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의 신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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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독립신문 朝鮮獨立新聞 | |||
<colbgcolor=#d60026><colcolor=#fff> 국가 | 일본 제국령 조선 | ||
창간 | 1919년 3월 1일 | ||
폐간 | 미상 | ||
설립단체 | 보성사 | ||
사장 | 윤익선 | ||
편집 | 이종린 | ||
책임자 | 이종일, 김홍규 | ||
종류 | 지하신문 |
<colbgcolor=#d60026> 1919년 3월 1일 자 《조선독립신문》 창간호[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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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3.1 운동 당시에 천도교 계열의 보성사에서 창간한 독립신문. 여기서 말하는 독립신문은 1896년(건양 원년)에 발간한 《독립신문》이나, 1919년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만든 《독립신문》과는 전혀 관련이 없으며, '대한독립의 염원을 담은 신문'이란 의미의 일반 명사로 사용한 것이다.2. 역사
1919년 3월 1일에 창간되었다. 날짜를 보면 알겠지만, 3.1 운동이 일어났던 바로 그 날이며 신문을 만든 목적도 3. 1운동 관련 소식을 조선 민중들에게 널리 알리기 위함이었다.제작소는 천도교에서 설립한 인쇄소 보성사로, 그 유명한 기미독립선언서를 인쇄한 곳으로 잘 알려진 곳이다. 만세 운동 시작 직전에 《조선독립신문》의 창간호 1만 부를 인쇄하여 배포했다. 신문사 사장은 윤익선이었으며 책임자는 보성사의 사장 이종일과 감독 김홍규였다.[A]
3.1운동이 전개된 후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이었던 이종일은 태화관에서 체포당했고, 사장 윤익선도 그날 오후에 연행당했다. 이종린만이 피신에 성공하여 관훈동 경성서적조합 사무소에서 장종건과 함께 등사기를 활용하여 계속 신문을 냈다. 그러나 9일 뒤에 이종린도 체포당하자 장종건은 광화문통(현재의 세종로) 유병윤의 가옥으로 몸을 숨겨 신문을 제작했다. 그러나 15일 뒤에 장종건 또한 붙잡혀서 한동안 신문의 맥은 끊겼다.[A]
그러나 이후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계속 신문을 만들었다가 잡혀가길 반복했다. 1919년 그해 8월 29일에는 경술국치 특집으로 기사를 내기도 했다.[A]
언제까지 이 신문이 제작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1920년 경 안팎으로 추정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