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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8-15 10:33:44

박달



1. 개요2. 생애3. 장의위원회 구성4. 참고문헌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북한의 정치인.

2. 생애

1910년 12월 28일, 함경북도 길주군 덕산면 백원동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본명은 박문상(朴文湘)이다. 가난한 화전민들이 많아 일제 관헌과 농민들의 충돌이 잦았던 갑산지역에선 강경한 농민운동이 계속 벌어지고 있었다.

박달은 1929년부터 1931년까지 명성소년회, 갑산청년동맹 등애 참여하였으며 1931년 보천면과 운흥면에 갑산적색농민조합을 결성하여 야학을 실시하고 농촌 계몽운동을 벌였다. 1932년, 박달은 공산주의에 눈을 뜨게 되어 농민조합을 해체하고 자신을 맹주로 하는 갑산공산청년동맹을 조직하고 기존 농민조합 지부를 청년동맹 지부로 개편하면서 체육회 명목으로 청년들에 대한 의식화 교육을 진행했다. 이때 그와 같이 대중 계몽운동에 참여한 것이 바로 훗날 갑산파의 리더가 되는 박금철이다. 일제의 단속이 가혹했기 때문에 박달은 2번이나 체포 위기를 겪었으며 이 때문에 더욱 비밀결사조직의 보안을 강조하게 된다.

일제의 계속된 탄압에 일부 사회주의자들이 전향하는 것을 본 박달은 당조직이 없는 현재 상황에서 조직화의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일본 경찰의 정보나 초기 북한 선전에서는 1935년 3월에 갑산공작위원회가 조직되었다고 알려졌는데, 김일성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 따르면 1934년 5월, 박금철과 함께 이미 조직을 만들어놓은 상황이었으며 갑산공작위원회라는 이름은 1936년 즈음부터 썼다고 한다. 갑산공작위원회는 매우 비밀스러운 단체라서 조직원들끼리도 가입 2년이 지나서야 서로의 존재를 알 정도였다.

갑산공작위원회는 검거를 피하기 위해 일본 주재소와도 표면적인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며 계몽운동을 계속했고 합법적인 투쟁을 가장해 소작료 인하, 화전 자유개간, 부역 반대, 고리대 반대, 군수물자 강제 재배 반대 운동을 벌였다. 1936년 3월에 박달, 박금철, 리경봉, 김철억, 심창식은 조선독립과 공산화를 조직의 목표로 정하고 조직을 확대해나갔다.

그러다가 1936년에 박달은 1934년에 장백으로 이주하여 조국광복회 장백지부를 설치한 리제순의 소개로 김일성과 접촉하게 된다. 박달과 박금철은 3차례 김일성과 비밀회동을 가졌다. 1937년 1월의 만남에서 박달은 김일성이 조선사람이지만 동북항일연군 소속이니 사실상 중국 혁명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했다. 이에 김일성은 동북항일연군은 중국군대가 아니라 기존 항일 유격부대들이 모인 국제연합군이라고 반박하면서 중국혁명을 도와주면서 동시에 조국해방을 추진하고 있다고 대답했다.....는 것이 김일성의 주장이다.

북한은 1937년 5월에 박달이 국내당 공작위원회를 조직하여 갑산 지역에서 공산당 조직건설사업을 했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북한 특유의 과장선전에 불과하다. 실제로 함경북도에 공산당 결성 운동은 있었지만 이는 김일성과 무관하게 진행되고 있었으므로 북한 입장에선 당연히 알바가 아니었다. 어쨌거나 박달은 1937년 2월에 갑산공작위원회를 한인민족해방동맹을 개칭하였는데 북한에서는 이것이 1937년 1월, 김일성의 지시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또 왜곡했다. 나중에 박달도 회고록에서 수령이 된 김일성의 눈치를 봤는지 1937년 1월 개편설을 그대로 썼다. 어쨌거나 김일성은 박달이 식견과 투지가 높지만 정작 소탈한 품성에 겸손하고 순박하다면서 그를 높이 평가했다.

1937년, 김일성이 보천보 전투를 기획하자 박달과 박금철은 보천보의 지도를 김일성에게 전달해주었고 자신을 따르는 80명의 청년들을 김일성 부대에 합류시켰다. 그리고 전선을 절단하여 일본군 추격을 방해하기로 하였다. 1937년 6월 4일, 혜산경찰서 습격이 시작되자 한인민족해방동맹 조직원 60여명이 면사무소, 우편국, 산림보호구, 소방회관 등에 불을 질렀다. 사실 보천보 전투는 규모로만 따져서는 그리 크지도 않은 전투고 김일성도 인정한다.[1] 하지만 국내에서 벌어졌다는 점에서 상징성이 컸고 국내 언론과 일제 관헌의 주목을 모두 받게 된다.

1937년 가을부터 일제는 대대적인 체포작전에 들어갔고 박달은 체포되지 않기 위해서 현봉길, 김문천, 리갑수, 박일수, 백록 등의 가명을 쓰고 다녔다. 하지만 1937년 10월 1일, 김윤덕이 체포되어 자백함에 따라 조국광복회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령이 떨어졌고 박금철, 심창식이 체포되었으며 총 739명의 조직원이 검거되면서 조국광복회는 붕괴되었다. 박달도 1938년 9월 23일, 김철억의 사촌 김창영이 체포되어 변절하는 바람에 끝내 체포되었다. 1941년 8월 28일 1심 재판에서 박달은 리제순, 권영벽과 함께 사형을 선고받았고 박금철은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박달은 사형을 선고받고 함흥형무소에 수감되었으며 형무소에서 극심한 고문을 당해서 척추와 다리가 모두 부러져 걸을 수 없는 불구가 되었다. 그보다 앞서 체포된 리제순은 1945년에 끝내 사형당했고 박달도 죽을 운명만 기다리고 있었으나 사형집행이 연기되면서 박금철과 함께 서대문형무소로 이감되었다. 그나마 일제 재판부에서 박달의 항고에 이유가 있다고 판단하면서 1943년 12월 28일 2심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했으나 1944년 10월 23일의 상고는 기각했다. 이후 해방이 이루어지면서 박달과 박금철은 모두 풀려났고 박금철은 즉시 월북하였으나 박달은 고문 후유증으로 운신이 불가능해서 서울에서 요양하였다.

당시 척수염 진단을 받은 박달은 서울대학교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고 그 소식을 들은 김일성은 사람들을 보내 박달과 그의 아내 현금성 및 가족들을 모두 평양으로 데려왔다. 박달은 김일성의 배려로 치료를 받게 되었다. 그와 함께 일했던 박금철, 리송운, 리효순, 허학송 등은 갑산파를 조직하고 북한에서 매우 잘 나가게 되지만 정작 박달은 건강 문제로 정치에 참여하지 않고 문필활동에 집중했다. 저서로는 수기 <조국은 생명보다 더 귀중하다>, 자서전적 장편소설 <서광>이 있다. 김학철의 증언에 따르면, 치료를 받는 박달을 만난 적이 있었는데, 박달의 아내가 박달의 쾌유를 위해 점쟁이들을 불러 갖은 굿판을 벌이고 있어 어이가 없어진 박달이 "유물론자가 미신을 권장하다니.... 내 팔자도 참 어지간하지."라고 쓰게 웃었다는 것이다.

1960년 4월 1일 새벽 2시에 결국 고문후유증으로 50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당중앙위원회는 부고를 발표, "언제나 당과 인민에게 충직하였으며 어떠한 난관 속에서도 혁명가의 절개를 고수한 박달 동지는 공산주의자의 모범으로서 전체 우리 당원들과 근로자들의 깊은 사랑과 존경을 받아왔다."라고 그를 높이 칭송했다.

시신은 대성산혁명렬사릉에 안장되었으며 반신상이 제작되었다. 김일성이 관을 들고 생가까지 조성되는 등 최고의 예우를 받았다.

3. 장의위원회 구성

4. 참고문헌


[1] 이젠 잘 알려졌지만 정작 보천보에서는 엉뚱한 일본인 요리사 한명과 여자아이 한명을 죽인게 고작이었고, 정작 보천보에서 철수하고 나서 순사 7명을 죽였으며 6월 30일, 일본군 추격대를 상대로 간삼봉에서 일본군을 크게 격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