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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천보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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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천보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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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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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0c0ff,#00003f> 보천보 전투
普天堡戰鬪
Battle of Pochonbo
날짜 1937년 6월 4일
장소 함경남도 혜산군 보천면 보전리 주재소
교전세력 파일:동북항일연군기.png 동북항일연군
파일:red.png 재만한인조국광복회
파일:일본 제국 국기.svg 일본 제국
지휘관 파일:동북항일연군기.png 김일성
병력 항일군
동북항일연군 90여 명
재만한인조국광복회원 80여 명
주재소 주재원
순사 3명
보조원 2명
추격 경찰대
30명
피해규모 주재소 공격 당시
없음
경찰대 충돌 당시
사망 25명, 부상 30명(일본 측 주장)
사건 이후
검거 739명, 기소 188명
주재소 민간인
사망 2명[1]
추격 경찰대
사망 7명[2], 부상 14명
결과 보천보 주재소의 일시적 혼란
영향 일본 제국의 검거 및 탄압에 의한 동북항일연군 세력 와해
한국 독립운동 세력에게 만주의 항일운동이 알려짐
'김일성'의 이름이 알려짐

1. 개요2. 배경3. 결과4. 의의
4.1. 영향
5. 북한에서의 왜곡과 과대평가6. 논란7. 기타
7.1. 신문
8.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일제강점기였던 1937년 동북항일연군 90여 명과 한국의 재만한인조국광복회 80여 명 등 약 170여 명이 압록강을 건너서 함경남도 혜산군 보천면 보전리 주재소(지금의 파출소)를 기습 공격하여 일시 점령했다가 퇴각한 사건. 오늘날 북한에서는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에 대한 대표적인 사례로서 언급, 연구되고 있다.

2. 배경

김일성은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2군 6사 사장 직책을 맡고 있었다.[3] 김일성이 장백현에 6사 조직과장 권영벽을 정치공작원으로 파견한 것은 같은 해 9월이었다. 갑산군에서는 1935년부터 공작이 시작되었는데 이 지역의 적색농업조합 활동에 참여하던 박달김일성과의 연락을 모색하고 있었다. 따라서 박달과 김일성의 연계는 순조롭게 이루어졌다.[4] 한편 김일성은 권영벽과 장증렬 등 요지로 파견한 공작원들로 하여금 중공 동만특위 장백현 정치공작위원회를 조직하게 했는데 권영벽이 회장을 맡았다. 아울러 ‘재만조선인조국광복회’ 공작위원회와 당세포, 생산유격대 조직이 신속하게 이루어졌다.[5]

1937년 3월에 열린 장백현 서강양목정자회의는 압록강을 건너 국내 진공 작전을 논의하기 위한 것이었다. 동북항일연군 제4사와 6사·2사가 합동으로 전개하기로 한 이 진공작전에서 유일한 한인 단위부대장으로서 장백근거지를 건설한 김일성이 작전의 주도권을 잡았다.

동북항일연군 6사는 장백현 쪽에서 함경남도 혜산군 보천면을 공격하고 나중에 2·4·6사는 백두산 서남쪽의 간삼봉에서 만나자고 했다. 이 시기에 함경북도 무산군으로 진출하여 일경의 주재소를 파괴한 제4사의 활동은 ‘최현’의 활약으로 알려져 최현의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6]

김일성을 국내외적으로 유명하게 만든 ‘보천보 전투’는 1937년 6월 4일 밤부터 전개되었는데 동북항일연군 2군 6사의 국내 진입에 ‘조선민족해방동맹’ 지부 조직이 호응하여 이루어졌다. 무산으로 진출한 최현의 4사가 포위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김일성은 국내 진공과 4사 지원이라는 2가지를 동시에 수행할 수 있는 거점으로 보천보를 습격하였다고 한다.

3. 결과

습격자들은 상대적으로 방비가 허술한 보천보 주재소를 공격했는데 동북항일연군 90여 명, 내응한 국내의 재만한인조국광복회원 80여 명 등 항일세력 170여 명이 동원되었다.

습격 당시 주재소에는 일제 경찰은 셋, 조선인 보조원이 둘 있었다. 170여 명이 맹렬한 공격을 펼쳤으나 멀리서부터 기관총 사격을 하면서 진격하는 바람에 상황을 파악한 주재소 내 5명 모두 도주에 성공했다. 결국 순사의 딸인 2살배기 여아 1명(야네 에미꼬)과 주재소의 일본인 민간 요리사 1명이 유탄(빗나간 탄환)에 맞아 죽고[7] 공격 후에 주재원 5명의 무장(소총 5정, 총탄 수백 발)을 탈취했다.

목적 자체가 선전에 있었던 만큼 전술 면에서 큰 성과는 없었으며 보천보 점령 후 토벌군이 본격적으로 오기 전에 허둥지둥 보천보를 빠져나갔다. 일본 측 기록에 의하면 다음 날 경찰대가 추격하는 중 교전하여 일본 측은 사망자 7명, 부상자 14명이 발생했으나 동북항일연군 측 피해자는 수십 명이었다.

전투를 마치고 철수하던 동북항일연군 6사는 추격 일본군 부대와 교전하여 큰 피해를 입힌 후 장백현의 밀영을 거쳐 2사, 4사와 합류하여 간삼봉에 도착했다. 큰 충격에 빠진 일본군은 조선인 김인욱 소좌가 지휘하는 함흥 제74연대를 출동시켜 추격하도록 하였는데 동북항일연군 3개사 연합군은 간삼봉에서의 교전을 통해 6월 30일 이 부대의 추격을 저지했다. (간삼봉 전투)[8]

일본군은 보천보 전투의 결과에 매우 놀라 그 다음해부터 동북항일연군에 대해 대토벌작전을 벌였다. 1939년부터 일본군, 만주군 등 70여만 명을 동원하여 토벌에 나서고[9] 그 결과 동북항일연군은 이 작전으로 대부분이 전사하거나 생포되었고 김일성을 비롯한 생존 병력들은 그해 1940년부터 1942년까지 소련 영역으로 탈출함으로써 만주에서의 무장투쟁이 종료되었다.[10] 보천보 전투에 도움을 주었던 조국광복회에 대해서도 대대적인 검거에 나서 조국광복회 조직은 이 사건으로 739명이 검거되었고 188명이 기소돼 조직이 궤멸되는 위기를 맞았다.(혜산사건) 와다 하루키의 북한 현대사

4. 의의

훗날 6.25 전쟁으로 한국을 침략하면서 보여준 김일성의 성향과 상당히 비슷한 면이 이 전투에서 나왔다.

국경의 작은 읍인 보천보 습격 자체는 커다란 군사적인 성과를 거둘 수 있는 곳이 아니지만 이 작은 마을은 혜산에서 20km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변경으로 이곳을 습격한다는 것은 상당한 선전 효과를 볼 수 있는 곳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인 학자 와다 하루키(和田春樹)의 평가에 따르면 파르티잔 부대로서는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만족을 얻을 수 있는 곳이었다.[11] 즉, 실질적 군공 거리는 전혀 없으면서 명성은 비교적 크게 얻을 수 있어 가성비가 좋은 곳이다.

한반도에서 무장 독립운동의 명맥은 이미 1909년 남한 대토벌 작전 이후 거의 끊어졌고 만주 지역의 항일세력도 자유시 참변만주사변 등을 거치면서 보천보 전투가 일어난 1937년경쯤 되면 만주지역 조선인 항일세력이 사실상 소멸하고 30년 가까운 일제의 식민지배는 매우 견고해 일제가 상당히 기세를 높임에 따라 독립운동 세력에서도 조금씩 패배감과 비관주의가 감도는 시점이었다. 1937년 4월 말 식민지 조선에서 가장 활발하게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이재유가 검거되자 조선총독부는 "이제 식민지 조선에서 독립운동은 사라졌다."고 대대적으로 선전하기도 하였다. 즉, 그러한 상황에서 이 사건이 터졌고 그 파급력이 무시하지 못할 수준이었다는 것이다.

이 전투는 한반도의 끄트머리를 조선인 항일세력이 습격했다는 소식을 알려 일제의 지배력이 완벽하지 않음을 드러내 다른 여러 독립군 세력과 조선인들에게 희망을 심어주는 공을 세웠고 당시 상황에서는 이런 해프닝에 가까운 사건이라도 큰 의미가 부여될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간삼봉 전투 등 이후의 반응이 이 사건이 큰 의미가 있었음을 증명한다. 이후에도 김일성을 토벌하려고 여러 차례 교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때문에 한국의 한국사 교육에서도 국내를 침투한 전투라며 의의를 언급하고 넘어간다.

김일성 본인 역시 보천보 전투에 대해 군사적 성과보다는 정치적 의의를 강조하였다.
보천보전투는 대포도 비행기도 땅크도 없이 진행한 자그마한 싸움이였다. 보총과 기관총에 선동연설이 배합된 평범한 습격전투였다. 사상자도 많지 않았다. 우리측으로 볼 때에도 전사자는 없었다.
너무나도 일방적으로 진행된 기습전이여서 어떤 대원들은 오히려 아쉬워할 지경이였다. 그러나 이 전투는 유격전의 요구를 최상의 수준에서 구현한 전투였다. 전투목표의 설정과 시간의 선택, 불의의 공격, 방화를 통한 충격적인 선동, 활발한 선전활동의 배합 등 모든 과정이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립체적으로 맞물린 빈틈없는 작전이였다.
전쟁이나 전투의 가치는 군사적의의에 의해서만 규정되는것이 아니라 그 정치적의의에 의해서도 규정된다. 전쟁이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의 연장이라는것을 알고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것을 어렵지 않게 리해하리라고 믿는다. 이런 리치로 볼 때 우리는 대단히 큰 싸움을 치르었다고 말할수 있다.
보천보전투는 조선과 만주대륙에서 아세아의 제왕처럼 행세하던 일본제국주의자들을 보기 좋게 후려친 통쾌한 전투였다. 인민혁명군은 조선총독부당국이 치안유지가 잘된다고 장담하던 국내에 들어가 한개 면소재지의 통치기관들을 일격에 소탕해버림으로써 일본제국주의자들에게 커다란 공포를 주었다. 일본인들로서는 청천벽력과 같은 타격을 받은셈이였다. 《후두부를 꽝 하고 강타를 당한것 같다.》느니, 《천날동안 베여들인 새초를 한순간에 태워버린듯한 한을 남겼다.》느니 하는 당시의 군경 당사자들의 고백자체가 그것을 반증하고있었다.
세기와 더불어 2권 175쪽
즉, 후술할 과대 왜곡과 달리 보천보 전투 자체에서 큰 전과를 거두었다는 주장은 90년대에 직접 부인하였고 '작은 싸움'이라고 자서전에서 인정했다.

4.1. 영향

이 사건이 영향력을 지니게 된 데는 동아일보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사실 사건 자체만 보면 민간인과 여아 1명이 희생된 해프닝에 가까운 사건이었는데 이를 대서특필하면서 호외기사[12]를 내보냈다. 총독부의 보도통제를 슬쩍 우회하는 편법을 썼기 때문이다. 항일세력을 '비적'으로 칭하는 총독부의 방침을 따르면서도 김일성이라는 누가 봐도 조선인의 이름을 중간 제목에 박아 버려 겉으로는 비적 떼라고 알리면서 조선인들에게 소멸된 줄 알았던 조선인 항일세력이 만주에 존재하고 잠깐이나마 한반도에 진입했다고 대문짝처럼 광고한 것이다. 1937년 6월 5일 동아일보 호외 기사

이 사건으로 김일성의 이름은 조선 전역에서 유명해졌는데 일제 말 삼천리 잡지에서 김일성의 행적 및 신원에 대해 직접 취재 및 주변인들 인터뷰까지 했을 정도였다.# # 결7호 작전을 위해 제주도에 파견된 육지인들이 섬 사람들에게 김일성에 대한 소문을 전해 주었다는 증언 채록도 존재한다. 해방 직후 중도우파 성향 잡지사 <선구>에서 창간기념으로 1945년 11월 여론조사를 하였는데 여기서 김일성이 군무부장에 1위로 조사된# 사례를 보더라도 김일성의 명성은 상당했다. 중도파 여운형사회주의 독립운동 노선과 척을 진 김구도 이 사건에 주목했을 정도다. 당시 여운형조선중앙일보 폐간 이후 검소한 생활을 유지하느라 금주, 금연하고 있었는데 보천보 전투 소식을 듣고 동네 사람들을 모아서 잔치를 벌였다고 한다.
“… 7년 전(1943)에 나는 남선(南鮮)의 어떤 소학교 6학년생과 중학교 2학년생을 모아놓고 강연을 한 후, ‘제군은 현재 누가 가장 위대하다고 생각하고 있는가. 정직하게, 절대로 두려워하지 말고 무기명으로 투표해 보라’고 말하면서 안심을 시킨 후 투표해 본 결과 놀랍게도 그들 중 67%가 김일성이라고 쓰고 있다”(鎌田澤一郞(카마다 사와이치로), 『朝鮮新話』(조선신화) 2, 창원사, 1950, 384쪽).[출처]
보천보 전투로 얻어진 김일성의 명성은 당시로는 엄청난 것이었다. 강대한 일제 치하에서 순응하던 조선인들에게 보천보를 일제 치하에서 탈환한 소위 김일성 장군에 대한 기대는 “솔방울수류탄을 만들고 나뭇잎으로 두만강을 건너며 축지법을 쓴다"는 비현실적인 이야기[14]까지 퍼질 정도로 대단하였다. 김일성은 여기에서 얻어진 명성을 발판으로 해방 후 쟁쟁한 빨치산 선배들을 제치고 북한을 장악했다.

5. 북한에서의 왜곡과 과대평가

파일:19-A-.png

북한에서는 김일성 우상화 차원에서 이 전투를 그야말로 신화로 포장한다.[15] 일본군 수천 명을 섬멸하고 골짜기마다 일본군 시체가 산처럼 쌓였다는 보천보 신화를 떠든다. 북한 영화 <내가 본 나라>에는 하도 일본군이 많이 죽어서 시체를 호박이라 속여서 날랐다나 뭐라나. 물론 당연히 거짓된 우상화다. 모 탈북자는 자신이 탈북하기 전까지 보천보 전투는 김일성이 200명도 못 되는 병력으로 수십만 대군을 격파한 대전투로 잘못 알았다고 하지만 사실 이는 북한에서 진짜로 이런 식으로 가르쳤다기보다는 북한에서 보천보 전투에서 일본군 몇 명을 죽였는지를 구체적으로 알리지 않아 '위대한 전투라고 하니 이런가 보구나'하고 착각했을 가능성이 더 높긴 하다. 후술하듯 북한에서도 보천보 전투에서 김일성이 일본군 수십만을 무찔렀다는 식의 주장은 전혀 하지 않고 오히려 엄청난 대군과 싸운 것은 아니라는 듯한 암시를 하기도 한다.

물론 이렇게 과대평가된 부분은 김일성 본인도 저서에서 부정한 내용이지만 모든 북한의 예술작품은 김일성이 통제할 수 있기 때문에 사실 뒤에서 김일성 자신이 조장했을 가능성은 대단히 높다. 특히 조기천처럼 황당한 과대평가를 한 사람은 김일성이 아주 좋아하기도 했다.

이 사건을 다룬 다른 작품으로는 북한 시인 조기천의 장편 서사시 <백두산>이 있다.
(중략)
이는 이름만 들어도 / 삼도 왜적이 치 떠는 / 조선의 빨찌산 김 대장!
이는 장백을 쥐락펴락하는, / 태산을 주름잡아 한 손에 넣고 / 동서에 번쩍!
천리허의 대령도 단숨에 넘나드니 / 축지법을 쓴다
(후략)
- 조기천 <백두산>
보천보 전투를 묘사하고 김일성을 우상화해 북한 정권이 아주 좋아하는 작품이다. 북한 정권 수립 전인 1947년에 썼는데 김일성이 조기천을 칭찬하고 서사시 창작 중 따로 면담도 하였으며 결국 북한에서 <시인 조기천>이라는 영화도 만들었다. 내용을 보면 어째 장군님 축지법 쓰신다를 복붙한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그 노래가 이 시에서 나온 게 맞다.

‘간삼봉에 울린 아리랑’ 등의 노래로 우상화되기도 했다.

세기와 더불어 같은 김일성의 자서전에는 대단한 전투가 아니라는 듯한 김일성의 발언이 있지만 정작 북한에서는 이 전투가 항일운동의 전부인 것마냥 여전히 역사 왜곡을 하고 있다. 혜산시보천보전투승리기념탑은 현재도 중요한 우상화 근거 기념물이며 보천보 전투 등에 동원된 부대로 중국공산당의 조직인 동북항일연군이 아니고 조선인민혁명군이라는 김일성이 직접 만들었다는 가짜 군대를 들면서 이 부대가 심지어 해방 당시 일본군까지 소탕하여 조국의 광복에 기여하였으며 그 부대는 현재의 북한군인 조선인민군이 되었다고 역사 왜곡을 한다.[16][17] 정확히는 아래처럼 묘사한다.
면사무소,우편국,산림보호구,소방회관을 비롯한 적통치기관들에서 삼단같은 불길이 솟구쳐올랐다.
정치공작원들은 위대한 수령님께서 몸소 작성하신 《포고》와 《조국광복회 10 대강령》[18] 을 거리에 불이고 선전물을 뿌리면서 정치사업을 하였다.
(…)
경애하는 수령 김일성[19]대원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그 의의는 일본놈들 몇명 죽인데 있는것이 아니라 조선사람이 죽지 않고 살아있으며 일본제국주의와 싸우면 승리할수 있다는 신념을 북돋아주는 혁명의 서광을 비쳐준데 있습니다.》
보천보전투가 가지는 의의는 일본놈을 몇명 죽인데 있는것이 아니라 조선사람은 죽지 않고 살아있으며 일제와 싸우면 반드시 승 리할수 있다는 신념을 북돋아준데 있다.[20]
보천보에서 녹아난 일제는 참패를 만회해 보려고 부랴부랴 주변에 있는 수많은 군대와 경찰을 긁어모아가지고 조선인민혁명군[21] 주력부대를 추격해 왔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대원수님께서는 추격해오는 적들을 커우위수이산(구시산)과 지엔싼봉(간삼봉)에서 모조리 소탕해버리시였다.[22]
보천보전투후 조선인민혁명군 주력부대가 커우위수이산에 이르렀을 때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적들이 뒤쫓아오리라는것을 미리 예견하시고 부대에 전투준비를 철저히 갖추게 하시였다.
얼마후 적들이 커우위수이산으로 공격해왔다.
(…)
조선인민혁명군 대원들은 위대한 수령님의 지휘밑에 고지에로 기여오르는 적들에게 무리죽음을 안기였다.[23]
이날 전투에서 겨우 살아 도망친 놈들은 200명정도밖에 안되였다.[24]
적들은 제놈들의 시체가 어찌나 많았던지 그대로 가져갈수 없어 대가리만 잘라 마대나 상자에 넣어 실어갔다.
그때 시체운반에 동원되였던 달구지군이 모르는척하고 일제놈에게 마대 안에 넣은것이 무엇인가고 묻자 호박이라고 대답하여《호박대가리》이야기가 세상에 널리 퍼지게 되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대원수님 혁명력사 (중학교 제 4 학년용) p.81~82 , 2012년

6. 논란

김일성이 사장(지휘관)으로 있던 동북항일연군 2군 6사가 보천보를 공격하여 일부 전과를 올린 점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으나 실제로 김일성이 보천보 공격을 이끌었는지에 대해서는 일부 이견이 있다.

7. 기타

7.1. 신문

파일:external/archivenew.vop.co.kr/03105320_63.jpg
* 위 이미지는 1998년 10월 동아일보 취재단이 평양을 방문했을 때 북한 측에 선물한 것으로, 동아일보의 보천보 전투 대서특필 호외보도(1937년 6월 5일)를 황금으로 뜬 금형이다. 원본은 평양김정일선물관[29]에 있다. #
탈북자주성하 기자의 증언에 따르면 김일성이라는 이름 석 자를 전 조선에 널리 광고해 준 덕분에 북한에서 동아일보의 이미지는 매우 좋다고 한다. 그래서 보천보 전투 선전 때문에 북한 주민들이 유일하게 이름을 알고 있는 대한민국 신문이 바로 동아일보라고 한다.
보천보 주재소를 습격하는 동시 다른 일대는 각지와의 전화선을 절단하고 우편소 면사무소 삼림보호구사무소 등에 방화하는 일방 약 백여 호의 촌락을 포위하고 약탈을 마음대로 하다가 한 시간만에 대안으로 도주한 사건이 돌발하야 보천보 촌락의 천여 명의 주민은 공포에 떨게한 소위 제이동흥사건[30]을 일으키었다.
동아일보, 1937년 6월 8일자.
* 당시 일제 치하에서 신문이 김일성에 대해 다루려면 비적으로 취급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김일성을 비적으로 규정한 당시의 신문 기사는 보천보 사건 한 해 전에도 존재했다. 예컨대 조선일보1936년 10월 4일김일성이 40여 명과 함께 스류다오거우(十六道溝)라는 작은 마을에 사는 박흥룡이라는 조선인 농부의 집을 습격하여 소와 곡식을 가져갔다는 기사를 실었다. 그 밖에도 당시 김일성의 활동에 관한 보도들은 대부분 그를 비적으로 다루면서 그의 약탈 행위를 규탄하는 내용이 주를 이뤘다.#

8. 관련 문서


[1] 요리사 하네 코사부로(羽根小三郎) 향년 35세, 에미코 향년 2세[2] 카네키요 이와오 순사(兼淸岩男, 25세), 타노구치 마사하루 순사(田野口正治, 29세), 이누이 후이츠 순사(戍亥淸一, 27세), 히라오 신지 순사(平尾信二, 28세), 오카베 요로즈키 순사(岡部萬記, 25세), 조연진 순사(趙然軫, 36세), 황진식 순사(黃辰植, 33세)[3] 한편 북한에서는 그가 1936년 말 광복회 조직의 구축에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고 주장하지만 이것은 한국에서 거짓으로 평가받는다. '조국광복회'는 실존하였지만 전광 등이 창설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조직이라는 것이다. #[4] 강덕상/미촌수수 편 "현대사 자료" 30권 283쪽[5]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51권, 독립기념관, 275p.(5장 3절 동북항일연군 제1군 6사의 활약 - 보천보전투와 간삼봉전투)[6] 이 일은 후에 북한에서 김일성이 주도한 '무산지구전투'로 왜곡되어 김일성이 이끌었다는 전투 중 보천보 전투 버금가는 위상의 전투로 선전되고 있다. 자세한 것은 대홍단군 문서 참조.[7] 한홍구 교수의 저서 <대한민국史>에서 상세히 묘사된다. 부대원들이 총을 쏘는 와중에 엎드린 순사 부인이 등에 업은 아기에게 유탄이 맞았다. 이 외에도 술꾼이 나오다가 유탄에 맞았다고 한다.[8] 북한에서는 후술하듯 이 전투의 일본군 전사자가 1,800명(...)이라고 주장하지만 당연히 사실이 아니며 일본 측의 기록에 따르면 전사자 5명에 중상자 1명, 그 외에 경상자가 다수 있었다고 한다. 사상자를 고의로 축소 은폐했을 가능성이 있지만 그래도 '5명'과 '1,800명'은 지나치게 큰 차이가 난다. 애초에 조선인 소좌가 지휘하는 연대라면 국군 후방부대처럼 정원 수가 매우 적어 네 자릿수의 병력을 지휘하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었을 것이다. 보통 연대 밑 대대장의 계급이 중령 정도임을 생각해 보자.[9] 북한 측에서는 이를 위해 동원한 병력을 100만으로 과장하며 그마저도 김일성이 이끌었다고 주장하는 조선인민혁명군 토벌을 위해서만 동원한 것으로 선전한다.[10] 1938년 가을에는 10만 병력을 투입하여 동변도(東邊道) 지구를 포위하였고 ‘3개성연합대토벌’도 일으켰다. 대규모 토벌작전의 효과는 매우 컸다. 1940년을 전후하여 남만과 동만의 동북항일연군은 거의 괴멸되었고 북만의 제3로군 일부만 명맥을 유지했다. 1940년 말의 병력 규모는 1,500명 정도였다고 한다.[11] 독립기념관에서 펴낸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제51권에서 축약[12] 당시 동아일보 특파원 기자였던 양일천이 김일성을 인터뷰한 기사와 보천보 사건의 기사를 작성하였다. 동아일보 혜산진 지국장을 역임했던 양일천은 30년대 후반까지 만주에 거주하면서 많은 중국 유력자들과 교류하였고 이후 국내에 들어와 해방을 맞이하였다. 해방 당시 일제 감옥에 있다가 풀려났는데 이때의 고문 후유증으로 이듬해인 1946년 사망하였다. 해방 후 천도교 측에서 활동하다가 이념에 의해 분열된 정치 상황에 회의를 느끼고 천도교 측과도 거리를 두었으며 최현배 등 국문학자들과 교류하였다. 양일천은 언론인으로서 김일성의 인터뷰 기사, 보천보 사건의 기사를 개재하였으며 이 사람이 조국광복회 비밀결사 요원이었다고도 전해지지만 그의 행보로 보았을 때 만주에서의 활동이 김일성 조직과 연결되어 있다는 해석에는 무리가 있다. 비밀결사 요원이었다는 위의 주장은 성공회대 한홍구 교수의 기고문에서 나왔으나 그에 대한 근거는 없으며 단순한 학자의 추론에 불과하다.[출처]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제51권 '1930년대 만주지역 항일무장투쟁' 주 72. 독립기념관 퍼냄[14] 김일성뿐 아니라 심남일이나 전해산 같은 의병장들도 일본군과 몇 차례 승리하면서 대중들은 이들이 도술을 부린다는 이야기를 만들었다. 실제로 이를 믿었다기보다는 그랬으면 좋겠다는 희망사항이었다.[15] 가랑잎 타고 두만강을 건너고, 솔방울로 수류탄을 만들고, 웃통을 벗고 모래밭을 구르니 모래가 이 되었다는 전투가 이것이다.[16] 다만 김일성의 자서전 "세기와 더불어"에는 "중국 동북지방에서 활동할 때에는 동북항일연군이라고 하였고, 조선 사람들이 많은 곳에 가거나 조선에 나와서는 조선인민혁명군이라고 정황에 맞게 이름을 바꾸어 가며 활동했다."고 서술되어 있다.[17] 그런데 조선인민혁명군 자체가 아예 존재한 적조차 없지만 자신은 부대에 입대한 것이 아니고, 아예 자기가 부대를 창설했다면서 어떻게든 동북항일연군이라는 진실을 섞으며 사실처럼 보이려고 안간힘을 쓰던 것이다. # 자신이 만주 지역 조선인들의 독립운동을 모두 지휘했다는 주장이다.[18] 김일성은 저런 글을 쓴 적조차 없다.[19] 북한의 모든 문서에서는 국가원수의 이름을 볼드체로 표기한다.[20] 비슷하게 북한에서 보천보 전투 버금가는 위상의 전투로 평가하는 '무산지구 전투'는 "적들이 전멸당했다고 선전하던 조선인민혁명군이 건재할 뿐 아니라 오히려 더욱더 강대한 역량으로 자라나 일본제국주의자들에게 계속 철추를 내리고 있다는것을 실지로 보여준 전투"로 자찬하고 있다. 그러나 이 전투는 실제로는 김일성의 최측근 최현의 전공을 훔친 것이다. 자세한 것은 대홍단군 문서 참조.[21] 사실은 보천보 전투를 이끈 부대는 김일성이 만들었다고 하는 이 부대가 아니고 동북항일연군이다.[22] 간삼봉 전투를 묘사하는 내용인데 이 대목에서 김일성 자신이 일본군을 소탕했다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 주성하 기자는 전광이 이끈 전투로 파악한다. #[23] 이 이후부터 완전한 거짓말이다.[24] 일본측 2,000 명 중 1,800명이 전사했다는 뜻이다. 1:10으로 싸웠는데 1 쪽에게 10 쪽의 90%가 몰살당했다고 왜곡한 셈이다.[25] 원래 상대의 겉모습만 보고 나이대를 추정하기는 매우 어렵다. 노지에서 험한 생활을 하던 유격대원들은 행색이 겉늙어 보이기 쉬웠다. 더군다나 보천보 전투처럼 밤에 횃불에 비친 모습으로는 더더욱 정확한 판단이 어렵다.[26] 해당 에피소드는 김두한이 만취 상태로 뭉치패의 습격을 받아 조직이 뿔뿔이 흩어져 피신한 상황이었다.[27] 다만 결과적으로 동북연안군의 궤멸을 가져왔기에 독립운동 성과적 의미보다는 과대포장된 김일성 자기홍보에 더 큰 효과를 봤다는게 의미라면 의미인게 문제.[28] 한국인 헌병보조원의 밀고로 발각되어 70여 명의 주동자가 붙잡히고 말았다. 1945년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최고 8년에서 3년까지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8.15 광복과 동시에 출옥하였다.[29] 김정일이 집권했을 당시 타국으로부터 받은 선물들을 전시하는 전시관[30] 이홍광이라는 다른 인물이 동흥읍, 북한에서 김형직군의 일환으로 관리되는 지역의 국경지대를 습격한 사건으로 일본측 사상자는 보천보 전투보다 많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