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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c0021><colcolor=#fff> 중국명 | 정뤼청(郑律成) |
영문명/병음 | Zheng Lücheng, Zhèng Lǜchéng |
본명 및 아명(兒名) | 정부은(鄭富恩) |
가명 | 유대진(劉大振) |
출생 | 1914년 8월 13일[2] |
전라남도 광주군 부동정 94번지 (現 광주광역시 동구 불로동 163번지[3][4]) | |
사망 | 1976년 12월 7일 (향년 62세) |
중국 베이징시 | |
국적 | [[북한| ]][[틀:국기| ]][[틀:국기| ]] (1948~1956) [[중국| ]][[틀:국기| ]][[틀:국기| ]] (1950~1976) |
학력 | 화순 능주공립보통학교 (입학 / 1922년) 숭일소학교 (졸업 / 1928년) 전주신흥학교 (중퇴)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
가족 | 배우자 딩쉐쑹(丁雪松)[5] 딸 정샤오티(郑小提)[6] |
소속 | 중국공산당 북조선인민위원회 조선로동당 선전선동부 팔로군 조선인민군 중국 인민지원군 중국 인민해방군 |
1. 개요2. 생애3. 비판 및 논란
3.1. 6.25 전쟁 당시 궁중 악보 약탈 논란3.2. 항일 운동 및 의열단 활동 진위여부 논란3.3. '중국 3대 음악가' 호칭 문제3.4. 대한민국 내 정율성 기념 사업 논란
4. 작품5. 소속 정당6. 기타3.4.1. 광주광역시 동구 정율성 탄생지 기념비3.4.2. 광주광역시 남구 정율성로 정율성거리전시관 논란3.4.3. 전라남도 화순군 능주초 정율성 기념물 조성 논란3.4.4. 광주광역시·화순군 '정율성 고향집·생가' 복원 논란3.4.5. 광주광역시 '정율성 음악축제' 사업 논란3.4.6. 광주, 화순 기념시설의 공통적인 문제점3.4.7. 광주광역시 정율성 역사공원 조성 논란
3.5. 2020년대 한국사회의 인지와 논란 제기[clearfix]
1. 개요
전라남도 광주 출신의 중국인 작곡가. 일제강점기 때 민족혁명당, 중국공산당 등에서 활동하다 해방 이후 북한에서 북조선인민위원회, 조선노동당, 조선인민군 등에서 활동했다. 6.25 전쟁 중에 중국으로 귀화하여 중국공산당과 중국인민해방군 등에서 작곡가로 활동했다. 중국 바이두백과는 그를 "근대 중국 작곡가"로 소개하고 있다. 바이두백과 郑律成2. 생애
2.1. 일제시대
1914년 일본령 조선 전라남도 광주에서 태어났으며, 1928년 개신교 계열 숭일소학교를 졸업하고 이듬해인 1929년, 전주신흥학교에 입학했으나 의열단 가입을 위해 1933년 중퇴했다고 주장한다. 이후 중국 난징시으로 건너가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에서 수학하며 피아노, 바이올린, 성악 등을 공부했다. 1936년 그는 첫 작품 '오월의 노래'(五月之歌)를 작곡했다.1937년 중일전쟁 발발 후 난징을 떠나 1937년 10월 중국공산당의 본거지인 옌안에 가서 본격적인 공산당원 활동을 시작했다. 1938년 무렵부터 당시 중국공산당의 거물 저우언라이 전 국무원 총리의 양녀 딩쉐쑹(丁雪松(정설송), 1918~2011)과 연애를 시작했다. 딩쉐쑹과의 밀애가 발각되며 당내 비판을 받기도 했으나 김무정이 정율성의 활약을 변호하여 위기를 벗어나게 되었다. 1939년 4월에는 오랜 심사 끝에 중국공산당 정식 가입이 승인되었다. 그 해 '팔로군 행진곡'(현 중국인민해방군진행곡)을 작곡했다.
1941년 중국인 딩쉐쑹과 결혼했다. 딩쉐쑹은 중국공산당에서 여전사로 이름을 날렸으며, 이후 중국 정부에서 외교관 및 정보요원, 언론인, 사업가 등을 겸하며 다방면으로 활약했다. 1979년 그녀는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사상 첫 여성 대사로 주네덜란드 중국대사에 부임했으며, 이어 1982년 주덴마크 중국대사를 역임했다.
작곡 활동과 함께 1941년 7월부터 화북조선청년연합회를 비롯해 이듬해(1942년) 12월부터 타이항산의 화북조선혁명청년학교 등에 소속되어 항일 운동을 전개했다고 주장했으나 2018년 보훈처는 항일 활동의 객관적 증거가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 바 있다.
그는 1944년 4월 다시 연안으로 돌아온 뒤, 해방을 맞이할 때까지 그곳에 있었다.
2.2. 북한 시절
1945년 8월 광복이 되자 연안 팔로군 본부는 한반도 공산화[7]를 위해 김무정의 지휘로 조선의용군 전체 인원에 대해 조선으로 들어갈 것을 명령하였다. 이에 정율성도 부인인 딩쉐쑹과 딸 등 가족과 함께 북한으로 향하게 되었다.1945년 12월, 소련 군정 하의 북한 평양에 딩쉐쑹과 딸 등 가족과 함께 도착해서 북조선인민위원회 소속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1945년 12월말 해주시로 가서 조선로동당 황해도 도당위원회 선전선동부장으로 취임하여 활동했다. 또 해주에서 음악전문학교를 창설하였다.
북한에 도착한지 석달 후인 1946년 2월, 딩쉐쑹과 함께 부부 동반으로 김일성과 대면했다.
보안간부훈련대대부 구락부장 겸 협주단장 복무 당시 인민군복 차림의 정률성 소좌. 왼쪽은 딩쉐쑹. |
또 그는 북한 사회주의 정권과 인민군을 찬양하는 곡들을 다수 작곡했는데, 《조선인민군 행진곡》, 《두만강 대합창》 등 30여 곡[10]을 작곡했다.
북조선국립영화촬영소에서 제작한 조선인민군 창설 기념 영상. 영상 말미에 정율성이 작곡한 조선인민군 행진곡이 삽입되어 있다. |
북조선인민위원회 위원장 김일성으로부터 수여받은 포상장[11] |
북조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의장 김두봉, 서기장 강량욱으로부터 수여받은 포창장 |
허정숙으로부터 수여받은 상장 |
이후 북한 최고의 국립음악예술대학으로서 설립된 평양 음악대학 설립에 참여하여 1949년 개교와 동시에 작곡부 부장에 취임했다.
2.3. 6.25 전쟁 시기
1950년 6월, 6.25 전쟁이 발발하자 북한군 군관 신분으로 참전하였으며, 서울 점령 직후 서울에 내려와 주둔했다. 그는 개전 초기 서울 점령 직후부터 9월까지 쭉 서울에 머물렀다. 그의 아내 딩쉐쑹도 함께 서울에서 머물렀는데, 8월경 돌연 딩쉐쑹이 딸과 함께 중국으로 돌아갔다.딩쉐쑹은 중국으로 귀국하기 직전에 저우언라이에게 "중국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다. 딩쉐쑹 본인의 증언에 따르면 거물급 중국인 아내를 둔 정율성이 북한에 계속 있다가 좋지 않은 상황에 직면할 수도 있을거라 생각했다고 한다. 당시 딩쉐쑹은 중화인민공화국 관영 기관지이자 정보기관인 신화사(신화통신) 평양분사 사장으로 실질적인 중국공산당의 주 북한 정보기관 대표역을 수행하고 있었다. 또 딩쉐쑹은 중국대사관 외교관을 겸하고 있었으며, 북조선화교연합총회 비서장도 겸하면서 북한 거주 화교 문제도 책임졌다. 이 때문에 북한인들도 그들을 곱지만은 않은 시선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딩쉐쑹은 정율성이 북한 정권의 완전한 주류로 편입되는 것은 어려운 일이라고 판단했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정율성의 중국 귀환 배경에 대해서는 다른 설도 있다. 조선의용군 출신으로 연변에서 활동한 조선족 작가 김학철이 1995년 펴낸 '최후의 분대장'에 따르면, 정율성이 북한 인민군 협주단 단장일 때 소프라노 한정금(韓貞今)과 바람이 났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를 알아챈 딩쉐쑹이 분노하여 저우언라이에게 편지를 보냈고, 얼마 후 정율성 부부가 중국으로 소환되었다는 것이다.
인천 상륙 작전으로 전황이 뒤바뀌던 1950년 9월, 저우언라이가 김일성에게 정율성을 중국으로 보내라는 내용의 서신을 보냈고, 결국 정율성은 어머니와 함께 즉시 중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중국에 돌아와서 중국공산당적을 회복하고 아울러 중화인민공화국 국적도 취득했다.[12][13]
1950년 12월, 중국 인민지원군 소속으로 다시 참전해 한반도 전선으로 돌아왔다. 송서평 중국 시난(西南)과기대학·예술학원 교수는 2009년 논문 '정율성의 음악창작 탐구'에 “조선전쟁(한국전쟁)은 정율성의 창작 격정을 불러일으켰다. 정율성은 중공군으로 참전하며 북한군과 중공군의 사기(士氣) 고취를 위해 ‘조선인민유격대전가’ ‘중국인민지원군행진곡’ ‘공화국 기치 휘날린다’ ‘우리는 탱크부대’ ‘전사의 맹세’ ‘지원군 10찬(讚)’ 등을 작곡했다”고 기록했다. #
1.4 후퇴 때 그는 중국 인민지원군(중공군) 장교로서 서울에 주둔했다. 그의 아내 딩쉐쑹(정설송)이 저우언라이의 양녀였기 때문에 당시 그는 중공군에서도 고위급 거물로 행세했다고 한다. ‘항일음악전사 정율성(대동문화)’ 등에 따르면, 그는 서울의 관공서 등 주요 시설, 고위 관료 사택 등을 마음대로 뒤지고 약탈하고 다니다 '조선궁정악보'들을 발견, 이를 약탈해 갔다.[14] 광주문화재단 자료 등에 따르면, 그의 부인이 전쟁 중 멋대로 가져간 궁중악보는 종묘제례악과 연례악 등 2부 18집에 달한다. 궁중악보는 한중수교가 이뤄진 후 1996년 10월, 대한민국 국립국악원에서 마오쩌둥의 시에 붙인 '매화의 노래' 등 정율성의 16곡 국내 초연이 열리기 직전 그의 아내 딩쉐쑹을 통해 한국 정부에 반환되었다. #
2.4. 중국 귀환
이후 UN군의 반격으로 중공군이 패퇴하던 시점인 1951년 4월 저우언라이에 의해 다시 중국으로 돌아갔다. 중국으로 돌아 온 정율성은 1952년 창단된 베이징인민예술극원(北京人民藝術劇園)에 배속되어 합창대 부대장이 되었다. 베이징인민예술극원은 중국공산당이 중국 대륙에서 정권을 장악한 후 공산주의 정권의 취향에 맞는 정권, 사상 찬양 등 공산주의 작품 상연을 위해 설립한 중국의 공연예술단이다. 그 외에도 중앙가무단, 중국음악가협회창작조, 중앙악단 등 중국의 음악단체들에서 활동하였다.기록에 따르면 그는 중국 인민해방군을 흠모하여 병영을 수시로 방문하고 인민해방군을 위한 많은 곡을 작곡했다고 한다.
1956년 북한에서 8월 종파사건으로 연안파가 숙청되었다. 옌안 시절부터 동지였던 북한 내 연안파 인사들 대다수가 숙청당하자 정율성과 북한과의 왕래도 사실상 끊어졌다.
1956년 중앙악단(현 중국 국립 교향악단, 中國國家交響樂團) 창작실으로 자리를 옮겼다. 또한 이 시절부터 그는 윈난성 등 중국 전국의 오지들을 찾아다니며 중국 민요 수집에 전력하였다. 그는 오지를 돌아다니다 중국 국경까지 가서 국경수비대를 방문하기도 했다. 또한 중국 인민 아이들을 위하여 '평화의 비둘기' 등의 선전 동요를 창작하였다.
대약진운동이 실패할 무렵 정율성은 대약진운동 실패의 책임을 물어 마오쩌둥을 비판하던 펑더화이[15] 등에 동조했다. 마오쩌둥을 가장 먼저 비판했던 펑더화이는 몰락했지만, 대약진운동의 실패는 분명했고 상황은 갈수록 참담해졌다. 결국 마오쩌둥이 실각하고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이 집권했다.
그러나 1966년부터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었고, 이 기간에 홍위병들의 수많은 협박과 함께 친구들에게서 받은 원고가 모두 수색당해 많은 악보 등이 유실됐다. 그러나 다른 예술가에 비하면 정율성은 대접받은 편이었다. 문화대혁명 자체가 문화예술가들을 자본주의 적폐로 몰아가며 발생한 것이었기 때문에 당시 예술가, 문인, 지식인들이 엄청난 고초를 당했으며 그 중에서도 문화예술인들에 대한 탄압이 가장 가혹했다. 정율성은 다른 예술가들과는 달리 거의 모든 작품들에 철저하게 공산주의를 찬양·고무했었고, 때문에 그는 중국공산당이 가장 내세우던 혁명예술가였다. 때문에 그는 다른 예술가들과 달리 문화대혁명 10년 동안 육체적으로는 아무런 고통을 겪지 않았고 이는 이례적일 정도의 특별대우였다고 할 수 있다. 심지어 그는 정치적으로 펑더화이 라인을 탔음에도 펑더화이 라인의 정치지도자들과 달리 어디로 끌려가서 노역을 당하지도 않았다. 다만 정율성이 펑더화이 라인이었기 때문에 마오쩌둥을 숭상하던 홍위병들 중 일부는 이에 불만을 가졌고 이에 협박을 벌였던 것이다. 그는 문화대혁명 시절 좌절감을 잊기 위해 고기잡이 취미가 생겼다고 한다. 그런데 중국 권력의 핵심에 있던 인물들이 줄줄이 끌려가 강제노역[16]을 하고 있을 때 한가롭게 낚시를 하고 있었다는 것 자체가 그가 문화대혁명 시기 상대적으로 안락한 삶을 살았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방증해준다.
어쨌든 문화대혁명 기간 동안 마오쩌둥 관련 작품을 제외하고 정율성의 창작활동은 제약받았다. 당시 마오쩌둥 찬양을 제외하면 문화예술계의 대부분의 활동들이 사실상 중단된 상황이었다. 이 때문에 자의인지 타의인지 알 수 없으나 이후 작고할 때까지 정율성의 작품의 대다수는 마오쩌둥의 시에 곡을 붙이는 등 마오쩌둥을 찬양하는 작품이 대부분이었다. 문화대혁명기에 그는 마오쩌둥의 시사 20편에 곡을 붙였다. 이 작품은 “그 자체가 웅장하고 아름다우며 기백이 넘쳐흐르는 교향악으로 중국혁명사의 최고탑”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그가 일생동안 마오쩌둥의 시사에 곡을 붙인 편수는 34수에 달한다.
1976년 9월 9일 마오쩌둥이 죽고 문화대혁명이 끝나자 곧 복권되었다. 그는 이번에는 저우언라이 총리를 찬양하는 연가와 건국 50주년(정확히는 중국공산당 창당 50주년)을 기념하는 작품을 만드는데 착수했다. 그러나 그해 12월 7일 베이징 근교의 한 운하에서 낚시를 하던 도중 심장병으로 쓰러져 62세로 사망했다.[17]
'인민음악가 정율성의 묘'라고 쓰여있다. |
2.5. 사후
1988년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는 그가 생전에 작곡한 팔로군 행진곡을 '중국인민해방군군가'로 정식 지정하는 안을 의결하였고, 덩샤오핑이 재가함으로써 동년 7월 25일 중국인민해방국의 공식 군가로 확정되었다.1989년에 김정일의 지시로 조선 2·8영화예술촬영소[18]에서 정율성의 생애를 그린 장편영화 《음악가 정률성》 제작에 착수하였다. 1988년 '인민상'을 수상한 오혜영 작가가 시나리오 집필을 맡아 중국에 파견되어 자료를 수집하는 등 3년에 걸쳐 공들여 제작되었으며, 1992년에 개봉되었으며 북한에서 오랫동안 상영되었다.
1996년 10월 국립국악원, 국립합창단이 정율성 작품 발표회를 열었다. 당시 국립국악원은 "전체적으로 볼 때 씩씩하고 대륙적 기질이 느껴지는 행진곡풍의 작품이 많다"고 평가했다. # # 공연이 시작하기 전 정율성의 부인 딩쉐쑹이 남편이 소장하고 있던 궁중악보를 한국 문화체육부에 기증하는 기증식을 가졌다.# 당시 언론에는 정율성이 소장하고 있던 한국전통음악 악보를 대한민국 정부에 기증한다고 미화된 보도가 나왔다. 이날 공연에서 마오쩌둥이 지은 시로 작곡한 찬가 등이 공연되었다.
2002년 중국에서 정율성과 그의 아내 딩쉐쑹의 사랑 이야기를 담은 영화 '走向太陽(Walking towards the Sun, 태양을 향하여)'가 개봉했다.
2009년 9월 13일 중국공산당 중앙선전부, 중앙조직부, 중앙통일전선부(통전부) 등 11개 중국공산당 핵심 기관들이 선정하고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이 공식 발표한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60주년 기념' 선정 '신중국 창건 영웅 100인'에 선정되었다. #1, #2 선정 직후 9월 14일 후진타오 주석은 신중국 창건에 공로가 큰 영웅으로 선정된 100명과 중국인을 감동시킨 인물로 뽑힌 100명을 베이징 인민대회당으로 초청해 좌담회를 가졌다. 전라남도 화순군 보도자료에 따르면 중국공산당은 신중국 창건 영웅 후보로 300인을 우선 선정한 후 중국 사회 각계 인사들을 상대로 8월 10일까지 투표를 실시하였다고 한다.
2009년 중국에서 그를 기리는 《작곡가 정뤼청(作曲家郑律成)》이 발간되었으며, 왕전 중국 부주석이 서문을 썼다. 왕전 부주석은 서문에서 “그는 현대 시대의 뛰어나고 뛰어난 작곡가이며, 중국 음악계의 선두주자이다. 프롤레타리아 혁명 음악 대의의 선구자 중 한 명이다."라고 썼다.
2017년 12월 15일 중국을 공식 방문한 문재인 전 대통령이 베이징대학에서 정율성을 공식 언급했다. 문재인 대통령의 중국 방문을 앞두고 정부는 정율성의 유공자 선정을 검토, 추진하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문재인 전 대통령이 정율성에 대한 발언을 한지 약 2주 후인 2017년 12월 29일 정율성 유족이 정율성을 대한민국 국가유공자로 등록해 달라고 신청했다. 국가보훈처는 정율성의 독립유공자 등록을 추진하며 심의에 들어갔다. 하지만 국내에서 한국을 침략, 약탈한 중국인을 국가 유공자로 등록하는 것에 대한 비판이 생기고 보훈처 심사 결과 정율성이 중국에서 항일 운동을 했다는 주장이 객관적으로 입증이 되지 못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2018년 보훈처는 결국 "활동 내용의 독립운동 성격이 불분명하다"고 밝히며 정율성의 유공자 서훈을 기각했다. #
2019년, 민중미술가이자 좌파 성향 시사 만화가인 박건웅이 그린 정율성의 생애를 다룬 만화가 발간되었다. 제목은 《옌안송: 정율성 이야기》. 정율성의 딸인 정샤오티가 감사의 인사를 친필로 남겼다.
2020년, 정율성의 일생을 그린 한국 영화 경계인이 개봉했다. 또한 같은 해에 같은 감독으로 김원봉과 정율성을 다룬 다큐멘터리인 경계, 머나먼 나라가 개봉했다. 두 작품 모두 코로나19로 인해 극장 개봉 대신 OTT로 관람할 수 있게 제공됐다.
3. 비판 및 논란
3.1. 6.25 전쟁 당시 궁중 악보 약탈 논란
정율성은 6.25 전쟁 때 조선인민군 소속으로 남침에 참전하였다가 도중에 저우언라이와 김일성의 협의에 따라 중국 인민지원군으로 소속을 변경하여 다시 참전했다. 《항일음악전사 정율성》[19] 등에 따르면, 전쟁 당시 그는 점령지 서울에서 주요 관공서 및 기관, 요인들의 사택을 마음대로 수색하고 다니며 종묘제례악, 연례악 악보 등 궁중 악보를 발견하고 이를 약탈하여 중국으로 무단반출했다. #궁중 악보는 정율성이 아니라, 정율성의 아내 딩쉐쑹(정설송)이 가져갔다는 주장도 있다. 현재 해당 악보를 전달받아 소장하고 있는 국립국악원의 소개 자료에 따르면 딩쉐쑹은 중국 신화통신 서울 특파원으로 서울에 왔는데 당시 공산군 본부로 쓰이던 국립국악원 건물에서 궁중악보들을 가져갔다고 한다.[20] [21]
광주문화재단 자료 등에 따르면, 중국으로 무단반출된 궁정악보는 종묘제례악과 연례악 등 2부 18집에 달하며, 사후 그의 아내 딩쉐쑹이 1996년 한국 정부에 반환한 것이 확인된다. #
3.2. 항일 운동 및 의열단 활동 진위여부 논란
여러 매체에 정율성은 과거 의열단 활동을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었고, 인터넷의 의열단원 자료에도 정율성이 기입돼 있었다. 정율성이 중국으로 건너가 조선혁명간부학교에서 공부하던 중 의열단에 가입했고 이 때 의열단장이자 조선혁명간부학교장이던 김원봉이 음악으로 성공하라는 뜻으로 '율성(律成)'이라는 이름을 지어줬다는 내용이 여러 매체에 보도된 바 있다.그러나 정율성을 연구한 사학자 이이화에 따르면, 정율성은 부친의 한탄을 듣고 작곡가로의 뜻을 정하면서 율성으로 스스로 개명한 것이라고 한다. #
정율성의 부인 딩쉐쑹(丁雪松)이 1992년에 펴낸 《작곡가 정율성》이라는 책에 의하면 "정율성이 의열단 소속으로 난징(南京)의 고루(鼓樓) 전화국에 침투하여 전화를 도청하며 일본군의 정보를 수집하는 비밀공작 활동을 했다"고 하는데 이렇게 정율성 항일운동 공적의 대부분이 측근의 일방적인 증언 및 구체적 내용없이 비밀공작 수행 이런식의 기록으로 증거자료로 입증되지가 않았다.기사2017년 문재인 대통령의 중국 국빈방문 준비 시점부터 정부는 독립 유공자(애국지사) 서훈을 추진했고, 문재인 대통령이 방중 기간에 중국 북경대에서 직접 정율성을 언급하기도 했다. 이에 발맞추어 2017년 12월 29일 정율성 유족이 정율성을 대한민국 국가유공자로 등록을 신청하였다. 그러나 국가보훈처의 심사 결과 정율성이 중국에서 항일운동을 했다는 주장에 대해 객관적으로 자료를 찾을 수가 없었으며 해방 이후 북한에서 지역 선동부장을 맡고 조선인민군 행진곡을 작곡하는 등 부역행위가 명백히 드러난 정율성을 대한민국 유공자로 추서하는 것은 법에 어긋난다며 국가보훈처 내부에서도 난색을 표하였다. 결국 2018년 제3회 독립유공자 제1공적심사위원회 제3분과 위원 회의에서 보훈처는 "활동 내용의 독립운동 성격이 불분명하다"고 밝히며 정율성의 유공자 서훈을 부결시켰다. 기사1 기사2 당시 보훈처 관계자는 "심사 과정에서 독립운동 공적이 발굴되기는 커녕 해방 이후 북한 정권 관련 활동이 너무 명백히 드러났다"고 설명했다. 기사
결론적으로 대한민국 정부 공식 입장은 정율성의 항일 운동 여부는 증거자료로 입증이 안 되었으며 불분명하다는 것이다.
3.3. '중국 3대 음악가' 호칭 문제
광주광역시 남구 정율성거리전시관에 '중국 3대 음악가'로 홍보된 정율성 |
- 2022년 정율성 동요축제: 사회자가 정율성에 대해 "중국의 3대 음악가로 추앙받고 있다"고 설명한다. (7분 30초부터)
- 디지털광주문화대전
- 경향신문 (2014년)
- 남도일보 (2011년)
- 연합뉴스 (2010년)
- 전북일보 (2008년)
하지만 이러한 국내 정보들과는 달리, 이들이 중국에서 3대 음악가로 묶인다는 근거를 제공하는 공신력 있는 중국발 정보는 확인되지 않았다. 따라서 현재로서는 '중국 3대 음악가' 호칭은 정율성 홍보 차원으로 한국에서 임의로 붙인 명칭으로 보인다.[23]
3.4. 대한민국 내 정율성 기념 사업 논란
3.4.1. 광주광역시 동구 정율성 탄생지 기념비
광주광역시 동구에 위치한 '정율성 기념사업회' 사무실과 '정율성 선생 탄생지' 기념비. |
3.4.2. 광주광역시 남구 정율성로 정율성거리전시관 논란
정율성로 도로명표지. |
정율성로 입구에 있는 정율성 동상.[24][25] |
정율성거리전시관 초입 (2015년)[26] |
정율성거리전시관 초입 (2021년)[27] |
정율성거리전시관 초입 (야간) |
2023년 8월 27일 정율성거리 방명록에 적힌 정율성 기념사업 비판 문구 |
3.4.3. 전라남도 화순군 능주초 정율성 기념물 조성 논란
능주초등학교의 정율성 대형 벽화 및 정율성 흉상 |
능주초등학교에 설치된 '정율성 교실' |
3.4.4. 광주광역시·화순군 '정율성 고향집·생가' 복원 논란
화순군이 2019년 복원해 건설한 정율성 고향집. |
화순군 정율성 고향집에 전시된 한 사진첩의 안내판. 6.25 전쟁을 두고 '항미원조', '혁명의 정서'라 해설하고 있다. |
광주광역시 남구 양림동과 동구 동구 불로동에도 정율성 생가가 있다. 정율성 생가가 여러 곳인 이상한 상황인데, 이와 관련해 기념사업회와 지자체가 법정싸움까지 가는 등 수년간의 교통정리가 있었다. 동구 불로동은 정율성 부친과 형제, 조카 등 3대에 걸친 본적지다. 화순군 능주면은 3살 때인 1917년부터 능주보통학교 2학년이던 1923년까지 성장한 곳이다. 남구 양림동은 정율성의 친필 이력서에 출생지로 적혀 있다고 하는데, 2009년 기념사업회는 이 친필 이력서가 가짜라며 남구청장을 사문서위조 및 허위사실 명훼로 고발해버리기도 했다.중앙통신뉴스
결국 2015년 당시 광주광역시장, 남구청장, 동구청장, 화순군수는 '공동 합의문'을 작성해서 정확한 생가 소재지를 다투는 분쟁을 그만두고 기념사업 추진에 힘쓰기로 했다. 기사
2023년 8월 현재 광주광역시는 양림동에는 전시관을, 불로동에는 역사공원을 조성하고 있다. # # 양림동 전시관은 전시관 부지 한옥 매입 2억 2000만원, 전시관 조성 1억 6700만원이 소요될 예정이다. 주간조선은 광주광역시는 6.25 참전용사 수당이 지자체 중 가장 낮은 축에 속하는데 정율성에는 너무 과하게 돈을 쓴다고 지적했다. 기사
비슷한 사례로 괴산군에서 벽초 홍명희의 생가[31]를 복원할 때에도 지역 보훈단체들이 격렬히 반발하기도 했다.#
3.4.5. 광주광역시 '정율성 음악축제' 사업 논란
2023년까지도 광주광역시가 주최하고 광주문화재단이 주관하는 정율성 음악축제가 열린 바 있다. 정율성 음악축제는 '광주성악콩쿠르', '정율성 음악제', '정율성 동요 경연대회'로 구성된다. 정율성 음악축제 공식 홈페이지의 아카이브[32]1996년부터 이어온 광주성악콩쿠르는 본래 다른 콩쿠르들과 성격이 같았으나, 2015년부터 정율성 음악축제에 편입돼 행사의 성격이 바뀌었다. 본선에 진출한 참가자들은 1부에서 정율성 가곡 12곡 중 하나를 불러야 한다. # 2023년 당년에만 시비(세금) 2억 8천만원이 투여됐다. #
'정율성 음악제'는 2005년 '제1회 광주 정율성 국제 음악제'로 시작했다.당시 기사 현재 정율성 음악제는 광주시립교향악단 및 성악콩쿠르 우승자가 참여한다.
광주MBC가 주관하는 정율성 동요대회의 홍보 영상과 무대 사진. | |
2022년 정율성 동요 경연대회 행사 영상. |
제1회 정율성 동요제는 호남대 공자학원과 공동으로 개최했다. 제1회 정율성 동요제의 국내 우승팀은 중국 후난성 장사제일중학교[33]에서 중국 학생들과 합동으로 공연했다. 광주MBC - [뉴스데스크]정율성으로 하나됐다 광주MBC는 "올해는 중국 혁명음악의 대부인 정율성 선생이 광주에서 태어난 지 정확히 백주년이 되는 해"라면서, "광주MBC 창사 50주년을 맞아 호남대 공자학당과 공동 기획한 정율성 동요제가 중국 현지에서 성황리에 개막됐다"고 소개했다.
정율성이 중국공산당을 찬양하는 동요를 다수 작곡했고 가사에도 그런 내용이 많이 반영돼있는데, 이를 회피하거나 왜곡해서 번역한 노래를 아이들에게 부르게 한 것이 확인됐다.
정율성 동요대회에서 선정한 지정곡 중 〈평화의 비둘기〉(平和鸽)라는 노래의 "우리는 소년선봉대원(我们少先队员)"이라는 가사를 한국어로 번역한답시고 "우리 조선 대원들"이라고 번역해놨다. 원 가사의 소선대원(少先队员)의 '소선대'는 1949년 만들어진[34] 중국 소년선봉대(中国少年先锋队)를 부르는 약칭이다. 그런데 이를 조선대원이라는 정체불명의 단어를 써가며 의도적으로 회피하고 왜곡해 번역해 놓은 것이다. # 중국 소년선봉대란 중국공산당의 유소년 조직으로[35], 14세 이하 아동[36]이 가입 대상이다. 어린 시기부터 체계적으로 공산주의 교육을 하기 위해 도입됐다. 이처럼 1950년대에 소선대에 가입해 정율성이 작곡한 공산당 찬양 동요들을 배우고 부르던 세대가 이후 1960~70년대 문화대혁명 깽판으로 유명한 홍위병 세대다. 여하간 광주MBC는 이렇게 왜곡해 번역한 노래를 지정곡으로 넣어서 역사적 내용도 모르는 애꿎은 한국 초등학생들로 하여금 배워 부르게 한 것이다. 결국 2018년 정율성 동요경연대회에서 아이들이 실제로 부르고 말았다. #
정율성이 만든 어린이 가곡 〈우리는 행복해요〉(我们多么幸福)도 대회 지정곡 중 하나로 선정해 아이들에게 부르게 하기도 했다. 해당 곡도 "아침 바람이 오성홍기를 휘날리고"(晨风吹拂五星红旗)라는 원 가사를 "아침마다 우린 책가방 메고"라는 헛소리로 번역해 놓았다. 2018년 정율성 동요대회에서 한 초등학교는 노래 절반을 중국어로 불렀는데, 아이들이 그 가사도 중국 원어로 부르며, 자막도 "晨风吹拂五星红旗 아침마다 우린 책가방 메고" 라고 표기돼 눈가리고 아웅하는 꼴의 번역을 보여준다. #
2023년 8월, 보수성향의 MBC 제3노조는 광주MBC를 비판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광주MBC가 매년 광주광역시로부터 5천만 원의 보조금을 받아 동요경연대회를 개최해왔다며, "수백만 동족상잔의 비극을 부추긴 정율성을 찬양하는데 왜 피 같은 대한민국의 예산이 사용되어야 하며 광주MBC라는 공영방송이 동원되어야 하는가? 그의 노래를 왜 대한민국의 초등학생이 불러야 하는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구국용사들의 피가 무덤에서 거꾸로 솟아오를 일이다. 이러한 매국 행사는 당장 중단되어야 마땅하다."고 했다. MBC 제3노조 "정율성 동요제 기가 찬다!…전범 추앙하는 광주MBC"
3.4.6. 광주, 화순 기념시설의 공통적인 문제점
광주광역시 및 전라남도 화순군 등의 정율성 기념 시설에는 다음과 같은 두가지 공통점이 있다.기사정율성음악축제 홈페이지의 정율성 소개란을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는데 자세히 설명하자면 첫번째로 증거자료를 통해 명백하게 입증되지 않은 정율성의 항일운동을 부각시키고 항일운동가 및 독립운동가로 단정하여 포장하고 있다.
참고로 정율성이 항일운동을 했다는 주장의 근거는 상술했다시피 정율성의 부인 딩쉐쑹(丁雪松)이 1992년에 펴낸 《작곡가 정율성》이라는 책에 "정율성이 의열단 소속으로 난징(南京)의 고루(鼓樓) 전화국에 침투하여 전화를 도청하며 일본군의 정보를 수집하는 비밀공작 활동을 했다." 이런 식으로 정율성 항일운동 공적의 대부분이 측근의 일방적인 증언 및 구체적 내용없이 비밀공작 수행 이렇게 기술된 것이 대부분으로 증거자료로 입증되지가 않았으며기사 그렇기 때문에 2018년 국가보훈처의 국가유공자 심사에서도 ‘활동 내용의 독립운동 성격이 불분명하다’는 사유로 부결되었다.기사정리하자면 정율성의 항일운동은 대한민국 정부에 의해 공식적으로 인정받지 못하였는데도 불구하고, 광주광역시와 전라남도 등의 기념 시설에는 정율성을 항일운동가로 단정하여 포장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 증거자료를 통해 명백하게 입증된 6.25 전쟁 당시 중공군의 일원으로 참전하여 선전 활동을 하고 북한 군가 작곡 등 이런 대한민국에 반하는 부역 행적은 의도적으로 감추고 있다.
결론적으로 정율성 기념 시설은 이때까지 국민 대다수가 정율성을 광주 출신의 항일운동가로서 중국에 귀화하여 중국에서 엄청나게 유명한 음악인 정도로만 인식을 하게 만드는 역사왜곡을 하고 있었고 현재도 하고 있는 중이다.
3.4.7. 광주광역시 정율성 역사공원 조성 논란
자세한 내용은 광주광역시 정율성 역사공원 조성 논란 문서 참고하십시오.3.5. 2020년대 한국사회의 인지와 논란 제기
정율성이 6.25 전쟁에서 중공군 일원으로 참전하여 행했던 공산 침략 부역 활동에 관한 최초의 문제제기는 2011년 KBS 스페셜에서 '정율성의 생애'를 제작한 다큐멘터리 방영과 관련하여 KBS 이사들이 반발하여 편성을 보류한 사건에서 발생하였지만, 이 사건이 당시 전국민으로 하여금 정율성이란 인물을 정확히 알게 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2012년부터 월간조선 등에서 정율성 기념사업 등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였으나, 2022년 8월 22일 국가보훈부 박민식 장관이 문제제기를 하기 전까지 대다수 국민들이 정율성이라는 인물이나 그의 행적에 대해 상세하게 알지 못 했기 때문에 큰 반향을 얻지 못했다. 그러나 이를 두고 광주광역시가 밝힌 것처럼 "오랜 기간에 걸쳐 대한민국 내에서 정율성에 대해 역사 정립이 끝났다"는 주장은 어불성설이며, "정율성이라는 인물 자체는 유명했음에도 그에 대해 긍정적 평가가 내려졌다"는 정황을 뒷받침할 학술적 자료 및 계량화된 통계, 설문조사 결과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광주광역시의 주장대로 "오랜 기간에 걸쳐 대한민국 내에서 정율성에 대해 역사 정립이 끝났으면" 광주광역시 기념시설의 정율성 소개란에도 당당하게 '중공군 일원으로 6.25 전쟁에 참전하여 공을 세우고', '김일성으로부터 훈장도 받았다'와 같은, '치부'로 드러날 만한 내용도 거리낌없이 기재될 수 있어야 하나, 이런 부분들은 논란이 표면화하기 전까지는 감추어져 있었다는 것이 그 방증이다.
4. 작품
- 중국인민해방군군가 (1939 작곡, 1951 개사)
- 연안송(延安颂) (1938)
- 연수요 (延水谣) (1939)
- 흥안령조가 (兴安岭组歌)
- 흥안령 위에 눈꽃 날리네 (兴安岭上雪花飘)
- 조선인민군 행진곡[37] (1947)
- 민족가극(오페라) 망부운(望夫云) [38]
- 아동가곡(동요)
- 우리는 정말 행복해요 (我们多么幸福)
- 평화의 비둘기 (平和鸽)
중국 인민해방군 군가(최초 제목: 팔로군 행진곡)가 가장 널리 알려져 있으며, 이외에도 '연안송' 등 여러 곡들을 작곡했다.
북한과 중국의 군가를 다수 작곡했는데 특히 중국에서는 중국인민해방군군가의 작곡가로 잘 알려져 있다. 이 곡 곡명은 최초 '팔로군 행진곡'이었다가 국공내전 시기에 '중국인민해방군 행진곡'으로 바뀌었다. 1988년 7월 25일, 이 곡은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심의를 거쳐 덩샤오핑의 재가로 '중국인민해방군군가'로 공식 지정되었다. 이 때문인지 정율성은 2009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60주년 기념으로 선정된 신중국 창건 영웅 100인에 이름을 올렸다.#
그 외에 작곡한 곡들은 다음과 같다. #
- 1945년
- 조국을 향하여 전진 (向祖國前進)
- 3.1 행진곡
- 조선해방 행진곡
- 1946년~1950년
- '두만강' 대합창
- '동해어부' 대합창
- '항일기병대' 대합창
- 공화국 기치 휘날린다 (共和國旗幟迎風飄揚)
- 조선인민유격대전가 (朝鮮人民遊擊隊戰歌)
- 우리는 탱크부대 (我們是坦克部隊)
- 전사의 맹세 (戰士的誓言)
- 중조우의 (中朝友谊)
- 신중국을 찬양하는 노래 (歌頌新中國)
- 1951년
5. 소속 정당
소속 | 기간 | 비고 |
| 1939 - 1976 | |
| 1945 - 1950 |
6. 기타
[1] 두음법칙을 적용하지 않을 경우 '정률성'. 북한과 중국에서는 '정율성'이라고 안하고 '정률성'이리고 한다.[2] 음력 7월 7일[3] 김성준(중국 연변대학 예술학원) 「작곡가 정율성 출생지에 대한 고증」, 한국음악사학회 『한국음악사학보』 37호, 2006., 53~74쪽[4] 정율성 출생지는 양림동설, 금동설, 화순 능주설 등 분분했다. 정율성 유가족은 "양림동"이 출생지였다고 주장해서 광주양림휴먼시아2단지아파트 동벽(東壁)에 온갖 정율성 관련 기념물들이 붙어 있으나, 연구자들의 조사와 검증으로 불로동이라는 사실이 드러났다.[5] 1918년 ~ 2011년 (향년 93세), 한국명 정설송[6] 1943년생, 한국명 정소제[7] 정확히는 한반도를 중국공산당에 예속시키기 위함이었다. 실제로 조선의용군을 중심으로 한 연안파는 북한에서 김일성의 빨치산파, 박헌영의 남로당파, 소련파 등 다른 사회주의 파벌들과 치열한 주도권 다툼을 벌였다.[8] 현재 조선인민군(=북한군)의 전신이 조선보안대다. 보안간부훈련대대부는 이 조선보안대의 최고참모부로, 1946년 8월 15일 창설됨. 자세한 내용은 조선인민군의 역사 참조[9] 이때의 정율성의 인민군 협주단이 훗날 현재의 조선인민군협주단이 된다.[10] 미디어오늘[11] 이 시기 북한은 아직 인공기를 사용하지 않고 태극기를 사용하던 때였다.[12] 중국인으로 귀화했기 때문에 영어 위키백과는 정율성의 표준 중국어 발음의 한어병음 표기인 Zheng Lücheng으로 그의 이름을 표기한다.[13] 중국어 위키백과 및 중국 바이두백과를 포함한 다수의 정보는 정율성이 1950년에 중국 국적을 땄다고 서술하고 있다. 국내에서는 중국 귀화 시기가 1956년이라는 설도 있지만, 1956년설은 종파사건 때 정율성이 중국으로 건나가 살아남았다는 서술을 오해해서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정율성은 이미 1950년 중국으로 건너갔고 이후 쭉 중국 베이징에서 거주하며 활동해왔다. 종파사건 당시 연안파 중 생존한 사람이 김학철, 정율성 정도라며 정율성이 언급되는데 이는 정율성이 1950년부터 이미 중국에 거주했기 때문이지만, 국내에서는 이를 가지고 정율성이 1956년 종파사건 때 중국으로 건너간 것으로 오독한 것으로 보인다.[14] 이에 대해 그의 부인 딩쉐쑹이 주도하였다는 주장도 있다. 하단 논란 참조.[15] 6.25 때 중공군 총사령관이었던 펑더화이는 북한 연안파와 인연이 깊었고, 8월 종파사건이 발생하자 북한을 방문해 김일성을 질책하며 숙청한 인물들을 복권하도록 지시하기도 했다.[16] 이 중에는 현 중국 주석 시진핑의 아버지 시중쉰도 있다.[17] 1918년생으로 간주할 경우에는 58세.[18] 조선인민군 총정치국 소속의 예술영화촬영소로서, 주로 북한군의 공적을 찬양하는 영화를 제작하고 있다. 1995년에 조선인민군 창건일이 4월 25일로 변경됨에 따라 '조선 4·25영화촬영소'로 이름이 바뀌었다.[19] 이건상, 『항일음악전사 정율성: 광주가 낳은 중국 3대 혁명 음악가의 삶』, 대동문화, 2007.[20] 국립국악원 개원70주년 특별전: 미공개 소장품전, 21인의 기증컬렉션 88페이지, 정율성 컬렉션 수집 이야기:아악보의 여정 ‘서울에서 북경으로, 다시 서울로’ 출처[21] 이는 남편을 비호하기 위해 딩쉐쑹이 꾸며내거나 윤색한 이야기일 수도 있다. 일단 당시 그것들이 무엇이며 무슨 가치가 있는지 감별할 능력이 있는 것은 전문 음악가이자 한국에서 태어나 자란 정율성뿐임은 자명하다. 그런데 당시 북한 인민군 소속이었던 정율성이 입수했다면 북한 당국에 입수되어 계속 소장되었을 수 있는데, 결국 중국으로 반출된 것을 보면 중간 경위가 어쨌든 그의 아내가 가져간 것은 맞을 수도 있다.[22] 혹은 중국 3대 작곡가, 중국 3대 악성(樂聖), 중국 3대 인민음악가 등[23] 비슷한 예로는 윤이상을 두고 '세계 5대 작곡가'라고 주장하던 예가 있다. 역시 근거가 전무하며, 한국 언론 외에는 아무도 그렇게 부르지 않는다.[24] 2009년 7월 남광주 청년회의소(JC)가 중국 해주구 인민정부로부터 기증받아 아파트 입구에 설치했다고 한다. 기사[25] 2023년 10월 2일 새벽 의도적으로 보수단체 회원이자 유튜버에 의해 기단만 남긴채로 밧줄에 묶여 뽑혀서 파괴되었다. 기사[26] 간체자로 쓰여진 정율성 이름은 딩쉐쑹의 친필이다. 출처 : 문체부 산하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웹진 2021년 12월호[27] 광주광역시 남구청은 2021년 국비를 포함해 사업비 1억여원을 들여 전시관을 보수했다.#[28] 전시물들을 사진으로 볼 수 있다.[29] 약 20m 근방에 정율성 생가(양림동)가 있다. 이곳은 2023년 현재 정율성 전시관 조성사업이 진행되고 있다.[30] 2022년 호남대학교 공자아카데미에서도 정율성 교실을 탐방했다. #[31] 본래 그의 생가(카카오맵)는 '괴산 이복기 가옥'이란 이름으로 국가민속문화재로 1984년에 지정했었지만, 이후 관리 부실로 인해서 1990년 지정이 해제되었다. 이후 계속 빈 집으로 남아있다가('답사여행의 길잡이-충북' 편에 적힌 그의 생가) 이후 괴산군에서 시도민속문화재로 재지정하고 복원을 하긴 했는데, 보훈 및 유공자 단체의 반발로 그의 부친인 홍범식의 이름을 넣어서 '괴산 홍범식 고가'라는 이름으로 지정되어 있다.(국가문화유산포털)[32] 2023년 8월까지는 재단 측에 의해 홈페이지가 운영되고 있었으나, 정계에서 정율성 논란이 진행 중이던 2023년 8월 29일부로 갑자기 폐쇄되어 현재는 인터넷 아카이브 등에만 흔적이 남아 있다.[33] 마오쩌둥 등을 배출한 중국의 명문 중학교라고 한다.[34] 1953년 정식으로 중국소년선봉대라는 명칭이 된다.[35] 붉은 스카프인 홍링진(红领巾)을 매고 다니는 게 특징이다. 소련에서 유래한 것인데, 중국에서는 인민영웅들의 피와 오성홍기를 상징한다고 설명한다. 북한 초등학생들이 목에 매고다니는 빨간 스카프와 같다.[36] 소선대에서 15세가 되면 중국공산당의 청년정치조직인 공청단으로 넘어간다. 이후 예비당원을 거쳐 중국공산당의 정식당원이 될 수 있다.[37] 조선인민군, 즉 북한군 전체를 대표했던 공식 군가이다. 1960년대에 조선인민군가가 만들어지면서 이후로는 거의 사용되지 않고 있다. 이 쪽은 리범수 작사, 라국 작곡의 노래다. 제목이 비슷해서 그런지 '조선인민군가'도 정률성 작곡으로 잘못 알려져 있는 경우가 많다.[38] 정율성의 오페라 망부운은 2019년 3월 광주문화예술회관 대극장에서 광주시립오페라단과 한중 정상급 성악가들의 참여로 상연됐다.# 공연 정보 홍보 영상[39] 한국명 정설송[40] 한국명 정소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