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북한의 정치인.2. 생애
1924년 9월 24일, 평안북도 성천군의 빈농집안에서 태어나서 보통학교 졸업 이후 농사를 짓다가 목재소, 철도노동자로 일하였다고 한다. 1946년부터 교통성 산하 평양철도국에서 일하다가 1948년 6월, 철도성 정치국, 평양철도국 및 안주철도국에서 정치선전 일군으로 일했다.1954년 군당비서에 발탁되어 사업하기 시작, 1955년 12월에 중앙위원회 지도원이 되었다. 1957년 9월에 중앙당학교에 입학하여 1960년에 졸업하였으며 1962년 7월, 평안북도 인민위원회 위원장에 임명되었다. 1962년 10월, 3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 1963년 12월, 당시 아랍연합공화국이었던 이집트에 대리대사로 부임하였으며 1965년 2월에 특명전권대사로 승진, 가말 압델 나세르에게 신임장을 봉정하였다. 1967년 11월, 4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되었다. 1968년 6월, 김룡택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귀국하였다. 1962년에 김정일을 처음 만났는데 눈이 펑펑 쏟아지는데 갑자기 김정일을 알아보고 달려와서 김정일에게 자신이 이집트 대사로 임명된 사람이라고 아부를 하자 김정일이 그를 눈여겨보고 같이 사업을 잘해보자고 했다고 10분 정도 대화했다고 한다.[1] 귀국 후 1971년 8월, 조선체육지도위원회 부위원장에 임명되었다.
1972년 11월, 김정일의 눈에 들어서 당중앙위원회에 발탁, 선전선동부 제1부부장에 임명되어 김일성 우상화 및 김정일 세습 정당화를 위해 당사상사업에서 사업하고 1973년에 경제선동에 참여, 승리자동차 연합기업소 및 여러 주요 기업소 일군들을 독려하여 자동차를 더 많이 만들라고 일군들을 조졌다고 한다. 선전선동부에서 일하면서 김정일의 측근이 되었다. 그런데 한번은 항일 빨치산들을 모아놓고 사진을 찍는 자리에서 한 빨치산 여성이 병환에 걸려서 참석하지 못하였는데 리찬선이 참석자 명단만 보고 그 빨치산도 참석했다고 김정일에게 잘못된 보고를 올렸다가 김정일이 그 사실을 알고 그를 추궁하는 바람에 잠시 혁명화를 당했다고 한다. 그외에 북한 선전에 따르면 건강이 좋지 않아서 의식을 잃고 쓰러진 일이 있어서 1년간 요양하면서 운동을 하라는 지시를 받은 일도 있다고 한다.[2]
1977년 9월,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보선, 1978년 11월에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승진했다. 1980년 10월, 6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에 재선되었다. 1982년 4월, 김일성 칠순기념 김일성훈장을 받았다. 1982년 9월, 김일성의 중국 방문을 수행하였으며 1984년 11월,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으로 승진하였다. 80년대에 불어닥친 개인주의 열풍을 가혹하게 때려잡았다고 한다. 이후 80년대 후반 동유럽 사회주의가 무너지기 시작하자 당내 기강을 잡기 위해서 다시 사상전을 전개하였다.
1990년 4월, 전임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 겸 본부당 책임비서 리관필이 사망하자 후임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 겸 본부당 책임비서에 임명되어 막강한 세도를 자랑하였다. 김정일은 그를 매우 신뢰하여 자신이 개최하는 연회에 그를 부부동반으로 매번 초대할 정도였다. 하지만 이때 너무 많이 마신 술이 문제가 되었는지 병을 얻었고 김정일이 특별히 그를 외국에서 치료를 받을 수 있게 조치해주었다. 외국에 나가서도 외국 정세에 자료를 수집하여 보고하였다고 한다. 1992년 5월 2일, 오후 1시에 67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북한의 주장에 따르면 유언으로 "저는 저와 같이 친애하는 지도자동지의 크나큰 신임과 가르치심을 받으며 자라난 전사들이 저의 몫까지 합하여 순결한 동지적의리와 필승의 신념을 간직하고 영광의 날에나 준엄한 시련의 날에나 우리 혁명의 최고사령관이신 친애하는 지도자동지만을 진심으로 믿고 지도자동지께서 가리키시는 승리의 한길로 끝까지 나아가리라고 믿습니다."라고 마지막까지 김정일 후빨을 했다 카더라. 김정일이 직접 조문을 갔으며 당중앙위원회는 부고를 발표, "동지는 당 및 행정기관의 외교부문 등 여러 부문에서 사업하면서 당의 로선과 정책을 관철하기 위하여 적극 투쟁하였다. 동지는 다년간 중앙위원회의 중요한 초소에 있으면서 우리 당의 령도를 높이 받들고 당대렬을 조직사상적으로 공고히 하며 당의 두리에 광범위한 인민대중을 튼튼히 묶어세우기 위하여 정력적으로 사업하였다."라고 칭송하였다. 그의 후임으로 문성술이 본부당 책임비서 겸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에 임명된다.
이후 시신은 애국렬사릉에 안장되었으며 2016년 5월, 7차 당대회 개회사에서 김정은은 '조선로동당의 강화발전과 사회주의 위업의 승리를 위해 헌신적으로 투쟁한 충직한 혁명동지'의 한 사람으로 허담, 연형묵, 김중린, 허정숙, 김국태, 김용순, 김양건, 전병호, 박송봉, 리제강, 리용철, 강량욱, 리종옥, 김락희, 안달수와 함께 리찬선을 언급하였다. 김정은 시대에 김치구와 함께 좋은 대접을 받고 있다. 그의 생애를 기리는 연속소개편집물도 제작되었다.
3. 참고문헌
- 현성일, 북한의 국가전략과 파워엘리트: 간부정책을 중심으로(서울: 선인, 2007)
[1] 이때 북한의 선전이 웃긴데, 김정일이 상품 공급의 정형에 대해서 료해하고 있었다고 하면서 정작 당시 젊은 김정일을 알아보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생판 낯 모르는 젊은이가 상점에 들어와서 갑자기 이래라 저래라 훈계를 하는 모양새가 된다. 그리고 리찬선은 그를 어떻게 알아봤겠는가?[2] 여담으로 해당 운동이 계단 오르내리기인데 이한영도 회고록에서 김정일이 한동안 계단 오르내리기 운동을 열심히 했었다고 적은 바가 있다. 2022년 8월 4일자 로동신문에 실린 리찬선 관련 기사에서 김정일이 "오늘부터 자신과 함께 계단훈련을 하자"라고 김정일도 계단 운동을 했음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