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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독립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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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독립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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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orean Independence Army

1. 개요2. 배경3. 편제4. 무기 및 복장5. 한중 연합 작전6. 주요 전투7. 논란8. 해체9. 여담

1. 개요

파일:한국독립군 진군기.svg
군기

지청천이 중심이 되어 지린성, 헤이룽장성 등 북만주에서 활동하던 독립군을 말한다.

한국독립당(임시정부)와 이름은 같지만 전혀 다른 별개의 정당인 한국독립당(1930년)의 당군이 한국독립군이다.

1935년에는 중국 난징에서 김구한국국민당(1935년)[1]을 제외한 중국 내의 한인 정당들이 민족혁명당[2]으로 통합[3]되었고 김원봉의열단계의 독주로 한국독립당(1935년)조선혁명당(1937년)으로 이탈하여 1938년 중국 창사에서 한국국민당(1935년)과 3당 합당을 하여 충칭 중화민국에서 한국독립당(1940년)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여당으로 거듭난다.(이 시기엔 민족혁명당이 야당이 된다.)

따라서 북만주 한국독립군의 후신은 남만주의 조선혁명군과 함께 1940년 9월 17일에 창설된 한국광복군이 된다.

2. 배경

1931년 9월 18일 만주사변이 발발하자 한국독립군11월 2일 지린성 따시허즈(大石河子)에서 긴급 중앙회의를 개최한다. 일제의 침략전쟁에 대하여
① 각 군구에 총동원령을 내려 군사행동을 개시할 것
② 당내 일제의 공작을 군사방면에 집중할 것
지린성 항일군사 당국에 특파원을 파견하여 한중합작을 상의할 것

등을 결정하였다.[4] 그리고 11월 10일에 각 군구에 총동원령을 내려 장병 소집과 징모활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했다.[5] 당에서는 군사위원장을 지청천 총사령으로 하여 한국독립군의 편제를 강화했다.[6]

당시 징집구역은, 미샨(密山), 후린(虎林), 뚱닝(東寧), 왕칭(汪淸), 무링(穆陵), 푸송(撫松), 허룽(和龍), 훈춘(琿春), 옌바이(延白), 어무(額穆), 지린(吉林), 우샹(五常), 슈란(舒蘭), 아청(阿城), 쑝청(雙城), 둔화(敦化) 등지로 조경한, 오광선, 권득수, 심만호, 정남전, 오종걸, 김학유가 책임징집위원이었다.

당시 중국 군인들은 각지의 조선인 마을에 들어와 "너희들은 일본에 속하는 소일본"이라 하며, 무단히 학살, 강간, 약탈을 가하여 한인 농민들은 생사의 선을 오고가는 통에 제대로 살 수 없는 지경이었다. 철령 지방에서는 중국 군대가 한인들을 학살하고 부녀자를 능욕하며, 한인 가옥에 불을 질러 한인들은 철도연선지역 안으로 피신하기도 했다. 한인 사회는 일제 만주침략으로 인하여 일본군과 중국군에 의하여 이중적인 압박에 직면하고 있었고 이들을 보호해줘야 했기에 그 역할을 수행하고자 한게 한국독립군이었다.

3. 편제

새로 모집한 장정들은 「3·3제」로 편성되었다. 30명을 1소대로, 3소대를 1개 중대, 3개 중대를 1개 대대로 하는 편성이었다.

4. 무기 및 복장

조경한의 『백강회고록』105~106쪽에 따르면 소총 70정, 탄환 5천발, 수류탄 200개, 장창 200병을 중국군에게 지원받았다고 기록이 되어있다.

만주사변으로 봉천군벌이 몰락했기 때문에 한국독립군을 지원한 중국군은 정규군이 아니라 자위군 또는 구국군 형태의 민병대였을 것으로 보인다. 즉, 한국독립군의 주력 소총은 청나라에서 1895년부터 쓰인 한양조 88식일 가능성이 크다. 그외에는 1933년대전자령 전투처럼 일본군으로부터 일본식 무기와 탄약을 노획하기도 했다. 『백강회고록』에 의복 관련 기록도 나오는데 겨울엔 솜옷을 입었고 여름 홀옷도 기념으로 가지고 있었으나 6.25 전쟁때 소실되었다고 한다.

식주 관련해서는 중국 농민 민가에 청해서 숙식을 정중히 요청하기도 하고 민가가 없는 밀림에선 풍찬노숙을 할 수 밖에 없었는데 여름엔 모기와 싸워야 했고 겨울엔 추위와 싸우고자 생목을 찔러 화톳불을 피워두고 비상식을 나눠먹었다고 한다. 이때 먹은 전투식량은 건량이라고 부르는 찹쌀이나 밀을 볶아 가루로 만든 것으로 눈과 섞어 먹었다고 한다.

기록을 종합해보면 봉천군벌일본군으로부터 이중으로 압박을 받았고 군자금이나 부대 운영[7] 때문에 제식이 있는 군복이기보다 일반 민간복장으로 게릴라 전투를 벌였을 가능성이 크다.

5. 한중 연합 작전

한국독립군은 중국군인들로부터 한인들을 보호하기 위한 방편의 하나로서 연합전선의 형성에 필요했던 상황이었기에 한중연합전선의 확대에 주력했다. 이는 일제의 거세진 압박도 한몫 했는데 만주사변을 통해 만주에 영향력을 확보한 일제는 지린성 정부에 대해 한인독립운동 세력에 대한 공동수색을 요구하였고 이에 한국독립당(1930년) 당원들은 지린성 정부로부터 호조(신분증)을 발급받아 피신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뿐만 아니라 한국독립군에서는 미샨(密山) 지역의 경우 오상세를 제 2대장으로 임명하고 닝안현 동쪽지방에서 활동을 지휘하도록 했는데 제대로 무장하지 못한 병사가 많던 한국독립군은 일본군에게 대항하지 못하고 후퇴할 수 밖에 없는 안타까운 상황에 직면해 있었다. 이에 따라 싸울 수 있게 무기와 탄약의 보급을 지원해 줄 수 있는 중국 세력과의 연합이 한국독립군의 주요 과제로 떠오른 것이다.

한중연합전선의 결성이 시급한 현안으로 대두되자 한국독립당(1930년)에서는 1931년 11월 12일 신숙과 남대관을 중국 호로군연합군총부에 파견하였고 양측의 협의는 비교적 순조롭게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상호간 항일전쟁을 위한 효과적인 방략은 한중연대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11월 12일, 한국독립당(1930년)은 당군 대표로 신숙과 남대관을 지린자위군과 호로군연합군 총부에 파견하였다. 이들은 이달 말 목적지에 도착하여 지린자위군 사령관 딩차오(丁超) 및 제 2, 3군장 양원후이와 카오펑린(考鳳林)을 만나 상의했는데 그 형세가 심히 흡족하였다. 이 소식을 듣고 지청천이 최악, 오광선, 심만호, 김청농, 최관용, 최종원 등과 함께 친히 그곳으로 가서 한중연합의 구체적인 조건의 논의를 결정하였다. 그 내용은
① 한중양군은 어떤 열악한 환경을 막론하고 함께 장가항전할 것을 서약한다.
② 중동철도를 경계로 하여 서부전선은 중국군이 맡고 동부전선은 한국독립군이 담당한다.
③ 한중 양군의 전시 후방 교련은 한국독립군 장교가 담당하고 한국독립군의 소요일체(보급)자료는 중국군이 보급한다.

또한 한국독립당(1930년)에서는 빈현정부에 권수정을 교섭원으로 파견하여 주석인 청윈(誠允)과의 논의를 통해 공동 전선을 펼치고자 했다. 권수정은 청윈(誠允)에게 무기와 군자금의 지원, 한국독립군의 독자성을 인정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독자적인 군대 인정과 군사활동은 연합전선 초기 상호간 이해 관계로 인하여 발생할 수 있는 불신을 최소화하려는 의도였다.

뿐만 아니라 한국독립군1932년 1월에는 지린성 아성현 대석하에서 임시대회를 개최하여 한국독립당(1930년)의 임원을 개편하였고 군사위원장 지청천에게 소집령을 발동하게 하며 군사행동을 개시하기 위한 계획을 착착 진행하였다.

한편 만주사변이 발생하자 한국독립군은 민족진영 내부에서도 연합전선을 시도했다. 1931년 10월 18일 한족연합회의 남대관과 권수정, 한족자치연합회 군사위원장 지청천, 그리고 국민부의 이동선이 주축이 된 한독연합회, 한족농무연합회, 국민부, 조선혁명당(1929년)의 대표 30여명이 시도허즈(石道河子)에서 시국회의를 개최했다. 이들은 다음과 같은 결의 내용으로 한인 사회 단결을 도모했다.
· 한족연합회, 국민부, 한족농무연합회, 조선혁명당 등이 연합하여 재만한교총연합회를 조직하고, 동회 내에 연합선전부 및 연합총군부를 설치할 것
· 연합선전부는 재만 조선인 민족파와 대동단결에 의한 대내 선전을 위하여 연합총군부는 4개 단체의 군사파를 연합하여 이를 기초로 동청연선을 중심으로 하여 군대를 양성하여 중국군대와 공동전선을 펴 일본군에게 적대행동을 취한다.
· 연합총군부는 전 지린 변방 부사령 왕王군법 과장 배하의 육군 장교의 지휘를 받을 것.
· 연합선전부 및 연합총군부의 비용은 중국 측 군부의 원조 및 북만 지방재류 조선인 부호 등의 의연금에 의하여 지출할 것.
· 무장 및 피복은 중국 육군으로부터 지급받을 것.[8]

이 밖에 한국독립당(1930년)에서는 1932년 2월 경에도 민족진영세력을 단결을 위해 노력했다.
금번 만주사변으로 인하여 과거 남만 각지에 근거를 두고 조선독립을 목적으로 활동하던 민족주의 단체에서는 대 타격을 밧고 다시 북만으로 옮겨 중동선 일대를 근거를 두고 재래 북만을 잇근 무장단체와 악수하고 중동선 모처에서 3연합회의[9]를 개최하고 재래의 반목 암투하던 오해를 풀고 피차 협력하야 운동의 발전을 도모하였다는데 앞으로 이 시국의 분요한 틈을 타서 모종의 대대적인 계획을 세우고 방금 대 활동 중이라 한다.(하얼빈)[10]

크게 보면 대독립당에서는 국민부와 대종교인으로 조직된 종교적 색채를 띤 독립당 연합을 시도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국독립군의 대규모 병력이 한곳에 집결할 수 없었기 때문에 옌안현 동쪽과 서쪽으로 나누어 활동하고 있었다. 부대 편재는 단위부대의 체제를 유지하면서 필요에 따라 중국군과 연합작전을 전개하면서 일정하게 독자성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불령단은 그 후에도 이합집산을 반복하면서 도처에 준동을 계속하고 있던 중 2월 하순에 한국독립군 지청천 일파와 홍진 일파 사이에 내분이 일어나 지청천이 파는 딩차오(丁超) 군대에 편입되어 한국독립연대라고 하고 삼성, 부금 방면에 횡행하며, 홍진 일파는 유만괴의 구국군에 가담하여 영안현 방면으로 집결하였다.

이상의 내용을 종합해보면 만주사변이 발발하자 한국독립군한국독립당(1930년)에서는 우선 중국 반만한일군 연합 혹은 공동작전 및 지원을 통해 보다 적극적인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고자 최선을 다하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민족진영과 연합전선에도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이는 한국독립군이 일제와 만주침략에 맟서 끈질긴 항전을 전개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다.

6. 주요 전투


1932년 1월 일본군은 치치하얼과 진저우(錦州)를 공략하는 동시에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여 하얼빈을 공격했다. 이에 맞서 리두(李杜) 딩차오(丁超) 펑잔하이(馮占海) 등의 중국군은 일제히 이들 도시에 집결하여 격전을 치러 적을 격퇴하였다. 이들은 원래 만주지역의 지방군 출신이었기 때문에 청윈(誠允)이 지도하는 항일 지린성 정부에 가담할 것을 선언하고 1월 31일 지린자위군의 결성에 선포하기에 이른다. 이 항일부대는 약 1년 동안 만주군과 일본군 상대로 치열한 격전을 치뤘다.[11]

만주사변 이후 중국군과 연합을 도모했던 한국독립군1932년 1월 지린자위군 시에푸청(謝復成) 부대와 연합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당시 우창현(五常縣)과 슈란현(舒蘭縣)일대에서 조경한과 권오진이 주축이 되어 모집한 한국독립군 1개 대대 병력은 본부가 있는 팡정현(方正縣)으로 이동하던 중 시에푸청(謝復成) 부대를 만났으며, 무장지원을 받아 한국독립군유격독립여단의 명칭으로 공동작전을 수행하였다.

한국독립군은 슈란현(舒蘭縣) 전투에 참가했다. 1월 29일 밤 슈란현(舒蘭縣)성 주변에 병력을 분산 배치한 양군은 일본군 1개 분대와 지린군 1개 중대가 지키는 슈란현(舒蘭縣)성을 포위한 후, 자위군이 성의 동, 서, 남쪽 3방향에서 공격을 가하였다. 한국독립군은 성의 북문 밖으로 매복했다가 후퇴하는 적을 섬멸하기로 약속하였다. 작전은 예상대로 성공하였으며, 한중 양군은 상당한 전과를 올렸던 것으로 보인다.

한중 양군은 1932년 2월초, 200여 명의 지린군이 주둔하고 있던 어무현(額穆縣)성에 별다른 저항 없이 점령했다. 약 50일간 이 곳이 머물면서 전열을 재정비한 후 3월 말 경 중동철도 연선을 따라 북상하였다. 그러나 한중 양군은 일면파 방면의 타이핑천(太平川) 라펑샨(拉鳳山) 계곡에서 적 1개 대대와 교전하던 중국공산당군의 지원을 받으며, 대규모 지원병을 동원하여 공격해 오는 적을 당해낼 수가 없어 퇴각하였다. 이후 시에푸청(謝復成) 부대는 사기가 크게 떨어져 동만주로 이동했다. 반면 한국독립군유격독립여단은 이들과 결별하고 총사령부가 있는 쩡팡현(正方縣)으로 향하였다.[12]

한편 지청천한국독립군1932년 1월 따스허(大石河)에서 개최된 임시대회 이후 옌수현(延樹縣)에서 지린자위군의 왕지웨이(王之維)와 연합하여 무장투쟁을 준개했다.
임시대회에서 중국군과 합작하기로 결의한 뒤, 독립군 총사령 지청천은 각 지방에 산재해 있는 재래의 독립군을 소집한 결과 인원 60명에 달했으므로 그것을 우선 일대로 조직 편성하여 지린성 자위군 왕지웨이가 인솔하는 약 10만 군과 연합하여 전투하여 헤이룽장으로 향하여 퇴각하는 도중에 중국군 왕지웨이는 귀화하고, 잔병 약 5만군과 함께 헤이룽장까지 가서는 별 수 없이 일본군, 만주군의 토벌을 받아서 승산 없이 패산하여, 쇼와 7년 8월에 아청(阿城)으로 지청천은 약 400명의 독립군을 인솔하고 되돌아왔다.[13]

이 내용에서 보면 지청천은 임시대회 이후 각 지방에 산재한 60명 정도의 병력을 이끌고 지린자위군의 왕지웨이가 이끄는 10만의 대부대와 연합하여 헤이룽강까지 진출하였다. 지청천 부대는 공동으로 항일전을 전개했으나 왕지웨이가 변절하고 일본군, 만주군의 공격을 받아 상황이 어렵게 되자 중국군 패잔병 5만명과 함께 퇴각하고 말았다.

지청천은 아청(阿城)으로 돌아오는 어려운 과정에서도 400명의 독립군 병력을 모집하는 등 군사력 유지에 노력을 기울였다. 일제는 한국독립군 활동이 활발해지자 지청천, 오광선, 김창환, 이규채 등에 대해 현상금을 내걸고 이들을 체포하는데 노력을 기울였다.[14]

또한, 1932년 5월 초순경 이규채는 안해강과 함께 아청(阿城)에 있는 지린자위연합군 총지휘관 양야오쥔(楊曜鈞)을 방문하여 지린자위연합군 제 3군(군장 카오펑린考鳳林)과 연합을 성사시켰다.
7년 5월 중순경 지청천헤이룽장성에서 돌아오기 전인데, 대대장 오광선헤이룽장성에서 먼저 돌아왔으므로 오광선과 부사령관 김창환을 불러서 잔류하여 독립군을 소집하라고 명했던 바, 군인 약 60명을 모집해 왔으므로 제 3군 내의 한국군 부대를 편성했다. 우선 지청천이 귀환할 때까지 훈련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청(阿城)을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동년 8월 1일경에 지청천헤이룽장성에서 약 400명을 인솔하여 귀환했으므로 그것과 함께 편성하여 제 3군과 연합하여 아청(阿城)을 방비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15]

당시 지린자위군중로연합군 제 3군 독립영으로 편제된 한국독립군의 조직구성원은 다음과 같다.
총사령 지청천, 부사령 김창환, 참모 이규채, 신숙, 회계 한동근, 대대장 오광선 중대장 최악, 중대장 안해강, 중대장 최관용, 소대장 차철, 소대장 윤필한, 소대장 이간, 소대장 공흥국, 소대장 박영묵, 대대부관 안규원, 군수처장 한아강, 군수정 심만호, 수종원 최만취, 영장 오광선, 영부관 리펑린(중국인), 영부관 안일청[16]

60명 정도의 한국독립군이 10만 명에 달하는 지린연합자위군과 합작하게 된 계기에 대해서 이규채는 "중국 군인은 무식한 사람뿐으로 상관은 나쁜 일을 하지 않아도 병사들이 멋대로 하는 반면, 조선인들은 모두 상당한 학문도 있고 소행도 좋기 때문에 반갑게 환영해주었기 때문"이라고 언급하였다.[17]일제의 대규모 공세에 대한 중국인들의 위기의식이 크게 작용한 사실을 엿볼 수 있다. 한국독립군의 엄격한 규율은 정규군 못지 않은 엄정함에서 비롯되었다.
쑝청(雙城)현을 1회 습격하고 귀환했을 때 회의를 열었었다. 그 회의는 전후책을 강구하기 위한 독립군 장교회의도 되고, 독립군 간부회의도 되는 것인데, 거기에서 총사령 지청천은 아직도 계속해서 애무현 중심으로 자위군의 왕더린 군이 있으니 계속해서 그들과 연합하여 싸우자고 주장했고, 나는 지금은 독립당에서는 그런 행동을 했기 때문에 자위군에서도 양해하고 조선인 동포에는 위해를 가하지 않아서 조선인 농부는 모두 수확을 끝내고 식량을 수습하여 피난했기 때문에 생활에는 도움이 되었고, 또 정세를 보더라도 일본군, 만주군과 싸워도 승산이 없고 참패할 것이 틀림없으니, 그것을 중기하고 중국본토로 들어가서 적극적으로 운동을 하자고 주장했다. 지청천 등 장교들은 참패로 끝날 때까지 반항하여 싸우자고 주장하므로, 그러면 나는 먼저 중국 본토로 가서 자금을 조달해 보낼 것이니 끝까지 싸우다가 패배하거든 본토로 도피해 오라고 약속하고 결정했던 것이다.[18]

이후 한국독립군지청천 이하 400 여 명의 병력은 8월 15일에 전개되었던 쑝청(雙城)보 1차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여세를 몰아 9월 하순에 다시 쑝청(雙城)보 2차 전투를 전개하였으나 일본 공군기의 폭격으로 피해를 입고 동빈현(同賓縣)으로 퇴각했다. 뿐만 아니라 10월에는 일본군 대공세를 견디지 못한 카오펑린(考鳳林)이 투항하고 휘하 부대가 흩어지게 되자 한국독립군은 이들과 결별하고 새로운 항일 투쟁의 전략을 모색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한다.[19]

이에 한국독립군10월 23일 다시 군사회의를 개최하고 심만호, 공진원, 강진해, 마창인을 뚱링현의 중국국민구국군에 파견하여 합작문제를 협의토록 하였다. 이를 통해 이듬해 1월 중국 구국군 보병 제 8연 제 23단(단장차이시롱柴世榮)과 연합한 중한연합토일군이 편성되었다.
① 안투(安圖) 푸송현(撫松縣)을 군사 제 1근거지, 랴오허, 후린, 바오칭, 미샨을 제 2근거지로 삼아 둔전(屯田)을 설치한다. 사병을 모집하여 단기군사교육을 실시한다.
② 선전대원을 편성, 선전조직을 전담하여 향곡을 순회하여 토일연합군을 조직한다. 전단 및 신문잡지를 간행, 민중을 고무 격려시킨다.
③ 사방에 복병을 출몰시켜, 각 지에 적기관을 습격 군수품을 탈취한다.
④ 실력을 축적 양성하여 때가 오기를 기다린다. 그런 다음 대부대로서 중동로 일대를 먼저 점령하고 서쪽을 석권한다.[20]

이후 한국독립군1933년 2월 중순부터 7월 중순 사이 경박호 전투, 사도하자 전투, 동경성 전투, 대전자령 전투를 전개하였다. 이외에 이규채 증언에 따르면 한국독립군1933년 1월부터 5월 사이에 자위단이나 일본군과의 소규모 전투도 지속적으로 수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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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독립군대전자령 전투에서는 만주지역 항일무장투쟁사상 가장 빛나는 전과를 거두었다. 당시 한국독립군은 약 500명 군세로, 약 2000명의 차이시롱(柴世榮)부대와 연합하여 대전자령에서 철수하는 일본군 수송부대를 매복 기습하여 많은 군수물자를 빼앗는 대승을 거두었다. 이 부대는 1932년 4월 간도에 출동했다가 이듬해 6월 말 철수하는 일본군 75연대의 포병, 기갑, 공병 등으로 구성된 혼성부대였다. 다량의 군수품을 수송하고 있었는데, 한중연합군은 이 부대를 타이핑령에서 기습, 섬멸하였다. 이 전투에서 한중연합군이 노획한 군수물자는 박격포 등 포 8문, 기관총 110자루, 소총 580자루, 탄약 300상자, 수류탄 100상자, 권총 200자루, 도검 40자루, 군용지도 2000여매, 각종 문서 300여부, 피복, 담요 등을 포함한 기타 군 장비 2000여건, 장갑차 2량, 망원경 25개, 약품 50상자 등이었다. 항일독립전쟁사상 가장 많은 군수품을 노획한 전투라고 볼 수 있다.
대전대접(大甸大蜨)
높은 고개 험한 숲 몇 백리를 뚫고 넘어가자니까 군인들의 노고란 말할 수 없이 긴장이 끊길듯
노모저(老母著)에 이르러 다시 탐문하기 주둔했던 적군이 2~3일 후에 서쪽 방향으로 옮아간다는 것이다.
생각건대 적의 방향이 두 갈래 길이 있는데, 모두 험준한 산곡이었다.
가만히 매복병을 두 갈래 산곡 위에 파견하고 다시 적의 배후를 무끼를 정예병력을 배치하였지
나도 또한 장비를 든든히 한 후 사졸보다 앞서서 지휘했다.
어찌 높은 탁자에서 획책만 할쏘냐?
배낭 속에는 다만 사흘 양식만 있고 주먹 속에는 한갓 한 자루 총뿐이네
참호에는 모기 깔따구의 덤비는 것이 괴롭고 숲속에서는 호표의 으르렁대는 소리만 들리는누나!
붉은 해와 누런 달이 떴다 졌다 하기를 세 차례나 되었으니 고대하는 이리떼는 어찌 아직 이르지 않노.
건사한 양식이 다해가니 주림은 창자를 범하고 장맛비는 잇따라 쏟아지니 냉기는 살가죽을 핍박하네!
(중략)
한참 있다가 비는 개고 햇살이 퍼지는데, 적기(敵騎) 두 서넛이 고개 마루에 나타나 머뭇거리며 사면을 보살피네!
쥐 죽은 듯이 참호 속에서 고요히 주시하면서 놈들의 전 군대가 깊은 골짜기로 들어오도록 방임했지!
고개 및 골짜기가 30리나 되는데 조금 있다가 적군이 줄줄이 이어 오불꼬불 내려오네!
적의 수미(首尾)가 완전히 골짜기 속으로 들어섰을 때 벼락치고 폭풍일 듯 일제 사격을 맹렬히 퍼부었지
적이 전진 후퇴가 모두 막힘을 알고 최후발악으로 우리 고지를 향해 대항하려 했으나 궁구의 말세로 되었으니 무슨 효과가 있으리오.
화약연기와 피비린내는 긴 구렁에 꽉 찼고
성난 대포와 미친 총알은 푸른 공중이 부서지는 듯!
장사들이 앞을 다투어 무찌르고 나갈제
위엄을 뽐내며 성낸 고함으로 제각기 본대를 부리는 듯!
더욱 용기를 돋워 족쳐 나간 싸움이 다섯 시간 만에 낙화유수 흘러가고 텅비듯이 모두 쳐서 없애버렸네!
하나도 그물에 빠짐없이 도륙했을 뿐 아니라
전리품의 풍부하기도 전에 없던 일일세!
징을 울리고 북을 치며 개선가를 부르며 돌아갈세
사기의 드높음은 대지를 말아 부칠 듯한 바람과 비슷하다고나 할는지?
다만 원컨대 이로부터 줄곧 대첩하여 빨리 광복을 보도록 성충을 다해봅세[21]

7. 논란


대전자령 전투 더 나아가서는 한국독립군이 벌인 일련의 전투에 대해 실제 여부를 의문시하는 시각이 존재하는데 특히 연변 학계에서 이런 시각이 강하다.

이런 시각의 대표사례는 이미 고인이 된 박창욱 연변대학 교수가 있는데 그는 "한국독립군이 동만주에서 진행한 몇 개 전투 특히 사도하자 전투, 대전자령 전투는 계속 조사 및 연구해야 할 문제라고 본다. 그러나 규모가 그렇게 크고 전과가 있는 전투는 아니었다고 본다."라고 주장한 적이 있다.[22] 이러한 주장에는 사실상 한국독립군의 전과라고 알려진 몇 전투가 사실상 중국의 항일의용군[23]이 벌인 다른 전투를 한국독립군이 사칭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짙게 깔려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연변 학계와 연계된 국내 일부 학자도 한국독립군의 활동이 과장되어 있다는 주장에 동의하고 있다.

8. 해체

이 무렵 백두산 근처의 안투현 일대에 활동하고 있던 지린구국군 대리총사령 우이청(吳義成)이 대전자령 전투에서 한중연합군이 대승을 거두었다는 소식을 듣고 부대를 이끌고 대전자령 부근으로 이동해오면서 그 동안 독자적으로 활동해 온 차이시롱(柴世榮)부대는 우이청(吳義成)의 휘하로 통합되었다. 이후 한국독립군과 중국군 사이에 갈등이 심화되기 시작했는데 이미 전리품 분배문제로 차이시롱(柴世榮)부대와 약간의 분쟁을 벌어진 상황에서 우이청(吳義成) 부대가 합류한 이후에 한국독립군읜 그의 휘하인 저우바오종(周保中) 등 상당 수의 중국공산당 인사들과 운동방략을 둘러싸고 갈등을 빚었다.[24]

이후 양측의 갈등은 민생단 문제 등이 중첩되어 반감의 골이 더 깊어졌다. 이 같은 상황에서 관내 지역에 파견되어 있던 이규채로부터 이동자금이 전달됨에 따라 홍진, 지청천, 조경한, 오광선, 공진원 김창환 등 한국독립군 주요 간부들과 사병 가운데 선발된 중국육군군관학교 입학지원자 등 40여 명이 베이징을 거쳐 중국 관내로 이동하였다.[25] 이 때 이동한 청년 34명은 중국육군군관학교 뤄양분교 한인특별훈련반에 입교하여 1935년 4월에 졸업하였고 이들은 이후 관내지역에서 한국독립군에 크게 이바지 하였다.[26] 또한 북만주 현지에 남은 독립군들은 일부가 중국에 귀화하였다. 신골, 최악, 최만취, 안태진 등은 잔류부대를 이끌고 닝안, 애무, 무링, 미샨 일대의 산림지대에서 지속적인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27]

9.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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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암살에서 염석진한국독립군 주둔지로 제2지대 저격수 안옥윤 상병을 찾아가는 장면이 있다.


[1] 중국 CC단의 지원을 받아 만듬[2] 중국 특무기관 남의사의 지원을 받았다.[3] 정당을 해산한다는 조건으로 통합되어 만들어짐.[4] 일청, 「9.18후 한국독립군재동북살적장사」, 한국광복군총사령부, 『광복』 제 2권 제 1기, 53쪽 ; 채근식, 『무장독립운동비사』, 157쪽.[5] 한국광복군총사령부, 『광복』 제 2권 제 1기, 53쪽.[6]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5, 599쪽. 당시 한국독립군 조직은 총사령관 지청천 부사령장관 남대관, 참모장 신숙, 재무겸 외교관 안야산(安也山), 의용군훈련대장 이광운, 의용군중대장 오광선, 암살대장 이출정, 의용군소대장 이춘정, 별동대장 한광림, 헌병대대장 배성운, 통신부대 겸 검사연 신원균, 구국군원호회회장 권수정, 서기장 홍만호(홍진), 선전대 겸 결사대장 심중근 등이었다. 그런데 『백강회고록』, 95~96쪽에서는 총사령 지청천 참모장 이장녕(신숙), 정훈대표 조경한 참모 신숙, 조경한, 김상덕(후임), 부관 최만취, 이규보, 전성호, 영군인물 이응서, 오광선, 최악, 최해룡, 차철, 지상기, 손무영, 안종명 등 150여명이었다고 한다.[7] 최소한의 대원의 먹고 사는 문제에 있어서 군량 문제를 생각해보면 몆백명을 먹여가면서 전투를 펼친다는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8] 한국광복군총사령부,『광복』 제 2권 제 1기, 53쪽[9] 국민부, 귀일당, 대독립당[10] 『조선일보』,1932년 1월 19일, 「중동선 일대 각 단체 모종계획을 수립, 3단체 연합회의를 개최하고 북만 각지 ㅇㅇ단 활동」.[11] 장세윤, 『중국동북지역 민족운동과 한국현대사』, 명지사, 2005, 251쪽[12] 조경한, 『백강회고록』, 105~109쪽 참조[13] 경기도경찰부, 「이규채 신문조서(제 3회)」, 1935년 1월 21일.[14] 한국독립군의 활약상을 뒷받침하는 중국 측의 기록에 의하면 "한간 우성산 무리가 일본군 공로를 세우기 위해 지청천, 이규채, 김창환, 오광선 등에 현상금을 내걸었고 "하얼빈 『빈장일보(濱江日報)』는 비수(匪首) 지청천이 이끄는 400여 명이 쌍청을 공격 파괴하였다고 보도하였다. 또한 조경한은 "일본군 사이에는 지청천에게 현상금 60만원을 내걸고 만주 광야에 휩쓰는 우리 독립군 군사위원장이며, 총사령인 그를 체포하는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고 하였다. (조경한, 「지청천 장군과 광복군 (하)」, 『세대』, 11월호, 1970, 299쪽)[15] 경기도 경찰부, 「이규채 신문조서(제 3회)」, 1935년 1월 21일 당시 이규채는 제 3군의 중교참모로 활동하였고, 제 3군의 군장은 카오펑린이었다. 지린자위연합군의 경우 총지휘관 양야오쥔, 제 1군장 쑨칭린, 부하 3만명, 제 2군장 리푸팅, 부하 약 4만 명, 제 3군장 카오펑린(考鳳林), 부하 약 1만 수천명, 당시 한국독립군 병력은 500명 정도였다고 한다.[16] 경기도 경찰부, 「이규채 신문조서(제 3회)」[17] 경기도 경찰부, 「이규채 신문조서(제 3회)」, 1935년 1월 31일 실제로 한국독립군은 전투에 참가하여 민첩하게 행동하고 1명이 100명을 당해내지 않은 이가 없었다. 대오는 훈련에 받음에 있어 흐트러지지 않았고 사병들은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아 중국인들이 모두 칭찬하였다고 한다.[18] 경기도 경찰부, 「이규채 신문조서(제 3회)」[19] 장세윤, 『중국동북지역 민족운동과 한국현대사』, 252쪽. 한국독립군은 함께 활동했던 카오펑린 부대가 "정예분자는 모두 깊은 산속으로 숨어들고 나머지 무리들은 투항하여 내년 4월 풀이 돋을 때 일제히 합세하여 제기할 것을 결의"함에 따라 한국독립군은 이들과 결별하였다고 한다.(한상도, 「재만 한국독립당과 한국독립군의 중국관내지역 이동」, 『사학연구』 55.56, 772쪽)[20] 박영석, 「백산 이청천」, 『한국현대인물론』 2, 을유문화사, 1987 ; 한상도, 「재만 한국독립당과 한국독립군의 중국관내지역 이동」, 『사학연구』, 55.56, 773쪽[21] 조경한, 『백강시집증보』, 한국종교협의회, 1989, 173~176쪽.[22] 박창욱「1920~30년대 재만 민족주의 계열의 반일민족운동」,『역사비평』27, 1994, 257쪽; 박창욱,「동북지역 한민족 독립운동사 관련 사료 정황」,「한국독립군 운동사연구」18, 2002, 305~307쪽[23] 만주사변을 전후하여 만주에서는 항일의 깃발 아래, '자위', '구국', '의용'등의 이름을 쓴 무장단체들이 대거 출현했었다.[24] 장세윤, 『중국동북지역 민족운동과 한국현대사』, 253~255쪽. 대전자령 전투와 관련해서는 이 책을 참고하였다.[25] 당시 상황에 대해 조경한은 "한국독립군이 진퇴유곡에 빠져있을 무렵 의외의 오광선의 보고를 받고 급전직하 뤄양특훈 방향으로 전환으로 결정되었고 오광선, 심만호는 군사간부의 연락과 학생 모집, 고립된 간부가족의 관내 이주와 각종 여비조달 등의 책임을 지고 동분서치하였다."고 회고했다.(조경한, 『백강회고록』, 212쪽[26] 장세윤, 『중국동북지역 민족운동과 한국현대사』, 258~259쪽; 한시준, 「이청천과 한국광복군」, 『한국근대현대사연구』 56, 한국근대사학회, 2011[27] 한상도, 「재만 한국독립당과 한국독립군의 중국관내지역 이동」, 『사학연구』 55.56, 774쪽[28]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는 조선의용군으로 개편되어 동북삼성 지역으로 진격하던 중 광복을 맞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