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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등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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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등작(五等爵)

공작

후작

백작

자작

남작


1. 개요2. 역사
2.1. 성립 이전2.2. 형성2.3. 변형
2.3.1. 이십등작2.3.2. 개국작
3. 변용: 역어로서4. 관련 문서

1. 개요

오등작(五等爵)은 공()-후()-백()-자()-남() 5등급으로 이뤄지는 제후의 칭호이자 그 서열로 한자문화권에서 도식화한 다섯 작위를 가리킨다.

이 5등급의 작위 구분은 유학자들이 주나라 때 사용된 다양한 호칭들을 5개의 작위로 도식화하고 서열순으로 정의한 것으로 어디까지나 '도식화'일 뿐이기에 역사적으론 주나라 때 사용된 것과는 차이가 있다. 가령 공(公)은 엄밀한 의미의 세습 작위가 아니라 삼공이나 송나라 국군(國君)처럼 주나라 왕이 특별히 대우해주는 높은 어른에 가까운 개념이었다.

이 개념은 전한과 후한 사이의 나라인 신나라 때 작위 제도로 잠깐 쓰였다가 위진남북조시대에 본격적으로 도입되어 수나라 이후의 각 왕조들은 작위의 계급별 칭호와 서열을 이에 맞춰 제정하였다. 작위에 따라 들 수 있는 홀()에도 차등이 있었는데 공작·후작·백작은 옥으로 만든 홀인 규()를 들었고, 자작·남작은 가운데가 뚫려 있는 둥근 옥인 벽()을 들었다. 같은 규나 벽이라도 작위에 따라 명칭과 크기도 차등이 있었는데 자세한 사항은 참조.

이에 따라 오등작 개념은 한자문화권 전역으로 전파되어, 일반적인 제후의 칭호이자 그 등급으로 인식되었다. 근대 이전 한자문화권 국가들은 모두 오등작에 따른 작위 제도를 시행하여왔고, 봉건제가 폐지된 이후에는 공신을 대상으로 하는 상훈체계이자 왕족의전을 규정하는 역할을 했다. 도교에서는 신선이나 명산 등에 작위 칭호를 사용하는 이름을 붙이기도 하는데, 근대 이전에는 그 영향을 받아 국가에서 명산에 작위 칭호를 책봉하는 일도 있었다.

근대 일본 학자들은 당시 서유럽에서 제도적으로 수여되는 귀족들의 칭호와 그 서열관계를 도식화된 오등작 체계에 맞춰 번역하였는데, 그 번역이 한자문화권에서 일반적으로 쓰인다. 즉 주나라의 작위를 억지로 도식화한 것을 다시 유럽의 작위에 끼워맞춘 것이다.

2. 역사

2.1. 성립 이전

춘추전국시대에 각국에서 부국강병책의 일환으로 군현제를 시행하여 영토국가로 발전하기 이전까지, 중국씨족 단위로 여러 단계의 연합체를 구성하는 도시국가들의 집합체였다. 가장 최하위 단계인 도시를 당대에는 '()'이라 불렀고, 읍을 소유한 사람을 ()으로 호칭했다.

원래 (子)라는 칭호는 다른 집안의 웃어른을 높여 부르는 극존칭의 일종이었다.[1] 읍을 중심으로 하는 정치집단은 읍 주변의 공백지에 새로운 읍을 건설해나가는 방식으로 점차 그 영역을 확장해나갔는데, 이 과정은 보통 기존 읍의 주인과 혈연관계에 있는 사람이 새로운 읍의 군으로 분봉(分封)되는 형태로 이뤄졌다. 이런 방식으로 여러 읍으로 구성된 일정한 지역을 차지한 가문의 대표자를 가리켜 '자(子)'라는 호칭이 사용되었다. 이보다 상위의 연합체인 씨족 연맹체의 수장은 일반적으로 (侯 또는 后)라고 불렸다.

상나라는 당시 중국 지역에선 독보적인 패권국이었고, 자신들의 임금과 다른 나라들의 후들은 서로 격이 다름을 내세우며 ()이란 칭호를 자칭했다. 상나라는 조상신을 숭배하는 신앙을 가진 나라였고, 신앙의 대상이 되는 왕의 조상들은 ()라고 존칭하여 숭배의 대상으로 삼았다.

2.2. 형성

상주혁명으로 주나라가 새로운 패권국이 되면서, 은 주나라 임금의 전용 칭호가 되었고, 왕의 배우자를 후(后)로 존칭하게 하여, 자연히 제후들의 칭호는 (侯)로 일원화 되었다. 주나라는 상나라의 조상신 숭배 신앙 대신 하늘을 숭배하는 신앙을 퍼트렸고, 왕을 천자(天子)라는 신분으로 표방하여 중국 전역에 대한 지배권을 정당화 했다. 천자를 자처하면서 선왕을 제(帝)로 존칭하는 관례도 사라졌다.

따라서 주나라는 상나라와는 달리 적극적으로 다른 씨족 연맹체들과 주종관계를 확고히 정립하려는 성향이 강했고, 왕족이나 공신의 자손들을 새로 후로 책봉해 아직 주나라에 복속되지 않은 지역으로 파견하여 주변 군소세력들을 복속시키는 임무를 맡겼다. 그 외에는 혁명 당시에 주나라를 지지했던 씨족 연맹체의 수장들만 후(侯)로 칭해졌다. 주나라 초기에 형성된 동성제후국과 이성제후국들은 이러한 방식으로 탄생했다.

조상신 숭배 신앙을 대신하여 씨족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종법 질서를 도입하였는데, 매우 엄격한 장자 상속 원칙을 규정했다. 장자가 상속함으로써 유지되는 본가는 대종(大宗)이라 하고, 그 외의 형제들에겐 새로 읍(邑)을 수여해 분가를 형성하고 이를 소종(小宗)이라 했는데, 조상들을 기리는 제사를 대종이 주관하게 하고 소종의 참여를 강제했다.

소종의 수장은 그 자신의 형제항렬에 따라 백(伯)·중(仲)·숙(叔) 등으로 호칭했는데, 소종이 형성된 당시에는 원칙적으론 중이나 숙이 쓰일 수밖에 없으나 소종이 그 장자에게 상속되면 그 수장은 (伯)으로 호칭되었다. 즉, 이 호칭은 고정되는게 아니라 소종의 수장 본인의 형제항렬에 따라서 대마다 매번 바뀔 수 있다. 선대가 장남이라 백()이었다고 해도, 계승자가 장남이 아닐 경우에는 숙()으로 호칭이 바뀌는 것이다. 또한 소종의 수장은 차남이더라도 따로 중()으로 부르지 않고 그냥 숙(叔)으로 호칭한 경우가 많았다.

당연하게도 제후에게도 각자의 분가인 소종들이 있었고, 그러한 소종들도 위와 같은 칭호들을 사용했지만, 각 제후의 소종은 천승지국(千乘之國)으로 표현되는 번방(藩邦)의 범주에는 포함되지 않았다. 소종의 수장이 아님에도 백(伯) 칭호를 받은 경우는 진나라 양공의 사례가 유일하게 확인된다. 당시 진나라가 세운 공적을 표창하는 의미로, 주 왕실 직할 신하들 중에서 특별히 왕실의 분가 격으로 예우한다는 의미의 특전이라 추정된다.

주나라 조정에는 삼공(三公)으로 호칭되는 관직들이 있었는데, 이는 왕의 자문역이자 유사시 섭정의 권한을 가지는 최고위 직책이었으며, 보통 왕보다 항렬이 높은 소종의 수장들이 그 관직을 맡았다. 이들은 왕에게 스승의 예우를 받는 것이 관례였다. 또한 송나라의 군주인 송후(宋侯)는 상나라의 후예 자격으로 의전상 왕의 신하가 아닌 빈객으로 예우 받았다. 주나라 왕은 이들을 특별히 (公)으로 높여 호칭했다. 공(公)이란 표현 자체는 일반적으로 남을 높여 부르는 호칭으로 쓰였다. 이 경우는 군주가 고위 직급의 신하에게 사용하는 존칭인 경()을 넘어서, 천자가 직접 다른 사람을 높여 부른 경우가 되므로 그 의미가 남달랐던 것이다.

그밖에도 많은 읍(邑)을 보유한 유력 가문의 수장도 기존의 관례에 따라 (子)로 호칭되었다. 상주혁명에 동참하지 않은 씨족 공동체의 수장들은 후(侯)로 칭해지지 않게 되었고, 그들은 천자나 인근 제후의 씨족 공동체 일원 또한 아니었기에, 이런 독자 세력의 수장들도 자(子)로 불리게 되었다.

(男)이란 칭호는 갑골문에서도 칭호로 쓰인 것이 확인되고 있어 상나라 이전부터 쓰인 칭호로 파악되지만,[2] 그 사례가 적고 불분명하여 연원을 알 수 없다.[3] 남이 문헌상 확인되는 사례는 허나라군주나 여융(驪戎)의 수장을 남(男)으로 호칭한 정도가 확인될 뿐이다. 여융은 아예 대놓고 이민족으로 지칭되는 세력이고, 허나라 또한 틈만나면 제후들의 회맹으로 결성된 연합군의 토벌대상으로 지목되었던 것을 보면, 실제로는 주나라 통치질서에 소속되지 않은 독자세력의 수장을 이렇게 지칭한 것이 아닐까 추정된다.

주나라가 표방한 국제 질서에서 자(子)와 남(男)은 인근에 있는 천자나 제후의 신하 신분이었다. 따라서 천자 직할의 후(侯)나 백(伯)이 관할하는 영역 내의 자와 남은 그 신하로 취급되어 단독으로 천자에 조회에 참석할 수 없었다.

주나라가 패권을 잃으면서 춘추시대가 개막되자, 각 나라들은 존왕양이의 구호를 내세우며 주나라를 대신해 패권을 장악하려는 경쟁에 돌입했다. 초나라나 상술한 허나라의 사례처럼, 원래는 주나라의 통치질서 바깥에 있었던 나라들이 천자의 신하를 자처하거나 자신들의 선조가 천자에게 작위를 받은 것으로 역사 왜곡을 자행하고, 심지어는 자국의 역사삼황오제 신화와 결부지어 정통성을 부여하는 일이 잦아졌다. 이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유학자들이 각 나라별 수장들의 칭호들을 주나라의 작위와 그 서열관계로 정리하여 기록했고, 이것이 현재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오등작의 실체이다.

2.3. 변형

전국시대에는 제후들이 모두 (王)을 자칭하면서, 각국은 왕족이나 공을 세운 신하를 후(侯)로 책봉하기 시작했고, 공(公)·백(伯)·숙(叔)·자(子)·남(男) 등의 칭호는 자연히 사라졌다. 진나라에선 이십등작이 제정되었고, 그 제도가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한 뒤 한나라로 이어지면서 완전히 정착하였다.

유교가 공식적인 통치이념으로 자리잡고, 유학자들이 가진 주나라 이전의 제도를 이상적으로 여기는 복고주의 성향에 의해, 유교 경전상 주나라의 작위제도로 기록된 오등작을 구현하려는 시도가 있어왔다. 왕망왕작(王爵)과 이십등작제의 제후 작위를 폐지하고 오등작을 도입하면서, 신나라는 중국 역사상 오등작 제도가 그대로 구현된 유일한 사례가 된다.

신나라가 망하면서 왕작과 이십등작제가 환원되었다가, 서진에서 왕(王)과 이십등작 사이에 오등작이 재도입되었다. 서진 이후의 왕조들에선 오등작 위에 왕(王)을 도입하거나 같은 작위에 계층을 나누기도 했기에, 기본 골격만 오등작의 형식이었을 뿐 신나라 때처럼 유교 경전상의 오등작을 그대로 구현해 사용하지는 않았다.

2.3.1. 이십등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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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2. 개국작

개국작(開國爵)은 동진 때 도입된 오등작 형태의 작위 체계로, 남북조시대에 정립되어 송나라 때까지 유지되었다. 현대인들은 한문에 익숙지 못한 까닭에 "개국"이라는 표현에 과한 의미를 부여하여 개국공신 전용의 작위라고 여기는 경우도 있으나, 여기서의 개국은 "봉국(封國)을 수여한다."라는 의미이지 개국공신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원래 이십등작 체계에서 열후는 황제에게 책봉되어 봉국(封國)을 받았어야 했으나, 후한 말에 군웅할거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군웅들이 황제에게 천거했다는 명목으로 멋대로 열후를 책봉하는 일이 성행하면서 봉국은 실제로 수여되지 않게 되었다. 삼국시대인 264년에 위나라에서는 진왕(晉王)으로 봉작된 사마소가 유교 경전상의 작위 제도인 오등작을 부활시킨다는 명목으로 왕작과 열후 사이에 오등작을 도입했다. 이때의 오등작은 실제 봉국을 수여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식읍으로 수여되는 호(戶)의 숫자에 맞춘 관념상의 봉국을 수여하여 그에 따른 추가 봉록을 지급하는 것으로 열후와 차등을 두었다.

하지만 영가의 난으로 서진이 붕괴되고 영토가 반토막난 동진이 세워지면서, 서진 때 수여된 관념상의 봉국마저 그 실체가 사라지게 되었다. 이에 기존 오등작 봉국의 식읍대로 제후의 봉록을 주는 것은 불합리한 것으로 여겨졌고, 실제로 봉록을 지급하는 동진 이후의 봉국과 그렇지 못한 서진 시절의 봉국을 구분하기 위해 기존 오등작의 상위 작위 체계인 '개국작'을 도입하게 된 것이다. 남북조시대 동안 남조에서는 서진 오등작이 폐지되고 북조는 남조를 모방해 개국작 형식을 도입했다. 북주에서는 국공(國公) 미만은 개국작 형식의 봉작만 남기고 이십등작에서 유래된 제후 작위를 완전히 폐지했는데, 북주를 계승한 수나라가 남북조시대를 종결지으면서 북주의 작위 제도가 표준으로 자리잡게 된다. 이는 고려베트남에도 수용되어 개국작 형식은 중세 동아시아 작위의 특징이 되었다.

개국작 형식의 작위는 관제상으로는 '개국군공'이나 '개국현백' 처럼 표기되지만, 실제 봉호의 형식은 '○○군개국공'이나 '○○현개국백'의 형태였다. 수나라 이후로 약칭으로는 '군공'이나 '현백' 등으로 표기된다.

참고로 국공(國公)은 개국작이 아니므로 '○○국개국공'의 약칭이 아니다. 국공은 개국작과 구별되어 왕작에 준하는 작위 개념이었으며, 봉호 또한 일반적으로 1글자인 국호로 주어져서 정식 봉호는 '○국공' 형태였다.

원나라에서 개국작 형식을 완전히 폐지하고 국공 미만은 오등작으로 통일해 8계층이 되었다. 명나라에서는 초기에는 원나라의 작위를 쓰다가 홍무제가 작위 제도를 정비했는데, 크게 황족과 비황족 작위로 구분하여 왕작은 황족 전용의 작위가 되었으며, 공신과 외척 작위는 국공(國公)-군후(郡侯)-현백(縣伯) 3종만 남겼다. 청나라에서는 후금시절 팔기군의 지휘관 계급을 작위 체계로 개편하면서 점차 명나라의 작위 제도에 맞춰나갔는데, 건륭제가 공신과 외척 전용 작위 체계의 만주어 음차 표기를 폐지하고 한문식 표기로 개정하면서 자(子)와 남(男)을 칭호를 부활시켰기에 다시 오등작 형식이 갖춰졌다.

3. 변용: 역어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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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과 중국의 공후백자남은 상호 의미 연관성은 전혀 없으나 일본에서 메이지 유신 때 유럽식 작위체계를 도입하면서 다섯 계급 구분이 얼추 맞아서 작위 고하에 맞춰 대입시킨 것이다. 메이지 유신 무렵에는 이미 유럽 국가 대부분에서도 귀족의 특권들이 대부분 사라지고 작위의 서열화가 이루어졌기에 작위의 고하 정도는 따져도 유래나 의미를 따질 필요성은 적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Duke=공, Marquess=후, Earl=백, Viscount=자, Baron=남은 1869년 후쿠자와 유키치가 〈영국의사원담〉이라는 글에서 영국의 의회제도를 설명하며 영국 작위를 번역할 때 처음으로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1884년 화족 제도가 확립되며 공식화되었다. 단, 화족 작위를 영어로 옮길 때는 공작=Prince, 후작=Marquess, 백작=Count, 자작=Viscount, 남작=Baron으로 정했다. 일단 메이지 정부의 공식 입장은 중국의 고전 '예기'에서 착안했다는 것이다.

주나라의 오등작과 마찬가지로 유럽 작위들도 딱딱 처음부터 정해진 서열이 아니라, 800년~1,000년인 2세기 동안 지방 호족들이 자칭하고 난립하던 칭호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서열이 정해진 것이다.

유럽 작위 체계의 핵심은 둑스(DUX, 公.공작)-코메스(COMES, 伯.백작)-바론(BARON, 男.남작)의 3계급 체계다. 자작으로 번역되는 viscount부터가 백작의 보좌 직위이며 후작으로 번역되는 마르크그라프 역시 백작의 파생작위인 변경백이 유래다. 러시아 역시 크냐지(Князь. 公.공작)-그라프(Граф. 伯.백작)-바론(Барон. 男.남작)의 3계급 체계였다.

대부분 그 어원이나 기원은 로마 제국 시대에서 유래된 것으로, 로망스어권 국가들 간 작위 명칭이 흡사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게르만어권 국가들도 이들과 대체로 잘 대응되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이는 중세 법률 용어로써 유럽 전역에서 공통적으로 쓰이던 라틴어 표기를 보면 더욱 분명하게 알 수 있다.
<colbgcolor=white,#505050> 라틴어 <colbgcolor=white,#505050> 번역 <colbgcolor=white,#505050> 설명 이탈리아 영국 프랑스 독일어권 러시아 동유럽
(정교회)
dux 공작 군사령관[4][5] duca
(두카)
duke
(듀크)
duc
(뒤크)
herzog
(헤르초크)[6]
[7]
princeps 공 또는 후 공동체의 두령[8] principe
(프린치페)
prince
(프린스)
prince
(프랭스)
fürst
(퓌르스트)[9]
[ruby(Князь, ruby=Knyaz)]
(크냐지)[10]
voivode
(보이보드)[11]
marchio 후작 변경주방어책임자 marchese
(마르케세)
marquess
(마퀴스)[12]
* marquis
(마르키)[13]
Markgraf
(마르크그라프)[14][15]
comes 백작 각종 행정관[16] conte
(콘테)
earl
(얼)
Count
(카운트)[17]
comte
(콩트)[18]
Graf
(그라프)
Conte
(콘테)[19]
[ruby(Граф, ruby=Graf)]
(그라프)
boyar
(보야르)
vicecomes 자작 백작 대리
백작의 궁재[20]
visconte
(비스콘테)
viscount
(바이카운트)[21]
vicomte
(비콩트)[22]
Vicomte
(비콩트)[23]
baro 남작 상류층에 편입된 지방호족[24] barone
(바로네)
baron
(배런)[25]
baron
(바롱)[26]
Baron
(바론)
Freiherr
(프라이헤어)[27][28]
[ruby(Барон, ruby=baron)]
(바론)
* 표시는 불 · 독 · 이탈리아뿐만 아닌 유럽 대륙 전반에 걸쳐 쓰이는 칭호이며, 괄호 안은 현행 외래어 표기법을 따른 표기이다.
그 밖에도 인판테(스페인의 왕손들), 대공(Grand Duke와 Archduke), 신성 로마 제국선제후, 변경백, 궁중백, 방백, 추기경, 대주교공, 주교공[29], 성주(Castellan) 등이 있고 파고들수록 복잡해진다.

또한 이들보다 위계가 낮은 세습적 지위로는 영국에서는 준남작, 대륙에서는 세습기사(프랑스의 쉬발리에, 독일/오스트리아의의 Ritter), 그리고 세습기사보다 위계가 낮은 기타 칭호(독일/오스트리아의 Edler나 이탈리아의 Nobile 등)가 있으나, 이들 칭호는 고위 관료에 대한 경칭 등으로도 전용되었기에 그 소유자가 귀족이 아닌 경우도 많으며, 특히 영국의 경우 그러하다. 다만, 대륙의 경우 이러한 칭호를 지닌 이들도 귀족이 맞을 가능성이 높은데, 이는 대륙 전통에서는 당사자의 작위나 영지 보유 여부와 상관없이 조상 중에 귀족이 있는지가 관건이기 때문이다. 작위 보유 당사자만 귀족으로 간주하는 것은 영국만의 독특한 법률이다.

작위 칭호 외에도 귀족들을 경칭하여 부르는 관습도 고려해야한다. 예를 들어 영국에서는 귀족들의 이름에 SirLord를 붙인다든가 하는 것. 여기서 유래된 것이 오늘날의 영어권 어휘 중 타인에게 격식을 갖추어 부를 때 사용하는 Sir이다. 오늘날에도 영국에선 기사 계급의 왕국민은 본명 앞에 Sir을 붙인 것이 법적인 정식 이름이다. 예를들어 페르마의 대정리를 증명한 앤드루 와일스는 기사 작위를 받아 정식 이름이 앤드루 와일스 경(Sir Andrew John Wiles)이 되었다. Lord 역시 백작 이상의 고위귀족에게 경칭으로서 계속 사용된다.

남성 귀족의 배우자(부인, 夫人)와 정식으로 작위를 하사받은 여성 귀족 중에서도 기혼자인 부인(夫人)은 같은 호칭을 공유하는 성향이 있다.

남성 귀족의 배우자 외에 여성이 작위를 가지는 경우, 즉 夫人일 때, 한국에서는 오등작 앞에 '여()'를 붙여서 번역 내지는 기술하거나 그대로 ~작 부인(夫人)이라 표기한다. 토스카나의 마틸다처럼 여성 제후들에 관해 언급하는 역사책이나 교양 서적, 서양권의 여귀족들이나 서양권 문화를 바탕으로 한 창작물에서 쓰이는데, 역자가 지식이 부족한 경우 종종 작위보유자인데 "부인"이라고 옮기는 오역이 벌어지기도 한다.

이는 사전의 용례로도 올라와 있는 것인데, 대부분의 오늘날의 국가들이 그렇지만 과거의 한국 역시 계급사회 기간 동안 여성이 관직을 가지고 전면에서 활동한 경우가 드물어 귀족 자체가 남성성을 강하게 띠는 계층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한국의 경우 왕정의 사무직과 귀족이 동일시되었다.

이것은 서양도 마찬가지이다. 예컨대 위 표에도 나와있는 프랑스의 후작 Marquis의 경우 여후작은 Marquise라 하는데, 이는 본래 남성명사인 Marquis가 먼저 만들어지고 거기에 여성명사형 접미사인 "-e"를 붙여 만들어진 단어이다. 다만, 한국어의 "―부인"과는 달리 여성명사가 무조건 기혼자 취급을 받는 것은 아니어서 여성 당사자가 작위보유자든 배우자든 그냥 동일하게 썼다. 양태는 오히려 "여―" 방식에 더 가까운데, 굳이 배우자임을 강조할 때는 "Consort"(배우자)를 붙였으며 이는 남성 쪽이 배우자라도 마찬가지이다.[30]

매우 드문 경우지만 여성이 작위명을 그대로 사용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엘리자베스 2세의 경우 랭커스터 공작이면서 동시에 에든버러 공작 필립 마운트배튼의 배우자로 에든버러 공작부인이라 부르기 때문에, 작위명으로 Duke of Lancaster와 Duchess of Edinburgh를 같이 갖는다. 이는 작위를 받은 여성이 명백히 해당 가문 혹은 집안의 수장 내지는 대표자이며 동시에 소속된 가문/집안에서 주도적으로 의사표명을 하거나 의사결정권자일 경우에 해당한다.

단, 예시로 들은 엘리자베스 2세의 랭커스터 공작 작위의 경우 랭커스터 공작 가문은 영국 왕실을 상징하는 가문이기에 근현대의 영국왕들은 랭커스터 공작 가문의 일원은 아니지만, 항상 랭커스터 공작이라는 칭호가 따라왔다. 장미전쟁은 튜더 가문이 끝맺어 왕들을 배출해내기 시작했고, 이 튜더 왕조랭커스터 가문의 방계였다. 덧붙여 영국왕의 자리는 튜더 왕조로 쭉 이어진 것이 아니라 이후 스튜어트 왕조, 하노버 왕조 등 여러 차례 바뀌었다.

따라서 엘리자베스 2세 같은 영국의 여왕을 duchess of Lancaster라 하지 않는 건 엘리자베스 2세가 랭커스터 공작 가문의 가장 높은 이(사람)이기도 하지만 랭커스터 공작 가문의 夫人으로 오해를 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설령 어느 가문의 미망인이 그 가문의 가주이거나 대표자로 활동한다고 해도 여성형 명사로 불리지 남성형 명사로 부르는 경우는 굉장히 적다. 이 경우 만약 처녀적 가문의 대표자라면 가능하다. 또 희귀한 경우지만 가문의 멸문 혹은 멸족 후 재건을 하였을 때, 그 주체가 여성일 때도 초대 ~작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결혼 후 배우자의 가문 소속이 된 후에는 법적으론 배우자 가문의 일원이라 하더라도 발언권을 낮게 본다.

4. 관련 문서


[1] 일반적으로 이민족에 대한 멸칭으로 쓰였다는 것으로 잘못알려져 있는데, 어디까지나 왕(王)을 자칭하고 있던 초나라의 군주를 제후들이 인정하지 않고 '초자(楚子)'라고 임의로 격하시켜 불렀기에 멸칭이 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조선시대에 영감은 아무한테나 붙일 수 없는 정/종3품 당상관에게 붙이는 극존칭이었지만, 인조반정으로 쫓겨난 광해군에게 붙이면(실제로 제주로 유배간 뒤 주변 군졸이나 종들이 영감이라 불렀다) 한 때 군주였던 이에겐 극도의 멸칭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특히 공자맹자, 장자 등 제자백가의 주요 사상가들은 자(子)로 존칭되는 점에서, 남을 폄하하여 부른 멸칭이라고 볼 수는 없다.[2] 갑골문에는 '전()'이란 칭호도 발견되는데, 학자마다 이를 남(男)을 간략히 표기한 것으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고, 남(男)보다 낮은 등급의 칭호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3] 일반적으로 자(子)와 함께 일반인에게나 수여된 작위라고 알려져 있는데, 아무런 칭호가 없는 읍의 주인은 그저 군(君)으로 불렸던 만큼, 정말로 아무것도 아닌 일반인에게 이런 칭호가 붙은 것은 아닐 것이다.[4] 원래 고대 로마에서는 민사에 관여하지 않는 순수 군인으로서 국경군에 배치되는 사령관이었는데, 일종의 동맹 소집군 내지 용병이었던 포에데라티(Foederati)를 통해서 여러 게르만족 사회로 이식되었으며, 로마로부터 공식적으로 지위와 권력을 인정받은 부족의 수장들이 사용하였다.[5] 독일어권신성 로마 제국 주요 제후국 단위로 저마다 중앙화하였기에 세력있는 통치작위로서 행세하였으나, 왕국 단위로 국민국가를 성립한 타국의 경우 늦어도 절대왕정시기에는 세력이 축소되어 아예 봉토를 국왕에게 바치고 국왕의 가신 노릇을 하는 세력도 등장했다.[6] IPA: /ˈhɛʁˌt͡soːk/[7] 러시아의 봉건제는 독일의 영향을 받았으나, 이 지위는 기존에 존재하던 [ruby(Князь, ruby=knyaz)]가 대체되지 않고 유지되었다. 그래서 herzog를 그대로 옮긴 [ruby(Герцог, ruby=gertsog)]는 단순히 다른 나라의 dux(herzog)를 가리킬 때만 쓴다. 이는 여타 dux가 존재하지 않는 동유럽권 국가들도 대동소이.[8] 로마 시민사회에서는 "수권자", "수령", "제1시민"이라는 뜻이었으나, 게르만 부족사회에서는 혈통 대대로 부족을 지배해온 족장 및 일족을 거느린 고위귀족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공통적으로 "우두머리", "으뜸자"라는 뜻이 있다. 두 단어의 어원에 관해서는 프린스 문서를 참고할 것.[9] 통치작위에 대해서는 prinz를 쓰지 않으니 주의.[10] 상술하였듯 dux 지위를 들여오지 않았기에, 실질적으로는 공작에 해당하는 작위였다. 보이보드도 마찬가지.[11] 왈라키아 공국블라드 3세가 유명하다.[12] IPA: /ˈmɑː.kwɪs/[13] IPA: /maʁ.ki/[14] IPA: /ˈmaʁkɡʀaːf/[15] 독일의 Markgraf는 흔히 변경백이라 번역한다. Mark(변경주) + Graf(백작).[16] 고대 로마에서는 황제의 측근 보좌관에서 비롯하여 여러 고위 행정관이나 야전군 지휘관, 특정 지역의 전담 방어군 사령관 등에게 부여되었고, 중세 초 프랑크 왕국 시대에는 파구스(Pagus) 혹은 가우(Gau) 단위의 행정장관이었는데, 이는 도시를 중심으로 설정되는 키위타스(Civitas)보다 더 작은 구역이었다. 참고로 도시 즉 우르브스(urbs)/슈타트(Stadt)를 관할하는 것은 주로 주교주교후였는데, 상업과 교역의 발달과 함께 도시 자치공동체에 그 자리를 내어주었다.[17] 전자는 고대 노르드어영향을 받은 영국, 후자는 카롤링 프랑크의 영향을 받은 대륙 것을 지칭한다. 이러한 기원 차이로 영어권 문화에서는 영국의 것을 제외하고는 count라고 한다.[18] /kɔ̃t/[19] Conte는 보통 프랑스 등 타국 작위를 가리킬 때 사용한다.[20] 원래 통치작위가 아니라 백작의 예하 관리인 까닭에, 대륙에는 자작 단계에 해당하는 작위가 없는 국가들이 많다.[21] IPA: /ˈvaɪkaʊnt/[22] IPA: /vi.kɔ̃t/[23] 이 역시 Conte와 마찬가지로 독일에서는 타국의 자작 단계에 해당하는 귀족들을 일컫는 데에만 사용하는 제한적인 단어이다. 특히 프랑스의 자작 귀족들을 부르는 데에 사용했고, 그래서 단어 발음도 프랑스어식 그대로 한다. 독일권에서 이와 비슷한 대우를 받았던 작위는 요새 즉 카스트룸(castrum)/부르크(Burg)/슐로스(Schloss)의 방어책임자였던 성백작(Burggraf)인데, 프랑스 등지에서도 비록 근대 작위 체계로 편입되지는 않았으나 성백작이나 자작과 비슷한 지위를 지녔던 성주(Chatelain)가 있었다.[24] 후에 부르주아들도 귀족으로 편입하면서 받는 경우가 나왔으나, 보통은 그보다 다소 낮은 에들러(Edler)나 에스콰이어(Esquire) 등의 칭호를 받았다.[25] IPA: /ˈbæɹən/[26] IPA: /ba.ʁɔ̃/[27] IPA: /fʀaɪ̯hɛʁ/[28] 전자는 타국 작위에 대한 역어 한정.[29] Prince Bishop, 즉 주교들도 세속적 지위를 누리면서 사실상 영주나 다름 없이 활동했다. 독일에서 Fürst가 고위 성직자들에게도 붙여 불렀던게 그 예이다. 또한 오스트리아는 잘츠부르크 대주교령이 500년 가까이 영속했다. 현대 가톨릭 교회는 실질적인 영주로서의 주교는 없지만 그 흔적이 남아 있는데, 사제가 주교품을 받으면 고유의 문장을 갖는 것이 그것이다.[30] 이에 관한 예시로는 아키텐 여공작이자 프랑스/영국의 왕비였던 엘레오노르 다키텐이 적절한데, 영문 위키피디아의 표를 보면 이해하기가 쉽다.