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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3-30 00:58:33

민족대표 33인

3.1 운동의 민족대표 33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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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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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대표 33인 김좌진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1]
취소선은 부정적으로 언급된 인물이다.
[1] 실제 홍길동을 언급한 건지 후대 인물 허균이 창작한 의적 홍길동을 언급한 건지 논란이 있지만 간접적인 언급으로 소설 홍길동전에서 대중화된 의적 이미지를 노래 가사로 사용했으므로 저자 허균을 생각하고 언급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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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상세3. 명단
3.1. 33인 중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된 인물3.2. 민족대표 48인?
4. 비판5. 기타

1. 개요

1919년 3.1 운동 당시 기미독립선언서와 독립통고서에 서명한 33명의 사람들.

2. 상세

손병희를 위시한 천도교계 인사들이 주축이 되었다, 이들은 한규설, 윤용구[1], 박영효, 윤치호[2], 이완용과도 접촉했다. 그러나 별 반응이 없자 개신교, 불교, 가톨릭, 유교 등의 종교계 인물들과 접촉하여 민족대표를 꾸리게 되었다. 이 때 가톨릭유교는 각 단체의 이해관계로 참여하지 않았고, 불교계는 일본 불교의 침투로 혼란스러운 상황이라 두 명만이 참가했다. 반면 개신교는 개신교 내의 민족/독립운동을 탄압하는 105인 사건으로 일제에 대한 반감이 올라있던 상황이라 천도교의 제의에 적극적으로 동참했다. 결국 천도교 15인, 개신교 16인, 불교인 2인으로 33인의 민족 대표단이 결성되었다. 원래는 천도교 15인, 개신교 15인으로 30인을 구성하려 했으나 개신교 종파인 감리회장로회가 숫자를 놓고 다투다가 각각 8명을 내세우고 16명으로 개신교 대표를 늘리는 대신, 불교 2인도 포함시키면서 현재의 33인으로 구성되었다.

의외로 민족종교인 대종교 인사들은 여기에 관계하지 않았다. 당시 대종교 교단은 분리되어서 반일세력은 만주로 거점을 옮겼고 당시 국내에 남아있던 단군교는 일제 식민체제에 협력했기 때문이다.

유교는 학파별로 참가 여부를 놓고 갈등이 심했는데 호남의 거물 유림인 간재 전우는 '"머리 깎은 자들의 복국 운동은 유림으로써 상종할 일이 되지 못한다."'라고 거부했지만, 심산 김창숙을 비롯한 유림들은 드디어 죽을 자리를 찾았다고 기뻐하면서 참가를 결정했다. 결국 영남 지역 등 일부 학파에서 김창숙을 비롯해서 유림대표 2인을 파견했는데, 모친의 와병으로 인해 사정이 생겨서 늦게 도착하여 서명할 기회를 놓쳤다. 독립선언서에 유림 대표들의 이름이 없는 것을 안 유림 대표들은 막대한 죄를 지었다며 길바닥에서 뒹굴며 통곡했다고 한다. 그러자 군중들이 "이놈아, 통곡은 왜 하느냐. 나라를 망칠 때는 너희 놈들이 온갖 죄악은 다 지어놓고[3] 오늘날 민족적 독립운동에는 한 놈도 끼지 아니하였으니. 이놈아, 이러고도 다시 유림이라 오만하게 자부하려느냐?"라고 욕설을 퍼부으며 면박을 주자, 이에 크나큰 충격을 받은 김창숙 등은 파리평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보내 이 수치를 씻자고 제의하기에 이른다. 3.1운동에 대한 부채의식을 가진 유림 세력의 최후의 함성이 면우 곽종석을 중심으로 시작된 1919년의 파리 장서 사건으로 베르사유 조약에 국내 유림의 편지를 보내 독립을 호소하기로 한 것이다. 간재 전우를 비롯해서 외적을 데려와 외적을 물리치는 일이나 머리깎은 자들의 복국 운동이나 유림으로서 할짓이 못된다고 거부한 사람들도 있었으나 드디어 죽을 자리를 찾았다고 기뻐하며 참여한 유림이 더 많았다. 하지만 일본에 의해 발각되는 바람에 실패로 돌아간다. 곽종석 등 여러 유림들이 투옥되었다가 순국했다. 유림 세력들이 천한 상놈들의 모임이라 참여하지 않았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한용운이 변절 또는 한용운을 제외하고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되었다거나 민족대표 33인은 만세운동이 항일운동의 전부라는 주장도 있는데, 근거없는 루머에 불과하다. 확실하게 식민지 체제에 협력한 사람은 박희도, 정춘수, 최린의 3명(최남선을 포함하면 4명)밖에 안 되며[4], 나머지 대표들은 3.1 운동 직후 또는 이후로도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붙잡혀 감옥에서 옥사하거나, 살아남았더라도 일제를 피해 중국과 미국 등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계속했다. "3·1운동 이끈 민족대표 대부분 변절했다고?"

3. 명단

3.1. 33인 중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된 인물

3.2. 민족대표 48인?

파일:external/www.independence.or.kr/sam4.jpg
손병희 최린 권동진 오세창 임예환 권병덕 이종일 나인협
홍기조 김완규 나용환 이종훈 홍병기 박준승 이승훈 박희도
최성모 신흥식 양전백 이명룡 길선주 이갑성 김창준 이필주
오화영 박동완 정춘수 신석구 한용운 백용성 안시환 임규
김지환 최남선 함태영 송진우 정노식 현상윤 이경섭 한병익
김홍규 김도래 박인호 노헌용 김세환 강기덕 김원벽 유여대

배경은 일본 법정에서 3.1운동 관련으로 재판을 받은 것이고, 이들의 사진이 당시 동아일보를 통해서 알려지면서 48명이라는 숫자가 남았다. 이들은 33인의 민족대표 가운데 31인[11]에 3.1운동 관련으로 잡혀서 같이 재판을 받은 17인을 더한 것이다. 물론 이 명단 자체는 인지도도 낮거니와, 김병조와 특히 옥고로 사망한 양한묵을 제외하는 것이 말도 안된다는 이유로 온갖 형태의 바리에이션이 존재한다[12]. 민족대표, 민족지도자, 3.1운동 지도자 등에 숫자도 48, 49, 50이 모두 존재한다.

4. 비판

민족대표 33인의 독립운동 방식은 외교론적, 평화론적인 방법에 근거한 것으로서 지나치게 낙관론적이고 제국주의의 비인간성을 무시했다는 비판이 있다. 경술국치 전의 헤이그 특사가 무시를 당했듯이, 아무리 명분이 차고 넘쳐흘러도 1차대전 승전국 일본에 한국의 독립을 압박해줄 세력은 없었다. 이 당시에도 이러한 이유로 민족대표 33인의 활동과 독립운동을 비판한 독립운동가가 몇몇 있었고 일부는 무장투쟁으로 노선을 바꾸기도 했다3.1운동을 비판한 독립운동가 김산의 절규.

민족대표 33인은 그들이 출동한 일본 헌병에게 인력거 대신 자동차를 요구하자, 일본 헌병들은 비웃었다고 한다. 아울러 재판을 받으면서 민족대표 33인은 ‘사의 천박한 학생과 군중이 모였으니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몰라 (손병희)’ ‘무식한 자들이 불온한 일을 할 것 같아서 (박희도)’ 장소를 변경했다고 법정에서 말했다.# 물론 3.1운동이 전국적으로 퍼지면서 폭력사태가 있기는 했지만,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에 반발한 것이지 무턱대고 쳐들어간 것은 아니었다.

33인의 행동에 대해 지휘부로서 시위와 봉기를 주도하는 등 적극적인 독립운동을 이어가지 않고 자수하는 어리석은 짓이라 평하는 사람도 있다. 조선민족이 일본에 독립을 청원하거나 협상을 청한 것이 아니라 떳떳하고 당당하게 '선언'한 것인데, 자수를 한 것 자체가 죄를 지었다 인정하는 행위로 비춰져 독립선언의 당위성 자체를 깎아내린다는 것. 민족대표 33인이 자수한 취지는 만세시위의 배후라 할 수 있는 자신들이 자수함으로써 무고한 시민들을 학살하지 않고 그들의 시위 또한 막지 말라는 취지였으나, 10년간의 혹독한 무단통치를 실시해 온 식민지 당국을 상대로는 순진무구한 요구였다고 할 수 있다.

5. 기타



[1] 나무위키 문서 윤용구에 적혀있는 인물과는 전혀 다른 인물이다.[2] 이때 윤치호는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일제 식민체제에 협력한 것도 아니었다. 윤치호가 적극적으로 일제 식민체제에 협력한 것1940년경이다.[3] 굳이 말하자면 이들이 직접적으로 잘못된 정책을 수립, 집행하여 나라를 망치거나 백성들의 삶을 도탄에 빠뜨린 책임은 없지만, 유교적 논리에 따르면 이런 시기에야말로 유림들이 필요한 때로 유림들이 이를 바로잡아줘야 한다. 그러나 이 시기의 유림들은 세도가들에게 제대로 맞서지 않았고, 그러한 점에서 책임이 컸다는 의미다.[4] 한때는 최근우 역시 1940년 이후로 만주국 협화회에서 활동했다는 기록을 근거로 추후에 변절했다는 주장이 제기되어 친일인명사전에 등재까지 되었으나, 후속 연구에서 실제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측의 밀정으로 활동하느라고 거짓으로 전향했음이 밝혀지면서, 친일인명사전 등재가 취소되었다.[5] 1907년 평양 대부흥의 발단이 된 인물이기도 하다. 당시에는 장로였다.[6] 이날이 47세 생일이었다.[7] 2023년 3.1절 기념식에서 광복회장의 부재로 임예환의 증손이 유족대표로 독립선언문을 낭독했다.[8] 확실하지 않다.[9] 여제자와 키스 내기 화투를 했다는 것이 알려져 엄청 시끄러웠다. 이를 처음 보도한 신문은 조선중앙일보였다. 이 사건으로 박희도가 여자와 곱사춤을 잘 추는 명인이라고 소개되는 합성 드립까지 나왔다. 사진은 한용운 항목에서 볼 수 있다.[10] 이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의 조사를 받게 되며 기독교대한감리회에서 목사직을 파면당하고 출교 조치되었고 아내와 함께 가톨릭으로 개종한다. 문서 참조.[11] 국외로 망명하여 체포되지 않은 김병조, 체포되어 옥고로 사망한 양한묵은 제외[12] 석호필을 집어넣거나, 이승만이 여기에 포함되기도 한다.[13] 김형직도 독립운동에 동참했다. 그러나 북한의 공식 사관에서는 김일성 우상화에 이용하려고 실제보다 과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