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대 조선사회민주당 중앙위원장 강량욱 康良煜 | Kang Ryang Uk | |
<colbgcolor=#bc0021><colcolor=#fff> 출생 | 1904년 12월 7일 |
평안남도 평양부 용산면 하리 칠골 | |
사망 | 1983년 1월 9일 (항년 78세) |
평양시 | |
학력 | 신덕소학교 (졸업) 숭실중학교 (졸업) 숭실전문학교 (졸업) 주오대학 (예과 / 학사) |
종교 | 개신교 (장로회) |
정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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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제강점기의 장로회 목사·교육자이자 북한의 목사·교육자·정치인이다. 공산주의와 상극인 종교인임에도 김일성에게 부역하여 북한 지역의 개신교를 쇠락하게 만든 중요한 인물인데, 그 대가로 조선그리스도교련맹 중앙위원회 위원장(1946년-1983년)과 조선사회민주당 중앙위원회 위원장(1958년-1983년)과 최고인민회의 대의원(1948년-1972년)과 북한 부주석(1972년-1983년)을 맡는 등 종교계, 정치계 요직을 두루 역임했다. 김일성의 외재당숙할아버지[1]로도 유명하다. 평안남도 대동군 용산면 하리 칠곡[2] 부락 출생.2. 생애
2.1. 출생과 학력
1904년 12월 7일 평안남도 평양부 용산면 하리 칠곡부락에서 강병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육촌형 강돈욱[3]은 1899년 창립된 하리교회[4]의 창립 교인이자 장로 중 한 사람이었을 정도로 그의 가족과 친척은 일찍이 구한말부터 개신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일찍이 개신교 신앙을 받아들인 그의 가족과 친척을 따라서 그도 개신교 신앙을 받아들였지만 그의 가족과 친척이 주로 출석하던 하리교회가 아닌 소룡리교회에 출석했다. 하지만 그 외 그의 유년시절에 대한 자세한 사실은 알려지지 않았다.신덕소학교를 졸업하고 숭실중학교를 졸업한 후 숭실전문학교에 입학했으나 중퇴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주오대학 예과를 수료했다. 숭실전문학교에서 중퇴한 이유는 바로 가족의 가난이었다. 비록 본인은 가난하게 자랐고 그 때문에 숭실전문학교를 중퇴해야 했지만 그는 그 당시 조선 사람으로서 교육을 잘 받은 축에 속했다.[5] 이 시기 받은 교육은 그의 이후 교사활동과 목회활동에 보탬이 되었다.
2.2. 해방 이전 행적
주오대학 예과를 수료하고 조선으로 귀국한 그는 육촌 형 강돈욱이 창립한 창덕소학교 부임으로 교사생활을 시작했다. 창덕소학교 교사로 근무한 시절에 외종손 김일성의 담임으로써 그를 가르치기도 했었다. 이 때 인연은 훗날 해방 후 북한에서 그가 정치활동을 시작하는데 있어 이점으로 작용했다. 강량욱은 창덕소학교에서 근무하다가 1930년에 진남포득신소학교로 전근했고 1930년대 중반 조선예수교장로회 평양신학교에 입학할 때까지 교사생활을 계속했다.1930년대 중반 평양신학교에 입학했고 재학 중 장대현교회 전도사로 활동했다. 1943년 3월 평양신학교롤 제38회로 졸업했다. 졸업 이듬해 1944년 봄 조선예수교장로회 평양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1923년 창립된 평양 고정교회[6]의 담임목사로 부임했다. 북한교회연구원 원장 유관지 목사가 수집한 증언에 따르면 고정교회 담임목사 시절의 강량욱은 건장한 체구에서 나오는 좋은 성대로 찬양을 잘 인도하고, 사경회도 잘 인도해서, 별명이 "사경회 목사"였고 때로는 "제2의 김익두"[7]라는 말을 듣곤 했다고 한다. 설교 실력도 뛰어나서 월남한 개신교 신자 중 광림교회 원로 김선도 목사, 전(前) 인천제2교회 담임 이삼성 목사 등 고정교회 담임 시기 강량욱의 설교를 직접 들어본 인사들은 그의 설교 실력을 대단히 뛰어나다고 평했다. 강량욱은 광복 후에도 계속 고정교회를 담임했는데, 1946년 3월 13일 일어난 암살 시도 사건 때까지 교회 목사 사택에 거주했다.
2.3. 해방 이후
해방후 김일성이 소련군과 함께 이북지역을 접수하며 교회와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이루어졌으나 김일성과의 혈연과 사제관계 인연덕에 무사했다. 북한의 기독교 공동체가 탄압받으며 무너지는걸 방관을 넘어서 김일성이 제공하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서기장 같은 자리에 눈이 멀어 어용 단체에 교회를 강제 가입시키는 식으로 오히려 조장하였으며, 조선기독교도련맹과 조선그리스도교련맹의 책임자로 선출되어 북한 어용 단체의 직위를 맡았다. 이 때문에 북한에서 남은 기독교인들의 큰 미움을 사 암살 당할 뻔하기도 했다. 유력한 김익두 목사가 이 단체가 자신의 명의를 빌리는 것을 반대했지만, 강량욱 목사는 김익두 목사가 이를 승낙했다고 거짓말까지 일삼을 정도였다. 그 단체는 평범한 설교를 해도 김일성 찬양 설교로 조작까지 하던 곳이었다. # 조만식 명의의 조선민주당에서 조만식 세력을 밀어내는데 앞장 서기도 했다.1948년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하여 연설하는 모습.
1950년 6월, 홍남표 장의위원, 1951년 8월, 허헌 장의위원을 지냈다. 1953년 7월 29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미영제국주의 무력침범자들을 반대하여 자유와 독립을 수호한 조선인민의 정의의 조국해방전쟁의 승리를 보장함에 있어서 온갖 헌신성과 창발적 활동으로써 특출한 공훈을 세운 국가정권기관 및 당 지도일꾼"으로 선정되어 로력훈장을 받았다. 1954년 11월 25일, 50세 생일을 기념하여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로력훈장을 또 받았다. 1958년 9월 7일, 강영창, 김두삼, 김회일, 리기영, 리송운, 리일경, 리천호, 리희준, 백남운, 정두환, 진반수, 최철환, 한설야와 함께 공훈이 있는 국가기관, 정당, 사회단체 지도일군으로 선정되어 국기훈장 1급을 받았다.
홍기황의 후임으로 1958년 11월부터 사망 전까지 조선사회민주당의 위원장을 맡았다. 1960년 4월, 박달 장의위원, 1962년 9월, 김경석 장의위원, 1963년 5월, 강진건 장의위원, 1965년 3월, 안재홍 장의위원, 1965년 5월, 한동백 장의위원장. 1968년 3월, 홍명희 장의위원, 1971년 10월, 박문규 장의위원을 지냈다. 1972년 사회주의 헌법 채택 이후 초대 부주석에 선출되었다. 1974년 2월, 장길부 장의위원, 1976년 5월, 홍원길 장의위원, 1977년 6월, 강장수 장의위원을 지냈으며 1977년, 1982년에도 부주석으로 재선되었으며 죽을 때까지 부주석에 재임하였다. 1982년 3월, 전창철 장의위원을 지냈다.
1983년 사망한다. 김일성이 직접 조문을 오는 등 큰 예우를 받았다. 2016년 5월, 7차 당대회 개회사에서 김정은은 '조선로동당의 강화발전과 사회주의 위업의 승리를 위해 헌신적으로 투쟁한 충직한 혁명동지'의 한 사람으로 허담, 연형묵, 김중린, 허정숙, 김국태, 김용순, 김양건, 전병호, 박송봉, 리찬선, 리제강, 리용철, 리종옥, 김락희, 안달수와 함께 강량욱을 언급하였다. 이중에서 조선로동당 당원이 아니었던 것은 강량욱이 유일하다.
강량욱의 후손들도 대를 이어 조선그리스도교련맹에서 직위를 맡고 있다. 강량욱의 후손들은 신천강씨로 우대 받으며 백두산 줄기[8]에 편입되었다. 김씨일가를 제외하고는 북한에서 아무도 건드릴 수 없는 가문인데 김일성의 어머니 강반석이 우상화되었고 김일성도 친척인 강씨 집안을 후하게 대우해줬기 때문. 한국으로 탈북한 강명도의 작은할아버지이기도 하다.
3. 장의위원회 구성
- 위원장: 김일성
- 위원: 김일, 박성철, 리종옥, 오진우, 림춘추, 서철, 오백룡, 김환, 현무광, 윤기복, 리근모, 강희원, 강성산, 허담, 공진태, 최광, 계응태, 정준기, 최재우, 황장엽, 허정숙, 홍성룡, 김회일, 김창주, 김복신, 방학세, 한상규, 리영수, 천세봉, 홍기문, 렴태준, 김봉주, 김이훈, 손성필, 정두환, 정신혁, 렴국렬, 김성률.
4. 세기와 더불어에서 김일성의 언급
김일성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서도 김일성의 선생으로 나온다. 다만 기독교인으로 개신교 목사인 점과 신천 강씨로 강반석의 친척이라는 사실은 언급하지 않는다.나는 희망대로 강량욱선생이 담임한 학급에 편입되였다.
내가 칠골에 간것은 강량욱선생이 숭실학교를 중퇴하고 창덕학교에 취직한지 얼마 안되는 때였다. 선생은 학비를 댈수 없어 학교를 그만두었다고 하면서 못내 아쉬워하였다.
가난이 오죽 심했으면 선생의 부인(송석정)이 시집을 버리고 한동안 친정에 가있었겠는가. 부인의 부모들이 네가 인덕이 모자라 조강지처는 되지 못할지언정 가난에 진저리가 나서 지아비를 버리다니 그게 될말이냐, 조선사람치고 그만큼 가난하지 않은 집이 몇집이나 된다더냐, 그래, 시집을 가면 금방석에 앉아서 꿀물에 옥밥이라도 말아먹을줄 알았더냐, 일언이페지하고 당장 돌아가서 사죄하라고 엄하게 질책하여 부인을 시집으로 돌려보냈다고 하니 강량욱선생의 가세가 어느 정도였는가가 긴 설명이 없이도 짐작이 가리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선생의 부인을 《숙천아지미》라고 불렀다. 부인의 고향이 평안남도 숙천이였다. 내가 가면 《숙천아지미》는 매번 비지밥을 해주군하였다. 그 비지밥이 참으로 별맛이였다.
해방직후 나는 강량욱선생의 생일을 축하하러 갔다가 부인과 함께 창덕학교시절의 비지밥을 회상한적이 있었다.
사모님, 나는 지금도 칠골에서 사모님이 해주시던 비지밥 생각을 가끔 합니다. 그때 그 밥을 얼마나 맛있게 먹었는지 모릅니다. 20여년동안 타향살이를 하느라고 고맙다는 인사도 못했는데 오늘은 그 인사를 받아주십시오.
내가 이렇게 말하자 부인은 《가난때문에 쌀밥 한끼 변변히 대접 못하고 비지밥만 해드렸는데 감사하다고만 하시니 도리여 몸둘바를 모르겠습니다. 비지밥이 맛있으면 얼마나 맛있었겠습니까.》라고 하면서 눈물을 흘리였다. 그리고는 창덕학교시절에 장군님대접을 소홀히 한 봉창을 해드린다고 하면서 손수 지은 음식들을 차려주었다.
어느해인가 그 부인이 내 생일을 축하한다면서 《백화주》라는 자작술까지 보내주었다. 《백화주》란 백가지 꽃으로 만든 술이라는 뜻이다.
그 운치있는 이름때문에 류다른 호기심을 느끼면서도 나는 가볍게 잔을 들지 못하였다. 쌀밥 한끼 제대로 먹어보지 못하고 늘 시장기와 싸우던 부인의 지난날이 눈앞에 삼삼해서 좀처럼 잔을 들어올릴수가 없었다.
나라없는 민족의 슬픔을 뼈에 사무치도록 체험한 나에게는 고향에 있는 한대의 나무, 한포기의 풀, 한이삭의 곡식이 이전보다 몇갑절 더 소중해보였다. 그런데다가 강량욱선생이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부단히 고취하였으므로 나는 가정에서나 학교에서나 일상적으로 애국적인 영향을 많이 받게 되였다. 그때 선생은 학생들에게 애국심을 심어주기 위하여 원족이나 수학려행 같은것을 많이 조직해주었다.
해방후 강량욱선생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서기장과 공화국 부주석으로 일하면서 나와 사업상 접촉할 기회가 많았는데 우리는 창덕학교시절의 수학려행에 대하여, 우리가 본 정방산의 성불사와 남문루에 대하여 감회깊이 회상하군하였다.
창덕학교시절의 추억가운데서 또하나 잊혀지지 않는것은 강량욱선생의 창가수업이다. 창가시간은 우리가 제일 기대를 가지고 기다리는 인기시간의 하나였다.
선생은 전문가들을 무색케 할만한 희한한 고음성대를 가지고있었다. 그런 성대를 가지고 선생이 《전진가》나 《소년애국가》와 같은 노래를 부를 때면 온 교실이 숨을 죽이고 그 노래를 감상하군하였다.
돌이켜보면 선생이 배워준 창가의 선률들이 우리의 가슴에 애국적인 정서를 많이 부어주었다고 생각된다. 나는 그후 항일무장투쟁을 하면서도 창덕학교시절에 배운 노래를 종종 부르군 하였다. 그 시절에 배운 노래들은 지금도 가사와 선률이 그대로 고스란히 머리속에 남아있다.
1924년 가을철운동회때 이 음악유희를 무대에 올렸는데 공연도중에 순사가 운동장에 나타나 당장 걷어치우라고 야단을 쳤다. 자그마한 운동회를 하나 열려고 해도 경찰기관의 사전승인을 받아야 하고 설사 승인을 받았다고 해도 순사의 립회가 있어야 하던 세월이였다.
나는 강량욱선생을 찾아가 자기 나라의 산천을 사랑하며 노래하고 춤추는것이 무슨 잘못인가, 놈들이 뭐라고 하든지 공연을 계속하자고 주장하였다.
강량욱선생은 다른 교원들과 함께 순사의 부당한 처사를 규탄하고 《열세집》의 공연을 계속하도록 하였다.
우리와 같은 소학생들도 이처럼 강한 애국정신, 반항정신을 가지고있었으니 어른들이야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내가 칠골에 간것은 강량욱선생이 숭실학교를 중퇴하고 창덕학교에 취직한지 얼마 안되는 때였다. 선생은 학비를 댈수 없어 학교를 그만두었다고 하면서 못내 아쉬워하였다.
가난이 오죽 심했으면 선생의 부인(송석정)이 시집을 버리고 한동안 친정에 가있었겠는가. 부인의 부모들이 네가 인덕이 모자라 조강지처는 되지 못할지언정 가난에 진저리가 나서 지아비를 버리다니 그게 될말이냐, 조선사람치고 그만큼 가난하지 않은 집이 몇집이나 된다더냐, 그래, 시집을 가면 금방석에 앉아서 꿀물에 옥밥이라도 말아먹을줄 알았더냐, 일언이페지하고 당장 돌아가서 사죄하라고 엄하게 질책하여 부인을 시집으로 돌려보냈다고 하니 강량욱선생의 가세가 어느 정도였는가가 긴 설명이 없이도 짐작이 가리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선생의 부인을 《숙천아지미》라고 불렀다. 부인의 고향이 평안남도 숙천이였다. 내가 가면 《숙천아지미》는 매번 비지밥을 해주군하였다. 그 비지밥이 참으로 별맛이였다.
해방직후 나는 강량욱선생의 생일을 축하하러 갔다가 부인과 함께 창덕학교시절의 비지밥을 회상한적이 있었다.
사모님, 나는 지금도 칠골에서 사모님이 해주시던 비지밥 생각을 가끔 합니다. 그때 그 밥을 얼마나 맛있게 먹었는지 모릅니다. 20여년동안 타향살이를 하느라고 고맙다는 인사도 못했는데 오늘은 그 인사를 받아주십시오.
내가 이렇게 말하자 부인은 《가난때문에 쌀밥 한끼 변변히 대접 못하고 비지밥만 해드렸는데 감사하다고만 하시니 도리여 몸둘바를 모르겠습니다. 비지밥이 맛있으면 얼마나 맛있었겠습니까.》라고 하면서 눈물을 흘리였다. 그리고는 창덕학교시절에 장군님대접을 소홀히 한 봉창을 해드린다고 하면서 손수 지은 음식들을 차려주었다.
어느해인가 그 부인이 내 생일을 축하한다면서 《백화주》라는 자작술까지 보내주었다. 《백화주》란 백가지 꽃으로 만든 술이라는 뜻이다.
그 운치있는 이름때문에 류다른 호기심을 느끼면서도 나는 가볍게 잔을 들지 못하였다. 쌀밥 한끼 제대로 먹어보지 못하고 늘 시장기와 싸우던 부인의 지난날이 눈앞에 삼삼해서 좀처럼 잔을 들어올릴수가 없었다.
나라없는 민족의 슬픔을 뼈에 사무치도록 체험한 나에게는 고향에 있는 한대의 나무, 한포기의 풀, 한이삭의 곡식이 이전보다 몇갑절 더 소중해보였다. 그런데다가 강량욱선생이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부단히 고취하였으므로 나는 가정에서나 학교에서나 일상적으로 애국적인 영향을 많이 받게 되였다. 그때 선생은 학생들에게 애국심을 심어주기 위하여 원족이나 수학려행 같은것을 많이 조직해주었다.
해방후 강량욱선생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서기장과 공화국 부주석으로 일하면서 나와 사업상 접촉할 기회가 많았는데 우리는 창덕학교시절의 수학려행에 대하여, 우리가 본 정방산의 성불사와 남문루에 대하여 감회깊이 회상하군하였다.
창덕학교시절의 추억가운데서 또하나 잊혀지지 않는것은 강량욱선생의 창가수업이다. 창가시간은 우리가 제일 기대를 가지고 기다리는 인기시간의 하나였다.
선생은 전문가들을 무색케 할만한 희한한 고음성대를 가지고있었다. 그런 성대를 가지고 선생이 《전진가》나 《소년애국가》와 같은 노래를 부를 때면 온 교실이 숨을 죽이고 그 노래를 감상하군하였다.
돌이켜보면 선생이 배워준 창가의 선률들이 우리의 가슴에 애국적인 정서를 많이 부어주었다고 생각된다. 나는 그후 항일무장투쟁을 하면서도 창덕학교시절에 배운 노래를 종종 부르군 하였다. 그 시절에 배운 노래들은 지금도 가사와 선률이 그대로 고스란히 머리속에 남아있다.
1924년 가을철운동회때 이 음악유희를 무대에 올렸는데 공연도중에 순사가 운동장에 나타나 당장 걷어치우라고 야단을 쳤다. 자그마한 운동회를 하나 열려고 해도 경찰기관의 사전승인을 받아야 하고 설사 승인을 받았다고 해도 순사의 립회가 있어야 하던 세월이였다.
나는 강량욱선생을 찾아가 자기 나라의 산천을 사랑하며 노래하고 춤추는것이 무슨 잘못인가, 놈들이 뭐라고 하든지 공연을 계속하자고 주장하였다.
강량욱선생은 다른 교원들과 함께 순사의 부당한 처사를 규탄하고 《열세집》의 공연을 계속하도록 하였다.
우리와 같은 소학생들도 이처럼 강한 애국정신, 반항정신을 가지고있었으니 어른들이야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북한의 선전자료에 따르면 김일성은 해방 후 절대권력을 쥐게 된 다음에도 강량욱에게만은 반말하지 않고 깍듯하게 선생님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5. 관련 문서
[1] 할아버지 항렬이지만 나이 차이는 8살밖에 나지 않았다. 재당조카딸와 재당조카사위는 오히려 12살, 10살 연상이었다. 또한 재당조카사위의 남동생과도 고작 1살밖에 차이 안 난다.[2] 다른 이름은 '칠골'[3] 그의 딸 강반석은 김형직의 아내로 김일성의 외조부이기도 하다.[4] 하리교회는 6.25 전쟁 중 파괴되고 1989년 칠골교회라는 이름으로 재건된다.[5] 일제강점기 말기인 1945년까지도 조선의 문맹율은 75%였다. 일제강점기 조선에서는 중등교육까지만 받고도 초등교육 교사 노릇을 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6] 6.25 전쟁 때 파괴되었다.[7] 일제강점기 유명한 부흥사이자 목사였던 김익두는 해방 후 북한 정부에 협조하여 조선그리스도교련맹 총회장을 지냈지만 6.25 전쟁 중 북한 정부를 배신하고 국군·UN군을 지지하여 총살되었다. 그 아들이 김용식(축구인)이다.[8] 백두혈통은 최근에 생긴말로 김씨일가에 적용되지만 김일성의 부하 항일 빨치산 출신과 김씨일가의 친인척은 원래 백두산 줄기로 불린다.
분류
- 조선그리스도교련맹 중앙위원장
- 북한의 목사
- 신천 강씨
- 만경대구역 출신 인물
- 1904년 출생
- 1983년 사망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부주석
-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 조선사회민주당 중앙위원장
- 5기 중앙인민위원회 위원
- 6기 중앙인민위원회 위원
- 7기 중앙인민위원회 위원
- 1기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
- 2기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
- 3기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
- 4기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
- 5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 6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 7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 애국렬사릉 안장자
-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서기장
- 일제강점기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