 조부영 | 조영장 | 지연태 | |
채문식 | 최각규 | 최기선 | 최무룡 | 최상진 | |
최운지 | 최재욱 | 최형우 | 한승수 | 함종한 | |
허재홍 | 홍세기 | 홍희표 | 황낙주 | 황대봉 | |
황명수 | 황병우 | 황병태 | 황윤기 | 황철수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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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용 | 임복진 | 박광태 | 이길재 | 조홍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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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순범 | 김명규 | 조순승 | 박상천 | 이영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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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수 | }}} }}}}}} |
[A] 종로구·중구의 제12대 국회의원[A] [B] 서울 제1선거구의 제11대 국회의원[B] [C] 종로구의 제13대 국회의원[D] 서울 중구의 제13대 국회의원[E] 종로구·중구의 제12대 국회의원[E] [9] 의원직 사퇴.[10] 상서공후(尙書公后)-백사공파(白沙公派) 중시조 37세 종(鍾)○ 항렬. 백사 이항복의 12대손.[11] 원래 중앙정보부장과 안전기획부장은 부총리급이었으나 국민의 정부에서 국가정보원으로 개편하기 직전에 장관급으로 격하하였고, 이종찬 부장도 그대로 국정원장에 유임되었다.[12] 흥선대원군의 외손녀다.[13] 흥선대원군의 차녀이다. 혈연상 고종의 남매이긴하나 고종이 효명세자에게 양자로 입적되었기 때문에 법적으로는 고종과 12촌이다.[14] 외할머니의 남자형제[15] 혈연으로는 이 가족관계가 맞지만 법적으로는 고종이 이종찬의 외할머니와 12촌이기 때문에 이종찬에게 고종은 외할머니의 12촌이 된다.[16] 외할머니의 아버지[17] 외할머니의 할아버지[18] 우당의 둘째 아들인 이규학의 4남.[19] 다만 두 사람의 부친은 어머니가 다르다. 본처인 달성 서씨가 1907년에 사망하면서 우당이 이듬해 한산 이씨 이은숙과 재혼했기 때문. 이종걸은 우당의 다섯 번째 아들인 이규동의 아들이다.[20] 동기생으로 신구, 고건, 이준용, 박용오, 조양래가 있다. 대우그룹 회장인 김우중과 경기고 52회 동기로서 매우 친했다고 한다. 둘 다 경기고 내에서 주먹패로 날렸다고 한다.[21] 원래는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국사학과에 가려고 하였으나, 집안 형편 때문에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고 한다.[22] 이외에 김지하 본인의 주장으로는 이종찬에게 쿠데타 제의를 한 적도 있다고 한다. 이종찬은 이 주장에 대해 사실이 아니라고 부정했다.[23] 이종찬의 부하로서 김대중을 연행한 이기동이 신동아 1999년 7월호에 기고한 "남산 지하실에서 만난 김대중·김홍일·한화갑"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에서[24] 애초에 당시 중앙정보부는 10.26 사건 이후 전두환의 보안사령부에 사실상 장악되면서 위세가 많이 꺾이며 신군부의 입김에 놀아나던 상태였다.[25] 아이러니하게도 일제강점기 조선인 최고위 경찰이었던 윤종화의 아들이다. 윤석순도 이종찬처럼 중앙정보부에서 고위직이었다.[26] 국사편찬위원회의 법률상 근거를 마련한 법률. 사료의 수집·편찬 및 한국사의 보급 등에 관한 법률의 전신[27] 김대중의 오랜 참모들은 신당 창당에 회의적이었으나 이종찬이 강력하게 주장한 덕분에 결국 신당을 창당하게 되었다고 한다.[28] 통합민주당(1995년) 후보가 함께 출마하면서 야권 표가 분산된 영향이 컸는데, 당시 통합민주당 후보는 노무현이었다. 그래서 이 선거는 대한민국 역사상 유일하게 미래의 대통령들이 동반 출마한 진귀한 선거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당시 노무현은 이종찬을 '민정당 출신이 신분세탁했다'고 비판했지만, 이종찬 본인은 이때의 일에 대해 악감정을 갖지 않고 1998년 재보궐선거(이명박이 선거법위반으로 재판을 받던 중 자진사퇴하여 실시) 때 노무현에게 지역구를 넘겨주었다. 대의를 위해서 과거의 악연을 넘어가 준 이종찬의 모습에 노무현 본인도 감사를 표했다.[29] 윤석열과 이철우는 서울대광초등학교와 서울대 법과대학 동기동창이다.[30] 반면 사촌동생인 이종걸은 이재명 전 경기지사의 대표적인 측근이며 사이가 가까우며 상대후보였던 이재명 후보를 지지선언 하였다.[31] 이 회장이 '밀정'을 언급한 것은 상당한 수위의 비판이라고 볼 수 있다. 멀리 가지 않아도 당장 그의 조부인 이회영이 밀정의 밀고에 의해 일제 당국에 붙잡혔고 모진 고문 끝에 순국했기 때문이다.[32] 누이의 자녀이므로 정확하게는 '생질(甥姪)'이라고 한다.[33] 그 당시 이종찬은 한국말도 잘 못하고 중국말을 섞어 쓰고 하여 '짱꼴라'라는 별명으로 불렸다고 한다.[34] 서울법대와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런던정경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다음, 성균관대 법대 교수를 거쳐 연세대 로스쿨 교수가 되었다. 전공은 법사회학이다. 김선수, 윤석열과 같은 서울법대 동기로 대학교 다닐 때 서로 알고 지냈다고 한다.[35] 6.25 전쟁 당시 연대장을 맡았는데 광복군 출신인 전임 연대장이 80%의 병력을 잃는 현리전투 버금가는 실책을 저질렀고, 남은 병력을 이끌고 후퇴하느라 고생하였다. 그런 일본군 출신이란 정체성이 더 컸을 것이다.[36] 허정 내각에서 국방부장관을 지냈다. 본 문서의 이종찬 광복회장과는 먼 친척으로, 친일 귀족 이하영의 손자다. 일본군 출신의 친일 군인이었으나 조부와 부친의 귀족 작위 습작을 거부하였고, 해방 후 다른 친일파들과 달리 친일 이력을 참회하고 부끄럽게 여겼으며 이승만 정부의 독재에 항의하기도 하는 등 참군인의 면모를 보였다.[37] 독립운동가 후손 이종찬 "태극기 오염은 제발 그만", 2018년 3월 1일, 노컷뉴스 김현정 기자.[38] 2018년 11월 9일, 의회신문 박성용 기자.[39] 때문에 이종찬은 이승만을 추켜올린답시고 김구를 폄하하려는 우익 세력에 대해서도 좋게 평가하지 않았다.[40] 애초에 이종찬 스스로 밝히듯 저 공팔과이 발언은 마오 사후 중국 지도자가 된 덩샤오핑이 마오의 생애를 ‘공칠과삼(功七過三)’이라 규정한 것에서 비롯되는데(사실은 마오쩌둥이 스탈린한테 친 드립이 원조긴 하다), 저 말이 주로 독재자들의 변명용으로 쓰인다는 걸 생각해보면..[41] 1919년 건국론을 부정하거나 왜곡하는 세력은 "극좌파 친북 이적집단이거나, 한국의 독립운동을 고의로 폄하하고 왜곡하는 소위 극우 세력"이라고 혹독하게 비난했을 정도.# 건국절을 밀어붙이는 뉴라이트를 아예 우파로 취급하지도 않겠다는 뜻인데, 절묘하게도 뉴라이트의 원류가 전향한 주사파다.[42]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과 신설 합당, 이른바 3당 합당.[43] 대선 경선 불복으로 인한 탈당.[44] 민주당에 흡수 합당.[45] 새정치국민회의 창당을 위한 탈당.[46] 안기부장 취임으로 인한 탈당.[47] 새천년민주당에 흡수 합당.[48] 종로구·중구[49] 민주한국당 김판술 후보와 동반 당선[50] 신한민주당 이민우 후보와 동반 당선[51] 이 선거의 당선자가 이명박, 3위 낙선자가 노무현이었다.[52] 종로구·중구.[53] 종로구·중구.
분류
- 대한민국의 남성 정치인
- 대한민국의 군인
- 1936년 출생
- 2000년 은퇴
- 국가정보원 특정직 7급 정기공채 출신
- 제11대 국회의원
- 제12대 국회의원
- 제13대 국회의원
- 제14대 국회의원
- 국가보위입법회의 의원
- 민주정의당 국회의원
- 민주자유당 국회의원
- 새한국당 국회의원
- 민주당(1991년) 국회의원
- 새정치국민회의 국회의원
- 새한국당 총재
- 원내대표
- 상하이시 출신 인물
- 경주 이씨 백사공파
- 서울창신초등학교 출신
- 경기중학교 출신
- 경기고등학교 출신
- 육군사관학교 출신
-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 출신
- 군인 출신 정치인
- 정무장관
- 국가안전기획부장
- 국가정보원장
- 독립유공자 후손
- 국민의 정부/인사
- 노태우 정부/인사
- 전두환 정부/인사
- 박정희 정부/인사
- 이회영 가문
- 대통령직인수위원장
- 대한민국 국가유공자
- 중앙정보부 기획조정실장
- 제14대 대통령 선거/후보 경선/후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