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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15년 1월 7일 |
전라남도 담양군 | |
사망 | 2008년 2월 24일 (향년 92세) |
서울특별시 | |
묘소 |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 |
본관 | 김해 김씨 |
가족 | 배우자 오덕혜 |
이명 | 황민(黃民)·호영(胡英) |
상훈 | 대통령표창 수여 건국훈장 독립장 수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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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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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1915년 1월 7일 전라남도 담양군(潭陽郡) 담양읍(潭陽邑) 객사리(客舍里)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김해(金海)이며, 이명으로 황민(黃民)[1], 호영(胡英), 김해(金海) 등을 사용하였다. 여러 이명을 사용한 것은 일제기관에 발각되지 않도록 신분을 속이기 위해서였다. 김승곤은 서울 출신, 황민은 평양 출신, 호영은 충청도 출신 등으로 위장하여 일제 당국의 수사에 혼선을 주려 하였다. 중국에서 군관학교나 임시정부에서 활동할 때는 ‘황민’이라는 이름을 많이 사용했던 것 같다. 『뤄양군관학교(洛陽軍官學校) 동기생 명부』 등의 자료에는 ‘전북 김제 출신’, ‘경남 밀양 출신’ 등으로 기재되어 있다.3. 독립운동
1933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난징(南京)에서 김원봉(金元鳳)이 이끄는 조선의열단(朝鮮義烈團)에서 운영하는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朝鮮革命軍事政治幹部學校)에 입학하였다. 같은 해 5월 6일 국내에 파견된 조선의열단의 모집연락원 정의은(鄭義恩)[2]의 권유로 유학을 핑계로 고향집을 떠난 것이다.정의은은 3·1운동 이후 중국으로 망명한 숙부 김종(金鍾)의 소개로 만난 적이 있었다. 정의은이 국내에서 모집한 다른 5명과 함께 담양을 출발하여 광주·목포·부산, 그리고 일본의 나가사키(長崎)와 중국 상하이(上海)를 거쳐 같은 해 9월 13일 난징에 도착하였다. 도착후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에서 2기생으로 입학하여 6개월간 훈련받았다. 이듬해인 1934년 봄 훈련을 마칠 즈음, 동기생 14명과 함께 허난성(河南省) 뤄양(洛陽)에 있는 중국육군군관학교 뤄양분교 내 한인특별반으로 옮겨 1년여 정도 교육 받은 후 1935년 졸업하였다.[3]
1935년 4월 한인특별반 교육을 마치고 다시 난징으로 갔다. 같은 해 7월 5일 김원봉을 중심으로 중국 관내 지역 독립운동 전선의 통일전선 성격을 띠고 창당된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에 가입하여 검사국(檢査局) 소속으로 활동하였다. 이후 민족혁명당 특무부 간부가 되어 석문룡(石文龍)·최성장(崔成章)·하동진(河東振) 등과 함께 난징·상하이 등지에서 일본의 밀정(密偵)을 조사하는 등 군사 공작·정보 수집 활동에 종사하였다. 특무부는 부장 이춘암(李春岩)을 중심으로 중국 화베이지역(華北地域)을 비롯하여 상하이·광둥(廣東)·난창(南昌)·만주·조선 등 각지에 당원을 배치하여 정보를 수집하는 한편, 반동분자 및 일만요인(日滿要人)을 암살하고 기타 파괴공작을 수행하던 조직이다.
4. 조선의용대 시절
중일전쟁 발발 직후인 1938년 10월 후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 창건에 참여한 뒤 제 1구대 대원으로 후난성(湖南省) 창사(長沙)의 중국 제 9전구지역을 무대로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1939년 말의 ‘제 2차 창사대회전(長沙大會戰)’에도 참전하였다.[4] 이후 구룡산(九龍山)·오동산(梧桐山) 등지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한 유격전에 참전하였다.1940년 말부터 1941년 봄에 걸쳐 조선의용대원 다수가 중국 공산당의 항일 근거지인 화베이의 타이항산(太行山) 지역으로 이동하던 중 뤄양에 이르렀을 때, ‘하루 속히 태항산으로 들어가자’라는 의견으로 선견대의 일원으로 선발되었다. 그러나 “공산군에 합류하기를 꺼려 결사적으로 탈영해 서안의 광복군”에 합류하였다고 한다.
『대한민국임시정부공보』 1941년 10월 17일자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전라도 선거구의 감독관으로 활동한 것으로 되어 있고, 다른 자료에는 1942년 5월 현재 조선의용대 ‘직원’으로 되어 있다.
5. 한국광복군 편입
1943년 3월 30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회 비서로 선임되었으며, 4월 20일부터 국무위원회에서 선전부 선편과(宣編科)에서 과원으로 활동했다가 같은 해 7월 6일 모두 해임되었다.1943년 11월 16일 왕명철(王明哲)이 보고한 문건 「정정자(政情字) 제137호」에 따르면, 임시정부 비서 ‘황민’은 “김약산의 첩자와 같은 인물이라서, 이전부터 주시해왔다”라고 하면서 11월 7일 임시정부청사 수위가 분실한 권총도 황민을 통해 왕통(王通)에게 전달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사건은 비서직에서 해임된 이후에 일어난 일이지만, 이전부터 양 세력의 갈등이 지속되어 왔음을 감안하면 그 와중에 해임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후 같은 해 12월 20일 광복군에 편입되어 조선의용대 출신 대원들로 편제된 제1지대 부관실(副官室) 주임 겸 본부 구대장(區隊長) 등으로 활동하였다.
1945년 3월 28일 광복군이 영국군으로부터 인도·미얀마 군사작전을 위한 공작대원 증파 요청을 받자, 이병훈(李秉勳)·조지영(趙志英)·김재호(金在浩)·진가명(陳嘉明)·왕영재(王英哉)·진춘호(陳春浩)·여정순(呂正淳)·호건(胡建)·김빈(金斌) 등 8명과 인도·미얀마 파견공작대 요원으로 선발되었다. 중국 정부 군사위원회에 여권 발급을 신청해놓고 대기하던 중, 왕영재 등 5명이 먼저 파견되었다.
이후 조지영·이병훈·진가명과 파견 명령을 기다리던 중 연합군의 미얀마 작전 종결로 무산되었다. 같은 해 6월부터 광복군 총사령부 정훈처 선전과에서 근무하면서 주로 석판(石版)으로 신문을 만드는 일에 종사하였다.
6. 광복 이후
1945년 8·15 광복 당시 광복군 제1지대(지대장: 채원개) 부관주임 겸 본부 구대장(區隊長)이었는데 이후 광복군의 후속 업무를 처리하느라 10개월 정도 충칭(重慶)에 머물렀다. 1946년 5월 30일 광복군이 정식으로 해산된 후, 7월 5일 미군(美軍) 수송선(輸送船)을 타고 귀국하였다. 이후 잠시 신문사에 근무하다가 중국인 학교에서 교편을 잡기도 했다.1977년 이래 4년간 광복회 총무부장으로 일하였다. 이후 1992년부터 1996년까지 제12대 광복회 회장을 역임하였으며 광복회장 시절 1993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선열 유해 봉환 등 해외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의 유해 봉환을 주도하였다. 1993년부터 3년간 독립기념관 이사장을 역임하였다. 2008년 2월 24일 서울 성동구 금호동 자택에서 사망하여 2월 26일 서울 국립 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7. 참고문헌
김승곤의 공적정보사상정세시찰보고집 257·378면
사상정세시찰보고집(기2) 25·431면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128면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2권 577·718면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 12권 723면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 13권 469·855면
임시정부의정원문서(국회도서관) 867·871·872면
자료한국독립운동(추헌수) 3권 229면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6권 126·308·373·486·609·610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