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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91970><colcolor=#fff> 계백 階伯 | |
계백 표준영정 | |
출생 | 630년 이전 추정 |
출생지 미상 | |
사망 | 660년 8월 20일 (음력 7월 9일) |
백제 황산벌 | |
관등 | 달솔(達率) |
성씨 | 부여(扶餘)(?)[1] |
주군 | 의자왕 |
사당 | 의열사(義烈祠) 삼충사(三忠祠) 충곡서원지(忠谷書院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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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부여 삼충사의 계백 영정.
백제 말기의 충신(忠臣).
흔히 계백 장군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군인이라는 인상이 강하지만 백제에서 좌평(佐平)에 다음 가는 관등인 달솔(達率)까지 지내는 등 문인 관직에서 주로 활동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근대에 체계적인 장교 육성 시스템이 완성되고 관료와 군인 계급이 완전히 분리되기 전까지는 어느 문명권에서나 평시에는 문관직을 수행하던 고위 귀족이 전시에는 군 사령관을 맡는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하급 장교까지는 실전에서 구른 무관들을 등용할 수 있었지만 최고사령관 정도 되는 위치는 병법과 외교적 협상력도 필요하기에 학문에 통달한 문관이 맡아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과거 제도가 생긴 이후에는 문관직과 무관직의 구분이 보다 뚜렷해지지만, 과거 제도가 생기기 이전인 고대에는 그 구분이 희미했기 때문에 역량만 있다면 한 사람이 문관직과 무관직을 오가거나, 겸직하는 경우도 흔했다.
2. 생애
2.1. 초기 일생
충청남도 부여군 충화면 천등산 일대가 출생지라고는 하나 명확한 것은 아니다. 생년은 알려져 있지도 않다. 대부분의 백제 인물들이 그렇듯 기록이 부족해 행적은 베일에 싸여 있다. 관련 기록은 남아있는 것이 적어 황산벌 전투 이전의 삶은 알 수 없는데 그나마 남아있는 삼국사기의 계백 열전에 따르면 벼슬길에 올라 달솔에 이르렀다고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달솔이라는 벼슬은 백제 16관등 중에서도 1등급 좌평에 이은 2등급에 이르는 벼슬이었으니 신분은 높았을 것으로 추정된다.조선 시대에 김정호가 지은 대동지지에 따르면 계백은 당시 백제의 수도였던 사비성 출신이며 이름은 승(承)이고 성씨는 백제 왕실과 동성(同姓)인 부여씨였다고 전한다. 또한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도 이와 같은 기록을 찾아 볼 수 있는데 기록이 사실이라면 계백의 본명은 '부여승(扶餘承)'이 되며 계백이라는 이름 자체는 별칭일 가능성이 높다. 사실 계백이라는 이름을 잘 뜯어보면 품계나 계급을 의미하는 '계(階)'와 으뜸 혹은 존칭 표현으로서의 '백(伯)'으로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일부에서는 '계백'이라는 호칭 자체가 관직을 가진 사람에 대한 존칭이거나 혹은 공후백자남의 작위가 아니었나 하는 가설을 내놓기도 한다.[2] 그리고 자였을 가능성 또한 높은데 고구려의 고자의 아버지 고질이 성문(性文)이란 자를 사용했고 계백과 동시대 백제사람인 흑치상지가 항원(恒元)이라는 자를 사용한 것처럼 삼국시대 말기에도 자를 사용했다는 기록이 분명히 남아있고 백중숙계는 보통 자에 쓰였기 때문이다.[3]
대동지지는 계백 사후 훨씬 뒤에 적힌 기록이긴 한데 지리서라고 해서 마냥 받아들이지 않는 건 아니다. 고려 말엽 이전까지 역사란 국가의 흥망성쇠를 군주의 입장에서 기록한 것이 거의 전부였고 일부를 열전이라 하여 굵직한 족적을 남긴 인물을 기록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때문에 정사에서는 비중있게 다루지 않는 고을 읍현의 옛 지명이나 향족, 거족 등의 인물은 지리서에 주로 기록되었다.[4]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서는 해동잡록(海東雜錄, 1670년 편찬)을 인용하여 계백이 백제 왕족인 부여씨 출신이며 본래 가잠성전투에서 김유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하여 두각을 드러냈다고 한다.[5]
2.2. 신라의 침공
660년 신라와 당나라가 각각 육지와 바다를 통하여 동시에 공격해오자 백제 조정은 혼란에 휩싸이고 말았다. 본래 국경을 맞대고 투닥투닥대던 신라라면 몰라도 당나라가 고구려를 내버려둔 채 황해 바다를 횡단해서 백제를 침공하리라고는 성충 정도 외에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고 신라군도 최단거리 경로가 아니라 북서쪽으로 향해 서해안가의 덕물도까지 우회해서 마치 고구려를 공격하려던 것과 같이 경로를 위장했기에 백제로서는 예측하기 어려운 공격이었다. 달솔 벼슬을 지내던 계백은 충상, 상영 등과 함께 장군이 되어 죽음을 각오한 5천 명의 결사대를 이끌고 출전하여 북동쪽에서 내려오는 신라군을 막게 되었다. 그러나 계백은 이미 전황이 절망적으로 돌아가고 있어 나라를 지킬 수 없음을 직감하고는 노예로 전락할 처자식에 대해서 "살아서 치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쾌히 죽는게 낫다"(與其生辱 不如死快)라고 하며 출진하기 전에 처자식을 모두 자신의 손으로 베어 죽였다. 아들이 없고 딸만 있었거나 아들이 어렸을 것으로 보인다. 장성한 아들이 있었다면 신라 측의 김품일이나 김흠순의 아들들인 김반굴과 김관창처럼 전장에 데리고 나왔을 것.[6] 이런 점과 황산벌 전투 이전의 기록이 거의 없는 것으로 미뤄볼 때 계백은 황산벌 전투 당시 의외로 매우 젊은 나이가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도 있다.[7]2.3. 황산벌 전투
660년 음력 7월 좌평인 충상, 상영 등과 함께 죽음을 각오한 5천 결사대를 이끌고 황산벌에 진을 친 계백은 "옛날 월왕 구천은 5천의 군사로 오나라왕 부차의 70만 대군을 격파하였다. 오늘 우리는 마땅히 각자 분발해서 승리를 쟁취하여 나라의 은혜에 보답해야 하리라!"라고 말하며 병사들을 독려했다. 이렇듯 비장한 각오 속에 계백 휘하 5천 결사대는 그대로 황산벌에서 신라의 영웅이자 최고의 명장이었던 김유신이 이끄는 5만 신라군을 맞이하였다. 하루 동안 4번의 전투가 이어졌고 백제는 4번 모두 신라군을 격퇴하는 기적에 가까운 전과를 올린다.백제군이 엄청난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번번이 승리하는 바람에 신라군이 사기를 잃자 신라의 장군이자 김유신의 동생인 김흠순이 아들 반굴에게 소수의 병력을 이끌고 공격하게 했고 반굴이 죽자 장군 김품일이 16세의 어린 아들 관창을 마찬가지로 적은 수의 병사들을 이끌고 적의 진영으로 돌격하게 했다.[8] 관창은 백제군에게 사로잡혔고 계백은 관창을 살려보냈다. 어린 나이임에도 용전한 관창을 가상히 여긴 게 살려보낸 이유로 알려져 있으나, 풋내기인 어린애가 전장에 나오자 어처구니없어서 그런 것이란 주장도 있다. 이후 관창은 재차 나와 싸우다가 또 붙잡혔으며 계백은 자신의 목숨을 돌보지 않고 싸우는 관창의 목을 잘라 말 안장에 묶어 신라군 진영으로 돌려보냈다. 그러자 신라군은 어린 관창의 용맹한 죽음으로 사기가 올라 총공격을 감행했고 그 기세를 막지 못하고 백제군은 패하였다.
황산벌로 함께 출진한 장수들 중 계백보다 상위 관등인 좌평급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아닌 계백에게 지휘를 맡겼다는 것은 계백이 왕족이었거나 혹은 고위 귀족 출신에 속하는 인물이었다는 것을 짐작가게 하는 부분이다.[9]
2.4. 죽음
결국 계백 휘하 5천 결사대는 거의 전멸하였으며 계백 본인 역시 마지막 전투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다만 계백과 함께 전투를 지휘하였던 좌평 충상, 상영 등을 비롯한 20여 명은 살아서 포로로 붙잡혀 신라에 항복했다. 계백이 황산벌 전투에서 전사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백제의 수도인 사비성이 당나라군과 신라군의 협공을 받아 함락되었고 백제의 마지막 왕이었던 의자왕은 웅진성으로 도망쳤으나 부하인 예식진의 배반으로 인해 사로잡히면서 백제는 멸망하게 되었다.2.5. 사후
자세한 내용은 백제부흥운동 문서 참고하십시오.일본에서는 백제 멸망이라는 소식을 들은 사이메이 덴노가 병으로 죽어감에도 불구하고 백제를 구하라고 일본 전토에서 싹싹 긁어모아 1차 원군으로 5,000명(661년)의 군대를 파견했으며 2차 원군은 663년에 출정했는데 그 수가 27,000명에 달했다. 백제 멸망 후 봉기한 백제 부흥군은 한때 백제 전역에 영향을 끼치고 웅진도독부를 수세로 몰기도 했지만 내부 분열과 신라군의 지원 등으로 인해 663년 2월 기점으로 열세에 밀리고 말았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663년 8월 백강에서 백제와 왜 연합군은 나당연합군과 백강 전투라는 결전을 치렀지만 결과는 '왜군의 피로 강이 붉게 물들었다'라는 기록이 말해주듯이 참혹한 패배였다. 살아남은 왜군과 백제 부흥군 수뇌부는 그대로 일본으로 도주했고 남은 임존성을 제외하면 백제 부흥군들은 나당연합군에 대거 투항한다. 임존성의 지수신이 663년 11월까지 농성을 벌였으나 끝내 임존성이 함락되면서 백제부흥운동도 막을 내리게 되었다. 백제부흥운동 실패 후 백제 전역은 당나라와 신라의 각축장이 되어 결국 신라가 671년 당나라의 괴뢰 정부인 웅진도독부를 요동으로 축출하면서 완전히 신라 영역이 된다.
3. 평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의 계백에 대한 기록은 고작 황산벌 전투에 국한되어 있으며, 그나마도 백제본기나 계백열전에 나와있는 내용보다 신라측 기록에서의 관창열전 등에서 오히려 계백에 대한 묘사가 더 자세한 편이다. 즉, 계백에 대한 기술은 철저히 신라의 입장에서 쓰인 기록으로, 신라인들 역시 비록 적대국인 백제국의 장수이지만 계백의 인품을 꽤 높이 평가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다만 '인품 존중'보다는, 의자왕을 '막장'이라 표현하기 위한 장치였다는 주장도 있다. 계백을 띄워주는 것만으로도, '의자왕은 훌륭한 충신을 죽게 만든 폭군'이라는 결론이 자동으로 나오기 때문이다. 또한 이에 더해, 충신이라는 점에서 추모받았다는 점도 한 요인이 될 수는 있겠다.역사기록엔 이처럼 계백에 대한 내용이 부족하지만 신채호가 쓴 조선상고사에서는 해동잡록에 계백에 대한 기록이 좀더 남아있었다며 많이 인용하였는데, 정사로서 인정받지 못하긴 하나 계백은 백제 왕족인 부여씨로써[10] 가잠성의 성주가 되어 김유신과의 싸움에서 승리, 그때부터 두각을 나타내 신라와의 싸움에서 연전연승을 거두게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백전백승의 전적을 자랑하던 김유신을 이긴 유일한 백제 장수가 계백이라는 것인데, 사실은 알려진 바와 달리 김유신은 백제에 여러 번 패배를 당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다만 해동잡록은 조선 후기에 지어진 책이고 가잠성 전투 문서에 나오듯 진평왕 이후 신라가 가잠성을 백제에 빼앗겼다는 기록은 없다.
그만큼 김유신을 상대로 강했다는 것이고, 그러한 사실을 의자왕 역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본대가 소정방의 13만 대군을 막는 동안 하루라도 김유신의 5만 대군을 막아서 시간을 벌게 한 것으로 보인다.
영화 황산벌에서는 본래 백제는 무역을 통해 당나라와의 관계가 좋은 편이었기 때문에 신라군만 안정적으로 막아낸다면 당군은 협상을 통해 회군시킬 승산은 충분히 있다고 생각했던 것으로 묘사된다.[11] 작중 의자왕이 보낸 서신 중 '네가 하루 이틀만 더 거시기 해뿔면 나가 소정방이와 쇼부를 쳐불텐디. 알아먹었제?' 라는 부분이 있다. 그런데 작중 소정방을 통해 드러나는 당나라의 의도는 백제도 신라도 점령한다는 것이었기에 성공했을 가능성은 낮았을 것이다.
짧은 일화와 황산벌 전투로 후대 조선 시대 유학자들이 평가를 했는데 대체적으로 충신이라는 평가를 많이 받았다.
최부와 서거정 등은 계백만이 백제의 충신이라고 극찬했다. 다만 권근은 일가족을 죽인 것을 가지고 냉혹하다며 비판했다. 안정복은 그런 권근을 역으로 비판하며 계백의 충의로움을 칭찬했다. 거기다 당시 백제와 신라는 최악의 관계로 백제가 멸망하면 계백의 가족들은 죽는 것 보다 끔찍한 최후를 맞이 할 가능성이 높았기에 계백의 행동을 일방적인 가족살해로만 볼 수는 없다. 당장 의자왕도 술을 따르는 치욕을 당했고 백제 왕족과 고위 귀족들은 당나라로 끌려가야 갔다.
뿐만 아니라 설령 그 가족들이 항복해서 신라로 투항한다고 해서 5,6두품 혹은 그 이상의 직위를 받는다해서 문무왕이 있을때는 호의호식한다고 해서 신문왕같은 왕에게 숙청당할 위기가 매우 컸다. 참고로 왕권강화 차원에서 숙청당한 대상자는 왕조가 끝날때까지 복권이 안된 경우가 많았고 역적으로 몰릴 경우도 커서 대가 끊길 위험도 컸다. 당에서도 좋은 관직을 얻는다고 할지라도 흑치상지 역시 당에서 관직을 얻고 새로운 삶을 살았으나 측천무후 손에 숙청당한게 예다.[12]
북한에서는 삼국시대에 대한 평가에서 신라에 대해 매우 부정적이다 보니, 김유신에 대항했던 백제의 계백에 대해 높게 평가한다.# 참고로 김정일 또한 계백에 대해 애국적인 명장이라며 높게 평가했는데, 다만 계백의 가진 애국정신은 봉건적인 충군사상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에, 그의 공적과 더불에 계급적인 본질도 같이 봐야한다고도 평가했다. 아무래도 신라에 대해 비판적이다 보니 계백에 대해 높이 평가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4. 5천 결사대 논란
신라가 한강 유역을 공략해 성왕을 전사시키며 그때까지의 나제동맹(羅濟同盟)이 결렬되자 백제는 고구려·일본 등과 친교를 맺고 신라에 대항했다. 고립상태에서 위기에 처한 신라는 중국의 당과 동맹을 맺고 원병을 요청했는데, 당 고종은 소정방을 대총관으로 임명하여 원병을 이끌게 했다. 660년에 나당연합군 18만명(당군 13만명, 신라군 5만명)의 공격이 백제를 향하게 된 것이다.의자왕은 백제를 사수하기 위해 병력을 총동원하려 했지만 의자왕과 지방세력 간의 악화될 대로 악화된 관계[13]로 인해 중앙 조정이 모을 수 있었던 병력이라곤 고작 5,000명뿐이었다는 이야기가 한국에서 꽤 널리 퍼져있는 내용이다. 어린이용 역사책이나 연구가 제대로 되지 않은 시절의 오래된 역사서에선 의자왕 말년의 향락과 사치 때문에 백제가 쇠락해서 군대가 5,000명 밖에 없었다고 단순하게 설명하기도 한다.
하지만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내용은 이와는 상당히 다르다. 구당서 소정방전(참고문서)에는 소정방이 이끄는 당군이 강의 입구에 도착했을 때 백제군이 방어진을 치고 있었고, 이에 상륙작전을 벌여 백제군을 격파해서 수천 명을 괴멸시켰으며, 당군이 그 후 수륙 병진으로 사비성으로 진격하자 백제는 나라를 기울여 저항하여 대전투가 벌어졌고 이 때 다시 백제군을 격파하여 만여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에 왕은 군사를 모아 웅진어귀를 막고 강가에 주둔시켰다. 소정방이 강 왼쪽 언덕으로 나와 산 위에 진을 치니 그들과 싸워서 아군이 크게 패하였다. 이때 당나라 군사는 조수가 밀려오는 기회를 타고 배를 잇대어 북을 치고 떠들면서 들어오고, 소정방은 보병과 기병을 거느리고 곧장 도성 30리 밖까지 와서 멈추었다. 우리 군사들이 모두 나가서 싸웠으나 다시 패배하여, 사망자가 1만여 명에 달하였다. 당나라 군사는 승세를 타고 성으로 육박하였다.
《삼국사기》권제이십팔 백제본기 제육 의자왕
《삼국사기》권제이십팔 백제본기 제육 의자왕
이 내용은 삼국사기에도 나오는 내용으로, 전군이 전멸하였다는 기록이 없는 가운데 사망자가 1만여 명에 달했다는 기록만 존재하기 때문에 정확한 규모는 알 수 없으나 부상병, 포로, 패잔병 등을 고려했을 경우 실제 백제군의 규모는 최소 몇만 명 수준은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신라와의 싸움에 5천명 밖에 동원하지 못한 이유는 어쩌면 의자왕이 진짜 막장이었을 수도 있지만, 사실은 주력군이 당군을 막아내야 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왜 이러한 다른 기록이 생겼는지에 대해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다. 다만 몇 가지 추정은 가능하다. 우선 통일 이후 신라가 당나라보다는 신라의 전공을 더욱 부각시키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기록을 누락시켰거나, 혹은 관련 기록이 남지 않았거나, 그것도 아니면 삼국사기 수록과정에서 당서 기록을 백제본기에서 수록해주었으니 충분했다고 보는 등의 수록과정의 문제일 가능성이 있다. 또는 계백이 동원한 5천은 국왕이 즉각 자신의 권한으로 빼올 수 있는 직속군대여서 바로 급파하였고, 백강 방어전은 인근 지방세력과 5천 병력을 급파한 후에 지방에서 끌어모은 병력이 꾸준히 투입되어서 보강되었을 가능성이다. 이 경우 위의 지방세력과의 갈등 문제도 설명이 가능하다. 지방 병력의 동원이 아주 불가능하진 않더라도 갈등으로 인해 동원이 지체되는 것 자체는 피할 수 없자, 의자왕은 5천이라는 적은 병력이나마 국왕 직속 부대를 빨리 보내서 일시적으로라도 신라군을 저지하고 그 사이에 동원 시간을 벌어서 당나라 군을 막는게 낫다고 판단했을 수 있다.
5. 기타
충남 논산시 부적면에 있는 계백 동상 논산 군사박물관에 있다. |
충남 논산시에 육군훈련소가 있기 때문에 육군훈련소가 1절에서도 계백을 언급[14]한다. 이 노래는 육군훈련소에서 기초군사훈련을 받는 훈련병과 기간병이라면 퇴소 또는 전역 때까지 질리도록 부르기 때문에 계백이라는 이름은 적어도 논산 땅에서 매일 들을 수 있다.
한편 논산에는 그의 이름을 딴 도로[15]가 있는데 익산대로 최북단에서 이어진다.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의 군청로터리에는 계백장군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6. 대중매체에서
6.1. 노래
-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1절 마지막 소절에 등장한다. 황산벌의 계백, 맞서싸운 관창, 역사는 흐른다 이 부분은 그 자체로 훌륭한 대구를 이루고 노래 전체에서 하이라이트를 이루는 부분이어서 강렬한 임팩트가 있다. 그래서 당시에 이 노래가 한참 보급되던 시절에 학창 시절을 보낸 국민학교 학생들은 이 노래 소절을 대부분 기억할 정도로 인지도가 매우 높다. 덕분에 계백, 관창에 대한 인지도가 높아진 것도 덤.
-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을 쓴 박문영이 작사·작곡한 계백장군이라는 노래가 있다.
다섯동이[16] 버전 정광태 버전
쏟아지는 적군의 꽃잎 속에서 홀로이 싸우시다
최후의 격전지 황산벌에서 고이 고이 잠이 드셨네
꽃은 시들어 낙화암에 떨어지고
말없는 저 백마강 모른 채 흘러가네
계백 장군 마지막 충신 나는 잊지 못하리
의자왕 이십년 태양은 지고 나라가 위태할 때
계백의 용맹스런 오천 결사대 의를 위해 칼을 뽑았네
쏟아지는 적군의 화살 속에서 최후의 한사람까지
싸우고 싸워서 지킨 내 나라 충성스런 장군과 부하
꽃은 시들어 낙화암에 떨어지고
말없는 저 백마강 모른 채 흘러가네
계백 장군 마지막 충신 나는 잊지 못하리
나는 잊지 못하리 나는 잊지 못하리||
6.2. 도서
- 글동산에서 나온 그림으로 엮은 <한국의 역사>에서의 계백 편에서는 어떤 근거에서인지 젊어서 불교에 귀의했다가 의자왕이 직접 부르러 와서 돌아온다는 설정으로 나온다. 이후로는 계속 중머리. 이후 신라와 고구려를 상대로 연전연승하다가 의자왕이 사람이 변하자 이에 실망해 다시 절로 들어간다. 이 때 계백을 따르는 친위대 역시 함께 스님이 되는 것으로 나오는데 이들이 이후 5천 결사대의 중심이 된다. 그림으로 그려진 이미지는 중머리를 한 관운장으로 긴 수염에 청룡도를 든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이 당시에 계백에 대한 이미지는 주로 거룩한 희생을 하는 수도승같은 이미지로 그려졌다.
6.3. 게임
- 조이온(HQ Team)이 개발한 국산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 <천년의 신화>의 후속작이자 지금은 완전히 잊혀진 게임인 <천년의 신화 2 : 화랑의 혼>이라는 게임에서 백제 측 영웅 유닛으로 등장하였다. 두 갈래로 갈라진 검을 사용하는데 원거리 공격이 무려 전기 충격. 특수 기술을 사용할 경우 맵 전체에 비가 내리기 시작하여 주변에 적이 있을 경우 하늘에서 해당 적에게 낙뢰가 발생한다. 일정 횟수를 모두 소진하면 비가 그제서야 그치는데 횟수를 강조한 이유는 이 횟수를 모두 소진하지 않으면 비가 무한대로 내리기 때문. 비가 내리는게 뭐가 어떠냐고 물어보면 자원과 관련이 있는데 동사에서 개발한 게임인 <임진록>과 본 게임의 전작에서는 비가 내려도 자원인 쌀이 다시 자라지 않았지만 본 작에서는 주 자원인 쌀이 자연 상태에서도 매우 조금씩 다시 자라며 비가 내릴시 더욱 빨리 자라게 설정이 되어 있었다.
- 웹게임인 <콜로니 오브 워>에서 69레벨의 HCS 시리즈 기체 중 하나로 염동기체이다. 건곤감리코어 구현이 완료된 무휼을 토대로 강화된 기체들이며 그 중 이름을 따와 계백이며 3기체 중 가동률이 가장 짧은 편으로 대략 1시간도 안 된다.[17] 대신 마의 구간 후반기 기체인 만큼 강력한 무장들이 있으며 공유도 가능하다. 3기 전부 슬롯이 3개고 식별이 HCS로 공유된다.
- 게임 영걸전 시리즈의 외전 작품인 <삼국지 조조전 온라인>에서 계보명으로 결사계백의 패가 유출됨으로 인해 추가 미래무장으로 등장이 확정되었다.
- 게임 <바람의 나라>에서도 황산벌 지역이 추가되면서 나오는데 미청년 이미지로 나온다. 여기 가면 볼 수 있다.
6.4. 영상매체
6.4.1. 삼국기
1992년 KBS 드라마 <삼국기>에서는 배우 유동근이 연기했다. 여기서는 그의 동생으로 좌백[18]이 등장하며 본래 산에서 살던 산사람인데 신라와의 접경 지역에 시찰을 나왔던 의자왕자를 위험에서 구해주면서 그에게 발탁된 산사람으로 나온다. 그의 어머니는 돌아가신 아버지가 사냥꾼이라고 숨겼으나 사실은 신라와의 전쟁에서 전사한 백제의 장수였던 것. 이후 드라마에서 백제에 설치된 화랑 비슷한 교육기관인 "수사"에 들어가 수련하며 백제를 대표하는 무인으로 성장한다. 극 중 수사 훈련과정에서 알게 된 한 여인[19]과 서로 사랑하여 부부가 된다. 이후 의자왕자에게 중용되며 당항성 공격에서 백제 조정의 눈도장을 제대로 받게 되며 극 중 백제 최고의 지장이자 맹장으로 부각된다. 의자왕 등극 이후 주로 가잠성 성주로 있으면서 중원성의 김유신과 부딪치며 백제의 신라 공격시 김유신이나 알천의 발을 묶어두는 역할을 하며 신라에도 명성을 떨친다.극 후반부에서는 자신의 스승이자 멘토인 성충이 투옥되자 전방의 군대를 끌고 사비성으로 달려오는 과격함을 보인다. 이후 성충의 만류로 군대의 포위를 풀었으나 성충의 실각과 임자의 득세 과정에서 흥수, 복신 등 다른 성충파 정치인들과 함께 좌천되어 수덕사에서 수사들을 조련하는 장수로 지내게 된다. 나당연합군의 공격이 시작되자 의자왕의 부름을 받고 결사대를 이끌고 출전하며 출정 전날 가족을 베는데 딸은 사당에서 따로 자결하며 부인은 미리 준비하고 있다가 계백이 직접 벤다. 이후 진행된 황산벌 전투는 역사대로 전개되는데 최근 한국 사극에서 실종된 장면이 많이 등장한다.[20] 사서의 기록대로 네 번 싸워 네 번 모두 이기나 이후 관창의 분전으로 전세가 역전되어 계백은 병사들과 함께 총돌격에 나섰고 직접적인 전사 장면은 보이지 않는데 전장을 수습하던 김유신이 부릅 눈을 뜬 채로 온 몸에 화살이 박힌 채 서서 전사한 계백의 모습을 의미심장하게 바라보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인간관계의 경우에는 성충을 스승이자 멘토로 여기며 성충 라인의 장수로 등장하는데 처음에는 동료였다 정치적인 라이벌로 등장하며 대립하는 임자와의 갈등도 괜찮게 설정된 편. 그외에도 흑치상지는 친구, 의직은 수사 시절 자신을 가르치던 교관이자 스승이며 함께 백제를 지탱해 나가는 장수로 나온다. 그러나 무조건 싸우기만 하는 것은 아니며 가끔 고구려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고구려의 동명제를 참관하거나 연개소문과 협상을 하는 모습도 나오며 당시 귀족들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21] 여기서도 계백은 김유신의 라이벌로 등장하는데 전반적으로는 과묵하고 사려깊으며, 충성심이 깊으며, 지략에 능한 백제의 먼치킨 정도의 포지션이다.
황산벌 전투 직전의 연설장면이다.
6.4.2. 천년지애
- 백제 멸망기를 다루었지만 의외로 의자왕이 출연하지 않은 드라마 천년지애에서 단 한 컷 나온다. 물론 전쟁에서 전사하는 역할인데다가, 그나마도 연출의 허접함으로 인해 전혀 비장하지 않게 묘사되었다.
6.4.3. 황산벌
영화 황산벌에서의 계백[22][23] |
자! 외통수에 걸렸으면 장기판을 싸게 걷어야제! 전군 문열어!!
영화 中
앞서 설명한 어떤 드라마보다 임팩트 있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기존의 클리셰를 박살낸 작품. 맛깔나는 전라도 사투리 연기를 보여준 박중훈이 열연하였는데[24] 대체로 무척 과묵하고 우직한 성격으로 묘사된다. 영화에서 잔꾀를 잘 부리는 김유신의 모습과 대조된다.영화 中
여기에서는 결전을 나설때 자기 처자식을 죽이는 장면에서 계백이 아내에게 "호랑이는 죽어서 꺼죽을 냄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냄기는 법이여! 제발 깨끗이 가장께!"라고 하면서 죽음을 종용하자 아내가 코웃음을 치면서 "입은 삐뚤어졌어도 말은 똑바로 씨부려야지. 호랭이는 가죽 땜시 뒤지는 것이고, 사람은 이름 땜시 뒤지는 것이여, 이 인간아!!!"라고 일갈한다. 참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주는 장면. 작중에서 많은 인물들이 역사에 자신의 이름을 남기는 것에 집착하는 것과 대비된다. 거기다 이 장면 앞에서는 계백이 약을 주는데, 이걸 보면서 계백의 부인이 "자식새끼 싸질러놓고 언제 신경이나 한 번 제대로 써봤냐!"면서 악다구니를 쓰자, 계백은 할 말이 없어서 당황하다 칼을 빼들고 곱게 갈지, 아니면 칼 맞고 갈지 선택하라고 한다.
김유신의 동생 김흠순이 "니 계백이 작전이 뭔지아나? 그냥 열심히 싸우는거데이, 형님아 니 계백이랑 싸워서 이겨본적이 있나?"라고 할 정도로 별 작전없이 상대방의 작전이 무의미해질 정도로 단순 무식하게 열심히 싸워서 이기는 전법을 구사하는 듯 하다. 김흠순의 말에 따르면 김유신은 온갖 잔머리를 굴리는 반면에, 계백은 우직하게 싸운다고 하는데, 백제와 신라의 사정을 생각해보면 두 장군이 이렇게 싸우는 당연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백제가 신라를 압박하던 터라 계백을 백제의 지원 아래에 충분한 병사와 여건을 가지고 적의 기책을 피하며 우직하게 싸우면 이기지만, 김유신은 열세에 있으니 온갖 기책으로 상황을 매꾸려고 할 수 밖에 없긴 하다. 상황이 반전되어서 신라군이 백제군의 10배인 황산벌에서도 계백은 갑옷을 옷에 꿰매는 등의 조치로 병사들의 결의를 고취시키고 목책에서 농성하는 등의 정석적인 싸움법을 구사하는 반면에, 김유신은 첩자를 파견하고 신라군의 사기를 고취시키게 화랑들에게 자살돌격 시키거나 백제군의 갑옷을 무력화시키게 진흙덩어리를 투석기로 날리는 등의 기책을 구사한다.
병사들을 선발하는 방법도 가관인데 자신의 말에[25] 군말없이 대답하면 합격시키고 토를 달면 "넌 빠진다 실시!"라며 발로 차버리는 식이다.[26] 신라군 뿐만 아니라 의자왕이나 중신들도 그의 무식함을 잘 아는 모양인지[27] 왕 앞에서 버럭버럭 대들던 중신들도 계백이 칼을 들고와서 "시방 내 손에 뒤질래? 두당 군사 오백씩 내놓을래?"라며 협박하자 군말없이 군사를 내어준다.[28] 장수들이나 휘하 병사들에게도 갑옷을 꿰매입고 오라고 하던가 신라군 오만대 우리 오천이면 우리가 명색이 결사대인데 두당 열명도 상대 못하냐며 죽을 때 죽더라도 열명 죽인거 확인받고 죽으라고 하는 등 여러모로 헝그리 정신이 투철한 모양이다. 이렇게 보면 그냥 무식해보일 수도 있지만 김유신과의 장기에서 통수로 이길 정도로 노련한 전략가인 것으로 보인다. 실제 전투에서도 진지에 함정을 설치해서 신라군 선봉대를 역으로 포위하여 섬멸하는 노련함을 보여주었다. 애초에 우직하게 싸우는 것이 멍청하게 싸운다는 것이 아니라 적의 속임수에 빠지지 않고 안정적으로 전투에 임한다는 뜻이다. 여러 기책으로 적을 함정에 빠뜨리는 김유신에게는 천적인 셈.
황산벌에서는 김유신이 훨씬 나이가 많고 계백이 젊은 장수로 묘사되는데, 생년이 확실치 않지만 역사가들은 대부분 최소한 김유신보다는 젊었을 것이라 보고 있다 한다. 참고로 이때 김유신 나이는 66세,[29] 환갑도 넘긴 할아버지다.
6.4.4. 연개소문
2006년 SBS 드라마 연개소문에서는 배우 정흥채가 맡았다.[30] 황산벌 대첩 전까지는 의자왕의 충신으로 나오며 충언을 했다가 실각당하고, 전쟁이 나자 부랴부랴 의자왕이 불러 황산벌 싸움에 나선다. 그 결과는 물론 패배, 참고로 합판소문으로 악명높은 드라마답게 그가 활약하는 황산벌 대첩 역시 매우 조악한 퀄리티로 나왔다. 50000대 5000의 전투인데 고작 100여명쯤 패싸움 규모를 보여준다든가... 그래도 마지막 최후만큼은 비장하게 연출된 편이다. 무엇보다 두 번째 사로잡힌 관창이 제발 자신을 죽여달라고 간곡히 청하자 한참 망설이다가 '이 아이와 함께 우리 백제도 끝'이라고 말하며 관창의 수급을 신라에 보내고, 관창의 죽음에 사기가 오른 신라군에 의해 장렬하게 전사하는 장면이 인상적이다.6.4.5. 선덕여왕
자세한 내용은 계백(선덕여왕) 문서 참고하십시오.6.4.6. 계백
2011년 MBC 드라마 <계백>에서는 배우 이서진이 연기했다. 당대 백제의 충신으로 유명한 성충과 흥수의 의형제를 맺은 걸로 나오며 은고와 의자왕과의 복잡한 삼각관계를 이룬다. 임금님보다도 백성들의 믿음을 한 몸에 받는 그야말로 영웅으로 묘사된다. 굉장한 먼치킨으로 나오는데 신라와의 전투에서 단 2패를 겪었다. 1패는 황산벌 전투이며 나머지 1패는 당나라에게서 정식적인 왕비 조서를 받기 위해 신라와 내통한 은고의 세작질로 인한 것. 주인공답게 김춘추와 김유신의 평가는 '의자는 별 거 아닌데 계백은 두렵다.' 수준. 작중에서 절대 선역으로 그러지기 때문에 황산벌 전투에 나서기 직전 가족들을 벤 것도 본인은 그럴 생각은 전혀 없었는데 5천 결사대의 사기가 다 무너진 걸 본 계백 부인이 이대로 전장에 나서면 필패다. 나와 자식들을 베고 돌아갈 곳이 없다는 마음으로 사력을 다해 싸워라. 당신이 우릴 베지 않으면 자결하겠다고 강권하여 결국 가족들을 베는 것으로 그려졌다.장군으로서의 능력은 세계관 최강자, 인품 또한 성인군자라는 표현이 어울릴 만큼 거의 완벽한 인물로 그려지지만, 약점 또한 확실히 존재하는데, 바로 정치적인 능력이 전무하다는 것과 지나치게 선량하다는 것. 사실 계백 본인은 정치에 관심도, 권력을 휘두를 의사도 없었지만 대장군이라는 막강한 요직에 올라선 탓에 정치적인 능력의 부재가 문제가 되기도 했다. 그나마 정치력 부재는 성충과 흥수라는 정치력이 뛰어난 의형제들이 붙어 있어 큰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본인의 지나친 선량함이 오히려 큰 문제를 만들기도 했다. 이 때문에 곤경에 처한 적이 몇 번이나 있고, 결정적으로 황후인 연태연과 태자 책봉 문제를 놓고 세력이 밀려 위기에 처해 도움을 요청해 온 은고에게 "나는 이 나라의 장군으로서 백성과 나라를 위해 충성할 것이다. 당신은 의자왕의 후궁이니 의자왕 곁을 지키며 백성과 나라에 충성하라"고 조언했다가 사태를 최악으로 만들기도 했다. 의자왕은 은고의 가족에게 신라 세작의 누명을 씌워 일족을 몰살시키고 은고를 강제로 자신의 곁에 둔 파렴치한이었고, 은고도 이 사실을 알고 극도로 분노한 상황이었음에도 이런 조언을 했으니 계백급의 성인 군자가 아니고서야 들어먹힐 리가 없었다. 결국 은고는 계백도 자기를 버렸다는 생각에 자신에게 남은 건 권력과 자식 뿐이라고 생각하며 권신에 매국노로 완전히 흑화하여 백제를 멸망시키는 데 단단히 기여했다.
6.4.7. 대왕의 꿈
대왕의 꿈에서의 계백 |
7.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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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석문 및 문헌기록상 신라 최초로 성씨를 사용한 왕은 진흥왕임 * 29~31권까지 연표 * 32~40권까지 잡지 |
{{{#!folding [ 열전(列傳) ]
}}} ||[1] 조선시대 이후 기록에서만 확인된다. 다만 백제에서도 고위직인 달솔 직위에 오른 점을 보면 고위 귀족 가문 태생일 가능성은 높다.[2] 후작의 경우 실제로 이전에도 내린 적이 있다. 다만 달솔이라는 고위관직에 비해 백작은 급이 너무 낮은데, 계백의 경우 꽤 젊은 나이였지만 너무 위급시였기 때문에 구원투수로서 갑자기 달솔이라는 고위직에 제수되었을 가능성도 점쳐지고 있는 만큼, 당시의 이례적이었던 정황이 관직과 작위의 비대칭에 대한 설명이 될 수도 있다. 다만 존칭 여부에 대해서는 비슷한 전례도 없고, 후의 귀실복신이나 부여자신의 경우에는 그냥 좌평이라는 백제 고유의 관직이 사용된 예가 있기 때문에 가능성이 떨어지는 편. 물론 하기한 것처럼 그냥 자였다면 제2의 이름으로써 쓰였던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상기의 가설은 아무래도 상관없어진다.[3] 사마의의 중달이나 동탁의 중영은 이들이 둘째라는 것을 표시했다. 계백의 경우 자가 맞다면 그가 맏이였다는 게 된다. 같은 시대의 인물인 성충(백제)의 경우 이름이 선중(善仲)이었다는 기록도 남아있는데 이것도 자가 기록된 것이라면 그는 형제 중 둘째였다는 것을 뜻한다.[4] 이런 정사에 들어가지 못하는 향토사료들을 모아 편찬한 대표적인 사서가 삼국유사이다. 삼국사기에 비하면 정확도가 떨어지긴하지만 사료적 가치는 충분하다.[5] 그러나 해동잡록은 일종의 소설로 실제 역사로 볼 수 없다[6] 다만 5천 결사대를 이끌고 가면서 자기 가족을 죽인 것은 조선시대에도 비판(권근)이 나왔다. 결사대 결성의 목적은 ‘우리는 죽더라도 나라/내 가족은 지킨다’는 의도였을 진데 수장이 미리 돌아갈 곳을 끊어버리는 선택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는 것. 물론, 그가 맹렬히 싸울수록 패전했을 때 그의 가족들은 전과에 비례하는 수모를 겪게 될 것이라 생각했을 테니 그가 나라에 바치는 마지막 충의와 그 합리성과는 별개로 가족에만큼은 실지적 상황에 비추어 판단했다고 볼 수도 있다. 혹자는 황산벌에서 관창 등이 죽은 데 대해 신라군이 복수를 했다거나 패전 및 사망 소식에 자진했다고도 한다.[7] 그러나 이에 관해 반박도 많은데 여수전쟁 당시 중요도가 떨어지지 않았을 우중문의 별동대를 막는 임무를 맡은 을지문덕 또한 이때의 기록만 있지 전쟁을 지휘하기 전 기록이나 분명 대승을 거두고 생존까지 했음에도 후일의 기록이 없다. 이것은 계백과 을지문덕만이 아니라 삼국의 많은 장수들의 기록 자체가 부실하다.[8] 홀로 돌격했다는 말이 자주 보이지만 삼국사기 관창 열전에서는 적군은 많고 아군은 적었다고 돼있지 홀로 돌격했다는 말은 없다. 혼자서 돌격하는건 사기 진작이 아닌 그냥 개죽음이라는걸 생각하면 당연한 것이다. 또한 반굴의 돌격과 관창의 2번 돌격을 합치면 5번이 아닌 8번 공격한 것이 되므로 반굴과 관창의 돌격은 4번의 공격 속에 포함되어 있다는 주장도 있다.[9] 뚜렷이 기록된 부분이 아니라 확실하지는 않지만 명목상 황산벌 전투의 지휘관은 계백보다 관등이 높은 충상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다만 황산벌 전투의 직접적 지휘는 계백 주도로 된 것으로 보인다.[10] 조선 시대 지리서인 동국여지승람에서도 계백의 성이 부여씨라고 기술되어 있다. 또한 위에서 기술한 것처럼 당시 의자왕과 귀족들 사이가 벌어질대로 벌어져 있었고 5천 결사대는 국왕 직할 병력이었을 가능성이 크므로 그 병력의 지휘관인 계백도 왕족으로 보는 것이 논리적으로도 꽤 그럴 듯 하다.[11] 하지만 당태종의 고구려 침략 때 신라는 당의 요청에 따라 고구려로 군대를 보냈는데 백제는 고구려를 공격하지 않고 정작 고구려 파병 때문에 방어체계에 구멍이 뚫린 신라의 내부를 기습 공격한 적이 있다. 원래 당은 백제를 어르고 달래서 신라와 손을 잡고 고구려로 파병하라고 설득 중이었는데, 이 사건 이후 외교관계에 있어 백제보다 신라를 우선시하게 된다. 특히 수나라 때부터 백제는 파병하겠다고 말로만 하고, 실제로는 단 한 번도 고구려로 파병한 적이 없는 반면 신라는 백제가 틈을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도 ((김춘추의 억지로) 군대를 보낸 것이라 당은 백제를 꽤 불신했고 역으로 신라를 더 신뢰하게 된다. 그렇다고 당과 백제의 국력이 비슷한 것도 아니고. 신라가 없었다면 모를까 당시 백제가 당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낼 확률은 낮다고 봐야 한다.[12] 이런 측천무후를 보고 여태후의 잔혹성과 비교해도 이상할것이 없었다.[13] 의자왕의 왕권강화 움직임으로 인해 백제 귀족세력과 의자왕의 관계는 악화일로를 걸었고, 그것은 이 시기에 이르러 절정에 치달아 있었다.[14] 백제의 옛터전에 계백의 정기 맑고/관창의 어린넋이 지하에 혼연하니[15] 계룡시-대전광역시로 이어진다.[16] 1990년대 초 '국민학생 혼성 그룹'으로 등장한 그룹. 이 곡은 《다섯동이 1》 앨범에 수록되었다. 이 영상의 명의인 '어린이 역사노래회'는 박문영이 회장을 지낸 단체로, 1992년과 1994년 사이에 영상의 자켓과 같은 '한국역사 노래부르기회'로 바뀌었다.[17] 대략 50분 후반이며 김유신 장군 모티브인 유신과 을지문덕 장군 모티브인 문덕에 비하면 기름먹는 하마, 게임할 때 콜로니 밖에 1시간 정도 방치하면 그야말로 우주미아.[18] 이 좌백이라는 인물은 실제 기록으로 따져보면 사에키노 고마로가 분명해 보이는데, 여기서는 계백의 동생으로 설정되었다.[19] 극 중 "아랑"이라는 이름을 사용한다. 배우는 2014년 KBS 드라마 <정도전>에서 명덕태후 역으로 출연하신 원로배우 이덕희씨. 여기서는 성충과 윤충이 형제로 나오며 아랑이 여동생으로 집안을 건사하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20] 제대로 갖춰진 진영 배치와 전방 감시탑이 설치되어 있고 지휘부가 전략을 마치 장기말 같은 것으로 세우면 이를 감시탑에서 깃발로 전체 군사들에게 신호를 보내는 것인데 극 중에서 이런 장면이 몇 차례 등장하기는 하지만 황산벌 전투는 이러한 전투의 흐름을 상당히 자세히 보여주며 보병방진 전투가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된다.[21] 시대가 시대인 만큼 당시 귀족들은 싸움을 이끄는 장수이며 정치가이기도 했다. 최근 사극들이 이런 점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일 뿐.[22] 백제 중신들을 협박해서 병사들을 받아내는 장면이다. 완전히 귀기가 어린 모습인데, 아직 코미디 영화 분위기가 강한 전반부 그것도 초반에 보인 모습이라 영화 분위기와 다소 이질적이었다. 이렇게 계백이 살벌한만도 한 것이 바로 전 장면에서 자기 처자식을 자기 손으로 죽였기 때문. 이 영화가 단순한 코미디 영화가 아니라는 복선인 셈이다.[23] 여기서 "시방 내 손에 뒤질래? 두당 군사 오백씩 내놓을래?"라며 중신들을 협박한다.[24] 엄밀히 말하면 이는 고증오류이다. 계백은 부여 출신인 만큼 충청도 사투리가 더 적절하다. 다만 영화에서는 백제와 신라 간 대립을 보여주는 만큼 영호남 지역갈등을 부각하기 위해 전라도 사투리로 설정했을 가능성이 높다.[25] "너 나랑 몇 년 됐어?"[26] 발에 까인 장수가 "음마마마마마"하면서 넘어지는게 백미. 이 장수의 배역은 코미디언 박승대가 맡았는데, 박승대는 전북 남원시 출신이라서 비록 짧은 등장이었다지만 작중 백제인들이 모두 전라도 사투리를 쓰는 가운데 이문식, 우현 등과 함께 전라도 출신답게 가장 자연스럽고 맛깔나는 전라도 사투리 연기를 보여줬다.[27] 당장 첫 등장 때 의자왕 앞에서도 냅다 무릎을 쿵 하고 꿇어서 의자왕이 "아우 무릎 깨져야."라며 만류한다.[28] 가뜩이나 직전에 가족들을 죽이는 장면과 협박하는 계백의 손에 피가 묻어있는 것을 생각하면, 계백은 가족을 죽이고 바로 찾아온것이다. 여러모로 잔꾀를 부릴수가 없는 상황이었다.[29] 그래서, 김유신 배역을 맡은 정진영은 나이가 들어보이고 흰 수염을 기르고 있다.[30] 이분은 이후 대왕의 꿈에서 백제를 멸망시키는 소정방 역을 맡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