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1-18 03:26:11

조선중앙일보


파일:일본 제국 국기.svg일제강점기의 신문
{{{#!wiki style="margin: 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경성일보
京城日報
고려시보
高麗時報
동아일보
東亞日報
매일신보
每日申報
불교시보
佛敎時報
시대일보
時代日報
조선독립신문
朝鮮獨立新聞
조선일보
朝鮮日報
조선중앙일보
朝鮮中央日報
중외일보
中外日報
}}}}}}}}} ||

조선중앙일보
朝鮮中央日報
<colbgcolor=#9D6A58><colcolor=#fff> 국가 일제강점기 조선
창간 1931년 12월 27일 (《중앙일보》)
개칭 1933년 3월 7일 (《조선중앙일보》)
폐간 1937년 11월 5일
설립자 김찬성
사장 여운형[1]
편집국장 이관구
종류 일간신문
파일:조선중앙일보.png
<colbgcolor=#9D6A58> 《조선중앙일보》

1. 개요2. 역사
2.1. 시대일보2.2. 중외일보2.3. 중앙일보
2.3.1. 노정일의 언론관
2.4. 조선중앙일보
3. 성향
3.1. 중앙일보3.2. 조선중앙일보
4. 여담5. 대중매체

[clearfix]

1. 개요

1924년 《시대일보》라는 이름으로 창간하고 《중외일보》로 개칭했던 신문을 계승해 1931년 11월 27일에 《중앙일보》라는 이름으로 창간된 신문이며, 북한 국영 조선중앙통신, 조선중앙방송이나 지금의 《조선일보》, 《중앙일보》와는 무관하다.

2. 역사

2.1. 시대일보

《시대일보》는 1924년 3월 31일에 창간된 일간 신문이다. 최남선이 발행해오던 주간지 《동명》[2]을 폐간한 뒤 일간지로 개편한 것이다. 국한문혼용체를 사용했으며, 민족의 단합과 협동을 제일의 사명으로 내세웠다.

당시 발행되던 신문들과 달리, 《시대일보》는 1면에 정치기사가 아닌 사회기사를 실었다. 1면 머리에 '오늘일 래일일'이라는 시평 칼럼을 두었으며, 서명을 넣어 논설을 게재했다는 특징이 있다. 이외에도 미국만화 '엉석바지'를 6단폭의 6컷으로 연재하기도 한다. 발행 초기에 발행부수가 2만 부에 이르러 당시 《조선일보》, 《동아일보》와 함께 3대 민간지중 하나가 됐다.

1925년 대홍수 때 다른 신문들과 함께 수재민 구호운동을 전개했으며, 학술강연회·전국 농구선수권대회·전국 자전거대회·전조선축구전 등의 운동경기를 주최하기도 하였다. 발행되었던 신문의 일부가 현재 서울시특별시교육청 종로도서관에 있다. 종로도서관 고문헌 검색시스템.

하지만 시대일보는 창간 직후부터 심각한 자금난을 겪었다. 주식회사 설립을 위한 40만 원의 자본금을 모집했지만 약간의 창간비용만 마련할 수 있었고, 애초에 최남선은 《동명》의 부채금 1만 원도 상환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관련 논문 219p 참조. 몇달 뒤, 자금 마련을 위해 보천교로부터 전도금 3만원을 받았으나 발행권 인수인계 문제로 갈등이 발생했다. 결국 1924년 7월 9일 경영권을 보천교 측에서 인수했다.

경영난으로 1년도 안 되는 기간 동안 사장이 몇 차례 바뀌었으며, 《시대일보》는 휴간과 속간을 반복하게 된다. 이후 1925년 4월 《동아일보》 주필 겸 편집국장인 홍명희가 사장이 되며 혁신호를 펴낸다. 이때부터 다른 신문들처럼 1면에 정치기사를 실었으며, 제호의 밑바탕에 그려진 무궁화 모양이 사라진다. 하지만 재정적 안정을 찾기는 어려웠는지, 사원 전원이 회사를 그만둠에 따라 신문사가 해산된다.

2.2. 중외일보

《시대일보》의 폐간 이후, 그 발행권을 '신문계의 귀재'인 이상협[3]이 계승하며 창간한 신문이다. 《중외일보》는 《시대일보》의 발행권은 인수했으나 지령을 계승하지 않았고, 1926년 11월 15일부터 지령 제1호로 새롭게 시작했다.
“ 중외일보는 대중의 충실한 동무로서 白衣大衆의 행복을 希求하여 陳頭에 나서는 선봉이 될 것과 斥候者가 될 것을 원한다.”
《중외일보》, 창간사, 1926년 11월 15일.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중외일보'

《중외일보》는 참신한 기획으로 인기를 얻었고, 이로써 1920년대 이후 조선인을 주 독자층으로 한 한글신문은 《조선일보》, 《동아일보》, 《중외일보》로 정립된다.

당시 김성수라는 뒷배를 가진 《동아일보》와는 달리, 《조선일보》와 《중외일보》는 고질적인 경영난에 시달리고 있었다. 《중외일보》는 4면 발행에 월정 구독료 60전으로 '값싸고 좋은 신문'을 표방하며 야심차게 출발했으나, 창간 4개월 후부터 임금을 제대로 지불하지 못하는 등 재정난에 부딪혔다. 1930년대에 들면 경영난에 이은 연쇄 파동으로 인해 신문사 소유주의 변동과 기자들의 대규모 이동이 있었다. 잦은 압수와 한 차례의 무기정간[4]으로 인해 《중외일보》의 재정난은 더욱 심각해진다. 일제의 검열 흔적은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전시한 《중외일보》 검열본과 삭제본에서 고스란히 찾아볼 수 있다. 붉은 줄 긋고 사진삭제…민족지 '중외일보' 곳곳 일제 검열 흔적

자구책 마련을 위해 1930년 2월 15일 발행인 겸 편집인이 안희제로 변경됐으나,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같은해 10월 13일 자진 휴간에 들어섰다. 결국 속간 비용 마련에 어려움을 겪고 1931년 6월 19일 종간호를 냈으며, 9월 2일 주식회사가 해산했다.

2.3. 중앙일보

지금의 중앙일보와는 무관하다. 노정일[5]에 의해 1931년 11월 27일에 《중외일보》의 후신으로 간행된 신문이다. 운영 미숙과 재정 부족으로 인해 1932년 4월 공무국 직원 전원이 밀린 급료를 요구하는 파업을 벌이고, 5월 4일에는 편집국장 이하 전 직원이 파업에 참여했다. 결국 5월 5일 휴간했으며, 최선익과 윤희중에게 발행권을 넘긴다.[6] 최선익과 윤희중에게 인수된 《중앙일보》는 1932년 10월부터 속간된다. 《중앙일보》 사장으로 추대된 인물은 여운형이었다. 그의 취임 후 1933년 2월에 《조선중앙일보》로 이름을 바꾸어 발행하게 된다.

2.3.1. 노정일의 언론관

《중앙일보》의 역사에서 노정일이라는 인물은 떼어놓기는 어렵다. 미국 유학 생활을 했던 노정일은 1930년 4월 당시 조선총독이었던 사이토에게 외국 식민지 통치에 대한 소감, 조선 통치에 대한 견해, 조선인의 공통된 단점, 민심 지도의 필요성 등을 밝힌다. 노정일은 조선은 식민지가 되어서는 안되며, "일시동인의 성지에 따라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일본과 조선이 가장 밀접한 관계라고 생각했으며, 동화가 숙명적이라고 생각했다.

노정일은 이를 위해 정치 외에 민족성의 개량과 교육이 필요하며, 이것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민심을 이끌어 갈 언론기관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윤갑병은 사이토 총독에게 노정일을 추천하며 "언론으로 민심 지도를 맡을 각오를 하고 있으나 때가 오지 않아서 할 일 없이 세월을 보내고 있어서 애석하다"고 말한다. 1929년 겨울, 경무국에서 《매일신보》의 개혁안을 의뢰받은 노정일은 자신의 생각을 담아 '특종신문 경영안'을 작성해 제출했으나 채택되지 않는다.

이후 1930년 말, 노정일은 사이토 총독에게 《중외일보》 인수를 위한 자금 지원을 요청한다. 노정일은 사이토 총독에게 지원금을 받아[7] 《중앙일보》를 간행했다. 《중앙일보》는 1931년 11월 27일 '속간사'에서 《중외일보》와의 네 가지 차이점을 밝힌다.
첫째로 내부 전용 외에 《중외일보》를 폐지하고 중앙일보로 개칭하며, 둘째로 좁은 옛 사옥을 버리고 견지동의 신축 사옥으로 이전하며, 셋째로 독자의 경제적 부담을 고려하여 구독료를 내리며, 넷째로 양보다는 질을 중시해 집약적 편집법으로 지면을 4면으로 축소했다는 것이다.
장신, '조선·동아일보의 탄생', 146p

2.4. 조선중앙일보

1933년에 여운형이 사장에 취임하면서 제호를 《조선중앙일보》로 고쳤다. 이 무렵 《동아일보》, 《조선일보》와 함께 조선의 3대 일간지로 자리매김했으며 사옥을 증축했고 소속 잡지로 《중앙》, 어린이 잡지 《소년중앙》을 발행했다.
파일:external/zbook.moazine.com/001.jpg
<colbgcolor=#9D6A58> 《소년중앙》 창간호 표지
《소년중앙》 창간호 표지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화가가 사장 여운형에게 표지 그림을 제출하자 "아이들이 밖에서 씩씩하게 뛰노는 그림을 그릴 것이지"하며 약간 불만을 표했다. 화가는 이에 대해 '그 애들이 눈 속에서 한참 뛰놀다가 지금 막 들어와서 불을 쬐는 장면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여운형은 어이없어서 웃으면서 표지로 싣는 것을 허락했다고 한다.

여운형의 취임 당시 편집국은 《조선일보》 출신 인사들이 대다수였으나[8], 1934년 7월 주식회사로 전환되며 편집국에 변화가 있었다. 또한, 1935년 중반 《조선중앙일보》 내에서 경영권 분쟁이 발생하며 최선익이 떠나게 된다. 두 사건으로 《조선일보》 출신 기자들은 떠나고, 여운형과 정치적 입장을 같이하거나 개인적으로 가까운 기자들이 다수를 이루게 된다. 소유주가 명확한 《조선일보》나 《동아일보》와는 달리 《조선중앙일보》는 몇 사람의 대주주로 나뉘어 있었기 때문에, 외부에서 영입된 사장 여운형이 편집국 진용 구성 시 그의 의중을 많이 반영할 수 있었으며, 타 신문사에 비해 운신의 폭이 넓은 편이었다. 이는 《조선중앙일보》가 제한적이나마 타 신문과 차별적 논조를 보일 수 있었던 기반이 됐다.

1936년 8월 9일, 제11회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경기에서 손기정 선수가 한국 역사상 최초이자, 세계 신기록으로 우승하는 쾌거를 이뤘다. 조선의 한글신문들은 손기정 선수의 승리를 한민족의 승리로 간주했으며, 민족의 자긍심을 높이는 사설과 기사를 냈다. 그 전까지는 조선총독부에서도 민족 의식을 드러내는 기사에 많은 제재를 가하지 않았으나, 8월 13일자 《동아일보》와 《조선중앙일보》는 시상대에 서 있는 손기정의 가슴에 새겨진 일장기를 지운 채 보도한 것을 기점으로 상황이 급변한다. 《동아일보》를 무기정간시켰으며, 뒤늦게 총독부는 《조선중앙일보》의 사진도 재수사한 뒤 관련자를 구속했다. 결국 《조선중앙일보》는 9월 4일, 당국의 허가가 있을 때까지 9월 6일부터 휴간하겠다는 사고를 내게 된다[9]. 초반에는 곧 속간할 듯 보였으나, 오랜 재정난과 경영권 분쟁으로 결국《조선중앙일보》는 속간을 하지 못한 채 1937년 11월 5일자로 폐간된다.

일장기 말소사건 당시 《조선중앙일보》 1936년 8월 13일자 서울판 기사와 날짜가 동일한 《동아일보》의 1936년 8월 13일자 지방판 기사가 발굴되면서 《조선중앙일보》의 원조설은 논파되었다.
파일:external/2ab251e6d2db1c9930d78f8c0eca03c3d11891d1d366354159bf50c43b9df85e.jpg
<colbgcolor=#9D6A58> 1936년 8월 13일자 《조선중앙일보》(좌), 《동아일보》(우)의 지방판 기사이다.
채백 부산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저서 《사라진 일장기의 진실》(커뮤니케이션북스 펴냄)을 통해 《조선중앙일보》가 가장 먼저 손기정의 우승사진에서 일장기를 말소했다는 주장이 학계에서 널리 알려졌지만 《동아일보》도 《조선중앙일보》와 같은 날 이 사진을 보도했다고 말한다. "8월 13일자 《동아일보》 조간 지방판에 《조선중앙일보》(서울판)가 게재한 사진과 똑같은 사진을 실었는데, 서울판이 당일 새벽에 인쇄하던 반면 지방판 조간은 그 전날 인쇄하던 관행에 비춰, 손기정의 우승 사진은 《동아일보》가 먼저였다고 결론 지을 수 있다"고 말했다.일장기 말소 사건의 진실은?

《조선중앙일보》의 폐간의 실상은 조선총독부의 1936년 극비문서와 《삼천리》 1938년 1월 1일 신년호에 잘 나타나 있다. 내용은 아래와 같다.
“소화 11년(1936년) 8월 13일자 지상에 ‘머리에 빛나는 월계관, 손에 굳게 잡힌 견묘목, 올림픽 최고 영예의 표창 받은 우리 손 선수’라는 제목 아래 사진을 게재했다. 그러나 전기 동아일보와 같은 모양의 손기정의 가슴에 새겨있는 일장기 마크는 물론, 손 선수 자체의 용모조차 잘 판명되지 않는 까닭에 당국으로서는 당초 졸렬한 인쇄 기술에 의한 것이라 판단했으나 일단 관할 경찰 당국을 시켜 조사한 결과 동아일보처럼 손기정의 가슴에 새겨져 있는 일장기 마크를 손으로 공들여 말소시킨 사실이 판명되었다. 그렇지만 동사(同社) 사장 여운형 이하 간부는 전연 그 사실을 부인하다가 사실이 밝혀지자 하는 수 없이 근신의 의미로 같은 달(9월) 4일에 이르러 당국의 처분에 앞서 ‘근신의 뜻을 표하고 당국의 처분이 있을 때까지 휴간한다’ 운운의 사고(社告)를 게재함과 동시에 휴간 수속을 이행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극비문서 〈조선출판경찰개요〉, 조선총독부 경무국 도서과,1936년, 119 ~ 120쪽
소화 11년(1936년) 9월 5일, 동업 동아일보가 같은 사건으로 경무국으로부터 발행정지의 처분을 받자, 중앙일보는 자진휴간의 거조(擧措)에 출(出)하야 1개년간이나 경무 당국의 속간 내락을 얻기에 진력을 하였으나 사태 불순하야 한갓 헛되이 일자를 끌어오다가, 만 1년을 지나 또 제 9조에 의한 2개월간의 기한까지 지나자 11월 5일에 저절로 낙명(落命)하게 된 것이다. 같은 사건으로 처분을 받았던 동아일보는 그래도 그 제명(題名)을 살려 다시 속간함에 이르렀는데, 어찌하야 당국의 정간 처분도 아니오 자진 휴간한 말하자면 경미한 중앙일보만 낙명하게 되었느냐 함에는 여기에 여러 가지 복잡한 사정이 잠재하여 있었던 것이다. (중략) 휴간 중에 현 사장(呂運亨) 지지파와 신 사장(成元慶) 지립파(持立派)의 알력이 있어 호상 대립이 되어 중역회에서나, 주주총회에서나 분쟁이 늘 끊이지 않아(不絶)왔으며 거기다가 8만원 공(空) 불입 같은 것이 튀어나와 주식회사 결성 중에 큰 의혹을 남긴 오점까지 끼쳐놓았음이 후계 간부가 사무국을 이해시킬만 한 공작을 1년 내내 끌어오면서도 이루지 못한 등 여러 가지의 실수가 원인이 되어 파란 많은 역사를 남기고 끝내 무성무취(無聲無臭)하게 마지막 운명을 짓고 말았다.
〈오호, 중앙일보 逐 폐간, 이십여년의 언론활약사를 남기고〉, 《삼천리》, 1938년 1월 1일 신년호

3. 성향

3.1. 중앙일보

노정일이 사장일 당시의 성향과 논조는 여운형의 《조선중앙일보》와는 사뭇 다르다. 《중앙일보》는 신문의 논지나 질이 좋지 못하다는 비난을 받았다. 이로 인해 《시대일보》, 《중외일보》, 이후의 《조선중앙일보》와는 달리 조선의 민간지로서 자격을 갖추지 못했다고 평가받았다. 설화자는 "신문 수준에 이르지 못한 신문"인 데다가 "사설은 냄새나는 황분통에서 방금 주워 낸 듯이 악취가 코를 돌릴 지경"이라며 상당한 혹평을 할 정도이다. 설화자에서 더 나아가 박래춘은 사설 몇 가지를 예로 들며, 사설은 보통학교에나 쓰일 수준이고 조선의 민간지를 표방하면서 총독부의 입장을 대변한다며 비판한다.
사설은 총독부에 보내어 보통학교의 수신 교과 편찬의 자료로나 쓰일 것이다. 그 문장의 유치함은 중학교 일년생의 작문이다. 편즙체재는 十九世紀式(19세기식)이요, 誤字(오자)의 數(수)가 正字(정자)의 수보담 더 만타. 삽화와 만화는 그야말로 만화가의 만화 재료다. 뉴-스는 항융 삼사일씩 뒤진다. 이것은 신문이 아니라 신문지다. 이럴 바에야 조선의 민간지 대립으로부터 정립이 될 필요가 중앙일보 자체로 보나 독자편으로 보나 절대로 업지 아니하냐. 동아와 조선 이외의 신문을 그래도 요구한다면 매신이 잇지 아니한가.
박래춘(朴來春), '노정일(盧正一)과 중앙일보(中央日報)', 66쪽

박래춘의 비판은 노정일의 《중앙일보》 창간 목적이기도 했기에 정확히 짚었다 볼 수 있다. 다만 노정일은 《매일신보》를 대체하여 조선 통치에 기여하는 '어용지'를 원했으나, 평가를 보면 《매일신보》조차 되지 못했다.

중앙일보의 1면 제호 옆에는 '중앙평단', '평단', '논설'이라는 제목을 단 사설[10]이 매일 실렸다. 논설위원이 누구였는지는 확실히 알기 어려우나, 정치 분야는 편집부장 김남주, 경제 분야는 정경부장 배성룡이 맡았다. 비판받은 사설들은 민족주의도, 사회주의도 아닌 논지를 가져, 뚜렷한 방향성 없이 사회문제를 관념적으로 해석했다. 의외인 점은 신년사를 제외하면 아무리 빨라도 1932년 2월 말까지는 노정일이 사설이나 평단에 개입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결국 노정일은 자신의 이상을 구현하는 데 실패했다고 평가된다.

3.2. 조선중앙일보

성향이나 논조는 반일논조가 분명했다. 《조선중앙일보》는 수위부터 사장에 이르기까지 정치, 사상관계 전과자(즉 항일운동가)만 20명에 이르는 신문사가 된다. 예를 들어 홍증식, 조동호, 임원근 등이 대표적이다. 범죄행위나 총독부 협력자, 특권층 비리는 가차없이 대차게 깠다. 대표적으로 최린, 박희도를 들을 수 있다. 특히, 박희도 같은 경우는 매우 심하다 싶을 정도로 대차게 까곤 했는데, 박희도가 그 당시 제자들과 불륜관계, 성관계를 맺고 있다든가 사생활이 굉장히 지저분한 걸로 유명했다. 반면 빈민, 노동자, 농민, 학생에 대한 지지는 최고조였다.[11] 1930년대 《조선일보》나 《동아일보》가 상업화를 주도해나간 흐름과는 달리, 사장 여운형은 기본적으로 신문들 간의 판매나 광고를 위한 지나친 경쟁을 자제할 필요가 있다는 입장에 서기도 했다.

국내 일간지 중 최초로 스포츠면을 따로 만들었다. 사장 여운형이 스포츠를 좋아했기 때문. 실제로 당시 《중앙일보》 주필이라거나 기자들 중에서 스포츠 관련 인사들이 상당히 많았다고 한다. 축구에 대한 애착을 가진 기사를 작성했으며 1936년 3월 1일에 "우리의 국기인 축구"라는 표현을 썼고, 같은 해 4월 16일자 지면에서는 "우리 겨레가 사는 그 어떤 곳에서도 뽈차기를 모르는 이가 별로 없다"고 보도했다.#

존속 기간은 짧았지만 과감한 시도를 많이 했으며 이상의 〈오감도〉를 실어서 독자들의 빗발치는 항의를 받은 적이 있다.

4. 여담

파일:external/farm1.static.flickr.com/487848321_03dd771c15.jpg
<colbgcolor=#9D6A58> 구 《조선중앙일보》 사옥
당시 사옥으로 쓰인 건물이 아직도 남아 있다. 서울 지하철 1호선 종각역 인근으로 종로 보신각에서 안국동 사거리로 가는 길(서울시 종로구 우정국로 38-1)에 있으며, 현재 NH농협은행 종로금융센터 자리다. 이 건물은 해방 이후에 자유당 중앙당부 건물로도 사용되었다. # 현장에 있는 안내비석에 따르면 1970년에 농협이 인수했다.

연재된 만화로는 오성대감, 심산 노수현의 〈머저리와 문여리〉(1934년 5월 ~ 1934년 7월 《조선중앙일보》에 60회 연재) 등이 있다. 《조선일보》의 〈멍텅구리 헛물켜기〉 시리즈와 비슷한 만화[12]로 올림픽에 참여한다거나, 세계여행을 하고, 필리핀 여성으로 착각한 마네킹을 구조하는 에피소드가 있다. 참고로 여운형에 대해 알고나서 〈머저리와 문여리〉를 보면 은근히 기묘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사장을 모델로 그린 것임이 틀림없다

5. 대중매체


[1] 폐간 당시.[2] 주간지 《동명》은 일제의 문화통치 시행과 함께 발행된 신문 중 하나인 《시사신문》의 발행권을 최남선이 인수한 후 1922년 9월 3일부터 발행됐다.[3] 이상협은 《동아일보》 창간에 참여해 초대 편집국장을 지냈으며, 《조선일보》로 옮겨간 뒤에도 《조선일보》의 기반을 잡는 데 공헌한 인물이다.[4] 1928년 두 번의 필화 사건으로 관련자가 처벌받고 무기정간 처분을 받았다.[5] 친일적 성향으로 지탄받은 인물이기도 하다. 강동진은 사장 노정일을 직업적 친일분자로 분류했다.[6] 정진석, 한국 언론사, 426~428p[7] 조선총독부의 자금이라기 보다는 사이토 총독 개인의 기밀비로 봐야 한다. 즉, 《중외일보》 발행권 인수가 조선총독부의 언론정책이라고 보기는 어렵다.[8] 《조선일보》 경영권 분쟁 때 최선익과 함께 안재홍, 이승복에 반대한 이들이다. 《조선일보》 퇴사 후 노정일의 《중앙일보》로 옮겼다가 최선익과 윤희중의 인수로 그대로 《조선중앙일보》에 남았다.[9] 채백, '사라진 일장기의 진실', 2008, 101~112p[10] 1931년 11월 29일부터 12월 11일까지 '중앙평단', 12월 12일부터 1월 18일까지 '평단'과 10여 개의 '논설', 1월 10일부터는 '논설'만 실린다.[11] 이는 조선중앙일보의 등장 시기가 한창 일제가 검열을 강화하던 시기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정치적인 이슈를 실어 비판하기 쉽지 않았기 때문에 대신 친일 인사들의 사생활 고발로 저항을 했던 것.[12] 애초에 〈멍텅구리 시리즈〉가 노수현의 만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