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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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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a52a2a><colcolor=#ffffff> 장영실
蔣英實
파일:장영실 표준영정(얼굴 확대).png
▲장영실 표준영정(박영길 作)
본관 불명 ('본관 논쟁' 문단 참조)
생몰년도 1385년~1390년 정도 또는 1393년[1] ~ 1442년 이후
출생지 경상도 동래현 (現 부산광역시)
직업 관료, 기술자

1. 개요2. 생애3. 본관 논쟁4. 대중매체
4.1. 드라마4.2. 영화4.3. 만화4.4. 게임4.5. 뮤지컬4.6. 소설
5. 평가6. 기타

[clearfix]

1. 개요

조선 세종 때 활약한 기술자이다.

경상도 동래현(현 부산광역시)의 관노의 아들로 태어난 노비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태종에 의해 등용되었으며, 세종이 중용했다. 간의, 앙부일구, 옥루, 일성정시의를 제작하였다.

2. 생애

영실(英實)은 동래현(東萊縣) 관노(官奴)인데, 성품이 정교(精巧)하여 항상 궐내의 공장(工匠) 일을 맡았었다.
세종실록, 세종 16년(1434) 7월 1일 4번째 기사
행 사직(行司直) 장영실(蔣英實)은 그 아비가 본래 원(元)나라의 소주(蘇州)·항주(杭州) 사람(其父本大元蘇ㆍ杭州人)이고, 어미는 기생이었는데, 공교(工巧)한 솜씨가 보통 사람에 뛰어나므로 태종께서 보호하시었고, 나도 역시 이를 아낀다.

임인·계묘년[2] 무렵에 상의원(尙衣院) 별좌(別坐)를 시키고자 하여 이조 판서 허조와 병조 판서 조말생에게 의논하였더니, 허조는, '기생의 소생을 상의원에 임용할 수 없다.'고 하고, 말생은 '이런 무리는 상의원에 더욱 적합하다.'고 하여, 두 의논이 일치되지 아니하므로, 내가 굳이 하지 못하였다가 그 뒤에 다시 대신들에게 의논한즉, 유정현(柳廷顯) 등이 '상의원에 임명할 수 있다.'고 하기에, 내가 그대로 따라서 별좌에 임명하였었다.

영실의 사람됨이 비단 공교한 솜씨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성질이 똑똑하기가 보통에 뛰어나서, 매양 강무할 때에는 내 곁에 가까이 두고 내시를 대신하여 명령을 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어찌 이것을 공이라고 하겠는가. 이제 자격궁루(自擊宮漏)를 만들었는데 비록 나의 가르침을 받아서 하였지마는, 만약 이 사람이 아니더라면 암만해도 만들어 내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들으니 원나라 순제(順帝) 때에 저절로 치는 물시계가 있었다 하나, 그러나 만듦새의 정교함이 아마도 영실의 정밀함에는 미치지 못하였을 것이다. 만대에 이어 전할 기물을 능히 만들었으니 그 공이 작지 아니하므로 호군(護軍)의 관직을 더해 주고자 한다.
세종실록, 세종 15년(1433) 9월 16일 3번째 기사
(장영실은) 중국계 귀화인과 기녀 사이에서 태어났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는 아산(牙山)의 명신으로만 기재되어 있다. 동래현의 관노로 있을 때 그의 재주가 세종에게 인정되어 중국에 파견, 천문기기 연구의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장영실(蔣英實) #

장영실의 정확한 생몰년도는 알려지지 않는다. 실록의 기록에 따르면 장영실의 어머니는 동래부 관기였고, 장영실의 아버지 장성휘에 대해서는 중국 소주, 항주 지방 출신의 원나라 사람이라고 밝히고 있다.

실록에는 1423년 장영실이 상의원 별좌로 임명되었다는 내용이 등장하며[3], 이후 행사직(行司直), 1434년 호군(護軍) 등의 직책을 거쳐 1438년 대호군(大護君)까지 오른다. 그리고 후술할 가마가 부러지는 사고로 인해 파직된 것이 1442년이다. 따라서 이러한 활동 기록을 토대로 장영실의 출생 시기는 1385~1390년생 정도로 보고 있다.

그는 금속 제련, 성곽 축조, 농기구, 무기 수리 등에 탁월한 기술력을 가지고 있었고 전하는 이야기로는 동래현이 가뭄으로 위기에 처했을 때 수로를 파고 먼 곳에서 물을 끌어올 수 있게 수차(오늘날로 따지면 양수기 펌프 비슷한 기구)를 개발해내어 동래현에 들었던 가뭄을 해결했다고 한다. 이 사실이 세종에게 보고 되어 한양으로 불려갔다고 잘 알려져 있지만 이는 연려실기술에 있는 기록이며 태종실록에서부터 장영실이 등장하며 그 실력을 인정받아 보호받았다고 한다.

역시 연려실기술에는 세종 초년에 장영실에 대한 기록이 있다.
3년 신축에 남양 부사 윤사웅, 부평 부사 최천구, 동래 관노 장영실을 내감으로 불러서 선기옥형 제도를 토론하여 연구하게 하니 임금의 뜻에 합하지 않음이 없었다. 임금이 크게 기뻐하여 이르기를, “영실은 비록 지위가 천하나 재주가 민첩한 것은 따를 자가 없다. 너희들이 4중국에 들어가서 각종 천문 기계의 모양을 모두 눈에 익혀 와서 빨리 모방하여 만들어라.” 하고, 또 이르기를, “이 무리를 4중국에 들여보낼 때에 예부에 자문을 보내어 《조력학산》과 각종 천문 서책을 무역하고 보루각ㆍ흠경각의 혼천의 도식을 견양하여 가져오게 하라.” 하고, 은냥ㆍ물산을 많이 주었다.
4년 임인에 사웅 등이 4중국에서 돌아오면서 천문에 대한 여러 가지 서책을 사오고, 양각의 제도를 알아 왔으므로 곧 양각 혼의 성상도감을 설치하여 사웅 등에게 감조하게 하였다.
7년 을사 10월에 양각을 준공하여 임금이 친히 내감에 가서 두루 보고 이르기를, “기이하다. 훌륭한 장영실이 중한 보배를 성취하였으니 그 공이 둘도 없다.” 하였다. 곧 면천시키고 가자하며 실첨지를 제수하고 겸하여 보루사를 살피게 하여 서울을 떠나지 않게 하며, 감조관 윤사웅 등 세 사람에게 안마를 하사하였다.
연려실기술

물론 이 내용의 시기는 조선왕조 실록의 내용과 맞지 않다. 해당 내용에서는 윤사웅과 최천구를 고위 관료로 다루고 있으며[4] 윤사웅 등이 혜성을 발견한 공로로 남원부사나 부평 부사 등에 임명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해당 내용에 대해서도 불명이다. 무엇보다 세종 5년에 호군에 임명되었고, 이전에도 관직생활을 하고 있던 장영실이 이후 시점에야 면천된 것처럼 묘사되기 때문이다. 다만 명나라에 가서 중국의 천문역법을 배우고 왔다는 것은 흥미로운 대목이다.

세종 5년인 1423년, 세종은 장영실을 왕실의 물품을 제작, 수리하는 상의원의 별좌로 임명하려고 일단 허조조말생에게 의견을 물었는데 허조는 반대하고 조말생은 찬성하였다. 이에 세종은 잠깐 결정을 미뤘다가 유정현 등 다른 대신들과 의논했는데, 여기서도 그를 등용하자는 결론이 나서 장영실은 무난히 상의원 별좌에 임명되었다. 따라서 백관들이 장영실을 등용하는 세종의 결정을 강력하게 반대했다는 설은 실록의 기록과 정면으로 어긋난다. 사실 백관들이 천민 운운하며 반대했을거란 생각자체가 굉장히 단편적인 생각이다. 성종때 구휼에 앞장선 노비가 면천을 받거나, 을묘왜변때 면천을 내세워 노비들을 충군하거나, 임진왜란 발발후 창설된 훈련도감이 사노비들까지 받아들인데서 알 수 있듯이 조선 조정은 필요만 있으면 노비를 면천시키고 포상 내려주는데 망설임이 없었다. 노비제도 자체를 고치는 것도 아니고 공있고, 국가의 기틀인 (농업=)에 유용한 기술을 가진 관노 하나 면천시키는데 신료들이 반대할 이유가 없다.오히려 신하들이 임금 몰래 면천시키고 싶었을 것이다. 돈이 복사가되니 말이다.[5] 또한 이 때의 기록을 보면 그는 40대에 든 중년이었음을 추정할 수 있기에, 이에 근거해 장영실을 1380년대 말에 태어난 사람으로 추정한다.

이후 그는 행사직을 거쳐 1432년에 공조판서 이천의 휘하에서 천문 기구인 간의대 제작에 착수했다.

이듬해인 1433년에는 호군에 제수되었고, 혼천의 제작에 착수해 1년만에 완성했다. 이후 태종 대의 금속활자인 경자자의 단점을 보완한 갑인자의 주조를 감독했고, 우리나라 최초의 자동 물시계인 보루각의 자격루를 만들었다.

이후 장영실은 많은 과학적인 기구들을 제작했다. 천체관측 기구인 대·소 간의와 휴대용 해시계인 현주일구와 천평일구, 공공장소 설치용 해시계인 앙부일구 등이 그것들이다. 이러한 천문기기들과 시계의 제작은 세종의 강력한 지원하에 이루어진 것들이었다.

또한 자격루를 발전시켜 만든 천상시계 옥루를 제작하였다. 이는 자동시계의 배경으로 농촌의 4계절의 광경을 그린 화폭을 세우고, 선녀가 방울을 들고 나타나는 모양, 사람·동물·나무 등을 나무로 조각하여 농촌의 자연을 재현하는 등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움직이는 모습을 한 인형이 나타나고 사리지게 만든 것으로 세종은 옥루를 두기 위해 전각을 짓고 양녕대군으로 하여금 전각의 이름을 짓게 하여 "흠경각"이라는 현판을 달게 했다.

그 뒤 경상도 찰방별감으로 제수되어 경상도로 내려가 각종 금속 채굴과 제련작업을 지휘감독했다. 1441년, 강수량의 정확한 측정을 위한 기구제작에 착수해 세계최초의 우량계인 측우기[6], 그리고 강의 범람여부를 알 수 있는 수표를 제작하였다. 이 수표를 설치한 다리인 수표교는 청계천에 있다가 복개공사로 인해 해체되어 장충단 공원으로 운반된 뒤 재설치되어 오늘날까지 보존되고 있다. 이 공으로 대호군으로 특진하였다.

그 이듬해, 세종은 각종 병으로 고생해서 온천에 자주 갔는데, 장영실은 세종이 온천여행을 갈때 타고 갈 어가를 제작하라는 명을 받고 어가를 제작했다. 이 어가도 비범한 것이 무려 자신이 직접 움직일 수 있는 것이었다고 한다.[7] 그러던 중, 어가가 부서지는 사고가 발생했고 장영실은 대불경[8]으로 의금부에 투옥되어 장형을 받은 뒤 파직되었다.
의금부에서 아뢰기를,

"대호군(大護軍) 장영실(蔣英實)이 안여(安輿)를 감독하여 제조함에 삼가 견고하게 만들지 아니하여 부러지고 부서지게 하였으니, 형률에 의거하면 곤장 1백 대를 쳐야 될 것이며, 선공 직장(繕工直長) 임효돈(任孝敦)과 녹사(錄事) 최효남(崔孝男)도 안여(安輿)를 감독하여 제조하면서 장식한 쇠가 또한 견고하게 하지 아니했으며, 대호군(大護軍) 조순생(趙順生)은 안여가 견고하지 않은 곳을 보고 장영실에게 이르기를, '반드시 부러지거나 부서지지 않을 것이오. '라고 하였으니, 모두 형률에 의거하면 장형 1백 대를 쳐야 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장영실에게는 2등을 감형(減刑)하고, 임효돈과 최효남에게는 1등을 감형하며, 조순생에게는 처벌하지 않도록 명하였다.
세종실록 96권, 세종 24년 4월 27일 정사 2번째기사

즉, 처벌에 대한 첫 반응은 장영실은 2단계 강등이었고, 그것도 의금부의 주장보다 가벼운 것이었다. 이 때, 같이 언급된 이들은 장영실, 임효돈, 최효남, 조순생이고, 장영실과 임효돈, 최효남이 처벌받았다.

이후 처분에 대한 기록이 없으나, 장영실은 의금부에서 80대의 장형을 받고 파직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후 역사에서 완전히 사라진다. 그 뒤로 어디서 무엇을 하며 언제까지 살다가 세상을 떠났는지 아무런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다시 복직을 했는지 완전한 파직이었는지도 알 수가 없다. 장영실의 업적을 말살하기 위해 간의대 철거나 천문 기록을 삭제했다는 식의 음모론은 전혀 근거가 없으며[9], 아무 기록이 없는 상황에서 가장 합리적인 추측은 장영실의 나이다. 처벌 받은 인원 중에 장영실만 복귀를 다시 하지 못했는데, 상의원 별좌에 임명될 때 장영실의 나이가 이미 3~40대였다. 가마 사고 당시에는 환갑을 넘겼거나, 환갑이 다 되었을텐데 조선시대면 언제 죽어도 이상할 게 없는 나이다.

다시 말해 처벌을 받고 물러나서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노환으로 죽었거나, 병세 등으로 복귀가 힘들었다 정도로 추정하면 앞뒤가 맞는다. 위의 실록 기록을 보면 알겠지만 세종대왕은 가마 사고로 큰 처벌을 원하지 않아했으며, 신하들이 불경죄로 다스려야 한다고 하도 난리를 치니까 어쩔 수 없이 들어준 것이다. 그리고 조선시대 당시, 신하들의 여론이 들끓어 잠시간 파직을 하거나 귀양을 보냈다가 다시 복직시키는 경우는 매우 흔했다. 실제로 장영실을 제외한 인원들은 얼마 후 다시 복직을 한다. 딱히 장영실만 배제할 이유가 없는데 빠진 것을 보면 복직하기 힘들었던 이유가 있었다고 보는 게 합당하다. 신분이 문제되었다는 주장도 있으나 이미 면천된지 한참이고, 20년이나 관직생활을 한 인물을 이제와서 신분 문제로 복귀를 못 시켜준다는 것은 별 근거가 없다.

즉, 단순 가마 사고의 총책임자로서 처벌을 받아 관직에서 물러났는데 이미 고령이라 다시 관직에 나서지 못했고, 애초 출신이 한미한데다 남은 조선 전기 지방기록(공문서건 가전문서건)이 극히 소략하여 현대에는 퇴직 이후 행적을 알 수 없다 정도로 정리된다. 조선 전기 기록은 후기 기록에 비해서 임진왜란 등의 전란으로 인한 소실이 많아 부족한 면이 많은데다 인물의 사망시에 그동안의 행적을 요약해 서술하는 실록의 졸기(卒記)는 조정의 고관대작 정도는 되어야 써주는 만큼 기술직 관료였던 장영실에 대한 기록은 부족할 수 밖에 없고 사망에 대한 기사도 나오지 않는게 당연한 일이다. 오히려 기록이 끊어졌다고 온갖 음모론과 억측을 만들어내는게 지나친 일이다. 출신 내력도 정확히 알 수 없는 노비 출신임에도 관직에 올랐고, 당대 인물 비중에 비해 현대에는 인지도가 상당히 높다보니 그의 노년기 이력이 대중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부분이 워낙 많아서[10] 되도 않는 음모론을 비롯해 온갖 설왕설래를 만들어낸 것이다.

장영실에 대한 기록이 이렇게 부실하다 보니, 족보나 세보 이야기하면 고개부터 절레절레 흔드는 학계에서도[11] 아산장씨 세보에 관심을 가지기도 하는데, 근거가 정말 하나도 없다. 장영실의 명백한 흔적은 지금의 부산인 동래현 관노였다는 것인데, 조선초기 지방공문서는 소실이 극심하다. 조선건국시기부터 연산군 시기까지의 동래부지는 모두 소실되어서 남아있는 자료가 없다.

3. 본관 논쟁


장영실의 본관에 대한 기록은 정사에서는 찾아볼 수 없으며, 불분명하다. 그러나 아산 장씨 종친회를 포함한 아산 장씨 종중의 여러 단체들은 『아산장씨세보(牙山蔣氏世譜)』에서 '장영실이 아산 장씨의 시조 장서(蔣壻)의 9세손'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등 교차검증 할 수 없는 내부 족보 및 전승을 근거로 장영실이 아산 장씨라 주장하고 있다.

오늘날 아산시에는 종중에서 조성한 장영실의 묘가 있는데, 이는 시신이 안장되어 있지 않은 허묘이다. 아산과 장영실의 관계성은 『동국여지승람』에서 '장영실은 아산의 명신이다'라는 기록만이 한 줄 전하는데, 이 기록이 그의 본관을 지칭하는 것인지는 학술적으로 고증된 바 없다. # 오히려 『세종실록』에서는 '장영실의 아버지가 원나라 소주(蘇州, 쑤저우) 및 항주(杭州, 항저우) 출신의 귀화인'이라고 명확히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본관을 나타내는 것이라 해석한다면 모순이 된다.[12] 현대 대한민국에 장(蔣)씨가 아산 1본[13] 밖에 없는 것은 맞으나 중국에서는 보다 흔한 성씨이며, 이것은 귀화인에게는 문제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에 대해 아산 장씨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장씨 사이에 전해져 내려오는 일화에 따르면 장영실의 아버지는 실록의 기록과 다르게 원나라 출신이 아니며, 그는 사실 아산 장씨 8세손인 장성휘의 아들이라고 한다. # 또 장영실의 아버지 세대는 5형제 5전판서 장성길(蔣成吉), 장성발(成發), 장성휘(成暉), 장성미(成美), 장성유(成裕)로 유명한 영남 출신의 고려의 명문이었다가 고려-조선 변천기에 급격히 몰락한 집안이며, 종친회는 아버지 세대가 조선의 건국을 반대하던 중 이방원을 위시한 인사에 의해 숙청당하고, 장영실의 어머니가 관노가 되었다는 추리를 한다. 그리고 나머지 4형제들은 모종의 이유로 경북 산골에 숨어들어 무덤을 남겼고 그들의 후손도 오늘날까지 계속 이어져오는 데 반해, 장영실의 아버지는 장영실 이외에 알려진 후손이 없고, 그들의 무덤의 유무도 알려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다만, 이러한 이야기는 상상에 근거하는 것이어서 신뢰성이 크게 떨어지며 이를 입증한 기록 등 증거는 전무하다. 종친회의 주장대로 장영실의 아버지가 '장성휘'라는 인물이 맞고 해당 인물이 역적으로 몰려 처형되었다면 실록에 언급이 반드시 있어야 하지만 전혀 없다. 다른 사건이면 몰라도 '역모죄'를 기록하지 않고 묻어 버리는 경우는 없다. 또한 '몰락한 가문'이라는 주장의 요지는 영실의 어머니가 관노였다는 점인데, 실제로 몰락한 가문의 가족이 관노가 되는 경우는 많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관노가 몰락한 가문인 것은 아니다. 즉 장영실의 어머니가 관노였다는 점이 몰락한 가문 출신이라는 근거가 되지는 않는다. 일부 관노가 몰락한 가문 출신이라고 해서 전체 관노가 몰락한 가문 출신이라고 단정짓는 전형적인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다.

또한 엄연히 연좌의 개념이 존재하던 시기에 아무리 능력이 출중하다고 해도 역적의 직계 자손을 등용하고 직책을 내려주는 것은 당시 사회적 통념을 크게 거스르는 행위다. 종친회의 주장은 이처럼 신빙성이 없으며, 출생에 관한 기록은 정사(正史)인 실록에 장영실을 총애하고 직접 등용한 세종대왕이 직접 증언한 만큼, 해당 내용이 가장 신빙성이 높다 할 수 있다. 세종대왕이 총애하는 신하의 태생을 중국계라고 깎아내릴 이유도 없거니와, 모호한 부분이 있으면 출생이 모호하다고 했지 확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에 와서 장영실의 출신이나 본관을 검증하는 것은 추가적인 문헌이 발굴되지 않는 한 불가능하며, 일부 칼럼이나 평론의 의견을 사실과 구분하지 않고 무분별하게 인용하는 것은 연구 부정이자 왜곡행위이다.

한편, 2022년 국립제주박물관의 학예사 강민경이 국립고궁박물관 특별전을 통해 공개된 소장품을 확인하던 도중 '장영실이 경주 장씨며 자는 실보(實甫), 1393년생이다'라고 기록한 자료를 발견했다. 이는 1857년(철종 8년) 창경궁 화재로 불탄 주자소를 다음해 재건하면서 내건 현판으로, 조선의 역대 활자를 주조한 관원의 인적사항을 기록했다. 교차검증이 되지 않는 내용이 너무 많아 아직은 연구 대상에 불과하지만, 없는 생년을 일부러 꾸며 기록할 다른 이유가 없다면 적어도 전래되었던 장영실의 인적사항 자료에 대한 가능성을 확인했다고 할 수 있다. #

4. 대중매체

실제 인물은 30대 후반의 나이에 관직 생활을 했음에도 대중 매체에서는 이 시기의 장영실을 소년이나 젊은 청년으로 그리는 경우가 많다.[14] 대표적인 예가 <대왕 세종>으로 분명 세종보다 연상이었던 장영실을 세종 역의 김상경보다 7살 어린 이천희가 맡았다. <천문: 하늘에 묻는다>에서는 중장년인 최민식이 장영실 역을 맡으면서 그간의 인식과 차별화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다만 해당 영화에서 세종 역을 맡은 한석규 또한 최민식보다 나이가 겨우 2살 젊은 똑같은 중장년이다.

4.1. 드라마

4.2. 영화

4.3. 만화

각종 학습만화, 대체역사물들에서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로 온갖 기상천외한 물건들을 만들어내는 역할로 나온다.

4.4. 게임

4.5. 뮤지컬

4.6. 소설

그 외에도 조선 전기를 배경으로 한 대체역사물에서는 미래 지식을 가진 주인공이 그 시대 기술력으로도 구현이 가능한 지식과 설계를 넘겨주면 뭐든지 만들어내는 만능 공돌이로 등장하곤 한다.

5. 평가

한국의 과학사학자들은 세종 대의 대표적인 과학자로 이순지이천을 꼽으며, 장영실이 이 시대의 '과학'의 대표자로 자리매김한 것에 대해 상당한 의구심을 갖고 있다.# 장영실이 갑자기 주목받은 것은 현대에 들어서인데, 한 예로 1921년에 잡지 개벽에서 조선 10대 위인을 선정했을 때 과학 부문에서는 서경덕정약용이 꼽혔을 뿐이다.[22]

무엇보다, 장영실은 기술자이지 과학자가 아니다. 또한 발명가도 아니다. 훌륭한 과학 기구들을 만들어냈지만, 그것을 둘러싼 원리를 탐구했다는 기록은 전혀 없으며, 기구들과 관련된 사상적 논의도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과학 기구들은 이천 등의 학자들이 설계한 것이고 장영실은 설계에 따른 제작만 담당했으며, 그 과학기구들도 기존에 이미 존재한 기구들로 새로운 기구를 창조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뛰어난 기술자는 맞지만 과학자는 아니며 발명가 역시 아니다.

과학사학자들은 세종 대 과학을 논의할 때, 장영실보다는 오히려 이천, 이순지, 김담, 정인지와 같은 인물에 더 주목한다. 천문학을 필두로, 다양한 자연 영역에 대해 관심을 갖고 탐구한 인물이 바로 이들이기 때문이다. 이천 같은 경우, 혼천의나 앙부일구부터 각종 화약무기나 악기까지 다양한 분야의 각종 기구를 만들어내는 총책임자였고 장영실 역시 그의 아래에서 제작을 도운 인물 중 하나였을 것이라 추정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중적 인식에서 장영실은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의 원인은 크게 두 가지를 꼽을 수 있는데, 첫 번째는 자주성을 강조하는 경향 때문, 두 번째는 근대성을 강조하는 경향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전자의 경우, 장영실이 세종 대 과학기술이 지닌 자주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그를 강조했다는 해석이다. 세종의 과학기술에 대한 관심이, 정말 중국에 대한 사대의 반대 개념의 자주적인 성격을 지녔다면, 중국이나 사대를 원하던 신하들과 갈등이 생기는 것이 자연스러웠을 것이다. 하지만 훈민정음 정도를 제외한다면 표면적으로 그러한 갈등은 드러나지 않는데, 이러한 간극을 해소하기 위해 장영실을 부각시켰다는 것이다. 가령 장영실이 사실 원나라 출신 기술자였다거나, 중국이 소환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세종이 일부러 장영실을 은퇴시켰다거나, 독자적인 천문학 연구에 대한 명나라의 불만을 장영실의 은퇴로 무마시키려했다는 등의 가설도 제시되었다. 즉, 자주적인 과학을 추구했지만 외부의 적, 그리고 내부의 사대주의자들에 의해 꺾여버렸다는 실패한 천재 영웅의 서사를 장영실에게 부여했다는 것이다.

후자의 경우, 장영실이 유교와 근대의 대립 구도를 상징하는 인물로 강조되었다는 해석이다. 즉 장영실의 기술은 고루한 유학 사대부와 달리 실용주의를 추구한 것으로 여겨졌고, 천민인 장영실이 신분을 극복한 것 역시 유교 사회의 신분제를 극복한 세종의 근대적인 능력주의라고 예찬받곤 했던 것이다. 세종 역시 유교국가 조선에서 유독 두드러지는 과학군주의 성격을 부여받았고, 그것을 보좌하기 위한 인물로 선택된 것이 바로 장영실이었다. 근대화의 실패가 과학기술의 발전을 가로막은 유교 때문이라는 관념 속에서, 출신과 업적 모두 탈유교적이었던 장영실이 일종의 실패한 영웅처럼 간주되었다는 것이다.

유교적 기반을 두었던 이순지, 김담, 정인지, 이천 등의 양반이 아니라 미천한 장인 출신이자 탈유교적 신화의 주인공이었던 장영실이 파트너로 채택된 것은, 당시 한국의 과학기술인은 정통 엘리트로 여겨지지 않았었던 것과도 일맥상통할 것이다. 흔한 엘리트 대신, 과학기술인들이 근대 한국을 이끄는 선봉장이 되었고, 그들에게 투영된 역사적 신화가 바로 '성군에 의해 신분을 극복한' 장영실이었다는 것이다.

물론 그가 훌륭한 업적을 남긴 기술자라는 것은 맞지만 최근 점점 늘어나는 이러한 해석이 등장함에 따라, 과도한 영웅주의적 해석을 경계하고 세종 대 다양한 인물들에 대해 바라보자는 의견이 제시되고 있다.

6.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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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옛 자료 중 경주 장씨로 알려지면서 같이 알려진 생년.[2] 각각 세종 4년(1422)과 5년(1423)을 말한다. 장영실이 상의원 별좌가 된 것은 당시의 기록엔 없고 이렇게 호군으로 직급을 올려줄 때 간접적으로 언급된다.[3] 실록 원문에는 임인(1422), 계묘(1423)년이라고 나오는데 이건 장영실을 상의원 별좌로 임명할지 논의를 그 기간동안 했다는 말이므로 임명은 1423년에 했을 것이다.[4] 연려실기술에는 윤사웅이 원래 관상감 정에 있다가 물러났다고 적고 있는데, 해당직책은 정3품 관직이다.[5] 애초에 노비는 세금도 안냈기 때문에 국가 입장에서는 노비가 많을 수록 오히려 손해였다. 따라서 세수 확보를 위해서는 양인이 많이 있어야 했다. 그러므로 공을 세운 노비를 양인으로 면천시켜주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장영실을 호군에 임명하는 기사를 보면 황희가 이에 찬성하며 '태종 때 김인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원래 관노였으나 태종께서 특별히 아끼시어 호군에 제수하셨고, 김인 뿐 아니라 이러한 무리들(=천한 출신)로 호군 이상의 관직을 받는 자가 매우 많나이다.' 라고 발언한 것이 확인된다. 즉, 황희의 발언을 따져보면 장영실이 특이 케이스였던게 아니라, 당대 관노 출신들 중 능력을 인정받아 관직을 받고 양인이 되는 케이스가 매우 많았다는 것.[6] 측우기에 대한 아이디어는 문종이 세자 시절 고안했다. 측우기 참고.[7] 그래서 장영실이 만든 가마는 대중매체에서 수레로 묘사된다.[8] 승여(乘輿)를 튼튼하지 않게 만드는 게 이 죄에 해당한다.[9] 간의대를 철거한 것은 세종과 무관한 연산군 11년의 일이다. "명하여, 보루각(報漏閣)을 창덕궁(昌德宮)에 옮기고, 간의대(簡儀臺)는 뜯어버렸다." (연산군일기 60권, 연산 11년 11월 24일 을사 5번째기사) 간혹 세종이 1443년 1월 14일 간의대를 헐어버렸다고 잘못 퍼져 있는 경우가 있는데, 당시 실록 원문을 보면 헐어버린 게 아니고 후궁을 짓느라 옮긴 것이다. 기록 상으로도 연산군 시기까지 남아있었으니 세종조에 헐린 것은 아니다.[10] 연려실기술 보면 조선시대부터 그런 인식이 있었다.[11] 족보나 세보는 가문의 영광을 위한 과시나 윤색이 원체 심한 자료이기에, 교차 검증이 되지 않는 한 그렇게까지 신뢰하지는 않는다.[12]조선왕조실록』은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될 정도로 사료의 객관성이 우수한 문헌으로 꼽힌다.[13] 과거에는 청송, 김포 등의 본관이 더 존재했으나 한반도에 뿌리내린 장씨는 시조가 장서(蔣壻)로 모두 동원(同源)이었기 때문에 현대에 단일화되었다.[14] 반대로 장영실 등용 시에 아직 청년이었던 세종은 제왕의 풍모 연출 때문인지 중장년으로 그리거나 계몽사의 위인전 삽화처럼 아예 노인으로 그릴 때가 많다. 사실 세종은 비만에다 당뇨병(+강직성 척추염)을 앓고 있어 그 합병증으로 고생하면서도 워커홀릭 기질은 꾸준했기 때문에 실제 나이와 외모 사이의 괴리가 존재했을 가능성이 높다. 다시 말해 질병과 과로로 고생했기 때문에 원래 나이보다 늙어 보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세종의 건강 문제 참조.[15] 역사 기록에서는 장 80대지만 극에서는 장 100대를 맞았다. 본래 역사에는 세종이 2등을 감하라는 명을 내려 은근히 적당히 집행하라는 무언의 지시를 내렸을 정도이니 장형을 집행하는 이가 왕의 뜻을 알고 적당히 치는 시늉을 해서 장영실이 후유증을 앓았을 가능성은 없었을 텐데 사극에서는 이상하게 이럴 때만 가혹하게 표현을 한다. 이는 역모죄로 잡혀가서 온갖 고문을 당해놓고도 정작 풀려난 후에는 멀쩡한 다른 사극 인물들과 완전히 대조된다.[16] 고3인 주인공이 세종 시대로 타임슬립해 현대의 문물을 이용해 활약한다.[17] 세종이 직접 장영실이 만든 가마를 손상시키는 기지를 발휘해 명나라로 압송 도중 돌아오게 된다. 세종에게 장영실을 사면하는 대신 훈민정음을 포기하라고 영의정이 교섭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장영실은 직접 그 교섭을 거부하고 스스로 파직되는 길을 택한다.[18] 찾으려고 작정을 해도 찾기 어려운 곳인지라 이무기는 어이없어 했다.[19] 바빠서 혼인을 못했다고 나온다.[상술하였듯이] 1442년 어가 파손 사건이 일어나자 궁궐에서 쫓겨난 것이 그에 관한 기록의 마지막이다. 이후에 세종대왕이 다시 불렀다는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이미 사망하였을 것이라고 추측할 뿐이다.[21] 정다운 일행이 경복궁의 천록 석상 넷 중 하나의 등을 통해 시간 이동하여 도착한 해.[22] 서경덕의 사상이 과학철학을 연상시키고, 일기장존설(一氣長存說)이 에너지 보존 법칙에 부합하는 등 당시에는 꽤나 깨어있는 학자로 인식된 것 같다. 북한에서는 여전히 '과학자'로서의 서경덕의 이미지를 밀고 있다.[23] 2003년 개교[24] 2010년[25] 2011년[26] 다만 장영실은 이름이 실로 끝나기에 그대로 붙여넣지만 이천은 "이천실"로 명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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