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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2-13 00:33:22

리송운



1. 개요2. 생애3. 매체에서4. 참고문헌

1. 개요

한국독립운동가이자 북한의 정치인. 갑산파의 일원이었다.

2. 생애

일제감시카드에 따르면 1910년 2월 24일, 함경북도 성진군 학성면 수사동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박금철의 회유를 받고 김주찬, 한윤득 등과 함께 한인민족해방동맹에 가입했으며 물자 획득과 방화를 담당하여 김일성의 보천보 전투를 도왔으나 일제가 국내 조국광복회를 소탕하려 한 혜산사건에 연루되어 체포, 10년형을 선고받았으나 해방 이후 석방되어 월북, 원산시당 위원장으로 사업하였으며, 1948년 3월 2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1952년, 불가리아에 조선로동당 대표단장으로 파견되었으며 1953년 12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검사총장에 임명되었다.

1955년 12월, 최용건, 조성모, 방학세, 림해, 김익선 등과 함께 박헌영의 사형을 선고하였다. 1956년 2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검사총장에서 해임, 조성모에게 자리를 물려주었다. 이후 박금철의 선동으로 고려인 공격에 앞장선 평양시 당위원장 고봉기가 황해남도 당위원장으로 좌천당하자 후임 평양시 당위원장으로 이임했으며 1956년 4월, 3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에 재선되었다. 조선로동당 1956년 9월 전원회의에 출석, 8월 전원회의 결과의 정당성을 강변하였다. 1957년 9월, 2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및 상임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이후 반종파 운동을 적극 전개하면서 반 김일성 세력 숙청에 앞장섰다. 1958년 9월 7일, 강량욱, 강영창, 김두삼, 김회일, 리기영, 리일경, 리천호, 리희준, 백남운, 정두환, 진반수, 최철환, 한설야와 함께 공훈이 있는 국가기관, 정당, 사회단체 지도일군으로 선정되어 국기훈장 1급을 받았다. 1958년 11월, 류경수 장의위원을 지냈다. 1960년 1월, 서철, 김익선, 김경석과 함께 최창익, 박창옥, 고봉기 등을 사형에 처하고 박의완에게 10년형을 선고하였다. 이로 인해 김일성으로부터 종파분자들을 잘 청소했다고 칭찬받았다.

1960년 2월, 주소 북한 대사에 임명되면서 평양시 당위원장 자리를 리효순에게 물려주고 3월에 소련에 부임했다. 김일성은 리송운이 "겸손하고 당에 충실한 사람, 혁명적인 반일지하투쟁 참가자"라고 칭찬하면서 그가 소련대사에 임명된 이유가 고혈압으로 건강이 좋지 않기 때문에 요양하기 위해서라고 설명했다. 1961년 9월, 4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에 재선되었으며 1962년 3월, 최고인민회의 3기 대의원에 재선되었다. 1961년 10월, 김일성의 소련 방문을 수행하였다. 초기에는 리효순보다도 무게감이 있었으나 뒤에 가서는 주요 장례식에 장의위원에 위촉되지 못하는 등 정치적 위상이 리효순에 밀려 과거보단 대단치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1964년 1월 25일, 김병식에게 소련대사 자리를 물려주고 귀국, 허석선의 뒤를 이어 다시 평양시 당위원장에 임명되었으며, 1965년 12월, 서채순 장의위원을 지냈다. 1966년 9월 30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리국진의 뒤를 이어 다시 검사총장에 임명되었다. 후임 평양시 책임비서로는 김동규가 임명되었으며, 리국진은 최고재판소 소장으로 이동하였다. 하지만 1967년 5월, 조선로동당 4기 15중전회에서 갑산파가 몰락하면서 같이 쓸려나간 것으로 보인다.

3. 매체에서

4.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