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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09-14 18:41:20

고려시보

파일:일본 제국 국기.svg일제강점기의 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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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보
高麗時報
<colbgcolor=#2e2e2e><colcolor=#fff> 국가 파일:일본 제국 국기.svg 일본 제국령 조선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대한민국
창간 1933년 4월 15일
폐간 1941년 4월 16일
복간 및 재폐간 1945년 ~ 1950년
설립 및 운영자 공진항, 김학형, 김재은, 고한승, 이선근, 김영의
박일봉, 김구[A], 김병하, 마태영, 박재청
상장여부 상장기업
종류 지방신문
파일:고려시보.jpg
<colbgcolor=#2e2e2e> 《고려시보》의 영인본, 영인초고, 원본, 발췌본[2]

1. 개요2. 역사3. 고려시보 유물

[clearfix]

1. 개요

일제강점기 중후반과 대한민국 초기에 발간한 경기도 개성시지방신문. 개성의 사회상과 현안을 다루었다. 개성의 지역신문이었으나, 개성 외에 황해도까지도 보급 대상 지역으로 삼았다. 이름은 개성을 수도로 삼았던 국가 고려에서 따왔다.

2. 역사

1933년 4월 15일에 경기도 개성부에서 창간되었다. 창간 당시에는 동인제(同人制)로 운영했다. 동인제는 모든 운영진이 권리와 의무를 동시에 지는 방식을 말하는데, 당시 동인이었던 사람들은 공진항, 김학형, 김재은, 고한승, 이선근, 김영의, 박일봉, 김구[A], 김병하, 마태영, 박재청 등 10명이었다.

설립 2년 뒤인 1935년 6월에는 주식회사로 체제를 전환했다. 이 때 발기인은 34명이었는데, 개성 출신 유지들을 비롯하여 여운형 등 유명인사들도 이름을 올렸다.

조선총독부의 언론통폐합 정책으로 1941년 4월 16일에 강제 폐간당했다. 1945년에 광복이 되면서 바로 복간했으나 1950년 6.25 전쟁이 터지면서 결국 문을 닫고 말았다.

3. 고려시보 유물

《고려시보》는 현재 남아있는 것이 거의 없다. 6.25 전쟁 때 대부분이 불타 사라졌기 때문이다. 다만, 소수는 남아있는데 남게 된 과정도 매우 극적이다.

6.25 전쟁이 끝난 후 개성 출신 기업인 김용남이 서울 근교의 인삼밭을 지나가던 중에, 우연히 한 인부가 집에서 아궁이 불을 피우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그때 불쏘시개로 사용한 종이가 눈에 띄어 자세히 들여다보니 바로 《고려시보》였던 것. 김용남은 이를 보고 귀중한 개성의 자료가 사라지는 것을 매우 안타까워하여 인부에게 큰 돈을 주고 그나마 남아있던 《고려시보》 신문지들을 매입했다고 한다. 김용남은 사들인 신문들을 개성시민회에 기증했고, 이후 개성시민회에서 계속 보관했다.

그러다 2018년 3월에 박광현 개성시민회 및 (주)제일향역 회장과 그의 아들 박수종 경희대학교 우주과학과 교수가 《고려시보》와 관련한 유물 4점을 국립중앙도서관에 기증했다.# 유물은 《고려시보》 원본을 비롯하여 《고려시보》의 주필이었던 박재청이 집필한 문학 작품들을 따로 뽑아내어 펴낸 《고려시보 발췌》 및 《고려시보》 영인본, 《고려시보》 영인 초고 등이다. 참고로 기증자 박광현 - 박수종 부자는 각각 박재청의 아들과 손자이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기증받은 자료를 데이터화시켜 현재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를 통해 공개했다. 누구나 무료로 읽을 수 있다. 링크


[A]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을 지낸 김구와는 동명이인.[2] 사진 출처 - 국립중앙도서관.[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