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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훈(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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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독립운동가 이강훈.jpg
청뢰(靑雷)
본관 전주 이씨[1]
출생 1903년 6월 13일
강원도 김화군 서면 청양리
사망 2003년 11월 12일 (향년 100세)
서울특별시 보훈병원
학력 북간도 연길도립사범학교
묘소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
서훈 건국훈장 독립장
1. 개요2. 일생3. 대중매체에서4. 참고/관련 자료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독립운동가.

2. 일생


1986년 3월 3일 KBS2 <11시에 만납시다> 인터뷰 영상.

1903년 강원도 김화군 서면 청양리[2]에서 태어나 13세 때 아버지를 여의었고, 철원에서 보통학교를 다녔으나 교사가 제복과 칼을 착용하고 기미가요를 부르는 게 싫어 학교를 그만뒀다. 16세 되던 1919년 3.1운동 당시 대열에 같이 서다가 주재소 헌병들에게 연행되어 매를 맞았고, 여름에는 신의주에서 처남 고준명을 잠깐이나마 만난 후 초가을에 철원을 찾아온 이완용에게 "매국노"라고 외쳤다가 유치장 신세를 지내기도 했다. 1920년 2월 북간도로 떠난 후 상하이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비서로 1년 동안 근무했다가, 북간도로 돌아와 연길도립사범학교에서 3년 동안 공부하기도 했다. 1924년 졸업 후 김좌진의 신민부에 가입하여 국내 독립운동자금 모금 활동을 했고, 1926년 김좌진의 지시에 따라 신창학교 교사로 재직해 후진 양성에 힘썼다. 1929년에는 한족총연합회에 가입하여 동북만에서 활약하였으며, 동년 12월 10일에는 헤이룽장성 하이린에서 북만민립중학기성회를 개최하고, 이지산·김야운·김유성·전명원·김종진 등과 그 집행위원이 되어 민립중학을 설립하여 교포 청소년들에게 조국광복을 위한 민족정신을 고취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파일:이강훈 의사.png
육삼정 의거 실패 후, 촬영한 사진

1931년 만주 사변을 계기로 만주에 대한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그는 1932년다롄을 거쳐 다시 상하이로 망명하였다. 1930년 김좌진이 피살당한 후 임시정부로 옮겨 유자명, 정화암, 백정기 등과 함께 기존의 재중국조선아나키스트연맹을 '남화한인청년연맹'으로 개편했다. 1933년 주중 일본공사 아리요시 아키라(1876~1937)를 암살하기 위해 원심창, 오면직 등 11명과 '흑색공포단'을 조직해서 행동에 나서려다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어 징역 15년을 선고받고 나가사키 형무소에서 복역하게 되었다. 이후 1940년에 징역 8년 11개월로 감형되어 1942년에 형기가 끝나는 듯했으나, 일제는 재범 우려를 빌미로 구마모토 지방재판소에서 예방구금(기한 없는 구속) 판결을 내려 도쿄 후추(府中) 형무소에서 광복 2달 후인 1945년 10월 10일까지 영어[3]의 몸이 되어야 했다.

출옥 5일 후 조선인연맹 고문으로 추대되었다. 재일한국거류민단 부단장을 지내면서 백범 김구의 부탁으로 일본에 같이 거주한 박열과 함께 이봉창, 윤봉길, 그리고 그리고 나가사키 형무소에서 순국한 동지 백정기 등 '3의사'의 유해 발굴/봉환과 동포들의 교육에 힘을 썼고, 1946년 1월 '신조선건설동맹(건동)' 결성 당시 부단장으로 선임되었으며 10월 '재일본대한민국거류민단'으로 재창설될 당시 부단장으로 재추대된 바 있다. 1960년 귀국 후 한국사회당 총무위원을 지내다가 1961년 5.16 쿠데타 후 사상범으로 몰려 2년 동안 옥고를 치렀다. 그러고서 일본으로 떠났다가 1967년 재귀국 후 독립운동사편찬위원, 1977년 독립운동유공자 공적심의위원을 지내는가 하면, 제3대 매헌윤봉길기념사업회 이사장(1983~1997)을 지냈고, 1977년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고 독립운동과 관련된 저술활동에 힘썼다.

1988년부터 4년간 제10~11대 광복회장을 역임하며 고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숨어있는 독립 유공자들을 찾아내는 데 온 힘을 헌신했다. 2000년 5월직장암 판정을 받고 서울 보훈병원에서 투병하는 와중에도 독립운동가의 후손이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독립운동의 역사적 평가가 외면당하는 상황에서 자신이 아무 일도 할 수 없다는 데 대해 깊은 괴로움을 표했다.

2003년 11월 11일 병세가 악화되어 다음날인 12일 아침 8시 50분경에 숙환으로 숨을 거두었다. 향년 100세. 사후 장례는 사회장으로 엄수되어 동월 16일 서울국립현충원 현충관에서 영결식을 거행한 후, 시신은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되었다.

3. 대중매체에서

4. 참고/관련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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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효령대군 19세손, 시조 42세손 강(康)◯ 항렬.[2] 현재는 강원특별자치도 철원군 김화읍 청양리[3] 囹圄. 감옥이라는 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