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9-22 11:08:59

김무정

김무정
金武亭
파일:김무정.jpg
<colbgcolor=#DE2910><colcolor=#fff> 본명 김병희(金炳禧)
이명 김명석(金明石)
본관 김해 김씨
출생 1904년 5월 16일
함경북도 경성군 용성면 근동[1] #
(현 함경북도 청진시 근동리)
사망 1951년 7월 10일 (향년 47세)
최종 국적
[[북한|
파일:북한 국기.svg
북한
]][[틀:국기|
파일: 특별행정구기.svg
행정구
]][[틀:국기|
파일: 기.svg
속령
]]
학력 나남공립보통학교 (졸업)
중앙학교 (중퇴)
조선중앙기독교청년학관 (중등과 / 졸업)
경력 사단장[2]
정치장교
조선의용군 사령관
인민군 포병사령관(☆☆)
민족보위성 포병부상(☆☆)
인민군 제2군단장(☆☆)
1. 개요2. 생애
2.1. 초기 이력2.2. 중국 시절2.3. 항일 운동과 귀국2.4. 귀국 이후
3. 숙청4. 복권5. 기타6. 대중매체에서

[clearfix]

1. 개요

일제강점기공산주의독립운동가, 북한군인.[3]

본명은 김병희(金炳禧)이며 흔히 '무정'이라고 불린다.[4] '김무정'보다는 '무정'이 더 맞는데 당시 항일운동가, 공산주의자, 무정부주의자와 같은 활동가들은 가족이나 주변인들의 안전을 위해 아예 성씨까지도 알 수 없는 가명을 쓰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2. 생애

2.1. 초기 이력

1904년 5월 16일 함경북도 경성군 용성면 근동[5]에서 대지주[6]였던 아버지 김현극(金鉉極)[7]과 어머니 종산(宗山) 사이의 아들로 태어났다. 경성군 오촌면에 있던 나남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여 재학 중이던 1919년, 15세의 나이로 3.1 운동에 참여하였으며, 1920년에 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그해 10월 경성부 중앙학교에 진학하였으나 1922년 3월 병으로 중퇴하였다. 같은 해 4월 조선중앙기독교청년학관 중등과에 편입하여 이듬해인 1923년 4월 졸업하였다.

한편, 조선중앙기독교청년학관 재학 중이던 1923년 2월, 서울청년회에 회원으로 가입하여 서울청년회 주최의 청년당 대회에 참여하며 간부 이영(李英) 등과 함께 활발히 활동하였다. 또한 동지 현칠종(玄七鍾)과 함께 대립파인 조선청년연합회 및 동아일보 사원 등에 대해 이따금씩 물리적 견제를 하기도 했다. 그 후 강택진과 정우영(鄭又影)의 아내 등이 조직한 경성여자강습학교(京城女子講習學校)에서 교원으로 근무하기도 했다.

1923년 9월에는 장적파(張赤波)·강택진 등과 함께 노농대회(勞農大會)를 조직하기도 했다.#

2.2. 중국 시절

1924년경 중국으로 망명하여 한 군사학교[8][9]를 졸업하였다. 이후 옌시산 군벌군에서 포병장교로 활동하다가, 장제스의 북벌에 호응하여 군벌군을 탈퇴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국민당군의 북벌에 참가했다.

1925년 중국공산당에 가입, 장제스의 4.12 상하이 쿠데타 이후 공산당원 체포령이 떨어지고 우창에서 체포되어 사형을 언도받았으나,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국민당의 백색테러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자 장제스는 정치범을 석방하는데, 이때 운좋게 풀려났다. 이후 공산당의 요원으로 활동하면서 여러 파업과 폭동에 참가한다. 그러다가 영국 조계에서 체포되었고, 이때 2개월형을 받는다. 이후 홍콩으로 갔다가 장시성의 중화소비에트공화국으로 가서 펑더화이 부대에 합류한다. 펑더화이 부대는 국민당군으로부터 노획한 75문의 야포 및 산포를 보유하고 있었고, 무정은 이를 운용하여 큰 전과를 올리면서 공산당 지휘부의 주목을 받는다.

제5차 초공작전 이후 1934년의 공산군은 서쪽으로 패주하게 되었는데, 이 대장정이라고 불리는 도주에 무정도 참여했으며, 대장정에 참가한 조선인중 둘뿐인 생존자였다.[10] 대장정시에 중장비는 모두 버리고 가야 했고, 홍군은 기껏 박격포를 장비했을 따름이지만, 무정은 이런 빈약한 홍군의 화력이나마 적재 적소에 화력지원을 하여 홍군의 포위망 탈출에 공을 세웠다고 한다.

장정중에 그가 맡았던 직책은 마오쩌둥이 지휘하는 당중앙의 직접 명령을 받는 군단(军委纵队, 군단장 예젠잉) 휘하 제3제대(사단에 해당)의 사령관 및 정치장교(겸임)를 맡았다. 그와 비슷한 레벨(제대장)을 맡았던 인물들은 후에 살아남았으면 중공정권의 장차관급 혹은 인민해방군의 대장급에 이르렀으니 무정의 위상이 홍군 내에서도 꽤 높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인물중에는 제4제대장 천겅(陈赓)[11], 제2제대장 허장궁(何长工)[12], 그리고 무정의 후임으로[13] 제3제대장을 맡았던 리웨이한[14] 등이 있다. 이후 시안 사변 이후 국공합작이 재개되자, 홍군이 개편된 팔로군의 핵심 간부로서 맹활약했으며, 만주지역의 항일운동에도 개입했다.

팔로군 포병사령관[15]을 맡았으며, 달리는 차를 조준기 없는 박격포로 맞출 정도로 박격포의 귀신으로 알려져 있다. 오죽하면 펑더화이가 자기 자서전에서 "팔로군에서 포를 쏠 수 있는 것은 나(펑더화이)와 김무정 뿐이다."라고 했을 정도. 후에 북한군의 군사고문으로 온 소련군 포병장교들이 "포술에 필요한 고등수학도 모르면서 어떻게 포병을 한담?"이라고 무시하다가, 이런 묘기를 보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또다른 일화로, 박격포 하나를 놓고 주변 간부들에게 '전투 도중에 계산을 일일이 어떻게 하나'라는 투로 얘기를 한 다음 손짓과 눈대중으로만 목표물을 겨냥해서 포를 쐈는데, 쏘는 족족 백발백중이었다고 한다.[16]

주더펑더화이의 신임을 돈독히 받았으며, 나중에 중공군 총사령관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한 펑더화이와는 중매도 서주고, 암호책을 맡길 정도로 절친한 사이였다고 한다. 이 사건은 장정 시절 4방면군을 지휘하던 장궈타오가 당권을 쥔 제1방면군의 마오쩌둥을 체포하여 처형하기 위해 휘하부대의 마오쩌둥 부대와의 교신에 쓰이는 암호책을 회수한 사건인데, 무정은 펑더화이의 명을 받고 따로 만든 암호책을 가지고 혈혈단신으로 감숙성에 있던 마오쩌둥 부대에 전달, 펑더화이 부대와 마오쩌둥 부대의 교신을 연결시켜 결과적으로 마오쩌둥이 장궈타오의 음모로부터 벗어나게 되는데 큰 공을 세웠다.

2.3. 항일 운동과 귀국

1941년 김두봉과 함께 조선독립동맹을 만들고 "조선의용군"의 사령관이 되었다. 조선의용군은 중국공산당 팔로군과 합작해 일본군과 여러차례 교전했는데, 대표적으로 활약했던 전투는 타이항산 전투가 있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 지휘관은 한국인 출신 홍사익이었고, 조선의용군은 김무정이 지휘했다. 이 전투에서 항일 운동가 윤세주가 전사했다. 1944년 일제 말기에는 식민지 조선 국내에 있던 비밀결사 단체 조선건국동맹과 연계하였다.

중국에서 해방을 맞이한 후 9월 5일 조선의용군을 이끌고 만주로 출발했다. 11월 초에 국부군의 추격을 피해 고생하면서 심양에 도착한 무정은 조선의용군 선발대가 입국을 시도했다가 소련군에게 쫓겨났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무정은 일본공산당 지도자 노나카 산조를 통해 소련 측에 입국 허가를 요청했으나 소련 측은 이를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이에 무정은 중국공산당과 협의하여 조선의용군을 동북조선의용군으로 개편하여 만주에 남기고, 간부들만 입국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1지대장 김웅, 1지대 정치위원 방호산, 1지대 참모장 안빈, 정치주임 주연 등은 남아서 국공내전에 참가하게 되었고, 무정은 국공내전에 참가하지 않았다.

사실 무정에 대해서 김일성과 대비시키기 위해 엄청나게 대단한 인물로 띄워주는 경향이 강하지만 사실 무정의 권위도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 그의 권위에 결정타를 준 것은 1945년 11월, 국부군이 심양을 공격하기 시작하자 겁을 먹은 무정이 자기 혼자서 무순에서 징발한 트럭을 타고 달아나버리는 추태를 보인 사건이었다.(...) 문제는 자기가 버리고 달아난 동료들을 단둥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고 이들은 조선으로 돌아가는 기차 안에서 무정을 모포를 씌워놓고 두들겨패서 보복했다.(...) 이는 서휘의 증언이다.

2.4. 귀국 이후

그가 정확히 언제 귀국했는지는 자료에 따라 얘기가 다르지만, 조선민주당 간부 출신의 박재창의 증언에 따르면, 11월 말이라고 한다. 서휘와 홍순관은 12월 초로 기억하고 있다. 무정은 결국 개인자격으로 기차를 타고 귀국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가 5만명의 의용군을 이끌고 귀국했느니 어쩌니 하는 소문이 파다했다고 한다. 귀국 후에도 동북조선의용군과의 연락을 유지했으며 이들의 귀국을 도모하였다.

1945년 12월, 무정은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제3차 확대집행위원회에서 간부부장에 임명되었으나 자신과 친한 인물들만 중용하여 다른 인물들의 불만을 샀다. 원래도 파벌도 아니었던 연안계는 무정의 이러한 행동 때문에 더욱 더 분열되었다는 평가가 있다. 여기에 상당히 야심이 있던 무정은 김창만과 함께 황해도 일대를 다니면서 자신을 알리려고 했다고 한다. 무정은 함경북도 출신이므로 황해도와 딱히 연고가 있지는 않았지만 평안도는 김일성이 이미 장악하였고 함경도는 오기섭과 같은 토착 공산주의자들의 기반이었기 때문에 무정은 황해도를 자신의 지지기반으로 삼으려고 했다는 것이다. 심지어 황해도에서 '위대한 아버지'라고도 불렸다고 한다.[17] 서휘의 증언에 따르면 무정은 "해방이 됐으니 이제 발 벗고 조선 건설을 하겠소. 이제 군대 가지고만은 되지를 않소. 한때는 군인만 하려 했는데 이제 정치를 해야겠소."라고 하기도 하였다. 무정은 군인다운 시원시원한 연설로 시민들의 상당한 인기를 얻다고 전해지는데, 연설 중에 음담패설을 적절히 섞어가면서 좌중을 휘어잡곤 했다고 한다.[18]

하지만 무정은 거침없는 반소 성향을 드러냈는데, "어떤 놈이라도 우리 조선의 주권을 강탈하려는 놈은 그냥 두지 않을 것이다. 대포를 쏴 당장 내쫓을 것이다."라고 연설하기도 했다. 성격 또한 사교적이지 못하고 고압적이었던 모양인데, 유성철은 무정이 김일성보다 능력은 나은 것 같지만 성격은 고압적이라서 별로였다고 평가했다. 한편 무정은 김일성도 소련 똘마니로 보고 매우 싫어했던 것으로 보인다. 김일성은 무정을 견제하여 다소 푸대접했는데 이에 무정은 "일성이 새끼가 나를 꼭 없애야 하기는 할 터인데... 그러나 이 무정이 아무리 못났기로 일성이 같은 어린애 앞에서 굴복할 수는 없지 않은가. 나는 직업적 혁명가로서의 투쟁역사에 있어서나 또는 개인 무정을 놓고 볼 때 나야말로 백전연스의 자타공인하는 용장이거든. 내가 일성이 새끼만 못하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야."라며 김일성을 가소롭게 보았다. 그리고 소군정의 푸대접에도 불만을 품고 갑자기 자신의 총상을 보여주면서 "이같은 나의 경력은 있는 것도 제대로 소개하지 않으면서 누구는 없는 경력까지 만들어서 선전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현 단계의 혁명적 의의를 망각하고 자기 세력의 부식에만 급급하고 있으니, 이것은 장차 당문에 큰 재화를 분비하는 것이 될 것이요."라고 소련과 김일성을 묶어서 깠다. 함경북도에 갔다가 김일성 초상화를 뜯어내기도 했다고 한다. 그외에도 "대위 계급장(김일성은 광복 당시 공식적으로는 소련군 대위였다.) 달고 온 것들이 무슨 놈의 장군!"이라고 일갈했다는 카더라가 있다.]

이러한 행동 덕분에 무정은 자연스레 권력구도에서 밀려나게 된다. 우선 그의 측근 김창만이 반소분자로 몰려 좌천되었는데, 이후 김창만은 철저한 김일성 추종자로 돌변하게 된다. 또한 신민당과 북조선공산당이 합당하여 북조선로동당이 출범했을 때 간부부장 자리를 박일우에게 빼앗겼으며, 북조선인민위원회가 결성되면서 겨우 임시인민위원 자리만 받았을 뿐이다. 1946년 9월, 여운형이 북한에 왔을때 무정을 만나려 했으나 불발되었고, 여운형은 무정이 운신이 자유로운 몸이 아니며 권부에서 멀어졌음을 간파했다. 1948년 3월, 2차 당대회에서 오기섭은 무정이 자신을 위대한 아버지라고 해야 했으니 자아비판해야 한다고 물고 늘어지기도 했다. 그외에 박훈일도 무정이 토지개혁을 제대로 못했다고 비판했다.

그나마 조선인민군 창건에 관여하여 보안간부학교 심사위원장을 지냈으며, 보안간부훈련소가 창설된 후 사령관을 맡았다는 미군 측 정보도 있다.총참모장 안길이 사망한 이후 총참모장 대리에 임명되었으나 김일성과 협의하지 않고 독단적으로 지휘하다가 해임되고 포병 부사령관으로 좌천되었다. 1948년 8월, 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에서 탈락하는 충격적 이변도 있었다. 1948년 9월 9일, 내각이 조직되면서 민족보위성 부상에 임명되었다.

6.25 전쟁 중에 작성된 미국 CIA 보고서에서는 해방 직후 중국에서 돌아온 김무정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김일성보다 훨씬 더 인기가 높은 인물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소련은 이미 김일성을 북한의 지도자로 지원을 하고 있었으며 중국공산당을 배경으로 가진 연안파를 불신하였다. 이들은 연안파를 견제하며 김무정의 군사력을 무력화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고 이로 인해 김무정은 독자적 세력을 구축하지 못하고 인민군 장성으로밖에 머물 수 없었다고 적혀있다.[19]

그 결과 6.25 전쟁 때까지 김무정이 맡은 직책들은 포병사령관(☆☆), 2군단장(☆☆),[20] 민족보위성 부상(☆☆) 등 그리 높지 않았다. 연안파의 리더였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연안파 내부에서도 그다지 인정을 못 받았다고 한다.[21] 김두봉이나 최창익이 당 내 요직에 앉아 활약할 때 그는 군부 안에서만 활약했다. 최용건 민족보위상(국방장관) 아래서 차관을 맡았다. 뛰어난 무인이었으나, 정치인으로서의 정치력은 뛰어나지 못했다.

6.25 전쟁으로 조선인민군이 남침하면서 동부전선 공략을 맡았던 김광협 인민군 2군단장이 공세부진으로 해임되자, 무정은 현역으로 돌아와 중장 계급을 달고 후임 군단장을 맡았다. 인민군 2군단은 강원도를 점령하고 포항까지 진격했으나, 낙동강 전선에서 급격히 소모되었고, 결국 인천 상륙 작전에 퇴로가 막히면서 춘천을 거쳐 백두대간을 종단하여 평양까지 패주했다.

3. 숙청

김일성은 국군과 UN군의 공세로부터 평양을 방어하기 위해 무정을 평양방위사령관에 임명한다.[22] 그러나 평양방위사령부는 급조된 부대였고 당연히 방위가 될리가 없어서 평양을 다시 유엔군에게 빼앗기고 북쪽으로 도주하였다. 이때 무정은 아주 큰 사고를 치는데, 미군 폭격으로 부상당한 중국인민지원군 병사들을 지방 의무대에서 받으려하지 않자 격분하여 병원장을 즉결처분으로 총살해버린 사건을 저지른 것이었다. 이미 부하들을 즉결처분한 전력이 있던 그는 즉시 체포되었고 김일성에게 만만한 먹잇감으로 전락한다.

남침을 총 기획한 김일성은 정치적 라이벌들에게 패배의 책임을 덮어씌워 위기에서 탈출하려 했다. 1950년 12월 4일 자강도 만포에서 열린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김무정은 불법살인[23], 낙동강 방어선 공략실패, 평양 상실의 책임을 한꺼번에 뒤집어쓰고 "중대과오를 범했다"는 이유로 실각하고 만다.

남한 관변자료에는 총살설, 지하 노예설, 암살설, 병사설 등이 돌았으나 숙청 후 지하 노역장 관리로 잠시 있다가 중국측의 요청으로 송환, 1951년 중국에서 병사한 것으로 파악된다.[24] 어쨌든 실각후 몇달만에 48세의 많지 않은 나이로 사망했다.

4. 복권

무정이 요절한 것은 그런데로 전화위복이 되었는데, 북한에서 1994년 4월에 무정을 복권해준 것이다. 이전까지 조선중앙년감과 김일성 전집에선 김일성이 무정을 봉건 마왕, 군벌주의자라고 혹독하게 쪼인트 깐 내용을 여과없이 실었으나 김일성 사후 1995년 나온 김일성 전집 12권에선 무정 비판 내용이 삭제되었다. 김일성은 세기와 더불어에서도 김무정에 대한 비판과 업적을 동시에 언급하였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화북에 있던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의 존재에 대해서도 일정한 관심을 돌렸습니다.
그때 거기에서 무정이 적지 않은 역할을 하였는데 그는 중국의 홍군건설과 중국인민의 해방투쟁에도 기여를 한것으로 알려져있습니다.
조국에 돌아와서는 민족보위성 부상도 하고 포병사령관도 하였습니다.
무정이 조국에 돌아왔을 때 나는 우리 집 가까이에 그의 집을 잡아주었습니다.
무정은 해방된 조국에 돌아와서도 무력건설에 참가하여 공로도 세웠지만 워낙 군벌관료기가 심한 사람이여서 조국해방전쟁때에 비판을 받고 군직을 다 내놓았습니다.
무정이 현직에서 해임되였지만 우리는 그가 중병으로 신고할 때 최선을 다하여 치료대책을 세워주었습니다. 중국 장춘에 로므니아의료집단이 운영하는 병원이 있었습니다. 무정은 그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습니다. 그후 무정이 우리곁에서 눈을 감고싶다고 하기때문에 그를 조국에 데려왔습니다. 나는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그의 공로를 평가하여 장례식을 잘해주었습니다.
무정은 나를 처음으로 만났을 때 김장군소문을 많이 들었다, 그때마다 힘이 났다, 왜놈오랑캐들을 벌벌 떨게 하는 장수가 조선에 있다고 생각하니 얼마나 기뻤는지 몰랐다, 몸은 비록 팔로군에 있었지만 내 마음은 언제나 백두산쪽에 가있었다, 조선의용군이 김장군부대와 합류하는 방법은 없겠는가, 조선의용군과 조선인민혁명군이 공동으로 일제를 격멸할수는 없겠는가, 이런 생각을 하면서 김일성장군과 손을 잡아보려고 여러모로 애썼다고 하였습니다.[25]

실제로 조선혁명박물관에서 전직 고위인사들의 사진과 명단을 둘러보다 김무정의 이름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그의 정치적 명예를 회복시킬 것을 지시한 것도 김일성이었다. 김무정의 사망 이후 평양으로 송환되어 평양 교외에 묻혀있던 그의 유해도 애국열사릉으로 이장되었다고 한다. 이 사실은 2001년 중앙일보 통일문화연구소가 무정의 묘비 사진을 입수하면서 한국에서도 알려졌다.(2001년 중앙일보 기사)

5. 기타

6. 대중매체에서


[1] 인근의 남석동·농포동·송정동·송향동·용향동·회암동과 함께 김해 김씨 집성촌이다.[2] 군위종대(军委纵队, 군단장 예젠잉) 휘하의 제3제대(사단에 해당)[3] 1945년 광복 후 바로 북한에 왔기 때문에 1949년 건국된 중화인민공화국 국적을 가진 바 없으므로 조선족이 아니다. 당시 중화민국 영내에서 활동하는 독립운동가들을 중화민국은 자국인이 아니라 일본 국적으로 간주했으며 이 때문에 김무정과 비슷하게 중국공산당원이었던 김산장제스4.12 상하이 쿠데타 이후 중국국민당에 의해 중국 공산당원이 대거 처형될 때도 사형을 면하고 일본 국적으로 간주되어 일본 조계로 신병이 인도되었다.[4] 다만 '김무정'이라는 표현도 이에 못지 않게 많이 쓰였다.[5]함경북도 청진시 근동리.[6] 1927년경 제작된 왜정시대인물사료부동산이 13,000엔 정도 있었다고 한다.[7] 이명 김기준(金基俊).[8] 한국에는 바오딩(보정)군관학교라는 설이 있는데, 이 학교는 1923년 폐교되었으므로 이 해 중국에 건너간 무정이 입학할 수 없다. 바오딩군관학교는 1901년 청나라 시절 신식 군대 장교를 양성하기 위해 만든 사관학교로 나중에 유명하게 되는 황포군관학교보다 먼저 생긴 근대식 군사학교이며 2년제였다. 황포군관학교 초대 교장이던 장제스가 바로 여기 출신이다.[9] 중국측 자료에서는 옌시산이 만든 북방군관학교라고 나온다. 일부 반공소스에서는 그가 전혀 군사교육을 받지 않았고 팔로군 이력도 부풀린 것이라고 주장하나, 그가 담당했던 포병운용은 군사적 무학자가 운용할 수 있는 성격의 병과가 아니므로, 어디서라도 군사학교를 제대로 다닌 것은 확실한 듯. 또한 무정의 활약상은 펑더화이 자서전과 중국의 공식자료에도 나오기 때문에 과장이 아니다. 인민해방군의 홍보사이트인 "중국군망" 인민일보의 웹사이트 "인민망"[10] 다른 한 명은 양림(楊林, 1898~1936)이라는 인물로, 대장정 당시 홍군 중앙군사위원회 간부단 참모장이었다. 이후 팔로군 15군단 75사단 참모장을 역임하였으나, 황허강 도강 작전 당시 전사한다.[11] 대장, 한국전에도 참전.[12] 중화인민공화국 수립후 중공업부 부부장(차관)[13] 무정은 장정도중 포병사령으로 전근되었다.[14] 등소평과 이혼한 부인의 재혼남편이다.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국무원 비서장을 맡았는데, 한국으로 치면 국무조정실장쯤 된다. 이후 통일전선부 부장(장관)에 재직했다.[15] 홍군은 중장비를 다 버리고 갔으므로, 초공작전 당시 노획한 국민당군의 야포도 모두 버리고 갔고, 팔로군은 기껏해야 박격포, 산포 정도를 장비한 수준이었다.[16] 말도 안 되는 묘기이지만, 100여년 뒤 마리우폴 전투에서 아조프 연대가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17] 또 하나의 일화로는 자신의 몸에 있는 상처들을 보여주면서 "나도 이렇게 열심히 독립운동을 했는데 왜 어떤 사람(김일성)의 독립운동만 선전하는 것이냐"고 불만을 토로한 적도 있다고 한다.[18] 일부 소개하자면 자신의 강의 중에 자는 사람을 발견하자 밤중에 여편네와 무엇을 했길래 자는가? 라고 소리치기도 했고, 자고 있던 참모 한 사람에게 자녀가 몇명이냐고 묻더니 딸만 둘이라는 대답에 조는 꼴을 보니 '조준실력'(?)이 형편없을 줄 알았다고 농담하기도 했다.[19] POSITION OF KIM MU-CHONG, CIA REPORT, May 17 1951[20] 동부전선 담당. 장사상륙작전 당시 인민군 맹렬부대와 함께 학도병들을 몰살시켰다.[21] 중앙일보에서 펴낸 <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책을 보면 귀국 길에 김무정이 국민당군의 공격을 피해 혼자만 도망치자 기차 안에서 단체로 뺨을 한 대씩 때리는 등 무정의 연안파 내 입지는 별로 높지 않았다고 한다.[22] 평양방위사령부는 이후 1955년 민족보위성 직할부대로 재편되었다가 1960년엔 호위사령부로 통합된다. 그러다가 1990년대에 다시 부활해 여러가지 이름으로 불리고 있는 제91수도방어군단이 된다.[23] 후퇴자에 대한 즉결처분을 했다는 혐의였다.[24] 중국측에서는 오히려 위궤양으로 평양에서 사망했다는 자료도 있고, 혹은 병세가 위독해지자 중국지도부의 요청으로 만주로 송환되어 당시 만주에서 가장 좋은 병원이 있던 창춘시에서 루마니아인 의사의 치료를 받았으나 현지에서 사망했다는 이야기도 있다.[25] 이 부분은 구라이거나 과장일 가능성이 높다. 아니면 이미 무정이 김일성이 북한에서 거스를 수 없는 대세인걸 인정하고 한 아부이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